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은 중학교 때 명동에 있던 유네스코 빌딩의 작은 극장에서 처음 보았다.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였던 어송과 함께 갔는데, 밤 늦게 끝나서 거의 마지막 버스를 타고 콩닥콩닥, 그런 마음으로 집에 온 게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 아마 지금까지 백 번도 넘게 본 것 같다.

 

여기에 그런 얘기가 나온다. “신은 한 쪽 창문을 닫을 때, 다른 쪽 창문을 열어 주신다.” 어린 내 마음에도 이 말이 참 좋았다. 그리고 그 때는 이 작은 대사 하나가 나의 삶을 좌지우지할 중요한 말이 될 줄은 몰랐다.

 

교회에 대한 경험들이 좀 진하게 있다. 그 안에는 증오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싫었다. 하긴, 그 시절 사랑의 교회에는 사랑이라고는 정말 돈에 대한 사랑과 지위에 대한 사랑 밖에는 없는 것처럼 느껴지던 게.. 장로가 되려고 하는 명박이 주차 안내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단 한 명을 저주하고, 남들에게 욕 퍼붓는 게 정신의 핵심인 종교가 어디 있겠는가. 다 불운했던 한국의 근현대사가 만들어 놓은 이상한 현상일 뿐이다.

 

2.

둘째가 아파서 하던 일들을 모두 내려놓던 순간 아니 그 기간을 아마도 죽을 때까지 잊지는 못할 것 같다. 익숙해서도 그렇고, 아까워서도 그렇고, 선뜻 뭔가 결심을 하기가 어려웠다. 어쩌면 나는 결심을 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냥 현실은 그렇게 되었고, 그걸 피할 수 없던 상황을 내가 선택한 것이라고 나중에 미화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는 아팠고, 아내는 육아 우울증이 진행되고 있었다. 어쩌면 그 상황에서 다른 선택은 없던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내용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그런 생각은 그 기간들을 지내면서 사후적으로 선택한, 아니 다른 선택지는 없는 상황을 그냥 받아들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 때 화려함을 비롯한 모든 것들을 같이 내려놓았다. 언젠가 있을 또 다른 성과를 위해 현재를 희생? 그런 건 비겁한 변명이다. 그냥 이렇게 살다, 때 되면 눈 감는. 그런 내 삶을 받아들였다. 내 나이 50, 남들은 한참 활동한다고 할 나이이고, 인생 2모작이니, 내 인생은 60부터, 그런 소리들을 찍찍 한다.

 

다 개체적 욕망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나타난 기현상이다. 자연적이지 않고, 사회적이지도 않다. 그냥 자본주의적일 뿐이다. 병든 한국 자본주의에, 뭐라도 한 번 더, 그런 개인의 욕망이 만나서, 같이 병들어 가는 것일 뿐이다. 휴식 없이 죽을 때까지 개지랄을 한 번 더’, 그냥 그걸 언론의 언어로 바꾼 것일 뿐이다.

 

죽을 때까지 뭐라도 돈을 부여잡지 못해서 발버둥치게 만드는 것, 최소한 이게 노르딕 스타일도 아니고 복지 국가의 미래도 아니다.

 

나는 그렇게 돈이든 명성이든 아니면 권력이든, 놓지 못해서 끝까지 부여잡고 아둥바둥하는 스타일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바둥거리면서 시간을 보내면, 나는 죽을 때 눈을 못 감을 것 같다. 도대체 뭐하고 산겨? 만족할 인생을 살지는 못해도 괜찮지만,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그게 내가 생각한 찌그러지는 맛이다.

 

마지막 눈 감는 그 순간까지, 난 찌그러져서 살기로 했다. 그리고 조롱을 견뎌냈다. 무기력도 견뎌냈다. 냉정한 현실을 참았다. 그래도 내가 잘나서 이렇게 한 거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작년부터는 은행 잔고가 그렇게 바닥을 치는 순간은 벗어났다. 호사롭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세 끼 밥 먹고 사는데 아무 문제 없다. 몇 년만에 내 통장에 돈이 좀 찰랑거리기 시작했다. 깊게 고인 물은 아니지만, 흘러 들어오는 대로 바로 흘러 나가는 옹달샘은 아니다.

 

3.

지난 10, 한국은 연성, 그야말로 극도의 연성적인 매체들만 살아남는 사회가 되었다. 경성이라고 불렀던 그런 분야는 진짜로 돈은 먹고 죽으려도 없다는 상황이 되었다. 인식론에 hard sciencesoft science를 구반하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 hard, 그야말로 하드코어 영화의 한 구석에나 나오는.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경성의 스타일인 것만은 아니다. 아주 부드럽고 상업적인 매체도 다룬다. 그렇지만 내가 쓰는 글들은, 아마도 한국에서 가장 딱딱하고 경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분야일 것이다. , 그 중에서도 사회과학은 가장 딱딱하다.

 

그냥 생태적인 시각으로만 보면, 시대와 구조의 변화에 맞추지 못해 죽어가는 멸종 위기종에 가깝다. 그런데 딜레마가 있다. 사회과학을 비롯한 경성 과학이 죽으면, 그 사회도 같이 죽는다. 아주 오래된 얘기지만, 맛있는 것만 먹는다고 건강해지지 않는 것과 같다. 아이들이 먹고 싶어하는 체리와 캔디 그리고 초콜릿만 주면 좋은 부모일까? 당연히 그런 건 아니다.

 

자본주의는 체리와 캔디만 주고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와 같다. 자본주의가 원하는 것만 한다면, 대학이라는 게 왜 존재하고, 학문이 왜 존재하겠는가?

 

나는 이런 질문 앞에 서 있다. 그래도 괜찮은 것은, 나는 한 번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탈탈 털어버린 이후의 삶이기 때문이다. 보람도 없느냐, 그런 건 아니다. 이런 딱딱한 분야가, 그래도 보람은 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보람과 행복 그리고 소소한 잔재미들은 있다.

 

그걸로 만족할 수 있는가? 다행히도 나는 이제 그런 걸로 만족할 수 있는가?

 

그걸로 먹고 살 수 있어? 이 질문은 어렵다. 나는 충분할 정도로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러나 내 뒤에 올 사람도 그럴 수 있느냐, 그게 보장이 없다. 그래서 판 걷어내고, 다른 양지 바르고 부드러운 데로 이사,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아마도 나는 오랫동안 작은 이정표 역할은 하게 될 것 같다. “여기로 가면 딱딱한 길이 나옵니다.” 그렇게 알려주고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 그냥 내 건강과 여력이 허용하는 그 시간 정도일 것이다.

 

이정표가 이정표 역할을 하는 건 내 일은 아니다. 그건 내 능력 범위를 넘어선다. 그래도 이정표 역할이나마 하게 된 건, 어쩌면 50이 된 신이 나에게 열어 주신 또 다른 작은 문인지도 모른다.

 

다행히 내 삶은 편안하다. 건강이 메롱이지만, 그래서 더 살살 산다. 무리하는 일은 절대 없다. 그래도 이 만큼이라도 버틴 게 정말 많은 사람들의 도움 덕분이었다는 정도는 안다.

 

<음식국부론> 내고, “그런 걸 알면 삶이 더 찝찝해져서 그냥 모르고 살래요”, 이런 얘기를 많이 들었다. 뭐라고 하지도 않았고, 그런 걸 탓해본 적도 없다. 그냥 나는 알면 찝찝한얘기를 하는 사람인 내 모습이 좋다. 다만 좀 더 그걸 웃을 수 있게, 유머러스하게 하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다.

 

알면 인생이 더 피곤해져”, 그런 벽 앞에서 나는 춤추고 노래한다. 그렇게 살아왔다. 이제 더 작은 마이크를 들었고, 더 작은 규모의 사람들과 대화한다. 괜찮다. 나는 이렇게 살다가 죽으련다.. 누군가는 아주 딱딱한 코어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싶다. 그리고 아직은 그런 걸 몇 번은 더 할 수 있다는 게, 썩 고맙기만 하다.

 

(쥴리 앤드루스가 가장 멋있었던 것은 <사운드 오브 뮤직>이 아니라 <프린세스 다이어리>였었다. 진짜, 멋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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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 둘째, 올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 아이가 폐렴 없이 봄을 넘겼다..) 

 

2018년의 마지막 날이다. 하여간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해였다. 뭐든, 잘 안되었다. 그래도 그 와중에, 올해 3, 처음으로 둘째가 폐렴 없이 봄을 맞았다. 그거면 되는 거다. 그래서 올해는 봄이 시작되자마자, 무조건 성공한 한 해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좋은 일이 또 하나 있기는 하다. 이래저래 아내 연봉이 좀 올라서 내년부터는 아내 연봉으로 우리집 생활비가 된다. 오 예. 퇴직하기 전에는 우리집 생활비보다 한참 높았지만, 지금 그거 따질 형편은 아니고.

