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타 센다이 공장에서 위기가 오면, 요넘으로부터 초기 기동이 시작된다..)

1.

<모피아>사 손에서 나온 건 큰 애 막 태어난 그 즈음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대선이 있었다. 드라마 판권은 팔렸는데, 박근혜 정권, 결국 편성되지는 않았다. 영화 판권은 막판에 서고. 하여간 그런가보다 했다.

 

처음에 <모피아>는 공무원의 부패와 관련해서 3부작처럼 디자인했었다. 두 번째는 교육 마피아, 세 번째는 건설 마피아.

 

두 번째 얘기는 이화여고 학생과 중앙고등학교 학생의 사랑 이야기로 구상을 했었는데, 얘기가 너무 슬펐다. 그래도 좀 덜 무겁고, 조금은 경쾌하게 하고 싶은데, 이 얘기를 너무 슬프고 칙칙하지 않게 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 고민을 하다가 결국 모피아 시리즈는 손을 놓았다.

 

2.

2년 전 여름, 정권이 바뀔 거니까 <모피아>를 영화로 살려보자는 얘기들이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안 한다고 했다. 그 사이에 드라마 판권은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벌써 이미 몇 년 전에 지난 얘기를 또 붙잡고 있는 것보다는 새로운 얘기를 만드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해서 새로 잡은 라인이 결국 <당인리>가 되었다. 모피아 작업할 때 그 팀이 그대로다. 그 사이 꽤 많은 변화가 생기기는 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어쨌든 너무 돈 없어서 헤매던 그 시절보다는 조금은 나아졌다. 초근목피 수준은 넘어섰다.

 

그렇지만 내년 한 해만 더 고난의 행군을 하자고 했다. 아직 샴페인을 터뜨릴 때가 아니고, 돈을 넉넉하게 쓸 때는 아닌 것 같다. 한 해만 더 고생을 하자고 했다. 최소 비용으로,최소 조건으로.. 물론 그렇다고 해도 <모피아> 쓸 때처럼 그렇게 정말 아무 것도 없이 전전긍긍하는 상황은 아니다. 그 때는 이준익도 어려웠고, 우리들 모두 다 개인적으로 인생의 가장 어두운 시기를 지내고 있었다. 사회도 어두웠다. 명박 시대 막 끝나고, 다시 박근혜와 함께 5년을 지내게 된.

 

3.

<당인리>는 전기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STE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Mathematics) 소설을 표방한다. 겉만 그렇게 하려는 게 아니라, 진짜 얘기도 기술과 기술 사이에서 벌어지는 충돌과, 그 밑에 숨은 음모에 관한 이야기다. 그래서 음모를 벗어나서 이기게 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남자들에 치여서 후방 지원을 하는 자리, 그야말로 한직으로 현업에서 밀려난 세 명의 여성 엔지니어에 대한 얘기다. 그리고 역시 엔지니어인 처장급 남성이 한 명 나온다. 여성 스리톱에 남성 한 명, 그런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가장 최신의 전력 관련 기술들이 사건 클라이막스 즈음에 대거 등장한다. 그리고 마지막 시퀀스는 실제로 센다이 대지진 이후 만들어진 토요타 센다이 공장에서 지역 위기 상황에 대비해서 설치, 운영 중인 바로 그 시스템을 모티브로 디자인했다. 기본적으로는 최신의 덴마크 연구와 일본의 연구들을 결합, 지금 우리가 뭔 짓들을 하고 있느냐, 이 개명천지에.. 고론 얘기들이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수소차 얘기하는 아저씨들이 지금 뭔 짓을 하고들 하고 계시는 것인지. 2년 전 최초의 구상에서 수소차는 아주 약하게 들어갔는데, 지금은 서브 라인 중에서는 메인 급으로. 어느 정권이나, 에너지는 별로였다. DJ 때가 그나마 좀 나았던 것 같기는 한데, 그 때도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기는 어려웠다.

 

4.

겸임교수는 두 번을 했다. 두 번 다 공대 대학원이었다. 그냥 숨 죽이고 잡 일 해주면서 기다리고 있으면 교수 되는 길이었는데, 30대의 내 나이에 숨 죽이고 기다리면서 살기가 싫었다. 성공회대와 연대에서 강의 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강의를 공대에서 했었다. 그런 이유로, 내 후배와 학생들의 대부분은 공대생들이었다. 내 주변에 공대생들 바글바글하다.

 

기술에도 드라마가 있다.”

