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대한 단상'에 해당되는 글 363건

  1. 2019.02.13 연극성과 양아치 벗어나기.. 3
  2. 2019.02.12 해탈은 아직 멀다.. 1
  3. 2019.02.05 하루 2시간 일하기.. 2
  4. 2019.02.01 그 나물에 그 밥..
  5. 2019.01.31 쓰는 내가 재미가 없는 순간.. 2
  6. 2019.01.29 오피스텔 시세를 보다가.. 4
  7. 2019.01.27 류이치 사카모토에 대한 메모.. 1
  8. 2019.01.27 보람과 재미..
  9. 2019.01.24 뼈다구 만들기.. 1
  10. 2019.01.23 노트를 샀다 2

 

예전에 공부할 때 연극성(theatralite)라는 개념이 유행했었다.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려운 개념이고, 쉽게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 개념이다.

 

푸코의 <말과 사물>의 연장선에서 생각해보면..

 

사춘기가 과연 예전에도 있었을까?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사춘기가 현대적 현상이라는 거다. 근대가 출현하기 전에, 인간이라는 개념도 약했고, 인문과학, 그런 개념 자체가 아예 없었다. 그러니까 어린이 개념도 없고. 어린이는 약한 사람, 불완전한 사람, 그런 거였던 것 같다. 인간에 대한 접근이나 개념 자체가 약하니까 당연히 어린이도 개념이 없고. 교육도 지금과는 접근 자체가 다르고. 그러니까 청소년이라는 개념도 없었던. 청소년이라는 개념이 없으니까 그 청소년기라고 해서 뭔가 특별하게 다르게 취급하지도 않고.

 

우리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사실 청소년기에 들어가기도 전에 벌써 결혼을 했고, 아빠가 되어 있거나 엄마가 되어있거나. 사춘기? 그게 뭔데? 불과 100년 전만 해도 한국 사람들은 그랬을 거다. 그러면 사춘기는? 이게 자연적 현상이냐, 사회적 현상이냐? 보기에 따라서 양 쪽 다 가능한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절대적인 생리현상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사춘기가 이제는 중2에 온다고 하기도 하고, 초등학교 5학년 때 온다고 하기도 하고. 사춘기야말로 사회현상이기도 하고, 개념 현상이기도 하다. 나는 사춘기가 없었던 것 같다. 반항은 학교 죽어도 안 간다던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반항을 안 한 적이 없으니까 특별히 더 한 시기도 없다.

 

연극성은 이런 생각의 연장이다. 자기가 자신의 삶을 무대의 주인공처럼 생각한다는.. 이게 보기에 따라서는 20세기 현상이기도 하다. 대가족 시절에는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재산이고 뭐고, 아무 것도 안 주는 차남들에게서나 생겨나는 현상일 수도 있다.

 

더 올라가면 과연 인간, 아니 남자가 언제부터 허리띠를 쓰기 시작했는가? 최소한 그 때부터는 자신을 장식하고 꾸미기 시작한 거니까. 생각보다 늦다.

 

소비적 주체의 등장, 아마도 그런 과시적 효과를 베블렌이 분석한 게 19세기 후반이니까 그 정도에는 중산층에서도 어느 정도 형성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20세기, 드디어 생산의 주체이자, 소비의 주체인 개인에 대한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스스로 자신의 삶이 주인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엇겠지만, 귀족이거나 선각자 정도 되지 않았을까. 하여간 연극성이라는 얘기는 이런 얘기다.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 모두에게 자신은 자신만의 극장에서 모두가 주인공이다. 인생을 하나의 거대한 연극처럼 생각하고, 모두 거기에서 자신만의 연극을 하게 된다. 그게 삶이다.

 

이 얘기가 너무 재밌었다. 실제로 이 얘기로 박사 논문을 쓸 생각도 있었는데, 현실이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정권이 우파로 바뀌면서 지도교수가 정년 이후 명예교수에서 밀려났다. 그리고 나는 현실과 좀 타협을 했다.

 

연극성, 이 얘기 자체가 엄청나게 새롭거나 그런 거는 아니다. 자기 인생에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거, 너무 당연한 거 아냐? 그리고 남이야 뭐라고 하든, 작당한 판타지를 가지고 사는 거 아냐? 어차피 삶은 연극 같은 것인데?

 

그렇기는 한데, 이 얘기가 나한테 영향을 안 준 것은 아니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거나 별 거 없어 보이는 사람도, 다 자신의 의식 속에서는 주인공들이다. 그가 착각을 하는 게 아니라, 원래 그런 것이다.