 

애들 보면서 뭔가 한다는 게, 진짜 깽깽 발 짚고 올림픽 나가겠다는 것과 비슷하다. 별로 하는 게 없으면 건강이라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다. 이제는 뭘 해도 무리다.

 

그래도 내가 잘 하는 게 하나는 있다. 남의 일 돕는 건, 이건 정말 잘 한다. 내 일이 제대로 안 되니까, 남의 일이라도 열심히 도와주고. 내 책은 못 팔아도, 남의 책은 좀 팔아줬다. 심지어 남의 영화도 좀 팔아줬다. 굼벵이도 기는 재주가.. 기는 재주라도 있으니까 아직도 내 입에 밥이 들어가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 왜 이 모양 이 꼴로 연말을 맞게 되었는지,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하나하나 이유가 있기는 하다. 이건 이래서 힘들고, 저건 저래서 어렵고. 그렇지만 구차하다. 그냥, 망한 해에 불과하다.

 

완전히 헤매고 망한 해가 맞기는 하지만, 숨 고르기 하고 넘어가는 한 해라고 생각하면 훨씬 마음이 편하다.

 

흐르는 물살 속에 거꾸로, 이런 멋진 건 아니고 그냥 헤매는 느낌의 한 해를 보냈다. 책은 어렵고, 사회과학은 더 어렵다. 그렇지만 뒤집어서 생각하면, 아무 보람도 없는 것은 아니다.

 

둘째 아파서 집에 들어앉으면서 언제까지 책을 쓸까, 좀 고민을 했다. 아내는 적당한 데 취직자리 생기면 그냥 나가보라고 말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내가 그냥 나가버리면 집은 난가가 된다. 방법 없다.

 

올해는 헤매기는 했지만, 책에는 별 문제 없는 것 같다. 50대 에세이는 삶을 정말로 한 번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했다. 이제 나는 앞에서 뛰는 스프린터 느낌으로는 할 수가 없다. 더 뒤에서 후방 지원군 같은 역할을. 그것도 막상 하려면 쉽지 않다.

 

올해는 정말 법인을 만들었어야 했는데, 자금 흐름이나 여유 시간 등 도무지 여력이 잡히지 않아서 내년말로 미루었다. 그냥 지나간 일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앞으로 올 날을 생각하는..” (요 말은 고정식 특허청장이 내가 사직서 내고 쉬는 동안에 해준 얘기다.)

 

1년은 더 쉬면서 삶을 돌아볼 시간이 생겼다.

 

그리고 왜 책을 계속 써야 하는지, 이유도 생겼다. 언제부터인지, 내 삶도 아주 사회적 삶이 되었다. 내가 지금의 삶이라도 누리고 사는 게, 너무 많은 사람들의 정성 덕분이라는.. 사회과학이 좋을 때면 할 만큼 했다, 이래도 되겠지만 지금은 난국이다. 나 하나 힘을 보탠다고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지만, 안 쓴다고 하면 그것도 좀 그렇다. 그래도 한국 최초의 사회과학 전업작가라고 불렸다. 그런 나도 상황이 힘들다고, 손 털고 나갔다고 하는 건 좀.

 

내가 책에서 바라는 것은 엄청난 것은 아니다. 딱 우리 집 생활비 만큼의 인세. 꾸역꾸역, 평균 내보면 그 정도는 하는 것 같다. 몇 년은 더 버틸 여력은 된다.

 

개인의 삶이나 사회적 삶이나, 흐름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2006년부터 2012년까지, 나는 괜찮은 흐름을 탔었다. 그리고 박근혜와 함께 망했다. 정확히 말하면 순실이가 남양주 종합촬영소 팔아먹을 때, 나는 그걸 못 막았다. 그 때부터 되는 일이 없었다. 아이는 아프고, 내 일은 안 되고, 동료들은 헤매고, 처박고..

 

무슨 대단한 만루홈런이나 연타석 홈런, 그런 걸 기대하면서 살지는 않는다. 병살타 치지 말고, 희생번트 정확하게 대고, 가끔 유의미한 장타. 그 정도면 내 능력으로는 충분하다. 그리고 어디 부상 나서 게임 거르지 않고, 시즌 소화하는. 지난 몇 년간을 이렇게 살았다.

 

그 대신 정말로 나를 돌아보고, 기본에 해당하는 것들을 다시 해본다.

 

최근에 책 서문 소리내서 읽는 걸 시작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는데, 막상 달리 할 것도 없고.

 

다큐 감독하고 통화하고 나서, 제일 처음 생각한 게 서문 읽기였다. 근데 막상 해보니까 생각보다 좋다. 마치 도 닦는 것 같다. 잡념도 없어지고, 삶의 단절 같은 게 생긴다. 그리고 무슨 책을 할지, 내 맘이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그런 것도 별로 상관 없다. 그렇지만 내가 걸어가는 길을 같이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가지게 될 것 같은 효과가 생기기는 할 것 같다. 그래도 고스톱 쳐서 책이라도 쓰게 된 것은 아니다. 별로 피나는 노력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냥 멍하니 않아서 뭐라도 되겠지, 그렇게 살지는 않았다.

 

한 해가 간다. 몇 년째 변함 없이, 올해도 망했고, 올해도 망했고, 에 또 올해도 또 망했네.. 이러고 있다. 이제는 망하는 게 내 삶의 일부분인 것처럼 익숙하다. 괜찮다. 올해도 망년회는 어김 없이 했다.

 

내 책들은 시대보다 너무 빠르다는 평을 받는다. 미세먼지 문제로 데뷔한 게 2005년이니까, 벌써 13년 전에 그게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했던.. 시대보다 늦으면 판 접어야 하지만, 아직은 시대 보다 빠르다. 그러면 된 거다.

 

그리고 나는 이 모양이지만, 동료들이 열심히 일 한다. 가끔은 나도 좀 묻어가고.

 

내년에는 농업 얘기와 젠더 얘기로 들어간다. 젠더 얘기가 중간에 끼어들어오는 바람에 도서관 얘기가 후년으로 밀렸다. 사실 직장 민주주의 책이 좀 팔렸으면 내년에 바로 도서관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이게 영 시원챦다. 그래서 도서관 책은 내가 좀 더 인기권으로 올라온 다음에 하려고 다음 해로 미루었다 (방법이 없다. 도서관 얘기는 그냥 진루타로 쓸 수가 없는 주제라서. 그 다음에는 나도 카드 없다.)

 

내년에는 책 세 권, 여력이 되면 초고 한 권 더.

 

지난 몇 년간 했던 작업들 중 묵직한 것들이 실제로 세상에 나오는 것은 후년이다. 올해도 망하는 한 해를 참고 버텼고, 내년도 망할 것이 뻔한 한 해를 참고 견디려고 한다.

 

미리 생각한 대로 많은 것이 진행되면, 일본에서 출간을 한 번 해보려고 한다. 예전 <촌놈들의 제국주의> 시절에 일본에서 부탁받은 게 있었는데, 그걸 미루고 미루고 있는 중이다. 50대 중반에는 그 일을 처리하려고. 내 삶의 많은 시간표가 그 일정에 맞추어져 있다. 물론 되면 좋지만, 이런 데 목숨 걸고 살지는 않는다. 애들 키우면서 생각하기에는,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일 뿐이다.

 

2018, 올해를 거치면서 내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뭔가 거대하고, 이루기 어려운 걸 이루는 허들식 인생, 사실 별로 재미없다. 하면 뭐할 건데? 또 다음 허들을 향해? 그래서 그걸 다 넘으면? 도라도 깨치는 거냐? 아니, 저기 더 높은 허들을 향해.. ? ? 병신 아냐? 하느님이 너 죽어라고 허들이나 뛰다가 인생 낭비하라고 이 세상에 보낸 건지 아냐?

 

목표라는 것도 부질없고, 성공이라는 것도 부질 없다. 그냥 되는 대로,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열심히 하면 그걸로 그만이다. 되면? 되면 되는대로 의미가 있겠지만, 안 되도 그냥 멍하고 있었던 건 아니라서 그걸로 됐다.

 

뭔가 이루고 아니고, 그건 아무 것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을 좀 살피고 보살피고, 그렇게 사는 게 진짜 인생이다. 허들만 뛰다가는, 자기가 왜 사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병신 아냐. 신이 환상해서 내 주변에 있을 수도 있다. 그를 돌보는 것은 우주를 돌보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정신 없이 뛰다보면, 옆에 신이 환생에서 와 있든, 뭐가 주변에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죽어라고 뛰기만 한다. 그게 병신이다.

