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새로 배우는 것들 1

 

20살 안팎의 나이였던 것 같다. 그 때는 ‘inspiration’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했다. 그 때는 뜻이나 알면서 좋아했던 건지도 잘 모르겠다. 하여간 영감이나 혹은 충동, 그렇게 갑자기 떠오르는 이미지, 그 정도 뜻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아마 경제학에 대해서 내가 가장 많은 영감을 가졌던 것이, 아마 박사과정 2년차에서 3년차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그 때는 작은 노트를 가지고 다니면서 나중에 쓰고 싶은 책의 리스트를 적는 게 중요한 취미생활이었다. 인터넷은 내가 학위를 받은 즈음에나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고퍼도 거의 학위 마칠 때쯤이었고, 대학에서 이메일 계정이라는 것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거의 학위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노트북은 가지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맨날 컴퓨터만 붙잡고 있을 수도 없었고,

 

혼자 다니는 시간이 거의 대부분이니, 카페에서 잠시 커피 한 잔 마시고 쉴 때 뭔가 할 일이 필요하다. 그 때 앞으로 쓰고 싶은 책의 제목을 쓰거나 고치거나, 찢어버리거나, 하여간 그게 혼자서 카페에서 놀 때 가장 편하게 할 수 있는 놀이였다. 작은 수첩과 펜 하나만 충분히 커피 두 잔 정도는 심심하지 않게 마실 수 있다. 그 때 수첩은 벌써 잊어버렸는데, 그 시절에 내가 쓰고 싶던 책과 지금의 책은, 일부분을 제외하면 아주 다르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게 바로 지금의 책이 된 것은 아니고

 

한 번쯤 더, 정말로 내가 뭘 하고 싶고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많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가 초록정치연대 정책실장을 하던 시절이다. 지금 쓰는 경제학 책들의 원형은 대부분 그 시절의 노트 같은 데에서 나왔다. 그 시절에 끄적거려 놓은 것과 전혀 상관없는 책이, 없는 것 같다. 하던 생각이 전개되지 않고 죽는 법은 있어도, 해보지도 않은 생각이 글로 나와서 책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내가, 참 게으르다. 몇 년째, 그 시절에 했던 생각을 정리하고, 또 정리하는 그런 일만 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그 중간에, 그야말로 틈틈이 새로 배우는 것들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수 년째 나의 일상은 정리하는 일 밖에 없다.

 

지금 10권째에서 서 있는 경제 대장정이나, 한참 중간을 넘어 파이널로 피치를 올리고 있는 나꼽살이나, 내가 여기에서 경제학에 대해서 뭔가 배우는 것은 아니다. 이미 알고 있거나 생각했던 것을 포맷을 바꾸거나, 전달하는 방식 혹은 요소들의 앞뒤 연결 고리만 바꾸는 일이다.

 

사실 내가 모르는 것을, 남한테 설명할 수가 있겠나? 그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내가 부지런하게 취재를 다니는, 뭐 그런 인간은 절대 아니고.

 

아는 건 아는 거고, 모르는 거는 모르는 거다이게 내 인생 철칙 중의 하나이다. 잘못 알고 있는 건 있을 수 있다. 이건 모르는 거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중간, 그건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아는 것 중에도, 모르는 것이 있다.

 

영감이라고 하는 단어를 쓰거나, 모티브라는, 동기의 의미를 가지고 있거나이런 게 분노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분노가 사람을 움직이기는 하지만, 그 분노는 오래 갈 수가 없다. 하루 종일 화낼 수도 없고, 몇 년째 화만 내고 있을 수도 없다. 사람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공부든, 작업이든, 분노로 시작한 것은 오래 못가는 듯 싶다.

 

분노가 해소되는 일은 거의 없다. 분노를 출발하게 만든 그 사건이, 사람이 살아가는 한에서는 해소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그런 구조적인 일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MB라는 틀이 기본적으로 이런 딜레마 안에 들어가 있다. 이 인간이 좀 황당한 인간이기는 하지만, 정말로 인간 하나 이상하다고 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건 아니다. 그래서 아무리 그를 미원한다고 해도, 그 구조를 바꾸기는 어렵다. 게다가 어차피 대선이라는 게, 지나간 대통령을 뽑는 게 아니라 다음 사람이 나오는 구조쟎아? 박근혜도 미워하자! 말이 쉽지, 그 미움의 감정이 그렇게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한 두번 건너가면 그 강도가 약해지게 된다.

 

맨날 벽에 사진을 걸어놓고 미워하자!

 

이거, 자기가 먼저 지친다. 누구도 그렇게 증오만 하면서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

 

세상의 증오라는 것은, 많은 경우, 지쳐서 사라지거나, 증오의 에너지를 다 써버려서 결국은 잊혀지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지 못한다.

 

나라고 싫은 사람이 왜 없겠나?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숫자만큼 나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고, 당연히. 그러나 사실 이제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예전에 헤어진 연인이 그렇게 미웠던 적이 있었는데, 하나씩 잊혀져 가다, 나중에는 아예 이름도 잊혀지게 된다. 그게 정상이다. 그걸 다 기억하면, 못 산다.

 

증오보다는 돈이 조금은 더 솔직하고, 에너지의 강도도 높다고 할 수 있을 듯 싶다.

 

증오가 사물에 대한 관계라면, 돈은 조금 더 보편적이고 밋밋한 것이다. ‘보편적 등가물’, 그야말로 돈이야말로 평등하면서도, 동시에 얕은 감정이다. 그 대신, 오래 간다. 등가물, 이 사람은 저 사람과 치환되지 않지만, 이 돈은 저 돈과 치환된다.