 

기획을 하거나 마케팅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흔히 양아치 짓을 하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사람을 숫자로만 보는 것이다. 물론 관객수, 독자수, 이런 건 다 숫자로 나온다. 시청률, 열독률, 이런 tv와 신문 같은 것도 주요 지표가 숫자로 나온다. 하다못해 유튜브도 카운터 숫자와 독자수, 이렇게 숫자로 나온다. 그래서 머리 수 세는 논리에 익숙해진다. 이런 게 그 자체로 나쁜 건 아니다. 하다 못해 생태학의 기본도 머리 수 세기다. 포퓰레이션, 모집단의 개체수를 세는 것으로부터 생태학이 시작된다. 그런데 머리 수가 모든 것이 되고, 머리 수만으로 생각을 하게 되면? 이러면 딱 양아치다.

 

그 숫자로 대표되는 모집단 속에서 한 명 한 명의 연극 주인공들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잃으면, 그게 바로 양아치 아닌가? 생태학은 머리 수 세는 데에 끝나지 않는다. 그건 기본 데이터일 뿐, 그 속에서 생명과 생명 그리고 구조와의 관계를 구성해가는 것이 생태학 작업이다. 머리 수만 세고, 그걸 돈으로만 연결하는 것, 그건 양아치다. 그런 양아치성을 끝까지 몰고 가면, 미세먼지가 중요하니까 원전을 늘리자, 이런 이상한 얘기가 나온다. 환원해서는 안 될 것을 환원하게 된다.

 

이와는 정반대의 경우가, 주인공들끼리의 연합체 같은 것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것. 나도 주인공, 너도 주인공, 우리 모두 주인공, ‘우리끼리만’. ‘스카이 캐슬현상 같은 것으로 보면 된다. 예전 경기고 나온 할아버지들이 이런 짓을 잘 했다. 얘도 경기고, 쟤도 경기고. 노회찬도 경기고 아녀? 이런 참, 뭐라 할 수도 없고. 노회찬은 학교나 학번 따지고, 나이 따지는 거 진짜 싫어했다. 어쨌든 노회찬도 경기고 나왔으니까 그 자리까지 간 거여, 참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 경기고들이 대통령은 한 번도 못 만들었다. 얼마나 억울해들 하시는지. 그래서 이회창을 죽어라고 밀었다. 이회창 대통령 떨어질 때, 얼마나 꼬시던지! 게다가 상고출신 대통령 되는 순간, 진짜로 꼬셨다. 그래, 이게 시대 정신이야!

 

한 명 한 명의 연극 무대를 들여다보고, 그 사람이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연극으로 보는 것, 물론 나도 잘 못 한다. 그래도 세상을 그렇게 보려고 한다. 한 사람 한 사람, 기회가 되는 대로 그렇게 삶의 하나로서 재구성 해보려는 노력은 한다.

 

책의 저자가 되는 것은, 독자 한 명 한 명을 연극의 주인공으로 인식하기로 마음을 먹는 것과 같다. 제일 개쓰레기 같은 작가는 책 판매 부수로 자신의 독자들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건, 인간도 아니다. 양아치도 아니고, 스카이캐슬도 아니고, 그냥 개쓰레기다. 책을 못 쓸 수도 있고, 재미 없게 쓸 수도 있고, 쓰다 보면 틀린 내용을 쓸 수도 있다. 살다 보면 그런 일이 생긴다. 그러나 독자를 그냥 머리 숫자로만 이해하는 사람은, 책의 저자로서 출발점이 안 된 개쓰레기다. 3류 신문사 편집국장 같은 얘기일 뿐이다.

 

책이란 임시로 펼쳐진 연극 무대 같은 것이다. 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그 연극 무대와 조명, 장치들을 설치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책 쓴 사람이 주인공 아니냐고? 오 노! 연극 장치의 설치자 중의 한 명일 뿐이다.

 

책은 독자가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책 만드는 놈을 욕하든, 책 쓴 놈을 욕하든, 자기 마음대로 평가하든, 주인공 마음이다. 읽는 사람이 임시로 무대 이에 올라가는 주인공, 그런 게 책이다. 비슷한 표현으로 여행 가이드라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다. 여행은 주인공이 하는 것이다. 가이드는 그 코스를 도와주거나 약간의 설명을 덧붙일 뿐이다.

