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꽃이 피었다. 사과는 어려서부터 먹었지만, 사과 꽃은 나이를 먹고서야 처음 봤다. 생각보다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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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심심해서 가만히 있다가 잠시 앞으로 남은 책 숫자 생각해보니까. 50권까지 이미 결정된 것 빼고 나니까, 아직 비어 있는 건 6권 남짓이다. 여섯 권을 새로 준비해야 한다면 이것도 어마무시하지만, 46권을 채웠고 나머지 남은 게 여섯 권이라고 하면 느낌이 좀 다르다. 시간은 4년 정도 남았으니까 그냥 편안하게 해도 그 정도는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나, 그런 생각이 문득. 처음부터 경제 대장정이라는 이름으로 50권을 쓸 생각은 없었고, 12권만 그 이름으로 하려고 했었는데.. 하다보니 이렇게 되었다.

요즘 내 삶의 기준은 '명분과 재미', 딱 두 가지다. 몇 년 전부터, 돈은 애당초 고려 대상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돈이 안 중요해서가 아니라, 돈을 기준으로 하는 변수는 콘트롤하기가 어려워서 그렇다. 그냥 종속 변수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하다보면 적당히 벌리겠지..

50이 넘으면서 명분이 없는 일은 아예 하지도 않고, 얘기도 못 꺼내게 한다. 이걸 굳이 왜 내가 해야 하느냐? 20대 재테크, 40대 제테크 같은 책 아니면 청소년용 권면서, 이런 제안들이 많기는 한데.. 무엇보다도 명분이 없다. 굳이 이걸 왜 내가 써야 해? 나는 그렇게 재테크하면서 살지도 않았는데.. 이제 명분이 없는 일은 들여다보지도 않고, 생각해보지도 않는다.

명분이 있어도 재미가 없는 일도 안 한다. 돈도 별로 안 되는데, 재미도 없는 일을 왜 해? 이 나이에. 아무리 명분이 좋아도, 재미가 없는 일도 안 한다. 공직이 그렇다. 아주 명분이 없는 자리도 있지만, 명분이 있는 자리도 있다. 그렇지만 재미가 없다. 이 나이에 다시 패거리들 모아서, 어깨싸움하는 일을 할 이유가 별로 없다. 물론 그게 재미가 있는 사람들은 그런 걸 하면 된다. 그렇지만 이제 난 별로 그런 거에서 재미를 느끼지는 않는다. 재미가 없다.

요즘 내려야 하는 많은 판단들을 이런 기준으로 한다. 실익? 별로 재미 없는 방식의 생각이다. 큰 이익이든 작은 이익이든, 그게 얼마나 의미가 있겠나? 죽을 때까지 이익을 남기며 사는 것.. 그거 쫌생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이것도 개소리다. 이름은 남겨서 뭐하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유교적 질서에서 시키는 대로 충성을 다하라고 만들어낸 헛소리 아니겠는가? 자연의 질서 아래, 인간의 이름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저 작더라도 명분이 있으면 고맙고, 재미가 있으면 최고다. 그런 일들만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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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그런 건 아닌데, 가끔은 글을 쓰다가 내가 우는 일이 있다. 울었던 책도 있고, 안 울었던 책도 있다. '88만원 세대'는 쓰면서 눈물이 난 적은 없었다. 울고 싶기는 했는데, 가급적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지나와서 보니까 책의 성공이나 판매와는 아무런 상관은 없다.

지금 쓰는 책은, 육교를 걸어가면서 계단 중간에서 머리 속으로 구상하다가 크게 눈물이 난 적이 있다. 육교 위에서 한참 눈물이 났었다.

그리고 또 덤덤하다가 오늘 아침에 눈물이 약간 났다. 일산에 사는 두 딸의 엄마에 대해서 쓰다가, 문득. 쓰던 거 잠시 내려놓고, 밖에 나가서 멍하니 서 있다 들어왔다.

책은.. 감정을 만드는 게 어렵다. 내가 감정을 만든다고 해도, 그게 전달이 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억지로 감정을 만들면, 독자에게 거의 전달되지 않는다. 그게 제일 어렵다.

일부러 감정을 만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글을 쓰다보면 감정이 생겨난다. 제일 절제하려고 하는 건, 분노다. 그건 거의 전달이 안 된다. 입장이 다르다고 하면, 1도 전달이 안 된다.

'모피아' 쓸 때는, 후반부에 많이 울었다.

제일 많이 운 버전이 있는데, 그 버전은 결국 쓰지 않았다. 엔딩 버전이 바뀌었고, 덜 우는, 그렇지만 스케일은 더 큰 엔딩 버전을 썼다.

가끔 그 생각을 한다. 많이 우는 버전이 나았을까, 덜 우는 버전이 나았을까? 최근에 드는 생각은.. 공포 버전이 있었으면, 그걸로 엔딩을 했었을텐데, 그 때는 그런 생각 자체가 안 들었다.

쓰면서 울거나 안 울거나, 결과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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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올 봄에 맞춰서 진보 진영에서 오고가는 정책에 관한 것들을 꼭지별로 여럿이 나누어서 쓰는 정책집 같은 책을 낼 생각이 있었다. 흐름상, 올봄에는 그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공보 논리가 아니라 정책 논리로 한국의 논쟁이 형성되는 게 유의미하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각자 글 하나씩 쓰고 책을 만드는 것을 주도하지도 않았었는데, 지금은 별로 그런 흐름이 없기도 하고.