 

얼만 동료에게 했던 얘기다.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도 드라마가 있다. 그렇지만 기술의 내면에도 드라마가 있다. 왜 우리는 220 볼트를 쓰는데, 미국과 일본은 아직도 110볼트를 쓸까? 한국이 선진국이라서? 그들이 우리보다 민주주의 국가라서 그런 건 아닐까? 그리도 구석구석에 수많은 사연들과 사연들 그리고 사회의 작동 방식이 숨어있다. 그런 얘기가 하고 싶어졌다.

 

5.

애들 보느라고 준비하고 구상해놓은 것들이 너무 내깔려져 있었다. 내년부터는 너무 묵히지 말고 좀 정리를 하나씩 해나가기로 했다.

 

급하게 밀린 게 SF가 하나 있고, 정치 코미디가 하나 있다. 정치 코미디는 기본 틀은 거의 다 잡았는데, 그야말로 일상에 치이고 치여서. 고양이 애니메이션도 미루어 둔 게 너무 미루다 보니.. 이제는 기억마저도 가물가물.

 

당장 뭘 급하게 할 생각도 없고, 그렇게 하기도 어렵다. 그래도 몇 년 동안 여유생기면이라는 별 되도 않는 핑계로 미루어 둔 것들을 내년부터는 하나씩 정리해 나가려고 한다.

 

그리하야 내년은..

 

추수는 언제할지 모르지만, 씨를 뿌리는 한 해로. 가난은 하지만, 몸을 최대한 가볍게 해서, 많은 씨를 뿌려두는 한 해로. <모피아> 이후 지난 6년을 돌아보면, 정리는 제대로 못했지만, 이것저것, 하기는 참 많이 해두었다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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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균 의장이랑 몇 달만에 점심 식사. 이 양반도 몇 년 사이에 많이 늙었는데, 머리만큼은 아직도 염색 안 했다고 자랑을. 그렇게 오랜 기간을 같이 지냈는데,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없어서.. 국회의장 해보니까, 처음에는 2년이라서 좀 섭섭했는데, 막상.. 2년이면 충분한 것 같다. 웃겼다.

2년간을 거의 매일 보다시피 했었다. 이제는 하는 일도, 가는 길도 달라서, 시간 내서 그냥 얼굴이나 보는 사이가 되었다. 세상 사는 게 그렇다. 만났다가 또 헤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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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동안 핸펀 주소록을 거의 관리하지 않고, 그냥 더하기만 하고 살았다. 1700명.. 차 블루트스 핸펀 db에 1000명만 들어간다. 어지간하면 그 선에서 문제 없었을 것. 얼마나 내가 너저분하게 살았는지, 느낌이 팍 왔다.

별 다른 방법도 없어서 그냥 시간 날 때마다 손으로 하나씩 지우기로 했다. 김씨 동네 막 끝났다. 우와, 이렇게 많은 김씨들이 있었다니.

앞으로 차 한 잔 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기준이다. 용민이 남고, 김어준? 그래도 술 한 잔 할 가능성이 높은. 남고. 그 사이에 장관된 사람이 몇 명 있는데, 아무래도 이 번호로 연락해서 차 한 잔 마실 일은 없을 것 같다. 방송할 때 알았던 사람도 많은데, 필요하면 지들이 알아서 연락하겠지. 문재인 태그로 18명이 있는데, 이것도 일괄 삭제. 김두관 번호는? 차 마실 일 진짜 없을 것 같다. 꼭 술 한 번 마시자고 돌아섰는데, 그리고 술 마실 일이 없었던.

한살림이나 ymca 간사들 번호 지울 때 좀 생각을 했다. 어렵던 시절, 같이 등을 대고 건너던 사이이기는 한데.. 필요하면 자기들이 알아서 연락하겠지.

여의도에서 무슨 일을 할 일은 없을 것 같고, 정부에 다시 들어갈 일도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방송을 다시 할 것 같지도 않고. 그냥 지난 시간의 일이다. 사실 2년 전에 일괄 정리를 한 번 했었어야 했는데, 그럴만한 틈이 없었던 것 같다. 마침 직장 민주주의, 최종 수정까지 탈탈 털고 나니 잠시 마음의 여유가.

특별히 유별난 일 하지 않는 이상, 나는 100명 정도의 전화번호면 충분할 것 같다. 어쩌다가 1,700명까지 늘어났을까? 너저분하게 살아서 그렇다. 잠시 반성.

늘 보고 일하는 동료는 다섯 명도 많다. 정신없어서 그렇게 많은 숫자가 같이 돌아다니기 어렵다. 1년에 한 번 차 마실 정도의 사람은 100명이 안 된다.

총리실에 있던 시절, 수첩 전화번호칸이면 깔끔하게 다 들어갔다. 그 수첩이 내 삶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준 수첩이 되었다.

