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에 있는 고양이들은 세 마리로 구성된 한 가족이다.

왼쪽이 아빠, 오른쪽 끝이 엄마, 그리고 가운데가 새끼.

얘네들이 벌써 3대째쯤 된다. 고양이들이 겨울 나기가 참 어렵다.

지난 겨울에 우리 집에 있던 아주 귀여운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우리 집 건너편에 있는 빌라 보일러실에 쓰러져서 동네 동물병원에서 입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거 입양받아서 꼭 데려다가 키우고 싶었는데, 두 마리가 감당이 될까 싶어, 결국 포기.

지금의 이 가족들도 언제까지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되는 데까지는 열심히 걷어먹일려고.

원래 새끼가 세 마리였었다.

장마철 한참 비내릴 때, 마루 앞 쪽에서 비 피하면서 장마 내내 옹알거리면서 지냈다.

가을이 되면서 새끼 두 마리는 보이지 않고, 결국 한 마리가 남았다.

한 달 전인가, 고양이들끼리 엄청 다툼이 났었다.

아마, 별로 필요없어진 아빠 고양이를,

너 나가,

엄마 고양이가 밀어내는 그런 싸움으로 안다.

마음이 안 좋아서 나가서 싸움도 말리고.

기본적으로는 길냥이용 대안 사료를 주고,

집에서 먹다 남은 생선 같은 거 있으면 준다.

오늘은 어제 선거 끝나고 아내랑 정종 한 잔 하면서 구워먹었던 꽁치 부스러기들.

먹이가 모자르다 싶으면, 아마 아빠 고양이가 이 집단에서 쫓겨날 거다.

예전에 마당에서 고양이 많이 기르던 시절,

새끼가 어느 정도 자라면, 엄마 고양이가 제일 강해보이는 새끼 한 마리를 집에 두고 떠나고는 했다.

물론 집 안에서 키우면 그런 건 없지만, 마당에서 키우다보면 남은 새끼들이라도 잘 먹으라고,

엄마가 떠나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 아빠 고양이는, 먹이를 주면 새끼와 엄마가 먼저 먹고, 자기는 그래도 여유가 있으면 그 때 먹는다.

꽁치 한 마리는 아직 몸이 남아있고, 두 마리는 진짜 머리만 남은 거였는데,

내가 보고 있는 동안에 아직 이 아빠 고양이는 냄새만 한 번 맡고 아직 먹지 않았다.

어제 준 사료도 아직 남아있고.

인류학 하는 사람들이, 수컷은 무엇에 필요한가, 그런 질문들을 종종 한다.


처음 이사왔을 때에는 우리 집 마당을 놓고 고양이들끼리 쟁탈전이 치열했었다.

며칠 마다 한 번씩, 밤이면 대혈투를 벌이는 소리가. 꼬리 잘린 고양이를 보는 건, 아주 흔한 일이었다.

그해 봄이 지나자, 이제 부부가 같이 지내는 모습을 일상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무래도 두 마리가 같이 있으면, 느닷없이 덤비는 침탈자로부터 자기 사는 데를 뺏기지 않아도 될테니.

아마 올해 겨울까지는 이 고양이 가족을 계속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도 어차피 전세 기간도 끝났고, 이사를 생각 중이다.

지금 사는 데에서 먼 데는 아니지만, 그래도 1킬로는 족히 떨어지는 곳으로 가게 될 것 같은데.

이 고양이 식구들이 눈에 밟힌다.

어차피 겨울을 제대로 날지도 모르고, 내년 봄이 되면 지금의 새끼가 다시 이 마당의 안주인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세 번의 겨울을 나는 길고양이는 거의 없다.

보통 한 번에서 두 번의 겨울을 보고, 세 번째 겨울에 수명을 마친다.

자연계에서의 균형이라는 것은, 늘 이런 임시적 균형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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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프랑스와 독일은 많이 다르고, 라틴 국가들은 또 다르다. 북유럽 국가라고 하지만,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다르고, 스위스는 또 다르다.

 

이런 것을 뭉뚱그려서 유럽이라고 표현할 때, 솔직히 좀 괴롭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더 유럽에 가는 게 귀찮아지고, 새로운 흥미도 줄어든 게 사실이다. 꽤가 난다고나 할까? 그 대신 일본 연구로 점점 더 옮겨가는 중이고, 일본이라는 사회를 좀 이해해보기 위해서 나름 시간을 들이는 중이다.

 

토마스 케이건의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는 취리히의 첫 장면에서 시작한다. 유럽에는 어느 정도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나도 취리히에 2주 정도 처음 머물 때 정말 충격을 받았던 게 기억난다.

 

좋든 싫든, 나에게는 파리가 제 2의 고향 같은 곳이다. 물론 많은 파리에 살았던 외국인들이 그렇듯이, 나는 파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지방으로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면서 에펠탑을 보고, “아 집에 왔구나”,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런 나를 엄청 혐오했다. 사람이 이렇게 간사한가, 그런 생각을 가졌던 적이 있다.

 

내가 정말 잘 사는 곳이라고 느꼈던 곳은 리옹, 그리고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라는 책에서 꽤 길게 소개된 본이라는 곳이다. 파리 외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도시는, 어쨌든 본이다. 수 년 동안 1년에 두 달 가량은 어떻게든 체류하게 되던 게, 예전의 내 직장 시절의 생활이었다. 줄기차게 가고 또 가고. 만약 본이 평안한 곳이 아니라면, 정말 가기 싫었을 것 같다.

 

이런 것을 기질이나 민족성 탓으로 설명하는 것은, 가장 쉬운 설명이다. 초기의 생태 인류학이 좀 황당했던 것들은, 이런 차이점들을 그 지역의 생태적 여건으로 환원시켜서 설명하려고 한 것.

 

사회라는 것은 좀 더 복잡하다. 토머스 게이먼은 지금의 미국과 독일 사이의 차이점을 노동조합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 그리고 기걸 복합적으로 결정하는 사민주의 체계라는 것으로 설명을 시도한다. 어쨌든 어느 사회에 속해있었는가를 기점으로, 두 집단의 삶은 차이가 많이 나니, 무엇이든 설명하려고 하는 수밖에.