사회과학 시장이 워낙 죽다보니까, 예전 같으면 정책 하나 혹은 정책 몇 개를 모아서 분석하는 책들이 나왔을 법한 시간인데.. 요즘은 그런 흐름 자체가 거의 없다. 나도 내봐야 안 팔릴 책을 뭘 그렇게 붙잡고 궁상을 떠느냐고 놀림을 받는 처지인데, 다른 사람들이라고 안 그렇겠느냐 싶다.

출판사도 정했고, 에디터도 정했는데, 실제로 추진하지는 못했다. 큰 애가 초등학교 입학하는 게 그렇게 큰 일일 줄은 나도 미처 몰랐다. 막상 초등학교 입학 준비 시작하는 데, 우와..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글 쓸 저자들 일일이 만나서 부탁하고, 글 받고, 전체적인 맥락에서 조율하고..

원래 내 꿈이 이런 일을 하는 거였다. 프랑스의 갈리마르나 seuil 같은 어마무시하게 유명한 출판사에 보니까, 시리즈별로 그걸 주관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시리즈를 주관하는 사람이 본인도 엄청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또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다. 뭐, 그렇다고 일반인들이 아는 건 아니지만, 무척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형편이 그렇게 안 되어서, 누군가에게 책을 쓰게 하는 일들을 잘 하지는 못했다.그래서 누구 시키지는 못하고, 그냥 내가 나에게 시킨다..

선거라는 게 그렇다. 선거에는 온갖 사회적 문제들이 다 올라온다. 계급적인 일은 물론이고, 계층 그리고 문화적 충돌도 다 올라온다. 그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원래 그러라고 선거 하는 것 아니겠나?

그 틈을 비집고 정책들이 들어온다. 계급이나 계층에 관한 것이 주체에 관한 일이라면, 정책은 수단에 관한 일이다. 그리고 이 수단은, 안 그럴 것 같지만 유행이라는 게 있다. 각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따라서 유행이 바뀌기도 하고, 세계적인 흐름 같은 게 있다. 그래서 공약의 흐름이 매번 바뀌게 되는 것이다. 지난 번에 못한 걸 이번에 다시, 요행이 세계적 유행이 그쪽으로 가면 다행이지만, 그럴 보장은 없다.

우리가 편의상 진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역대로 이런 공약에 강했다. 빨갱이 중의 빨갱이로 몰려서 결국은 처형당한 조봉암도 토지개혁이라는 변화를 만들었다. 보수는? 걔들은 정책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 자체가 없었다.

그냥 미군정으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아서, 그냥 일본하던 것의 기본에 미국 꺼 적당히 하는 척하면 그만인데, 뭔 정책이 필요할까? 우리나라 보수들이 여전히 정책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는 것은, 애당초 그게 그들에게 절체절명의 과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공, 멸공, 공산당만 잘 때려잡으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방첩 검사들이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지도자 행세하는 전통이 생겨났다. 그런데 정책은 뭐? 애당초 필요가 없는 집단이다.

진보는 좀 다르다. DJ가 집권하고 제일 먼저 형성시킨 법안이 국민기초생활보장법, 한국 복지의 기본법을 만들었다. 그 전에도 복지는 있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도입된 것이라서 기본법의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했다.

구조가 이렇다..

그래서 속칭 진보 쪽에서 책을 통하든, 아니면 그 뭐를 통하든, 정책적 의제를 제시하는 일을 멈추면, 한국은 퇴행으로 향한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한국은 그렇게 발전해 온 나라다.

그래서 정치가 만들어진 물건을 파는 행위라면, 정책을 그 물건을 만드는 공장장 같은 역할이다. 팔 물건이 없으면, 이제는 싸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내년 총선을 가를 분기점이 올 봄에서 올 여름쯤일 것 같다.

각자 만든 물건을 전시하는 쇼케이스 같은 게 선거가 될 것이냐, 아니면 물건은 없고 사람만 파는 인물 전시장이 될 것이냐?

황교안이 무슨 물건을 만들어서 내년 총선에 보일 것인가? 걔네는 신상 같은 거 없다. 만드는 놈이 없는데, 팔 게 뭐가 있겠나?

박근혜 때로 가거나, 좀 심하면 mb 때로 복귀하는 것을 신상이라고 껍딱만 바꾸어서 들고 나갈 것이다. 그리고 '누구누구' 죽이자, 이렇게 선거를 치룰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 편에서는 뭐라도 좀 신상을 내놓을 게 있느냐? 구상품의 기능강화형, 그걸 버전 2, 버전 3, 이렇게 껍딱 개비하는 게 제일 편하다. 물론 거기에도 신기능을 넣는 진짜 버전 체인지가 있고, 기능 변화는 없고 순수하게 껍딱 즉 이름만 바꾸는.. 아니, 이름만 바꿔도 좀 낳다, 고민은 한 거니까. 과거 상품 그냥 그대로 들고 갈 확률이 높다.

그 분기점이 올 봄에서, 올 여름 사이일 것 같다. 앞으로 나갈 것이냐, 그냥 뒤로 갈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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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저자 소개에 성격 까칠하다고 쓴다.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는데, 나는 성격 정말 더럽게 까칠하고 까탈스럽다. 남들 다 맞다고 해도, 그게 아닌데,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하거나 행동에 옮긴다. 성격 정말 좋은 사람들은, 그렇게 안 한다. 나도 나의 이런 성격이 불편하다. 좀 더 편하고 즐겁게 사는 방법도 많았을텐데, 이 지랄맞은 성격 때문에 아주 인생 피곤하게 살았다.

그렇지만 나도 내가 준비하고 있는 책들 끝내면, 이제는 좀 덜 까칠한 방법으로 살고 싶다. 나이 먹어서도 까칠하게 굴면, 그게 학자적 양심이나 행동하는 시민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그냥 입맛 까다로운 까탈스러운 영감처럼 보일 것 같다.

