화투..

아이들 메모 2023. 6. 3. 04:40

며칠 전에 큰 애가 화투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좀 난감한 부탁이다. 카드는 거의 한 적이 없고, 화투도 어렸을 때 할머니랑 민화투 치고, 고등학교 때 고스톱 쳐본 게 거의 다 일 정도. 화투장 이름 정도도 이제 까먹은 게 더 많고, 숫자도 잘 모른다. 

나도 잘 모르는데 가르쳐줄 수가 있나.. 기본적인 것만 알려주었다. 다음에 좀 더 알려주기로 하고. 

생각해보면, 나도 인생을 참 단조롭게 산 것 같다. 골프는 그야말로 골프 채도 집어본 적이 없고, 스키도 타 본 적 없다. 너무 일찍부터 환경에 대한 이론들을 공부해서 그런지, 그런 것들은 정말로 안 했다. 

‘잡기’라고 부르면서 좀 배워둬야 한다는 것을 안 한 데에는 아버지 영향이 컸다. 아버지는 바둑만 두셨다. 노년에는 인터넷 바둑과 tv 조선, 거의 두 가지만 하시는 것 같았다. 바둑을 좀 배우다가, 아버지가 매일 기원에만 계셔서, 바둑을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안 했다. 비슷한 이유로 당구도 안 쳤다. 술 마시기 전에 친구들 당구장 가면 나는 당구장 아래층에 있는 만화가계에 갔다. 그 시절에는 만화책 보면서 짜장면 먹는 게 그렇게 부러웠었다. 만화책 몇 권 볼 정도의 돈은 있었는데, 짜장면 시켜 먹을 돈은 없었다. 돈 생기면 전부 책을 샀으니, 만화책 볼 돈이라도 주머니에 있는 게 다행이었다. 맥주 마실 형편은 아니었고, 감자탕에 물 계속 부어서 끓여가면서 소주는 많이 마셨다. 생각해보면, 나는 평생 술만 마신 것 같다. 

한 달 전에 둘째가 여러가지로 너무 힘들어해서 결국 닌텐도를 사줬다. 큰 애랑 둘째랑 갖고 싶다는 게임 하나씩 사주고.. 몇 주 후에 닌텐도 스포츠는 그냥 사줬다. 둘째가 이래저래 힘든 시절을 겪는 게 아니었다면 게임기는 안 사줬을 것 같은데.. 그렇게라도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게 좀 더 나을 거라고 생각을 했다. 

희로애락에서 ‘락’에 해당하는 일은 사실 술 말고는 거의 한 게 없다. 음악을 듣기는 하는데, 원래 음악 전공하려다가 여러가지 사건이 겹쳐서 결국 경제학을 전공하게 된 거라서.. 그냥 순수하게 취미로만 듣는 것은 아닌 것 같고. 

돌아보면 나는 술만 마시고 살아온 것 같다. 좋아도 마시고, 슬퍼도 마시고. 힘들어도 마시고, 안 힘들어도 마시고. 요즘은 술 마시는 빈도는 확 줄었는데, 양이 줄지는 않았다. 한 번 마시면 날 잡고 확 달리는. 그렇게 마시지 않을 날은 아예 입에도 안 댄다. 마시다 말면 짜증나! 

아버지 살아계실 때 약속을 한 게 있다. 아버지 기일은 챙겨드리는데, 제사상은 차리가 어렵고, 드시고 싶은 걸 놓아드리겠다고. 아버지는 과자랑 주스 애기를 하셨다. 어머니는 초코렛과 연유를 얘기하셨고. 노년에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셨던 음식은 찹쌀 도너츠와 카스텔라였던 걸로 기억한다. 

화투 가르쳐 달라는 큰 애 보면서 잠시 아버지 생각이 났다. 저녁 때 동네 기원에 아버지 모시러 가던 게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싫지 않았는데, 몇 달째 되니까 그게 그렇게 실어졌었다. “한 판만”, 그렇게 하면서 몇 판을 두셨다. 나는 기다리다 결국 혼자 집에 왔었다. 그리고 바둑 끊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잠시. 

