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몽우리가 맺히더니, 오늘 드디어 감자가 꽃을 피웠다. 올해는 봄에 정신이 없어서 감자를 아주 늦게 심었다. 이렇게 늦어도 뭐가 날까 싶었는데, 그래도 꽃이 났다.

 

총선 이후, 괴롭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고, 매일 같이 아무 것도 하기 싫다는 마음을 억지로 누르면서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살면서 별나게 즐거운 일이 뭐가 있을 게 있겠나. 이제는 어지간히 즐거운 일에도 별로 반응하지 않고, 또 왜만큼 실망스러운 일에도 크게 마음이 움직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평상심을 잘 유지하느냐그런 건 아니고, 그냥 사람이 무뎌가는 중인 듯 싶다.

 

요즘은 박근혜 세상이다. Kbs 라디오를 자주 듣는데, 요즘 동구밭 과수원길, 뭐 이런 노래도 나오고, 목화밭도 나온다. 70년대 복고풍이라고 하기에는, 정말 복고스러운. 박근혜와 같이 살아갈 세상이 어떤 것인지 미리 보여주는 듯하기도 하다.

 

지난 6개월간은 정말 fta와 같이 살아왔고, 하루의 대부분을 fta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보냈다.

 

발효는 이미 했고, 한중 fta, 한일 fta, 연일 난리이다.

 

그 와중에 모든 일정을 뒤로 미루어놓고 fta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게, 이게 생각보다 어렵다.

 

그래도 누군가는 얘기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붙잡고는 있는데, 흥이 막 나서 신이 나는 그런 상황이 아닌 건 당연하지 않은가?

 

원래 꽃 사진도 잘 안 찍고, 접사도 별로 즐기는 편은 아니다. 올 봄에는, 꽃 사진을 아주 많이 찍었고, 안 하던 접사도 많이 했다.

 

작은 것에서라도 기쁨을 찾거나, 아름다움을 찾지 않으면, 지금 어떻게 버티면서 계속해서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갈 수 있겠나, 그런 거 아니었나 싶다.

 

마당에 감자꽃이 피는 날, ‘fta 한 스푼본문을 끝냈다. 잠시 머리 좀 돌리고, 에필로그를 마치고 나면 지난 겨울부터 끌어온 fta 책은 내 손을 떠나간다. 물론 뒤쪽에서 생각이 좀 바뀐 것들이 많아서, 앞 쪽 내용들에 튜닝을 좀 해야하기 때문에, 당장 원고 작업이 끝나는 건 아니다.

 

한참 진행 중인 사안에 대해서 책을 쓰는 것은, 변화하는 상황을 계속해서 보고, 출간된 시점에서의 상황 그리고 그 후의 6개월, 1년 후도 조금씩은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에, 특히 머리가 아프다.

 

Fta 같은 경우는, 급격하게 사회적 힘이 빠지고, 패배와 좌절감 그리고 그 후에 몰려오는 아른한 듯한 피곤함, 그런 것들 앞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이 특별히 힘든 경우였다.

 

총선은, 졌다. 그리고 총선의 패배 이후로, 소위 해석투쟁이라고들 하는데, 중 정치인들은 한미 fta를 전면에 내걸었던 것을 패배 이유로 찾는 것 같다. 별로 그런 것 같아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얘기를 한다고 해서, 뭐 특별하게 할 얘기가 있지도 않고, 서로 명예롭게 논쟁을 이끌어나갈 듯 싶지도 않아, 그냥 입 다물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는 통합진보당 사태가 생겼다.

 

정치적으로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어쨌든 fta 싸움의 한 영역을 맡아주던 곳이, 그렇게 그냥 무너져 내려갔다. 그 사람들, 지금 fta 고민할 정신은 없을 거다.

 

가만히는 있지만, 참 힘들다.

 

그렇다고 엄청난 한 방이 있어서사실 그런 것도 아니다. 틀을 바꾸고, 프레임을 바꾸어서 다른 해석을 해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나라고 무슨 땡수가 있어서, 다들 기둘려봐,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별 수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상황에서, 꾸역꾸역 참으면서, 하여간 일단 본문은 마쳤다. 재밌는 얘기도 꽤 들어갔고, 전혀 다른 시각도 좀 들어가 있지만결정적 한 방은, 없다. 하긴, 그런 게 이런 구조에서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노무현 컨센서스라는 말을 새로 만들었다.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제일 적절한 용어인 것 같아서, 며칠 고민을 하다가 그냥 썼다.

 

마지막 몇 페이지를 한달음에 썼는데, 감자꽃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본 게 사실이다.

 

보통은 감자 꽃이 피게 두지는 않는다. 감자는 뿌리에서 열리는 거라서, 꽃이 피어간 말거나 상관도 없고, 씨감자도 그냥 감자에서 나온다. 괜히 영양이 꽃으로 가는 건 손해라서, 감자 꽃은 떼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꽃이 피어야 열매를 맺는 다른 작물과는 좀 다르다.

 

내가 감자 키워서 팔 것은 당연히 아니고, 오히려 씨알이 작은 씨감자가 찌개에 넣으면 더 맛있다. 껍질 안 벗기고 넣을 수 있는 작은 감자, 햇감자.

 

감자 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감자에게서

 

존재에 의미 같은 게 있겠나, 그냥 존재는 존재로서의 의미이다. 그리고 그 존재로서 아름다운 것이다.

 

별 의미는 없을지 몰라도, 감자 꽃에 대한 생각은, 문득 이 시기의 내 삶에 대한 생각과 비슷하게 만나는 점이 있는 것 같다.

 

시대, 참 어두운 시대를 살아간다. 한미 fta에 대해서 고민하는 내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게 무슨 정치 절차를 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엄청난 사회적 절차를 새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난 최선을 다했다, 그런 알리바이를 만들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왜 난 이 작업을 삭발도 하고, 금주도 하면서, 끝까지 끌고 왔을까? 딱히 대답하기가 어렵다.

 

감자 꽃에게, 넌 누구니, 그렇게 물어보고 싶지는 않다. 나도 나에게, 너무 힘들게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본문의 마지막 절은, ‘통상 거버넌스라는 딱딱한 제목으로 끝난다. 외교부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행정적인 질문인데, 통상교섭본부의 귀속에 관한 내용이다.

 

지난 겨울, 이해영 선생과 이 주제를 가지고 같이 토론회를 한 번 만들어보기로 국회에서 약속을 했었는데, 서로 정신이 없어서 그냥 넘어간 적이 있다. 그 얘기를 마지막 부분에 정리해 넣은 거다.

 

10년 전인가, 외교부에서 파견근무 요청이 온 적이 있었다. 지금 내가 문제삼고 있는, 바로 그 통상교섭본부이다. 당시는 아마 경제국이었나, 그렇게 기억난다.

 

그 때 나는 공직생활 아니 직장생활을 정리하려는 생각을 막 시작한 때라서, 별 이유도 대지 않고 그냥 싫다고 그랬던 적이 있었다.

 

정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일인데, ‘fta 한 스푼을 마무리지으면서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 그 때 외교부로 갔었으면 내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문득 그 생각이 들었다. 잘 모르겠다. 어떻게 되었을지.

 

 

 

 

 

 

(어제 꽃망울은 이렇게 생겼었다. 이게 하루만에 꽃잎을 피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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