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남 눈치 보지 않고 살아도 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나 싶다. 물론 나도 아이들 둘과 아내의 눈치를 보기는 한다. 아내가 아침에 애들한테 시달리다가 결국 출근 시간 놓쳤다. 반차 내고 좀 쉬다가 나가면서 ‘no merci’라는 말을 했다. 애들은 정말 no merci.. 인정사정 없다. 남자 애들 둘이 크는 우리 집은 더 그렇다. 졸렵다고, 피곤하다고 봐주는 것 일절 없다.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직장 상사의 눈치를 보게 된다. 공무원들도 장관 등 상사 눈치 무지하게 봐야 한다. 가끔 자신만의 왕국을 세워놓은 기관장 같은 똘아이들도 있지만, 그 힘이 영원한 것은 아니다. 잠깐 그런다. 언론도 다 눈치 본다. 방송 진행해도 마찬가지다. 힘 있을 것 같지만, 사장이나 편성국장 같은 사람들 눈치를 봐야 한다. 아무 눈치도 안 보는 것 같은 사람은 거의 정봉주가 유일했던 것 같은데, 그는 너무 눈치 안 봤던 것 같다.

 

학자들 특히 교수들도 눈치 엄청 본다. 정부에서 뭔가 하고 싶으면 진짜로 하다못해 7급 공무원 눈에라도 날까봐 벌벌벌 떤다. 모 학회 회장님께서 전직 차관님 눈치 엄청 보는 얘기가 최근에 들은 가장 웃긴 얘기였다.

 

나는 눈치 안 본다. 더 얻고 싶은 것도 없고, 더 되고 싶은 것도 없고. 청와대에 있는 아저씨들이 날 어떻게 볼까? 지 맘대로 생각하겠지. 나는 내 길 가는 거고, 너거는 너거 길 가는 거고.

 

직장 민주주의는 이렇게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서 쓸 수 있었던 책이다. 내 밑에 아무도 없지만, 내 위에도 아무도 없다. 대안이 실현 가능할 것인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인가, 그런 기술적 측면만 고려했지, 누가 어떻게 볼까, 그딴 건 키우지 않았다.

 

나도 보나마나 애들 둘이 한국에서 빌빌거리고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먹고 살겠다고 어딘가 취직을 해야 할 것이고..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아빠가 줄 수 있는 건 별 거 없고, 그래도 세상이라도 지금보다는 좀 낫게.

 

우리나라 직장들, 하여간 개떡 같다. OECD 국가 중에서 이렇게 지랄 맞은 나라는 또 없다. 그런데 그게 이상한 걸 잘 모른다. 남들도 다 그래.. 아냐, 니들만 그래!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겠냐, 그런 생각이 책 쓰는 내내 들었다.

 

내가 뭐라도 하면 뭐 좀 바뀌어? 내가 바꾼 건 생각보다 많다. 별로 티가 안 나서 그렇지. 국격이라는 말을 논쟁 중에 내가 제일 처음 썼다고 하면 아마 지랄이라고 난리들 칠 것 같다. 실제로 노무현 말기에 라디오 토론에서 논쟁하다가 그 말을 썼고.. 그걸 mb 인수위 메시지팀에서 받았다. , 나는 국격이라는 용어가 그보다는 좀 더 우아한 맥락에서 사용되기를 바랬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고.

 

따져보면 좋게 바꾼 것도 있고, 결국 나쁘게 바뀐 것도 있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 것도 안 바뀐다. 뭐라도 자꾸 만들고, 안 되면 개념이라도 만들 거나, 말이라도 만들어야.. 결국 뭐라도 조금 바뀐다.

 

안 바뀌면? 될 때까지.. 설령 내가 끝내지 못하더라도, 뭐라도 변화의 기점을 만들면, 난 그걸로 충분히 족하다.

 

남의 눈치를 안 보는 삶을 살게 된 것은, 누군가에게 인정받아야 할 이유도 같이 사라졌다는 말과 같다. 최선을 다 해서, 열심히.. 누구는 그렇게 안 살겠는가?

 

나는 그저 명랑하게, 웃길 수 있을 때 웃기고, 못 웃기면 다음 웃기는 찬스를 기다리며 그냥 술 처먹고 기다리는.