그렇게 바둑을 안 좋아했는데, 내 주변에는 바둑 죽어라고 두는 사람들이 참 많기도 했었다. 그것도 인연인가 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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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부산 출장이라서 집에 안 오는 날이다. 둘째 병원 데리고 갔다 오고, 저녁까지 준비하기가 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냥 우리 집 어린이들과 밖에서 먹었다. 저녁 때 수영장 갈까 말까 잠깐 고민을 하다가, 이제는 자는 것 정도는 알아서 할 수 있는 나이일 것 같아서 잠시 갔다 왔다. 

다음 주부터는 우리 집 어린이들 둘 수영 교실을 등록했다. 일주일에 두 번인데, 멀어서 차량 운행은 없단다. 두 번 다 당분간 내가 데려다 준다고 했다. 수영장 있는 학교를 다니면 그래도 수영 정도는 좀 쉽게 배울 수 있을 것 같은데, 형편이 그렇지가 않다. 

글을 쓰면 하루 종일 쓸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 완전 집중하는 시간을 하루에 두 시간을 내면, 꽤 뭔가 한 날이다. 30대 때에는 며칠씩 밤 새면서 쓰기도 했지만, 이제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급하면 두 시간 보다 조금 더 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매일 하기도 어렵다. 중간중간 이런저런 일이 생기고, 부탁 받아서 써야 하는 글들도 좀 생기고. 

물론 실제 쓰는 시간은 그렇지만, 굉장히 많은 시간 동안 이것저것 생각을 하기는 한다. 그거야 누구나 다 그렇게 하는 거고. 

되도록이면 뭔가 한다는 티를 안 내려고 한다. 그냥 조용히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일상을 보내려고 하는 게, 내가 세상과 갖는 타협 같은 것 아닌가 싶다. 수영을 하면 그런 데 도움이 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글쎄.. 내 경우에는 택도 없다. 그 정도 가지고 머리 속의 긴장이 풀리지는 않는다. 거의 사람 없는 조용한 수영장에서 명상 하듯이 수영하면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동네 수영장에서 꽉 차 있는 데에서 이리저리 피하면서 수영하다 보면, 스트레스 더 받는다.

그래도 끊임없이 웃을 거리를 찾고, 즐거움을 찾아내려고 한다. 올 초까지는 카톡에 생일 뜨면 매번은 아니더라도, 조그만 선물이라도 좀 챙겨서 보내고는 했다. 내가 즐겁지는 않더라도 누구라도 즐거우면 좋은 거 아니냐는 생각이다. 몇 년 전에 정태인 선배 생일이라서 커피 쿠폰 보낸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뒤에도 같이 술을 마신 적이 몇 번 더 있었는데.. 그래도 그 양반한테 살아 생전에 뭐라도 선물을 하게 된 기억이 덕분에 생겼다. 

올해는 둘째한테 돈이 많이 들어갈 것 같아서, 얼마 전부터 생일날 카톡으로 선물 보내는 것도 당분간 그만두기로 했다. 아쉽지만, 당분간은 지출 조절을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래도 내년부터는 생일 선물하는 걸 다시 하려고 한다. 그래봐야 얼마 되지도 않는 선물인데, 내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는지, 그런 걸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기는 했다. 이미 벌써 떠난 사람들도 많고. 그 사람들에게 다 갚기는 어렵고, 그냥 나도 일상의 즐거움 같은 것으로 선물이나 되는 대로. 

진정한 즐거움 혹은 깊은 즐거움, 그런 걸 만들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가벼운 즐거움, 간단한 즐거움, 이런 것에는 많은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큰 공이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 정도는 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잠시 우리는 즐거운 생각을 혹은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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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휴일, 둘째랑 마포 농수산물시장 갔다왔다. 조개도 사고, 새우도 사고, 절임류도 이것저것 좀 집고. 

