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주문한 조성향미 4kg짜리. 충남 농업기술원에서 얼마 전에 개발한 향진주쌀. 밥 지을 때 냄새가 가득하기는 하다. 만생종인데, 쌀이 엄청 좋기는 좋은데, 고시히카리보다 맛있는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 맛을 제대로 보려고 물 조금만 넣고 했는데, 아내가 이빨 아프다고 민원 들어와서.. 다음에 밥 할 때는 물 많이 넣고 했다. 찰진 밥이 되기는 했는데, 내가 찰진 밥 별로라서.
일단 지금 나온 것 중에서는 이게 최고라고 해서 먹어봤고, 다음부터는 한동안 베트남 쌀과 태국 쌀 먹어보려고 한다. 나한테는 익숙한 쌀이지만, 한국에서는 어떤 게 수입되는지 잘 몰라서, 좀 살펴보려고 한다.
며칠 전부터 홍차가 마시고 싶어졌다. 고등학교 1~2학년 때 새벽 다섯 시에 mbc fm에서 영어 강의 시간이 있었다. 2년간 그 시간에는 영어 공부를 했다. 그때 육개장 사발면을 많이 먹었고, 식빵과 홍차로 버틸 때도 있었고, 나중에 보니까 그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하여간 그때 생각이 났는지, 며칠 전부터 홍차가 마시고 싶어졌다. 나중에 얼 그레이도 마시고, 다즐링도 마시고 그랬었다. 책을 쓰고 난 뒤로는 홍차로는 택도 없어서, 커피를 많이 마셨다.
커피를 딱히 마시고 싶지 않게 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맛있는데, 농업 경제학 조금씩 살펴보기 시작하면서, 커피 원두 가격의 폭등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별 딱히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커피를 좀 덜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홍차가 없나 보니까, 없다. 하긴 산 적이 없으니까. 일본에서 홍차 가루 사 온게 있기는 했는데, 너무 오래 되서 비린 맛이 난다. 이건 아니고. 꽤 전에 로얄 밀크티 사놓은 게 있다. 너무 달아서 그렇게 자주 마시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아직 좀 남았다. 하이고, 달다..
어지간한 차는 다 있는 동네 구멍가게에 갔는데, 별의별 둥글레차와 한방차까지 다 있는데, 홍차가 없었다. 그때 처음 그 생각이 들었다, 한국 사람들이 요즘 홍차를 잘 안 마시나보다. 혹시나해서 편의점도 가 봤는데, 역시 홍차는 없었다. 예전에는 커피와 홍차, 그렇게 밖에 없던 시절이 있었다. 별 기능이 없는 홍차가 요즘 인기가 없는 것 같다. 결국은 주문했다.
홍자를 제일 맛있게 마셨던 것은 영국 리즈에 갔을 때였다. 학회가 있어서 처음 논문 발표하러 갔을 때였다. 오후에 그냥 리즈 시내 걸어서 돌아다녔는데, 말로만 듣던 할머니들이 꽃단장하고 오후에 카페에 홍차 마시로 나온 걸 보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그런 모습을 못 봐서, 정말 신기했다. 그때 할머니들이 각설탕 하나씩 홍차에 넣는 걸 보고, 나도 설탕 넣어서 먹어봤다. 생각보다 맛있었다. 그때가 막 토니 블레어 당선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나를 초청한 영국의 젊은 교수들과 밤에 맥주 한 잔 마시면서 토니 블레어 얘기 열심히 듣던 것도 꽤 인상 깊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시간이 오래 지나고 나니까, 그때 리즈에서 할머니들 옆에서 달달한 홍차 마셨던 것이 역시 인상 깊은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커피를 진짜 많이 마셨다. 대학원 때 커피에 대해서만 몇 시간 동안 배웠던 게 기억이 난다. 그래도 그게 내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직까지도 커피 농장에 한 번도 못 가봤다. 물론 홍차 농장에도 못 갔다. 올해는 조금씩 시간을 내서, 식품 공장들에도 좀 가볼 생각이다.
호기심이 아직도 줄지는 않는 것 같다. 한국 사람들이 왜 홍차를 덜 마시게 되었는가, 이런 게 갑자기 궁금해졌다.