 

돈을 위해서이건 솔직한 거다. 돈 때문에, 이렇게 이유를 댈 때, 뭐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돈이 갖는 에너지로서의 한계는, 돈이 주는 에너지는 다른 돈으로 치환된다는 점 아닐까 싶다. 이렇게 벌든, 저렇게 벌든, 돈만 벌리면 돈의 궁핍으로부터 생겨난 정신적 에너지는 소멸된다. 그래서 돈이 허무한 거다. 쥐어봐야,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물론 그 돈에 대한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사람들도 종종 있는 듯 싶다. 예를 들면 명박. 요건 기본적으로는 악마인데, 따져보면 그 인간도 불쌍한 인간이다. 명박을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돈에 대한 욕구가 돈의 양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영화 <나자리노>에는 사탄이 늑대인간에게, 사실은 자기는 외롭고 힘들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있다. 늑대인간이 사랑을 선택했기 때문에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텐데, 그 때 자기가 힘들다고 애기를 좀 해달라고

 

악마도 잘 생각해보면, 불쌍한 구석이 있기는 할 듯 싶다. 물론 대부분의 우리는, 그런 걸 불쌍하게 생각할만큼 그렇게 속이 깊지 못하고, 또 삶이 팍팍해서, 그렇게까지 여유를 부리기가 쉽지는 않다.

 

그보다 상층의 동기는?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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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이 함께 하기를!

 

‘fta 한 스푼이 오늘 예약판매가 시작되었다. 아마, 오랫동안 시간이 지나도 이 순간을 잘 잊지 못할 것 같다. 앞으로도 몇 권 더 나올 게 있고, 책 작업은 당분간 계속 하기는 할 것이지만경제학자로서의 내 삶은, 이 책에 걸었다. 아니 모두 묻었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일까?

 

열정이라

 

20대에는 열정과 분노가 아주 컸던 것 같고, 30대에도 열정만큼은 컸던 것 같다. 그 대신, 나는 꿈 같은 것은 가져본 적이 없던 것 같다. 하기로 한 건 열심히 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꼭 나의 꿈인 것은 아니었다. 기후변화협약의 정부 대표로 협상에 나서던 시절, 열정적으로 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게 내 꿈이 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총리실 근무하던 시절에도 열정적으로 일을 했던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내 꿈인가? 그런 꿈은 가져본 적이 없다.

 

작년 10월 후반에서 11월을 거치면서, 나는 사람들과 한미 fta라고 불리는 줄 앞에 서 있었다. 그냥 내 양심이 시키는 대로 했다. 원래는 한미 fta에 대한 책 계획이 없었는데, 그 줄 한 가운데에서 책 한 권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상식적으로, 합리적으로는, 그 책은 쓰지 않는 편이 좋은 책이다. 그걸 내가 모르는 건 아니다. 짧게 보건, 길게 보건, 쓰지 않는 편이 낫다. 아직도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면 말이다.

 

이 시점에서, 정권이 바뀌든, 바뀌지 않든, 한미 fta에 경제학자로서 반대한다는 건, 한국에서는 아무 것도 안 하겠다는 말과 마찬가지이다.

 

냅둬요, 그냥 생긴 대로 살래요

 

어차피 많은 걸 포기하고 살고, 또 포기할려고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걸 이 시점에서 이런 식으로 할 필요가 있느냐, 나에게 많은 사람들이 해준 얘기가 이런 거다.

 

세 번의 큰 사건이 있었다.

 

국회 날치기 사건이 있었고, 한미 fta 발효가 있었고, 에 또총선에서의 패배가 있었다.

 

그 사이에 사람들은 대부분 떠나갔고, 시간은 흘러갔다. 포지션을 잡는다고 할 때, 이게 아주 어렵게 되었다.

 

그 와중에, 책을 그만 내려놓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여러 번이 있었다. 일단 입장을 정하기가 어렵고, 그러다보니 어디에서 논쟁점을 잡아야 할지, 그런 기술적인 고민들이 있었다. 그리고 님 떠난 빈들에서, 그런 생각도 강했고. 이미 사람들은 다 떠났는데, 나 혼자 빈들에 앉아 이게 무슨 가지학대적인 고민이람, 그런 생각도 많이 들었다.

 

이미 끝난 걸 뭐하러 붙잡고 있냐, 대표적인 목소리가 이준익 감독이었다. ,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진취적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미 지나간 건 어쩔 수 없고, 다음 방어선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는 얘기를 주로 했다.

 

아 참, 내가 이렇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느껴진 건, 정말 대학 시절에 처음 경제학 책을 진지하게 보기 시작한 이후로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내가 내놓을 수 있는 건, 그 과정에서 거의 다 내놓은 것 같다.

 

삭발은 진짜 애교이고. ‘88만원 세대절판은 그 다음에 이어서 한 거고.

 

더 내려놓을 수 있는 게 있으면 더 내려놓으려고 했는데, 그 다음에는 내려놓을 게 없었다.

 

총선 끝나고, 사람들이 멘붕을 호소하는 그 시점에

 

나는 금주를 했고, 한미 fta에 대한 입장과 생각들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이석기 사건이 생겨났고.

 

그 와중에 한미 fta는 무슨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을지, 대선이 무슨 소용아람!

