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의 이름은 생협, 몸은 고양이별에, 마음은 내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다음 에세이집 키워드는, 돌봄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가 몇 권의 책을 냈는지 까먹게 되었다. 좋게 얘기하면 초월하게 된 거고, 나쁘게 얘기하면 교만해진 거다. 그리고 재수 없게 얘기하면, 앞으로 하고 싶은 얘기에 더 집중하느라고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지 않는 거고. 그 어느 편이든, 진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진짜로 잘 모르겠다.

 

<1인분 인생>은 여러 가지로 나에게 의미 있는 책이다. 문학이라는 분류로는 처음 낸 책이기도 하지만, 늘 고통스럽게 생각하던 책 만드는 과정이 즐거웠던 책이기도 하고. 이 책에서 출판사에서 번 돈이 봉도사가 감옥에 가자마자 낸 포토 에세이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간직하는 보람이기도 하고 (그 책, 참 우라지게도 안 팔렸다...) 무엇보다, 이 책은 만드는 과정이 즐거웠다. 이선지라는, 크고 작은 결정을 내가 내릴 때마다 늘 상의하는 동료가 이 과정에서 생겨난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그리고 대학 시절, 카프카를 같이 읽던 여성 동지가 이 책의 기획자로, 이거 좀 내자고 해서, 어린 시절의 친구와 같이 작업할 수 있었던 것도 즐거운 일이었고.

 

어쨌든 <1인분 인생>은 대략적으로 2년 정도 작업을 한 건데, 마흔을 모티브로 글을 조금씩 쓰기 시작한 게, 마흔 넷이 되어서야 출간하게 된. 하여간 급하게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냥 쥐고 있다가 오래 된 친구의 권유로 내게 된 책이었다.

 

<1인분 인생> 다음 책은, 여전히 그 시절의 에디터인 이선지씨와 같이 고민을 한다. 어지간해서는 난 에디터를 바꾸지 않고, 출판사도 잘 바꾸지 않는다. 태생이 게을러서 그렇다. 그냥 하던 사람하고 계속 작업하는 게 편하다. 즐거움이든 아픔이든, 같이 나누는 그런 오래된 관계를 더 좋아한다. 문제가 있다면, 나에게 문제가 있을 거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게, 속 편하다.

 

어쨌든 <1인분 인생>에서의 키워드는 40대였는데, 나는 그 주제로 글을 쓰는 게, 편안하고 즐거웠다. 그 이후, 후속 작업에 대한 고민을 계속했었는데, 결정된 것은 다음 번 작업은 포토 에세이 형식으로 한다는 거 그리고 더 편안한 얘기를 해보겠다는 정도였다.

 

맨 처음 잡았던 주제는 명박 시대였다. 누구에게나, 어떤 이유로나, 명박 시대는 치열한 고민이다. 내가 알기로는, 보수들에게도 이 시대는 고민스러웠던 걸로 알고 있다. 그들도 사람이다. 저 꼬라지를 봐라, 겉으로는 쉴드 치는 사람들도, 편안하게 우리끼리 얘기할 수 있는 자리에서는 고통을 토로한다.

 

명박 시대 들어오자마자, 대운하는 아니다, 니가 좀 막아봐라, 그렇게 말한 사람들이 꼭 진보라고 불리는 사람들인 것만은 아니었다. 평소에는 보수 중의 보수라고 하는 사람들, 명박에게 자랑스럽게 투표한 사람들도, 저건 좀 아니다 싶다, 니가 어떻게든 막아봐라, 그런 얘기를 많이 했다. 새만금 개발에 대해서도, 이건 좀 아니라고 나를 격려해준 사람들이 꼭 평소에 좌파나 생태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만은 아니다. 누가 딱 봐도 보수 중의 보수인 그런 사람들도, 새만금 얘기는 니 얘기가 맞다, 절대 굴복하지 마라, 내가 도와줄 수는 없어도

 

나중에 알게 된 일이다. 내가 칼럼으로 처음 데뷔한 것은 서울신문을 통해서였는데, 그 때 나를 추천해준 사람이 조선일보 기자였다는 사실을세상 참 복잡하고 교묘하게 얽혀있다. 삶이란, 원래 그런 건가 보다.