둘째는 떡볶이는 안 먹는 대신 어묵은 잘 먹는다. 다섯 개 먹는다는 걸 달래서, 겨우 세 개만 먹기로. 쥐포 먹고 싶어서 쥐포도 샀는데, 집에 와서 집에 쥐로 많다고 아내한테 혼났다. 

둘째랑 수산 시장 와서 이것저것 사는 일을 종종 한다. 오는 길이 많이 막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휴일을 그냥 보낼 수는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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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틈틈이 솔 벨로의 <오늘을 잡아라> 다 읽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제목만 보고 멋있어서 영문판을 집어들었는데, 몇 달 가지고만 다니고 앞부분만 읽고 다 못 읽었던 소설이었다. 

그 시절에는 자원 선물시장을 잘 몰랐다. 나중에 대학원 때 이걸 전공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었다. 파리에 자원 선물시장이 새로 생겼고, 그해 파리10대학 국제경제 전공한 대학원생들에게는 국제자원에 관한 논문을 쓰도록 되었다. 그리고 희망하면 약간의 교육과 함께 선물시장 거래 자격증이 나오게 되어 있었다. 물론 나는 박사 과정에 들어가면서 선물시장 거래 자격증 과정으로 가지는 않았는데.. 석사 졸업하자 마자 취업 제안서가 두 통이나 왔다. 가끔 그때 짧게라도 그 제안 중에 하나를 받아들고 취업을 했다면 내 인생은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하여간 대학교 1학년 때 나는 자원시장은 잘 몰랐고, 선물시장은 더더군다나 몰랐다. 게다가 일반적인 소설과 달리 사건이라고 할 게 별로 없는 단편적인 에피소드만 있는 형식이라, 그 시절에는 내가 이해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다. 

몇 년만에 소설을 이렇게 재밌게 읽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60페이지 정도의 짧은 소설인데, 첫 사건이 아버지와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잠시 아버지를 보고, 그 식사가 시작되는 데에 40페이지 정도가 걸린다. 

하따, 이 아저씨 말 많네.. 

몇 년 동안 한 번 간다고 하면서도 결국 못 간 데가 필라델피아였다. 주인공은 필라델피아 주립대학을 중퇴했다. 배우가 되기 위해서. 

아주 인상적인 문장들이 좀 있었다. 

“그의 인생 역정은 그런 오판이 열번이나 거듭된 결과였다.”

오판을 열 번쯤 거듭하면 인생이 이렇게 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판을 몇 번 했을까? 

다 읽고 나서 해설도 읽었는데, 솔 벨로의 자전적 요소가 많이 있는 소설이란다. 식구들은 사업을 하기를 바랬지만, 작가가 되면서 늘 돈이 없었고, 나중에 안정적인 상태가 되기 전까지는 중압감을 많이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건지, 그저 좀 약하고 우유부단한 정도의 한 사나이가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순간순간들에 대한 심정이 절절했다. 가슴을 후벼판다는 느낌이 이런 거 아니겠나 싶다. 

마지막은 어쨌든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장에서 흘러 퍼지는 음악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마음의 평온을 느끼는 문장으로 끝난다. 아마 미리 써놓은 수표 때문에 파산 선거를 받기는 하겠지만, 재정적 파산이 곧 인생의 파산은 아니다. 그 뒤의 얘기는 알아서 상상하는 수밖에 없다. 