저 할배, 원래 그래, 니들이 이해해..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지갑도 잘 못 푸는 처지에, 말도 더럽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도 글을 쓸 수 있고, 책을 쓸 수 있을까? 그걸 잘 모르겠다. 잘난 척하고 사는 거는 취향에 안 맞고. 나처럼 해봐요 요렇게, 그럴만한 삶을 산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남들처럼 그 나이에 손자나 보면서.. 우리 애들이 초고속으로 자라도, 10살도 되지 않았을.

그래서 나의 미래는 나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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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 튤립이 만개했다. 노란색, 큰 꽃, 극한의 화려함이다. 꽃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너무 화려해서 바로 앞에 실물을 보면서도 몽환적이다. 꿈에서 보는 것 같다.

이제 내 삶을 슬슬 마무리해가는 단계로 들어간다.

친구처럼 살았던 나이 많은 친구들이 환갑이 가까워지면서 뭔가 내려놓고 정리하기 보다는, 이제야말로 정말 한 번 해보고 싶다는 모습을 보여준다. 슬퍼진다.

꽃은 치매가 없다. 그리고 구질구질함도 없다. 화려하게 피고, 어느 날 지고 만다. 튤립이 우리 집에 온 건 5년 전이다. 있으나 마나, 잡초 사이에서 티도 없이 그냥 버티고 있다. 그리고 일년에 딱 한 번, 화려하게 꽃을 피운다. 그 때, 아 튤립이 있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의 삶은 그와는 다르다. 나이를 먹을수록,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더욱 욕심이 많아지나보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 감탄하는 것, 그런 마음이라도 잃고 싶지 않다.

흰 머리가 나면, 이제 추스리고 마무리할 시간이 다가온다는 신호가 아닌가 싶다. 이제부터 나의 시간이야, 그렇게 주접 떠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너무 크고 화려하게 핀 튤립을 보면서, 잠시 배운다.

너는 이 아름다운 꽃잎을 며칠 후면 내려놓을 것이다. 그렇다고 너의 아름다움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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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번째 책이 되기를 희망하는..

1.
책을 쓰고 나서 만난 사람들이 있고, 그 전에 알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책을 쓰게 된 데에는, 아내가 제일 영향이 컸고.. 그리고 이재영과 노회찬이다. 2003년 정도에 그 둘을 만났고, 2004년에 민주노동당 총선을 같이 치루었고, 2005년에 첫 책이 나왔다. 그러니 내가 얼마나 많이 영향을 받았겠는가. 서로 영향을 많이 받았다.

'88만원 세대'를 썼을 때, 정말로 뛸듯이 좋아했던 사람이 노회찬이었다. 여러가지 중의적 의미다. 그 인세로 이재영이 월급을 받게 되었다.

50대 에세이가 잊혀지기 어려운 책이 된 건, 그 시절의 얘기, 정확히는 그 둘과 가장 행복했던 어느 날의 얘기를 썼는데..

그리고 이제는 노회찬 마저도 죽었다.

'붉은 돼지'의, 좋은 놈들은 이미 죽었어, 정말로 그렇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나에게는 꿈이 하나 있었다. '이상한 나라의 인민노련'이라는 책을 쓰고, 그 표지에 노회찬 얼굴을 어마어마하게 달고, 그리고 시내버스에 광고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서울 시내에 노회찬 얼굴이 버스와 함께 달리게 하고 싶었다.

2.
이게 책이 될 것이라고 처음 생각한 것은, 이재영이 울산과 포항 지역에 기지를 만들기 위해서 처음 경주에 가던 시절의 얘기를 해주었을 때의 일이다. 정말로 웃겼다. 처음에 인천에 가던 시절의 얘기는, 오히려 경주에 가던 시절에 비하면 덜 재밌을 정도였다.

그래도 바로 못한 것은, 이게 거의 인류학 책 정도가 될 정도로 인터뷰도 많이 필요하고, 자료조사도 필요한, 품이 많이 드는 책이라서 그렇다. 그리고 점점 더.. 기억하는 사람들도 줄어가고, 자료도 없어져간다.

내가 인민노련 책을 준비하려고 한다고 하니까, 전국의 인민노련 활동가였던 분들이 연락을 많이 해오셨다. 참.. 눈물 나는 얘기들이 많다. 우울증이 많았고, 사회부적응 상태로,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지만, 그래도 인민노련 얘기를 누군가 해보려고 한다니까 갑자기 눈이 번쩍 떠졌다고..

그래도 너무 힘들어서, 일단은 접어놓았다.

3.
그 때 바로 하지 않은 이유는, 역설적으로 나도 조금 더 경제적 안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힘은 많이 드는데, 팔릴 가능성은 별로 없는 책을 바로 추진하기에, 진짜 도니가 달랑달랑.

그리고 언제든지 이재영에게 얘기를 들으면 되니까, 좀 더 편안해지면 하자.. 고 했다.

그 때는 이재영이 그렇게 금방 죽을 줄 몰랐다. 아니, 알았어도 그 책은 못했을 것 같다. 너는 이제 죽을 거니까, 그 얘기 좀 해주라.. 그렇게는 못했을 것 같다.

긴 시간의 눈으로 보면, 어차피 그 책은 그 때 나올 수가 없던 책이었다. 발사대인 나도 너무 힘이 약했고, 주인공인 이재영은 곧 다가올 죽음을 자신도 모르면서 기다리던 중이었고.. 그리고 메인 주인공이었던 노회찬도 결국은 죽을 것..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다.