 

시대에 뒤떨어지는 아주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는 걸 감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게 좀 멋지게 표현하면 시대의 불쏘시개’…

 

원래는 모든 공포의 총합으로 시작했던 컨셉에서 ‘fta 한 스푼으로 바꾸게 된 건, 정말로 일반인들과 아주 길게 그리고 아주 오래, 많은 대화를 나누고 난 다음이다.

 

모든은 나는 못하겠고, ‘한 스푼은 하겠고.

 

그래서 한미 fta 논의에 나는 딱 한 스푼만큼 더 한다고 가볍게 마음을 먹은 다음에, 세워놓았던 원고를 다시 붙잡을 수 있었다.

 

불쏘시개로 그냥 활활 타오르는, 뭐 그 이상은 나는 못하겠고.

 

불쏘시개에 불을 붙인다고 그게 정말로 나무에 불이 붙을지, 그건 잘 모르는 거고. 불쏘시개는 그냥 불쏘시개 답게 확 타버리면 그만 아니겠남?

 

하여간 책 한 권이 발간되게 하는 것, 그 이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처음에는 총선을 생각하면서 대선과 총선 사이에 국회에서 할 수 있는 조치들을 디자인하면서 작업을 시작했는데

 

총선 이후로는, 대선 과정에서도 한미 fta는 필요 없는 논의가 되어버렸다. 그거야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래도 자신의 삶을 위해서 그런 논의가 필요한 국민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요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정확히 말하면 내 주변 사람들이 치룬 대가는 크다. 원고를 마무리지을 때까지, 그 전의 모든 일정들을 다 세웠고, 원래 있던 계획들은, 개판이 되었다.

 

내 삶도 완전 개판이 되었고, 같이 작업하던 동료들의 삶도 덩달아 같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 후에 이 상황을 수습하느라고 하는 만큼 하지만, 한 펀 개판이 되어버린 삶이, 최소한 일정이라도 원래대로 돌아오지는 못했다.

 

어쨌든 그렇게 난리굿을 치면서 만들어낸 책이 예약판매가 걸린 게 오늘이다.

 

원래 예약판매 같은 건 거의 안하는 편인데, 한미 fta 논의에서, 이것저것 가릴 게 뭐가 있겠나 싶어서 그냥 하자고 했다.

 

어쨌든 경제학자로서 시대의 맨 앞이 아니라, 시대의 맨 뒤에 서게 되는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남들보다 먼저 논의를 하는 게 아니라, 논의 다 끝난 뒤에 저 뒤에 서서,

 

, 아직 이 얘기는 안 해봤쟎아…”,

 

요런 상황에 되었다.

 

난 그걸 받아들였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맨 앞에 서는 것만이 학자로서 할 일이 아니라, 맨 뒤에 서는 것도

 

비겁한 변명입니다!

 

영화 <실미도>에 나오는,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유행하게 된 대사가 생각난다.

 

맨 뒤에 서 보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기는 하다. 아마 이 상태로 작은 불소시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어떠랴.

 

이 시대에 경제학자로서 살았던 나는, 내가 꼭 해야 할 얘기를 했고, 그걸 두려워하지는 않았다는, 그야말로 내가 왜 살았는지, 그건 나한테 설명할 수는 있게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한 스푼은 정말로 나를 위한 제목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많은 걸 바꾸려고 하면 아무 것도 못하게 된다. ‘한 스푼만큼은, 혼자서라도 할 수 있는 것아닌가 싶다.

 

한미 fta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나는 늘 눌려 있었고, 웃음을 갖기가 어려웠다. ‘한 스푼이라는 제목을 달고서야 비로소 유머와 명랑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이 책과 함께, 내가 치룬 대가 중에 큰 건, 복지와 금융 등 많은 것을 같이 고민하던 동료들과 가은 자리에 앉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대부분, fta의 세계로 건너갔다.

 

나는 건너가는 대신, 그냥 여기서 늙어 죽으리라, 그렇게 선택을 했다.

 

몇 년 전부터 쓰던 구호인데, 지난 몇 달 동안 나를 지켜주었던 구호가 하나 있었다.

 

명랑이 함께 하기를!

 

아직 fta의 나라로 건너가지 않은 모두에게, 이 말을 드리고 싶다.

 

명랑이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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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문>에 관한 짧은 메모

 

 

 

1.

용산 참사가 벌어지던 날은, 공교롭게도 동경에 있던 날이었다. 그 사건에 대한 얘기를 건네 들으면서, 정말로 놀랐다.

 

2.

영화 보는 내내, 좀 괴로웠다. 당연한 것이고. 그리고 또 괴로웠다. 나라면 이 얘기를 어떻게 처리했을까, 어떻게 다루었을까, 그런 생각들이.

 

3.

죽어라고 보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들을 극장으로 인도할 방법은 별로 없다. 용산참사, 과연 우리는 누구와 싸우고 있는 것일까?

 

영화 내에, 이건 일종의 기준이 되어서, 이 정도로 해도 사람들은 별 반응이 없겠구나, 그런 인터뷰가 나온다. 사실 이게 이 영화의 주제일런지도 모르겠다.

 

너무 재밌는 것이 많기도 하고, 너무 충격적인 것이 많기도 하고, 또 너무 안 보고 싶은 것이 많기도 해서

 

사람들이 시선을 단 1분 붙잡고 있기도 힘들다.

 

4.

누군가는 만들었어야 할 영화이고, 과연 누군가 만들었다.

 

그게 시대의 미학이라는 생각을 잠시.

