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소 건물 2층 사무실에 한국 진보정당 초창기 시절의 멤버들이 모여 있었다. 그 시절 공식적인 상근자는 이재영과 지금은 20대 국회의원이 된 노회찬, 단 둘이었다. 내가 이사간 집은 마당이 있는 전셋집이었다. 나와 이재영 그리고 지금만큼 유명해지기 전의 노회찬, 이렇게 셋이 그 마당에서 삼겹살을 구워먹는 날이 있다. '불판'으로 약간 유명해진 노회찬이 그날은 고기 굽기를 담당했다. 그는 고기를 구울 줄 아는 남자였다. 그 두 사람이 아직 너무너무 아름답던, 찬란한 어느 하루의 오후였다. 햇살도 더없이 좋았다. 어쩌면 내 삶에서 그날이 가장 행복하고 화사한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내 생의 단 하루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그날을 돌려달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독자 한 분이 50대 에세이의 한 구절을 나에게 보내주었다. 겨울, 노회찬과 삼겹살 구워먹은 날을 내 인생의 가장 화사한 하루라고 썼었다. 이걸 쓴지 6개월도 지나지 않았는데, 노회찬과 다시는 마당에서 삼겹살 구워 먹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걸 쓸 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래를 향한 생각이 아니라, 과거를 향한 생각.. 진짜로 난 그 날이 가장 내 삶의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생각했다.

좋은 기억은 아니다. 가끔 나는 돗자리 깔라는 소리 들을 정도로,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흠칫하게 맞추는 경우가 있다. 오후에는 약속이 있어서 나가봐야 하는데, 자꾸 또 눈물이 나려고 한다. 내 에세이집 한 구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의 기억으로 노회찬을 남겨놓아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정의로운 사람, 강인한 사람, 유능한 사람, 노회찬의 여러 얼굴이다. 나는 노회찬이 크게 웃고, 행복해하던 순간의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끼리 모이면, 정치 얘기나 사회 얘기, 그런 얘기들은 하지 않았다. 애 낳아라, 빨리 낳아라, 안 낳으면 나처럼 된다, 그런 얘기들을 많이 했다. 이제 나는 아이 둘의 아빠다. 애 빨리 낳아야 한다고 달달 볶던 사람 중의 한 명이 노회찬이었다. 그 집에서 큰 애가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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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나와 달리 잠을 잘 자는 편이다. 눕기만 하면 바로 잠 드는. 어제는 한 시까지 잠을 못 이루었다. 가슴이 뛴다고 한다. 아내만 그랬겠나. 큰 일 치룬 사람들처럼 다들 심장 박동수가 높아졌을 것 같다. 그래도 놀랍고 슬픈 가슴을 진정시키고 또 하루를 살아야 한다. 악착같이 먹고, 힘을 더 내서, 노회찬이 보고 싶었던 그 한국의 모습을 꼭 만들어야 한다. 나쁜 놈들이 뒤에서 웃고, 뭔가 바꾸려고 했던 사람들은 뒤에서 우는, 이 더러운 꼬라지를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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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을 마지막으로 본 건 2년 전 총선 직전 여의도의 어느 카페였다. 그가 먼저 차 한 잔 하자고 연락했다. 나는 늘 그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같이 고민해주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서울에서 창원으로 내려가는 결정을 이미 내렸었다. 그 선거는 생각보다 복잡했다. 안철수가 그의 지역구를 빈집털이 한 후, 어쩔 수 없이 지방으로 내려갔다.

 

나는 그가 걱정스러웠는데, 그는 내 걱정만 했다. 좀 미안했다. 나는 누가 걱정해주지 않아도 먹고 살고, 그냥 버티는 거, 이런 거는 잘 한다. 그 때 그는 자기가 제대로 된 자리를 한 번 만들테니까, 나중에 꼭 한 번 같이 일하자고 했었다. 나는 그가 도와달라고 하면 언제든지 도와드린다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울 시장 선거에서 나는 노회찬의 후원회장을 했었다. 뒤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자리를 주선하거나 하는, 좀 드러나지 않게 움직여야 하는 일들을 주로 해주었다. 그 때 노회찬의 선거 조직을 관리하던 사람이 오재영이었다. 오재영은 작년에 과로로 죽었다.

 

나에게는 오래된 꿈이 있었다. 노회찬을 대통령으로, 이런 거창한 것은 아니다. 책 한 권을 제대로 쓰고, 그 책을 버스 광고를 하는 게 꿈이었다. 그래서 노회찬 얼굴을 단 버스가 시내를 질주하는 것을 보는 게 내 꿈이었다.