 

2018, 난 병신처럼 살지는 않았다. 되는 일이 별 없어도. 그건 괜찮다. 주어진 시간이 아직도 많다. 우리는 우정과 환대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아닌가? 냉담하게 남 갈구고, 욕이나 서로 퍼부으라고 우주의 에너지가 모인 이 시간 속에 그냥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아듀, 2018. 그리고 보나마나 엉망진창이고, 제대로 되는 일이 없을 것 같은 2019년을 맞는다. 그래도 나는 그 속에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올해도 되는 일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올해 불행했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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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 글을 쓰는 일이 편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가장 싫은 일은,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는 일. 물론 그런 얘기를 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나 싶겠지만, 대부분의 글이 하나마나한 소리가 되고 만다.

중앙선데이에 꽤 큰 지면으로 연재를 하게 되었다. 자꾸 쓰던 대로 쓰려고 하는 관성 같은 게 나에게도 생겼다. 한겨레 36.5에 명랑국토부 연재하던 시절에는 그야말로 빵빵 터졌었다. 경향에 시민운동 몇어찌 연재하던 시절에도 종종 터졌었다.

그때랑 지금이랑 뭐가 다를까? 글쎄..

스타일, 문체, 정보, 이런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나도 익숙해지는 습 같은 게 생겨서 하던대로, 약간 그런 게 생긴 것 같다. 전혀 다른 눈으로 보고, 앵글을 바꾸어서 보고.. 이런 건 사실 그냥 하는 얘기다. 무슨 얘기를 할 것이냐, 그게 내가 쓰는 글의 생명이다. 스타일은 진짜 부수적인 것이고..

그 때는 나도 30대라서, 그냥 내 생각만 얘기해도 다른 사람과 생각이 많이 달랐다. 그걸 지금은 못할까? 글쎄..

못 하는 게 아니라, 생각하기가 귀찮아서 안 하는 거라는 생각을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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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그런 용어를 거의 안 쓰지만, 예전에는 아방 가르드라는 말이 한참 유행했었다. 가드 보다 더 앞에 있는 그런 척후병 같은 용어인데, 이걸 전위라는 말로 번역해서 쓰기도 하였다. 전위예술, 물론 재미 없다는 얘기와 동의어다.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약간의 도치나 전복적 시도를 가지고 전위라고 뻥까는 거, 아주 질리도록 보았다. 한동안 누벨 바그 계열의 프랑스 영화들 보면서 어이가 없었다. 이건 전위가 아니라, ‘덜 만든 것’, 마무리 짓지 못한 것. 그래 놓고 인생이 원래 답 없어”, 턱하고 엔딩 타이틀. 뭐야, 이거.

 

2005년에 미세먼지 문제로 처음 데뷔를 하였다. 책이 나오고 나온 첫 기사는 서평이 아니라 사회부의 스트레이트 기사였다. 물론 나에게는 익숙한 얘기였고, 가장 익숙한 얘기였으니까 데뷔할 주제로 골랐지 않았겠나. 요즘의 한국에너지공단, 예전의 에너지관리공단의 팀장을 그만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이 미세먼지였다. 총리실 파견을 정리하고 돌아와서, 나는 발전소 오염물질 관리나 하겠다고 신청을 했다. 그리고 내가 관리하는 항목에 pm-10을 포함시켰다. 원래 내가 하던 일들을 아주 좁히고 좁혀서, 이런 거나 하고 쉬겠다는 약은 판단이었는데. 위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건지는 모르는데, pm-10은 업무 영역을 넘어가니까 이거 빼고 하라고 통보가 내려왔다. 그 날 사직서 써야겠다, 마음 먹었다.

 

미세먼지는 그 시절에도 최전선이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최전선이다. 지금 쓴다고 해도 가장 종합적인 보고서를 쓸 수 있다. 미세먼지 대책은 아직도 헤매고 있다.

 

내가 왜 계속 책을 쓰는가? 이건 내 주변 사람들은 물론이고, 나에게도 질문 거리다. 가능하면 책 쓰는 과정을 즐기면서 하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즐겁거나 편안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돈으로 생각하면, 내가 책에 대해서 기대하는 것은 인세로 딱 우리 집 생활비 만큼이다. 평균 내보면 그것보다는 많이 벌었다. 최근에는, 맞춘 해가 있고, 못 맞춘 해가 있다. 평균 내보면, 그래도 대충 비슷하다. 저자 데뷔 이후 최악의 2년간을 보냈다. 방송, 강연, 전부 최소 수준으로만 하고, 한동안 신문 칼럼도 못 썼다. 그런 거 치고는 그래도 선방한 셈이다.

 

이 과정에서 나에게 생긴 원칙이 하나 있다. 내가 아니면 못 쓸 것 같은 책 아니면 안 쓴다. 이건 어쩌다 나가는 방송을 제외한 내가 만드는 전분야에 걸쳐서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원칙이다. 방송은 내가 기획하고 준비한 게 아니라 그것까지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그걸 나는 나름 최전선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동기가 생겨나지 않는다.

 

어쩌면 이게 먹고 살 만하게 된 이후의 폐해일지도 모른다. 돈 되면 아무 거나 다 해야하는 거, 맞기는 한데, 나는 그렇게는 못 한다. 하기가 싫어지고, 내가 왜 이걸 해야 하나, 심통이 든다. 다른 사람의 제안을 받아서 책을 쓰는 일을 안 한 게, 그런 이유다. 해봤는데, 그런 식으로는 책을 마무리하지를 못하겠던.

 

직장 민주주의 책이 처음으로 외부에서 제안을 받아서 쓴 책이었다. 외부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그 이전에 같이 작업하는 동료였던 에디터의 제안이었다. 그리고 충분히 최전선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렵고 난해한 작업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직장 민주주의 책이 되었다.

 

그래서 내가 안 쓰는 게 입문서나 청소년용 책이다. 다른 출판사에서 오는 제안의 대부분은 그런 거다. 물론 그런 걸 전혀 쓸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도저히 최전선에서 버틸 수 없는 수준으로 내 능력이 떨어지면. 퇴물이 된 마음으로 지나간 것들을 정리해보는. 그렇지만 실제로 나이 먹어서 최전선에 있기 어렵게 되면, 결국 입문서도 안 쓸 것 같다. 나이 먹어서 최전선에 서기 어려우면 그냥 책을 안 쓰면 되지, 뭐 하러..

 

아직도 해보고 싶은 실험들이 좀 있다. 예를 들면, 책을 쓰는 과정에서 사람들 만나는 인터뷰와 조사한 결과들, 그런 것들을 가지고 경제 다큐 만들어보는 것. 생각만 있지 아직 그렇게까지 넓힐만한 여력은 없다. 그래도 언젠가는 해보고 싶다.

 

최전선에 서는 것은 직장 민주주의 책으로 어느 정도는 정점을 찍은 것 같다. 더 앞으로 가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면서, 오히려 삶의 노예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 직장 민주주의 책 수준 밑으로 내려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내 능력으로는 그 정도가 극대치다. 그 상황에서 포맷과 양식 등 형식 실험을 좀 더 해보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웃길 수 있나, 어떻게 하면 사회과학이 가지고 있는 근엄함을 좀 더 누그려뜨리고, 확 깨는 스타일로 할 수 있나. 움베르트 에코도 했는데, 우리라고 못할 건 없지 않나?

 

예전에는 있던 일인데, 요즘은 좀 어려워진 게, 책의 힘만으로 책을 파는 것. 이게 2년 전부터 내가 방송을 갖지 않는다, 그런 몇 가지 원칙들을 만든 이유다.

 

10년 넘게 저자로 살아오면서 저자로서 누릴 수 있는 영광은 이미 다 누렸다. 20만 부 넘게 팔린 책도 있어서, 책도 팔만큼 팔아봤다.

 

요즘은 내 인기가 바닥이다. 일반적이면 그 인기를 높이는 게 우선순위일텐데,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수단이 없는 건 아닌데, 애 보면서 하기에 좀 그렇기는 하다. 그리고 제일 해보고 싶은 게, 인기가 바닥인 상황에서 정말로 책의 힘만 가지고, 그것도 최전선에 서서 팔리는 책을 해보고 싶다.

 

몇 사람 안 오는 블로그 정도 운영하면서 이미 그것도 올드 매체가 되어버린 약간의 강연, 그 정도만 가지고 책의 힘으로 스스로 팔려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리고 그래야 이게 선례가 될 것 같다는. 그게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 날을 위해서 나도 참고 버틴다.

 

그런 이유라면 참고 버티고, 계속 책을 쓰는 게 나에게 의미를 준다.

 

가끔 출판사 사람들이, 이렇게 하면 이건 딱 팔릴 것 같은데, 왜 안 쓰냐고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본다. 물론 그 정도 틀이면 충분히 팔릴 거라는 것은 나도 안다. 그렇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이 써도 되고, 더 젊은 사람들이 써고 되고. 굳이 내가 쓸 이유는 없다. 책을 잘 팔아서 돈을 벌기 위해서 책을 쓴다면, 내가 이미 보내 버린 나의 청춘 시절이 너무 불쌍해진다. 인생에.. 돈이 다가 아니다. 명예는 더더군다나 아니다. 나에게 인생은, 명분이다. 명분이 없는 일은, 생각도 하지 않고, 시도도 하지 않는다.