 

연출 기법이니, 플롯을 잡아가는 방식이나 등등필요 없다일단 그 영화를 만들어서 우리 앞에

 

5.

그래도 힘이 나지 않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걸 사람들한테 전달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tv에서 다큐로 만들면 그만인 걸, 극장까지 가서 봐야 하나

 

요건 속 편한 얘기인데, 우린 지금 공중파가 막힌 시대를 살고 있다.

 

6.

큰 모티브는 두 가지로 보였다.

 

얘기치 않던 죽음, 그리고 사라진 진실.

 

죽음을 맨 처음에 보여주었다. 그리고 진실이 사라졌다는 건, 아마 극장에 있던 모두가 이미 알고 있던 것이었다.

 

이 두 개를 놓고, 긴장감을 만드는 연출이런 생각을 잠시 했었는데, 이것도 배부른 투정이다.

 

죽음 앞에 다른 진실이 뭐가 더 필요하겠나? 요즘 재밌는 영화들을 너무 많이 봐서, 내가 배가 부른 거다.

 

7.

한 번 더 볼 꺼냐? 아무래도 극장에서 한 번 더 볼 것 같지는 않고, DVD가 발매되면 살 것 같기는 하다. 분석하려면 정식으로 여러 번 충분히 보고 분석을 하고, 아니라면

 

이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묵념.

 

8.

국가의 폭력, 특히 이런 어처구니 없는 폭력은,

 

나나, 내 주변 사람에게나, 혹은 우리 모두에게나 생겨날 수 있다.

 

한 다리 건너 철거민 식구가 없는 국민은 없고, 무엇보다도

 

이 사건은 철거민들에게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계를 운영하는 자영업자나 심지어 멀쩡한 회사를 다니다가 얘기치 않게 해고된 사람에게도, 혹은 이도저도 아니라도 누구에게나

 

우리는 일상적으로 국가의 폭력 앞에 노출되어 있다.

 

그걸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그런 질문이 생겼다.

 

이건, 어느 가난했던, 그래서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어 보였던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분석은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해보려고 하고, 일단 메모만 잊어버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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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노현 에세이 <나비>

 

시간이 지날수록 좋아지는 사람이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별 거 없다, 그렇게 되는 사람이 있다. 그거야 사람이 살아간단면 응당 그렇게 되기 마련이고. 일관되게 좋았거나, 일관되게 싫거나, 그런 경우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내게 곽노현의 경우는, 뭐 그런 사람 있겠지 정도로 생각되다가,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놀라게 되는 경우이다. 사람에 대해서 판단하기가 참 어렵다, 그런 걸 곽노현을 보면서 배웠다.

 

요즘 나는 눈이 너무 안 좋고 피곤해서, 책을 잘 못 본다. 보겠다가 붙잡고 펼쳐놓은 채로, 아직 끝내고 있지 못하는 책이 10권이 넘는다. 꼼꼼하게 보지는 못하더라도, 일단은 보고 넘어가는 습관에 비하면, 참 이례적으로

 

안 보이는 데는, 수가 없다.

 

곽노현 에세이집 <나비>, 그래도 참고 억지로 끝까지 다 읽었다.

 

티워터에 있던 글과 옥중서신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고, 뒤쪽에는 재판에서 법정에 제출된 최후 진술서가 들어있다.

 

옥중서신은 최근에 정봉주의 옥중 서신을 읽은 적이 있다.

 

곽노현 때에는 간다 간다 그러면서 결국 못갔고, 정봉주 때에는몇 번 간다고 하다가 계속 사정이 생겨서 못가고, 결국 다음 주에 선대인과 이번에는 꼭 가자, 그렇게 해서 가기로 했다.

 

감옥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쨌든 감옥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생각하면서 읽으면, 옥주서신은 재밌는 편이다. 인간이 바뀌거나, 생각이 변하는 과정들도 재밌고, 상황에 적응하면서 조금씩 생각을 넓혀나가는 과정들이 재밌다.

 

트위터에 썼던 글들도 조금씩 은미하며서 읽으면 나름 읽을맛이 있을만한 글일텐데, 그렇게 보지는 못했다.

 

교육에 대한 단면보다는, 세상에 대한 생각의 단면을 읽는 것이, 트윗 쪽에서는 더 재밌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한국의 공무원에 대한 세 가지 얘기에 대한 구성을 몇 달 전부터 해보는 중이다. 그 중에 제일 머리 아픈 게, 소위 교육 마피아에 대한 얘기이다.

 

크게 보면, 새누리당에 덤빈 자 결국 감옥에 가리라, 이런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교육 마피아에 감히 균열을 내려고 하면, 이렇게 감옥에 가게 된다

 

그렇게 이 사건이 읽히기도 했다.

 

시대에 불화하였던 한 사나이의 내면의 얘기, 은근히 읽는 재미가 있는 책이었다.

 

(감옥에 대한 묘사, 그리고 적응과정, 그런 건 읽을 때마다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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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에 대한 생각

 

 

1.

2012 6, 이 시기를 어떤 때로 기억하게 될까, 그런 질문을 해보게 되었다.

 

아주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명박 정부가 끝나고 그 다음 정부는, 박근혜 정부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상태에서 사람들이 멘붕을 호소하는 시기일 것이다. 박근혜 시대를 살아간다, 많은 사람들은 그 사실에서 머리가 뽀개지도록 아프거나 아니면 생각이 멈추어 버릴 듯 싶기도 하다. 그러나 또 많은 사람들은, 이제야 자기 세상이 왔다고, 활개치면서 행복해할 것도 사실이다.

