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향자와는 꽤 친하게 지낼만한 사이였는데, 내 코가 석자라서. 미루고 미루다, 어제 여의도에서 술 한 잔 했다. 다음에 만나면 누님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좋아한다. 나는 누나들하고 특히 잘 지냈다. 목에 힘 빳빳하게 줘봐야,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다.

 

50대 에세이는 팔린 건 그닥, 그렇지만 내 삶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바뀐 생각이 글에 반영되는 것도 좀 있지만, 글을 쓰면서 다시 생각을 정리하고..

 

나중에 70쯤 먹어서 나에게 가장 많이 영향을 준 책 물어보면, 나는 이 책 집어들 것 같다. 요즘 만나는 사람들, 가급적이면 편안하게 해줄려고 노력한다. 예전의 나는 그렇지는 않았다.

 

50이 넘으면 좀 찌그러지는 맛이 있어야..

 

요즘 진짜로 그렇게 산다. 좀 찌그러져서, 적당히.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갖고, 나 혼자 있는 시간도 가급적 많이.

 

만약 내가 갑자기 암으로 죽지 않는다면, 찌그러지는 것의 미덕 하나가 늘어날지도 모르겠다. 찌그러지는 것이 목표가 되면, 스트레스가 엄청나게 줄어든다. 사실 무지막지한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어진다. 그런 것들의 많은 이유는 자기가 자기에게 주는 짜증과 비난 같은 것 아니겠나.

 

안희정과 이재명 지지자들이 뻥하고 붙을 때, 나는 무서워서 도망다녔다. 사람들 감정이 날카롭게 서 있었다. 요즘도 그렇다. 나는 그냥 무서워서, 대충 찌그러져 있을려고. 이재명을 공격하는 사람이나 방어하는 사람들 모두, 너무 많은 감정과 정성으로 한다. 이해는 가는데,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너는 의견이 뭐야?

 

네, 그냥 저는 찌그러져 있는.. 계속 찌그러져 있을께요.

 

기자들이 만날 때마다 김수현에 대한 의견을 물어본다. 의견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 뒤가 무섭다. 네, 찌그러져 사는 사람이 무슨 생각이 있겠어요, 잘 몰라요.

 

2004년부터 사회적 논의에 의견을 표명하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다. 시시콜콜, 이건 이렇게 생각하고, 저건 저렇게 생각해.

 

이제 처음으로, 나도 찌그러져서, 저 아무 생각 없어요.

 

많은 의견들은 논리처럼 생겼지만, 사실 감정이다. 그리고 그 감정의 뿌리는 생각보다 단순한 먼지 한 알인 경우도 많다. 그 위에 우리는 논리의 나무라고 생각하면서 사실은 감정의 숲을 일군다. 그리고 가끔은 그 숲을 보면서 스스로 대견해한다.

 

여기에 의견을 내는 것은 무의미한 경우가 많다. 시간이 많은 것을 스스로 드러나게 하리..

 

계통망인 그리드, 농업 전문가 특히 일본 농업 전문가, 플러그인 설계자, 내가 겨울 안에 만나려고 생각하는 사람들 리스트다. 일부는 내가 필요해서, 일부는 동료가 필요해서.

 

내가 관심 갖고 있는 분야나 주제는, 사실상 아무도 눈 돌리지 않고, 또 의도적으로 '불편하다'고 관심을 돌리고 있는 분야들이다.

 

찌그러져서 내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 한다. 뭐, 약간은 나도 돈도 좀 벌고.

 

그러면 나한테 뭐가 좋아?

 

찌그러진 삶에서도 찌그러진 꽃은 피는 법,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허허무지 벌판에 꽃씨를 피우는 마음을 사람들은 알랑가 몰라. 그런데 작은 꽃, 진짜 찌그러진 꽃이라도 피어나면 가슴이 뿌듯해지는 그 행복감을 사람들은 알랑가 몰라.

 

이런 마음을 50대 에세이 작업하면서 만들어낸 것 같다. 뭐, 원래도 화려한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책 작업과 함께 그렇게 화려한 것을 피해야 하는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인 마음 가짐을 가지게 되었다. 찌그러지는 것은 아름답지 않더라도, 불편하거나 더러운 것은 아니다.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값비싼 모피를 입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뒤에서 받고 있는 것보다는 낫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의 의미를 잘 몰랐다. 못 빳빳하게 세워야, 그런 생각을 했었다.

 

찌그러지고, 굽어져보니까, 선산을 지키는 것의 의미는 알겠다. 그냥 세 끼 밥 처먹고 있는다는 얘기와 다를 바 없다. 그래도 세 끼 입에 밥이 꼬박꼬박 들어가는 게 어디냐.

 

앞에 나가서 전사들처럼 헤집고 싸우는 사람들도 필요하고, 그냥 쭈그러져서 황무지에서 조그만 꽃이라도 피우는 찌그러진 사람도 필요하다.

 

'손 많이 가는 남자'라는 표현이 있었다.

 

나이 50, 이제 나는 씨 뿌리고, 꽃을 쓰다듬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에 가까워진다. 내 손이 필요한 일들이 세상에 좀 생겨났다. 그렇게 찌그러져서 밥값이라도 하고 사는 게 행복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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