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콰트로스>는 지난 주에 2쇄를 찍었다고 한다. 예전 같으면 아무 일도 아닐 것 같은데, 요즘 내 처지에서는 너무너무 감사하면서 진짜 한시름 놓게 되는. 수십 쇄씩 나가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지만, 이젠 다 옛날 얘기라, 1쇄 터는 것도 핵핵 거리는 경우가 많다. 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도 이제는 좀 적응해가는 중이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은 수많은 사람들의 크고 작은 도움으로 어려운 시간들을 버텨낸 삶과 같다. 이번에도 정말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2쇄 내면서 고마웠던 사람들에게 짧게라도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중이다. 진심이다. 고맙다고 해서 내가 뭘 더 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지만, 그래도 마음이라도 전하고 싶었다.
어린이들 보면서 이제 나는 내 또래의 친구들과는 매우 다른 스타일의 삶을 살게 되었다. 이래저래 원래도 생각하는 게 좀 많이 달랐는데, 이제는 많이 다르다. 특히 두 달 전부터 어린이들 저녁 시간을 7시에서 6시로 한 시간 당겼다. 오후 간식을 그만 줘야 하는데, 배고파 해서 저녁 시간을 바꿨다. 전에는 아내랑 교대로 저녁을 했는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다섯 시 정도로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청소기 돌리기 시작하면서 저녁 준비를 한다. 되도록 간단하게 하려고 하는데, 그게 보통 일이 아니다. 물론 매일 밥하는 건 아니다. 급하면 시키기도 하고, 여의치 않으면 나가서 먹기도 한다. 어쨌든 그 시간에 어린이들 밥을 해줘야 하니까, 이제 약속 잡기는 아주 어렵다.
둘째가 작년부터 알레르기가 좀 심해졌고, 올봄 황사철에는 진짜 심해졌다. 어쨌든 올해는 입원하지 않고 한 해를 넘기는 게 소박한 목표다. 돼지고기랑 못 먹는 생선들이 많아졌고, 재료가 제한적이라서 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다. 도저히 이렇게는 못하겠다, 차라리 그냥 육개장 끓이고, 이것저것 국을 왕창 끓여놓고 버티는 걸로 전략을 바꿨다. 쭈그리고 앉아서 육개장용 고기 뜯고 있는데, 진짜 이게 자식이 먹는 거니까 하지, 내가 먹으려고 이렇게까지 할까 싶은.
큰 애가 부탁이 있다고.. 소머리국밥을 해달라고 한다. 돌아비리. 그냥 사다주기로 했다. 인터넷으로 바로 주문. (원래는 이 다음에는 소고기 무국을 끓일 생각이었다.)
아내는 점점 더 바빠진다. 출장도 갈 수 있을 때 가라고 했다. 심지어 조찬도 있다. 며칠 전에 어린이들 아침 준비하면서, 아침 준다고 했더니.. 아침 밥 먹으로 간단다. 예전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조찬모임이라는 게 있는 건 내가 알기로 한국 밖에. 정말 열심히들 산다.
이렇게 살면서 이제는 시민단체 모임 같은 데 나가기가 아주 어려워졌다. 그래도 전에는 가끔씩 나가서 이것저것 말도 좀 보태고 그랬는데.. 오래된 시민단체 사람들은 주말에 많이 모인다. 주중에도 애들 봐야 하지만, 주말에는 정말로 얄짤 없다.
애들 어릴 때에는 작업실을 낼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지금 같아서는 택도 없다. 게다가 내 책 파는 규모에서는 작업실 비용이 나오지가 않는다. 내가 쓰는 돈이라도 아주 훌쭉하게 사는 게 맞다. 고정성 경비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차도 아내가 타던 10년 넘은 모닝으로. (모닝을 타면서 정말 내 인생관도 많이 변했다. 나의 유일한 경쟁력이다.)
한국은 네트워크 사회라고 하는데, 나는 이제 그런 네트워크 완전 바깥에 있다.
유튜브를 해야 한다고 그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애들 보면서 하기에는 품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 그리고 난 그렇게 부지런한 스타일도 아니다. 예전에 모두를 왕따 놓는 학생에 대한 얘기가 있었는데, 내가 딱 그렇게 산다. 왕따 된 게 아니라, 왕따 놓은 거라고!