 

얼마 전에 어떤 연구원의 연구원장 자리 제안이 왔다. “머리에 총 맞았어요, 지금 와서 그걸 하게.” 진심이다.

 

인기 바닥인 상태에서 최전선에 서 있는 책을 책의 힘만으로 파는 것.. 그걸 위해서 차관 자리 몇 개 장관은 아니고 몇 개의 기관장 자리를 안 한다고 했다. 차관 해봐야, 그걸 누가 기억하겠나? 사람들은 잠시만 시간이 지나가면 총리 이름도 다 까먹고, 장관은 더더군다나. 차관은 정말 아무도 모른다. 그냥 자기 만족이다. 혹은 아버지, 할아버지 좋으라고. ‘가문의 영광’, 그런 건 집에서 같이 사는 고양이의 환한 미소 보다도 가치가 없는 일이다.

 

책은 부드럽게, 팔리게 써야 한다는 게 지금의 출판 시장에서 대세다. 그리고 맡지를 못해서 그렇지, 어떻게든 방송을 맡고, 그렇게 얼굴을 알려야 책도 더 팔린다고 권유하는 게 대세가 된지 벌써 몇 년이다.

 

나는 그 흐름과는 정반대로 간다. 능력이 안 되서 못하지, 더 최전선으로, 더 전위로 내가 다루는 주제를 밀어넣는다. 농업경제학, 생각만 해도 머리 지끈지끈하다. 이걸 누가 하겠나? 내가 한다. 그런 자부심 정도는 가지고 산다.

 

정말 터프하고 지나치게 정공법이다. 내가 책을 사랑해서 그렇다. 읽는 것도 사랑하고, 좋은 책이 나오는 것도 사랑하고, 읽은 만한 것을 쓰는 행위도 사랑한다. 그래서 책을 능멸하거나 조롱하거나 무시하는 건 괜찮다, 그 정도는 그런 시대와 정면으로 맞서 서는 게 나는 보람이 있고, 즐겁다. 지지 않는다, 언젠가는.

 

내 책만 파는 건 쉽다. 그러나 더 좋은 책을 많이 쓰고, 그런 게 더 많이 읽히고, 그렇게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고. 내가 꿈꾸는 세상은 그런 정공법의 세상이다. 그리고 난 그런 게 좋다.

 

나는 돌맹이, 이리 치고 저리 치여도, 굴러가다 보면 좋은 날 오겠지

 

마시따 밴드의 <돌맹이>와 함께 올해도 한 해를 버텼다.

 

블로그의 여러 분들에게도, 한 해를 같이 지내면서 지지고 볶었던 시간을 위해서, 감사의 말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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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가 함께 하기를.”

 

8편까지 이어져온 <스타워즈>가 만든 대표적인 유행어다.

 

스타워즈의 세계관과 명랑을 합쳐서, 국적불문의 요상한 문장 하나를 만들었다.

 

전에도 책 사인할 때 가끔 명랑이 함께 하기를”, 요렇게 썼었다. 내년부터는 아예 더 파격적으로, “May the 명랑 be with you..”

 

사실 내가 요즘 명랑하기 좋은 시절을 보내는 건 아니다. 아이들 둘 보는데, 내년에는 큰 애 학교 들어가서, 학교, 어린이집, 서로 시간 다르게 두 탕을 뛰어야 한다. 생각만 해도, 진짜 죽을 것 같다.

 

잔고라도 좀 넉넉하면 좋겠지만, 그냥그냥, 딱 세 끼 입에 밥 들어가는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다. 기분 전환으로 쇼핑, 이런 건 택도 없다. 겨울에 입을 슈트 한 벌 사야 하는데, 이것도 그냥 미루고 미루고..

 

버티고 버티면서, 그야말로 시간을 버티는 거지, 뭐가 엄청나게 잘 되고, 그냥 막 웃음이 나오고, 그런 시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그래도 나는 웃음을 잃지 않고, 명랑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한국 사람 아닌 것 같다. 가슴 속에 이 없다. 억지로 기억하면 고통스러운 순간이 없지는 않은데, 흔히 한이라고 부르는 그 한이 없다.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있지만, 그렇다고 딱히 밉고, 막 복수하고, 그런 사람도 없다. 빈정 상하는 사람들 리스트를 만들면 DB 하나는 채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진짜 싫은 사람, 그런 것도 없다. 그냥,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좀 있을 뿐이다.

 

내년에는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꽤 많은 글을 쓰게 된다. 그리고 형식도 정말 다양하다.

 

최대한의 파격을, 그것도 웃기고 명랑한 방식으로 해보려고 한다. 남 야지 놓으면서 웃기는 것도 별로고, 성적 농담으로 자기만 웃기는 것도 별로다. 좀 다른 방식으로 명랑해보고 싶다.

 

자기 속을 쥐어 파면서 뭔가 만드는 것도 별로다.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야만 할까? 그냥 좀 웃으면서, 그렇게 적당히 하면서도 의미 있는 건 못하는 걸까?

 

에세이 제목으로 “May the 명랑 be with you”라고 쓰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냉정하게 얘기하면, 아무 일도 안 벌어진다. 난 그렇게 인기 있는 저자가 아니다. 그냥 밑바닥을 박박 기면서 버티는 중일 뿐이다. 그러니 그런 걸 못 할 이유도 없다.

 

나는 출발부터 ‘C급 경제학자였다. 그렇다고 재야 경제학자는 아니다 (여전히 이렇게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 그러신가보다 하고 나도 무시한다. 나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 실력이 떨어지는 거지, 재야는 아니다..)

 

더 파격적으로, 더 명랑스럽게, 그렇게 해 보려고 한다. 어차피 잃을 것도 별로 없고, 신경 쓸 사람도 별로 없다.

 

30대에 시도하던 걸, 더 꼴통스럽게 몇 단계 올려서 다시 한 번 해보려고 한다. 그래야.. 나라도 명랑해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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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노회찬과 같이 토크쇼하던 사진을 드디어 찾아냈다..)

 

포위 당해서 섬멸의 위기에 놓였을 때에는 내용은 물론이고 형식에 대한 모든 것들을 고민해봐야 한다. 지금 한국의 지성은, 전멸 위기다. 지성과 지식, 모두 다 전멸 직전.

일부는 청와대 가서 폼 잡는 것은 좋은데, 아, 열심히 공부해서 저거 하려고 하셨구나, 그 회의감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 같다. 일부는 대중들의 삶과 아주 멀리, 그냥 안드로메다로. 그리고 또 다른 일부는 월급만 많이 주면, 땡큐, 열라 땡큐.

이러다 책이 문제가 아니라 지성 자체가 전멸한다. 분서갱유가 아니라 그냥 상업적인 이유로 고립되어 분서폭망. 욕만 하고, 쟤네들 다 나빠요, 이렇게 풀 문제가 아닌 것 같다.

70년대에는 박정희랑 목숨줄 내걸고 싸운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지지해줬다. 80년대, 90년대, 마찬가지다. 지금은 뭐랑 싸우냐? 지지할 이유도 없고, 뒤에서 폼잡고 있을 거면. 지성이 존재할 이유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걸 보여줘야 한다. 지금이 그래도 뭔가를 해볼 수 있는 거의 마지막 순간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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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가 폐렴으로 입원하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특별한 스터디팀 없이 지냈다. 그렇지만 이건 내 인생에 아주 예외적인 순간이다.

 

대학교 1학년 들어가는 순간부터 나는 늘 스터디를 만들거나 했고, 지금은 젊은 여성학 하는 박사들과 새로운 스터디팀을 만들기 위한 구상을 하는 중이다.

 

그 중에 가장 화려했던 것은 지금은 대통령이 된 문재인과 했던 스터디팀. 매주 했는데, 문재인, 정세균, 추미애 심지어는 김한실까지 고정 멤버였다. 여성부 장관이 된 진선미, 벤처기업부 장관이 된 홍종학도 멤버였다. 야당 시절, 도저히 방법이 없어서 스터디팀을 하나 만들었었다. 거기서 대통령, 국회의장이 나왔고, 장관은 겁나게 많이 나왔다. 그 때 장하성 선생과 김상조 선배도 강사로 왔고, 전번들을 서로 나누었다. 정성인 선생도 강의를 했는데, 그 때는 문 대표가 불참. 아쉬운 순간이었다. 보수 신문들은 이거 그만 하라고 난리들을 쳤었는데, 나는 못 들은 척, 그냥 1년 정도 강행했다. 결국 안철수의 탈당으로 아사리판이 나서 더 이상 끌고 나갈 수가 없어서 접었다. 나중에 문대표 양산 집에 갈 일이 있었는데, 그 때 했던 내용들 꼭 책으로 내면 좋겠다고 하셨던.. 한다고 대답은 했는데, 둘째 입원하면서 나도 모르겠다, 내 코가 석자다..