정말로 간만에 소설을 너무너무 재밌게 읽었다. 솔 벨로 소설을 조금 더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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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애가 어제 머리를 빡빡으로 밀었다. 오늘 학교 갔더니 친구들이 두 손으로 합장하면서, “스님, 오셨습니까” 했다고 한다. 계속 했댄다. 그래서 대답을 이렇게 했댄다. “오늘 저녁에 고기 먹습니다.” 저녁 때 슈퍼 갔다가 족발을 샀더니, 큰 애가 그 얘기를 한다. 안 그래도 오늘 저녁에 고기 먹는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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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

책에 대한 단상 2023. 5. 25. 01:37

전에 다니던 수영장에 저녁 자유 수영이 없어졌다. 한동안 수영 안 하다가 결국은 다른 동네 수영장을 가기 시작했다. 여기는 저녁 자유 수영이 10시다. 늦은 것도 늦은 건데, 사람이 엄청 많다. 

10시에 사람 많은 수영장에서 수영하다 보면, 이게 뭔 짓인가, 그런 생각이 든다. 

늦잠 잘 때면, 늦잠 자도 되는 이유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일어났다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다시 잔다. 밤에 수영장 가는 것도 그것과 비슷하다. 끊임없이 안 가도 되는 이유들을 생각한다. 그렇게 어제도 안 갔고, 그저께도 안 갔다. 오늘도 이런저런 핑계가 생겼는데, 야구 보다가, 그만 보고 싶어졌다. 수영이나 가자. 아마 야구 이겼으면 오늘도 안 갔을 것 같다. 

이제 나도 50대 중반이다. 예전처럼 밤 새고, 또 새고, 그렇게는 못 한다. 되는 대로 하고, 안 되면 말고, 그렇게 살아간다. 송파구 살 때 좋았던 건, 수영장이 집 가까이 있었고,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그렇다고 다시 이사 가기도 좀 그렇고. 

그래도 물에 들어가 있으면, 복잡한 생각이 없어져서 좋다. 매일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은 늘 하는데, 사실 그렇게 하기는 어렵다. 이것저것 해봤는데, 나한테는 수영이 제일 잘 맞는 것 같다. 물을 좋아하고, 물에 들어가 있는 것도 좋아한다. 그렇지만 사람 너무 많은 수영장에는, 꾀가 난다. 

사설 수영장도 좀 알아봤었다. 수영장만 따로 있는 건 아니고, 골프 연습과 패키지로 되어 있는데, 천만 원 정도 내라는 것 같다. 돌았나 싶었다. 난 골프 연습이나 필드, 이런 건 필요 없는데. 

몸이 노곤한데,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이 밀려 있다. 낑낑 대면서, 조금씩 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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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보육 관련된 학회들이 하는 합동 학술대회에서 기조 발제 부탁을 받았다. 전에도 한 적이 있기는 했는데, 최근에는 외부에서 하는 일들을 할 수가 없어서 정말 간만이다. 직책을 써달라고 해서, 작가라고 썼다. 작가라고 직업을 적은 것은 처음이다. 그렇게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아버지가 쓰러지시고 돌아가시는 일이 벌어졌고, 연달아 막내 동생도 쓰러지고, 둘째는 병원에 갔다. 이래저래 시간 관리가 어려울 것 같아서, 재계약 안 했다. 아울러 다른 일도 더 줄여서, 방송도 결국 접었다. 그때부터 나는 은퇴 준비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다른 건 문제가 안 되는데, 소속 같은 거 물어볼 때 잠시 곤란하다. 보통은 무직이라고 쓰는데, 외부 발표 같은 때에는 그렇게 하기가 좀 미안하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작가라고 했다. 학회에서 교수가 아닌데 발표하거나 그럴 때면 좀 어색하다. 