 

그것이 제도 때문이든, 아니면 교육 때문이든, 독일적 삶과 미국적 삶, 그 사이에는 이제는 현격하게 많은 차이가 벌어져 있다. 삶의 불안으로 설명하든, 여가와 여유라고 설명하든, 혹은 실질 구매력 또는 가처분 소득에 근거한 개인 자산으로 표현하든, 어떤 지표를 들어도 차이는 명확하다. 다만 1인당 명목 GDP에서만 별 차이가 없다.

 

간만에 지나온 삶과 몇 가지 생각들을 잔잔하게 떠올려 보게 되는 책을 만났다.

 

머리 속에 몇 가지 수치와 시스템을 떠올리면서 보려고 하면 이 책은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책이 된다. 수 십년 동안 저자가 독일을 방문하면서 가졌던 그 때 그 때의 경험과 변화, 이런 것들이 통독과 EU 창설, 세계화, 그런 논의들과 엮이면서 복잡한 메커니즘을 머리에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여행기처럼, 복잡한 내용들은 좀 잊고, 저녁 6시면 가게 문을 닫아버리는 그런 사회에 대한 구경이라고 생각하면 훨씬 편해진다. 나는 책의 절반쯤에 가서야, 여행기편이 뒤에 있고, 그걸 정리한 저자의 결론이 앞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좀 더 편한 독서를 위해서라면, 오히려 순서를 뒤집어서 뒤쪽을 먼저 읽고, 그 다음의 앞의 절반을 읽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책의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영원할지는 모르겠지만, 독일이 향후 수 십년 내에 당장 망할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

 

저자는 일중독과 함께 시간을 사용하는 방법으로 독일에 대한 문을 들어가려고 하였는데, 나는 점심이라는, 좀 독특한 문으로 들어가보려는 생각을 몇 년째 하는 중이다.

 

하긴 그 입구가 뭐가 중요하겠나. 찬찬히 살펴보면 대부분 크게 다르지 않은 결론이 나올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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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는 일 중에서, 돈 안되고 영광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들이 엄청 많다. ‘먹고 살기라는 관점에서 보면, 정반대의 길을 가는 셈인데, 그러다 보면 내 입에도 어쨌든 세 끼 밥은 들어온다는 게 믿음이다. 아직까지는밥은 먹고 다닌다.

 

다큐 <모래>가 어떻게든 상영회까지는 온 것 같다.

 

가슴에 손을 얹고, 목숨 걸고 꼭 봐야 할 다큐라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다큐가 그렇듯이, 보면 좋겠지만 안 본다고, 뭐 뒤지는 건 아니다. 세상의 부조리라는 건, 왕조 시대 이후로 늘 있으니, 뭐 그걸 다 해결하겠다고 해서 해결 되는 것도 아니고.

 

다큐 <모래> 안 본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니고, 이거 본다고 해서 비루한 삶이 특별히 좋아지지도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가끔 애잔해지고, 씁쓸하면서, 겉 얘기만큼이나 속으로 남는 진짜 속 얘기가 그리워지는 순간이, 살다 보면 오기도 한다. 어떻게 사람이라는 게 평생 강호동쇼만 보고 살 수 있나, 가끔은 좀 고급스러운 취향이 그리운 순간도 있다.

 

아주 다중적인 의미에서 이 다큐는 문제적 작품이다. 사회성 짙은 얘기들은 저 새끼들 다 나쁜 넘들이야”, 그러면 된다. 아니면 우리 모두 공범이다, 이 자연 앞에서…” 사회적 다큐가 보통 그런데, <모래>는 그걸 자기 안으로 들여오고, 매일 밥상을 마주 보아야 하는 식구들로 끌고 들어온다.

 

, 저걸 같이 찍는 부모들은 심정이 어땠겠나, 그런 애잔함이 있다.

 

삶이라는 건 독하고 잔인한 것, 그 부조리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보시고 싶다면.

 

다큐 <모래>의 상영회에 오시면 된다. 이걸 보고 나서 자신의 예술성이 갑자기 높아지거나, 아니면 사회성이 높아진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기분은 확실히 드러워진다. 그 드러운 기분을 잘 삭히면서 하루쯤 지나면, 이제 슬슬 묘한 기분이 들기 시작할 것이다. 감독이 처음부터 의도한 효과는 아니겠지만, 잉여질의 본질, 그것도 은마 아파트 사는 고급 잉여질이 애잔하게 가슴에 깔릴 것이다.

 

다큐 보면서 은마는 달리고 싶다는 얘기가 계속 떠올랐는데, 은마는 달리지 않을 것이다. 그게 남의 일이면, 댁들이 바로 하우스 푸어이셔요, 이렇게 간단하데, 그게 식구면? 게다가 거기 얹혀서 살고 있으면?

 

하여간 요즘 사는 거 골 아파서, 복잡한 얘기는 절대 볼 생각 없다, 그런 사람은 다큐 <모래> 보고 있으면 100% 졸 거다.

 

요즘 좀 상황이 괜찮아서, 아 나, 간만에 좀 머리 터지는 거 봐도 소화할 수 있어 혹은 아주 드물지만, 요즘 내 문화 취향이 약간 고급이야, 그런 사람에게는 빅 어드벤처.

 

아직 영화 끝나고 무슨 얘기를 할지는, 마음을 정하지는 못했다. 안 그래도 가슴 심난해서 마음 복잡해질 것이 뻔한 관객들에게, 가슴 답답하시죠, 그럴 수는 없는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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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슨>, 이거 참 문제적 작품이다. 요즘 엄청 욕먹고 있지만, 폭스 TV는 여전히 재밌다. 늘 보는 건 아니고 가끔 보는데, 저론 또라이 방송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황당하다. 물론 그 파격을 보며, 재미는 있다고 생각한다. 가끔 내가 자료로 쓸 때에는, 미국 5대호 지역의 중산층 경제 모델에 대해서 분석할 때, 그 이미지의 단초를 <심슨>에서 찾는다.

 

참 많은 나라를 돌아다녔는데, 아직까지 미국에 가 본 적이 없다. 나도 정말일까 싶은데, 진짜로 간 적이 없다.

