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올 봄에 맞춰서 진보 진영에서 오고가는 정책에 관한 것들을 꼭지별로 여럿이 나누어서 쓰는 정책집 같은 책을 낼 생각이 있었다. 흐름상, 올봄에는 그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공보 논리가 아니라 정책 논리로 한국의 논쟁이 형성되는 게 유의미하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각자 글 하나씩 쓰고 책을 만드는 것을 주도하지도 않았었는데, 지금은 별로 그런 흐름이 없기도 하고.

사회과학 시장이 워낙 죽다보니까, 예전 같으면 정책 하나 혹은 정책 몇 개를 모아서 분석하는 책들이 나왔을 법한 시간인데.. 요즘은 그런 흐름 자체가 거의 없다. 나도 내봐야 안 팔릴 책을 뭘 그렇게 붙잡고 궁상을 떠느냐고 놀림을 받는 처지인데, 다른 사람들이라고 안 그렇겠느냐 싶다.

출판사도 정했고, 에디터도 정했는데, 실제로 추진하지는 못했다. 큰 애가 초등학교 입학하는 게 그렇게 큰 일일 줄은 나도 미처 몰랐다. 막상 초등학교 입학 준비 시작하는 데, 우와..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글 쓸 저자들 일일이 만나서 부탁하고, 글 받고, 전체적인 맥락에서 조율하고..

원래 내 꿈이 이런 일을 하는 거였다. 프랑스의 갈리마르나 seuil 같은 어마무시하게 유명한 출판사에 보니까, 시리즈별로 그걸 주관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시리즈를 주관하는 사람이 본인도 엄청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또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다. 뭐, 그렇다고 일반인들이 아는 건 아니지만, 무척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형편이 그렇게 안 되어서, 누군가에게 책을 쓰게 하는 일들을 잘 하지는 못했다.그래서 누구 시키지는 못하고, 그냥 내가 나에게 시킨다..

선거라는 게 그렇다. 선거에는 온갖 사회적 문제들이 다 올라온다. 계급적인 일은 물론이고, 계층 그리고 문화적 충돌도 다 올라온다. 그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원래 그러라고 선거 하는 것 아니겠나?

그 틈을 비집고 정책들이 들어온다. 계급이나 계층에 관한 것이 주체에 관한 일이라면, 정책은 수단에 관한 일이다. 그리고 이 수단은, 안 그럴 것 같지만 유행이라는 게 있다. 각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따라서 유행이 바뀌기도 하고, 세계적인 흐름 같은 게 있다. 그래서 공약의 흐름이 매번 바뀌게 되는 것이다. 지난 번에 못한 걸 이번에 다시, 요행이 세계적 유행이 그쪽으로 가면 다행이지만, 그럴 보장은 없다.

우리가 편의상 진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역대로 이런 공약에 강했다. 빨갱이 중의 빨갱이로 몰려서 결국은 처형당한 조봉암도 토지개혁이라는 변화를 만들었다. 보수는? 걔들은 정책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 자체가 없었다.

그냥 미군정으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아서, 그냥 일본하던 것의 기본에 미국 꺼 적당히 하는 척하면 그만인데, 뭔 정책이 필요할까? 우리나라 보수들이 여전히 정책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는 것은, 애당초 그게 그들에게 절체절명의 과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공, 멸공, 공산당만 잘 때려잡으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방첩 검사들이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지도자 행세하는 전통이 생겨났다. 그런데 정책은 뭐? 애당초 필요가 없는 집단이다.

진보는 좀 다르다. DJ가 집권하고 제일 먼저 형성시킨 법안이 국민기초생활보장법, 한국 복지의 기본법을 만들었다. 그 전에도 복지는 있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도입된 것이라서 기본법의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했다.

구조가 이렇다..

그래서 속칭 진보 쪽에서 책을 통하든, 아니면 그 뭐를 통하든, 정책적 의제를 제시하는 일을 멈추면, 한국은 퇴행으로 향한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한국은 그렇게 발전해 온 나라다.

그래서 정치가 만들어진 물건을 파는 행위라면, 정책을 그 물건을 만드는 공장장 같은 역할이다. 팔 물건이 없으면, 이제는 싸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내년 총선을 가를 분기점이 올 봄에서 올 여름쯤일 것 같다.

각자 만든 물건을 전시하는 쇼케이스 같은 게 선거가 될 것이냐, 아니면 물건은 없고 사람만 파는 인물 전시장이 될 것이냐?

황교안이 무슨 물건을 만들어서 내년 총선에 보일 것인가? 걔네는 신상 같은 거 없다. 만드는 놈이 없는데, 팔 게 뭐가 있겠나?

박근혜 때로 가거나, 좀 심하면 mb 때로 복귀하는 것을 신상이라고 껍딱만 바꾸어서 들고 나갈 것이다. 그리고 '누구누구' 죽이자, 이렇게 선거를 치룰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 편에서는 뭐라도 좀 신상을 내놓을 게 있느냐? 구상품의 기능강화형, 그걸 버전 2, 버전 3, 이렇게 껍딱 개비하는 게 제일 편하다. 물론 거기에도 신기능을 넣는 진짜 버전 체인지가 있고, 기능 변화는 없고 순수하게 껍딱 즉 이름만 바꾸는.. 아니, 이름만 바꿔도 좀 낳다, 고민은 한 거니까. 과거 상품 그냥 그대로 들고 갈 확률이 높다.

그 분기점이 올 봄에서, 올 여름 사이일 것 같다. 앞으로 나갈 것이냐, 그냥 뒤로 갈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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