 

책만 그런 건 아니다. 만드는 모든 일이 다 그렇다. 연극에는 희로애락이 다 들어가 있고, 삶의 모든 요소가 들어가 있다. 그걸 이해하는 게 만드는 일의 출발점이다. 내 물건을 누가 쓰는지, 어떻게 쓰는지, 그 의미가 뭔지, 그걸 아는 게 만드는 일의 시작이다. 그걸 모르고 하면? 본인도 힘들고, 남들도 힘든 일이 언젠가 벌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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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 때에는 강연을 그렇게 많이 하지는 않았다. 가능하면 대학교 정도 가려고 했었는데, 그 시절에는 이미 학교 운동권이나 학생 자치 같은 게 무너지던 시기라서 그렇게 많이 가지는 못했다. 그리고 금방 mb 집권이 시작되었다. 나만 그랬던 건 아닌데, 하여간 대학교 강연이 학교 측이 반대로 무산되는 일이 몇 번 있었다.

나꼽살 하던 시절에는, 어느 정도는 김어준의 인기에 좀 묻어가는 면도 있었을텐데, 그 때는 진짜로 어마무시했었다. 부산대에서 대형 강의실 꽉 찾았다. 아마, 그게 가장 많이 왔던 걸로 기억난다.

2012년 대선의 문재인 서울 유세에서 처음 유세차를 탔다. 그 때 공약 중에서 의료비 100만원에 대해서, 아주 좋은 공약이라는 얘기를 했었다. 성격상, 길게 얘기하는 걸 싫어한다. 몇 분 얘기하지 않고 내려갔는데, 그게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나보다.

그 시절을 정점으로, 내 인생은 그 후로 줄곧 하강 국면이다. mb 때도 힘들었는데, 박근혜 아주 초반만 지나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을 정도로, 진짜 꽁꽁 틀어막혀 있었다.

그냥 정권 교체나 좀 돕자, 가벼운 마음으로 아직 당대표가 아니던 시절의 문재인을 돕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도운 건 마지막 선거가 끝나던 순간까지였다. 그렇지만 공식적으로는, 둘째가 폐렴으로 입원하면서..

그 때 아내랑 아이들 다 데리고 보령으로 갔다. 대천 해수욕장 근처에서 며칠을 지냈다. 거기서 내가 하던 모든 걸 내려놓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행히, 그 후로는 먹고 사는 걸 걱정하면서 살지는 않아도 별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늘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특별히 다른 사람하고 싸우면서 살지는 않으려고 한다.

내가 노력하면서 살았을까? 그렇다고 억지로 말하면 '겁나 노력
, 이렇게 말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면, 대부분 내 맘대로 살았고, 요즘은 그냥 내려놓고 산다.

그게 나의 50대다. 한 번 더 남은 인생을 위해서 도약, 그렇게 생각하기 좋은 나이일 것 같지만, 그건 똑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고.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두 명을 돕는 일이 내가 주로 한 일인 것 같다. 한 사람은 대통령이 되었고, 한 사람은 결국 환갑을 코 앞에 두고 감독 데뷔에 성공했다.

그리고 또 다른 동료 한 명의 인생의 난관을 풀어가는 데 나의 많은 시간을 쓴다.

그렇게 사는 게 더 나답다는 생각은 든다. 나는 앞에 서는 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죽을 때까지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

그리하여 정말 덤으로, 딱 우리 집 생활비만 나오면 된다는 마음으로 책도 쓴다. 잘 팔리면 고맙지만, 아니라도 큰 문제는 없다. 그저, 내가 나중에 돌아봐서, 이런 책을 미쳤다고 썼냐, 그런 자책만 들지 않으면 된다.

그래도 영 익숙해지지 않는 것은, 무시당하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잘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런 정도는 충분히 못 들은 척하고,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데도, 막상 그게 잘 되지는 않는다.

그거만 되면, 나도 해탈의 경지에 들 것 같다. 그러나 아직은 잘 안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나도 잠시 생각해봤다. 아직은 내려놓을 게 더 많은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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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먹고 애들 데리고 한 시간 정도 산책하고 왔다. 작은 놀이터에 가서 잠깐 뛰어놀기도 하고. 큰 애는 벌써 커서, 단순 '나잡아 봐라'는 재미 없어 하고, 미끄럼틀에서 공성전을 해야 한다. 미끄럼틀, 안 올라가고 싶은데, 올라가서 잡고, 도망가고, 이 정도는 해야 놀이 축에라도 끼는. 좀 더 크면 미끄럼틀 공성전에서 투석전 하게 생겼다..

이번 연휴의 목적은 아내의 휴식과 일. 컨셉 명확하다. 아내는 지쳤다. 시장 보기나 애들과 산책은 내가 하고, 아내는 푹푹 잔다. 그리고 하루에 몇 시간씩 애들 데리고 나가서 아내가 밀린 일들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좀. 그러다 내가 지쳐서 어제는 아홉 시도 되기 전에 뻗어서 잤다. 작전과 달리, 나만 푹 쉰.