"경제학자. 김영삼 시대는 기업에서, 김대중 시대는 정부에서 일했다. 명랑을 모토로 노무현 시대에 저자로 데뷔, 여전히 책을 쓰고 있다. 한 달 사이로 세 살짜리 둘째가 연거푸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하면서, 10년째 두 아이를 돌보면서 또래의 남성들과는 조금 다른 감성이 생겨났다. 경제는 결국 그 나라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세 끼 밥 먹고 사는 데 불편하지 않는 게 최고의 이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가난한 대학생들도 매일 과일을 먹을 수 있는 한국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중이다. 인생 최고의 업적은 편의점 김밥과 도시락이 중국산 찐쌀에서 국내산 양질미로 바뀌게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프레시안에 새롭게 글 연재하면서, 필자 소개를 새로 썼다. 지금부터 쓰는 책 몇 권은 요 톤으로 해볼까 한다..
초딩 남자가 극우 성향이라는 얘기는 참 위험하고 민감한 얘기인데..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내가 초딩 두 명을 키운다. 결국 유튜브를 막고, 책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읽게 하는 것 밖에는 별 방법이 없었다.
초딩 사이에 유행하던 게, 김정은 욕하는 방송이었다. 김정은 욕할 수도 있는데, 사물을 모두 김정은에 비교할 정도로 많이 봤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 시진핑 욕하는 방송들을 본다. 그렇게 혐중으로 넘어가고. 이 다음 단계로 다시 여성들 욕하는 방송으로.. 대체적으로 초딩 5학년부터 이렇게 표준화된 프로그램들이 돌아간다. 이게 내가 본 현실이다.
최상목 권한대행이 지방 미분양을 LH를 통해 사들이기로 했다. 3천호다. 나는 매입 임대주택에 대해서 찬성하는 입장이기는 하지만, 어떤 집을, 얼마에 살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세밀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분양가가 높아서 미분양이 된 집을 그 가격에 사는 건 좀 이상하다. 입지가 좋지 않아서 분양이 어려워진 경우, 특히 지방의 경우는 임대로도 인기가 없다. 차 없으면 어떻게 뭘 해볼 수가 없는 곳에 있는 집은 임대로도 역시 인기가 없다. 그냥 3천호 정해서 사주라고 하면, 결국 시내에서 먼 곳, 별로 가고 싶지 않은 곳들 먼저 사게 될 가능성이 높다. 좀 더 세밀한 가이드 라인이 필요하다.
4조 원 넘게 들여서 철도 지하화 사업을 하겠다고 한다. 이건 정말 뜬굼 없다. 부산 등 대상 지역이 땅이 모자르거나, 상가가 없거나, 그래서 경제 위기가 온 것은 아니다. 공장부지가 없어서는 더더욱 아니다. 지방 경제 위기라고 하는데, 1순위로 던진 사업이 철도 지하화라는 건, 그냥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못하던 숙원 사업을 그냥 이 기회에 해치운다는 것 이상으로는 안 보인다.
무엇보다 이런 규모가 큰 사업을 과연 권한대행이 얼랑뚱땅 결정해서 그냥 강행해도 좋은 건지 의문이 든다. 평소 같으면 대통령도 이런 사업은 여론과 야당의 견제를 뚫고 쉽게 강행하지 못한다. 정치적 비상시국이라서 정책에 대한 논의가 약해져 있는 사이, 권한대행이 이렇게 행정 행위를 해도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
트럼프의 관세발 경제위기 같은 것에 대해서 비상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회적 동의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근데 그게 지방 미분양의 공공 매입이고, 철도 지하화일까? 그런 게 트럼프 대책과 무슨 상관이 있고, 반도체 위기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지금의 위기니까, 이 기회에 그냥 나하고 싶은 거 한다, 이런 권한대행의 행정행위가 정상적일까?
연말에 쓰려고 생각하는 농업 경제학은 기본 컨셉은 기후변화와 농업이다. 그렇다고 무슨 보고서처럼 쓰거나, 생산자 정책 대책처럼 책을 쓸 생각은 별로 없다. 농업 분야의 책이 갖는 가장 큰 약점은 농민들이 책을 안 본다는 점이다. 그래서 농업 관련된 책이 잘 안 나온다. 그건 다 아는 거고.