 

한국의 많은 독자들 덕분에, 세 끼 밥 먹고 사는 데 불편함이 없게 되었다. 내가 누구 눈치를 보겠냐? 그저, 더 웃기지 못하고 더 발랄하지 못한 것을 반성할 뿐이다. 다음 챤스는 또 온다..

 

 

(직장 민주주의 한참 작업하던 시절, 강화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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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향자와는 꽤 친하게 지낼만한 사이였는데, 내 코가 석자라서. 미루고 미루다, 어제 여의도에서 술 한 잔 했다. 다음에 만나면 누님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좋아한다. 나는 누나들하고 특히 잘 지냈다. 목에 힘 빳빳하게 줘봐야,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다.

 

50대 에세이는 팔린 건 그닥, 그렇지만 내 삶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바뀐 생각이 글에 반영되는 것도 좀 있지만, 글을 쓰면서 다시 생각을 정리하고..

 

나중에 70쯤 먹어서 나에게 가장 많이 영향을 준 책 물어보면, 나는 이 책 집어들 것 같다. 요즘 만나는 사람들, 가급적이면 편안하게 해줄려고 노력한다. 예전의 나는 그렇지는 않았다.

 

50이 넘으면 좀 찌그러지는 맛이 있어야..

 

요즘 진짜로 그렇게 산다. 좀 찌그러져서, 적당히.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갖고, 나 혼자 있는 시간도 가급적 많이.

 

만약 내가 갑자기 암으로 죽지 않는다면, 찌그러지는 것의 미덕 하나가 늘어날지도 모르겠다. 찌그러지는 것이 목표가 되면, 스트레스가 엄청나게 줄어든다. 사실 무지막지한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어진다. 그런 것들의 많은 이유는 자기가 자기에게 주는 짜증과 비난 같은 것 아니겠나.

 

안희정과 이재명 지지자들이 뻥하고 붙을 때, 나는 무서워서 도망다녔다. 사람들 감정이 날카롭게 서 있었다. 요즘도 그렇다. 나는 그냥 무서워서, 대충 찌그러져 있을려고. 이재명을 공격하는 사람이나 방어하는 사람들 모두, 너무 많은 감정과 정성으로 한다. 이해는 가는데,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너는 의견이 뭐야?

 

네, 그냥 저는 찌그러져 있는.. 계속 찌그러져 있을께요.

 

기자들이 만날 때마다 김수현에 대한 의견을 물어본다. 의견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 뒤가 무섭다. 네, 찌그러져 사는 사람이 무슨 생각이 있겠어요, 잘 몰라요.

 

2004년부터 사회적 논의에 의견을 표명하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다. 시시콜콜, 이건 이렇게 생각하고, 저건 저렇게 생각해.

 

이제 처음으로, 나도 찌그러져서, 저 아무 생각 없어요.

 

많은 의견들은 논리처럼 생겼지만, 사실 감정이다. 그리고 그 감정의 뿌리는 생각보다 단순한 먼지 한 알인 경우도 많다. 그 위에 우리는 논리의 나무라고 생각하면서 사실은 감정의 숲을 일군다. 그리고 가끔은 그 숲을 보면서 스스로 대견해한다.

 

여기에 의견을 내는 것은 무의미한 경우가 많다. 시간이 많은 것을 스스로 드러나게 하리..

 

계통망인 그리드, 농업 전문가 특히 일본 농업 전문가, 플러그인 설계자, 내가 겨울 안에 만나려고 생각하는 사람들 리스트다. 일부는 내가 필요해서, 일부는 동료가 필요해서.

 

내가 관심 갖고 있는 분야나 주제는, 사실상 아무도 눈 돌리지 않고, 또 의도적으로 '불편하다'고 관심을 돌리고 있는 분야들이다.

 

찌그러져서 내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 한다. 뭐, 약간은 나도 돈도 좀 벌고.

 

그러면 나한테 뭐가 좋아?

 

찌그러진 삶에서도 찌그러진 꽃은 피는 법,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허허무지 벌판에 꽃씨를 피우는 마음을 사람들은 알랑가 몰라. 그런데 작은 꽃, 진짜 찌그러진 꽃이라도 피어나면 가슴이 뿌듯해지는 그 행복감을 사람들은 알랑가 몰라.