그 후에 노회찬은 국회의원도 되고, 몇 가지 호칭이 생겼다. 그렇지만 내가 가장 멋지다고 생각했던 노회찬의 호칭은 인민노련 조직부장. 이 사람이 어떤 20대를 보냈는지, 가장 잘 얘기해주는 것 같았다.

그 후로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인민노련 출신으로 알기도 하는데, 그렇게까지 열심히 산 건 아니고, 그냥 인민노련 사람들을 많이 안.

4.
50권으로 나의 '경제 대장정'은 마무리를 지으려고 한다. 그 후로도 책을 쓸지, 아닐지, 나도 잘 모른다.

쓰던 책을 마무리하는 와중에, 인민노련 책은 해야할 것 같고, 만약에 정말로 쓴다면, 59번이 되는 게 맞을 것 같다. 60권째는 전체를 마무리하는 코멘터리 북이 되는 게 맞을 것 같고.

딜레마도 있다.

일단은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일이다. 감정적인 것은 차지하고라도, 육체적으로 해야 할 작업이 너무 많다. 그렇다고 어디론가부터 후원이나 지원을 기대할 상황도 아니고.

또 다른 딜레마는, 지금 아니 4년 후라도, 그 시기에 과연..

집을 떠나 인천으로 가서 노동자가 된 대학생들의 얘기가 청년들에게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는 얘기가 될 것인가? 이걸 잘 모르겠다.

그냥 꼰데들의 노스탈지아.. 이러면 재미 없다. NL과 PD가 싸우던 시절의 얘기, 그런 것을 지도부가 아닌 현실의 얘기로 일부 다루려고 한다. 느무느무 재미 없다. 그렇지만 엄연한 현실이기도 하다.

그 얘기가 빠지면 왜 민주노동당이 집권하자마자 정책국장이던 이재영이 당에서 짤릴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이제 막 국회의원이 된 노회찬이 역시 개고생을 하고, '풍찬노숙'의 길로 들어갔는지, 설명이 좀 쉽지 않다.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너무 괴로운 얘기라서 이 얘기를 꺼내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나만 해도 한 다리 건너라서, 그 때 그랬어요.. 담담하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해도 나에게도 감정 소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왜 내가 갑작스럽게 유학을 가게 되었는지, 그 출발점에 해당하는 얘기들이 인민노련 안에 복잡하게 엉켜있다.

5.
그걸 명랑하게 그리고 재밌게, 그렇게 쓸 마음의 준비가 되면 나도 '이상한 나라의 인민노련'을 쓸 거다. 그러나 그냥 가슴만 후벼파고, 죽은 사람들에게 "내 책을 바친다", 이런 개 같은 소리나 할 거라면, 필요없는 책이다. 레토릭.. 그딴 거 필요없다. 명랑할 수 없다면 결국은 그냥 개소리일 뿐이다. 너무 생생한 과거의 얘기이고, 승자가 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그렇기도 하다.

하여 나도 생각 중이다.

마음은 그렇지만, 현실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걸 읽어줄 독자들이 과연 있을지, 어떻게 집 나온 대학생 얘기들이 그들에게 받아들여질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며칠 전에 인천에 갔었다. 아니, 올해 인천에 자주 갔다. 그리고 앞으로도 자주 갈 일정이다. 그 때마다 인민노련 생각이 나고, 이재영에게 들었던 얘기들이 생각난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아마도 한국에서 인민노련 얘기를 쓰고 싶어하고, 또 진짜로 쓸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내가 쓰면 그래도 이 얘기가 남는 거고, 내가 안 쓰면 아마도 그냥 사라질 것 같다.

인민노련 출신들하고 이렇게 생활도 하고, 삶의 중요한 순간을 같이 나눈 사람들이 또 얼마나 있겠나? 지금도 많이 잊혀졌다. 시간이 지나면 더 잊혀질 것이다.

그래서 계속 생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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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청에서 마련해주는 텃밭에 오늘 처음 모종을 심었다. 큰 애는 이제 몇 번 해봐서 능숙하게 잘 한다. 둘째는 작년에는 흙만지 싫다고 안 했다. 올해 처음 심는 걸 해봤다.

농사가 교육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처음 생각해본 것은 2001년쯤의 일이다. 어떻게 하다보니까 장애인 교육하는 특수교사들과 알게 되었다. 장애인 분리 교육이 아니라 통합 교육에 대해서 생각이 처음 정리된 것도 그즈음의 일이다. 하여간 일반 학교에 다니는 장애인들을 위해서 뭘 하면 좋을까, 총리실에서는 그즈음 7차 교육과정에 대한 논의가 한참이었다. 그러다 얘기가 나온 게 농업교육이었다. 그 때만 해도 어린이들이 다룰 수 있는 작은 농기구 같은 게 거의 없었다. 독일에 갈 때마다 모종삽 셋트 같은 것들, 정말 예뻐서 누구라도 만져보고 싶은 그런 것들을 사다 주었다.

그게 학위논문 같은 게 아니라 - 그래봐야 정책 현장이지만 - 현실에서 농업을 내가 처음 접한 순간이다.

주로 아내가 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텃밭을 하기 시작한 것은 이제 10년 정도 된다. 애들 아파서 그야말로 던져놓고, 자라거나 말거나 한 때도 있지만, 하여간 그것도 10년 가까이 된다.

큰 애는 어린이집 알림장에 농사를 잘 짓는다고 적혀 온다. 별 거는 아닌데, 흙만지는 것을 무서워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늘 하는 것도 아니니까, 가끔 뭘 심거나 손을 보는 걸 큰 놀이라고 생각한다.

