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대장정 코멘터리 북

1.
아침에 둘째 어린이집 데려다 주면서, 문득 이 시기도 언젠가는 끝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팠던 아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정말 내가 많이 놀아주어서 그런지, 하여간 애교가 엄청난다. 아침마다 배 위에 올라와서 깨운다. 이렇게 사는 시기는 얘가 초등학교 2학년 끝날 때까지, 앞으로 4년 정도 남은 것 같다. 그 뒤에는? 별로 생각해놓은 게 없다. 그리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4년 후에 내가 뭘 할지, 그런 걸 뭐하러 지금 미리 생각하나 싶다. 지금은,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는 생각 정도다.

직장 민주주의 책 준비하던 어느 일요일, 심심해서 처음으로 내가 낸 책들을 세봤다. 서른여섯 권 정도 되는 것 같다. 50 권까지는 열네 권 남았다. 대충 둘째 등하교 시키는 거 끝나는 시기랑 얼추 맞을 것 같다.

‘88만원 세대’부터 시작해서 연작으로 12권을 쓰고, 거기에 ‘경제 대장정 시리즈’라는 이름을 붙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게 끝나면 코멘터리 북을 한 권 해보고 싶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 시리즈를 마무리 짓지는 못했다. 문화 경제학까지 쓰고, 시리즈는 일단 세웠다. 문화 경제학 다음 책이 농업경제학이었는데, 그건 올해 나간다. 오랫동안 표류했던 셈이다. 그 뒤로 ‘과학과 기술의 경제학’이 있었고, 맨 마지막이 ‘방송과 언론의 경제학’이었다. 이 마지막 책은 안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3년 전에 애들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방송과 언론에 대해서 불가근 불가원이라는 입장을 정했다. 뭐 원래도 그렇지만.. 방송은 안 하고, 기자들도 일상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 외에 따로 만나지는 않기로 했다.

방송이 한국을 구원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한국 방송.. 사실 개판이다. 방송이 중요하기는 한데, 지금 구조에서 방송을 통해서 뭔가를 한다는 것은 신기루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론은? 방송 보다는 언론이 더 중요하다. 그렇지만 내가 움직여서 뭘 주도적으로 한다는 생각도 버렸다. 그냥, 도와달라고 하면 잠시 도와주고, 말기로..

그리고 그 힘을 전부 책에 쏟기로 했다. 나는 여전히 내가 사는 이 사회가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아지기를 바란다.

청와대 구조나, 현 정부의 힘 쓰는 사람들, 이걸 사실 몰랐어야 했다. 유능한 사람들이 갔으니까, 잘 하겠지, 그래도 이게 어떻게 생긴 정부인데, 적당히 염치 있게 하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살았어야 했다. 하필이면 또 유독 잘 아는 사람들이 요직에 가서..

현 정권 첫 인선 보고, 방송은 안 한다고 마음을 먹었다. 망했다. 저 구조면, 신선이 온다고 해도 살리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그 대신 책을 열심히 쓰기로 했다. 애 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좋은 책을 쓰는 정도일 거라고 생각을 했다.

마지막으로 현 정부에서 중요한 자리가 제안이 온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안 한다고 했다. 지금도 안 하고, 앞으로도 안 할 거라고 그랬다. 그냥 있는 게 좋아서가 아니라,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포자기로 살았던 시절을 다 합치면 6개월이 안 될 것 같다. 나는 한국에 대한 희망을 버린 적이 한 번도 없다. 지금 보다 나은 상태를 만들고 싶었다. 그게 내가 책을 쓰기 시작한 이유고, 지금도 책을 쓰는 이유다.

2.
정말 잘 알았던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가서 양아치 짓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기는 힘들다. 그래도 뭐라고 한 번도 안 했다. 신문에도 그런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얘기는 거의 쓰지 않았다. 그건.. 가쉽이다. 나는 가쉽으로 내게 확보된 지면 같은 것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대충 4년 후 어느 시점쯤 49번째 책을 쓸 것 같다. 50번째 책은 ‘경제 대장정 코멘터리 북’이라고 이름을 붙이려고 한다. 어느 출판사에서, 누구랑 할지는 정해진 게 없다. 제목만 정했다. 2004년부터 책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으니까 대충 20년 정도, 진짜 죽어라고 책을 쓰게 된 셈이다.

한 권도 돈을 벌기 위해서 쓴 책은 없다. 나는 그걸 ‘경제 대장정’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제 와서 뒤돌아보면, 그걸 나 혼자 한 게 아니다. 내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진짜 많이 도와주기도 했고, 그 길을 같이 걸어온 독자들이 있다. 첫 책은 1쇄 겨우 털었다. 그 때부터 내 책을 읽어준 수많은 독자들과 20년에 걸쳐 그 길을 같이 걸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먹고 살 수 있을지 없을지, 그런 건 독자들 덕분에 걱정하지 않고 살아도 좋았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비굴하게 살지는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 단 한 권도 그런 이유로 책을 쓰지는 않아도 되었다.

