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보수?

 

나는 전또깡 이래로 민주정의당의 후신들에 투표를 해본 적이 없다. 아주 솔직하게, 조선일보 기자들을 만날 때도 편치 않다. 그래도 책 막 나왔을 때, 이럴 때 상황 봐서 만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내 주변에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아주 많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 집안에서, 부모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친척들 중, 새누리당에 투표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아주 어렵다. 서울 보수, 그런 사람들이 온통이다. 결국은 대학 시절, 집을 나가고 나서야 마음의 평온을 찾았다.

 

그렇지만 새누리당 사람이라고 해서 특별히 차별하거나 그렇게 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나는 정치적인 선택을 이유로, 많은 차별을 당했고, 오랫동안 소수자처럼 살았다. 그건 내 선택이다. 회색인처럼 살고, 회색지대를 선언하면서, 적당히 중도라고 그러면서 살아도 상관은 없다. 그렇지만 어차피 한 번 사는 삶, 내 얼굴을 감추면서 하고 싶은 얘기나 표현을 감추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 대신, 그냥 가난과 차별 같은 것을 감수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감수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내가 무엇인가 선택하거나 채점하는 자리에 왔을 때, 정치적인 선택을 이유로 누군가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 짓을 하면, 나도 마찬가지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게 이기는 것도 아니다.

 

공기업 사장이나 감사 같은 것을 선출하는 인사위원회에 가끔 들어가게 되는 일이 생긴다. 50살 넘은 아저씨들의 세계에서는 민주당 지지자들도 별로 찾아보기 어렵다. 겉으로는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그냥 양쪽에 다 다리를 걸고 있는, 기가 막힌 로비의 대가, 그런 것에 불과한 경우도 많다. 앞으로도 나는, 정치적인 선택을 이유로 누군가를 부당하게 대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공개적으로 좌파 선언을 한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걸로 알고 있다. 한국에서 좌파는, 어쨌든공개적인 자리에서 스스로 불리는 이름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서 불리는 이름이다. 하여간 이건 나의 선택이고, 그로 인한 불이익은 그냥 감수하고 살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불이익을 선택하면서 살아가면 좋은 점이 몇 가지가 있다. 삶이 소박해진다. 지금도 그냥 츄리닝 입고 다니고, 아주 특별한 경우 아니면 청바지도 비싸서 못 산다. 구질구질해 보이기는 하지만, 삶이 구질구질한 것보다는 낫다. 내가 하는 유일한 호사는, 안주는 그래도 새우깡 보다는 좋은 거 먹자

 

술 마실 때 새우깡 혹은 새우깡 수준의 안주를 먹으면 너무 우울해진다. 소주에 새우깡 먹던 그 스무살로 돌아간 거 같아서 급 우울해진다. 그래서 그것보다는 좀 좋은 안주를 마시려고 한다.

 

그리고 정말 좋은 것은, 요행수를 바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직접 한 일도 뺏기는 판인데, 내가 하지 않은 일로 인해서 뭔가 좋은 일이 생기는 일, 그런 건 내 삶에 절대 없다. 10개를 하면 결국 하나나 두 개만 성과로 남게 된다. 요행수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실망하거나 속상할 일도 별로 없다. 아주 잘 해야 본전, 그렇지 않으면 대박 망하는 것이 현실에서 한국의 좌파들이 살아가는 삶이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성격이었는지, 꿈을 가져본 적도 없고, 희망을 크게 키워본 적도 없다.

 

그냥 세 끼 밥이나 입에 들어오면 된다고 생각하고 살아간다.

 

이렇게 살면 정말 좋은 게, 속상할 일이 별로 없다. 물론 살다 보면 명박네 삽질 하는 거 보면서 속상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세끼 밥만 입에 들어오면 된다고 생각하면, 크게 속상해할 일이 생기지는 않는다. 일종의 강요당한 소박 같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살다 보면 또 다른 것들, 예를 들면 아름다움이나 낭만 혹은 구구절절한 사랑, 이런 것들에 눈을 뜨게 된다.

 

아주 어렸을 때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봤었다. 6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난다.

 

신이 한 쪽 창문을 닫을 때, 다른 쪽 창문을 열어준다.”

 

지내 보니까, 정말로 그렇다. 교수 지원하고 총장 면접 볼 때마다 번번이 떨어지던 시절에는 정말 술 처먹고 우울하게 지내고 그랬다. 생각해보니까, 그건 그냥 내가 감수해야 할 삶인 듯 싶다. 그래서 그냥 감수하고 살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나서 우울증이 사라졌다.

 

물론 그래도 대인기피증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 무슨 상관이 있으랴. 같이 작업하는 소수의 동료들을 아주 자주 만나면, 그 삶도 부담스럽지는 않다. 게다가 무대 앞에 나서는 화려한 순간을 일부러 피하니까, 혼자 있는 시간이 아주 많이 생겨서 더 좋다. 아이와 부인, 고양이들과 몇 명의 동료들, 그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삶도 아주 재밌다.