올해는 농업경제학을 무조건 연내 출간할 생각이다. 미뤄도 너무 미뤘다. 게임중독에 빠진 아들이 중3 올라갈 때 아빠가 편지를 쓰기 시작해서, 1년간 쓰게 되는 것이 설정이다. 어려서부터 텃밭을 해봤다는 사실만 빼면, 대체적으로 내가 만나게 되는 일상의 얘기를 그대로 하려고 한다.

이렇게 방향을 바꾸게 된 중요한 계기 중의 하나는 제이미 올리버에게서 왔다. 불량 청소년 얘기에서 시작된 제이미 올리버의 신화는 결국 영국의 중학교 급식체계 자체를 바꾸게 된다. 그리고 여왕으로부터 작위도 받았다.

그즈음 영국의 패션 위크가 헤매다가 엄청나게 영향력이 커졌다. 내가 처음 패션 시장 공부하던 20년 전에는 밀라노가 중요했지, 영국 패션위크는 쳐주지도 않았다. 지금은 파리 패션위크와 함께 양대 패션으로 다룰 정도로 커졌고, 밀라노는 예전에 제쳤다.

최근의 요리와 식품 그리고 농업에 관해서는 영국이 스위스만큼이나 중요한 텍스트다. 만약 처음에 계획한 대로 10년 전에 농업경제학 책을 썼으면, 스위스가 기본 텍스트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제이미 올리버를 축으로 하는, 영국이다.

농업을 교육으로 본다.. 이게 내가 마지막으로 농업 다루던 시절에 마지막으로 제시하던 건데.

안타까운 얘기지만, 이 얘기가 흐르고 흘러서 충청도까지 갔고, 이걸 전격적으로 받은 사람은 안희정이다. 약간의 인물 배경 같은 것들이 좀 있기는 한데, 하여간 가장 적극적으로 농업을 교육 프로그램으로 생각한 사람이 안희정 지사였던 것은 맞다. 이래저래 길이 엇갈려서.. 결국 농업 얘기로 안희정과 차 한 잔 마시게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정책으로 보면, 안희정이 잘 한 것도 있고, 못한 것도 있다. 잘 모르면서 아는 척만 한 것도 없지 않다. 그렇지만 농업교육에 관해서는, 하여간 그가 가장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은 맞다.

그런 얘기가 제이미 올리버 얘기와 만나서, 작년부터 올해 사이, 내 안에서 자라고 자라서 10년 전과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정리해나가는 농업 경제학이 되어간다.

남자들에게 내가 농업과 관련해서 해주고 싶은 얘기는 딱 하나다. 자기 먹고 싶은 것은 자기가 해먹자..

먹는 걸로 아내와 다툴 일이 거의 없는 게, 뭔가 맛있다고 같이 얘기한 게 있으면..

검색해서 맛집에 가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시장 봐서 그걸 해서 먹는다. 그게 더 빠르다.

그렇게 살면 편하다. 집에서 내가 해먹는 게 제일 맛있고, 그게 힘드니까 식당에 가서 먹는다.

불편한 점도 생겼다. 우리 집 애들은 절대로 식당에 안 갈려고 한다. 가끔 식당에 한 번 가려면..

"그럼 내가 오늘 좀 양보하지, 아빠 사정이 그렇다니."

큰 애가 잘난 척하면서 하는 말이다. 이게 남자들의 일생에 중요한 시대가 오는 중이다. 결혼하거나 말거나, 그것과 상관 없이.

community-supported agriculture,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내가 쓰는 농업경제학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게 가능할 수 있는 사회.. 작은 농업 교육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의 남자들, 특히 약간 운동권 그리고 상당히 엘리트, 그런 사람들이 이걸 못 배웠다. 그래서 그들이 지성을 모아서 만들어낸 말이 "핸드폰 팔아서 쌀 사먹으면 된다." 정말로 내 친구들이 그런 말 할 때.. 판사도 그런 말 하고, 검사도 그런 말 했다, 진짜로. 에라이, 못 배운 것들아..

우리 아버지는 나를 육사 보내고 싶어하셨다. 그래서 타협점으로 공사가 결론이 되었다. 나도 비행기를 좋아했고, 비행기 조정을 하고 싶었다. 아마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는 불행한 역사가 없었다면, 나는 공군 근처에서 뭘 하는 그런 삶을 살았을 것 같다. 5.18을 보고, 광주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에라이, 군바리들아!

전환점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똑똑한 남자애가 집안에 있으면 어떻게든 육사를 보내야 한다는 시기에서, 막 서울대 법대로 바뀌던 시절이었다. 농업에 대한 최소한의 소양, 음식에 대한 기초 지식, 이런 게 필요하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우리 시대에는 남자가 똑똑하면 무조건 법대.. 밥은 엄마가 해주고, 너는 공무만 열심히.

그렇게 귀공자들이 되어갔다. 그리고 엄마가 아내로 대체되고, 그렇게 고상하게 어른이 되어서, 결국 자연의 이치와 생태의 순환성 같은 것은 시민단체의 거지같이 일상사는 것들이나 떼법으로 외치는..

그들이 그렇게 승진 열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시기에, 나는 어슬렁거리고 다니면서 텃밭이나 살피고, 전국의 유기농이나 급식운동한다는 농민들 만나고 다녔다.

학교급식이 사회적 의제로 뜬 건 그 다음이다. 초기 급식 운동 아이디어를 형성시킨 몇 사람이 있다. 나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그 모든 것을 모아서,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몇 통을 써보려고 한다. 그게 내가 쓰는 농업경제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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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통치

잠시 생각을 2019. 4. 20. 13:53

정치와 통치에 대해서 좀 더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좀 받았다.

최근에 쓰는 책의 보조 주제 하나가 정치다. 물론 좋은 의미가 아닌 정치다. 통치는 govern 정도의 의미다. 정부가 governing을 하지 않고, 정치만 한다면? 이런 게 내 오래 된 질문 중의 하나다.

