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새로 배우는 것들 1

 

20살 안팎의 나이였던 것 같다. 그 때는 ‘inspiration’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했다. 그 때는 뜻이나 알면서 좋아했던 건지도 잘 모르겠다. 하여간 영감이나 혹은 충동, 그렇게 갑자기 떠오르는 이미지, 그 정도 뜻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아마 경제학에 대해서 내가 가장 많은 영감을 가졌던 것이, 아마 박사과정 2년차에서 3년차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그 때는 작은 노트를 가지고 다니면서 나중에 쓰고 싶은 책의 리스트를 적는 게 중요한 취미생활이었다. 인터넷은 내가 학위를 받은 즈음에나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고퍼도 거의 학위 마칠 때쯤이었고, 대학에서 이메일 계정이라는 것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거의 학위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노트북은 가지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맨날 컴퓨터만 붙잡고 있을 수도 없었고,

 

혼자 다니는 시간이 거의 대부분이니, 카페에서 잠시 커피 한 잔 마시고 쉴 때 뭔가 할 일이 필요하다. 그 때 앞으로 쓰고 싶은 책의 제목을 쓰거나 고치거나, 찢어버리거나, 하여간 그게 혼자서 카페에서 놀 때 가장 편하게 할 수 있는 놀이였다. 작은 수첩과 펜 하나만 충분히 커피 두 잔 정도는 심심하지 않게 마실 수 있다. 그 때 수첩은 벌써 잊어버렸는데, 그 시절에 내가 쓰고 싶던 책과 지금의 책은, 일부분을 제외하면 아주 다르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게 바로 지금의 책이 된 것은 아니고

 

한 번쯤 더, 정말로 내가 뭘 하고 싶고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많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가 초록정치연대 정책실장을 하던 시절이다. 지금 쓰는 경제학 책들의 원형은 대부분 그 시절의 노트 같은 데에서 나왔다. 그 시절에 끄적거려 놓은 것과 전혀 상관없는 책이, 없는 것 같다. 하던 생각이 전개되지 않고 죽는 법은 있어도, 해보지도 않은 생각이 글로 나와서 책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내가, 참 게으르다. 몇 년째, 그 시절에 했던 생각을 정리하고, 또 정리하는 그런 일만 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그 중간에, 그야말로 틈틈이 새로 배우는 것들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수 년째 나의 일상은 정리하는 일 밖에 없다.

 

지금 10권째에서 서 있는 경제 대장정이나, 한참 중간을 넘어 파이널로 피치를 올리고 있는 나꼽살이나, 내가 여기에서 경제학에 대해서 뭔가 배우는 것은 아니다. 이미 알고 있거나 생각했던 것을 포맷을 바꾸거나, 전달하는 방식 혹은 요소들의 앞뒤 연결 고리만 바꾸는 일이다.

 

사실 내가 모르는 것을, 남한테 설명할 수가 있겠나? 그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내가 부지런하게 취재를 다니는, 뭐 그런 인간은 절대 아니고.

 

아는 건 아는 거고, 모르는 거는 모르는 거다이게 내 인생 철칙 중의 하나이다. 잘못 알고 있는 건 있을 수 있다. 이건 모르는 거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중간, 그건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아는 것 중에도, 모르는 것이 있다.

 

영감이라고 하는 단어를 쓰거나, 모티브라는, 동기의 의미를 가지고 있거나이런 게 분노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분노가 사람을 움직이기는 하지만, 그 분노는 오래 갈 수가 없다. 하루 종일 화낼 수도 없고, 몇 년째 화만 내고 있을 수도 없다. 사람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공부든, 작업이든, 분노로 시작한 것은 오래 못가는 듯 싶다.

 

분노가 해소되는 일은 거의 없다. 분노를 출발하게 만든 그 사건이, 사람이 살아가는 한에서는 해소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그런 구조적인 일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MB라는 틀이 기본적으로 이런 딜레마 안에 들어가 있다. 이 인간이 좀 황당한 인간이기는 하지만, 정말로 인간 하나 이상하다고 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건 아니다. 그래서 아무리 그를 미원한다고 해도, 그 구조를 바꾸기는 어렵다. 게다가 어차피 대선이라는 게, 지나간 대통령을 뽑는 게 아니라 다음 사람이 나오는 구조쟎아? 박근혜도 미워하자! 말이 쉽지, 그 미움의 감정이 그렇게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한 두번 건너가면 그 강도가 약해지게 된다.

 

맨날 벽에 사진을 걸어놓고 미워하자!

 

이거, 자기가 먼저 지친다. 누구도 그렇게 증오만 하면서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

 

세상의 증오라는 것은, 많은 경우, 지쳐서 사라지거나, 증오의 에너지를 다 써버려서 결국은 잊혀지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지 못한다.

 

나라고 싫은 사람이 왜 없겠나?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숫자만큼 나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고, 당연히. 그러나 사실 이제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예전에 헤어진 연인이 그렇게 미웠던 적이 있었는데, 하나씩 잊혀져 가다, 나중에는 아예 이름도 잊혀지게 된다. 그게 정상이다. 그걸 다 기억하면, 못 산다.

 

증오보다는 돈이 조금은 더 솔직하고, 에너지의 강도도 높다고 할 수 있을 듯 싶다.

 

증오가 사물에 대한 관계라면, 돈은 조금 더 보편적이고 밋밋한 것이다. ‘보편적 등가물’, 그야말로 돈이야말로 평등하면서도, 동시에 얕은 감정이다. 그 대신, 오래 간다. 등가물, 이 사람은 저 사람과 치환되지 않지만, 이 돈은 저 돈과 치환된다.

 

돈을 위해서이건 솔직한 거다. 돈 때문에, 이렇게 이유를 댈 때, 뭐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돈이 갖는 에너지로서의 한계는, 돈이 주는 에너지는 다른 돈으로 치환된다는 점 아닐까 싶다. 이렇게 벌든, 저렇게 벌든, 돈만 벌리면 돈의 궁핍으로부터 생겨난 정신적 에너지는 소멸된다. 그래서 돈이 허무한 거다. 쥐어봐야,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물론 그 돈에 대한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사람들도 종종 있는 듯 싶다. 예를 들면 명박. 요건 기본적으로는 악마인데, 따져보면 그 인간도 불쌍한 인간이다. 명박을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돈에 대한 욕구가 돈의 양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영화 <나자리노>에는 사탄이 늑대인간에게, 사실은 자기는 외롭고 힘들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있다. 늑대인간이 사랑을 선택했기 때문에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텐데, 그 때 자기가 힘들다고 애기를 좀 해달라고

 

악마도 잘 생각해보면, 불쌍한 구석이 있기는 할 듯 싶다. 물론 대부분의 우리는, 그런 걸 불쌍하게 생각할만큼 그렇게 속이 깊지 못하고, 또 삶이 팍팍해서, 그렇게까지 여유를 부리기가 쉽지는 않다.

 

그보다 상층의 동기는?

 

- 계속

 

Posted by reti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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