어느 날 전화번호 옮겨적다 보니까, 된장.. 절반이 박사고, 나머지는 고위 공무원들이네. 뭔 인생을 이렇게 대충 산 거야? 그 고민이 커지고 커져서, 결국 사직서를 냈다. 그리고 내 삶이 생겨났다.

100개의 전화번호면 충분하게, 그렇게 단촐하게 살아야 한다, 나이를 처먹었으면. 치부책 만지듯이 핸펀번호 들여다보면서 넉넉함을 느끼면.. 지옥갈 것 같다. 100개로 넘치는 삶을 단촐하게 살 수 있으면, 천당갈 가능성이 높아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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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진짜 속 편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은근히 쫑코 놓는 소리, 예를 들면 "야인으로 지내는 사람이", 요런 얘기 들어도 히히 웃고 만다. "좋지요, 진짜 편해요"... 예전 같았으면 속으로 부글부글 했을 소리들이지만, 요즘은 신경 한 개도 안 간다.

"당신 아니면 이거 못한다", 이렇게 택도 없는 주문을 하는 사람이 있어도, "조선에 인재 많습니다, 잘 난 사람도 많고, 유능한 사람도 많고.." 편안하게 눙깐다. 어서 원고료도 제대로 안 주면서 일을 떠넘길려고 개수작이셔, 속으로 그냥 웃어버린다.

"이런 건 니가 꼭 해야 해", 이렇게 엄청난 제안이 들어와도, "애 보는 아빠가 할 수 있는 게 뻔해서요, 외국에도 맘대로 못 가고", 퉁 쳐버린다.

좀 나쁘게 얘기하면, 내 위주로 시장을 재편.. 하고 안 하고는 내가 정해, 내가. 물론 그러면 소득도 줄고, 멋진 일을 할 기회도 줄지만, 괜찮아요, 워낙 조금 먹으니까요. 저, 차도 샀어요. 큰 돈 들어갈 일도 없구요.

나중에 후회할지는 몰라도, 아직은 속 편하다. 그리고 남는 시간 있으면, 이미 써놓은 글이라도 좀 맘에 안 드는 걸 다시 쓴다. 직장 민주주의 서문도 다시 쓴다고 했다. 톤 조절도 할겸, 씬삥으로 다시 한 번 시도해보려고 한다. 괜찮아요, 저 시간 많아요.

이렇게 내가 편해진 이유는..

내가 하면 잘 할 수 있다, 이 생각을 버린 다음부터다. 내가 하면 잘 하긴 뭘 잘 해, 똑같지. 논리적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건 쉬운데, 그걸 몸에 붙이기가 어렵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내가 해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몸에 찰싹 붙은 건.. 거봐, 나도 배 나오쟎아. 철철이 맞지 않는 슈트와 쟈켓을 몇 개씩 내다 버리면서, 봐, 똑같쟎아.

누가 살쪘다고 약 올리면, "그래도 이게 요즘 좀 뺀 거예요", 소심하게 되받아친다.

한국에서 남자가 서른이 넘어가면, "니가 하니까 확실히 다르다"는 되도 않는 말로 겁나게 그리고 무리하게 많은 일을 시킨다. 그리고 누가 그렇게 시키지 않는 상황이 되도, 지가 지에게 시킨다. 그리고 그걸 자기 관리라고 한다.

빙신들의 행진곡이다.

된장. 이걸 50이 되어서야 알았다. 마흔살부터 더 개기고 살았어도 됐던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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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 노혜경 시인과 차 한 잔. 사람 사는 게 그렇다. 생각났을 때 후다닥 차라도 한 잔 빨리 하지 않으면, 그냥 몇 년 또 후다닥 지나간다. 예전에는 누구 만날려면 밥 먹고, 술 마시고, 그러려다 보니 날짜도 미리 잡고, 이것저것 예약도 하고. 번거로우니까 결국 이리저리 미루다가 후다닥 몇 년 지나간다.

그나마 지금부터 한동안이 내 삶에서 가장 한가운 시간이 될 것 같다. 보통은 책 끝내면 다음 책 나올 때쯤 다음 책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맞추었다.

서평 나오고, 책 반응 보고.. 이러고 있는 내가 너무 싫었다. 되면 되고, 말면 말고.. 최선을 다 해서 원고를 쓰고 탁 잊어버리는 내 모습을 가지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잘 안된다. 결국 그런데 신경 안 쓰는 일정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그냥 좀 쉬려고 한다. 잠시라도 다음 책 일정이나 주제는 그냥 내려놓고. 강연도 없앴고, 방송도 다 없앴다 (그랬더니 인터뷰가 ㅠㅠ..)