이런 생각을 시작한 것은, 1987년의 대선을 복기하던 과정이다.

친구들이나 선배들에게 왜 그 때 노태우가 되었느냐, 물어봐야 같은 대답만 나온다. 그리고 결국 술만 마시게 된다.

보수 쪽 사람들은, 너네가 진 건 '수권 능력'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고 얘기를 했다. 도대체 저 야당이 수권 능력이 있을까, 그런 노태우의 캠페인이 유효했다는 거다. 우리는 양김의 분열 때문이다, 이런 표의 크기만 세고 분석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니면 지역 감정..

그런데 실제로 노태우에 투표한 사람들 중에, 그래도 괜찮아 보이는 사람들 찾아가 물어보니까, 수권능력이라는 참 택도 아닌 것 같아 보이는 대답을 했다. 물론 그건 보수의 오만이고, 이긴 자의 거만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여간 그 시절에 집권능력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정책과 정책 능력, 단순히 표를 더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로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통치는 힘으로 우악스럽게 할 수도 있고, 그래도 사람들이 느끼기에 좀 더 편한 나라를 만들면서 부드럽게 할 수도 있다. 나중에 평가는 갈릴 수도 있지만, 클린턴 시절에 경제 지표는 정말 좋았다. 경제학 교과서를 바꿔야 할 정도의 장기 호황이라고 호들갑 떨기도 했다.

여론조사가 일반화되면서, 부작용은, 통치는 사라지고 정치만 남게 된 것.

정부나 정권의 모든 행위가 대통령 지지율에 합산되어 이해되고, 또 실제로 청와대도 의사결정을 그렇게 많이 한다.

간단히 생각하면, 여론조사에 잡히지 않는 것을 잘 하는 것이 통치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정치만 너무 생각하면, 여론조사가 신경 쓰지 않는 것, 아니면 신문이 신경쓰지 않는 것은, 되거나 말거나, 그렇게 된다.

그래서 밑에서는 그냥 공무원들이 하던 대로, 실무에서는 오래된 전통대로, 적당히 해치우기도 하고, 해먹기도 하고, 그렇게 된다. 정치는 극도로 발달해도, 통치가 실패하는 경우가..

mb도 그렇고, 근혜도 그렇고, 통치는 실패한 것 같다. 보수의 수권능력은, 그들의 해쳐먹는 능력으로 전도되었다.

이 통치는 좌우의 문제도 아니고, 진보/보수의 문제도 아니다. 정치가 통치에 기여해야 하는데, 지금은 정치가 통치를 붕괴시키는 지경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여기에서부터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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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대장정 코멘터리 북

1.
아침에 둘째 어린이집 데려다 주면서, 문득 이 시기도 언젠가는 끝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팠던 아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정말 내가 많이 놀아주어서 그런지, 하여간 애교가 엄청난다. 아침마다 배 위에 올라와서 깨운다. 이렇게 사는 시기는 얘가 초등학교 2학년 끝날 때까지, 앞으로 4년 정도 남은 것 같다. 그 뒤에는? 별로 생각해놓은 게 없다. 그리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4년 후에 내가 뭘 할지, 그런 걸 뭐하러 지금 미리 생각하나 싶다. 지금은,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는 생각 정도다.

직장 민주주의 책 준비하던 어느 일요일, 심심해서 처음으로 내가 낸 책들을 세봤다. 서른여섯 권 정도 되는 것 같다. 50 권까지는 열네 권 남았다. 대충 둘째 등하교 시키는 거 끝나는 시기랑 얼추 맞을 것 같다.

‘88만원 세대’부터 시작해서 연작으로 12권을 쓰고, 거기에 ‘경제 대장정 시리즈’라는 이름을 붙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게 끝나면 코멘터리 북을 한 권 해보고 싶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 시리즈를 마무리 짓지는 못했다. 문화 경제학까지 쓰고, 시리즈는 일단 세웠다. 문화 경제학 다음 책이 농업경제학이었는데, 그건 올해 나간다. 오랫동안 표류했던 셈이다. 그 뒤로 ‘과학과 기술의 경제학’이 있었고, 맨 마지막이 ‘방송과 언론의 경제학’이었다. 이 마지막 책은 안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3년 전에 애들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방송과 언론에 대해서 불가근 불가원이라는 입장을 정했다. 뭐 원래도 그렇지만.. 방송은 안 하고, 기자들도 일상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 외에 따로 만나지는 않기로 했다.

방송이 한국을 구원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한국 방송.. 사실 개판이다. 방송이 중요하기는 한데, 지금 구조에서 방송을 통해서 뭔가를 한다는 것은 신기루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론은? 방송 보다는 언론이 더 중요하다. 그렇지만 내가 움직여서 뭘 주도적으로 한다는 생각도 버렸다. 그냥, 도와달라고 하면 잠시 도와주고, 말기로..

그리고 그 힘을 전부 책에 쏟기로 했다. 나는 여전히 내가 사는 이 사회가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아지기를 바란다.

청와대 구조나, 현 정부의 힘 쓰는 사람들, 이걸 사실 몰랐어야 했다. 유능한 사람들이 갔으니까, 잘 하겠지, 그래도 이게 어떻게 생긴 정부인데, 적당히 염치 있게 하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살았어야 했다. 하필이면 또 유독 잘 아는 사람들이 요직에 가서..

현 정권 첫 인선 보고, 방송은 안 한다고 마음을 먹었다. 망했다. 저 구조면, 신선이 온다고 해도 살리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그 대신 책을 열심히 쓰기로 했다. 애 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좋은 책을 쓰는 정도일 거라고 생각을 했다.