한국은 약간 판타지 사회와 비슷한 것 같다. ‘대박’이라는 단어가 꽤 긴 시간 동안 인기 단어가 되었다. 소소한 판타지이기는 하다. 최근에 증권으로 꽤 돈을 날린 사람을 안다. 나한테까지 와서 증권 상품 얘기 막 하는데, 못 들은 척 했다. 나이 먹어서 누가 뭐라고 해서 그 얘기 듣는 사람을 잘 보기가 어렵다. 결국은 폭망은 아니더라도 돈 손해를 꽤 봤다. 나이 먹고도 판타지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좀 있다. 꼭 나쁘다고 보지만은 않지만, 그것도 적당히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나는 판타지가 없는 편이다. 원하는 게 없으니까, 더 갖고 싶은 것도 별로 없고, 그냥 대체적으로 하루하루 행복해하면서 살고 있다. 고통스럽지 않으면 그게 행복이다. 아니, 절대로 헤어나올 수 없는 어려움에 빠지지 않았으면 그게 행복이다. 

별 판타지가 없는 사람들도 해외 여행에 대한 판타지가 있거나, 아니면 좋은 술에 대한 판타지가 있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 할 해외여행보다 더 많이 이미 30대에 다 했다. 포도주에 대한 판타지도 없다. 어지간한 사람들 평생 마실 포도주보다 더 많은 양을 이미 20대에 마셔버렸다. 차에 대한 판타지도 없다. 차는 그냥 잘 가면 그만이다. 내년까지는 지금 타는 모닝을 그냥 탈 생각이다.

판타지가 없어도 글을 쓸 수 있을까? 아무 상관없는 것 같다. 특히나 이 글이 성공하면, 이 책이 성공하면, 그런 종류의 판타지는 거의 없다. 이 주제가 사회에 필요한 것인가, 아닌가, 그리고 어디서 본 것 같은 내용인가 아닌가, 그런 몇 가지만 가지고 판단한다. 물론 내가 할 수 있느냐, 그런 게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그거야 당연한 거고. 몇 번 약속했다가 못 쓴 적이 있다. 상황이 바뀌어서 못 한 것도 있고, 같이 준비했던 에디터가 그만두게 되어서 못한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지금 와서 곰곰 생각해보면,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려고 해서 생겼던 일인 것 같다. 이제 나이를 처먹고 나니까, 의욕만으로 시작하는 일은 거의 없다. 할 수 있는 일만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영원한 삼미팬인 것 같다. 칠 수 있는 공만 치고, 잡을 수 있는 공만 잡는. 야구에서 그러면 난리 나지만, 개인이 한 평생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 문제없는 것 같다. 

책을 쓰면 좋은 점은, 알고 있는 것 전부는 물론이고 살아온 인생을 전부 한 번 뒤집어보게 된다는 점이다. 특정 주제에 대해서 써도 마찬가지다. 삼백 페이지 이상을 쓰기 위해서는 그런 과정이 몇 번 필요하다. 나는 책을 쓰기 전에 목차를 만들어 놓고 쓰지는 않는다. 물론 논문 쓸 때에는 나도 그렇게 한다. 펜으로 종이에 전체적인 밑그림을 여러 차례 시도해보기는 하는데, 그래도 형식을 고정시켜 놓거나, 세부 목차까지 정하지는 않는다. 

목차를 정해 놓고 쓰면, 결국은 채우는 방식으로 쓰게 된다. 여기에서는 이 정도, 저기에서는 이 정도.. 그러면 재미도 없고, 쓰기 싫어서 쓴 게 결국 티가 난다. 기능적으로 책을 쓰고 싶지는 않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그렇게 하면 당장 내가 재미가 없어서 읽기가 싫어진다. 나도 읽기가 싫은 걸 누가 읽겠느냐. 그런 건 이미 많이 썼더라도, 그냥 덮어버리는 게 낫다. 책 내고 후회하느니, 아예 중간에 접고 아쉬워하는 게 낫다. 

목차 없이 한 절 한 절, 내가 쓸 수 있는 최고의 내용을 쓰는 게 그래도 낫다. 이것도 작업 노하우라면 일종의 노하우다. 