 

<이상한 나라의 인민노련>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었다. 역시 인민노련이었던 이재영의 눈으로, 그와 같이 독재와 싸웠던 노회찬의 젊은 시절이 삶을 그리는 것, 그런 책을 쓰고 싶었다.

 

50대 에세이를 쓰면서, 그 시절의 기억이 났다. 책을 쓰는 것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노회찬, 이재영 등등, 그런 사람들이 지난 번 우리 집 마당에 모였다. 그 때 삼겹살을 노회찬이 도맡아서 구웠다. 나는 그 순간을 내 인생에 가장 화려한 순간으로 기억했다. 날이 좋았던, 오늘 같은 여름날이었다. 그 때 우리 부부의 친구였던 노르웨이 부부를 노회찬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후에 노르웨이 방문을 하면서, 그 노르웨이 부부의 부모, 친척 등 그야말로 노르웨이 사회당 계열의 교사들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들의 친구는, 이렇게 겹치고 저렇게 겹치고, 그렇게 몇 년을 지냈다. 그 순간은 내 인생에서도 가장 찬란하게 아름다웠던 순간으로 기억이 났다.

 

그 때 느낌이 좀 싸했다. 내 인생을 돌아보면서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순간을 회상해보자.. 머리에 노회찬과 이재영 등 친구들과 삼겹살 굽던 순간의 기억이. 올 1월쯤의 일인 것 같다. 왠지, 그 순간이 생각이 났다.

 

이재영이 먼저 죽었다. 암이었다. 이재영이 죽고, 너무 오래, 너무 길게 울었다. 아마도 그 때 나는 눈물이 말라버린 것 같다. 이재영이 죽었을 때, 조금 더 바지런을 떨어서 <이상한 나라의 인민노련> 작업을 진행하지 못한 것을 너무너무 후회했다. 이제 그 얘기를 들려줄 사람이 없다. 이재영이 떠난 뒤, 나는 몇 년을 울었다. 살아도 사는 것 같지가 않았다.

 

오재영은 작년에 죽었다. 민주노동당 시절의 두 재영이가 그렇게 모두 먼저 떠나갔다.

 

그리고 오늘, 노회찬이 죽었다. 우린 모두 언젠가 죽는다. 그렇지만 이런 방식의 죽음을 생각해본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다. 최소한 노회찬과 20년은 더 가끔 만나고, 가끔 시덥잖은 얘기하고, 허랑방탕하게 세상을 좀 살아보자는 농담하고그럴 줄 알았다.

 

노회찬을 위해서 공들여 쓴 글이 하나 있다. 꾸리에에서 노회찬에 관한 책을 내자고 해서, 무조건 나도 돕는다고 했다. 젊은 시절의 노회찬에 대한 평전을 꼭 쓰고 싶었는데, 이제는 노회찬에 대한 짧은 글 하나 밖에 남은 게 없다.

 

내가 30대에 만났던, 한국 진보정치를 대표하는 몇 사람들은, 정말로 너무너무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사람을 적게 만나지는 않았다. 극우부터 극좌까지, 정치라면 당연히 아나키즘이어야 한다는 극단에 있는 사람들까지, 다양하게 만났다. 2004년 이전, 민주노동당이 아직 원외 정당이던 시절, 그 앞에 서 있는 몇몇 사람들은 너무너무 찬란하고, 소박하지만 후광이 서린, 그런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과 몇 년을 같이 보냈다.

 

노회찬그가 떠났다. 생각해본 적도 없는 시기에, 떠올려 보지도 못한 방법으로 떠났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시대는 갔는가? 내가 봤던 그 아름다운 사람들은 이제 한 명도 이 땅에 남아있지 않다. 대충 살고, 적당히 하고, 술만 열심히 마시던 나만 혼자 살아남았다. 나는 그들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그들처럼 열심히 살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들을 기억하면서, 가끔 혼자 슬퍼하는 그런 바보 같은 일만 하게 될 것 같다.

 

너무너무 아름답고, 너무너무 찬란했던 기억만을 남겨놓고 노회찬, 그가 갔다.

 

남은 사람들은 이제 어쩔거냐지나치게 아름다운 사람들, 가끔은 무심하고, 때때로 무책임하다.

 

노회찬, 그가 도착할 천국에는 잔디밭과 삼겹살 불판 그리고 그와 같이했던 동지들이 있을 것 같다. 아름답게 들풀이 피고, 친구들의 수다소리 가득한 그곳, 그곳에서 영원히 지낼 수 있기를 바란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붉은 돼지>에 나오는 대사다.