 

이런 마음을 50대 에세이 작업하면서 만들어낸 것 같다. 뭐, 원래도 화려한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책 작업과 함께 그렇게 화려한 것을 피해야 하는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인 마음 가짐을 가지게 되었다. 찌그러지는 것은 아름답지 않더라도, 불편하거나 더러운 것은 아니다.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값비싼 모피를 입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뒤에서 받고 있는 것보다는 낫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의 의미를 잘 몰랐다. 못 빳빳하게 세워야, 그런 생각을 했었다.

 

찌그러지고, 굽어져보니까, 선산을 지키는 것의 의미는 알겠다. 그냥 세 끼 밥 처먹고 있는다는 얘기와 다를 바 없다. 그래도 세 끼 입에 밥이 꼬박꼬박 들어가는 게 어디냐.

 

앞에 나가서 전사들처럼 헤집고 싸우는 사람들도 필요하고, 그냥 쭈그러져서 황무지에서 조그만 꽃이라도 피우는 찌그러진 사람도 필요하다.

 

'손 많이 가는 남자'라는 표현이 있었다.

 

나이 50, 이제 나는 씨 뿌리고, 꽃을 쓰다듬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에 가까워진다. 내 손이 필요한 일들이 세상에 좀 생겨났다. 그렇게 찌그러져서 밥값이라도 하고 사는 게 행복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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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환경, 에너지, 이런 데가 책에서는 정말 인기없는 동네다. 그래도 경제사상사 보다 인기가 없지는 않다. 석사는 국제경제학으로 받았는데, 대학원 졸업하자마자 사업 분석하는 회사에서 팀장 제안을 받았었다. 6개월짜리 짧은 과정만 하나 더 들으면 국제 선물시장 거래인 자격이 나오는 게 졸업 옵션이었던. 나중에 그 석사 전공으로 wto에서 제안이 오기도. 그걸 다 내려놓고 사상사 전공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생태경제학에 대한 사상적 기반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사상사를 평생하고 싶었는데, 내 때에도 벌써 그게 쉽지가 않던 시대. 대학원 졸업 이후로 늘 춥고 배고프고, 한데 밥 먹으면서 살았다. 무관심, 이런 건 몸에 붙이고 사는 유니폼처럼 익숙하다.

좌파 내에서도 노동자 문제가 상대적으로 주류였다. 그 좋은 머리로 사상사나 생태 같은 거 하냐고, 이죽거리는 비웃음을 들으면서 20대를 지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진짜 주류는, 통일이 내 인생의 전부라고 하는 사람들. 통일파 1진, 노동파 2진, 그리고 나면 여성 문제가 조금 더 앞 줄이고, 나는 말진 중의 말진. 그래도 너니까 발표 기회를 준다고, 네 고맙고맙. 누구한테나 머리 숙이고, 고맙다고 말하고, 그런 게 입에 붙었다.

30대 이후는 시민단체와 함께 했다. 여기는 민주파가 또 절대 본진. '생태 파시즘'이라는 이죽거림과 함께 30대를 보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냥 내 길을 걸었다. 인생의 목표, 그런 건 모르겠고, 돈은 밥 먹고 살 정도만 있으면 된다는 빈곤형 톤 앤 매너가 몸에 붙었다.

이제 50.. 드디어 농업 문제를 다루어도 되는 순간이 되었다. 나중에 먹고 사는데 큰 문제 없을 때 하겠다고 뒤로 뒤로 미루어둔 주제다. 이제 먹고 사는데 큰 문제 없고, 삶의 어려움 때문에 고통받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왔다.

페북에서도 농업 주제는 썰렁하고 별 관심 없다. 만약 좀 더 스포트라이트 받고, 화려한 삶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지금도 관심없고 미래에도 관심 없는 이런 주제를 집어들지는 않았을 것 같다. 괜찮다.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보람있게 하는 체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대기업에서도 맨 앞에 서 봤고, 정부 내에서도 맨 앞에 서 봤다. 총리 주재 회의를 운영하는 일이 내가 했던 일이다. 경총회장이나 상공회의소 회장도 다 불렀었다. 그 시절, 내가 가장 어둡고, 다크했다. 정신적으로도 행복하지 않았었다. 내 논리는 모르겠는데, 내 몸은 그런 삶을 원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이 더 좋다. 몇 배 좋다.