마지막으로 현 정부에서 중요한 자리가 제안이 온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안 한다고 했다. 지금도 안 하고, 앞으로도 안 할 거라고 그랬다. 그냥 있는 게 좋아서가 아니라,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포자기로 살았던 시절을 다 합치면 6개월이 안 될 것 같다. 나는 한국에 대한 희망을 버린 적이 한 번도 없다. 지금 보다 나은 상태를 만들고 싶었다. 그게 내가 책을 쓰기 시작한 이유고, 지금도 책을 쓰는 이유다.

2.
정말 잘 알았던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가서 양아치 짓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기는 힘들다. 그래도 뭐라고 한 번도 안 했다. 신문에도 그런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얘기는 거의 쓰지 않았다. 그건.. 가쉽이다. 나는 가쉽으로 내게 확보된 지면 같은 것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대충 4년 후 어느 시점쯤 49번째 책을 쓸 것 같다. 50번째 책은 ‘경제 대장정 코멘터리 북’이라고 이름을 붙이려고 한다. 어느 출판사에서, 누구랑 할지는 정해진 게 없다. 제목만 정했다. 2004년부터 책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으니까 대충 20년 정도, 진짜 죽어라고 책을 쓰게 된 셈이다.

한 권도 돈을 벌기 위해서 쓴 책은 없다. 나는 그걸 ‘경제 대장정’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제 와서 뒤돌아보면, 그걸 나 혼자 한 게 아니다. 내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진짜 많이 도와주기도 했고, 그 길을 같이 걸어온 독자들이 있다. 첫 책은 1쇄 겨우 털었다. 그 때부터 내 책을 읽어준 수많은 독자들과 20년에 걸쳐 그 길을 같이 걸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먹고 살 수 있을지 없을지, 그런 건 독자들 덕분에 걱정하지 않고 살아도 좋았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비굴하게 살지는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 단 한 권도 그런 이유로 책을 쓰지는 않아도 되었다.

지금도, 이 책은 엄청 팔린다, 저 책의 판매는 우리가 보장한다, 이런 제안들 엄청 온다. 외부에서 부탁 받아서 쓴 책은 한겨레가 부탁한 직장 민주주의 책 한 권이다. 뭐, 돈 된다고 쓴 책은 아니고.

그래서 50권째 책을 내면, 잔치 한 번은 하기로 했다. 출판사나 그런 데 도움 안 받고, 그냥 내 돈으로 호텔 같은 데서 밥은 한 번 사려고 한다. 그리고 그 날은 독자들하고 술도 마시려고. 지금까지 독자들하고 술을 마신 적이 없다. 책 나오면 차 한 잔 마시는, ‘독자 티타임’을 늘 했다. 술은 많이 마시지만, 사람들하고 술로 엉키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지금도 모르는 사람하고 술을 마시는 일은 거의 없다. 성격이 더러워서 그렇다. 엄청 까칠하다.

그래도 20년간, 50권의 책을 마무리하는 날이면, 술 한 잔 해도 좋을 것 같다. 아내한테 벌써 허락도 받았다.

3.
대충 이렇게 일정을 잡고 보면, 이젠 진짜 남은 책이 얼마 없다. 지금 쓰기로 확정된 책이 일곱 권 정도 된다. 50권째 빼고 나면, 여섯 권 남는다. 그러니까 아직 주제가 확정되지 않고, 빈 칸으로 남은 게 딱 여섯 권. 누구랑, 뭘 할지 모른다. 확정된 건, 방송이나 언론에 대해서는 쓰지 않는다는 것 정도. 잘 모르는 세계의 일이다.

장관은 모르는데, 차관급 자리로는 몇 번 갈 일이 있었다. 싫다고 했다. 공기업 사장 자리는 딱 한 번 정말로 고민한 적이 있었다. 일주일 고민하고, 미안하다고 했다.

장관이나 차관 한 번 하는 것하고, 50권의 책을 쓰는 것, 나는 후자가 훨씬 명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 권 한 권, 최선을 다해서 한국 사회에 쏘아 올린다. 그걸 20년을 하는 건, 명예로운 일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대장정은 둘째가 세 살 때 폐렴으로 병원에 연거푸 입원할 때부터, 초등학교 2학년 마칠 때까지, 애 보면서 하고 있다. 남들 도와달라는 거 다 도와주고, 챙길 거 다 챙기면서 한다. 내가 무슨 엄청난 일을 한다고, 남들을 희생시키는 삶을 살겠나? 그런 방식으로는 살고 싶지 않다.

50권을 채우고 나면 뭐하고 사나? 그것보다는 나머지 여섯 권에 무슨 얘기를 하나, 그게 더 내 마음이 가는 질문이고, 더 어려운 질문이다. 처음의 12권은 시작하기 전에 스토리 보드를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내가 뭘 할지, 어디로 갈지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스토리 보드가 없다. 그래서 사실은 막막하다. 지금부터 어떻게 이 대장정을 마무리해야할지, 세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한 가지는 정했다. 이제 새로 에디터를 만나고, 새로 익숙해지고, 그런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출판계가 어려워지면서 에디터들의 이동이 너무 많아졌다. 요즘 힘든 건, 매번 새로운 사람하고 익숙해지는 일이다. 이제는, 그렇게 못하겠다. 지금까지 좋은 작업을 했던 동료 에디터들이 많이 있다. ‘88만원 세대’ 작업했던 레디앙의 이광호 선배나 가장 많은 책을 같이 했던 김문식 그리고 여전히 한 권 더 해보고 싶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했던 임윤희, 좋은 기억을 가진 동료들이 많이 있다. 돌아가면서 한 권씩만 해도, 나머지 여섯 권 다 끝난다.