지금도, 이 책은 엄청 팔린다, 저 책의 판매는 우리가 보장한다, 이런 제안들 엄청 온다. 외부에서 부탁 받아서 쓴 책은 한겨레가 부탁한 직장 민주주의 책 한 권이다. 뭐, 돈 된다고 쓴 책은 아니고.

그래서 50권째 책을 내면, 잔치 한 번은 하기로 했다. 출판사나 그런 데 도움 안 받고, 그냥 내 돈으로 호텔 같은 데서 밥은 한 번 사려고 한다. 그리고 그 날은 독자들하고 술도 마시려고. 지금까지 독자들하고 술을 마신 적이 없다. 책 나오면 차 한 잔 마시는, ‘독자 티타임’을 늘 했다. 술은 많이 마시지만, 사람들하고 술로 엉키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지금도 모르는 사람하고 술을 마시는 일은 거의 없다. 성격이 더러워서 그렇다. 엄청 까칠하다.

그래도 20년간, 50권의 책을 마무리하는 날이면, 술 한 잔 해도 좋을 것 같다. 아내한테 벌써 허락도 받았다.

3.
대충 이렇게 일정을 잡고 보면, 이젠 진짜 남은 책이 얼마 없다. 지금 쓰기로 확정된 책이 일곱 권 정도 된다. 50권째 빼고 나면, 여섯 권 남는다. 그러니까 아직 주제가 확정되지 않고, 빈 칸으로 남은 게 딱 여섯 권. 누구랑, 뭘 할지 모른다. 확정된 건, 방송이나 언론에 대해서는 쓰지 않는다는 것 정도. 잘 모르는 세계의 일이다.

장관은 모르는데, 차관급 자리로는 몇 번 갈 일이 있었다. 싫다고 했다. 공기업 사장 자리는 딱 한 번 정말로 고민한 적이 있었다. 일주일 고민하고, 미안하다고 했다.

장관이나 차관 한 번 하는 것하고, 50권의 책을 쓰는 것, 나는 후자가 훨씬 명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 권 한 권, 최선을 다해서 한국 사회에 쏘아 올린다. 그걸 20년을 하는 건, 명예로운 일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대장정은 둘째가 세 살 때 폐렴으로 병원에 연거푸 입원할 때부터, 초등학교 2학년 마칠 때까지, 애 보면서 하고 있다. 남들 도와달라는 거 다 도와주고, 챙길 거 다 챙기면서 한다. 내가 무슨 엄청난 일을 한다고, 남들을 희생시키는 삶을 살겠나? 그런 방식으로는 살고 싶지 않다.

50권을 채우고 나면 뭐하고 사나? 그것보다는 나머지 여섯 권에 무슨 얘기를 하나, 그게 더 내 마음이 가는 질문이고, 더 어려운 질문이다. 처음의 12권은 시작하기 전에 스토리 보드를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내가 뭘 할지, 어디로 갈지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스토리 보드가 없다. 그래서 사실은 막막하다. 지금부터 어떻게 이 대장정을 마무리해야할지, 세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한 가지는 정했다. 이제 새로 에디터를 만나고, 새로 익숙해지고, 그런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출판계가 어려워지면서 에디터들의 이동이 너무 많아졌다. 요즘 힘든 건, 매번 새로운 사람하고 익숙해지는 일이다. 이제는, 그렇게 못하겠다. 지금까지 좋은 작업을 했던 동료 에디터들이 많이 있다. ‘88만원 세대’ 작업했던 레디앙의 이광호 선배나 가장 많은 책을 같이 했던 김문식 그리고 여전히 한 권 더 해보고 싶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했던 임윤희, 좋은 기억을 가진 동료들이 많이 있다. 돌아가면서 한 권씩만 해도, 나머지 여섯 권 다 끝난다.

처음에 책 냈을 때, 장정일 선배한테 연락이 왔었다. 그 때 나에게 해준 얘기가, 10년 동안 열심히 책을 쓰면, 밥은 먹고 살게 된다..

해보니까, 진짜 그렇다. 10년쯤 지났을 때, 하루 세 끼 걱정 정도는 안 해도 되는 상황이 되었다.

내가 이런 얘기들을 공개적으로 하는 것은, 마지막 아쉬움 때문에 그렇다.