민주파들이 농업에 한 가장 큰 명언은 "핸드폰 팔아서 쌀 사먹으면 된다"는 말이다. 통일파들이 농업에 대해서 한 가장 큰 명언은 '통일 농업', 결국은 식량부족인 북한에 쌀을 어떻게 보낼 수 있는가, 이런 방안을 찾아달라고 했다. 민중파들이 농업에 대해서 한 가장 큰 명언은 "우리 전농에서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면서 꼭 앞 말을 그렇게 붙였다. '우리전농파'라고 불렀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gmo 개발하고 팔아먹을 생각만 했다. 그 길이 막히니까 농림부 공무원들이 아주 우울해했다. 시대에 뒤쳐지는 것 같다고 한탄을..

민주당 농업 정책은 새만금에 걸려 있다. 이번 정권의 근원적 아픔은 새만금과 광주, 여기에 있다. 그나마 그래도 민주당이 하고 싶은 거라도 있기는 하다. 한국당은 진짜로 농민표 말고는 아무 관심이.

내가 정리하고 싶은 관점은, 국토생태라는 눈으로 보면 농업이 이렇게 보이더라.. 그 얘기다. 건설교통부 시절에 신문에 '국토부'라고 이름을 바꾸면 좋겠다고 신문에 썼었다. 결국 다음 정권에 국토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렇지만 국토생태에 대한 생각은 탑재되지 않았다.

민주파라고 하고 농업은 하거나 말거나, 아주 지겹다. 얼마나 농업이 하기 싫었는지, 농업이라는 말을 농촌이라는 말로 다 바꿔버렸다. 1차 산업인 농업이 농촌 개발 혹은 농촌 정비인 3차 산업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아주 지랄들을 했다. 지금은 뭐가 좀 바뀌었나? 바뀌긴.. 90퍼센트 이상의 민주파 가슴 속에서는 여전히 "핸드폰 팔아 쌀 사먹으면 된다"는 정서가 존재하는 것 같다.

옥수수 사료로 살찌운 한우 특뿔, 이런 거 맛있다고 먹는 게 창피하기도 하지만, 그 입이 꼬진 것이다. 원래 인류는 그렇게 먹는 거 맛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한국인은 특히 더 그렇다. 그게 다 자본 아니 국제 농업자본이 단기간에 길들여서 만들어낸 인공의 맛이다. 아니, 자본의 맛이다.

 

근본에 관한 얘기는 상업적이지 않다. 그렇지만 그게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맛만 있으면 돼지."

 

요렇게 말하는 사람, 진짜 소주병으로 머리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니가 개, 돼지냐? 고양이 키워 보니까, 우와, 더럽게 까다롭네. 고양이만도 못한 사람이 너무 많다.

 

어려운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민주파의 권력 투쟁, 통일파의 더 근본적인 권력투쟁, 이런 속에 묻혀버린 농업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 2008년 11월, 첫눈 온 날, 우석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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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영화 시사회에서 관객과의 대화 끝나고 운전하고 집에 오다, 뜬굼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다. 멋있게 사는 것보다, 안 쪽 팔리게 사는 게 100배 중요하다. 어린이 환경보호 행사에 모피코트 입고 온 사람들 얘기를 곰곰이 생각하다.. 츄리닝은 멋지지는 않지만, 쪽 팔리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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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정훈과 여의도에 있던 포장마차에서 밤늦게 소주 잔을 기울이던 시절이 있었다. 나주 시장이던 신정훈이 막 초선의원이던 시절이었다. 지난 총선의 농업 공약의 마지막 조율을 그와 하게 되었다. 그의 동료였던 이재수와 민주당 정책위 농업담당, 그렇게 마지막 테이블 위에서 소위 넣고 빼기를 하였다. 아무도 농업에 관심이 없었는데, 내가 직권으로 테이블을 열었다. 그 때 나는 민주당 정책공약단 부단장이었다. 단장은 광주 시장 된 김용섭이었고.