일단 마음을 먹은 것은 1장은 쌀, 2장은 빵에 관한 얘기를 할 생각이다. 그렇다면 3장은 토마토, 이건 근교 농업에 관한 얘기.. 요러면서 <쌀과 빵>이라는 제목을 잡았다.
어쨌든 생산자의 눈으로 농업을 볼 생각은 없고, 소비자의 눈으로 보려고 한다. 물론 “싸면 장땡이다”, 이런 소비자주의는 아니다. “유기농이 몸에 좋은 거야”,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미래를 위해서, 이 정도는 좀 알아두는 게 좋다, 그런 정도의 톤이다. 쌀에 대해서 우리가 뭘 좀 알까? 알긴, 개뿔도 모른다. 다른 나라에서의 쌀, 이런 거 전혀 모른다. “이천쌀이 맛있다”, 이런 정도다. 이천쌀과 혼합미, 이렇게 물어보면, 어?
하여간 시간을 가지고,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품종의 쌀은 일단 다 먹어볼 생각이다. 나도 사실 쌀 품종 적당히만 알고, 특히 최근에 나온 쌀들은 잘 모른다. 다음 주부터 시작인데, 태국 쌀과 베트남 쌀부터 먹어보려고 한다. 사실 이런 쌀 처음 먹는 건 아니다. 유학 시절, 많이 먹어보고, 다양하게 사기도 많이 사봤다. 그래도 요즘 건 잘 모른다.
이번에는 농업 관련된 연구소도 가보고, 품종 개량하는 회사도 가보려고 한다.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하나씩. 어쨌든 품을 좀 많이 팔 생각이다. 예전에 유기농하는 조그만 농민들 많이 찾아다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생협 관련된 농민 위주로 봤었다. 이번에는 좀 더 제도적인 접근을 할 생각이다.
친한 친구가 돼지 농장을 해서, 기댈 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 농업 연구 같이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다 은퇴했다. 교수 한 명은 은퇴하고 귀농했고, 농촌경제연구원 원장했던 양반도 벌써 은퇴. 자주 만났던 전문가 한 명은 청와대 갔다가 차관했고. 하여간 시간이 많이 흘러서, 다들 은퇴, 현역은 별로 없다. 새로 만나야 하는데, 그것도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하여간 대상과 방법, 접근법 이런 것은 일단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어느 정도는 정리가 되었다. 사진도 쓸 생각이다. 포토 에세이 느낌 나게. 카메라 하도 오랫동안 처박아 놨더니, 밧데리 충전기가 어딨는지 몰라서, 그것도 새로 샀다.
나중에 또 바뀔지도 모르지만, 형식은 포토 에세이, 그렇게 해놓고, 그 안에 사람들이 잘 모르는 농업 얘기들을 끼어넣는 형식으로 하려고 한다. 부제는 <밥 해주는 아빠> 정도로 달면 어떨까 싶다. 그렇게 밥 하는 얘기랑, 재료 얘기 그리고 그 사이사이 미래 농업, 그렇게 채워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일본의 쌀값이 작년부터 계속 오르는 중이다. 일본 정부가 비축미를 푼다고 하고, 이게 개구라라는 반박이 이어지는 중이다. 작년에는 관광객들이 밥을 너무 많이 먹어서 쌀값이 오른다고 했는데, 이게 잘 해야 수요의 0.5%도 안 되기 때문에 택도 없는 설명이고. 결국은 정부가 너무 낮은 쌀값을 올리는 정책을 쓴다는 게 맞는 것 같다. 지금까지 일본 쌀값이 너무 쌌던.. 농업 경제학 배울 때, 세상에서 제일 비싼 게 일본 쌀값이라고 배웠었는데.
일본 쌀값 얘기하면, 역시 세상에서 제일 비싼 한국 빵값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비싸도 너무 비싸다. 6년 가까이 파리에서 바게트를 주식으로 먹고 살았다. 다른 게 먹고 싶으면, 크라상. 가난한 유학생이라도 보통 크라상보다 당시 1프랑 정도 더 비싼 버터 크라상 정도는 먹고 살았다. 둘째가 크라상 좋아해서 종종 사주는데, 이게 진짜 눈 돌아갈 정도로 비싸다. 한국 빵값 왜 이렇게 비싸요? 독점 체계, 공장 빵 수요, 우유 가격 등 별의별 얘기가 다 있는데, 사실 진짜는 아무도 모른다.
