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5년 후

 

같은 상황에서 1년 후, 5년 후, 10년 후 그리고 30년 후를 나누어서 생각해보는 것은 학자로 살면서 몸에 밴 습관이다. 물론 생각한다고 해서 맞춘다는 보장은 없다. 당연한 거 아니겠나? 그야말로 ceteris paribus, 다른 상황이 동일하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렇게 생각해보는 게 습관이 되었다. 물론 우리의 삶은 대개 한치 앞도 모르는 상태에서 움직인다. 그러니 길게 앞으로 올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올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니다. 다만 귀찮을 뿐이지.

 

일요일 오후, 창 밖으로 바보 삼촌이 마당에 내려 앉은 산비둘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한참 보았다. 저들의 삶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노무현 5, 명박 5년을 거치면서 한국에서 삶의 안정성이라는 것이 많이 떨어졌다. 직업의 안정성이 농경사회에서 벗어나며 자본주의가 잠시 찾은 타협책이었는데, 그게 지금 무너지고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5년 후에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국민의 몇 퍼센트나 될까? 혹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썩 만족스러워서 5년 후에도 이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 퍼센트나 될까?

 

파리에 살던 시절, 식당에서 서빙하는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스믹이라고 부르는, 최저생계비 약간 넘는 돈을 받았는데, 사실 당시 프랑스의 상황이라면 다 때려치우고 식당에서만 일해도 한국에서 어벙벙한 직업을 갖는 것보다는 나은 조건이었다. 당시 식당에서 일하던 젊은 사람들이 그 분야에서 평생을 보내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것을 보고 신기했던 적이 있었다. 불어로 레스토랑 업계를 restauration이라고 부른다. 이걸 하나의 분야로 생각하고, 그 안에서 전문직이 되기 위해서 교육 계획 같은 걸 세우는 걸 보면서, 정말로 놀랐었다. 이건 우리식 사농공상 감성으로 간단하게 이해할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garcon de café, 커피 종업원에 관한 비유를 든 적이 있다. 누구를 위하여 커피 종업원은 커피를 나르는가? 정말로 그 커피 종업원들이 쟁반에 커피를 받쳐든 채 달리기 시합을 하는 걸 보면서 신기했던 적이 있다. 루디크 혹은 루덴스라고 부르는 유희에 관한 얘기를 할 때 종종 인용되는 샤르트르의 구절이다. 커피 종업원은 어쩌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교를 부리면서 커피를 나르는 것이 아닌가, 그런 질문이다.

 

영화 <디어 헌터>에 보면 미국의 철강 노동자들이 중고 세단이지만 어쨌든 세단을 타고 엽총을 들고 사슴 사냥을 하면서 휴가를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풍요의 자본주의라고 지칭되던 그런 시절의 문화적 특징들이다. 이런 것들이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독특한 일상성인데, 그 안을 지탱하는 것은 안정성이라는 조건일 것이다. 슘페터가 아주 오래 전에 했던 창조적 파괴라는 단어를 자본주의가 전면적으로 다시 내세우면서 혁신을 맨 앞에 얹은 것은 90년대 이후의 일이다.

 

그 이후로 안정성을 강조한 나라들이 있고, 안정성을 깨는 게 발전이라고 생각한 나라들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북구의 소규모 경제를 운용하는 나라들이 국가와 시민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안정성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나갔고, 한국과 일본의 지도자들은 안정성을 깨는 게 발전이라고 여겼다. 우리의 경우는 조금 더 심각했다. 안정성을 극단적으로 깨고, 그게 국가가 좋아지는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정계와 관계의 윗자리를 차지했다.

 

당연히 한국에서는 삶의 안정성이라는 것이 바닥으로까지 추락하게 된 것 아닌가? 돈이 많으면 행복할 거라고? 고위직 중에서도 자살로 마감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말로 이건희 일가나 정몽구 일가쯤 되는 사람들 빼고는 한국에서는 지금 그 누구도 안정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기 어렵다.

 

다른 사람들이 괴로우면 자신이 기분 좋아지는, 그 지독한 상대 비교의 논리가 아니라면, 지금 어느 누구의 삶도 안정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명박처럼 어쨌든 하는 일마다 하늘이 돕고, 땅이 돕고 그리고 쥐가 돕고 그렇게 승승장구하는 사람의 아들의 삶 역시 안정적이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물론 거스를 수 없는 변화도 없다. 카메라에 쓰는 필름 메이커들이 회생하기는 어렵고, 거기에 따른 각종 장비와 기술들도 일부 하이엔드나 복고 취향이 아니라면 과거처럼 전성기 영광을 다시 보기는 어렵다. 그런 큰 변화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한국의 마지막 LP 공장이 문을 닫는 걸 본 게 몇 년 전인데, 올해 다시 LP 공장이 문을 열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죽어라고 다시 LP로 음악을 듣는 시대가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개개인의 삶의 안정성을 그야말로 밀크 쉐이크처럼 돌려버리거나 스무디 만들듯이 헤집어놓는다고 해서 그 사회가 발전한다는 논리는 좀 이상하다. 사회의 속도가 빠른 것과 개인 삶의 안정성이 지켜진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다.

 

개개인에게 안정된 삶을 보장한다는 것은 물리적이고 경제적인 부의 축적과는 좀 다른 얘기이다. 그건 흔히 말하는 성장과 분배의 문제와도 다르다. 성장이 무조건 높다고 해서 안정성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 인민재판 방식으로 늘 재분배를 하고 있다고 해서 안정성이 높아지는 것도 아닐 성 싶다.

 

5년 후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질문의 진짜 의미는 5년 후가 어떻게 될지 그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5년 후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못했던 현 상황을 돌아본다는 것이다. 우리의 5년 후, 그 때도 역시 대선 기간일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 그런 질문을 해보고 싶었다.

 

'남들은 모르지.. > 명랑이 함께 하기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양이별이여, 영원하라!  (9) 2012.11.18
돌봄에 대한 가벼운 생각  (6) 2012.11.09
이오덕 선생을 생각함  (3) 2012.11.04
20대 보수?  (5) 2012.11.03
가을, 그림 엽서 같은  (1) 2012.11.02
Posted by retir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