나는 예전에 비하면 하는 일이 별로 없다. 물론 일 자체가 없지는 않은데, 속도와 강도도 몇 년 전에 비하면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낮추었다.

옆에서 누가 보면, 노는 건지, 하는 건지. 그럴 것 같다.

직장 민주주의 책을 벌써 손 털어버렸어야 하는데, 강연 등 일부 일정을 아직 잡고 있어서, 거기서 차질이 좀 생겼다. 할 수 없다. 그런 건 그냥 양심 가는대로.

얼마 전에 시사인 편집국장 했던 김은남 기자가 하루에 몇 시간 글을 쓰느냐고 물었다. 2시간요..

김은남 기자가 취재한 많은 작가들은 여덟 시간 한다고 한다. 뭐, 그럴 수는 있을 것이다.

책의 원고를 쓰는데 내가 쓰는 시간은 매일 2시간을 목표로 한다. 3시간 쓰는 날도 있고, 심지어 4시간을 쓰는 날도 있다. 그렇지만 꽝인 날도 있다. 잠시 책상에 앉지도 못하는 날도 있다. 그래서 평균 내면 2시간.

그 이상 하면 좋을까? 생각 하나마나다. 애 보면서 2시간 낼 수 있으면 최고치다.

그나마 요즘은 다시 바빠져서 블로그도 거의 포기, 책 서문 읽기도, 그렇게 시간을 빼기가 어려워서 당분간 개점 휴업. 한 책 끝내고 다른 책 시작하기 전에 잠시 여유를 낸 건데, 당분간은 신경을 분산시키기가 어렵다.

지나보니까.. 정열적 활동, 남들이 나를 그렇게 부르던 시기가, 그렇게 좋았던 것은 아니다. 뭘 잘 몰라서, 쓸 데 없는 짓을 많이 했었다.

우쭈쭈쭈, 남들이 꼭 필요하다고 하면, 진짜 몸이 부숴지도록 도와지기도 하고.

요즘은 좀 약아졌다. 누가 뭐라고 말을 해도, 단가표부터 물어본다. 단가 안 맞으면 안 한다.

물론 시민단체 활동을 조금씩 돕거나 그런 건 지금도 한다. 그런 데는 단가고 뭐고 없다. 시민운동에 단가 같은 게 어딨냐. 하면 하고, 말면 마는 거지.

나머지는 그냥 단가 맞춰보고, 영 아닌 건, 서로 마음 불편하지 않게 아예 시작하지 않는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그 마음은 좋지만, 애들 보는 처지에 봉사하는 마음으로 움직이기는 쉽지 않다.

당분간, 봉사는 애들한테 하고, 아내한테 하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겨우 하루에 2시간을 확보하는 거다.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없냐고 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하기는 하지만, 차 한 잔 마시기 위해서 앞뒤로 준비하는 시간까지 치면 4시간이 사라진다. 그렇게 해서는 2시간도 안 나온다.

내년은 모르겠지만, 올해는 꼭 매일 2시간을 마련하려고 한다. 누군가에게는 '에게 2시간'이겠지만, 그것도 내게는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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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물에 그 밥. 나는 유학을 엄청나게 일찍 갔고, 학위도 전례없이 빨리 받았다. 그러다보니까 20대를 좀 별다르게 보내게 되었다. 한국에서 그 분야에서는 제일이라는 사람들과 일상을 같이 보내게 되었다. 최고이거나 이제 곧 최고가 될 사람들. 서울대 철학과의 김상환 선생, 서양경제사의 주경철 선생, 이런 양반들하고 책 같이 읽고, 논문 뭐 써야하는지 그렇게 복댁이면서 살았다.

그러다보니까 내가 부딪힌 가장 큰 문제는, '그 나물에 그 밥' 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였다. 권위로 치면 내 주변 사람들의 권위가 하늘을 찌른다. 그리고 그냥 존경한다고 네네, 그렇게 지내다보면 뭔가 폼은 나는데, 결국 '그 나물에 그 밥'이 된다.

지금 내 주변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익숙한 것을 계속하고 싶어하고, 정말로 편안한 상태가 되면, 더욱 더 익숙한 것을 진짜 열심히 하고 싶어진다. 보통의 잘난 사람들은 그렇다.

쉐킷쉐킷, 그걸 어떻게 흔들어서 전혀 새로운 조합을 만들 것인가, 그게 20대부터 내가 늘상 고민하던 현실적 질문이다. 여전히 어렵다..