 

회사 다니던 시절에는, 미국 출장건이 생기면 늘 위에 상납했다. 난 지나칠 정도로 해외출장을 많이 다녔는데, 나도 상사들 눈치 봐야 하는 처지라, 미국 출장을 양보하면 몇 달은 편하게 지낼 수 있다. 그 대신 나는 아프리카나 오지에 있는, 별로 사람들이 가고 싶어하지 않는 곳을 주로 갔다. 미국에 꼭 가야 할 일이 가끔 생기기도 했는데, 그 때마다 공교롭게 다른 일이 겹쳐서, 하여간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요즘도 매년 3~4번은 외국에 가는데, 여행으로 가는 해외여행은 꼭 내 돈으로 간다는 철칙이 있다. 당연히 기초 연구를 위한 곳을 가다보니까, 여전히 미국에 갈 일은 없다. 그렇다고 유럽에 자주 가느냐, 마흔이 넘고 나니 비행기 타는 게 너무 힘들어서, 진짜 꼭 가야 하는 경우 아니면 안 간다. 자연히 일본으로 몰아서 가게 된다.

 

이런저런 이유로 심슨을 재밌게 본다. 시리즈 일부는 사서 봤고, 일부는 빌려서 보기도 하고. 아직도 “I’m your father”, 에피소드는 이제 잘 기억나지 않지만 <스타워즈 2>를 패러디한 장면이 제일 재밌게 기억난다. 이 장면은 배우들도 실제 연기를 하기 전까지는 이 장면의 시나리오를 보지 못해서, 막상 촬영에 들어갈 때, 내가 맞게 하는 건지, 그런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삼국지-용의 부활>을 촬영할 때, 유덕화가 자신이 아는 삼국지 얘기와 많이 다르다고 당혹스러워할 때,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삼국지에서는 드물게 잘 먹고 잘 살았다, 이렇게 생애를 마쳐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던 조자룡이, 사실은 조조의 손녀에게 대패하고 죽었다, 그 얘기를 유덕화한테 받아들이라고 하니, 아마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지금에야 루크 스카이워커가 아나킨 스카이워커의 아들이라는 게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다스 베이더의 입에서 내가 니 아비다”, 그 얘기가 처음 나올 때, 참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이 장면은 끝없이 패로디되고 또 된다. <심슨> 다음으로 이 장면의 패로디가 재밌었던 것은, 아직 마크 마이어스가 <슈렉>으로 대중에게 지금과 같이 알려지기 이전 시절. <오스틴 파워2>를 심야극장에서 <매트릭스>,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와 한 방에 본 적이 있다. 그 때 반은 졸면서 보다가도, “내가 니 아비다하는 장면에서는 정신이 번떡.

 

(그 말 많던 <오스틴 파워>의 인트로는 <심슨 더 무비>에서 다시 패로디 되는데, 우리의 바트는, 하여간 얘들은 좀 달라…)

 

리사의 입을 통해서 환경에 대한 얘기가 나온 적이 한 두번이 아니지만, <심슨 더 무비> EPA와 카길의 대립을 축으로 하고 있다. 극장에서 이파, 이파할 때, 사실 웃느라고 죽는 줄 알았다.

 

EPA 고위직은 몇 사람 아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내가 진짜 재밌게 아는 EPA 사람은, NREL 팀장이었는데 DoE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던, 정말 파트너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친하게 지냈던 친구의 부인. 우리 식으로 따지면, 환경 전공 대학원생 둘이 사랑을 해서, 결국 결혼을 했고, 남자는 에너지 쪽 정부 연구원으로 가고, 부인은 환경부 특채 공무원이 되고. 미국 공무원들도 상후하박이라, 그렇게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박사 진학하고 싶다고 하면서도 결국 삶이란 도니에 걸린 게 많아서, 초급 공무원 생활하던. 이 시절에 같이 친하게 지내던 국무성 공무원도 한 명 있었는데, 부시가 대통령 될 때, 자기는 환경 전공이라서 이 아저씨 밑에서 공무원 생활은 못 하겠다고 남들 다 부러워하는 국무성 자리에서 사표내고 민간인이 되어버린. , 성격 한 번 정말 끝내주었다.

 

(나중에 이 친구가 미국 와서 같이 일하자고 했었는데, 나도 회사 그만두고 놀던 시절이라 도니가 터무니없이 없었지만, 그렇게는 못하겠더라는.)

 

EPA Agency라서 청이고, 한국은 Department, 부로 한 끗발 높다. EPA가 하면 전세계가 따라가는, 뭐 그런 건 아니고, 프랑스는 부총리급으로 오히려 한 끗발 더 높다. 에너지 정책의 전설이 된 오레곤주나 LA에서 뭘 하면 좀 따라가기는 하는데, EPA가 한다고 해서 따라가지는 않는다. 게다가 부시 시절의 EPA명박 시절의 환경부,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한명숙 장관이 시절의 환경부 생각하면 비슷할 것 같다. 입으로는 뭔가 할 것 같은데,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꼬리 내리는. 명박 시절의 환경부는, 아예 입으로도, 대운하 좋아요, 4대강 좋아요, 그러니 국제적으로도 급으로 올려놓고 요지랄한 사례는 본 적이 없다. 하는 짓으로만 봐서는, 미국 EPA처럼 다시 청으로 격하시켜도 모자라고, 무슨무슨 본부 의미의 ‘Centre’ 정도 하면 딱 맞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여간 미국 대통령은 아놀드 슈왈츠제네거, “터미네이터기 언제 글 읽는 거 봤어?”. 요렇고, 말만 환경청이지, 명박 시대의 환경부 모냥 대충 황당한 짓 하는 기관이 만들어낸 합작품에 결국 우리의 심슨이 해방군으로 나서게 된다, 그런 모티브이다.

 

미국 대통령과 독대도 하는 환경청장은 바로 카길, 바로 그 문제적 기업이다.

 

쌀 시장 가지고 대학원 논문 썼는데, 사실상 카길 가지고 쓴 셈이다. 그 때만 해도 카길은 좀 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카길은 잘 모르겠다. 물론 정색을 하고 들여다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는 이유도 있는데, 이게 생각보다 복잡한 회사인 것 같다.

 

벌써 5~6년 되었나, 중앙일보 기자 한 명이 카길 기획기사를 다루고 싶다고 해서, 이것저것 내가 아는 대로 자문을 좀 해준 적이 있었다. 그 때도 진짜 실체에 잘 접근은 못했는데, 중앙일보가 원래 보수지라서 그렇쟎아, 그런 건 아니고 진짜로 이해하기도 어렵고 그 메커니즘을 알기도 어렵다.