노혜경 시인, 누님이다. 나는 이상하게 누나들과 잘 지냈다. 대학시절 가장 좋아했고 친하게 지냈던 누님이 둘이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대장금 작가인 김영현 선배.. 평생 이렇게 신세지면서 살 줄은 나도 몰랐다. 지금도 신세진다.

다들 한 자리 한다고 분주하게들 살아간다. 그런 걸 뭐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부지런하게 줄서는 넘이 뭐라도 줏어먹고 살게 되는 그 구조가 좀 답답하다. 노혜경은 그런 데에서 한 발 벗어나서, 아쉬움만 담고 살아가는 것 같다. 그런 사람이 별로 없다보니, 그게 다 대단해 보인다.

(사진은 50미리, 소위 '여친 렌즈'라고 불리는. 카페 특히 빛이 안 좋은 곳에서 맹활약하는. 차 한 잔 마시는 거리에서 얼굴이 타이트하게 딱 들어오는, 이 프레임 샷으로 유명해진 렌즈다. 가격은 싼 데, 이 조건에서는 최선의 결과를 기대하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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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민주주의, 본문 수정 끝났다. 이제 짧은 서문만 쓰면.. 서른여섯 번째 책이다. 우여곡절 끝에, 여기까지 왔다. 그래도 남한테 머리 숙이지 않고 살아왔다. 아주 친한 사람한테 농담 몇 번 한 거 빼놓고는 책 사달라는 부탁 안 하면서 살았다. 앞으로도 그런 부탁은 안 하고 살 생각이다.

내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에 부끄럽지 않게 산 것 같다. 그거면 된 거다. 더 바랄 것도 없다. 죽을 때 부끄럽지 않은 것, 내 인생의 가치는 그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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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민주주의 교정, 거의 마지막 단계다. 'kbs 민주주의'라고 제목 달아놓은 절에 에디터가 뭘 잔뜩 써놨다. 다른 절처럼 좀 간지나게 써달라는 주문이다. 된장.. kbs라는 제목을 달면, 뭘 해도 간지가 안 난다. 내가 뭔 생각으로 방송국 중의 샘플을 kbs로 잡았지?

오늘 kbs까지 해놓고 쉴려고 했는데, 여기서 오늘은 그만 철수해야겠다. 월급쟁이로서의 kbs 기자나 피디는 간지나는데, 직장으로서의 kbs는 참 간지 안 난다.

내 기억에 kbs에서 제일 간지 났던 건, kbs 헬기. 에어울프랑 같은 기종이란다. 그 때 헬기 기장님이 지금까지 내가 본 kbs 사람 중 최고 왕간지.

kbs라는 말이 붙으면 뭐든지 중립적, 술에 술 탄듯, 물에 물 탄듯. 그걸 간지나는 글로 바꿔 달라고 하시는데, 이거야 원.

하여... 오늘 작업은 일단 철수. kbs가 간지나게 보이게 하는 방법을 찾을 때까지, 나는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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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후배들 식구들이 와서 밥 먹고 놀다가 갔다. 한동안 둘째가 아파서 집에 누가 올 형편이 아니었다.

유학 시절에도 사람들 밥 엄청 해 먹였던 것 같다. 음식 하는 것도 좋아하고, 먹이는 것도 좋아하고. 우리 집에는 늘 손님들이 많았다.

요즘은 다시 집에 사람들이 온다. 어쩌면 살면서 요즘이 가장 편안하고 무탈한 시기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올 봄에 둘째가 폐렴에 걸리지 않고 난 후, 별 걱정이 없다. 물론 소소하게 속상하거나 맘 상하는 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애 아픈 거랑 비교하면 그런 건 걱정 축에도 못 끼는 일이다.

70년대 경제인류학에서 'want not, lack not!'이라는 표현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원하지 않으면 궁핍하지도 않다.. 요즘 내가 그런 want not인 상태인 것 같다. 뭐 특별히 원하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다.

올해 프로야구에는 '간절함'이 키워드였다. 누가 더 간절한가? 야구 하는 건 똑같은데, 그냥 해설의 트렌드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경제 불황이 오래 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간절함을 키워드로 많은 것을 해설하려고 한 것?

want not은 간절함과는 정반대의 상태다. 그냥 되는 대로. 되면 되고, 말면 말고.

자본주의는 자꾸 원하게 만들고, 그래서 더더욱 간절하게 만든다. 그리고 늘 궁핍해진다. 하이엔드 상품이 딱 그렇다. 최고급 제품을 구매하고 돌아오는 순간, 그보다 더 상급의 기기를 사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 찬다.