 

얼마 전부터 들었던 생각이, 이번 대선이 어쩌면 우리가 치루는 마지막 대통령 선거가 될 수도 있다는. 한국 정치에 언제나 떠다니는 얘기가 의원내각제의 전설이다. 이건 꼭 좌우로 나뉘어서만 진영이 펼쳐지는 것도 아니다. 초록정치연대 정책실장 하던 시절에, 녹색당이라면 대통령 중심제 해체하자고 주장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나한테 얘기하던 사람들이 은근 많았다. 좌파 인사들 중에도 있었다.

 

어쨌든 지금처럼 정치의 보수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석기 사태 이후로 도무지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진보의 몰락, 그런 게 겹쳐지면 의원내각제 방향으로의 개헌이 다음 정부에서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번 대선은 정말로 마지막 대선이 될 수도 있다.

 

조금 더 과장해서 말한다면, <스타워즈>에서 공화국이 제국으로 넘어가고, 시즈의 힘이 제다이의 힘을 눌러버리고, 루크 스카이워커가 다스 베이더로 변하는 그 순간, 바로 그 시대를 지금 우리가 지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공화국이 제국으로 변하고, 그 제국에 맞서서 루크 스카이워커가 다시 등장해야 하는.

 

영화로 치면, 다스 베이더가 내가 이 애비다라고 하는 기가찬 대사발을 날려주시는 5편도 아니고, 루크 스카이워커가 드디어 포스의 어두운 힘을 몰아내고 제국을 몰아내는, 그런 6편을 살고 있는 것도 아니라, 생각하기도 싫은, 공주는 죽고, 제다이들도 다 죽고, 아나킨은 다스 베이더가 되고, 요다와 오비완은 도망가는그런 <스타워즈> 2편의 어딘가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 아니냐, 그런 생각이 갑자기 머리를 빡.

 

이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했는데, 이석기 보면서, 이건 도저히 할 수 없는 게임에 들어와있다는 그런 어두운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하여간 객관적 상황이 이렇다면, 먼 훗날 우리는 이 시기를 박근혜가 풀 파워’, 완전히 힘을 갖추었고, 이 쪽은 지지부진, 무너지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진짜로 이렇게 될지, 아닐지, 그건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객관적으로는 명박 5, 근혜 5, 그렇게 10년이 펼쳐져가고, 그 뒤의 5년은 있을지 없을지, 정말로 일본 자민당식의 50년 독재가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다. 어쨌든 지난 수 년동안 새누리당이 모델로 삼던 것은 장기독재를 합법적으로 할 수 있었던 일본식 자민당 모델. 진짜로 갈 수 있을지, 없을지, 그건 모르지만 하여간 그리로 가고 싶어하고는 했다. 미국식 모델? 미국 모델만 해도 일본 자민당에 비하면 양반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새로운 힘이 등장하고, 뭔가 대단하게 바뀌고, 그럴 조짐은 사실 보이지 않는다.

 

객관적으로는 그렇다.

 

2.

엄마 고양이는 벌써 두 번째 새끼를 낳았다.

 

처음 봤을 때의 산뜻함은 사라졌지만, 그 대신 시간이 만들어준 아름다움으로, 정말 환하게 피어났다.

 

잘 때보면, 독특하게 눈이 +자 모양이 된다. 두 개의 10, ( +  +  ), 딱 요렇게 생긴 모습으로 잔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예쁘게 모습을 잡아보고 싶어서, 이렇게 저렇게 시도를 해본다. 사실, 예쁘다. 그러나 내가 너무 화사한 아름다움 같은 걸 보고 싶은 것일까?

 

2012 6월은, 새로 마당에서 고양이들이 태어나서, 어떻게든 살려서 이번 겨울이라도 볼 수 있게 해보려고 내가 아둥바둥하던 시기로 기억이 남을 수도 있다. ‘멘붕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특별히 정을 줄려고 했던 아기 고양이 한 마리는 벌써 고양이별로 떠나갔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서, 뭘 어떻게 해볼 수도 없었다.

 

작년에는 장마철을 세 마리가 모두 잘 버텨냈었는데, 결국 가을이 되었을 때에는 한 마리만 살아남았다. 그게 지금의 바보 삼촌이라고 부르는 애다. 지난 번에 냈던 에세이집에 사진이 실렸던, 그래서 책에도 한 번 나왔던 새끼 고양이가 얘다.

 

어쨌든 아름다움에는 치명적인, 일탈이라는 속성이 숨어 있기도 하다.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말이, 눈 앞에 주어진 질문을 피해나가거나, 사회적 변화로부터 눈을 감는다는 것과 같은 순간이 되기도 한다.

 

내일 세상이 망한다 하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스피노자의 얘기가 멋진 얘기이기는 한데, 박근혜가 풀 파워로 가는 동안에, 나는 열심히 고양이를 돌아보았다, 이건 좀 이상하다.

 

삶은 그런, 조금은 비루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멋지고 중요한 일을 하더라도, 또 세상의 모든 것을 짊어진 것 같아도, 세 끼 밥은 먹어야 하고, 꼬박꼬박 잠은 자야 하고, 틈틈이 세상과 삶에 대해서 사색도 해야 하고, 그리고 수다도 좀 떨어야 하고.

 

3.