 

농업 쪽에서 무시무시한 회사 거론할 때 늘 나오는 회사가 네슬레와 카길이다. 둘 다 무시무시한 회사이다.

 

6년 전인가, 7년 전인가, 프레시안하고 농업 문제를 진짜로 파고 들어가 보려고 한 적이 있었고, 그래서 약간 숨을 길게 잡고 해외 출장도 가고, 연구진이라도 좀 구성해서 해볼까 한 적이 있었다.

 

결국 그만둔 게, 그 때 걸러 걸러 돈을 대겠다고 나선 회사가, 결국 네슬레.

 

, 그 때는 나도 모골이 송연하게, 진짜 무서웠다. 범을 잡으려면 범의 입에 들어가야, 니가 들어가라, 난 무섭다.

 

쉽게 비유하면, 카길이 네슬레보다 무섭고, 네슬레가 삼성보다 무섭다. 물론 한국 내에서는 삼성이 더 무서울 수 있지만, 삼성은 너무 보이게 하고, 너무 뻔하게 한다. 그런 식으로는 티 안내고 국내 지배도 어렵고, 글로벌, 진짜 장난하나. 카길이나 네슬레 같은 데 움직이는 거 보면, 삼성이 무섭긴 뭐가 무섭냐.

 

IT 산업이 커지고 커져서, 돈 단위가 상상불가가 되었지만, 흔히 1차 산업으로 분류하는 아주 오래된 산업의 오래된 기업들의 끈끈한 시장 관리 방식, 요거 진짜 무섭다.

 

(범선 시절부터 했던 기업의 현대 모습을 보려면 영화 <인사이더>를 보면 약간 알 수 있고, 석유를 둘러싼 살발한 경쟁은 <시리아나>를 보면 된다.)

 

네슬레와 카길의 결정적 차이는, 네슬레는 주식회사이고 카길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일종의 생협 같은 건데, 주식을 상장하지 않고 내부에서 모든 걸 결정한다. 주식회사가 되면, 경영정보를 공개해야 하고, 공공연하게 장부를 조작했다가는 엔론처럼 한 방에 날라간다. 주식회사가 규모도 크고, 음모도 많아서 무섭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면 어느 정도는 관리 범위에 들어온다. 카길은 주시회사가 아니라서 공개된 게 별로 없다.

 

카길의 상황실에는, 뭐 국무성보다 더 넓게 전세계를 커버하는 각종 스크린으로 가득 차 있을 거라는이 방은 언론에 공개한 적이 있다.

 

봐요, 아무 것도 없쟎아요, 우린 그런 사람 아니예요

 

, 그렇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였다.

 

사람들이 멋진 첨단, 그런 데 눈이 가 있지만, 진짜 끈적끈적한 일들은 IT 이런 거랑 상관없는 타이슨 푸드나 몬산토 같은 이름들이 나오는, 곡물회사, 화학회사, 이런 이름들이 나오는 곳이다.

 

타이에서 아프리카로 가는 곡물 유통 루트, 싱가포르 선물시장, GMO와 관련된 끈적끈적한 음모론, 요런 얘기들이 칙칙하다.

 

<심슨 더 무비>에서 모비트로 끌어낸 얘기는, 진짜인지 아닌지, 아무도 모르지만 카길 출신이 미국 환경청 청장이고, 청장 형편에 택도 없는 대통령과의 독대를 통해서, 진짜 무서운 거그런 거 한다는 얘기이다.

 

물론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얘기이다.

 

영화가 나온 다음 해에, 우리 가카께서는 이파나 카길 통하지 않고, 바로 미국 대통령과 독대하셨으니.

 

상황이 이런 데, 좀 생각해 볼 것은,

 

원래의 심슨이 나왔던 폭스 TV, 우리 식으로 치면 중앙일보나 조선일보 종편 정도 되는 데인 거다.

 

예를 들면, 조선일보 종편에서, 성공한 에니메이션을 극장판으로 만들었는데, 여기에 환경부가 등장하고, 환경부 장관으로 예를 들면 4대강 추진 과정에서 미스터 삼성 혹은 미스터 현대 이런 사람들이 등장해서, 좀 살만한 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은 영화를 상영하드라

 

그쯤 되는 얘기이다.

 

우린 이런 거 못하나? 지나치게 상업적이라서 문제라고 하는데, 우리는 상업적인 수준도 지금 못가고 딱 최시중 인식 수준에 서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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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산문집, <생각의 일요일>

 




솔직히 내가, 은희경의 산문집을, 그것도 정가 그대로 주고 교보문고에서 사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절반 정도는, 특히 후반부 절반은 책방에 선 채로 읽었다. 그 정도면 보통 내려놓고 오지만, 은희경 산문집은, 진짜로 소장하고 싶었다. 가지고 있으면 나중에 자료가 될 듯 싶기고 했고, 워낙 특이해서 기념품으로서의 가치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머리를 팍 때리고 갔다. 이런 책도 있구나 하는 호기심, 그래도 간만에 간만에 은희경 책 하나 샀다는 스노비즘 그리고 시간을 좀 가지고 천천히 여러 번에 걸쳐 보고 싶다는 호기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곽노현에 대한 얘기들은 잠시 잊고 지낼 수 있는, 전혀 다른 세계의 그리고 다른 포맷의 읽을 거리가 필요했다. 책을 짚어들자 마자 딱 뇌를 스쳐지나간 건, 이것이 옳으냐, 저것이 옳으냐, 그런 얘기에 대해서 불가근 불가원인 그런 도원경 같은 지역도 글의 영역에서 분명히 필요하다는 것. 어쩐지 은희경이라는 작가는 그런 자기만의 공간을 누군가에게 열어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좋은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시인 최형미의 산문집에서도 유사한 느낌이 들었었다.

 

은희경의 소설을 처음 읽었던 것은, 90년대 후반, 현대에 있던 시절, 울산으로 가던 비행기에서 뭔가 읽어야 할 것이 필요해서 집었던 게 처음이었다. 아마 세 권인가, 책이 나왔던 것 같은데, 대구에 가는 비행기에서도 읽고, 몇 주 사이에 출장으로 지방에 내려가던 비행기에서 내려가고 올라가면서 읽고, 그리고 던져놓았던 기억이다.

