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의 어느 여름이라고 기억된다.

이제 막 서른이 되었고, 직급은 되게 높아져서 공공기관의 3급 부장이던 어느 여름.

가끔 재수 없다는 반응이 나올 걸 뻔히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삶을 환기시켜 주기 위해서, 당신이 최대한 높이 올라와도 아주 어렸던 시절의 내 위치에 오기가 어려울 거다...

그런 얘기를 하는 순간이 있다. 그 때가 딱 고맘 때즘 언저리를 경계로 한다.

미친 척하고, 신촌 어디선가 하는 토요일날 밤새 세 편 틀어주는 극장에서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 때 약간씩 졸면서 본 영화가,

매트릭스 1편, 오스틴 파워 2편 그리고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그 영화들이 내 인생에 그렇게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될지는 미처 몰랐지만, 하여간 이렇게 시대의 시리즈 영화들을 극장에서 밤새면서 보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그리고 곧 이어 해리포터 시리즈와 반지의 제왕 시리즈, 그리고 조금 늦게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가 시작하였다.

조금 늦게, 그러니까 내가 공직을 그만둔 다음에 국내 영화로 황산벌이 일종의 시리즈 영화로 시작하였다.

황산벌. 평양성, 여기까지는 어쨌든 나왔고, 내소성은 완전 오리무중.

99년을 기억하는 것은, 이 때가 내 삶에서 완전 최악, 그러니까 방향상실, 어이상실, 그냥 내가 왜 사는지 모르고 시간아 가라, 내는 모른다, 그러던 시절이라서 그렇다.

에너지관리공단에 부장으로 입사한지 약 반 년쯤 지났을 그럴 때였던 것 같은데, 뭐 그 상황에서 밤새도록 세 편 틀어주는 그런 극장에서 졸리운 걸 참으면서 영화를 볼 사람이 또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여간,

그 때쯤 나는 20대 내내 탐닉하던 예술영화도 끊고, B급 영화로 줄겨보던 영화들을 옮기면서, 상업영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예술영화도 아닌, 그런 엉기적하던 영화들을 아주 좋아하고 분석하던 시절이었다.

C급 경제학자라는 별명은, 그보다는 조금 먼저 얻게 된 별명이었다.

하여간 내가 뭘 할지, 뭘 하고 싶은지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헤매던 시절이었다.

해리포터 시리즈는 그즈음 시작했다.

극장에서 본 적도 있고, 못 본 적도 있는데, 어쨌든 꼬박꼬박 dd를 사면서 지내다보니 10년이 지났다. 

그 10년 동안 어린이이던 주인공들은 어른이 되었는데, 그 사이에 나에게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더 이상 아침이면 눈을 뜨고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 아는 게 되었고,

그 사이에 결혼을 했다. 내년이면, 아마도 오랜 기다림 끝에 아이도 태어날 것 같다.

정치적인 신념은 크게 바뀐 건 없지만, 뒤에 숨어있기 보다 뭔가 앞에서 해야한다는 생각이 좀 변했다.

복장은 크게 바뀌었다.

그 시절에는 넥타이 매고 전형적인 슈트 차림이었는데,

요즘은 그냥 츄리닝 입고 다닌다.

옷에도 돈을 쓰면, 내 주변의 식구들이 편안하게 살기가 어려우니.. 그냥 추리닝 입고 다닌다.

원래도 보이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할 눈, 이제는 노안이 심해져서 더 이상 엑셀이나 통계 작업은 하기가 어려워졌다.

책 보기도 힘들어졌고, 샤프를 더 이상 쓰지 않게 되었다. 샤프나 볼펜 혹은 수성펜 같은 것으로 써놓으면, 내가 읽지를 못한다.

도대체 이런 굵은 만년필을 누가 쓰나 싶은, 그런 거로 써야 겨우겨우 글씨를 읽는다.

소속도 바뀌었다.

나는 내가 뭘 차리는 건 절대로 하기 싫고...

정부기관 소속에서 영화사 소속으로,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이제 마지막으로 해리포터의 마지막 시리즈를 보았다.

문득, 지난 10년간이 싫든 좋든,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들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던 것처럼, 내게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안녕, 해리포터...

'영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 개의 문>에 관한 짧은 메모  (0) 2012.06.26
두 개의 문  (0) 2012.06.15
KU 시네마테크, 21번째 뉴스레터  (0) 2011.11.21
<돼지의 왕> 개봉 등  (7) 2011.11.06
<모래> 상영회  (5) 2011.09.16
Posted by retir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