 

어쨌든 <1인분 인생> 다음 책은 포토 에세이로 하기로 마음을 먹은 데에는 좀 사연이 있다. 경제 대장정 시리즈의 8, 핵발전에 관한 문제가 지금 권수로 비어 있다. 그리고 <문화로 먹고 살기>, 9권이 먼저 나갔다. 8권을 포토 에세이로 할 생각이 있는데, 그 중간에 넘어가는 단계로 좀 더 쉬운 주제로 포토 에세이를 한 번그런 생각이었다.

 

문제는, 이걸 문제라고 표현하는 것은 좀 그렇기는 하지만, 아기가 태어나게 되었기에해외든, 국내든, 여행을 늘 다니던 삶에서, 아이를 준비하고 태어나는 것을 지켜보면서, 가기는 어딜 가집과 영화사, 그리고 가끔 국회, 그렇게만 움직이는 삶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애초의 생각과는 달리, 고양이들과 꽃 그리고 아주 약간의 일상적인 사진 외에는 찍어놓은 게 없다.

 

하여간 이건 제약 조건이고

 

명박 시대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해보고 싶었는데, 아내의 임신 기간을 옆에서 지켜보며, 그리고 급박한 출산과 이제 100일이 되는 아기와의 삶, 그 속에서 차마 명박 시대를 카메라로 표현해보겠다고 뛰어다닐만한 용기도 또 그럴 의욕도 나에게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무엇인가를 증오하며 그 속에서 창작욕을 불태운다는 게, 새로운 생명의 탄생 앞에서는 정말로 어색해 보였다. 그래서 그 길은 포기했다.

 

올 봄에 태어난 두 마리 고양이들에게, 각각 강북과 생협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은, 내가 하고 싶은 또 다른 키워드를 그 고양이들 속에서 발견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동안 두 번째 에세이집의 가제목은 강북과 생협이었다. 생명을 보는 경이로움과 안타까움, 그게 내가 생각한 강북이라는 가치와 생협이라는 가치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녀석들에게, 나는 당시 내 머리를 차지하고 있던 가장 중요한 가치들을 부여했었다.

 

이번 첫 추위, 그날 영도까지 가는 추위도 추위였지만, 비바람이 몰아치던 그 밤에, 마당 고양이들이 많이 죽었다. 그리고 진짜로 내가 애지중지하던, 생협이 그 밤에 죽었다.

 

고양이들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앞뜰, 뒷뜰, 여기저기 구석진 곳을 찾아서 고양이 사체를 치우는 게 내가 하는 일이다. 그래도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몇 달간 썩어가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고양이별로 가는 마지막 길이라도, 내 손으로 치워주고 싶었다.

 

생협의 사체는 며칠 후, 마루 바로 바깥에 있는, 녀석이 늘 숨어있기를 좋아하는 회양목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녀석은 늘 내가 TV를 보던 마루 바로 바깥에서 정말로 자는 듯이 쓰러져 누워있었다. 고양이 사체를 치우는 것에는 이제는 좀 익숙해질 만하기도 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다. 집게로는 집을 수 없는 회양목 깊은 곳에 있어서, 결국 두 손으로 안아내면서, 정말 그렇게 눈물이 많이 났다. 너무너무 예쁜 녀석이었다. 한 번도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 못했고, 마음껏 안아주지도 못했다. 그렇게 한 번쯤 만져보고 싶었던 녀석을, 죽은 다음에야 안타깝게 만져볼 수 있었다. 아, 삶이란! 왜 우리는 마음껏 사랑하지 못했던가!

 

생전의 그 털 그대로, 그렇게 곱게 누워있는 녀석을 안아 들고, 구청 직원을 기다리면서, 집에 있는 제일 좋은 종이 봉투를 몇 개 겹쳐서 그 안에 넣어주었다.

 

올 봄에 녀석과 한 배에서 같이 태어났다가 한 달도 채우지 못하고 누운 녀석의 형제들도 내 손으로 받아주었었다. 그 때는 그렇게 눈물이 많이 나지는 않았었다. 솔직히, 그냥 안되었다, 넋이라도 좋은 곳으로 가면 좋겠다, 그렇게 무덤덤했다.

