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윤, ‘여행, 혹은 여행처럼

 

곽노현 사건은, 우리의 감성을 시험대에 들게 한다. 논리적으로야 뻔한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어디 사람이 그렇게 간단한 존재이던가?

 

나는 어렸을 때 그렇게 넉넉하지 않은 편이라서 민어탕을 먹어본 적이 없다. 서울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복날 개를 먹거나 닭을 먹었다고 하고, 양반들은 민어를 먹었다고 한다. 곽노현 교육감을 처음 보던 날그 때도 복날이라서 민어탕을 먹었는데, 오랫동안 그가 했던 말보다는 민어탕의 미감이 더 오래 떠올랐다. 그 때 같이 식사한 또 다른 양반들도 모두 어린 시절에 민어탕 먹었던 얘기를 했는데, 나는 그런 생선이 있다는 것도 어른이 되어서 처음 알았다. 따져보면 나는 생선장사집 후손인데, 민어를 모르다니, 그런 생각들을 좀 했었다.

 

어쨌든 생각을 돌리거나 잠시 숨이라도 쉬기 위해서는 당장 뭔가 읽었어야 했는데, 그 때 딱 내 손에 잡힌 책이 정혜윤의 <여행, 혹은 여행처럼>이라는 에세이집이다.

 

수필집에서도 니 편, 내 편을 나누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정혜윤의 글을 읽다보면, 우리 편 한 가운데 들어와있다는 묘한 안도감. 결국 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세상 모든 일은 다 니 하기 다름이다라는 메시지가 가득 차 있지만, 잠시라도 아니, 그렇지 않아요라고 얘기하는 또 다른 세상들 사이에서 숨이라도 좀 돌려가면서.

 

정혜윤의 <여행, 혹은 여행처럼>을 읽다보면 매우 특별한 고립계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도시빈민들이 어쩔 수 없이 몰려간 게또라기 보다는 몽골 초원에 있는 게르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미안하지만, 나도 말만 들었고, 몽고에 가 본 적은 없다.)

 

이동식 천막인 게르는 가족 단위로 거주하는데, 게르와 게르 사이의 거리는 보통 50킬로미터, 그 안에서 주인의 환대를 받으면서 소박한 유목민의 저녁 식사에 잠시 초대되어 초원에서의 황량함을 잠시 잊는 느낌.

 

보통 때 같으면,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혹은 “Show must go on”, 이런 뻔하디 뻔한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인간 곽노현이 캐발림 당하는 상황에서 귀를 틀어막고 싶은 현 상황에, 정혜윤은 기꺼이 게르의 안주인이 되어준다.

 

인터뷰와 여행에 대한 짧은 에피소드와 시나 신화와 같은 연결구들로 진행되는 이 책은, 아마 저자는 일종의 메타 여행과 같은 구도를 구상하였을 법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게르의 여주인과의 환담 그리고 그 안에서 TV를 틀어놓고 야밤에, 즉 오디션 쇼나 서바이벌 같은 예능방송도 다 지나간 시간에, 시청률 1%짜리 다큐 방송을 하나 같이 본 느낌

 

만약 방송이 지금처럼 막히지 않았다면 정혜윤의 게르에 초대된 초대 손님들은 당연히 공중파 한 가운데에서 대중들을 접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명박 시대, 그리하여 정혜윤의 게르에서 만나는 수밖에 없다.

 

소모뚜의 얘기가 아주 인상 깊었고, 시인 송경동의 구구절절한 사연 역시 가슴 한 구석을 부벼팠다. 송경동, 그렇다, 희망버스의 제안자 바로 그 송경동. 신문의 사진 기자를 그만두고 다큐 사진작가가 된 임종진의 사연도 가슴에 깊게 남는다. 줄치면서 책을 보는 습관이 있는데, 이 책에는 딱 한 줄을 치게 되었다.

 

대신 기자의 시선이 아니라 인간 임종진의 시선이 남았습니다.”

 

상당히 재밌게 본 사연인데, 줄을 쳐놓은 문장 하나만 맥락에서 떨어뜨려 딱 떼어놓으니, 뭔 말이래? 이렇게 되었다.

 

진딧물 얘기, 라틴어 얘기, 전부 재밌었는데, 하나하나 에피소드로 놓고 보는 것보다, 예를 들면 나무의 얘기에서 같이 더불어 살아가는 진딧물의 얘기, 그리고 관계를 노래하고자 했던 시인 송경동, 이렇게 얘기와 얘기 사이를 넘어가면서 확장되는, 일종의 변증법적 구조가 끈끈하게 얘기들 밑을 흐른다.

 

어느덧 문학은 손 끝 하나 까딱하기 싫은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기교를 연마하는 것과,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똑 같이 된 것 같다. 장편소설 한 권을 읽고 나면, 뭔가 긴 여행을 하고 난 듯한 느낌이 나기를 기대하는데허무만이 남아서 작년부터 한국 소설을 잘 안 보게 되었다.

 

마음이 평온할 때에는, 그래도 이런저런 잔재미를 찾으면서 읽을 수 있는데, 권노현 사태로 안 그래도 앞길도 잘 안 보이고 마음도 답답할 때 그런 소설을 읽으면, 정말 답답해서 디져버릴 것 같다.

 

그것이 설령 라디오 혹은 월간지 안에 임시로 펼쳐진 우리들만의 게르라고 할지라도, 지금은 정혜윤처럼 확실히 우리에게 할 말이 있는 사람이, 이들과 같이 합시다, 그렇게 얘기하는 책이 딱일 듯 싶다.

 

어제 오후에 읽기 시작해서, 딱 오늘 오후에 끝났다. 이거야말로 정혜윤표 12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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