 

이런 내 삶을 전제로, 박근혜에게 기꺼이 투표하는 정도가 아니라 박근혜를 통해서만이 자신의 삶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20대 보수에 대해서 요즘 조금씩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나는 20대들을 좋든 싫든, 많이 만난다. 좋아서도 만나고 어쩔 수 없이도 만난다. ‘88만원 세대이후로, 20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고, 싫든 좋든 만나게 되는 게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어려운 게, 내가 살아보지 않은 삶을 이해하는 게, 아무리 머리 속에서 논리적으로 따져본다고 해서 이해가 될 수 있겠는가? 경제학과 수업이나 경제학과 특강 혹은 상대 특강 같은 건 잘 안 하려고 한다. 평생을 경제학자로 살아왔는데, 경제학과 수업을 안 하다니!

 

경제학과에 가면 20대 보수를 아주 많이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냥 자신이 뭔가 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키기 위해서 보수가 된 게 아니라, 정말로 좌파들을 너무너무 싫어하고, 체질적으로 증오한다고 믿고 있는 그런 20대 대학생들을 아주 많이 만날 수 있다.

 

나한테 왜 FTA에 대해서 그렇게 이해하느냐고, 나의 후배라고 하면서 덤비는 친구들, 그런 사람들이 경제학과에 가면 아주 많다. 대학원 전공이 국제경제학이었다. 그래서 국제통상학부나 그런 곳의 학생들을 만나게 되는 일이 종종 생기는데, 그들 중 상당수는 적극적으로 박근혜를 지지한다. 영화 지망생 중에서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 그들을 차별하려고 하지 않고, 그들에게 나의 정치적 선택을 강요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개인의 문제에서, 모든 사람의 선택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불쌍하게 생각하거나 연민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삶은 삶, 그 모든 것들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경제학도들이, 대학에 들어가거나 그 이전부터 지독할 정도로 보수주의적이라는 사실은, 가끔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내가 박사가 될 때까지 혹은 학위를 마치고 시간강사가 될 때까지, 일부 좀 너무하다 싶은 몇 명의 선생을 제외하고는 저것도 쟤의 선택이고, 시험 점수로만 평가하겠다고 많은 선생들이 대해주었다. 재벌계열사나 정부에 있을 때에도, 나의 상관이나 상사들 중 좀 너무하다 싶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그냥 업무 성과로만 평가하겠다고, 내가 속 편하게 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었다.

 

그게 내가 20대 보수를 대하는 자세이다. 그 개별적 이유를 정형화시키기에는, 그들도 많은 이유가 있다. 출신 지역에 따른 편향이 있고, 부모와의 특수 관계에 대한 개별적 성향이 있고, 문화적이든 정치적이든, 그들이 이미 내린 과거의 선택이 있다. 조사에 따라 다르지만 작을 때는 20대의 17% 많을 때는 30% 정도가 박근혜에게 투표하겠다고 대답한다. 비록 나는 박근혜가 만들어내는 세상을 도저히 참을 수는 없지만, 그를 지도자로 선택한 사람들의 개별적 선택도 무시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도덕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래서 경제의 밑바닥에는 윤리하는 것이 존재하고, 그 윤리가 없다면 경제는 금방 개판 5분 전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도덕적 우월감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경계한다. 내가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박근혜 지지자에 비해서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큰 일 난다. 그건 논리적인 일이다. DJ 시절, DJ를 지지한다고 해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는, 그야말로 호남 향우회 스타일의 인간들을 보면서, 그건 좀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다. 노무현 열성 지지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생각을 했었다. 노무현 지지는 개별적 선택이지만, 그것이 그 선택을 내린 사람의 우월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그것이 도덕적 우월성일 때, 그것은 금방 증오와 폭력적 사유와 연결된다. 동일한 논리로, 그 시절 그 사람들에 대해서 좀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그래도 박근혜, 그것 역시 좀 아닌 듯싶다.

 

20대 보수, 쉽지 않은 주제이다. 만약 재벌 3세라서 자신이 보수적이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영 미친 넘 한 넘 있다고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실존적인 삶에서 보수의 길을 선택한 20, 그건 여러 가지로 같이 생각해볼 문제이고, 주제이다. 공교롭게도 20대 내에서는 박근혜 지지자가 소수이다. 물론 그 소수는 지배적 위치에 있는 소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영 가난하고, 앞 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 데도 박근혜 지지자라면?

 

어쩌면 왕따에 대한 기원론적 질문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남을 왕따 놓는 건지, 왕따가 된 건지. 철학적 질문에 대해서는 답이 잘 없다. 한국에서 박근혜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된 20, 그 질문 역시 철학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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