 

그러나 내 책의 모티브로 생각했던 생협, 그러니 내가 얼마나 더 정을 주었겠는가. 잠든 듯이 누워있는 녀석의 뻣뻣한 몸을 들어내면서, 문득 털이 참 곱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을 내가 그렇게 모시는 동안에, 정말로 녀석을 애지중지 돌보던 엄마 고양이가 담벼락 위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어머니 생각이 났다. 동생들이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어머니는 전부 다섯 명을 낳으셨다. 내 바로 밑에, 아주 어려서 죽은 여동생이 있다. 워낙 내 어린 시절이라, 기억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 밑에 남동생이 하나 더 있다. 걔는 기억에 난다. 어른이 되었을 때에는 삼형제로만 알고 있지만, 내가 알기로는 어머님은 다섯 명을 낳으셨다.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그 생각이 났다.

 

이래저래 생각해보면, 지난 4년 동안 내가 돌본 고양이들이 열 마리가 넘는다. 맨 처음 우리 집 마당에 자리를 잡았던 삼색 모녀 고양이, 거기에서부터 아직까지 마냥 자기 집이라고 우기면서 오는, 우리 집 아기 고양이들의 아빠가 된 검둥이, 그런 녀석들과 내가 지낸 지난 4년간의 삶, 그것을 설명하는 키워드로 돌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녀석들을 돌본 건지, 녀석들이 나를 돌본 건지, 그걸 잘 모르겠다.

 

사람들과의 티격태격하는 관계, 언제나 내가 질게 뻔한 새만금이나 FTA 같은 싸움 속에서, 내가 즐거움을 잃지 않고, “, 빨리 집에 가봐야 합니다, 얘들 굶고 있을 거라서”, 이렇게 내가 아프면 안되고, 쓰러지면 안 된다고 격려하던 건 오히려 내가 돌보는 고양이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가 누구를 돌보는 것이냐, 이게 요즘 내가 하는 고민의 가장 큰 주제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익관계인지, 협력관계인지, 잘 따져보면 말하기 나름이다. 이건 좀 복잡하다. 그러나 고양이를 돌보면서, 이게 이익관계가 아닌 건, 너무너무 뻔하지 않은가? 걸핏하면 집 나가고, 툭하면 죽고, 그런 어설픈 녀석들과 지낸 4, 돈과 이익으로 삶이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진짜로 내가 배운 것 같다.

 

내가 생협이라고 불렀던 고양이, 너무너무 예뻤었다. 녀석의 사체를 커다란 종이봉투에 담으면서

 

몸은 고양이별로 가고, 마음은 내 마음에 담고.

 

그 생각을 하면서, 정말로 많이 울었다.

 

마지막 길을 보내는 건, 귀찮은 일이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게 싫다고 돌보지 않는 것, 그건 좀 아닌 듯 싶다. 우리의 삶은, 좋든 싫든, 만남과 이별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 그게 어른이 되는 길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예전에는 대가족이었고, 형제들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기본적인 사회화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집안 내에서 형제들끼리, 어느 정도는 한다. 그게 전통적 삶이다.

 

그러나 지금은, 혼자 많아야 두 명이 큰다. 집안에서 형제, 자매들끼리, 그렇게 하는 사회화를 우리는 생략하고 넘어간다. 돌봄? 부모가 날 돌보는 거, 그게 당연해지는 사회이다. 학교? 지금 학교에서 그런 걸 가르쳐주지 않는 건 뻔하게 다 알고 있는 거 아닌가? 강남과 목동 엄마들이 신봉하는 사교육, 거기에는 예쁨받고 돌봄받는 귀공자, 귀공녀들 양산처 아닌가?

 

우리의 교육에서는, 좋든 싫든, 죽여라, 그래야 산다, 대학입시를 향해서 단 하나만을 가르친다. 대학교육? 뻔하지 않는가. 지금 우리는 태어나서 취직할 때까지, 남을 죽이라고만 가르친다. 그리고 그게 장땡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게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는 것은, 상식을 가진 사람들은 다 알 수 있는 거 아닌가?

 

돌봄은 올드한 개념이다. 영어로 캐어’, 그야말로 니미 뿡이다.

 

작년, 올해, 사회적 트렌드의 키워드는 힐링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건 명박 시대가 만든,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사기성 농후한 개념이다. 사람을 수동태로 만들고, 누군가 날 좀 치유해줘, 그러나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뭔가 좀 나아진 것 같지만, 돌아서면 허무하거나 사기 당한 생각이 드는 개념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멘토 열풍에서 힐링 열풍까지, 명박 시대를 지내느라고 우리가 너무 힘들어서, 잠시 그런 데 기대고 있었던 것에 불과한 것 아닌가?