주식이 비싸진 걸로 따지면, 멕시코의 옥수수 얘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국 생산 기반이 무너지면서.. 여기에 에탄올과 바이오 연료 문제가 부딪히고, 결국은 트럼프와 함께 관세 문제의 핵심이 된 게, 바로 멕시코 옥수수다.
주식과 가격, 그런 게 내가 생각하는 농업 경제학의 1장에 나올 내용이다. 사실 이런 분석들을 거의 한 적이 없다. 우리나라 혼합미 문제 생각 하다가 여기까지 왔다. 도대체 아직까지도 혼합미가 맛있는 쌀이라고 광고하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는 않아서 분석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도 정확히는 모르는데, 이제부터 좀 살펴보려고 한다.
어쨌든 장기적인 추세로는 20세기 후반에 대체적으로 지켜져 왔던 낮은 주식값이라는 등식이 깨어질지도 모른다. 주식값이 올라가면, 폭동난다는 게 정설이다. 과연 앞으로도 그럴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기후 가격’이라는 말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건 꼭 주식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기후 변동이 생겨나면서 앞으로 가격이 올라가게 될 상품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농산물이 대표적이다. 이런 개념을 좀 더 정형화해서 생각해볼까 한다.
저는 생일을 따로 챙기지는 않는데, 이번에 많은 분들이 귀한 것들을 보내주셔서, 고맙다는 말씀을 따로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녁 먹고 보내주신 딸기는 우리 집 어린이들과 잘 먹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들. 딸기 비싸서, 한 달에 한 번 사먹을까 말까입니다. 거듭 고맙.
생일이면 언제나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이 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외할머니가 키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제 삶에 할머니 흔적이 많습니다. 저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만이라도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나중에는 대학 들어가는 거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학위 받고, 시간강사 그만두고 취직할 때까지도 살아계셨드랩니다. 지금도 외할머니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려고 노력을 합니다. 마포구청장에게 좋은 어머니 상을 받은 게 벽에 걸려 있던 게 기억이 납니다. 어렸을 때, 무슨 얘기였는지는 모르지만, 많은 친척 어른들이 무언가 상의하기 위해서 할머니를 찾아온 게 기억에 오래 남아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구멍가게 가서 소주 댓병을 사왔습니다. 그때 안주로 돼지고기 편육을 하셨는데.. 그게 먹고 싶기는 한데, 아직까지도 그걸 파는 데를 못 봤습니다. 몇 번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비법이 따로 있었는지, 몇 번 실패하고 포기.
그 할머니가 제 생일을 참 좋아하셨습니다. 대보름 전날인데, 먹을 복이 있게 태어나서, 평생 굶지는 않을 거라고 좋아하셨습니다. 어쨌든 저도 이것저것 맛난 거 원컷 처먹으면서 살았습니다.
이 기회를 빌어, 많은 독자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덕분에 추운 겨울, 세 끼 밥 먹을 걱정 하지 않으면서, 우리 집 어린이들하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를.
다음 주에 대구 kbs에서 방송이 있어서 정말로 간만에 기차표 예매를 했다. 하도 오랜만에 ktx 예약을 했더니, 핸드폰 인증 받으라고 한다. 그 사이 카드도 기간이 끝나서, 새 카드를 쓰는 중이다. 생각해보니까 코로나 때 기차 예약 안 하기 시작해서, 벌써 몇 년이 되었다. 지방 갈 일이 전혀 없던 건 아닌데, 대부분 운전해서 갔다.
강연 안 한지 몇 년 된다. 올해도 많이 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조금씩 움직여보려고 한다.
간만에 ktx 예약했더니, 기차비가 이렇게 비쌌나, 섬찟한 생각이.. 전기차 타고 다녔더니, 연료비는 거의 무시할 정도고, 도로비도 반값이라, 그렇게 비용 생각을 안 한지 몇 년 된. 기차 요금 감각이 무디어졌다.
