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태어난 삼색 고양이와 봄에 태어난 강북걸 사이의 스킨쉽. 진정으로 다정함이 뭔지를 배우게 된다.)

 

가을이 막 깊어가기 시작할 때, 새로운 고양이들이 태어났다. 늘 그렇듯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앞에 놓고는 삶에 대해서 잠시라도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사의 조철현 대표는 요즘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있다. 아주 오랜만에, 영화사에서 간략하게 니체 이전과 니체 이후에 대한 철학사 강의를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삶에 대해서 대단한 통찰력이나 이해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삶에 대해서 너무 가벼워서도 안되고, 너무 무거워서도 안 된다는 정도의 생각을 한다. 고양이들의 삶은 짧다. 그리고 야생 고양이들의 사이클은 더더욱 짧다. 내가 돌보고 있는 동안에도 맨 처음 마당에 자리잡았던 모녀 고양이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번 봄, 바보 삼촌의 아빠였던, 내가 아빠 고양이라고 부르던 녀석이 사라졌다. 봄에 태어났던 삼색이와 누렁이, 두 마리도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하고 떠나갔다.

 

무엇인가를 돌본다는 것은, 참 익숙해지지 않는 헤어짐과 익숙해진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지도 모른다.

 

 

(이번에 태어난 세 마리 아기 고양이들, 얘들 데리고 이사갈 생각하면 머리가 욱신욱신하다. 잽싸기는, 엄청나게 잽싸르고, 눈치도 엄청 빠르다.) 

 

요즘 돌본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이 많아졌다. 지금 이래저래 내가 돌보는 고양이들이 열 마리가 되었다. 집안에 야옹구, 마당 고양이 7마리, 여기에 영화사에 있는 고양이 두 마리. 다들 나름대로 신경을 써고 돌보고 있지만, 내년 봄에도 계속 볼 수 있는 고양이가 몇 마리인지, 나도 잘 모른다. 이사가면서 혹시라도 못 따라오는 고양이가 있을 수도 있고, 이사간 집에 적응하지 못하는 고양이가 있을 수도 있고. 게다가 영화사 사무실에 있는 고양이들은 겨울이 되면서 더 이상 사무실에 있기가 어려워져서, 입양 보낼 데를 사무실에서 수소문하는 중이다. 그냥 그런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약간씩 애잔하게 남아있다.

 

아주 간단한 얘기이지만, 돌보는 사람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 과연 누가 누구를 돌보는 것인가, 누가 누구에게 도움을 주는 것인가, 그런 본질적인 질문이 가끔 든다. 고양이들과 이렇게 지내면서 나도 많이 바뀌었다. 여전히 게으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규칙적으로 무슨 일을 해야만 한다. 내가 없으면 굶거나 아주 힘들어지는 존재가 있다는 게, 날 힘들 게 하는 게 아니라 나한테 변화를 만들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조금씩 해보기 시작한다.

 

머리로 아는 것과 살면서 배우는 것 아니면 조금씩 느끼는 것, 그 사이에 간극이 많다.

 

어디에서 나왔던 얘기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듣기는 아내한테 들은 얘기가 있다. 전문가 집단 중 수명이 가장 긴 집단이 정원사들이라는 것. 정원사가 죽으면 그가 돌보던 정원도 황폐해지고, 귀하게 대접받던 식물들도 그냥 시름시름, 죽어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정원사들은 그게 의식적이든 혹은 무의식적이든, 어쨌든 기를 쓰고 오래 살게 된다는 것.

 

나는 어렸을 때 외할머니가 키워주셨고, 그래서 내 유년기 기억의 대부분은 외할머니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는 않으셨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학교 들어가는 거는 보고 눈을 감아야 한다고 맨날 얘기하셨다. 그리고 나중에는 대학교에 들어가는 거는 봐야겠다고 말씀하셨다. 결국은 박사학위를 받고 취직하는 것까지는 보셨고, 결혼하는 것은 못 보셨다. 현대 다니던 시절,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셨다. 당시만 해도 조모상의 경우는 휴가가 안되어서, 장지에는 못 갔다.

 

돌봄과 사랑은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은 다른 듯싶다. 사랑은 집착과 한 끝발 차이다. 스토커와 짝사랑을 구분하기는 참 어렵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아동학대, 지금 사교육으로 자녀들을 내모는 부모들이 기본적으로는 다 아동학대 아닌가? 그러나 사랑과 구분하기는 어렵다. 돌봄은 집착으로 바뀌지는 않고, 스토커로 바뀌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소유하지 않는 사랑, 그것을 돌봄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잠시 생각을 해본다.

 

과연 누가 누구를 돌보는 것인가, 마당의 고양이들과 몇 년째 같이 살면서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 고양이는 올해 두 번째 새끼를 낳았다. 봄부터 이미 건강이 썩 좋지는 않은 상태다. 이번에는 고등어를 구워서 주는데, 눈치 없는 바보 삼촌이 어김없이 나타나서 후다닥녀석의 별명이 그래서 바보 삼촌이 되었다. 봄 출산 때에는 엄마 고양이가 바이러스 감염까지 있어서 기침을 심하게 했다. 사람 천식 있는 것처럼 콜록콜록상당히 비싼 약을 사다가 캔에 타서 먹이는데, 녀석은 이 약 탄 캔까지 그냥 처묵처묵.

 

, 눈치 좀 봐라.

 

사랑이라는 게 뭘까, 이걸 이해하는 건 참 어렵다. 그러나 돌봄이라는 게 뭘까, 그건 그렇게 무겁거나 치명적인 속성이 없어서 더 편하다. 조금씩 서로를 돌보는 것, 이것은 다다익선이다.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않으면, 특별한 이데올로기적 속성을 가지지 않은 채로, 약간씩 서로 숨 쉴 공간을 만드는 것.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혹은 문화적으로나, 약간의 숨 쉴 공간이 지금 우리에게 있으면 좋겠다. 우리는 시방, 너무 날 선 삶들을 살고 있다.

 

(햐, 녀석도 몸단장한다. 아직 성별도 제대로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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