 

(당시 스터디 관련 기사.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23&oid=305&aid=0000017219)

 

그 시절에 딱 한 시간 포맷으로 했다. 30분 발표, 30분 토론. 좀 극단적으로 짧기는 했지만, 그게 매주 그 사람들에게 내가 받아낼 수 있는 시간이 극대치였다.

 

보통 내가 하는 스터디팀은 두 시간을 넘기지 않는다. 책을 같이 읽을 것인가, 읽지 않을 것인가, 이게 큰 기준인데.. 나는 개인적으로 모여서 책을 읽는 형식의 스터디팀을 만든 적은 없다. 책 정도는 혼자서 읽고, 그 뒤의 얘기들을 하는 것을 훨씬 선호한다. 그래서 이게 대학원 박사 과정의 스터디랑 형식이 같은 것이다. 모여서 책을 읽기 시작하면, 시간이 너무 많이 필요하다. 그러면 책 읽고, 진짜 할 얘기는 뒷풀이 가서.. 그렇게 해놓고 술 처먹다가 한 쪽에서는 싸우고, 한 쪽에서는 연애하고, 뭔 짓인가 싶었다.

 

내가 준비하는 강연은 2시간을 기준으로 한다. 예전에는 딱 한 시간 발표하고, 한 시간 토론이었는데, 이제 점점 더 토론의 강도가 약해져서, 그냥 한 시간 반 정도 얘기한다. 책을 읽고 오면 발표는 사실 필요 없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제일 싫은 것은 기업 연수교육에서 하는 강연이다. 아마 돈은 충분히 받았을 테니까, 한 번 씨부려봐, 품평회 하듯이 배 내밀고 앉아 있는 대기업 직원들 앞에서.. 딱 맘 먹었다. 배 내밀고 앉아 있는 사람들 앞에서 강연하는 건 안 한다. 지금도 사장이 어떻게든 꼭 해달라고 부탁한 예외적인 경우 아니면 기업 교육은 안 한다. 피차 서로 곤욕스러운 자리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전경련에서 부탁 왔을 때. 그야말로 회장급들 교육을 좀 시켜달라고 했다. 일본에서 한다고 했다. 간다고 했다. 그랬더니 나중에 보니까 골프 라운딩을 하면서 거기서 강의를 해달라는. 그래서 골프 못 친다고 했다. 그냥 골프채 들고서 치는 척만 해도 된다고 했다. 싫다고 했다. 돈 많이 주겠다고 했다. 그래도 싫다고 했다. 이것들이 사람을 뭘로 보고 (사실은 나도 전경련의 환경 분야 주포 역할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서로 전혀 모르는 관계는 아니다.)

 

요즘에 내가 새로운 양식 실험을 해보는 것은 티타임이다. 10명에서 20명 안팎의 사람과 모여서 차 한 잔 마시면서, 나는 30분 이내로 배경에 관한 얘기를 하고.

 

돌아가면서 서로 얘기를 하게 하고, 중간중간 내가 진행성 개입을 하는.

 

책을 읽지 않았더라도 읽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효과는 강연보다 티타임이 훨씬 좋다. 좀 더 비공식적인 얘기의 핵심에 바로 들어갈 수 있다. 최근에 독자 티타임하면서 나도 안 해본 새로운 포맷을 실험해보는 중이다.

 

티타임 형식이 성공하려면 얘기를 주도하는 사람이 확실하게 출발점과 목표점을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건 내가 하는 거니까 아무 문제 없고.

 

기존의 강연과는 다른 20명 내외의 티타임 형식을 좀 더 많이 만들어볼 생각이 있다. 물론 강연으로 돈을 벌고, 책을 팔 생각이면, 무조건 다다익선이다. 그렇게 보이기는 하는데.. 나는 사실 그런 목적은 별로 없다. 진짜로 사회를 조금이라도 움직이게 하고 싶은. 그럴 때에는 티타임 형식이 좀 더 나을 수도 있다. 사람의 마음을 사고, 변화를 만들기 위한 것, 진심이 최고다.

 

후배들하고 하는 스터디에 대해서 내가 약간의 자부심이 있는 게.. 석사 시절에 나와 공부했던 친구들이 대부분 박사가 되었다. 타율로 치면 9할이 넘는다. 셋째 아이를 낳으면서 박사과정 진학을 포기한 드문 경우 일부 아니면 대부분 최종 터치다운까지.

 

나는 그들에게 지식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공부하는 목적을 주로 가르치고, 공부하는 법을 가르쳤던 것 같다 (내 손을 거쳐간 박사들만 모아도 학과 몇 개는 거뜬히 만들 수 있을 듯한.)

 

이런 유사한 효과를 상식적인 시민들과 나누기 위한 포맷이 현재로서는 티타임이다. 강연보다는 나은 것 같다.

 

내년에는, 어차피 사람 많지 않은 것은 미리 주최측과 얘기해서 티타임 형식의 실험을 좀 더 많이 해보려고 한다. 내가 우스워 보여도 박사 22년차다. 가르치고 지도하고, 이골이 나도록 잔뼈가 굵었다. 좀 더 쉽고, 좀 더 표준화할 수 있는 양식에 대한 실험이 내년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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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강연할 때.. 저 시절만 해도, 참, 나에게도 힘이 남아있었다..) 

 

1.

몇 년 전만 해도 강연은 꽤 잘 되었다. 진중권, 홍기빈 등과 했던 건대 강연은 천 명인가 왔었다. 나 혼자 해도 500명 정도 되는 방은 너끈히 채웠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장하준 선생 강연이었다. 연대에서 강의하던 시절, 매주 한 명씩을 불렀다. 공식적으로 내가 줄 수 있는 돈은 10만 원.. , 염치 없기는 한데, 그 대신 나도 품앗이로 다른 걸 도와주기로 하고, 그렇게 했었다. 300명 정도 들어가는 대형 강의실을 내가 빌릴 때, 괜찮겠냐고 걱정들을 했다. 그래도 천하의 장하준인데..

 

그게 어찌어찌 소문이 나서 원희룡 같은 국회의원들도 왔다. 300명 들어가는 계단강의실에 500명이 넘게 왔다. 나중에는 산소 부족으로, 덥고, 숨쉬기 힘들고. 그 시절, 장하준의 인기는 정말로 하늘을 찔렀다.

 

mb 시절, 어쩌면 모두 외로웠는지 모르겠다. 뭐라도 있으면 같이 모여서 니들, 참 고생이 많다”, 그런 걸 나누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강연회마다 사람들이 가득 찼었다. 부산대 강연할 때 300명이 넘게 와서, 정신 하나도 없었던 기억이.. 그 시절에는 그랬다.

 

사회적 경제 책 내고 작년 하반기에 전국을 한 번 돌았었다. 그 때는 작게 돌았다. 지역의 작은 생협이나 협동조합 아니면 시민단체, 20~30명 모인 작은 강의실을 꼼꼼하게 돌았다. 사회적 경제는 크게 모여서 얘기할 주제는 아니다. 작을수록 좋다고 생각하고, 차비도 제대로 주기 어려운 시민단체의 작은 방들을 돌았다.

 

보통 강연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은 강연기획사와 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기업에서 하는 직원 연수 같은 거를 하면서 꽤 큰 돈을 받는다. 나는 그런 거는 안 한다. 돈 때문에 강연을 한다고 생각하면, 갑자기 내가 너무 불쌍하게 느껴진다. 그럼 그냥 연봉 많이 준다는 데 가서 대충 살았으면 될 거 아냐? 이 나이에 이게 뭐냐! 그렇게 내가 불쌍하게 느껴질 것 같다.

 

강연 시장에서는 강연자의 수명을 대체적으로 2년 반 정도로 본다. 전문 강연자로 나서면 한 때 돈을 많이 벌기는 하지만, 그게 2년 반이면 땡, 그게 시장의 시각이다. 이건 완전히 미사리 카페하고 경제적으로는 똑 같은 구조다.

 

미사리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려면 히트곡이 두 곡은 있어야 한다 (영화 <걸 스카우트>에서 최성수 팬이 등장하는.) 두 곡은 있어야 시작할 때 한 곡, 끝날 때 한 곡, 자기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중간에 남의 노래를 부르더라도 한 시간 짜리 공연에 앞뒤는 자기 거로 할 수 있어야 나중에 미사리라도 갈 수 있다.

 

히트작 하나로는 2년 반, 그게 강연 시장의 논리 구조다. 그리고 내내 돌아다니면서 같은 얘기만 하면 두 번째 히트작이 나오기가 어렵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게 강연업체들이다. 냉정하다. 그 세계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게, 내가 회사 강연을 안 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고.

 

2.