어쨌든 한동안 신경 쓰고 있지 않던, 도시계획이라고 부르는, 다가구주택 밀집지역과 같은 공간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하나, 그런 생각을 시작한 것은 엄마 고양이의 전신샷에 대한 고민을 하는, 그런 때였다.

 

아름다움이란 과연 뭘까, 그런 생각이 며칠 전부터 계속해서 머리를 맴맴 돌고 있다. <직선들의 대한민국>을 정리하면서, 한 번쯤 내가 생각하는 미학에 관한 걸 정리한 적은 있는데, 그걸 실제로 현실이나 정책에 연결시키려는 노력을 한 적은 없다. 콘크리트 미학의 세계가, 얼마나 단단하던지!

 

명박 시대라는 질문에서, 강북은 어떻게 가야 하나, 이런 식으로 질문을 조금씩 넘겨본 것이 대충 이즈음의 일이다.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결국 강북도 재건축하고 강남처럼 되어야 하고, 그렇게 못하면 슬럼이 될 거다, 이렇게 얘기하는 요상한 사람들이 꽤 많다.

 

한국의 도시계획 논의에서 슬럼이라는 개념을 전격적으로 들고 왔던 게, <슬럼, 지구를 뒤덮다>는 책을 한국에 소개하면서 내가 했던 일로 기억한다. 이게 돌고 돌아, 어느덧 다가구주택 밀접지를 강남 스타일의 인간들께서, 곧 슬럼으로 될 곳으로 포장을 하고 계시더라, 이런 허무한 결과.

 

그 시점에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런 질문을 다시 해보게 되었다.

 

명박 시대가 근혜 시대로 넘어가는 것을 다른 식으로 보면, 강남 스타일이 한국을 뒤엎는 것과 같다. 그것은 한 편으로는 경제 패러다임의 전쟁이고, 정치적 패거리의 이합집산이기도 하지만, 시대미학을 둘러싼 전쟁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강북과 아름다움, 요런 질문을 진지하게 한 번 던져보게 되었다.

 

튼튼하게 엄마 젖 잘 먹고 크는 다른 두 마리의 고양이 중에 한 마리에게 강북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문제는, 또 다른 한 마리와 구분을 할 수가 없어서, 누가 강북인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3번째 아이는 아직 이름을 붙여주지 못했다.

 

아파트촌을 보면서 아, 아름답구나 생각하는 것과, 다가구주택 밀집지역을 보면서, 이게 뭐야, 곧 슬럼이 될 곳 아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 사이의 격차가 너무 크다.

 

강북이라는 질문 하나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슬금슬금 내 삶 속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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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녀석은 내가 검둥이라고 부르는 녀석이다. 지난 겨울에 큰 상처를 입었었다.

 

어쨌든 내가 알기로는 얘가 아기 고양이들의 아빠이다.

 

얘가 새끼 고양이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모른다. 그렇지만, 최근에 부쩍 마당 어딘가에서 움크리고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자기 아기들이 태어난 것 정도는 알고 있는 눈치이다.

 

원래 아빠 고양이는, 엄마 고양이와 함께 아기들을 돌보면서 지냈다. 그러나 중성화 수술 이후로, 새로운 새끼들이 태어나서, 이제 근처에 자주 오지는 못한다.

 

가끔 발치로 보기는 한다.

 

 

검둥이는 배가 많이 고팠던 것 같다.

 

보통 내가 있으면 잠깐만 먹고 금방 도망가는데, 오늘은 꽤 길게, 눈치보면서도 많이 먹었다.

 

길고양이들의 삶은 애달프다.

 

 

 

잠시 후, 마당 고양이들이 나타났다.

 

엄마 고양이와 검둥이가 같이 있는 걸 본지 꽤 오래된다.

 

올 초, 혼자 있던 아들 고양이를 밀어내고 마당을 차지하기 위해서 검둥이가 싸움을 걸었던 적이 있었다.

 

아들 고양이가 한참 밀렸는데, 엄마 고양이가 나타나자, 정말 무섭도록 밀어붙여서...

 

금방 싸움은 종결.

 

그 때 엄마 고양이가 바위 위를 얼마나 빠르게 뛰어다니면서 전투를 하는지,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덩치는 검둥이가 훨씬 크지만, 싸움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런!

 

바보 삼촌이 검둥이에게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요즘 아들 고양이는 아기 고양이들 준다고 뜯어놓은 특식들을 자기가 먼저 눈치도 없이 먹어버린다고 해서, 바보 삼촌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엄마 고양이는 얼마 전부터 눈이 진물르기 시작했다. 바이러스 질환이라고 해서, 사료에 약을 조금씩 넣어서 먹이기 시작한다.

 

안 아픈 고양이가 먹어도 상관은 없다는 약인데, 뭐, 바보 삼촌은 눈치 없이 낼름낼름 잘도 먹는다.

 

이런 바보 삼촌이, 검둥이에게 회심의 펀치를 한 방!

 

약하지만 분명한 메시지였다.

 

기분이, 어째 한 방 날릴 듯 싶두만.

 

너, 너무 많이 먹쟎아!

 

 

엄마 고양이가 있는 곳은, 새끼 고양이들이 쉬고 있는 뒤뜰로 가는 길목이다. 길목을 딱 지키고,

 

나름대로 녀석들은 진을 짜고 있다.

 

검둥이는 10분 정도 자리를 지키다가 떠났다.

 

 

한참 조용해진 다음에,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나왔다.

