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학습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진지하게 해본다.

예전에 수학경시대회라는 게 있었다. 학교에서 문과, 이과 한 명씩 대회에 나갔다. 절차상, 대회에 나갈 사람은 그냥 학교에서 시험 봐서 뽑았다. 3년 내내 이 대회에 나갔었다. 수학을 늘 1등했던 건 아닌데, 이상하게 그 선발대회에서만은 문제를 잘 풀었다.

고3 때, 수학 선생님이 나를 아주 얄밉게 생각했다. 맨날 팽팽 놀다가, 경시대회 때만 되면 시험을 잘 보는.. "니가 안 되기를 바랬다." 대놓고 뭐라고 그랬다.

그 대회에 같이 나가던 이과 쪽 친구가 있었다. 최근에는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인생의 절친 정도 된다. 공부를 기깔나게 잘 했다. 서울대 물리학과 가서, 그렇게 박사도 되었다. 그런데 사는 게 좀 버거웠나 보다. 다시 학교 가서 한의사 되어서 한약방 냈다. 공부가 다가 아니다..

하여간 그렇게 3년간 수학 경시대회를 나갔는데.. 이게 기억에 남는 건, 그 때 나왔던 문제가 너무너무 어려워서 그렇다. 그런 경시 대회와는 좀 다른 게 백일장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백일장 나간 이후로, 이것도 고3까지 매회 대회에 나갔다. 6학년 때 전국 대회에서 장원을 한 적이 있었다. 중학교 때는 반항의 시대라서, 학교에서 대회를 내보내 주지를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다시 나가게 되었다. 상은 탈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었다. 고3 때인가, 논술대회 같은 데에서 상 탄 게 아마 마지막 상이었던 것 같다.

백일장은 놀러가는 날이다. 대충 후다닥 쓰고 놀았다. 정성 들여 쓴다고 상 타는 것도 아니다. 내 기억으로는, 순전히 그 날의 운이다. 제일 큰 상 탈 때, 김포 어딘가에 있는 학교에서 시합을 했던 기억이다. 방학 때였는데, 책상 서랍 안에 누군가 두고 간 삼양라면이 있었다. 이게 왠 떡이냐, 요즘 식으로 하면 뿌셔뿌셔, 생라면 먹는 게 그렇게 재밌었다. 서랍 속에서 라면 뽀셔 먹으면서 쓰는 둥 마는 둥.. 쓰는 거에는 별로 관심도 없었다. 납북된, 한 번도 보지 못한 큰외삼촌과 이제는 돌아가신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 고2 때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얘기를 썼다. 사실 라면 먹느라 쓰는 데 별로 관심도 없었다. 그게 아마 내가 탄 백일장 상 중에서는 제일 큰 상이었던 것 같다.

수학 경시대회는 좀 달랐다. 우와.. 한 문제도 제대로 못 풀겠다. 이게, 무슨 미분이나 적분 아니면 확률이나 통계 같은 게 나와서 어려운 게 아니다. 기하학 문제들이 특히 어려웠는데, 더럽게 꼬아놓고, 합쳐놓아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하면 절대로 해가 나오지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동경대 본고사 문제, 그런 데서 가지고 온 거 아니겠냐.. 진짜로 듣도보도 못한 어려운 문제였다. 몇 문제 못 풀었다.

그 시절에 전국이 같이 보던 평가시험 같은 게 있었다. 수학은 다 맞거나, 하나 틀리거나 그랬다. 수학 점수만으로는 전국 20등 밑으로 내려간 적이 거의 없던..

그래도 거의 풀기가 어려운.. 어렵다기 보다는 더러운 문제였다. 수학 실력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도대체 어떤 놈이 이런 문제를 풀고, 입상도 하는 거야?

나중에 들어보니까, 우리만 그냥 대회에 나갔지, 상 타는 학교들은 미리 훈련도 좀 하고 그런다고..