촛불집회 이후, 서울이든 지방이든, 강연은 이제 아주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서로 같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어려운 시기는 지나갔다.

 

그리고 유튜브가 커졌다. 돈 때문에 강연하던 사람들은 유튜브로 넘어갔고, 광고 수익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도 세상 사는 방법 중의 하나다. 이래저래 강연은 아주 힘들어졌다.

 

그 사이에 지방 강연은 정말로 더 힘들어졌다. <불황 10> 나왔을 때, 지방의 교보문고를 따라서 전국을 돌았던 적이 있었다. 그 때는 큰 방이든 작은 방이든, 꽉꽉 찼다. 그리고 다시 서울로 와서 강남교보에서 할 때 정말 그 큰 강당이 다 찼었다. 그건 옛날이다.

 

이제 지방의 교보문고에 강의실을 가진 곳은 거의 없다. 채울 수가 없으니 강연을 할 수가 없고, 그러니까 뭐하러 방을 유지하느냐, 그런 거랜다. 광화문에 있던 교보 기획팀이 근교로 이사가고, 그 이후에 책에 관련된 기획들이 급감했다. 그 충격이 지방에서는 더욱 더 충격적으로 온..

 

직장 민주주의 책 나오고, 어쨌든 되는대로 일단 지방 강연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잡힌 게 대구, 인천, 전주, 진주.. 강연장이 없어서 지역의 도서관과 연계해서 할 수 있는 데만 먼저 잡았다.

 

지방 강연이, 참 어렵다. 서울도 사람 모으기가 어렵지만, 지방은 더 어렵다. 그래서 더 안 하게 되고, 그러니까 더 안 가게 되고, 결국 아무 행사도 없는 지역이..

 

내가 내는 모든 책에 강연을 하는 건 아니다. 책 나오기 일상적으로 하는 강연 한두 번 하고 마무리하는 책들이 대부분이다. 강연이 들어오지 않아서가 아니라, 다음 작업을 해야 하니까 지난 책 붙잡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회적 경제 때 크고 꼼꼼하게 강연을 했었는데, 직장 민주주의는 좀 길게 꼬리를 늘이려고 한다. 낮고, 작게.

 

책에 썼다. “나의 타점은 낮다.” 높은 데 보고 스윙한 책이 아니다. 가벼운 진루타로도 충분하다.

 

원칙은 독자 다섯 분만 있으면 어디든 간다.”

 

유튜브와 디지털의 못하는 것은, 사회는 사람의 일이라는 점이다. 씨앗이 뿌려질 때, 결국 사람들이 만나는 순간이 한 번은 있어야 한다. 사회의 변화를 위해서는 사람의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이해는 많은 경우, 수다로부터 시작된다.

 

수다, 이건 내가 좀 한다.

 

물론 나도 언제까지 강연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리고 애들 보면서 잠시 시간 내는 거라서 물리적으로 한계도 뚜렷하다. 그렇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직장 민주주의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우린 안 될 거야, 아마.

 

이렇게 말하는 걸 싫어한다. 그래서 이상은의 <언젠가는>, 아직도 좋아한다. 언젠가는, 그 기다림 마저도 없으면 삶은 너무 비루하다. 나는 그렇게 비루하게, 그리고 때로 비겁하게, 그렇게 50대를 보내고 싶지는 않다.

 

화려하고 불꽃같이, 거대하고 거창하게, 그런 건 이제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 다시 올 필요도 없다. 그러나 비루하게, 그렇게 시간을 때우면서 환갑 되는 날만 기다리고 싶지는 않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방송의 인기와 같은 이미지의 도움 없이, 책 그 자체의 힘만으로 세상을 몇 센치라도 움직이는 것, 그 순간을 보고 싶다.

 

그래야 우리 자식 세대에도 책이 여전히 살아있는 나라가 된다. 지금 같아서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책은 오래 못 버틴다. 사회과학이라는 쟝르는 그보다 훨씬 전에 사라지게 된다.

 

예전에 협상하던 시절 태국대 교수랑 친하게 지낸 적이 있었다. 책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태국에는 한국과 같은 사회과학 책이라는 게 아예 없다는 거다. 그 때 놀랐다.

 

각고의 노력이 없으면, 우리는 진화가 아니라 퇴화하게 된다. 지금 우리는 그 분기점에 서 있다. 가면 안되는 길로 우리는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책이라는 광선검을 들고,

 

May the 명랑 be with you!

 

오늘도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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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글을 또 쓰기는 싫다. 안 그럴 수 있는 방법은 매번 다른 얘기를 하면 된다. 그런데 그건 다른 글인가? 신문기사는 같은 글의 소재만 다른 변주인 경우가 많다. 뉴스 끝에 있는 기상캐스터의 날씨 소개는 같은 글이 매일, 끝없이 반복되는 글의 전형이다. 이런 글은 쓰고 싶지 않다. 나는 기자가 아니거덜랑.

새로운 소재만 찾으면 같은 형식의 글을 끝없이 써도 되는 것일까? 이게 내가 글에 대해서 생각하는 가장 기본적 자세이며 파토스이기도 하다. 무슨 얘기를 하느냐만 중요한 것은 아니고, 어떤 식으로 쓰느냐도 때로는 중요하다. 그래야 같은 글을 또 쓰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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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책 중에서 이 책이 가장 의미있는 책이다. 세상은 못바꿨어도, 몇 사람의 인생은 행복해진 것 같다..) 

 

 

1.

90년대 대만의 젊은 감독들이 카메라 워크를 극단적으로 배제하고, 그야말로 스탠딩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기술이 발달해서 카메라를 다양하게 움직이고, 앵글도 훨씬 많아졌다. 실력이란, 카메라 딱 세워놓고 누가 잘 찍을 수 있느냐, 그게 진짜 예술이란 얘기다. 어차피 자본과 장비로는 헐리우드 이기기 어려우니까, 이런 논쟁이 나왔다. <붉은 수수밭> 나오던 시절의 기술적 논쟁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3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대형 지비집은 기본이고, 드론도 비행허가만 나면 다 쓴다. 물론 카메라를 세워놓고 그 안에서 긴박감을 만드는 고전적 영화 <구멍>을 비롯해서 여전히 그런 예술적 시도들이 있다. 그렇게 하면 대단한 게 맞기는 하다. 그런 걸로 승부 보려는 사람, 거의 없다. 하다못해 간단한 실외 예능방송도 동원할 수 있는 건 다 동원한다. 사람들의 변한 시선에 맞추는 수밖에 없다.

 

2.

2년 전에 <살아있는 것의 경제학>을 냈다. 겁나게 안 팔렸다. 그 뒤에 낸 육아 에세이도 역시 겁나게 안 팔렸다. 아마 몇 권이 계약되어 있지 않았으면 그 시점쯤 나는 책을 그만 쓰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했었을 것 같다. 생각은 그런데, 그 전에 약속한 게 있어서 억지로 억지로 끌고 갔다. 다행히 <사회적 경제는 좌우를 넘는다>가 체면치례 정도는 할 수 있을 수준은 되었다. 사회적 경제, 딱 견적 안 나오는 주제이기는 한데, 했던 작업들의 흔적은 남겨놓아야 할 것 같아서 한 책이다. 그야말로 시한부 생명연장’, 내 상황은 그렇다.

 

그 때쯤 나는 나도 돌아보고, 내가 내는 책도 돌아보고, 그리고 바뀐 세상도 돌아보게 되었다. 다들 책이란 원래 안 팔린다,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책을 쓸 이유도 없다. 도서관에 납품하려고 책 쓰는 건 아니다. 안 팔려도 괜찮지만, 그냥 안 팔려서, 그런 건 이유가 아닌 것 같았다.

 

3.

내 생각에는, 내가 다루는 주제나 내용에는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책을 둘러싼 여건도 너무 안 좋아지기는 했는데, 이건 내가 손댈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다들 방송에 좀 더 나가고, 케이블에서 하는 예능방송 같은 데에도 나가라고 했다. 라디오도 진행 섭외 들어오면 그냥 빼고만 있지 말고. 마침 그 때 신동엽이 mc를 맡는 새로운 방송 같은 것들이 만들어지고 있었고, 파일롯부터 만들어보자는 제안이 왔다.

 

나는 그게 본말이 뒤집힌 거라고 생각을 했다. 방송을 하다 보면 나갈 수는 있지만, 책을 팔기 위해서 방송을 나가는 것은 좀 아니다 싶었다. 그렇게까지 책을 써야 하면, 차라리 그만 쓰고, 편안하게 사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그래서 오히려 방송도 안 하기로 더욱 마음을 굳혔다. 어쩌다 오는 일회성은 몰라도, 진행을 하거나 고정을 하는 건 아니하기로 (하여간 성격 진짜 지랄 맞다. 이것 좀 해봐, 그랬더니, “절대로 안 할 거야”, 이렇게 삐둘어질 테다 버전..)