 

고만고만한 시기에 읽었던 소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김형경의 <새들을 제 이름을 부르면서 운다>… 소설의 맨 앞에 나왔던 어느 여의사의 이름이 천리향인지, 만리향인지, 아직도 그 이름을 기억하고, 원하지 않은 결혼을 결국 하게 된 어느 여인의 아픔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김형경 소설을 읽은 이후로, 비슷비슷하게 그 때 나온 소설들을 어지간하면 챙겨서 읽었고, 짧게나마 감상문을 적어놓기도 했었다.

 

아마, 이제 이런 소설은 그만 보자, 마지막으로 그런 그런 소설을 접었던 거의 그 즈음, 아마 마지막으로 사서 본 게 은희경 소설이 아니었나 싶다. 10년도 더 된 기억이다

 

물론 그 후에 소설을 전혀 안 읽은 건 아니다. 일본 문학의, 문제적 젊은 작가에게 준다는 상을 받은 소설을 읽었는데, 진짜 재밌는 것들이 좀 있었다.

 

소설가 김사과의 책들을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문학적으로 척박한 나에게는 너무 소화가 어려웠고. 인간 김사과에는 그래서 늘 송구함이 있다. 나는 그렇게 문학적 소양이 높은 사람이 아니라니까.

 

어쨌든 지금에 와서, 나는 은희경의 소설을 꼼꼼이 챙겨 읽는 그런 성실한 독자는 아니다. 오히려 내가 그의 소설을 읽을 수밖에 없던 그 시절의 삶, 그걸 더 혐오하는 편이고, 은희경은 마침 그 시절에 내가 읽었던 소설의 작가라는 이유로, 내가 지워버리고 싶던 그 우울증 시대의 한 요소처럼 나의 기억에는 남아있다.

 

공지영의 책은, <도가니> 이후로 진짜 읽기가 편해졌다. <도가니>는 불편한 얘기이고, 이중, 삼중으로 깝깝한 스토리가 얽개로 얽혀있다. 차라리 고대의 이 황당한 사건을 처리하는 고대의 얘기는, 그래도 스토리가 심플하다. ‘무진이라는 상징으로 대변되는, 보나마나 광주일 것이 당연한 듯이 느껴지는 그의 얘기는, 진짜 사람 심난하게 만든다.

 

매번 사람들이 최근 소설을 읽고, 뭐라도 얘기를 해달라고 해서, 억지로 읽으려고 하다가, 진짜 미안한 얘기지만 토 나올 것 같아서 그냥 덮었다. 이건 순전히 개인 취향이다. 작가의 생각까지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내가 읽기에는 아무 것도 사회적인 것은 하지 않고, 자기는 그냥 돈만 벌겠다그렇게 느껴지는 소설들이 있었다. , 그냥 참고 읽어도 되는데, 나도 마음이 강퍅해져서 그런지, 왠지 토 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박범신에 대한 복잡미묘한 심경과 비슷할 것 같다.

 

명박이 시장 시절, 서울문화재단이라는 아주 이상야릇한 걸 만들었다. 그리고 그 운영을 맡긴 게 유인촌이다. 명박은 대통령되고, 유인촌은 장관되고, 그럼 서울문화재단은 누가? , 그게 박범신이다. 그 정도면 심정 복잡미묘하지 않겠는가?

 

이제 몇 달 되었나? 아내랑 병원 갔다가 들어오는 길에, 너무 힘이 들어서 그냥 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하고, 동네 식당에 갔다. 옆 자리에 앉은 할아버지가 느무느무 시끄러워서, 누가 이렇게 시끄럽나, 홀깃 쳐다봤더니 아 박범신이런 순전히 식당 옆 자리에 앉은 이유로, 너무 내적인 대화를 고스란히 들어버렸을 때의 그 난감한 심정

 

은희경의 산문집은, 인터넷에 연재된 소설의 과정에 생성되는 감정의 부산물들을 가감 없이 풀어놓은 글들을 모아놓고 있다.

 

그냥 보면 정말 산만하도록 산만하고, 도대체 뭔 소리를 하고자픈거냐, 그런 말 딱 나오기 좋은 책이다.

 

그러나 이게 은희경의 삶의 얘기야,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순식간에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가고, 또 다른 에피소도로 넘어가면서, 아마 한 두 시간은 정신 없이, 아직도 소녀이고픈 듯한 어느 아줌마의 삶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가게 된다. , 이 아줌마가 연재 중에, 요런 고민과 요런 감성의 변화와, 요런 귀여운 데가 있었구만, 그런 진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상황 속에 한 번쯤은 푹 빠져들게 된다.

 

이 아줌마가 킬힐을 사서 뭐하고 싶대나, 그러나 사고 싶어서 샀지만, 과연 살아서 오늘 집에 갈 수 있을까, 문인들이 가는 선술집의 좁다란 계단길을 올라가면서 했던 은희경의 독백에, 나는 문득이것이 살아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포맷도 재수없고, 내용도 재수없다. 그러나 한 번 뒤틀어서 생각하면, 포맷도 전위적이고, 내용도 전위적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은희경의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은, 때때로 폭소를 지지 않을 수 없고, 다음에 만나면 누님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는, 도저히 나이 먹지 않는 것 같은 젊은 시절의 선배를 만나는 느낌.

 

글이라는 게, 작전과 전략을 가지고 철투철미하게 계산된 게 있는 반면에, 은희경의 첫 번째 산문집처럼, 극한적일 정도로 풀어헤치고 나가는 글도 있는 것이다.
 

지난 지방 선거를 두고, 은희경이 경기도민으로 짧게 쓰고 나간 글이 있다. 투표하자는 얘기인데, 과연 그는 누구에게 투표했을까, 그런 무감한 듯하지만 지난 1~2년 동안 우리를 뒤흔들었던 사건들로부터 그의 삶이 무관하지는 않았다. 노골적으로 표현할까, 그러지 말까, 그런 차이 정도라고 할까?

