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에세이, 에필로그도 새로 썼다. 여름에 끝날 줄 알았던 일이 결국 10월 들어와서야 마무리가 되었다. 어지간해서는 책 쓰면서 힘들었던 얘기는 잘 안 하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핵핵.. 진짜 죽는 줄 알았다.
쓰면서 원고 돌리다 보니까, 좌파라는 얘기가 아무도 안 좋아하는 얘기라는 걸 알게 되었다. 반응이 영.. 이런 걸 뭐하러 쓰느냐, 이런 얘기가 기반이다. 이래저래 내 얘기는 중간에 많이 날렸는데, 그래도 여기저기 맥락에 대한 설명이 들어가다 보니까 총분량은 늘어났다.
인기가 있는 주제는 원고를 미리 돌려보면, 자기한테 재미가 있던 부분 중심으로 얘기들을 한다. 그런데 인기가 없는 주제는 재미가 없는 부분 중심으로 얘기를 한다. 하나만 재밌어도 재밌다고 생각하는 것과 하나만 재미가 없어도 재미가 없다고 하는 것, 기본적으로는 주제가 얼마나 인기가 있느냐에 달린 문제다. 팔리는 것은 또 그것과는 크게 상관은 없고.
좌파는 인기가 없는 정도를 넘어서, 보고 싶지 않은 대표적인 주제인 것 같다. 한국에서는 그렇다. 그래도 꼭 쓰고 싶어진 것은, 나는 이게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 자체가 불행의 시작이다. 그렇다고 편한 길만 갈 수는 없고.
나이를 먹으니까, 이제 좀 귀찮고 힘든 것도 잘 피해가지 않게 된다. 재밌고 인기 있는 주제 몇 개 더 잡아서 책 몇 권을 쓴다고 해서, 그게 내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 지금 와서 빅히트 책을 쓴다고 해서 더 영광스럽지도 않고, 그게 꼭 필요하지도 않다. 인기는 잠시 있다가 가는 것이다. 하고 싶은 얘기 혹은 꼭 필요한 얘기를 하기에도 남은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도 후회, 저래도 후회, 그럴 거면 곤란한 주제라고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걸 다루는 게 나을 것 같은.
몇 주 전에 에필로그는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로 제목을 잡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쓰기 전에 찾아보니까 장석준이 그 제목으로 벌써 몇 년 전에 책을 냈다. 그리고 망.. 사람 생각하는 게 더 거기서 거기다. 그래도 조금 버전을 바꾸어서 AI 버전으로 에필로그를 썼다. 이래도 망, 저래도 망이면, 그래도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게 낫겠다 싶은.
뒷부분의 절 제목 하나가 ‘조선의 마지막 빨갱이’다. 몇 년 전부터 그런 별명이 생겼다. 뒤에서야 어떻게 얘기할지 몰라도 공식적으로 좌파라고 하는 사람이 워낙 없다보니, 그런 별명이 다.. 개인적 삶에서는 별로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것도 다 운명이겠거니 하고 살아간다.
아마 나의 나머지 삶은 완전히 좌파로 살아가게 될 것 같다. 사회 한 쪽 구석에 고립되고 처박힌다는 얘기이기는 한데, 딱히 뭔가 하고 싶은 것도 없으니, 그렇게 아무도 쳐다보지 않은 깃발을 들고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되고 싶은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는 나 같은 삶이 이런 때에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냥 좌표를 지키고 있는 것 같은 삶, 나는 그런 걸 참고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하여간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중간에 둘째가 입원을 하기도 하고. 좌파 얘기를 하다보니 중압감이 너무 강해서 10년 넘게 처박아 두었던 오디오를 꺼냈다. 고칠 거 고치고, 손 볼 거 손 보고.. 한 여름에 앰프 들고 용산 왔다갔다 하면서 생노동을 했다. 그만큼 이게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다. 그걸 전부 술 마시면서 버티려고 하면, 몸이 먼저 뒤질 것 같고.. 무슨 엄청난 얘기 하는 것도 아닌데, 정신적으로 너무 중압감을 느꼈다. 음악 하는 사람들이 약 빠는 심정이 뭔지 좀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하고.