 

곰곰 생각해보면, 내가 생협을 돌보고 있었던 것인지, 생협이 나를 돌보고 있었던 것인지, 난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생협의 사체를 발견하고, 그걸 정리하면서, 돌본다는 것은 누가 누구를 돌보고, 그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또한 삶이다. 생협은 6월에 태어나 11월에 눈을 감을 때까지, 다섯 달 동안 짧은 삶을 살았다. 그리고 나는 그 다섯 달 동안, 그의 삶 전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걸로, 하나의 우주가 완성된 것이다. 영생도 아니고, 건강도 아니고, 번영도 아니다. 삶은, 그냥 삶이다.

 

그런 생각을 곰곰이 하면서, 다음 에세이집의 키워드는 돌봄으로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무슨 돌봄 전문가인 것도 아니고, 스웨덴식의 돌봄 노동과 성의 고착화 같은 인류학 논문을 쓸 만큼 준비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각 잡고, 이게 돌봄이고, 이건 그릇된 돌봄이고, 그런 얘기를 할 마음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지난 4년 동안, 열 마리 넘는 길냥이들에게 매일 같이 밥을 주게 된 과정, 그 속에서 생겨난 인간적인 즐거움과 갈등 혹은 가끔 있는 아픔, 그런 얘기들을 이젠 좀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마당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눈 앞에서 죽었을 때, 마당에 있던 개나리 나무 아래에 묻어주었던 게 생각이 난다.

 

문득 생각해보니, 대한민국이라고 불리는 나라가 더 이상 교육과정에서 가르치지 않는 게, 우리는 뭔가를 돌보고 또 뭔가가 자신을 돌보는 그런 관계 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 어느 순간부터인가, 우리는 죽이라고만 가르친다. 시험을 잘 봐서 남을 죽이고, 입사 면접에 잘 대답해서 남을 죽이고, 그렇게 남을 죽여야만 니가 사는 것이다, 그렇게만 가르친다.

 

이게 나라냐? , 양아치들의 공화국 아닌가?

 

수경스님이 새만금 갯벌에서 삼보일배를 떠나면서 유마경 얘기하신 게, 오랫동안 마음을 적셨다.

 

네가 아프니, 내가 아프다

 

우리는 유마힐이 했던 그 얘기 속에서, 앞의 문장 반은 빼어먹고, ‘내가 아프다만 줄구장창 반복하고 있던 것 아닌가? 네가 아픈 건 안 보이고, 내가 아프다고만 말하고 있는 이 기이한 상황

 

내가 늘 있던 마루 앞에서 얼어 죽은 생협의 사체 앞에서, “참 추웠겠구나, 미안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사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20대에 나를 투사라고 생각하면서 삶을 시작했다. 이제는 그만 싸워야지, 하면서도 평생을 싸우면서 살았다.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싸우는 게, 결국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고, 뭇 생명을 위한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았다. 과연 그럴까? 겨우 다섯 달, 나와 같이 지냈던, 아직 어른이 채 되지 못한 고양이의 사체를 손에 안고, 참 생각 많이 했다.

 

싸우는 게 다가 아니고, 힐링이 다가 아니다. 우리 편 만만세, 이건 더더욱 아니다. 삶은 그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명박 씹새, 그것 또한 과정의 일부일 뿐, 깨달음은 아니다.

 

우리는 너무 날이 선 채로 살아간다. 그리고 정말로 날을 세울 것을 잊은 채, 증오 위에 삶을 세우려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 고양이를 열심히 돌본다, 그것 역시 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한다, 그것도 소박한 변명일지도 모른다.

 

무엇인가를 돌본다는 것, 그것은 소유하지 않으려는 사랑이 아닌가, 그 정도가 내가 내린 임시 결론이다. 내가 길거리에 떠도는 고양이 몇 마리에게 밥을 준다고 해서, 그들이 내 소유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속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런 질문들을 다시 해보게 된다.

 

과연 우리는 충분히 사랑하고 있는가? 어차피 우리는, 영원히 사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은, 생협이나 우리나, 다를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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