잠깐 한눈 팔고 있으면, 또 다른 '그 나물에 그 밥' 안에 들어가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거 아닌 것 같은데.. 늘상 헤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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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쓰다보면 쓰는 내가 재미가 없거나, 빨리 다음 장으로 넘어가고 싶을 때가 있다. 이 때는 전부 다 버리고 새로 시작하거나, 그 분량을 앞뒤로 드러내버린다. 그게 어려우면 그 부분이라도 다시 쓰는 수술을 한다. 쓰는 내가 재미가 없거나 감정이 안 생기면, 읽는 사람에게 그런 효과가 발생할 가능성은 없다. 물론 충분한 팬을 확보한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부담감을 안 느낄 필요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상황은 아니다. 내가 재미 없는데, 누가 재밌겠다고 느끼겠나 싶다.

물론 그냥 그렇게 하면 그만이지만, 그 과정이 쉬운 것은 아니다. 과감하게 드러내면 그만이기는 한데, 큰 공사가 되거나, 대공사가 되는 경우가 많다.

<88만원 세대> 처음 시작할 때, 맨 앞의 인트로가 좌완 정통파 투수 이상훈에 대한 얘기였다. 근데 이게 은유가 너무 겹으로 겹치다보니까 얘기가 복잡해졌다. 일단은.. 다 버렸다.

오늘 아침에, 버릴까 말까, 고민하는 순간이 왔다. 이게 판단이 어렵다.

감정을 쌓아나가면서 뒤에서 진짜 얘기를 들을 준비를 하는 게 효과적이기는 한데, 문제는 독자들의 호흡이 점점 더 짧아져서.. 그 순간까지 따라올 사람이 점점 더 없어지는.

싹 버리던지, 장면 전환이라도 해야 하는. 그런데 마땅히 할 다른 얘기가 없다. 비비적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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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스텔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 먹고 시세를 보니까, 월세는 4,000에 40이다. 아내는 필요하면 작업실 따로 내도 된다고 하는데, 그냥 40만원어치 노는 게 날 것 같다. 보는 김에 간만에 옛날에 살던 아파트.. 2배 올랐다. 그거 팔고 이사가려고 했던, 결국 찜만 찍었던 아파트. 3배 올랐다.

지방에 집을 하나 더 살까, 일본에 하나 더 살까, 그러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뭐, 그러면서 각 국별로 부동산 특징과 그런 걸 공부하게 되기도. 강릉에 있는 경포대 현대는 진짜 살 생각이 있어서 몇 번 가보기도 했다. 동계 올림픽 유치한다고 생지랄 떠는 거 보면서 정나미가 뚝 떨어져서.. 그 후로는 진짜로 강릉은 한 번도 안 갔다. 신혼여행을 강릉으로 갈 정도로 강릉을 좋아했었다. 최고 절친도 강릉 사람이고.

결국 돌고 돌아, 작업실은 따로 마련하지 않는 걸로 결론을 냈었다. 그리고는 지금은 야옹구 쓰는 방에 얹혀서 고양이 눈치 보면서 지내는.

그 시절에 약간만 아는 교수 한 명이 막 부동산 회사를 차리고, 자기도 디벨로퍼라고 생지랄을 떨었다. 끌끌.. 그렇게 돈이 좋더냐, 그렇게 막 무시했다.

암 말기라는 얘기를 얼마 전에 들었다. 햐, 사는 게 뭔가하는 생각이 문득.

내가 봤던 집들은 최소 2배고, 보통은 3배 정도 올랐다. 그래도 안 산 게, 집으로 돈 벌었다는 얘기가 정말로 듣기 싫었다. 그냥 내가 사는 집에서 조용하게 사는 게, 제일 편하다. 돈이야 있다가도 없고, 그런 것.

작업실 때문에 집을 하나 더 살 생각이 있었는데, 그것도 마흔 넘어가면서 다 귀찮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나처럼 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난 젊었을 때 월급을 너무 많이 받아서 서른 살에 집 샀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통장에 돈이 많아서..

아파트 살 때, 내가 다니던 사무실 두 군데에 지도에 컴퍼스와 자 가지고 딱 중간 지점에 선을 그었다. 광화문과 용인 사이. 그 중에서 형편 되는 데 그냥 샀다. 진짜 무식하게 산 건데, 그 집도 세 배 넘게 올랐다. 그야말로 개발의 시대. 아무 것도 없는 벌판이 좋아서 고른 건데, 명박이 거기에 뭐라뭐라 막 때려짓는다고 하고. 건너편에 이번에는 오세훈이 또 뭐라뭐라 짓는다고 하고.