겨울까지는 밀린 일들 처리할 게 너무 많다. 좌파 에세이 쓴다고 전부 뒤로 밀려서, 큰 작업들 몇 개가 있는 데도 겨울까지 왔다. 내년 초에는 도서관 경제학 작업에 드디어 들어간다. 겨울에 필라델피아 갔다오는 정도라도 처리했으면 한다.
계획을 세우면 뭘 하나, 제대로 지켜지는 계획이 최근에는 거의 없는데.. 나도 이제는 나이를 먹었는지, 내가 짠 일정도 제대로 못 맞춘다. 10년 전에는 어쨌든 일정보다 먼저 끝내고 중간에 다른 일도 좀 더 하고 그랬던 적이 있었는데.. 애들 키우다 보니까 그런지, 순발력도 별로 없고.
그래도 마무리 짓는 게 어디냐, 그런 소박한 기쁨이라도 누리면서 살려고 한다.
<매운 일생 달달하게 달달하게>, 그런 에세이를 쓰면서 책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순간에는 나를 믿는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쓴 적이 있다. 사실 그렇다. 잘 알지도 못 하는 독자 반응을 생각하면서 고치고 또 고치면서,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들고 결국 마무리도 못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재밌게 잘 고치면 정말 좋겠지만, 그렇게는 못 하더라도 마무리는 지을 수 있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세상에서 제일 안 믿었지는 게 나 자신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만을 믿을 수 있다고 하기도 하는데, 나는 도저히 나를 못 믿겠고, 내 판단도 잘 못 믿겠다. 그래도 마지막에 마무리하는 순간에 나를 믿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점집에 가서 물어볼 수는 없는 거 아니냐.
밤 새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좀 하는 척이라도 해야. 토막 시간에도 집중을 잘 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둘째는 병원에 있고, 큰 애는 옆방에서 자고, 이런 시간에 집중은 쉽지 않다. 게다가 워낙 집중해서 썼던 원고를 고치는 일이라, 그 이상의 힘이 필요하다. 그래도 어쩌겠냐, 뭐라도 하는 척 해봐야지.
나름대로 시간 계산을 하는데, 애들 보면서 뭔가 하면 계산 하나마나다. 어쩌겠냐. 그렇게 사는 거지.
애 얘기를 할 때마다 마음이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게, 이제 아이는 아예 낳지 않겠다고 생각을 했거나, 그런 생각 자체도 아예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아이 얘기가 보편적인 시대도 있었지만, 지금의 한국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물론 아이 안 낳거나, 결혼을 하지 않거나, 그냥 자기 인생 자기가 결정해서 사는 거라서 그냥 그런가보다 한다. 그렇지만 그게 문화를 단절시키는 또 다른 요소로 작용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홍준표에게 열광하는 청년들’, 진짜 머리 아픈 주제다. 그냥 MZ 세대라고 편하게 표현하고 넘어가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인가 싶다. 이런 얘기들을 좌파 에세이에 조금은 더 담아보려고 하고 있는데, 머리가 지끈지끈하기는 하다.
며칠 전에 경기과학고에서 강연을 했다. 강연 전에 학생들끼리 조모임 같은 형식으로 자기들끼리 발표도 하고, 동영상도 만든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팬데믹과 양극화는 이 친구들에게도 확실히 생각해볼 거리가 되는 것 같기는 하다.
10대의 여러가지 흐름들을 살펴보다가 홍준표에게 열광하는 20대들 생각하면, 일관되게 분석하는 게 어렵다.
왜 내가 이런 골 아픈 얘기에 발을 담궜나, 그런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한다. 사명감 같은 그런 거룩하거나 높은 건 아니고, 다음 작업을 위해서는 나도 좀 이해를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 그렇지만 난이도가 너무 높다.
둘째 병원에서, 호흡기 치료 끝나고 그림 그리며 노는 중. 병원에 약 타러 갔다가 바로 입원하게 된. 몇 년만에 다시 병원 생활이기는 한데, 어렸을 때 폐렴으로 계속 입원하던 때에 비하면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때는 진짜 심각했다.
2년만에 카메라를 고쳤다. 가방에 넣어 가지고 있다가 마침 할 일도 없어서. 카메라 휠 나간 김에 새 거 산다고 그러다가, 도니가 없어서 결국 포기하고 얼마 전에 고쳤다. 병실에서 할 일도 없어서 카메라 만지고 놀았다.