특별히 뭘 더 하고 싶지도 않고, 간절하게 가지고 싶은 것도 없고, 그렇다고 자식들에게 뭘 엄청난 걸 기대하지도 않는. 2018년 나의 가을은 이렇게 사람들 밥 먹이는 사이에 그 절정으로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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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심사가 뒤틀리고, 속이 배배 꼬이는 경우가 있다. 남이 뭘 좀 잘 되면 괜히 심통나기도 하고. 그리고 그렇게 심통내는 나를 한심하게 생각해서 더 속상해진다. 요 몇 달, 그런 게 없었다. 누가 잘 되면, 그런가보다, 누가 엄청 운이 좋았다고 해도, 그런 사람도 있어야지,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몇 달 정도 그런 건데, 태어나서 이렇게 긴 기간 심통나지 않은 것은 나도 처음인 것 같다.

 

첵 원고 오늘부터 고치기 시작한다. 일단 마음부터 편하게 먹고. 요즘 진짜 내 삶은 걱정이라는 게 없다. 내가 제일 못하는 게 심통 덜 내는 거였는데, 요즘은 심통도 없는 것 같다. 늘 책을 쓸 때에는 감정이 올라와있는 상태였다. 요즘은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감정을 없애고, 지우려고 한다. 무덤덤하게.. 그래야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다. 최대한 가볍게, 참을 수 없을만큼 가볍게.. 요번 교정의 목표다. 무거운 건, 버리고 간다. 웃길 순 없어도 가볍게 할 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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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가 폐렴을 앓지 않은 것은 올 봄이 처음이다. 그 동안에 내 삶은 많이 바뀌었다.

 

요즘 누가 어떻게 지내냐고 하면,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시간들을 보낸다고 한다. 속상한 일이나 기분 상하는 일이 없냐, 그렇지는 않다. 내가 하는 일은 뭐든지 다 잘 되고, 여기저기 뻥뻥 터지고, 뭐 전혀 그렇지 않다. 그냥 밥 먹고 사는 데 불편하지 않을 정도다. 그렇지만 아이가 이제 급하게 아플 일은 없을 것 같으니, 속이 진짜로 편하다. 세상에 이것저것 심통나고 힘든 일들, 애 아픈 거에 비하면 그건 걱정도 아니다. 안 되면 돌아가고, 힘들면 그만하고, 재미 없으면 때려치고, 간단한 솔류션들이 존재한다. 그게 싫어서 머리 디밀고 죽어라고 버티는 것 아닌가? 그런 종류의 고민은, 아이가 아픈 걱정에 비하면 걱정 축에도 못 들어간다.

 

 

 

가끔 애들하고 운동장에 가는데, 오늘 처음으로 둘째가 골키퍼가 아니라 진짜로 공을 찼다. 댕굴댕굴 구르다가, 진짜로 얼굴 쪽으로 날아오는 공도 찼다. 어, 괜찮은데. 자기도 차고 나서 엄청 기분 좋아한다. 원래 공놀이가, 잘 되면 재밌다. 잘 안 되도, 그래도 재밌다. 공 굴러가는 것 자체가 사람을 즐겁게 한다.

 

둘째 슛하는 거 보고 있으면, 아름답다. 살면서 진짜로 행복하고, 아름답다, 그런 느낌이 들 때가 몇 번이나 있겠나 싶다. 나도 비싼 거, 맛있는 거, 많이 먹어봤지만 그렇다고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낯선 여행지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기 어렵다.

 

가을이 깊어간다. 이 시간이 얼마나 갈지 나도 모른다. 지금 나는 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지나고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을 굳이 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잡는다고 잡아질 것도 아니다. 행복을 잡으려 하지 않는다, 알지만 그렇게 행동하기가 쉽지 않다.

 

엎어지면 쉬어간다고 한다. 나는 엎어진 김에 아예 자리 깔고 살림을 차렸다. 행복은 그곳으로 자기가 찾아왔다. 높은 거, 멋진 거, 훌륭한 거, 대단한 거, 그런 것들과 행복이 같이 가지는 않는 것 같다. 그리고 화려한 거, 값진 거, 갖고 싶은 거, 그런 것들이 아름답지는 않은 것 같다. 가끔, 너무 값나가는 화려함은 재수 없다. 가장 큰 아름다움과 행복은, 일상에 있는 것 같다.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찰나가 너무 짧을 뿐이다.

 

(캐스퍼 렌즈는 형편없는 조리개값으로 인해 다루기가 어렵다. 실내에서도 거의 못 쓰고. 그래도 가볍고, 상대적으로 휴대가 쉽다. 그야말로 딱 한두 장을 위해서 가지고 다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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