공사판 벌어지는 게 싫어서 그냥 이사왔다.

내가 알던 섬유 수입하는 회사 사장이 대구 사람이었다. 텍스타일 공부겸, 수출입 업무도 좀 봐주고, 섬유 시장도 좀 분석해주고. 그게 계기가 되어서 패션 공부를 하고, 선시장 후시장, 밀라노 시장, 프리미어 비젼, 그런 데 대해서 좀 익숙해지게 되었다. 이 양반이 아파트에 거의 광적인 수집벽 같은 게 있어서 돈만 생기면 아파트..

그게 싫었다. 그래서 헤어졌다.

패션쇼 관련된 일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좀 조언만 해주고 말았다. 그 때 모델들의 세계를 좀 볼 수 있었다. 참 어려운 일이구나.. 그리고 또 인연이 되어, 슈퍼 모델들하고 일을 할 기회도. 그냥 옆에서 지켜보는 데에도 그 삶이 너무너무 힘든 삶이었다.

삼성물산 등 그야말로 말로만 듣던 디자이너들이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라서, 히트 치는 지갑이나 가방이 구상되고 만들어지고, 그야말로 시장을 싹 아도치는 과정을 지켜볼 일도 있었다. 이것도 좀 지난 일이라서, 현빈 백 만드는 과정을 본 게 거의 마지막이었다.

20대에 우연한 계기로 텍스타일 관련된 일을 하다보니까, 우연하게도 패션 디자인, 모델, 패션쇼, 이런 게 너무 먼 거리의 일이 아닌 삶을 살게 되었다.

몇 년째 입고 다니는 후드티도 봉제 관련된 노동조합에서 선물로 받은 것. We are not the machine.. 그렇게 쓰여 있다.

뭐든, 난 그렇게 뭔가 만드는 사람들하고 있을 때 편하고 재밌지, 아파트 사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사는 사람들하고 있을 때에는 재미 하나도 없다.

가끔 패션에 대한 책 제대로 한 번 써보자는 제안을 받기는 하는데, 이게 손 놓은지 너무 오래 되서.. 아주 오래 전 일이지만 아르데꼬 다니던 친구들 다시 만나보고 싶기는 하다. 그 때 참 재밌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파트나 부동산에 인생을 걸고 목숨을 걸고 뛰어다니는 것, 인생을 낭비하는 길이다. 삶이라는 게, 그렇게 시간이 길지가 않다.

앙드레 김은 두 번 만났었다. 앙드레 김 얘기 한 번 해보자는 제안을 받은 것도 벌써 2년 전이다. 한 번은 해보고 싶은 일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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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부터 류이치 사카모토에 대해서 계속해서 생각 중이다. 진짜로 멋있다. 살면서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나도 이제 50. 내 삶도 누군가 걸었던 삶을 따라 걷는 삶은 아니다. 별 볼 일 없더라도, 나는 내 삶을 살고 싶다.

나이 먹으면, 류이치 사카모토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를 엄청 좋아했었다. 그러나 나이 먹으면 그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

나는 영원한 소년처럼 노년을 보내고 싶지는 않다. 성숙하고, 그 성숙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는 말년을 보내고 싶다. 나는 나이먹지 않는다, 그런 이상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기회가 닿으면 류이치 사카모토에 대한 평전을 쓰거나, 그의 인터뷰집을 내거나,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 오늘 들었다. 내가 얼마나 잘 나고, 얼마나 깊이가 있고, 얼마나 천재적인가.. 그런 건 별로 재미 없는 얘기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그런 걸 보이고 싶어서 오늘도 몸부림을 친다. 그렇지만 별로 재밌어보이지는 않는다.

류이치 사카모토처럼 음악을 하고 싶다는 사람은 종종 보는데, 그처럼 늙어가고 싶다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한 것 같다. 나는 그처럼 잘나거나, 대단한 삶을 살지는 못할 것..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그처럼 늙어가는 건,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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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시사인 편집국장 했던 김은남 기자네 집에 애들 다 데리고 놀러갔다. 식구처럼 지내는 집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요즘 시사인에서 책 담당한다고 한다. 사회과학, 이 쟝르가 우리나라에서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한다. 사실 그렇기는 하다. 내 책은 경제로 분류해도 되고, 사회과학으로 분류해도 되는데, 그래도 사회과학자로서의 존심 때문에 사회과학으로 출간한다.