 

어쨌든 곽노현 사태를 맞아, 이 편이냐, 저 편이냐, 그걸 선택하는 길 외에는 없어 보이는 이 척박한 시점에

 

소설가 은희경의 우연히 나온듯한 산문집의 아줌마가 되기를 거부하는 어느 아줌마의 산문집, 제대로 우리를 무장해제 시킨다. 읽다 보면, 자신이 어떤 마음에서 처음 이 책을 잡았는지, 마지막 페이지를 내려놓을 때쯤이면 잊어버리게 될 것 같다. 그게 연재의 힘일까?

 

아줌마의 수다, 그건 진짜 이게 원단이다. 산만하고 재수없고, 정신 없고, 그러나 그 역시 삶의 한 가운데 있는 글, 그리하여 다음에 만나면 누님이라고 불려드려야만 할 것 같은 어느 아줌마의 삶의 짧은 노정.

 

재밌다. 일찍이 이런 책은 한국에 없었다. 역시 은희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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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 ‘여행, 혹은 여행처럼

 

곽노현 사건은, 우리의 감성을 시험대에 들게 한다. 논리적으로야 뻔한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어디 사람이 그렇게 간단한 존재이던가?

 

나는 어렸을 때 그렇게 넉넉하지 않은 편이라서 민어탕을 먹어본 적이 없다. 서울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복날 개를 먹거나 닭을 먹었다고 하고, 양반들은 민어를 먹었다고 한다. 곽노현 교육감을 처음 보던 날그 때도 복날이라서 민어탕을 먹었는데, 오랫동안 그가 했던 말보다는 민어탕의 미감이 더 오래 떠올랐다. 그 때 같이 식사한 또 다른 양반들도 모두 어린 시절에 민어탕 먹었던 얘기를 했는데, 나는 그런 생선이 있다는 것도 어른이 되어서 처음 알았다. 따져보면 나는 생선장사집 후손인데, 민어를 모르다니, 그런 생각들을 좀 했었다.

 

어쨌든 생각을 돌리거나 잠시 숨이라도 쉬기 위해서는 당장 뭔가 읽었어야 했는데, 그 때 딱 내 손에 잡힌 책이 정혜윤의 <여행, 혹은 여행처럼>이라는 에세이집이다.

 

수필집에서도 니 편, 내 편을 나누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정혜윤의 글을 읽다보면, 우리 편 한 가운데 들어와있다는 묘한 안도감. 결국 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세상 모든 일은 다 니 하기 다름이다라는 메시지가 가득 차 있지만, 잠시라도 아니, 그렇지 않아요라고 얘기하는 또 다른 세상들 사이에서 숨이라도 좀 돌려가면서.

 

정혜윤의 <여행, 혹은 여행처럼>을 읽다보면 매우 특별한 고립계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도시빈민들이 어쩔 수 없이 몰려간 게또라기 보다는 몽골 초원에 있는 게르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미안하지만, 나도 말만 들었고, 몽고에 가 본 적은 없다.)

 

이동식 천막인 게르는 가족 단위로 거주하는데, 게르와 게르 사이의 거리는 보통 50킬로미터, 그 안에서 주인의 환대를 받으면서 소박한 유목민의 저녁 식사에 잠시 초대되어 초원에서의 황량함을 잠시 잊는 느낌.

 

보통 때 같으면,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혹은 “Show must go on”, 이런 뻔하디 뻔한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인간 곽노현이 캐발림 당하는 상황에서 귀를 틀어막고 싶은 현 상황에, 정혜윤은 기꺼이 게르의 안주인이 되어준다.

 

인터뷰와 여행에 대한 짧은 에피소드와 시나 신화와 같은 연결구들로 진행되는 이 책은, 아마 저자는 일종의 메타 여행과 같은 구도를 구상하였을 법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게르의 여주인과의 환담 그리고 그 안에서 TV를 틀어놓고 야밤에, 즉 오디션 쇼나 서바이벌 같은 예능방송도 다 지나간 시간에, 시청률 1%짜리 다큐 방송을 하나 같이 본 느낌

 

만약 방송이 지금처럼 막히지 않았다면 정혜윤의 게르에 초대된 초대 손님들은 당연히 공중파 한 가운데에서 대중들을 접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명박 시대, 그리하여 정혜윤의 게르에서 만나는 수밖에 없다.

 

소모뚜의 얘기가 아주 인상 깊었고, 시인 송경동의 구구절절한 사연 역시 가슴 한 구석을 부벼팠다. 송경동, 그렇다, 희망버스의 제안자 바로 그 송경동. 신문의 사진 기자를 그만두고 다큐 사진작가가 된 임종진의 사연도 가슴에 깊게 남는다. 줄치면서 책을 보는 습관이 있는데, 이 책에는 딱 한 줄을 치게 되었다.

 

대신 기자의 시선이 아니라 인간 임종진의 시선이 남았습니다.”

 

상당히 재밌게 본 사연인데, 줄을 쳐놓은 문장 하나만 맥락에서 떨어뜨려 딱 떼어놓으니, 뭔 말이래? 이렇게 되었다.

 

진딧물 얘기, 라틴어 얘기, 전부 재밌었는데, 하나하나 에피소드로 놓고 보는 것보다, 예를 들면 나무의 얘기에서 같이 더불어 살아가는 진딧물의 얘기, 그리고 관계를 노래하고자 했던 시인 송경동, 이렇게 얘기와 얘기 사이를 넘어가면서 확장되는, 일종의 변증법적 구조가 끈끈하게 얘기들 밑을 흐른다.

 

어느덧 문학은 손 끝 하나 까딱하기 싫은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기교를 연마하는 것과,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똑 같이 된 것 같다. 장편소설 한 권을 읽고 나면, 뭔가 긴 여행을 하고 난 듯한 느낌이 나기를 기대하는데허무만이 남아서 작년부터 한국 소설을 잘 안 보게 되었다.

 

마음이 평온할 때에는, 그래도 이런저런 잔재미를 찾으면서 읽을 수 있는데, 권노현 사태로 안 그래도 앞길도 잘 안 보이고 마음도 답답할 때 그런 소설을 읽으면, 정말 답답해서 디져버릴 것 같다.

 

그것이 설령 라디오 혹은 월간지 안에 임시로 펼쳐진 우리들만의 게르라고 할지라도, 지금은 정혜윤처럼 확실히 우리에게 할 말이 있는 사람이, 이들과 같이 합시다, 그렇게 얘기하는 책이 딱일 듯 싶다.