처음에 책 냈을 때, 장정일 선배한테 연락이 왔었다. 그 때 나에게 해준 얘기가, 10년 동안 열심히 책을 쓰면, 밥은 먹고 살게 된다..

해보니까, 진짜 그렇다. 10년쯤 지났을 때, 하루 세 끼 걱정 정도는 안 해도 되는 상황이 되었다.

내가 이런 얘기들을 공개적으로 하는 것은, 마지막 아쉬움 때문에 그렇다.

지금도 교수 되고 싶으면, 적당한 데 부탁하면 된다. 그 정도 성과는 냈다. 그렇지만 그렇게 살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건 아쉽지 않은데, 제자가 없다. 괜찮다. 그런 거 생각하고 살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내가 걸었던 길을, 전혀 새로운 방식이든 혹은 완전히 새로운 시선으로 계속 이어서 걸어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그래서 나의 대장정은 끝나지만, 누군가의 대장정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희망이 있다. 그래야 한국이 망하지 않는다. 여의도에 푹 박혀 있으면 눈이 좁아지고, 불안감이 생기게 된다. 청와대에 푹 박혀 있으면, 자신감이 너무 높아지거나 미움이 너무 많아진다. 내가 본 청와대에 있던 사람들, 특히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은 그 후에 나머지 인생을 지나친 자신감으로 살거나, 실망에 의한 미움을 안고 살아갔다. <반지의 제왕>에 오탕크의 돌을 본 사람들의 불행한 미래처럼. 그게 원래 그렇다. 2000년에 청와대에 갈 일이 있었다. 그 때도 안 갔다. 그 대신 총리실로 갔다. 청와대 갈 생각 있었으면, 그 때 벌써 갔다.

혹시 코멘터리 북에 문재인과 지냈던 몇 년 간의 얘기를 소개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도 성공적으로 대통령직을 마치고, 다음 정권도 어느 정도 안정되면 그 얘기도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주변 사람들이 묻는다. 요즘 뭐 해? 애 봐요.

물론 아이들을 보는 건 맞지만, 애만 보는 건 아니다. 나는 오늘도 내게 주어진 일을 한다. 하라고 시킨 사람은 없다. 그ㄱ렇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것 같아서 한다.

얼마 전에 동료들에게 내 마지막 꿈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있다.

너무너무 힘들 때, 노르망디 해안에서 바다를 보면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던 적이 있었다. 그 때, 죽을 때는 여기와서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말렸다. 류마티즘이 풍토병인데, 습기가 너무 많아서 노년을 보내기에 좋은 조건은 아니라고. 그래요? 그리고 넘어갔다.

나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아무도 모르는 곳, 에트르타 어느 해변가 작은 집 같은 곳에서 정말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말년을 보내고 싶다. 책 50 권의 제목 목록을 남기면, 정말이지 다른 아무 것도 더 남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난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고, 떠들썩하고 요란한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가, 여전히 가장 좋다. 가장 좋아하는 바다, 가장 좋아하는 혼자 있는 시간, 그렇게 마지막 순간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게 내 작은 개인적 소망이다. 그건 내 취향이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노년 때, 뉴욕타임즈인가, 하여간 뭐 그런 언론의 젊은 여기자가 인터뷰를 하러 갔다 보다. 이 영감쟁이가, 진짜 뭔 마음을 먹었는지, 오래 된 넥타이를 다 매고 나갔다. 그랬더니 기자가 그 넥타이를 보고 한 마디 했나보다. 그냥 그러려나, 웃고 넘어가면 될 일을 이 영감쟁이가 뭐라고 또 어마무시한 얘기를 했다.

“내가 만약 멋진 넥타이를 매고 살았다면, 지금 사람들이 아는 아이작 아시모프는 없었을 거요.”

멋지다는 생각과 지랄맞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책을 쓰기로 마음을 먹으면서 책과 영화를 봤다. 물론 린간들이 일반적으로 그럴 때 볼 것 같은 전공서적과는 전혀 다른 책들이다. 그 때 <파운데이션>을 읽었다.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아마도 몇 년간, 나는 <파운데이션>의 세상에 살고 있다. 여전히 수학을 붙잡고 있고, 계산을 하고, 기술책을 읽는다. 그리고 아직도 기술 분석을 한다. 많은 사람들이 <파운데이션>을 읽었겠지만, 그걸 보고 진짜로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내 박사 논문의 핵심 주제가 ‘foundation of foundation’이었다. 지금도 그걸 위해 책을 쓴다.

지난 주에 웹튠 제안이 왔다. 아직 초고가 다 안 끝난 책과 그 다음 책은 웹튠으로 제작하고 싶다고 한다. 아직 결정은 안 했다. 다음 주에 얘기 좀 들어보고.

50권의 책을 관통하는 정신은, 단 하나다. 명랑.. 난 심각하고 심오한 것은 싫다. 발걸음도 가볍게, 소풍 가는 것처럼, 그렇게 살고 싶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 심각한 것, 꺼져! 인상 쓰는 것, 지겨워! 내 안의 80년대, 진작에 안녕!

우리는 모두 행복해지기 위해서 산다. 그리고 서로 조금이라도 더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한다. 돈 벌려고 사는 게 아니다. 더 많은 국부를 위해서 노력하는 국가? 천박하기도 하지만, 그런 나라가 잘 사는 꼴이 되지가 않는다. 우리 자녀들의 시대는, 돈 벌려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잘난 척하지 않는 시대가 되면 좋겠다. 나의 소망이다. 그래서 이게 경제학자의 길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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