 

그게 내가 신정훈과 이재수를 본 마지막 날이었다. 신정훈은 신정부 들어가서 농업비서관이 되었다. 이재수는 지난 지방선거에서 춘천 시장이 되었다. 지난 총선이 농업에 관한 문제에서 내가 공식적으로 관여한 마지막 순간이다. 이제 아마도 더는 내가 농업 문제에 관여하게 될 것 같지는 않다. 2003년부터니까, 농업연구모임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농업 관련된 문제에 관여허게 된지 15년 정도 지난 것 같다. 그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정책 파트너로 잠시 논의를 같이 했던 박창길 박사는 농촌경제연구원장이 되었다. 새정치민주연합 시절이었다. 많은 것을 같이 한 윤석원 교수는 결국 은퇴하고, 귀농하여 진짜 농사군이 되었다. 한 때 등 대고 지옥의 불길을 같이 걸어가던 사이인 송기호 변호사는 아직도 어두운 밤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아이 둘 돌보는 아빠가 되었다.

 

애초의 경제 대장정 시리즈의 10 번째 책이 농업경제학이었다. 나는 대장정을 끝까지 마무리하지는 못했고, 문화 경제학 이후로 시리즈를 세워놓았다. 그렇게 뒤로 밀린 농업경제학을 이제는 마무리하려고 한다.

 

2.

아마 순서대로 하면 38번째 책이 될 것 같다. 37번은 당인리다. 39번은 아직 유동적이다. 39, 40번의 순서가 바뀔지도 모른다.

 

형식은 아빠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하려고 한다. 농업을 공부한 아빠가 별 생각없이 고 1이 된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원래 이 형식으로 책을 한 권 준비해둔 게 있는데, 그건 딸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딸은 태어나지 않았고, 망했으요..

 

편지 사이의 에피소드를 통한 바깥 얘기도 어느 정도는 만들어볼 생각인데, 꼭 그런 형식에 얽매일 생각은 없다. 우리 큰 애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보여줄 편지를 쓴다는 마음으로.. 당연히 1, 2년 사이에 변하게 될 정책은 그냥 실루엣만. 기본에 해당하는 얘기를 고1이 알아먹을 수 있을 수준으로 쉽고 간략하게.

 

시간 나는 대로 편지 한 통씩. 편지를 잘 쓰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편지를 많이 쓴 것은 사실이다. 정말 많이 썼다. 말로 하기 어려운 것을 편지로 쓰는, 나의 오래된 습관이다. 나만큼 편지 많이 쓰는 사람으로는 조한혜정 교수 정도 생각난다. 이 양반도 정말 편지 많이 쓴다. 10년 넘게 중요한 일들은 거의 다 서로 편지로 오고 갔던.

 

3.

이 작업은 좀 더 개방적으로 해보려고 한다. 대략 50장의 편지를 쓰면 책 작업은 끝난다. 아직은 좀 생소한 푸드플랜에 편지 한 통, 농업혁명이라고 했던 화학농의 도입에 편지 한 통, 새마을운동의 21세기적 해석에 편지 한 통, ‘핸드폰 팔아 쌀 사 먹으면 된다고 했던 경제관료들 얘기로 편지 한 통, 이런 식으로 할 생각이다.

 

결국 작업은 50개의 주제를 추리는 일과, 편지를 잘 쓰는 일, 이렇게 두 단계로 구성될 것이다. 작업이 성공하면, 50개의 편지를 읽은 후에 농업경제학 교과서 한 권을 숙독한 효과가 나올 수 있도록. 편지의 형식상 표, 공식, 그래프, 이런 건 안 들어간다. 아들에게 편지 쓰면서 그래프 그리는 똘아이가 있을까 싶다.

 

하여 1차 작업은 50개의 주제를 고르고, 그 안에서 스토리가 발생할 수 있도록 스토리 보드를 만드는 일.

 

제일 큰 관건은, 내가 알거나 하고 싶은 얘기가 아니라, 이 시기에 필요한 얘기로 주제를 업데이트하는 일이다.

 

하여..

 

주제 50개를 고르는 일은 좀 더 공개적으로 블로그를 통해서.