 

어제 오후에 읽기 시작해서, 딱 오늘 오후에 끝났다. 이거야말로 정혜윤표 12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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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전우치>

 

꽤 전에 <전우치> DVD를 사놓고 미처 못 봤었다.

 

요즘 날씨도 덥고, 집중도 잘 안 되어서 계속 <전우치>만 보는 중이다. 시대도 없고, 시기도 없다. 그래서 맥락도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재밌다. 내가 워낙 요괴 얘기들을 좋아해서 그런지 엄청 재밌다.

 

시대가 하수상해서 그런가, 요즘은 나도 별 생각 안 하고 볼 수 있는 게 땡긴다. TV, 한동안 재밌게 보던 드라마도 꼴 뵈기 싫고, 그냥 폴라리스, 놀티비, 이런 대 나오는 아웃도어 클럽 같은 거 주로 본다.

 

말은 전우치지만, 사실은 세 신선들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신선들의 대사가, 가히 예술이다. 아주 오랜만에 영화를 보면서, 저런 대사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아직 생각 없는 소설을 보기에는, 잘 적응이 안 된다. 요즘처럼 한국 소설을 안 보고 지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이다. 공지영의 도가니이후로는 별로 본 게 없다.

 

영화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 관대하고 넉넉해졌는지 모르겠다. 나이를 먹으면서 소설에는 더 신경이 바짝바짝 서고, 영화에 대해서는 오히려 더 넉넉해진다.

 

한동안 그런 생각이 안 들었었는데, 전우치를 며칠 동안 열 번쯤 보고 나니, 갑자기 영화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 가득 차게 되었다. 아주 오랜 만에 느껴보는, 묘한 창작욕이라고나 할까.

 

내가 요괴 얘기를 좋아하기는 좋아하는 듯 싶다. 답답한 시기에는, 신선 놀음이 최고라고 하더니, 과연 그렇기는 하다.

 

그나저나 화담이라는 캐릭터를 저렇게 써 먹을 생각은 어떻게 해서 튀어나온 것일까? 화담하면 거의 자동 빵으로 튀어나오는 황진이 얘기를 보다가 생각했을까? 아니면 정말로 유교 공부하다가?

 

요즘은, 입담 좋은 조연들의 시대인 듯 싶다. 신선들의 대화가 머리 속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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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간인가, 러시아 출신의 작가가 체르노빌과 관련된 방대한 인터뷰를 모아서 낸 책이다.

때때로 수치나 기술적 자료보다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게 더 중요한 경우들이 있다.

한국어판 서문은 아주 재밌게 읽었다.

구로자와 감독의 <꿈>에 관한 얘기로 시작하고, 체르노빌에서 동물들에 대한 학살 얘기까지는, 정말 전율에 넘쳐서 읽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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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페이지 정도를 겨우겨우 보고, 포기했다.

눈이 더 나빠져서 언젠가 책을 읽을 수 없게 되는 날이, 오래지 않을 거라고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몇 년은 내가 더 책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읽을 수 없는 첫 번째 책이 되었다.

글자 폰트 자체가 너무 살집이 붙어있지 않고, 인쇄상태도 유난히 흐려서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스마트폰 사러 갔다가, 도저히 아무 것도 읽을 수가 없어서, 아 나에게는 필요없는 물건이구나, 그러고 돌아온게 두 달 전이다.

메모를 연필로 했는데, 3년 전부터는 연필로 글씨를 써서는 내가 읽을 수가 없다. 만년필로 바꿨는데,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그나마도 사인펜으로 바꿔야 할지도...

어쨌든 책은 아주 재밌을 것 같고, 꼭 읽고 싶은 책이었는데...

나는 읽을 수가 없는 책이다. 안경을 끼고는 노안이라서 읽을 수가 없고, 5센치 앞으로 눈 대고 읽다가,머리가 빙빙 거려서...

살면서 하루에 두 권씩은 어떤 식으로든 책을 봤는데, 이제는 책을 읽을 수 없는 날이 나에게도 올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눈 좋으신 분들은, 읽어보시면 여러가지로 섬세한 감정들을 좀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읽을 데까지는, 슬픈 사건이지만, 사람들이 느꼈을 뒷모습들을 정말 섬세하게 그려내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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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이 단순 명료한 얘기를 꼭 프랑스 사람의 입을 통해서 볼 필요가 있나, 책을 집어들기 전에는 그런 생각을 좀 했었다.

 

지난 10년 동안 우린 맨날 분노하라고 하고, 정신 차리라고 하고그리고 그 메시지가 한국에서 얼마나 무용하고, 무기력한가,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대화하는 것에 대해서 작년부터 골돌히 고민하는 중이었다.

 

잠깐 분노하고, 다시 도서관 가서 취업 준비하는 것, 거기에서 분노가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런 생각이 더 많았다.

 

책은 빨려가듯이 읽었고, 아마 정상적으로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앉은 자리에서 읽을 수 있을만큼, 짧기도 하고, 강렬하기도 하다.

 

읽고 나서 최종적으로 든 생각은, 이 책은 한나라당 계열의, 그리고 국가와 민족에 충실하자고 말하는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한 번쯤 보아야 할 듯 싶다.

 

한국에도 레지스탕스와 같은 독립 운동의 역사가 없지는 않은데, 이들이 국가를 만들고 세울 기회를 갖지는 못했다.

 

레지스탕스 평의회가 했던 결정들 그리고 이런 결정이 드골 정부에서 반영되는 과정이 이 책의 주요 모티브이다.

 

전기, 가스 및 기본 인프라에 대한 국유화 논의 그리고 연금제가 우파 정부에서 도입되는 과정은, 우리의 전개과정과는 좀 다르다.

 

드골주의자들의 눈으로 본다면, 혹은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출신들의 눈으로 본다면, 최근의 한나라당의 국가주의와 효율주의를 대충 결합시켜놓은 복지에 대한 담론은, 진짜 웃기는 것일 듯싶다.

 

에꼴 노르말 출신인 저자는, 샤라트르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헤겔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우리 식으로 따지면, 정말 엘리트 중의 엘리트의 길을 걷게 된 것이고, 직업 외교관으로 삶을 살았다.

