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맛골이라는 데가 있다. 서울 생활 했던 중년들에게는, 약간씩의 추억이 있는 거리일 것이다.

 

이명박, 오세훈의 서울시를 거치면서, 뭐... 결국 뤼미에르라는 빌딩 아래 켠의 작은 소품으로 전락한 작은 통로가 되었다.

 

종로로 이사온 다음에, 아내와 가장 자주 오는 건물이기도 하고,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기도 하다.

 

아내가 활동가이던 시절, 주로 했던 일 중에 피맛골을 지키는 일도 있었다. 그러니까 아내와 나는 연애 시절에, 피맛골에서 술을 마신 게 아니라, 피맛골을 지키는 일을 같이 했었다.

 

참 지키고 싶었던 골목이고, 많은 사람들이 정성을 모으기도 했었는데...

 

조선 시대부터 내려온 이 골목 하나를 우리는 지킬 수가 없었고, 우리의 시대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시대였다.

 

어쩌면, 지난 10년, 지는 데 나는 너무 익숙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뭔가 지키려고 했지만, 정말로 온전히 제 모습을 가지고 버틸 수 있게 하는 게 쉽지가 않았다.

 

지금도 피맛골을 보면, 여전히 가슴 한 구석이 아리다.

 

어떤 기억이 있을까?

 

한 때 금융경제연구소라는 작은 연구소에서 이종태, 홍기빈, 이런 사람들과 같이 복닥거리면서 지냈던 적이 있었다. 이종태, 이 양반과 처음 술을 마셨던 곳이 피맛골이었다. 마지막으로 피맛골에서 술을 마셨던 것은, 이곳이 헐리기로 확정된 후, 아마 공지영 선배와 고갈비를 먹었던 때가 아닌가 싶다.

 

동경에 갔을 때, 그 사람들 표현대로 '오줌 골목'이라는 곳에 가본 적이 있었다. 진짜 조그만 일본식 바에서 아주 색다른 기분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도시가 나이를 먹으면서, 예전 것은 없어지고, 새로운 것이 생겨나기는 한다. 그렇지만 서울 한 가운데 있는 종로의 피맛골을 지키지 못했던 것, 그게 우리가 보냈던 2000년대이다. 이 골목에 들어올 때마다, 조선 시대의 애환이 기억나는 게 아니라, 여기에 요렇게 '피맛골'이라는 간판 하나 덜렁 남겨둔 우리의 개발 시대에 대한 생각이 더 많이 든다.

 

생각해보면, 지난 15년, 생태든 문화든, 나는 무엇인가 지키고 보전하기 위해서 젊은 시절을 불태웠던 것 같다. 현장에서 그 싸움을 접고, 은퇴를 생각하는 순간, 나는 중년이 되어 있었다.

 

그 시간 동안, 한국의 보수는 도대체 무엇을 했나, 그런 생각이 잠시 든다.

 

뭐든 부수고, 뭐든 밀고, 뭐든 엎어버리고, 그 와중에 떡고물 챙기고, 부패하고...

 

보수는 무엇인가 지키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한다. 도대체 한국의 보수는, 뭘 지키고 보존하겠다는 것인가, 피맛골에 나무로 걸어놓은 명찰을 보면서...

 

저게 한국의 보수가 스스로의 가슴에 달아놓은 명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 해가 지기 시작한 순간,

 

피맛골에 불이 켜지기 시작한다.

 

조선 시대, 아니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선술을 찾아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을 시간,

 

을씨년스러운 싸구려 보도블록의 차가움이 골목을 스산하게 스쳐간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이 골목은 그런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다.

 

시민운동이 피맛골에 해놓은 것은, 저 '피맛골 명찰 하나였던 것 아닌가?

 

명박이 우리에게 남겨놓은 상처, 그게 바로 이 골목에 서 있다.

 

완전히 망해버린 영화 '공포 택시'에 나오는 유령들이 모여서 술 한잔씩 하는 골목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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