 

꼭 선정되지 않더라도 뭔가 생각에 도움이 되신 분들은, 출간되면 책에 짧은 편지라도 적은 편지본으로 후사 (비밀댓글로 주소, 전번, 연락처 남겨주셔야 나중에 발송 가능합니다..)

 

출판사는 반비, 에디터는 '문화로 먹고 살기' 같이 했던 김희진씨..

 

(호박꽃, 어느 빛 좋은 9월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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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다페스트였다. 도나우강에 일본 정부 후원을 받아서 UN에서 배를 띄웠다. 막 사회주의에서 전환된 부다페스트는 딱 한국 70년대 모습 같았다. 공항에서는 서독 마르크를 받았고. 해질 무렵부터 진짜 호화판으로 먹고 마시고. 그 때 도나우강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내 인생이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 시절 외교부에서 파견 근무를 나왔으면 좋겠다는 얘기가 있었고, 청와대 외곽 조직 한 군데에서도 파견 희망을 했었다. .. 눈 딱 감았으면 UN 기구에 좀 높은 자리로 가는 순번이었다.

 

IEA, International Energy Agency, 국제에너지기구, 파리에 본부가 있다. 우리는 그걸 International Excursion Agency, 국제소풍기구라고 불렀다. 절경마다 찾아다녔고, 툭하면 칵테일 파티였다. 그 시절 나는 개혁파 young chair, 진짜 젊은 의장이었다. 몇 년 지나면 개혁파 지지로 서브스타 의장 정도는 할 거라고 사람들이 생각했나 보다. 하여간 혼자 차 한 잔 마시기가 어려웠다. 화려함으로 치면 극강의 화려함을 추구할 수 있는 자리였는데..

 

부다페스트에서 이렇게 사는 건 좀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2.

‘88만원 세대의 출발 버전이 여러 개가 있다. 세 번째 버전인가가 LG 투수 이상훈 얘기로 시작하는 버전이 하나 있었다. 그걸 갈아 엎으면서 어깨에 힘 빼고 던지기라고 메모를 적었다. 그 앞의 얘기들에 너무 힘이 들어가 있었다. ‘첫 섹스의 경제학이라고 이름 붙인 장은 그 한참 뒤의 버전이었다. 결국 그걸로 출발점을 삼았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사는 게 좀 힘들기는 했다. ‘악으로 깡으로’, 사실은 이런 말을 더 좋아했던 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악도 없고, 깡도 없다. 남은 건 늘어난 배 밖에 없다. 배가 나오고 살이 붙이 시작하면서, 존심도 사라졌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악과 깡으로, 그런 말이 정말 몹쓸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 천민 자본주의가 해줄 거 제대로 안 해주면서 그냥 쥐어짜기만 하려다 보니까 이런 이상한 말들을 만들어낸 거 아닌가 싶다.

 

악과 깡을 권하는 시대, 정말 거지 같은 시대를 우리가 살았다. 요즘은 좀 낫나? 올해 프로야구의 키워드는 절실함이었다. 절실함이 있는 선수와 절실함이 없는 선수, 악과 깡의 21세기 버전일 뿐이다. 지랄맞다.

 

3.

나라고 가슴 아픈 순간이 없겠나? 더럽게 안 팔리는 책들, 가슴 한 켠에 묻을 때는 솔직히 눈물 찔끔 나려고 한다. 그래도 순간이다. 요즘은 훨씬 쉽게 그런 걸 잊는다. 남 탓도 이젠 잘 안 한다. 그냥, 재수 없는 것에 불과하다. 잘 되든, 못 되든, 과도한 의미부여 같은 것도 잘 안 하려고 한다. 그냥, 재수가 없는 것이다. “내 탓이요”, 요 딴 것도 싫다. 남들은 뭔데? 거적데기여?

 

요 몇 년 사이, 남들한테 화 내는 일도 거의 없다. 유일하게 화 내는 건 우리 애들. 좀 정리 좀 하시고 사세요들.

 

그냥 기능적으로, 한다, 안 한다, 이렇게는 안 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무감각하고 무심하게 조건만 얘기할 뿐이다.