 

특별한 당적은 가지지 않았는데, 사회당 정부가 붕괴한 후 사회당에 가입을 하였다. 95, 시라크가 대통령이 된 것이 그에게도 충격적이었나 보다.

 

담론이라고 얘기하지만, 많은 경우 메시지와 발화자, 두 가지의 관계가 사실 문제의 핵심인 경우가 많다. 무슨 얘기를 할 거냐, 그리고 누가 그 얘기를 할 거냐?

 

한국을 만들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 중에 김정일에게 분노하라가 아니라 시대에 분노하라고 얘기하게 될 사람이 과연 등장할 수 있을까?

 

책에는 시인 아폴리네르의 시가 인용된다.

 

Sous le pont de Mirabeau

Coule la seine

Et nos amours...

 

요런 싯구로 아직 기억하는 시인 아폴리네르.

 

이상의 글에 나왔나 ?

 

이 표정 없는 얼굴을 지워버리고 싶다...

 

나는 표정 없는 얼굴에 분노하는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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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두 권의 경제학 신권에 대해서 해제를 쓸 기회가 되었다.

물론 다른 출판사이고, 경제학자와 수학자, 이렇게 접근이 조금씩 달랐는데, 두 개 다 경제학의 위기를 말하고 있는 점은 같았다. 약간씩 다른 포인트로, 두 권 다 생각을 전환하기에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중요한 책들이다.

라즈 파텔의 책은...

아마 당분간 내 글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value와 evaluation이라는 말이 있다. 약간 뉘앙스가 다르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공교롭게도 내가 정리하고 있던 장의 제목이 '가치와 가격, 경제 시스템, 가치의 복귀', 이런 내용이었다.

2010년대에 가치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런 걸 한참 생각하고 있을 때, 이 책을 읽었다.

얼마 전에 한국경제학회가 있었는데, 정의론에 대한 얘기가 주요 논제가 되었다고 한다.

선생들이 간만에 한국경제학회 같은 데에서 발표 좀 해보면 어떻겠냐고 하셨는데, 아직은 때가 아니고, 일단 제 생각부터 정리를 한 번 해보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만약 그 때 발표를 했다면, 아마 라즈 파텔과 아주 유사한 얘기를 썼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 같다.

가치의 복귀와 가치론의 복귀는 조금 내용이 다르다.

글쎄, 세상이라는 것은 돌고 도는 것이니까 가치론이 다시 한 번 유행할 시절이 아주 안 올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가까운 수 년 내에 7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가치론이 대대적으로 유행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가치의 얘기는 조금 다르다. 탈 가치, 탈 도덕, 그게 경제의 발전이고, 그런 게 바로 경제학이라는 주장이 90년대 초중반 이후, 20년 정도 유행을 했었다. 그러나 그 딱딱한 경제 근본주의에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로 이론적 균열이 나면서, 요즘은 다른 목소리들이 슬슬 비집고 나오기 시작한다.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재밌게 읽은 글이 있다면, 중농학파의 길을 열었던 프랑수아 케네의 '막심'일 것 같다.

요즘 산업시대 혹은 후기산업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눈으로 보면 정말 턱 없이 황당한 얘기이기는 한데, 나야 케네의 중농주의 이론을 워낙 좋아했으니까... 그 이론의 연장선으로, 케네가 제시하는 일종의 경제 윤리 혹은 경제적 권면 같은 게 바로 맥심이다.

예를 들면, 농촌에 사는 귀족들은 자식들을 파리로 보내지 마라, 그러면 경제 망친다.. 요런 얘기들의 연속이 맥심이다.

시골 사는 토호들에게, 자식들 서울로 보내지 말라는 얘기 같은 걸 하니까 요즘의 눈으로 보면 택도 없는 얘기지만, 경제에 대한 분석이 윤리와 분리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만든 책이 이 책이다.

맑스 이후로부터만 고전을 읽거나 아니면 아담 스미스 이후로부터는 고전을 읽은 사람들에게는 중농학파의 얘기들이 좀 생소하겠지만. (실제로는 케네나 스미스나, 거의 동시대 사람이다. 연배가 케네가 좀 더 높았던 정도.)

튀르고 같은 사람들의 책도 재미있다. 과연 자본주의 초기의 사상가들은 이 독특한 시스템 내에서 어떻게 사회를 인식하고, 또 세상의 미래를 생각했을까, 그리고 윤리관은... 그런 옛날 얘기를 요즘의 얘기와 비교해서 보는 게, 지겹지는 해도 생각보다는 재밌는 일이다.

나는 케네의 시절이 한 번쯤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2008년 이후의 경제학 논의의 한 흐름을 형성하게 된 주류 경제학의 비판에서, 단순한 맑스로의 회기만이 있는 게 아니라, 분석자들이 알고 했든 혹은 모르고 했든, 케네의 느낌이 많이 나는 책들이 확실히 많아졌다.

이론이나 생각이라는 게 확실히 돌고 도는 것 같기는 하다.

한 때 케네 전공을 할 생각도 했었는데, 동경대에서 너무 빠삭하게 연구를 해놓아서 기가 질려서 포기한 적이 있다.

케네의 무덤에 들어가서 초고들과 서간지들을 다시 찾아낸 게 동경대 연구팀이라니, 참 기가 막혀서.

유럽에서도 일본의 자료 축적에 대해서 경외감을 느끼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런 동경대도 학풍이 옛날 같지는 않은 모양이다. 확실한 훈고학이라고 약간 놀림감이 되기도 했었지만, 어쨌든 기원의 문제에 충실하고자 하던 나름대로의 학풍이 감동적이기는 했다.

앞으로의 경제학 논의의 흐름은 어디로 갈까? 워낙 10년 넘게 보수 일변도로 가던 경제학 논의 구도에서 요즘은 좀 다른 흐름들이 나오면서, 그 딴 건 필요없다고 쓰레기통에 버렸던 것을 다시 찾아내는 그런 시기가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경제학이 답답하고, 좀 다른 논의는 없느냐, 그리고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의 정치 외에는 없느냐, 그런 대안들이 궁금한 사람들이 보면 좋을 것 같다. 미세하지만 중요한 전환이 지금 이루어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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