지금도 교수 되고 싶으면, 적당한 데 부탁하면 된다. 그 정도 성과는 냈다. 그렇지만 그렇게 살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건 아쉽지 않은데, 제자가 없다. 괜찮다. 그런 거 생각하고 살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내가 걸었던 길을, 전혀 새로운 방식이든 혹은 완전히 새로운 시선으로 계속 이어서 걸어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그래서 나의 대장정은 끝나지만, 누군가의 대장정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희망이 있다. 그래야 한국이 망하지 않는다. 여의도에 푹 박혀 있으면 눈이 좁아지고, 불안감이 생기게 된다. 청와대에 푹 박혀 있으면, 자신감이 너무 높아지거나 미움이 너무 많아진다. 내가 본 청와대에 있던 사람들, 특히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은 그 후에 나머지 인생을 지나친 자신감으로 살거나, 실망에 의한 미움을 안고 살아갔다. <반지의 제왕>에 오탕크의 돌을 본 사람들의 불행한 미래처럼. 그게 원래 그렇다. 2000년에 청와대에 갈 일이 있었다. 그 때도 안 갔다. 그 대신 총리실로 갔다. 청와대 갈 생각 있었으면, 그 때 벌써 갔다.

혹시 코멘터리 북에 문재인과 지냈던 몇 년 간의 얘기를 소개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도 성공적으로 대통령직을 마치고, 다음 정권도 어느 정도 안정되면 그 얘기도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주변 사람들이 묻는다. 요즘 뭐 해? 애 봐요.

물론 아이들을 보는 건 맞지만, 애만 보는 건 아니다. 나는 오늘도 내게 주어진 일을 한다. 하라고 시킨 사람은 없다. 그ㄱ렇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것 같아서 한다.

얼마 전에 동료들에게 내 마지막 꿈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있다.

너무너무 힘들 때, 노르망디 해안에서 바다를 보면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던 적이 있었다. 그 때, 죽을 때는 여기와서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말렸다. 류마티즘이 풍토병인데, 습기가 너무 많아서 노년을 보내기에 좋은 조건은 아니라고. 그래요? 그리고 넘어갔다.

나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아무도 모르는 곳, 에트르타 어느 해변가 작은 집 같은 곳에서 정말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말년을 보내고 싶다. 책 50 권의 제목 목록을 남기면, 정말이지 다른 아무 것도 더 남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난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고, 떠들썩하고 요란한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가, 여전히 가장 좋다. 가장 좋아하는 바다, 가장 좋아하는 혼자 있는 시간, 그렇게 마지막 순간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게 내 작은 개인적 소망이다. 그건 내 취향이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노년 때, 뉴욕타임즈인가, 하여간 뭐 그런 언론의 젊은 여기자가 인터뷰를 하러 갔다 보다. 이 영감쟁이가, 진짜 뭔 마음을 먹었는지, 오래 된 넥타이를 다 매고 나갔다. 그랬더니 기자가 그 넥타이를 보고 한 마디 했나보다. 그냥 그러려나, 웃고 넘어가면 될 일을 이 영감쟁이가 뭐라고 또 어마무시한 얘기를 했다.

“내가 만약 멋진 넥타이를 매고 살았다면, 지금 사람들이 아는 아이작 아시모프는 없었을 거요.”

멋지다는 생각과 지랄맞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책을 쓰기로 마음을 먹으면서 책과 영화를 봤다. 물론 린간들이 일반적으로 그럴 때 볼 것 같은 전공서적과는 전혀 다른 책들이다. 그 때 <파운데이션>을 읽었다.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아마도 몇 년간, 나는 <파운데이션>의 세상에 살고 있다. 여전히 수학을 붙잡고 있고, 계산을 하고, 기술책을 읽는다. 그리고 아직도 기술 분석을 한다. 많은 사람들이 <파운데이션>을 읽었겠지만, 그걸 보고 진짜로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내 박사 논문의 핵심 주제가 ‘foundation of foundation’이었다. 지금도 그걸 위해 책을 쓴다.

지난 주에 웹튠 제안이 왔다. 아직 초고가 다 안 끝난 책과 그 다음 책은 웹튠으로 제작하고 싶다고 한다. 아직 결정은 안 했다. 다음 주에 얘기 좀 들어보고.

50권의 책을 관통하는 정신은, 단 하나다. 명랑.. 난 심각하고 심오한 것은 싫다. 발걸음도 가볍게, 소풍 가는 것처럼, 그렇게 살고 싶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 심각한 것, 꺼져! 인상 쓰는 것, 지겨워! 내 안의 80년대, 진작에 안녕!

우리는 모두 행복해지기 위해서 산다. 그리고 서로 조금이라도 더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한다. 돈 벌려고 사는 게 아니다. 더 많은 국부를 위해서 노력하는 국가? 천박하기도 하지만, 그런 나라가 잘 사는 꼴이 되지가 않는다. 우리 자녀들의 시대는, 돈 벌려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잘난 척하지 않는 시대가 되면 좋겠다. 나의 소망이다. 그래서 이게 경제학자의 길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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