 

4.

그리고 살펴봤는데, 내가 변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변했다. 유튜브의 짧은 동영상의 영향 등으로 호흡이 더 짧아져 있다. 책은 호흡이 길다. 책을 잘 안 보기도 하고, 텍스트의 묘미로부터 멀어져 있기도 하지만, 호흡 자체의 길이가 문제가 되는 것 같다.

 

많은 아날로그 매체들이 그렇게 디지털 시대의 변한 호흡에 잘 적응하지를 못한다. 그건 매체 속성상, 어쩔 수가 없다. 한국에서 디지털이 들어와서 시장이 붕괴되지 않은 거의 유일한 매체가 영화 정도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다음을 꼽으면 웹튠. 그런데 여기도 이익 분배 등 근본적인 문제들이 심각해지는 중이기는 한 것 같다.

 

,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작년에 맞닥거렸던 잘문이었다. 바꾸는 수밖에 없다. 그 실험적 시도를 해본 게 50대 에세이였다. 문제 실험을 많이 했다. 물론 망했다. 그렇기는 한데, 읽은 독자들의 팬레터 같은 게 좀 열렬하게.

 

이게, 세상이 돈이 전부가 아니듯이, 책도 돈이 전부가 아니다. 가끔 나한테 가장 의미 있는 책을 꼽으라고 하면 아직도 아날로그 사랑법을 꼽는다. 책은 완전 망했다. 그리고 가난한 출판사의 마지막 카드였는데, 나는 반전의 계기를 만들지 못했다. 에디터는 결국 가난한 출판사를 떠나게 되었다. 나도 한동안 전전긍긍했다.

 

그런데 그 책이 내 인생을 바꾸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 바뀌었다고 연락을 해왔다. 세상을 바꾸는 아니, 바꾸는 척만 책보다, 단 한 명이라도 행복하게 해준 책이 진짜 좋은 책이다. 그래서 저자로서 아날로그 사랑법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과 비슷한 현상이 50대 에세이 때 벌어졌다. 안 팔리는 책이 미운 책일 수는 있어도, 그렇다고 해서 나쁜 책인 것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안 팔리는 것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 많은 요소 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유튜브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맞춰서 호흡도 더 짧게 가져가고, 웃기거나 화나게 하거나 어쨌든 감정 포인트를 더 자주 가져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까지는 밀도를 높이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이제는 일부러 밀도를 낮춘다. 밀도를 높이면 숨이 막힐 정도로 꽉꽉 조이는 느낌을 받지만, 요즘은 밀도만 너무 높이면 힘들다고 책 집어 던진다. 밀도 조절도 이제는 신경 쓰는 항목 중의 하나가 되었다. 너무 낮추면, 글이 건들건들거려서 불량한 책이 되거나, 가짜 책이 된다.

 

5.

50대 에세이 때 했던 문체 실험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반영한 책이 직장 민주주의 책이다. 그래도 여전히 완성형은 아닌 것 같고. 중간 편집을 하면서 게임이론으로 조직론 설명한 2장을 통째로 날렸다. 그리고 그걸 짧은 몇 페이지로 축약해서 앞의 장 끝에 넣어버렸다. 독자를 웃길 수는 없어도 재우는 것은 너무 실었다. 책의 난이도가 확 내려갔다.

 

이렇게까지 해야 되느냐고 하지만, 사람들의 호흡이 변했다. 방법 없다. ‘88만원 세대에서 살아있는 것의 경제학까지는 주로 생각의 흐름을 간결하게 보여주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제 그렇게 하면 잘 훈련된 독자들 말고는 책을 못 읽는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하려면 거기에 맞추는 것 말고는 별 방법이 없다는 게 내 판단이다.

 

물론 그런다고 책의 내용이 더 좋아지느냐, 그렇지는 않다. 내용은 이러거나 저러거나, 같다. 결론도 같다. 이것저것 맞추다 보면 힘은 몇 배로 든다. 그래도 방법이 없다. 내가 제일 걱정하는 것은, 이러다가 1쇄도 못 털게 되고, 출판사에 돈을 벌어주기는커녕 매번 손해만 입히게 되는 것.. 그건 책을 그만 쓰는 게 아니라,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런 최악의 상황은 피하고 싶다.

 

이렇게 하면 책이 훨씬 더 팔리느냐? 꼭 그런 건 아니다. 책의 판매에는 개입하는 요소들이 아주 많다. 그리고 점점 더 힘들어질 것이다. 인지도와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방송에 나가지는 않는 선택을 했기 때문에 정말로 책의 힘만으로 파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게 내가 해보고 싶은 일이다. 엄청 팔고, 겁나게 팔고, 그런 건 옛날에 다 해봤다. 책의 힘만으로 팔리는 책 그리고 그 힘만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책, 그게 내가 해보고 싶은 일이다. 그래서 여전히 책을 쓰는 것이다.

 

다음 번 책에서는 더 많은 실험을 해보려고 한다. 농업경제학에서는 편지 형식의 형식 실험을 해보려고 하고, 젠더 경제학에서는 어투와 문체, 가장 저렴한 싸구려 문체를 사용할까 생각 중이다.

 

디지털 시대, 사람들은 유튜브의 영향을 받아서 호흡과 감성도 변한다. 책이 완전히 디지털 방식이 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호흡에 맞춘 변화 정도는 할 수 있다.

 

6.

권위도 더 내려놓고 싶다. 자꾸 사람들이 나한테 교수라고 한다. 애 태어난 다음부터는 도저히 여유가 없어서 학교 수업도 안 했다. 난 교수 아니다. 이제는 박사라고 불리는 것도 좀 그렇다. 박사면 어떻게 아니면 어떻고..

 

그냥 씨라고 불리는 게 차라리 더 편하다는 생각이 요즘 들기 시작한다.

 

글도 그런 마음으로 쓰려고 한다. 더 허당스럽고, 힘도 더 빼고. 좀 더 저자가 권위가 있어야 독자들에게 설득력이 있는 거 아냐? 10년 전에는 그랬다. 지금은 안 그렇다. 권위 있는 저자, 그냥 20대들은 아예 돌아보지도 않는다. 방법이 없다. 내려놓을 수 있는 건 극한으로 내려놓는 수밖에.

 

그렇게까지 해야 해? 물론이다. 좋은 세상을 보고 싶은 그 욕망을 위해서, 내가 뭔들 못하겠냐? 못해서 못하는 거지, 싫어서 못하는 것은 아니다.

 

더 짧게, 더 낮게 그리고 더 많은 주기적 패턴의 포커스들을 배치, 그런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다.

 

세상이 변하고, 사람들의 감성이 변한다. 그리고 20대의 감성은 정말로 흐름을 알기가 어렵다. 자기들도 사실 서로 잘 모르는 것 같다. 죽어라고 맞추려고 해도 어색하다. 그러나 맞추려는 노력도 안 하면, 진짜 급식체가 아니라 꼰데체라고 불리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방법이 없다, 맞춰가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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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 카메라 쓰던 시절, 세검정 옛날 내 방. 여기서 책 10권 넘게 쓴 것 같다.. 아이 태어나기 전.) 

 

나한테 왜 계속 책을 쓰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게 제일 대답하기 애매한 질문이다. 수없이 많은 답변을 해봤는데, 아마도 가장 진실된 답변은 그냥 책 쓰는 게 좋아서”, 이런 것 같다. 이걸로 먹고 살아야 한다는 헝그리 정신이 가장 표준 답변이기는 한데, 나는 그런 헝그리 정신을 가졌던 적이 한 번도 없다. 책만 그런 것도 아니다. 나는 내가 하는 거의 대부분의 일을 대충대충 한다. “이거 아니면 나는 죽는다”, 그런 생각 자체가 싫다. 그리고 너무 몰입해서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치는 그런 바보 같은 일도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대충대충, 건성건성, 되거나 말거나, 그런 자세로 살아간다. 그런 내가 책에서 만큼은? 에이, 그럴 리가 있나. 그렇게 목숨 걸고 책을 쓰면, 3권에서 4권 사이, 자살하고 싶은 순간을 한 번쯤은 맞게 된다. 책 쓰는 게 뭐라고, 자살 충동을 느끼고, 우울증 가고, 집안 식구들 달달 볶고.. 그건 아니다. 권장생 선생이 그러시지 않았나, 인생은 소풍 같은 것이라고. 인생의 소풍인데, 책이 목숨 걸? 그런 건 아니다. 그러면 2~3년 하다가 극도의 회의감에 빠져서 결국 가보지 않은 길을 내려놓게 된다. 대충, 살살, 그게 10년 이상 책을 쓰는 첫 번째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책에 관한 책>10년 넘게 책을 쓰면서 생겨난 약간의 노하우에 관한 책이다. 굼뱅이도 기는 재주가 있다고, 많이 쓰다보니까 요령 같은 것도 생기고, 패턴 같은 것도 생겼다. 그리고 저자로서 가져야 할 마음 가짐 같은 것도 조금은 알게 되었다. 소설가가 되는 것과 교양이나 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쓰는 것은 좀 다르다. 소설 작법이나 시나리오 작법 같은 것은 꽤 나온 책이 많은데, 교양 분야는 아직 생각해본 사람이 없다.