남들 다 트렌드 따라 옮겨가고, 돈 버는 직정으로 넘어가고, 힘 쓰는 자리로 넘어가는.. 그래도 출간 쟝르 하나를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버티다 보면 또 좋은 날이 오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내 삶의 자부심이, 트렌드를 쫓아간 적이 한 번도 없는. 그리고 매 번은 아니라더라도 가끔은 트렌드를 만들기도 하는. 이제 나도 51세,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만 한다. 재미도 있으면 더 좋겠지만, 내가 하는 일이 늘 재밌는 것만은 아니다. 보람은 있다. 보람도 없고, 재미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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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성격이 좀 다르다. 좋아하는 것도 좀 다르고.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돈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돈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나는 뭔가 만드는 일을 좋아한다. 원래 그런 걸 좋아했다. 그리고 만드는 단계 중에서도, 정말 대책 없이 새로운 걸 만든다고 막 고민하는 그 단계를 좋아한다. 그래서 몇 개의 실마리를 잡아서 얼키설키, 소위 뼈다구 만드는 그런 때가 가장 기쁘고 재밌을 때다.

이런 일들은 보통의 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은, 이 뼈다구 다음 단계 혹은 최종 제품을 팔거나, 혹은 자기 도장을 찍는 일을 좋아한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국회의원들은 도장 찍는 순간을 아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 좀 머슥해지거나, 누군가 눈치를 주면 "국회의원은 법이라는 이름으로 일을 하는 것"이라는, 되도 않는 개소리를 한다. 꽤 유명한 국회의원이 이런 말을 했다. "조문 작업을 좀 더 해야겠네요, 다음에 만나실 때에는 그걸 좀 더 하셔서." 옆에서 지켜보다가 얄미워서 진짜 머리 한 번 때려줄 뻔했다. 야, 그건 니가 해야하는 거 아냐? 이게, 그냥 거저 날로 먹을려고 그러네.

물론 안 그런 사람들도 가끔은 있다. 정세균이 바닥부터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누가 해놓은 것에 숟가락 얹는 것을, 체질인지, 성격인지 혹은 또 다른 이유인지,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다. 머슴의 자식이었던 그는, 국회의장이 되었다.

50이 되면서 알았다. 나는 초고 정도가 아니라, 스케치 정도가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얼키설키 뼈다구를 만드는 그 일 자체를 좋아한다는 것.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은, 부자 되기는 어렵다. 영광을 보기도 어렵다. 이런 건 도장 찍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된다. 체질적으로, "내가 다 했어", 이렇게 말해도 불편하지 않는 사람들이 결국 성공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지만 나같이 뼈다구 만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세상이 공평한 것은, 밥은 먹고 살기 때문에 그렇다. 계속 만들면, 밥은 먹고 산다. 물론, 조금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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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다시 만년필을 꺼내 쓰기 시작했고, 오늘은 노트를 샀다. 노트는 많이 있었는데, 아내가 가져다 쓰기 시작했다. 아직 몇 개 남아있기는 할텐데,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결국 새로 샀다.

 

살면서 공부를 내가 언제 했더라? 잠시 생각을 해봤다.

 

중학교 3학년 때 공부를 좀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무슨 평가시험 같은 것을 봤는데, 전국 석차로 28등인가 나왔던 것 같다. 3 때 공부 조금 하고, 다시 공부를 한 건 대학교 2학년 1학기 때였다.

 

사실 난 경제학이 뭔지도 모르고 대학교에 들어갔다. 그냥 점수 맞춰 아무 데나 갔다. 서울대 국문과 정도 갈 생각이었는데, 딱 공부도 그만큼만 했다. 근데 등록금 내줄 아버지랑 식구들이랑 국문학이나 역사학 같은 것은 안 된다고 생지랄들이시다. 정 그럴 거면 육사 가라, 아니면 공사라도. 내가 모아둔 돈도 없고, 세상을 진짜 안이하게 살았다는 작은 속상함 (그 때 술 처먹기 시작한 게 아직까지도 술을..)

 

방법 없어서 그냥 아무 데나 점수 맞춰 갔다. 어차피 재수할 거면 연대 경제학과나 고대 법대 가라고. 내 인생에 마지막으로 아버지 애기를 따른 순간이었다 (그 후로, 아버지 얘기는 들은 적도 없고, 같이 살기도 싫었다. 결국 대학교 3학년 올라가면서 집을 나왔다.)

 

고대는 집에서 너무 멀었다. 세상 끝까지 가는 것 같았다. 서울대 적당한 데 내고 재수할까 싶었는데, 여기도 대충 가기에는 너무 멀었다. 그래서 집에서 제일 가까운 연대에 갔고, 거기서 제일 점수가 높다는 경제학과에 갔다.