 

그래도 가끔 어깨에 더 힘을 빼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기도 하다. 진짜 이상하게 끼어드는 벤츠 보고, 저 놈의 벤츠 새끼가.. 그리고 금방 후회한다. 왜 욕을 해, 어차피 듣지도 못할 건데, 비겁하게 숨어서.

 

4.

뭔가 정부기관 기관장들 모아놓고 석학 발표 같은 것을 해달라고 한다. 뭔지도 모르고 추천한 사람 얼굴 보고 그냥 한다고 그랬더니, 발제문이 필요하단다. 젠장. 그냥 생각 자유롭게 얘기하면 된다고 하더니, 뭔 발표문이야.

 

가만히 돌아서서 생각해보니까, 근데 내가 석학인가? 나는 그냥 애 둘 키우는 아빠일 뿐. 뭔가 새로운 생각을 해야 한다는, 바로 그 생각을 안 한지 벌써 몇 년 된다.

 

나이만 처먹으면 그냥 대우가 높아지는 것은, 전형적인 개발도상국의 장유유서 분위기. .

 

되고 싶은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상태에 도달한지 몇 년 된다. 2년 조금 넘는 것 같다. 광주의 모 공기업 사장 자리 안 간다고 한 뒤로, 되고 싶은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상태에 드디어 도달한 것 같다.

 

남들은 불쌍하게 보는데, 나는 이 편안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몇 년간 내 속을 몇 번씩 다 뒤집어가며 남은 허세들 탈탈 털었다.

 

그래도 아직은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젠장, 나오기 시작한 배에 신경 쓰여서 배에 힘을 주다 보니, 온 몸에 다시 힘이 들어가는. 이거 아닌데.

 

5.

어떤 데에서 올해의 책 선정 해달라는 부탁이 왔다. 지방 여행 중이라, 바로 답변을 못했다.

 

잠시 생각을 했다. 올해의 책 선정을 전혀 안 한 건 아닌데, 나는 무슨 심사위원 이런 거 안 한다. 내일은 그 얘기를 하고, “저는 빼주세요”, 통화를 해야겠다.

 

그런데 이런 마음에는 약간의 심통도 있다. 지 책도 제대로 못 파는데, 무슨 심사는 심사. 한 물간 노털 느낌 드는 것도 좀 편치는 않다. 써야 할 글도 잔뜩 밀렸구만, 책 선정이나 하는 건, 약간 가슴이 서늘한 느낌도.

 

좀 더 넓게 마음을 먹고, 이것도 예, 저것도 예, 그냥 그렇게 대충 살아야 하는데, 지켜야하는 원칙이 아직은 너무 많다. 이것도 안 해, 저것도 안 해, 이건, 그냥 기분 나빠서 안 해..

 

애 보는 아빠가 이 정도는 좀 가려도 되지 않나, 나에게만 넓고 관대한.

 

teleology라는, 목적론이라는 개념이 있다. , 별로 안 좋아한다. 그래서 생태학 공부를 시작하게 되기도 하였다. 인생에 도달할 목표, 그딴 거 없다. 하면 뭐하게? 하면 더 행복해질까?

 

개인이 집을 사는 게 목표가 아니라, 국민들이 집 같은 거 고민하지 않게 해주는 게 북구 스타일이다. 아직은 전환기다. 국가의 목표가 하나하나씩 개인에게 전이되어, 개인들이 결국 악과 깡으로 살게 만드는 개떡 같은 나라 흔적을 아직도 못 버렸다.

 

목표는 국가가 고민해야 하는 거지, 개인은 목표 같은 거 필요 없다. 그게 선진국이다.

 

꿈이라는 것은 로보트 태권브이를 만들고 싶다, 달나라에 가보고 싶다, 그런 것을 꿈이라고 부른다. ‘해저 2만리같은 것이 꿈이다 (그리고 쥘베른은 해저2만리에서 제국주의가 진짜 꼬진 것이라고 끊임없이 외친다..)

 

그래도 어쩌겠냐, 국민들 소득수준은 선진국인데, 개도국 수준도 채 못 마치는 청와대 행정을 보면서 살아야 하니, 자꾸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그래서 어깨에 힘을 빼고 또 빼야 한다. 그러면 정말 좋은 볼을 던질 수 있게 된다. 언젠가는.