이제 애들도 조금은 커서, 음악도 다시 듣기 시작하고, 사진도 다시 찍으려고 한다.
포토 에세이는 한 번 냈었는데, 엄청나게 팔린 건 아니지만, 독자들에게 그 책 보고 인생이 변했다고 하는 연락을 가장 많이 받았던 책이기도 하다. 이전 살던 집 마당에서 고양이 사진 몇 년간 찍었던 적이 있었다. 사실 내 인생도 가장 많이 변했다. 고양이들 돌보고 고양이 사진 찍으면서 결혼하고 9년만에 애들도 태어나게 되었고.
50권 마무리 짓기 전에 포토 에세이 한 권 하고 싶은 생각은 있는데, 그냥 생각만 그렇고.. 뭘 찍을지는 아직 깊이 생각해둔 것이 없다. ‘깊은 심도’를 모티브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 정도.
카메라 새로 사고 책으로 본전만 나올 자신이 있으면 벌써 했다. 그게 만만치가 않다.
둘째 3학년 되면, 나도 이제 애들 보는 일에서는 좀 자유로와도 된다. 그때 제일 먼저 했으면 싶은 것은 국악 하는 사람들 인터뷰집. 아름다움에 대한 얘기를 나도 한 번 해보고 싶어져서. 틈 날 때마다 리스트를 만들어보는 중인데, 7~8명 정도는 나도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일반인들은 거의 모를 사람들이기는 한데, 나름 음반 내면서 활동하는 젊은 현역들 만나서, 시대가 변한 것들 것 대한 모티브를 좀 잡아보고 싶다. 여건이 되면 음악 다큐도 같이 만들고, 그러면서 포토 에세이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문득.
참 나도 성격 지랄맞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한참 유명하고, 뭔가 잘 나가는 것들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아무 관심이 안 간다. 꼭 정의를 위한 길, 그런 거 아니라도 뭔가 지키고 버티고, 그렇게 뭐라도 만들어 보기 위해서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주로 감동을 받는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돌아보면 나도 참 대중적인 것과는 정말로 먼 길에서 살았고, 더 해보고 싶은 것도 인기와는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옳은 것과 아름다운 것, 아마 그 축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산 것이 내 삶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돈 안되는 데에도 아름다운 것, 그것들은 진짜로 아름다운 것들이다. 치명적 유혹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하여간 간만에 파인더 뷰를 들여다보면서, 자고 있던 세포 몇 개가 깨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둘째는 오늘부터 입원이다. 워낙 입원이 잦은 아이라, 이제 입원한다고 해도 별 긴장감은 없는데, 다만 몸은 좀 고되다.
팬데믹 한 가운데 입원을 했더니, 보호자도 코로나 검사를 해야 병실에 들어갈 수가 있다. 이해는 하겠는데, 얄짤 없이 3만5천 원 받는다. 장모님까지, 10만 원이 넘는다. 돈이 그냥 주머니에서 막 흘러나간다.
어린이들 전문 병원에서 주는 밥 먹고는 도저히 양이 안 되어서 삼각김밥 두 개에 단팥빵도 하나 더 먹었다. 다른 일도 처리할 게 있어서 하루 종일 이것저것 한 데다, 점심도 집에서 잠시 대기하는 동안 둘째 준다고 끓여 놓은 죽 남은 걸로 때웠다. 영양은 없고 칼로리만 높은 걸로 저녁을 먹고 나니, 잠시 현타..
지난 몇 달 동안 살 좀 빠져서, 이제 7킬로만 더 빼면 60킬로대로 진입이기는 한데.. 수영장 가기 어렵게 만드는 일이 단기적으로도 많고, 장기적으로도 많다. 스케쥴이 인생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어쨌든 7킬로만 더 빼면 대학 졸업하던 시절 몸무게 정도 된다. 유학 시절에는 워낙 빠져서 그거랑은 도저히 비교할 수가 없고.
아내랑 병실 교대하고 돌아왔더니, 천둥 막 치더니 비가 겁나게 쏟아붓는다. 아내가 병실에서 이불을 안 준다고 해서 이불 가지고 간다고 했는데, 오지 말라고 한다. 요즘 너무 무리해서 쓰러질 것 같다고, 그냥 적당히 처리한다고 한다. 병원은 또 왜 이렇게 먼지.