이래저래 조금 움직여 보면서, 안 하던 인스타도 다시 계정 살렸다. 오래 전에 내 책과 방송 보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사람들이 인사를 했다. 몇 년간 정말 애들 보면서, 히키코모리 모드로 지냈다는 생각이 문득.
지난 가을에 둘째가 병원에 입원하면서, 전략을 대폭 수정했다. 수영 레슨 다시 받기 시작했다. 저녁 먹을 시간에 끝나서, 수영장 가서 데리고 오는 걸 몇 달 했다. 한 번은 버스 타고 가다가 너무 사람이 많아서, 둘째 손에 버스 문에 끼는 사고가 벌어지기도 했다. 방학 때도 계속 수영장 갔다. 오늘 중급반으로 올라갔다. 올해는 둘째가 수영장 죽어라고 다니면서, 입원하지 않는 첫 해를 만드는 게 목표다. 지난 가을에도 심하지는 않았는데, 진단은 폐렴으로 나왔다. 둘째가 입원하면 다 꽝이다. 그래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게, 둘째 수영하는 일이다.
다음 주부터 인터뷰 작업도 조금씩 시작한다. 원래는 인터뷰도 좀 많이 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어린이들 보면서 거의 못했다. 올해는 사람도 많이 만나고, 조언도 많이 들으려고 한다. 올해의 모토가 “잘 듣는 한 해”다.
아직 계획을 짜지는 못했는데, 고등학생 인터뷰를 좀 많이 하려고 한다. 어떤 경로로, 어떤 식으로 할지 방법까지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해야 할 일 리스트에 올렸다. 10대는 여론 조사에 잡히지가 않기 때문에, 성향이나 패턴에 대한 연구가 아주 어렵다. 어떤 식으로 하는 게 효과적일지, 좀 쌈빡한 방법을 찾아보려고 한다.
다음 달부터 쓸 책이 10대를 위한 경제학책이다. 여러가지 방식으로 10대들에게 포커스를 맞추려고 한다.
처음에 학위 받고, 전공 분야말고 부전공처럼 보려고 한 게 urbanism이라는 주제였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연구 분야인데, 프랑스에는 이게 엄청 책도 많고, 연구도 많은 분야다. 그래서 처음 집을 산 곳도 부천이었다. 현실에서는 전혀 연구를 하지는 못했고, 직장에서 집이 멀어서 고생만 죽어라고 했다. 이래저래 정신적 충격을 많이 받고, 결국 잠실 쪽으로 이사를 온 다음에야 정신적 안정을 얻었다. 그러면서 urbanism 연구에서 분야를 10대로 좁히는 일을 했다. 그렇게 조금씩 한국의 10대에 대해서 좀 살펴봤다.
<88만원 세대>가 나온 건, 그 10대 연구의 결과다. 내가 계속 살펴보던 10대들이 20대가 되었고, 그러면서 20대에 대한 연구를 같이 하게 되었다. 20대 연구를 한다고, 20대만 죽어라고 본다고 해서 뭔가 새로운 게 나오기는 어렵다. 10대를 보면서, 점차적으로 20대로 시선을 옮겨가는 게 내가 했던 연구 방법론이다.
이제 나도 나이를 먹었다. 과거의 영광은 다 사라졌고, 내가 누군지 아는 20대들도 이제는 어느 덧 다 30대가 되었다. 한 때 한국의 10대들이 아는 유일한 경제학자가 장하준과 우석훈이라는 얘기가 있었는데, 그것도 다 옛날 얘기다. 지금의 10대와 20대는 내가 누군지 전혀 모른다.
다시 시작하는 생각으로, 새롭게 10대들을 살펴보는 일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내가 원래 밑에서 박박 기는 일을 잘 한다. 신문사 데스크처럼 움직이지 않고, 현장 기자 혹은 현장 인류학자처럼 맨 밑에서 살펴보고, 변화를 찾는 일이 원래 내가 주로 하던 일이다. 박사 과정에 내가 소속되었던 연구소가 파리 10대학에 있던 경제인류학 연구소였다. 그 시절에 배운 방식이다.
다시 데뷔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정돈하고, 아주 기초부터 다시 시작해보려고 한다. 영광, 그딴 게 현실을 만들어주는 게 아니다. 그냥 낮은 곳에서, 낮은 자세로, 잘 드는 것, 그것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