우와.. 사실 약간 충격 받았다. 그래서 기하학 공부를 따로 좀 했다. 물론 그래도 경시대회에서 성적이 올라가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 때 기하학을 좀 체계적으로 공부를 해서, 나중에 대학 가서 엄청난 도움을 받기는 했다. 경제학과 수학 정도야.. 문과쟁이 수학이 더 거기서 거기지, 뭐..

요즘 대학이 이런 대회에 나가서 수상한 걸로 평가가 된다고 하는데..

나는 반대다. 그런 대회용 문제 푸는 게, 사실 진정한 의미의 '실력'과는 별 상관도 없다. 그리고 그걸 무슨 사교육에서 처리하는 것도 더 이상하다.

아마 요즘처럼 대회 나가고 그런 게 대학에 반영된다고 했으면, 나 같은 경우는 대회 근처에도 못 가봤을 것 같다. 수학을 공부하는 것과 시합용 문제 푸는 게 좀 다르다. 기하학 증명 아무리 잘 이해해도, 더럽게 꼬아놓은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그건, 풀어보는 수밖에 없다. 주어진 시간 안에 풀려면, 표준 해를 먼저 보는 수밖에 없다.

그런 희한한 기하학 문제 몇 개 푼다고 해도, 선형대수 앞에 서면 말짱 다 꽝이다. 집합론, 토폴로지 등 그 뒤에 나오는 과정들은 기본이 그야말로 전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고등학교까지 죽어라고 푼 문제들, 대학 가면 아무 쓸 데도 없다.

된장. 대학교 가서 들었던 첫 번째 경제학 수업이 나중에 국토부 장관한 서승환 선생 수업이었다. 그 때 편미분을 처음 보았다. 환장하겠네, 저건 또 뭐여? 웅성웅성.

학생들이 헤매니까 딱 편미분 정의 3줄 써주고, 이제 알았죠? 그냥 진도 나갔다. 그 양반 수업 참 까칠하게 하는. 경제학이 뭐고, 뭐하는 데 쓰고.. 이번 학기 수업은.. 이딴 거 없다. 시작하자마자 변수 몇 개 정의하고, 바로 문제 풀기 시작하던. (그 땐 몰랐는데, 운동권 될 얘들이, 경제는 뭐고, 국가는 뭐고, 정의는 뭐고, 이딴 말 하지 못하도록 많은 수업이 그냥 문제부터 풀고 시작하던..)

선행학습이 의미가 있게 대학입시가 설계되는 것, 그건 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배워두면 그래도 나중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시합용 문제풀이, 일생에 아무 도움 안 된다. 수학도 마찬가지다.

내 주변에 인생의 깊은 나락에서 어떻게든 나오려고 헤매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아줌마들이 세상 살기, 진짜 너무 힘들구나.. 그것도 순수학문을 할수록 더욱 더. 이거 더럽네, 진짜.. 그 중 두 명이 수학박사다. 둘 다 수학 겁나게 잘 한다. 물경, 미국의 엄청 좋은 학교에서 수학 박사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그런 게 아무 도움 안 된다. 아줌마면..

고등학교 때에는 인생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런 걸 더 많이 할 수 있도록 삶이 설계될 수 있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든다.

필요하다면, 경시대회를 싹 다 없애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 게 인생에 도움을 주나? 아무 도움 안 준다.

삶이란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다. 책도 좀 보고, 영화도 좀 보고, 여행도 좀 다니고, 단체활동도 좀 하고. 그런 게 가능하도록 고등학생의 삶이 디자인되어야 한다.

그 사람의 삶을 놓고 교육과정이나 평가과정이 디자인되어야지, 하던 게 습관이라고 그냥 하는 거, 21세기적이지 않다.

(다음 주에 조희연 선생이랑 식사하기로 약속이 잡혔다. 뭔 얘기를 해줘야 하나, 잠시 생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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