 

좋은 놈들은 이미 다 죽었어…”

 

진짜 그렇게 되었다. 그들이 지금쯤 노회찬의 천국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하고 웃고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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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투신 자살.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숨이 턱 막힌다. 예전 집 마당에서 같이 삼겹살 구워먹던 친구들이.. 이제 한 명도 남지 않았다. 너무 놀라서 애도할 방법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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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애는 오늘도 나한테 혼났다. 누워서 책 보다가. 습관이란다. 앞으로 한 번만 더 누워서 책 보면 다 치우고, 책 안 보기로 약속했다.

사실 내가 책 보는 거 혼낼 형편은 아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스탠드도 없었고, 조명이 너무 안 좋았다. 큰 애 나이 때에는 이미 안경을 꼈다. 다섯 살 때부터 책 너무 많이 읽었다.

원래 하고 싶었던 직업은 공군 조종사였다. 공사가고 싶었는데, 시력이 택도 없었다. 지금도 해보고 싶었던 유일한 일은 전투기 조종사. 근처에도 못 가봤다.

나중에 나이를 먹고 헬기 조종을 배울 기회가 생겼다. 진짜로 하고 싶었는데, 교정 전 시력이 택도 없었다. 큰 애랑 알고 지내던 일본 아동이 있었는데, 작은 아빠가 일본 자위대 헬기 조종사였다. 나중에 퇴역해서 그냥 상업 헬기 운전한다. 누군가에게 부럽다는 생각을 거의 해본 적이 없는데, 그건 부러웠다.

헬기 조정하는 기장 몇 명을 살짝 안다.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비행기도 안 돼, 헬기도 안 돼.. 배 항해사를 하고 싶었던 것은 몇 년 전의 일이다. 방황하던 아내가 배 타는 일로 완전히 전업을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 같이 준비해서 항해사 자격증을 딸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진짜로 해경 사무실에 가서 필요한 절차 같은 거 알아보기도 했다.

<내릴 수 없는 배>에는, 항해사 자격증과 해양사 공부하던 시절의 경험이 조금 관련이 있던.

돌아보면 유일하게 직업으로서 하고 싶었던 것이 공군 조정사였던 것 같다. 그걸 포기하고 난 다음..

난 한 번도 내가 하는 것을 직업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고, 이게 천직이다, 이런 생각도 잘 안 들었다. 그냥 되는 대로 하고, 밥이나 먹고 살면 된다.. 요런 생각으로 평생 산 것 같다.

다섯 살, 여섯 살, 나는 책을 너무 많이 읽었다. 어른들은 그 때 좋아했지만, 나는 정말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그 바람에 평생 못하게 되었던..

아들에게 말했다. 책은 나이 먹고 봐도 괜찮아, 나중에 봐도 되고.

내가 일곱 살 때, 나에게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알아서 책을 좀 그만보고, 시력을 관리하기에는, 나는 너무 아무 것도 몰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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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책을 4장 구조로 썼고, 부를 나누지는 않았다. 한 줄로 얘기를 끌어나가는 것을 좋아해서. 88만원 세대 때에는 부를 나눴었다.

직장 민주주의도 부를 나누었다. 1부, 2부.. (요즘 3부 리그라는 용어를 많이 쓰다보니, 내 입에 부가 자꾸 붙어서 그런가..)

1부. 직장 민주주의가 뭐여?
2부. 민주주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라

일단은 요렇게 다시 나누었다. 1부 막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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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리그..

책에 대한 단상 2018. 7. 20. 10:10

50대 에세이에서 사회과학 저자를 3부 리그로 표현했었다. 그리고 나는 진짜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관객은 별로 없어도 엄연한 현역이다. 매 게임, 최선을 다 한다. 묵묵히 그냥 할 일을 다 한다. 최선을 다 해서. 아프거나 힘들면, 쉰다. 여긴 1부 리그가 아니다. 대체 선수, 그런 건 없다. 잠시 쉰다고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이 안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역사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매번의 등판이 기쁘다.

올해 아주 덥다. 내년에는 출간 일정을 잘 조절해서 무더운 7~8월 쉬고, 아주 추운 1~2월 쉬고,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이 있다. 그외에는, 별 불만 없다.

그래서 친구처럼 지내던 양반들, 요즘 조금씩 찾아서 차 한 잔이라도 하는 중이다. 운이 잘 맞으면 점심 같이 먹고.

나는 77학번들하고 같이 공부했다. 하다보니 그랬다. 실제로 현업 시절에도 그 사람들하고 일을 많이 했다. 그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이 인생의 친구들인 셈이다. 이제는 대부분 은퇴하는 나이들이다. 그래도 한살이라도 덜 먹은 내가 찾아가서 차라도 한 잔.