 

녀석은 영양 상태가 다른 두 마리에 비해서 안 좋다. 젖먹기 경쟁에서 밀린 건데, 그러다보니 일찍 자립심을 키우게 되었다.

 

얘는 엄마 젖을 맘껏 못 먹으니, 캔을 일찍 먹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하루에 두 번씩 캔을 따주기 시작했다.

 

벌써, 한 마리는 떠나보냈다.

 

작년에는 별로 신경 쓰고 않고, 알아서 잘 하겠지...

 

하면서 장마를 보내고 나니까, 가을 무렵에는 결국 한 마리만 살아남았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살아남은 게, 지금의 바보 삼촌.

 

 

아이고, 이 녀석 물 마시는 것 좀 봐라.

 

물통이 높아서, 한 발을 짚고 올라간다.

 

나중에 다 크면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내가 돌봐주는 동안만이라도 아프지 않고, 잘 자라기만을 바랄 뿐이다.

 

 

내가 아무리 잘 돌봐준다고 해도, 엄마만 하겠나.

 

엄마 옆을 지나는 녀석의 표정, 이 순간만큼은 자신만만하다.

 

 

오늘 한 건 해서 그런지, 바보 삼촌이 오늘따라 의기양양하다.

 

내가 밥값은 한다...

 

마당에서, 먹이를 덜 줄 수가 없는 게, 녀석들은 늘 배고프고, 부족하다.

 

대학 시절에 키웠던 엄마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아주 좋아했던 녀석인데...

 

새끼를 낳고 나서, 먹이를 늘려주는 걸 잘 몰랐다.

 

제일 강해보였던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데리고 어느 날 떠나버렸다.

 

먹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새끼들이 좀 더 자랐을 때, 엄마 고양이가 새끼들을 위해서 자기는 떠날 수도 있다.

 

그래서 부족하지 않게 주려고 하는데, 바보 삼촌이 낼름낼름 먹다가...

 

돼지가 되어버렸다.

 

어쨌든 오늘,

 

오 예, 바보 삼촌, 한 방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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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문

영화 이야기 2012. 6. 15.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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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고양이는 '바보 삼촌'이라는 새로운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덩치는 엄마보다 더 큰데, 새로 아기 고양이들이 태어나게 되면서, 동생도 아니고 삼촌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되었다.

 

그래도 얘가 참 순박하다. 새끼 뻘인 동생들과 잘 지내고, 밥도 잘 양보한다. 틈틈히 핥아주기도 하고.

 

요즘은 형제들이 줄어서 그런 일이 잘 없지만, 어느 집에나 바보 삼촌에 대한 얘기들이 있었다.

 

얘가 딱 그 바보 삼촌의 이미지이다.

 

벌써 분가해서 자기 삶을 꾸렸을 나이인데, 여전히 엄마와 지내면서 새로운 동생들과 잘 지내는...

 

 

엄마 고양이는, 참 예쁘다. 그리고 지혜롭다.

 

어느 어미가 새끼를 키우면서 지혜롭지 않겠느냐마는, 고양이의 세계에서도 어쩔 수 없이 새끼를 버리고 도망가는 어미가 종종 있다.

 

집 마당이, 내가 개입해서 누군 살고, 누군 살지 말고,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자기들끼리 질서를 잡아나간다.

 

가두어놓고 키우는 게 아니라서, 갑자기 쎈 고양이들이 지금 사는 녀석들을 밀어내고 자기들이 터를 잡을 수도 있다.

 

처음에는 삼색 고양이 모녀가 살고 있었는데, 지금의 고양이들도 그렇게 먼저 있는 녀석들을 밀어내고 자리를 잡은 것이다.

 

시간과 여건이 허락하는 한, 지금의 엄마 고양이와 이 가족들을 오랫동안 보살피려고 한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새끼들이 이제 슬슬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도 아직 전부 모인 걸 보지는 못했는데, 지금까지 본 건 4마리이다.

 

작년에는 세 마리가 났다가, 결국 가을까지 버틴 건, 지금 바보 삼촌이라고 부르는 녀석 한 마리이다.

 

그때까지는 뜨문뜨문 먹이를 주다가, 먼저 떠난 두 마리가 너무 가슴 아파서, 겨울이라도 날 수 있게 해주자고 한 게 지금처럼 다시 대가족이 된 것이다.

 

 

멘붕이라고 부르는 삼색 고양이가 한 마리 더 있는데, 어제,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새끼 고양이들이 워낙 약해서, 잠시만 눈에 안 보이면 겁이 덜컥 나기도 한다.

 

엄마 고양이가 어련히 잘 알아서 챙기겠나 싶다가도, 새끼 때는 워낙 약하니까.

 

생각 같아서는 예방 접종도 다 맞춰주고, 그렇게 하고 싶은데, 괜히 잡는다고 지내는 걸 힘들 게 했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잘 몰라서.

 

 

 

 

 

엄마 고양이와 아들 고양이.

 

이제는 아들 고양이 덩치가 더 크다. 별 의미는 없는 사진이지만, 뒷뜰에서 해질 무렵이라, 왠지 느낌이 있게 나왔다.

 

갑자기 내 생각이 났다.

 

나는 장남으로 살아왔고, 어머니와는 대체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마도 내가 아는 한에서, 우리 집에서는 내가 처음으로 태어난 좌파였고, 그래서 난 늘 우리 집을 위태롭게 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햐, 정말 귀엽다.

 

노란 고양이 두 마리는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지금 같아서는 누가 누군지, 도저히 모르겠다.