마침 병원 가기 전에 좌파 에세이 고치던 데가 애 보면서 고생한 데.. 뭔 고생을 했더라, 시간이 지나니까 감정 자체가 잘 기억이 안 난다. 뭐였지? 그러고 있는데, 둘째 폐렴으로 거듭 입원하면서 먹먹하던 그 시절을 바로 다시 경험하게 된. 병원에 약 타러 갔는데, 그 길로 바로 입원하게 될 줄은 그때만 해도 몰랐다. 숨 소리 듣고 입원할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는데, 그건 아침 생각이고, 오전에는 또 아무 생각 나지 않았던.
방송국에서 강연 방송 하나 자문을 해달라고 하는데, 젠장.. 좀 알기는 아는 사람이지만, 제대로 책을 정독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 후다닥 몇 권 읽어야 하는데, 읽을 시간을 또 어서 쥐어짜나. 카메라 휠 맛탱이가 간 걸 2년만에야 고쳤다. 진공관 앰프 등 오래된 앰프들은 10년만에 고쳤다. 그나마 프리앰프는 그 사이 천안으로 사무실을 옮겨서, 아직 엄두도 못 내고 있다.
방송하면서 자기 일도 다 하는 사람들은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지금 별로 하는 일도 없는데도 맨날 숨이 턱턱 차게 일정이 돌아가는데, 대단한 사람들은 따로 있는 것 같다. 난 그렇게 못한다.
더스쿠프라는 매체의 기자에게 전화가 와서 둘째 병원 갈 시간 기다리면서 정말 엄청 자세하게 설명을 해줬다. 지금도 좋은 일 하는 사람에게는 매체의 크기나 기존의 친분, 이런 거 따지지 않고 성심성의껏 알려준다. 올해 아니 지난 3년으로 시간을 넓혀보면, 오늘 설명한 기자가 내가 본 기자 중에서는 가장 어려운 주제를 가장 성심성의껏 취재한 것 같다. 그래서 나에게도 작은 감동이 있어서, 알려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성실하게. 그야말로 감동이 있었다.
기자나 피디들에게 내가 느끼는 감동이라는 게, 좀 지랄맞다. 아무리 규모가 크고, 유명해도, 루틴한 일을 처리하고, 위에서 좋아할 만한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걸로는 감동이라는 것은 생기지 않는다. 일상적으로 것, 투린으로부터 벗어난 일을 누군가 할 때, 감동이 생기고 뭐라도 도와주고 싶어진다.
내 성격이 지랄 맞아서, 남들 다 가는 길이나, 남들 다 하는 일에서는 아무런 감흥과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나도 그런 건 지겨워서 못한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거들어보지도 않는 것에 재미를 느끼고, 그런 사람에게서 감동을 느낀다.
천상 마이너의 마이너가 체질이다. 30대 초반에 청와대에서 근무할 일이 생겼다. 듣자마자 “싫어요”, 그랬다. 남들 다 하고 싶어하는 것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싫다는 생각이 들었고, 새벽부터 기어 나가서 죽어라고 사는 것도 싫었다. 그러면 나중에 보상이 있지 않느냐? 그딴 보상 필요 없다는 게 30대 초반의 내 생각이었다.
어제 경기과학고의 고등학생들하고 줌으로 강연을 했다. 질문이 엄청 많았다. 결국에는 주어진 시간 내에 다 처리할 수가 없으니까, 나중에는 줄 서서 하나씩 질문을 했다. 학교에서 하는 행사라서 9시 반을 넘길 수가 없어서, 몇 가지 몰아서 한꺼번에 대답하고 마무리했다. 나도 행사 끝나고 나서 나름대로 생각이 많아졌다. 아마 팬데믹 국면이 아니었으면, 코로나 문제로는 고등학교 강연을 좀 더 많이 하게 되었을 것 같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어쨌든 10대들을 위한 책은 계획된 대로 몇 권 최선을 다 해서 해 볼 생각이다.
더 낮고 더 춥고 배고픈 곳으로, 내 삶의 모토와도 같은 것이었다. 나머지 인생은 더 그렇게 살아보려고 한다. 그래야 나중에 나를 돌아봐야, 지 처먹는 것만 생각하고, 진짜 개돼지처럼 막 살았다, 그렇게 돌아보게 되지 않을 것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