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를 위한 경제학은 앞부분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결국 다 갈아엎기로 했다. 제목은 ‘빵과 복권’으로 가는데, 이건 안 바뀐다. 부제를 ‘경제 밸런스’로 잡고, 이 개념을 중심으로 정리를 해나가던 중이었다.
요즘 고등학교에서 강연 부탁이 오면, 되도록이면 가는 방향으로 하고 있다. 몇 년 전에 한 외고에서 강연한 적이 있었다. 그 뒤로는 둘째가 연거푸 입원하는 바람에 오랫동안 강연을 안 했다.
그렇게 안 하려고 하지만, 책을 쓰다 보면 정말 머리로만 쓰는 경우가 있다.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 이 책 준비하면서, 오랫동안 안 하던 강연을 다시 하기로 했다. 아주 작은 희망이기는 한데, 모든 도서관과 모든 고등학교에 가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막상 고등학교에서 이 내용을 강연을 하려고 하면?
지금 준비한 건, 내 얘기로 먼저 시작하는 건데.. 그렇게 시작해서 정말로 10대들의 관심을 끌 자신이 전혀. <88만원 세대> 때에는 그 책이 워낙 유명해져서, 고등학생들도 어지간히 내용들을 알고 있어서, 강연하기가 좀 나았다. 이제는 시간이 많이 지났고, 나는 그냥 아무 것도 아닌 아저씨고, 내 얘기 관심 있을 게 전혀 없다. 나는 원래 좀 재수 없는 스타일이다. 워낙 재수 없는 인생을 살았다. 고생을 전혀 안 한 건 아니지만, 그 얘기 해봐야, 재수 없다는 소리나 듣는다. 그게 고생이라고? 아픈 둘째 키우면서 고생을 좀 하기는 하지만, 10대들 특히 남학생들에게 그런 얘기는 통하는 게 전혀..
그래서 경제 밸런스니, 그런 개념 가득한 얘기들은 집어치우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게 다 머리로만 생각을 하려고 해서 발생한 부작용이다. 10대한테 밸런스를 잡는 게 중요하다, 이게 통할 거라고 생각한 내 대가리도 참. 당장 우리 집 중학생한테 그런 얘기해봐야, 씨알도 안 먹힌다.
최근에 내가 했던 얘기 중에서 고등학생들한테 어느 정도 반응을 이끌어낸 질문은 “살면서 존중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요거였다. 존중이라는 단어는 평소에 자주 쓰지는 않지만, 결정적인 얘기를 할 때에 몇 번 사용해본 적이 있는 단어다. 한국 특히 한국 엘리트 남성들에게 잘 없는 개념이기도 하다. 나도 원래 이런 거 잘 몰랐는데, 살다보니까 어쩔 수 없이 생겨난 것 같다. 존경은 못해도, 존중은 해라, 이것들아,, 요런 식으로 사용한다.
최근에 생겨난 변화인데, 가급적이면 국회는 잘 안 가려고 한다. 물론 말만 그렇고, 어쩔 수 없이 요즘도 종종 간다. 토론회 발제 같은 거 하면 국회의원의 힘이 느껴지고, 기왕 그럴 거면 차관이랑 얘기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고. 또 뭐, 어차피 그렇게 숏컷을 찾다보면, 장관을 만나거나 대통령을 만나면 더 빠르지 않겠어? 이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몇 년 전에 크게 깨달은 적이 있다. 그런 짓은 안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국회 토론회장 가는 대신, 도서관과 고등학교에 더 많이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게 더 의미가 있고, 더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 높은 데서 스포트라이트 받고 그러는 거는 예전에 많이 해봤다. 뭐, 사실 별 거 없다. 더 높은 데, 더 멋진 데, 그런 거 찾으면서 나이를 먹고, 늙어가고 싶지는 않다.
나이를 처먹으면, 자연스럽게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지게 된다. 내 경우도 그런 것 같다.
고등학생 만나서 무슨 얘기 할 거냐, 그런 생각으로 10대들을 위한 경제학 책, 새롭게 재구성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논리적으로 경제 입문서 쓰는 거면, 한 달이면 다 쓴다. 그게 어려울 일은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얼굴 보면서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이라고 생각하면, 얘기가 다르다. 게다가 얘기를 하거나, 듣거나, 그럴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선머슴 같은 고등학교 남학생이라면? 여기는 유머 코드도 안 통한다. 박경리의 <토지>가 뭔지 모른다고 하는데, 그 다음 얘기는 넘어갈 수가 없다. 이 정도는 아시겠죠, 그런 게 안 통한다. 갤럽 조사 결과 보여주다가, 트와이스, 이런 거 나오니까 열광적 반응이 나왔다. 하이고야..
다른 사람을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경제, 그게 내가 생각하는 선진국이다. 이미지는 이렇다. 스위스 쮜리히에서 한적한 곳에서 길 찾다가.. 피어싱 잔뜩 한 스킨헤드 극우파 스타일 패션의 20대 커플에게 길을 물어본 적이 있다. 무서웠다. 그렇다고 내가 독일어로 길 물어볼 실력은 안되고. 근데 진짜 너무 친절하게 길을 알려줘서 감동받은 적이 있었다. 스위스는 어떻게 이런 청년들을 만들어냈는지, 그 뒤로 아주 오랫동안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때 문고판으로 나온 스위스 전서 시리즈 20권 정도를 사서 가지고 왔던 기억이 난다. 도대체 이건 어떻게 된 나라일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책을 써보려고 한다. 우리, 서로 존경은 못해도, 존중은 하는 삶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똑똑한 한국 남자, 존경받을 줄만 알지, 존중할 줄은 모른다. 나는 내 두 아들들이 사람을 존중하면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