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익숙해서, 다른 말로 길들여져서 생각하지 못했다. 회사와 민주주의가 이렇게 어색한 조합이라는 것을. 돌아보니 한국에서 회사만큼 민주주의의 언어와 원칙이 통하지 않는 곳이 있나 싶다. 숫자로 압박하는 이익 앞에서, 경력을 앞세우는 조직문화 앞에서, 발끈 했다가도 뭐가 바뀔까 싶어서, 입을 열다가도 나만 다치지 싶어서, 물 흐르는 듯 지내온 시간이 너무나 많지 않았던가.
경제학자 우석훈은 한국사회의 절실한 과제로 ‘직장 민주주의’를 꼽는다. 사회 구성 원리로서의 민주주의와 일상의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음에도 현실이 원칙대로 움직이지 않는 까닭, 그렇게 효율과 수익을 강조하며 다른 가치를 뒤로 미루면서까지 달려온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 모두 ‘직장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일을 하는 이들에게 또는 일을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직장은 삶의 중요한 축이다. 그곳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보다 짧은 시간을 머무르며 적은 영향을 받는 곳에서는 말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직장 민주주의는 직장 내 민주주의뿐 아니라 기업과 기업 사이의 민주주의, 나아가 기업과 국가, 결국에는 시민과 국가 전체의 민주주의와도 영향을 주고받을 게 분명하다. 직장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끝이 아니라 오늘날 민주주의의 새로운 출발점이라 하겠다.
직장 민주주의 책이 알라딘 대문에 걸렸다. 사실 책 나오면 신문 서평 나올 때 말고는 잘 들여다보지 않는다. 나도 강철심장은 아니라서, 그냥 안 보는 게 정답이라는 생각이..
'88만원 세대' 나왔을 때는 서평도 거의 없었고, 주목받은 서점도 별로 없었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한동안 잊고 지냈다. 출판사가 작아서 무슨 마케팅 할 형편도 아니었고. 몇 달 후에 보니까 한 달에 만 권 넘게 나간다고.. 강연은 몇 번 했지만, 중간에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사실 잘 모른다. 실제로 '촌놈들의 제국주의' 준비하느라고, 나는 정신이 없었다.
직장 민주주의 책은, 서평 나오는 그 주까지만 좀 챙겨보고 살펴보지 않으려고 책 나오기 전부터 마음을 먹었다.
두 가지는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전후로 내 삶의 시대가 바뀔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거야 내가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 되는 거니까. 한국 사회도 이 책 전후로 나뉠 것이다. 직장 민주주의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첫 번째 책이라는 것에 나도 놀랐다. 내 앞에도 없었지만, 당분간도 비슷한 책이 나오지는 않을 것 같다.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이.. 없다.
우리는 너무 큰 얘기만 하거나, 너무 작은 얘기만 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다. 직장은 너무 큰 얘기도 아니지만, 아주 작은 얘기도 아니다. 이런 얘기들이, 한국에서는 텅 비어 있다. 뭐가 되게 많은 것 같지만, 사실은 여기저기 텅텅 빈 나라가 한국이다.
어쨌든 간만에 서점 사이트 들여다보다, 정규제가 책을 낸 걸 알게 되었다. 책 목차 보니까, 정규제 목소리 들리는 것처럼 토 나오게 잡아놨다. 유튜브에서 정규재가 그렇게 인기가 높다는데, 책은 뭐 그닥, 인기 수준으로 팔리는 건 아닌 듯 싶다. 이게 태극기의 특징인가? 하긴, 태극기들이 책도 열심히 읽었으면 우리가 벌써 스위스 정도는 간단하게 따라잡았겠지.
어느덧 민주주의라는 단어도 구시대의, 올드한 언어가 되었다. 그래도 그냥 썼다. 다른 단어가 별로. 나도 이제 올드하고, 아날로그틱하고, 트렌디하지 않다는 사실을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냥 트렌드만 쫓아가면, 갑질이 만연한 사회에서 계속 살게 된다. 작업하다 보니, 갑질이 트렌드고, 민주주의는 올드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트렌드를 버렸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누가 요즘 책을 봐? 내가 본다. 뭐하려고 책을 쓰는데? 좋아서. 그런 선문답의 계절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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