책이란 게 묘하다. 사회과학은 특히 묘하다. 했던 얘기 다시 안 하고, 다루었던 주제는 다시 안 다루려고 한다. 그러면 이제 거의 다 써서 손 털고, 판 접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써야될 게 더 많아진다. 이것저것 해달라고 의뢰 오는 것도 많다. 점점 는다. 왜 이런지 생각해봤다.

획일성 때문이라는 게 내가 내린 임시 결론이다. 팔리는 거, 되는 거, 유행인 거, 이런 데 다 몰려 있으니까 그 흐름에서 조금만 빗겨간 것들이 다 황무지다. 물론 그게 3부 리그의 정의이기도 하다. 유행을 빗겨난 것, 인기 없는 것 그러나 의미도 없지는 않는 것.

직장 민주주의, 이런 걸 정면으로 다룬 책이 한 권도 없을지는 몰랐다. 정색하고 도서관을 분석한 책, 이런 게 없을지도 몰랐다. 농업경제학, 아무도 이런 건 이제 하려고 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이런 주제들이 수 십개가 넘는다.

여기가 내가 게임하는 3부 리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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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력?

책에 대한 단상 2018. 7. 19. 14:09

오늘 점심은 친한 기자랑 밥을 먹었다. 몇 년 동안 못 본 사람들, 요즘 약간 한가해져서 찾아보는 중이다. 하다 보니까 주로 아줌마들하고 주로 밥을 먹게 된다. 진짜 내 주변에 이렇게 여성 동료들이 많았었나? 나도 놀라게 된다. 신문 칼럼 얘기가 나왔다.

"그래도 좀 쓰는 게 영향력 유지에 도움이 되지가 않나요?"

"글쎄요. 책에서 나오는 영향력 말고는 별로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영향력이라.. 몇 년만에 들어보는 단어인 것 같다. 그런 방식으로 생각해본지 너무 오래되는 일이라서. 예전에 시민단체의 싸움에 앞장 설 때는 지면 하나, 방송 하나, 그런 게 너무 중요했다. 그래서 나도 죽기 살리고 버텼던 시절이 있다. 그런데 지금도 그럴까?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제 과거를 들여다보는 일은 별로 재미 없다. 미래에 대한 얘기, 다른 미래로 가는 방법, 이런 것들이 재밌다. 그걸 위해서 지금 현재를 다시 들여다보는 것이고. 현실에서의 영향력, 별로 재미 없는 방식이다.

내 책을 읽을 독자들과 같이 고민하면서 미래에 대한 얘기를 써나가는 지금의 방식, 나는 딱 좋다. 영향력, 그딴 건 필요없고. 2~3년이든, 4~5년이든, 그 시기에 필요할 것들을 지금 만드는 일, 충분히 보람 있고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나도 이제 50이다. 예전처럼 밤을 새고 전국을 누비면서 현장을 뛰어다는 일, 이제는 그렇게 못한다.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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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민주주의, 초반부의 셋업은 거의 끝나가고, 중반부로 넘어가기 위한 꺾기 들어가는 중이다. 이 책은 내 인생작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한국의 사회과학 저자는 또 다른 분야 사람이 느끼기 어려운 보람이 있다. 돈으로 생기는 만족감과는 좀 다른 종류의 느낌이다.

작년에 누군가 그런 얘기를 했다. 나는 그냥 차분히 내가 하던 일을 하는 게 가장 큰 애국일 거라고. 그럴지도 모른다. 그냥 나는 내가 하는 속도대로, 내가 하던 리듬대로, 새로운 생각을 계속 만드는 게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게 사회에 대한 기여도 가장 높은 것 같다.

이대호가 그런 얘기 했었다. "나는 조선의 4번 타자다." 나도 언젠가 그런 얘기 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나는 조선의 사회과학 저자다." 아직은 좀 아닌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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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많은 경우 "자기 말고는 다 바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남자들일수록 그렇고, 나이가 많을수록 그렇고, 잘 살수록 그렇고, 좋은 학교 나왔을수록 그렇다. 가끔은 다른 사람들이 다 맞고 자기만 혼자 틀렸을 수도 있다고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직장을 둘러싼 게임 유형을 분류하다보니까, "나 말고는 다 바보" 현상이 회사 안에서 종종 보이는 것 같다. 사례 분석하다 문득, 그렇게 잘 나신 분이 왜 여기서 이 일을 하고 계실까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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