쓸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지만, 책을 쓰는 법에 관한 책을 내가 쓴다면, 제일 앞에 나올 얘기 중의 하나가 목차 같은 것은 잊어버리라는 것이 될 것 같다. 목차를 써놓고 책을 쓰는 것도 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진짜로 내용하고 승부를 보기 위해서는 목차 같은 게 없는 편이 도움이 될 것 같다. 물론 고생스럽기는 하다. 그리고 뒤로 갈수록 마무리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그래도 그 정도 어려움은 참고 넘어서는 게 낫다고 본다. 시를 쓸 때 이 시를 몇 연으로 하겠다고 미리 정해놓은 시인이 있을까? 쓰다 보면 연을 넘겨야 하는 순간이 오고, 때로는 뒤집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책 쓰는 것도 그것과 비슷하다. 

목차는 구조적 흐름을 만들 것 같지만, 그건 정말 목차만으로 내용이 손에 잡힐 것 같은 도사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고, 나는 그런 도사가 아니다. 결국은 한 줄 한 줄 승부 보는 수밖에 없다. 

<모두의 문제는 아무의 문제도 아니다>, 제목이 이래저래 자리를 못 잡았던 책인데, 이제 1장 끝내고 잠시 쉬는 중이다. 쓰면서 보니까 이 제목이 딱 맞는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을 잠시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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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리어 넌..

영화 이야기 2023. 5. 22. 20:23

<워리어 넌> 다 봤다. 워낙 좋아하는 소재와 분위기이기는 한데, 약간 좀 참고 봤다고 하는 게 솔직한. 

셋업이 너무 길었다. 시즌 1이 사실상 셋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기본 설정에 너무 시간이 길었다. 워넉 좋아하는 소재 아니었으면, 초장 보다 접었을 것 같은데. 

<황혼에서 새벽까지>는 셋업이 사실상 없다. 일단 황당한 형제들을 사건 속에 밀어넣고, 중간에 술을 처먹게 하면서 조금씩 개성들을 드러나게 했다. <빅 숏트>의 경우는 개별 주인공들의 전사 같은 게 거의 없어, 그냥 금융상품 사고 파는 걸로 바로 들어간다. 그리고 각자의 금융거래를 하고 쪽빡차는 고난의 사건을 버티는 방식으로 개성을 드러나게 했다. 가장 유사한 느낌이 들었던 <블레이드> 시리즈 역시 별 셋업 없이 사건 속으로 가장 들어간다. 

셋업도 길지만, "내가 니 아비다", 이런 식으로 갑자기 비밀이 나오는 데, 이게 너무 많다. 그리고 그런 설정과 실제 전개 사이에 잘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좀 있다. 이 정도 앞뒤는 맞출 수 있을 것 같은데, 갑자기 "엄마, 나야", 이러고 나온다. 그리고 "엄마 나 뒤져", 그래버리는데. 

암흑 전투가 너무 많다. 밤에 벌어지는 일이라서 그렇기는 한데, 나처럼 눈 나쁜 사람은 거의 보기가 어렵다. 주요 장면들이 그런 암전 톤으로 진행되어서, 사실 좀 보기가 그랬다. 

다른 요소들은 울트라 모던이라고 할까, 요즘 애들 분위기는 이래, 그런 요소들이 즐겁게 해주었다. 올드 피플, 뉴 피플, 그런 두 종류의 인간들이 섞이고, 부딪히고, 화해하고.. 그리고 거기에서 많은 유머들을 뽑아냈다. 난 가벼운 인간이야, 인상만 잔뜩 썼지, 그런 얘기하는 것 같았다. 

셋업이 본 얘기하고 막 섞여서 좀 그렇기는 했는데, 이런 얘기 더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나는 재밌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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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같이 일하던 에디터들이 20대였고, 아주 젊었다. 나도 30대였다. 국회의원을 만나면 다 할아버지들이었고, 보좌관들도 대부분 형님들이었다. 방송국에 가도 피디와 작가들이 대부분 나보다 한참 위였고, 기자들도 그랬다. 