 

예를 들어보자. ‘필자라는 표현을 쓸까 말까? 나는 라고 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요런 문장을 본격 책에서 처음 쓴 사람이 나다. 신문에도 나는 라고 쓴다. 요즘은 필자라는 일본식 표현을 쓰는 사람이 많이 줄었지만, 내가 데뷔하던 시절, ‘라고 쓰는 것은 매우 어색한 일이었다. 주로 비평하는 문학 쪽 선생님들이 나를 보면서 요즘 것들, 기본이 안 되어서”, 아주 혀를 끌끌 찼다. 대놓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거는 영어구요, 불어는 on,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주어 처리를 합니다”, 내가 싸가지 맞기는 맞다. 환갑 가까운 초절정 유명 평론가들에게도 불어 문장으로 되치기를 했다. 영어의 피동형과 우리 말의 주어에 관한 얘기다. 왜 건방지게 라고 하느냐고 아주 지랄들을 하셨다. 그래서 근대 이후에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해진 글에 관한 얘기로 뭐라고 되받아줬다. 물론 누구나 다 아는 에밀 졸라의 <J’accuse>에 관한 얘기다. 나는 고발한다, 누가 고발하죠? Je, 에밀 졸라가 는 이라고 했다. 에밀 졸라가 그 사건은 고발되었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시일야방성대곡, ‘오등은이라고 시작된다. ‘를 왜 쓰느냐, 무슨 소리예요? 선생님은 지금 영어 얘기하시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말로 글 쓰는 사람들이구요. 불어, 독어, 다 그렇게 안 해요. Je, ich.. 베토벤이 ich liebe dich라고 했지요, 사랑하게 되었다라고 안 했어요. 뭔 소리예요? 나도 참 성질 지랄맞다. 하여간 그 사건으로 데뷔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할아버지들한테 개싸기지로 단디 찍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책에서 내가혹은 나는으로 시작하는 문장들은 그렇게 스타일이 되었다.

 

내 책은 일반적인 책에 비하면 파격 투성이다. 물론 나는 더 파격으로 가고 싶은데, 아직도 가슴이 좀 쫄려서, 더 과감하고 더 과격하게 못 간다.

 

독자가 읽을 수 없으면, 그건 쓰나마나, 독자에게 감정이 안 생기면 그것도 쓰나마나. 내가 책을 쓰는 기준은 토요일 밤에 시작해서 일요일 아침에 한 숨에 읽을 수 있는 것, 그게 아니면 안 쓴다. 물론 일부러 거꾸로 간 경우도 없지 않지만, .. 그 책은 망했다. 결국 12권으로 기획된 경제 대장정 시리즈가 그 실패로 서게 되었다. 언젠가 해보고 싶은 코멘터리 북도, 바이바이.

 

그렇게 꾸역꾸역 오다 보니 36권을 썼다. 감정, 밀도, 흐름, 시퀀스, 꺾기, 이런 내가 사용하는 기법들이 있다. 그렇지만 그런 기능 보다 100배는 중요한 게 일관성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삶이라는 게 그렇게 일관된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내 삶도 책을 쓰기 시작할 때에는 엉망진창이었다. 논리는 일관성을 가질 수 있지만, 삶이 일관성이 없으면 그 논리도 상황 논리에 빠진다.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안 그럴 수가 없다. 몇 년 하고 좌판 걷을 거면 몰라도, 10년이 넘어가면 논리적 일관성만으로는 일관성을 유지할 수가 없다.

 

결국 저자가 되는 것은 책을 완성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저자를 완성시키는 과정이다. 그게 제일 어렵다.

 

그래서 책은 연예인이나 배우와는 다르다. 책은, 연기하는 것이 아니다. 연구하는 사람, 서술하는 사람, 그 삶이 그대로 책에 투영된다. 연기와도 다르지만, 보고서와도 다르다. 보고서는 기능적이다. 누가 쓰느냐고 별로 안 중요하고, 기능과 결론만 중요하다. 책은 다르다. 그리고 그 인생이 거짓 인생이면, 책도 거짓이다. 책을 둘러싼 저자와 독자와의 메타 텍스트는 그렇게 형성된다. 거짓말을 한 번 할 수는 있지만, 10년 넘게 하기는 어렵다.

 

굼뱅이도 기는 재주가 있다, 이런 얘기를 두 번 하고 싶다. 책에 관한 것 한 번, 영화에 관한 것 한 번, 막상 해보니까 이렇더라.. 영화는 한 10년 후쯤, 그 때쯤 하면 어떨까 싶다. 나도 지식과 경험이 좀 더 쌓이고..

 

책은?

 

기능적으로는 지금 바로 써도 된다. 앞으로 내가 14권의 책을 더 쓰면 50권이 된다. 그 동안에 변화는 오겠지만, 기술이나 기량이 점프하듯이 늘지는 않을 것 같다.

 

내가 체득하고 이해한 기술만 가지고도 많은 사람들이 책 쓰는 시간을 1/3 이하로 줄여줄 자신이 있다. 일반인도 자신이 살아온 삶을 가지고 어느 정도 이상 수준의 책을 쓸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 기능에 관한 교과서라는 게, 원래 그런 거다.

 

내가 남자 애들 둘 보면서도 올해 책 3권을 냈다. 내년도 3권이다. 이렇게 하는 건, 엄청나게 내가 아는 게 많거나, 머리가 거의 천재급, 절대 이런 건 아니다. 기능으로 처리할 수 있는 건 기능으로 처리하고, 좀 더 감정적인 것이나 섬세한 데에 많은 시간을 들이기 때문이다. ‘굼뱅이의 기는 재주에 관한 책이 의미가 없거나, 뭔가 더 많이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못 쓴다. 요즘 내 책이 엄청나게 잘 팔리거나 그렇지는 않다. 책 시장이 힘들어서 그런 것도 있고, 내 인기가 바닥을 달리는 이유도 있고. 좀 복합적이다. 나도 그 상황은 안다. 그래도 꾸준히 하다 보면 티핑 포인트가 오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인생이 원래 좀 그렇다. 참고 기다리면 된다.

 

책에 관한 책을 지금 낼 수는 없다. 지 책도 못 파는데, 누구한테 책이 이러쿵 저러쿵, 지랄하네,그런 헛소리 취급 당하기 딱 좋다. 그래서 티핑 포인트가 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중이다. 이번 직장 민주주의 책에서 그런 티핑 포인트가 올까 싶었는데, 아직은 아니다. 1~2년 내에 오기는 할 것 같다.

 

그 티핑 포인트를 넘기면 쓰고 싶은 책이 또 하나 있다. 몇 년 전에 일본에서 제안이 왔던 책인데, <촌놈들의 제국주의> 일본판.. 그냥 하면 되는 일인데, ‘책에 관한 책처럼, 이것도 티핑 포인트 이후에 내야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쟁여놓고 있다.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누군가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인생에도 사이클이 있다. 책에도 사이클이 있다. 어려울 때는 고개 숙이고, 힘들 때는 버티고, 잘 나갈 때에는? 그 때도 고개 숙여야 한다. 그래야 멀리 간다.

 

나는 별 욕심은 없다. 내 인생을 돌아보면서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 두 개를 생각해보니까, 국민 경제가 IMF급으로 망하지 않는 것 그리고 살아서 전쟁 나지 않는 것, 이 두 개다. 나는 그렇지 않은 세상을 위해서 성실히 는 아니고 살살’ – 살아갈 뿐이다.

 

돌아보면, 내가 많은 사람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하는 건, 내 삶 그 자체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서 있기 때문이다.

 

초창기에 장정일 선배가 그런 얘기를 했다. “10년간 꾸준히 책을 쓰면, 부자는 아니더라도 밥은 먹고 살게 될 거다..” 실제 지내보니까 그렇다. 10년이 넘도록, 밥 먹고 걸 걱정하지는 않았다. , 워낙 쓰는 돈이 적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도움 덕분인지, 그야말로 뼈저리게 느껴질 정도다.

 

마치 장정일 선배가 나에게 도움을 주었듯이, 나도 다음에 올 사람에게 작은 참고자료는 남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책은 개똥이라고 생각하는 순실이 시대도 지났고, 책이 뭐여, 아직도 책 보는 사람 있나, 이러고 있는 시대를 지나고 있다. 그들에게 책이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인가, 보여주고 싶다. 책 한 권 남기는 게 평생 소원인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그게 한국의 힘이고, 저력이다. 나는 그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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