<호모 콰트로스> 2쇄 찍고 나서, 진짜로 마음 속에 내가 감사해야 할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었다. 추천사 써주신 분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고, 예전에 추천사 쓴 사람들에게도 도와주셔서 고맙다고 다시 인사하는 중이다.
원래 얘기는 3권으로 되어 있는데, 쫄아서 1권이라고 달지도 못했다. 망하면 결국 2권을 쓰지 못하니까, 1권이라고 쓰려면 어지간한 자신감과 배포가 있어야 한다. 나는 그 두 개 다 없다. 요즘은 기세가 유행이다. 기세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원고를 잡고 있을 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는 정도다. 그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요즘 나랑 작업하는 곳들이 대부분 작은 출판사들이다. 규모로 때려 박고, 기세로 밀고 나가고, 그딴 건 나에게 없다. 그 대신 조금 더 섬세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30대 때에는 섬세함, 그런 생각을 아예 못했다. 그냥 직진이었다. 이제는 좀 섬세하게 하려고 생각 중이다. 물론 생각만 그렇다. 섬세하다는 게 뭔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가진 강점이 한 가지는 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책 쓰는 과정이 괴롭거나 그렇지는 않다. 비교적 즐겁게 하는 편이다. 조정래 선생은 글감옥이라는 표현도 썼는데, 뭐 그렇지는 않다. 사실 행복한 일이다. 책 써서 세 끼 밥 먹고 사는데 크게 불편함이 없는 삶, 중세 이후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상황을 꿈꿔왔겠나. 강사 시절에 한 달에 누가 100만 원만 주면 평생 연구만 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좀 있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까 내가 그 상황이 된 건데,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2년 전에 대학을 그만두었다. 많은 사람들이 말렸는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린이들 보고, 도저히 병행할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 50대도 그냥 다 가겠다는 위기감이 들어서, 그만두었다. 뭔가 성과를 내고, 뭔가 달성하고, 더 높은 데로 가는 그런 삶은 이제는 내게 없다.
그냥 내가 생각했던 것을 정리해서, 누군가 읽을 수 있게 하고, 그러는 일에서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가도 충분히 행복한 삶이다. 조마조마하면서 책을 냈다가, 1쇄 털면 잠시 행복해지고. 누군가 대박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사실 그런 생각이 머리에서 사라진 지도 좀 된다. 이미 남들이 평생 경험해보지 못할 정도의 대박이 몇 번이나 있었다. 충분히 행운도 누릴 만큼 누렸다.
그래서 나의 목표도 대체적으로 소박하다. 1쇄를 다 털면.. 오죽하면 일본 드라마 제목이 <중쇄를 찍자>였겠나.
요즘은 워낙 사회과학 시장이 죽어서 그런 얘기 안 하지만, 내가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하던 별명이 “한국에서 처음 등장한 사회과학 전업작가”라는 말이었다. 실제로 내 전에도 없었고, 뒤에도 없는 것 같다. 하도 궁금해서 한국의 사회과학 독자를 이런저런 방식으로 추정해봤는데, 한 만 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사회과학 책이 만 권 팔리면 어지간한 독자들은 다 샀다는 계산이었다. 지금은 그 정도도 안 되는 것 같다. 그런 작은 시장에서 버티다 보면 결국 남는 것은 부드러움이다. 힘으로는 제 정신으로 버티기가 어려워서, 부드러워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도 ‘고마움’은 사실 잘 탑재가 안 되었다. 말로는 고맙다고는 하는데, 정말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감사함이 나오느냐? 아주 솔직히, 그렇게 고마움도 탑재될 정도로 내가 성숙한 인간은 못되었다. <호모 콰트로스> 2쇄 찍으면서, 정말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고맙다는 생각이 드는 걸 느꼈다. 임찬규 10승 하는 얘기 같은 걸지도.
앞으로는 정말 감사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가슴을 툭 치고 절절한 감정으로 나왔다. 나도 사람들 도울 일 있으면 더 많이 돕도록해야겠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