 

알 듯 싶었는데, 막상 이렇게 보면 정말 모르겠다.

 

 

 

하여간 요렇게 발발거리고 돌아다니는 녀석이 현충일날 태어났다고 해서 현충이라고 부르는 그 녀석인 것 같기는 하다.

 

자기도 먹어야겠다고, 얼굴 들이민다.

 

똑같이 나온 녀석들이라도 발육 상태가 다 같은 건 아니다. 벌써 캔과 같은 습식 사료 정도는 먹는 녀석이 있고, 아직도 밖으로 잘 못 나오는 녀석도 있고.

 

 

진짜 열심히 먹는다.

 

어쩌면 녀석에게는 이건 생존이 걸린 문제일 수도 있다.

 

일요일 오후, 야옹구까지, 고양이 여섯 마리가 전부 자고 있었다. 오후에 잠시 외출을 했던 아내도 낮잠을 자고.

 

나 빼고는 이 집의 모든 존재들이 자고 있었다.

 

평온이라는 단어를 잠시 떠올렸다.

 

모든 평온은 일시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삶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헤쳐나가야 할 난관의 연속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잠시의 평온과 잠시의 행복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살면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런 걸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우린 너무 많은 걸 부여잡으려고 한다.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두는 것, 그런 잠시의 평온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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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새끼 한 마리를 더 봤다.

 

결국 오늘은 얘네들 보통 지내는 광에 가서 확인을 해봤는데,

 

최종적으로 세 마리.

 

 

 

아, 이거 고민 생겼다.

 

삼색 고양이는 멘붕, 한 마리는 현충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세 번째 고양이는 강북이라고 부를까 하는데...

 

뭐, 완전 똑같아서 구분할 방법이 없다.

 

여러 사진 같다놓고 한참 판독을 했는데,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모르겠는데, 지금으로서는...

 

하여간 귀엽기는 엄청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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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행이 아닌 선택

 

퇴행(regression)이라는 단어가 있다. 나이를 뒤로 먹는다는 말로 표현할까? 하여간 무엇인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것을 만났을 때, 이런 퇴행을 겪게 될 수 있다.

 

총선은 아마 많은 사람에게 충격이었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렇다. 견디기 힘들었고, 미래에 대한 예상 자체가 고통스러웠다.

 

총선의 결과를 보고 제일 먼저 한 게, 대선 때까지 술을 끊기로 한 것이다. 맨 정신에 이 일들을 보는 게 힘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맨 정신이 아닌 상황에서 이 일들을 겪는 건 더 싫었다.

 

어떤 사람들은 멘붕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 말을 제일 적극적으로 쓴 사람은 김용민이었다. 그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좋든 싫든, 나 역시 그와 가장 가까이에서 그가 겪던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나쁜 일은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는 않는다. 이정희에서 이석기에 이르기까지, 진짜 기막힌 타이밍이다. 누가 그렇게 일부러 시간을 맞춘다고 해도 쉽지 않을 정도로

 

그냥 버티고 갈 때까지 갈 거라는 예상이야 누구나 할 수 있던 거였고, 역시 또 일은 그냥 그렇게 갔고,

 

금융 위기에 대해서 퍼펙트 스톰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거야말로 퍼펙트 스톰 아닌가 싶다.

 

솔직히,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 아무 말도 안하고 싶고, 아무도 안 만나고 싶고, 다 귀찮다이게 솔직한 심경이다.

 

뭐라도 분석을 하고, 데이터표라도 들여다 보고 있으면 뭐하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이라는 게, 원래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니니, 여기까지야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발만 더 나가면, 그때부터는 퇴행이다.

 

그 선이 애매하기는 한데, 멘붕을 거쳐 원상태 혹은 다른 또 어떤 상태로 진화하는 방식이 있고, 그냥 퇴행으로 가는 방식이 또 하나 있을 법 싶다.

 

이게 참 애매하다. ‘승화(sublimation)’라고 부르는 것과 퇴행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한 경계가 있을까? 이런 답답함을 예술과 같은 창작이나 창조적 힘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승화라고 부르는데, 그것과 퇴행 사이의 경계가 좀 애매하기는 하다.

 

하긴, 이 모든 것들의 기준이 되는 궁극의 답이라는 게 존재할 리가 없으니 말이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는 그 궁극의 답은

 

42라고 했다.

 

42? 알 게 뭐냐. 영문 소설명의 글자수를 다 더하면 42개가 된다는 얘기가 있지만, 그런 건 아닌 듯싶고.

 

어쨌든 현실에서 도망쳐 회피하고 싶은 일탈의 경계선이 어딘가, 그런 질문이 문득 들었다.

 

이 모든 게 김제남 손에 달려있다는데, 이거야 참.

 

김제남 마지막으로 본 게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아예 사람을 몰라야지, 너무 뻔하게 아는 김제남의 손에 달려 있다니, 그 사실을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힘들다.

 

혹시 핸펀에 김제남 총장 전화번호가 있나, 검색해봤더니, 이런 된장김종남 총장 전번이 나온다. 김제남, 김종남, , 내가 이런 ㄱㅈㄴ, 요런 이름의 머리글자를 가지신 분들과 같이 일을 했었구나요런 쓸 데 없는 생각을 하는 것도 일탈인가 싶다.

 

하여간 기막힌 타이밍으로, 모든 일은 기똥차게 꼬였다. 이젠 멘붕을 넘엉서, 일탈의 경계가 어딘가, 그런 걸 고민할 수밖에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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