 

(국립 제주박물관에서 다섯 살 둘째가 난리를 치면서 찍어준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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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표지 확정되면 인쇄 들어간다는 것 같다. 어쨌든 이 책을 경계로, 나도 다음 단계로 넘어갈 것 같다. 느낌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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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클랜드의 단장 빌리 빈은 머니볼 이론으로 2002년 20연승을 이루었다. 그해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한 보스턴 레드삭스가 거액의 연봉을 빌리 빈에게 제시한다.

가장 낮은 비용으로 가장 높은 승률을 추구하던 빌리 빈은 보스톤으로 이적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여기 이 낡은 구장에서 우승하고 싶다, 바로 여기", 이런 얘기를 한다. 의미 있는 얘기다. 머니볼의 단장도 돈에 의해서 움직이면, 팀 형성이 안 된다.

영화 <머니볼>은 40대 이후의 나의 삶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나는 계산 먼저 하는 게 하는 일의 거의 전부다. 이게 될까, 안 될까, 얼마가 들까, 얼마나 남을까, 그 계산만 한다. 그렇게 계산은 하지만, 나는 돈으로만 움직이지는 않는다.

빌리 빈은 아직도 우승을 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젠 승진도 해서 팀의 부사장이 된.

행복은 우승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우승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게 행복이 아닐까 싶다. 10년 전에는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우승을 못하는데.. 그렇게 생각했다. 요즘은 과정에 모든 게 있다는 생각을 나도 한다.

목표가 큰 의미가 있지는 않다. 목표를 달성한다고 해서 엄청나게 기쁜 것도 아니다. 그 과정이 아름답거나 의미가 있거나, 하다못해 작은 즐거움이라도 있어야 한다. 요즘 나도 생각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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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애들 자는데 옆에서 그냥 잤다. 늦게 자거나 일찍 자거나, 일어나는 시간은 어린이집 가는 시간으로 똑같아졌다. 내년에는 큰 애가 학교 들어가서 한 시간 더 일찍 일어나야 한다. 이게 내 삶의 거의 유일한 고민인 것 같다. 하는 일이 없으니, 고민도 없다.

점심 때 최운열 의원과 밥 먹기로 했다. 참 복잡하게 얽힌 인연인데, 짧은 몇 달간을 뜨겁게 보냈던 것은 맞다. 복잡한 상황은 결국 간단하게 해소가 되었다 - 해결이 아니라. 둘째가 거푸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하면서, 방법 없이 내가 애들 돌보는 수밖에 없었다.

오후에는 당인리 발전소와 서울에너지공사 견학가기로 되어 있다. 현대에 입사한 것은 96년이었다. 과장 특채라서 별도의 교육 과정은 없었는데, 그 대신 그 사람들이 공장 견학 프로그램을 짜주었다. 몇 주에 걸쳐서 공장 시설들을 돌아보았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매달 공장 등 시설들에 들어가면서 살았다. 같이 가기도 하고, 혼자 가기도 하고.

20년이 넘게 그렇게 살다보니, 그게 생각의 원천이 되었다. 처음 인천의 전기로 보러 갔을 때 그게 내 삶의 일부가 될 줄은 몰랐었다. 공장도 가고, 유기농 현장도 가고.. 그렇게 살아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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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야구는 재밌게 봤다. 시즌을 마감하는 경기. 영화 머니볼에서 빌리빈은 마지막 경기에서 지면 꽝이라고 했다. 그 마지막 경기다.

영화 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선의 8번 타자다." 원래 8번은 투수들이 들어가는 자리다. 지명타자가 있으면 그 팀에서 제일 못하는, 수비 전문 같은 사람들이 들어간다. 하여간 타격으로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그래도 게임에는 나오는.

남은 인생, 8번 타자로 살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뭔가 해줄 거라고 기대하지 않고, 또 그럴 실력도 안 되고. 그래도 8번에서 뭔가 나오면 게임 풀어가기가 훨씬 쉬워진다. 누가 나한테 인생을 대하는 태도 같은 거 물어보면, "나는 조선의 8번 타자다"라고 자신있게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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