이제 나랑 같이 일하는 에디터들 중에는 20대는 물론, 젊은 사람이 거의 없다. 몇 년째 계속 같이 일하는 에디터들이 있기는 한데, 그들도 이제는 젊다고 할 수는 없다. 

작년까지는 학교에서 수업을 해서 학생들은 종종 만나기는 했는데, 앞으로는 학교에서 수업할 계획은 없다. 어지간히 노력하지 않으면, 이제 내 또래의 같이 늙어가는 처지의 친구들 정도나 보고 살아가게 될 것 같다. 그렇다고 일부러 뭐를 막 벌이고 그럴 생각은 없다. 지금 애들 보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당장 할 건 아니지만, 20대에 대한 얘기 하나를 작년부터 조금씩 준비하던 게 있다. 앞의 것들이 너무 밀려서 예정 없이 그냥 뒤로 밀려가고만 하고 있다. 나이를 처먹으면서, 조바심 같은 게 없어졌다. 사실 열정이 사라졌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당장 보고 싶어! 그런 건 이제 별로 없다. 되는 대로 하고, 안 되면 또 말고. 

사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며칠에 걸쳐서 본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여운이 길게 남아서 그런 것 같다. 몇 번 시도를 했었는데, 한번도 앞뒤 전체를 보지는 못했다. tv에서 해줄 때 좀 보다 말고, 그랬다. 예전에 오드리 햅번 관련된 책들은 좀 읽기는 했었는데, 오래된 영화들까지 챙겨서 보지는 못했다. 진짜로 차분히 앉아서 다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볼 때는 몰랐는데, 보고 나니까 내 인생 최고의 영화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영화는 생각을 많이 하게 해주는 영화가 아니겠나 싶다. 요즘 너무 잘 정돈되어 있고, 왜 이렇게 하는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너무 잘 구성된 얘기들만 너무 많이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 대책 없는 인간들이 인생 마지막 순간 같은 곳에서 만나는 얘기가 너무 멋졌다. 티파니에서 10달러만 쓸 수 있다는 사람들이 결국 내민 싸구려 반지에 이름을 새겨주겠다는 얘기는 정말로 로맨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방시가 만든 옷들도 너무 멋있었다. 아주 유명한 첫 장면, 크라상을 입에 물고 테이크 아웃 커피 잔을 들고 티파니 앞에 서 있을 때 헵번이 입었던 검은 드레스, 이건 헵번이 고집을 해서 옷이 이 모양이 되었다고.. 그렇게 알고 있다. 지방시는 장식을 많이 쓰지는 않지만, 뭔가 악센트가 되는 걸 꼭 하나씩은 넣고는 했었단다. 헵번이 이 검은색 드레스에는 아무 장식도 없어야 한다고, 두 사람 사이에 언쟁이 될 정도로 고집을 했다고 한다. 장식이 있는 편이 나을지, 아니면 아무 장식도 없는 편이 나았을지, 그걸 판단할 정도로 내 눈이 고급은 아니다. 그렇지만 분위기 하나는 정말 끝내줬다. 새벽에 택시를 타고 내려서 크라상을 되는 대로 한 입 물고, 손에 든 테이크 아웃 커피 잔의 뚜껑을 여는 장면에서 인트로가 끝난다. 그게 그대로 영화 제목이다. 티파니에서 먹은 브렉퍼스트.. 

한 장면 한 장면이 그림 엽서였다. 한 장면 한 장면이 cf 같은 영화들은 가끔 있다. (유명한 cf 감독이 만든 영화 하나를 보다가, 멀미 나는 것 같아서 고생한 적이 있기도.) 

‘티파니에서 아침을’ 보고 나니까, 요즘 내 주변에 20대들은 어떻게 살아가나,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좋은 영화를 보면 나 자신과 내 주변을 돌아보게 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오후에 수영장 갔다 와서, 아이들 데리러 나가기 전에 잠시 이루마의 피아노 소품들 틀어놓고 내 나름의 낭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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