 

고등학교 선배가 아주 가난한 사람이 있었다. 공부는 겁나 잘 했다. 나중에 cpa랑 행정고시랑 그런 거 몇 개를 붙었다 (그렇다고 좋은 인생 사는 걸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양반이 서울대 경영학과에 갔다. 그래서 경영학이 뭔지는 좀 알았는데, 경제학이 뭔지는 정말.. 이게 뭐야? 이걸 왜 해? (그래서 지금도 청소년을 위한 경제학 책, 이런 거 부탁 오면 청소년이 무슨 경제학이냐.. 그러고 안 쓴다. 나도 그런 거 안 봤다. 심지어 나는 경제학이 뭐였는지도 몰랐으니까..)

 

대학교 1학년 때는 그냥 술만 마셨다. 그나마도 5월에 교통사고가 나서, 대부분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냈다. 그 때 나에게 공부 좀 하라고 이것저것 챙겨준 누님이 두 분 계셨다. 한 분은 나중에 공부해서 지금은 경기연구원에.. 내가 세상에서 본 사람 중에 제일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누님이다. 내 인성은 물론 경제학의 성격은 거의 다 누님의 인성에서 배운 것 같다. 자주 보지는 않지만 여전히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다. 그리고 그만큼 존경했던 누님이 나중에 대장금의 작가가 된 김영현, 늘 웃었다. 그리고 인상 좀 쓰지 말라고.. 책은 잠깐만 읽고, 술만 마셨다.

 

대학교 1학년 겨울, 삭발을 했다. 술 먹고 일어난 아침,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내 손으로 머리를 밀었다. 뭐 이것저것 속상할 일이 겹쳐서 벌어지기는 했는데, 총체적으로, 이렇게 사는 건 좀 아닌 듯 싶었다. 그리고 강릉으로 갔다. 여인숙에서 하루를 자고, 동해를 따라 무작정 걸었다. 아주 예전의 7번 국도.. 속초까지 걸어가서, 거기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며칠간 우셨다. 삭발을 한 후, 나를 건드리는 사람은 집안에서 아무도 없었다. 나를 키워주신 외할머니 외에는 친척은 아무도 안 만났다. 그리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친척은 아무도 안 만난다. 그렇게 살았다.

 

학교로 돌아와서 학교 매점에서 바인딩 노트를 비롯해서 노트 열 권 정도를 산 것 같다. 그리고 비싼 건 아니지만 만년필 세 자루와 형광펜 두 자루를 샀다. 그리고 어머니한테 책 살 돈 달라고 했다. 그 시절에는 복사본이라서 원서가 그렇게 비싸지는 않았다. 선형대수 등 수학책을 포함해서 원서 교과서 30권 정도를 산 것 같다.

 

그렇게 대학교 2학년 1학기가 시작되었다. 그 때 내 생각은, 경제학과를 계속 다닐지 말지는 잘 모르겠는데, 경제학이 뭔지는 알고나 그만두어야겠다는. 한 학기 다녀보고 경제학 재미 없으면 그만 둘 생각이었다. 그래도 뭔지는 알고나 그만두는 게 맞을 것 같은.

 

그 한 학기가 끝나갈 때쯤 한열이가 죽었다. 그래서 나의 공부도 그걸로 쫑. 다시 술 먹고 놀기 시작했다.

 

대학을 통틀어서 진짜로 공부한 건 그 한 학기였던 것 같다. 나중에 보니까 경제학이 의외로 간단한 거였다. 한 학기가 공부 했는데, 대학원 시험 보는 데 아무 문제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경제학 대학원 시험이라는 게, 전세계적으로, 뻔하다. 심지어 박사 코스웍 때 게임이론 추가적으로 공부한 거, 나중에 미분방정식 공부한 거, 이 정도를 빼면 대학교 2학년 1학기 때 공부한 걸로 박사 졸업할 때까지 특별히 뭐가 더 어려운 거는 없었다. 문과 수준보다는 조금 어려운 수학이 나오기는 하는데, 그거야 하면 되는 거고. 선형대수 보고, 집합론 보고, 토폴로지 조금 더 공부하면, 경제학과 박사 코스웍까지는 약간의 미분방정식 말고는 더 어려운 거는 안 나온다.

 

어떻게 보면 2학년 1학기 때 몇 달 공부하고, 결국 그걸로 박사 코스웍까지는 무난하게. 심지어 나는 박사 과정에 1등으로 들어가서 코스웍 시험까지는 1등이었다. 심지어 처음 유학 가서 치룬 석사 입학 시험과 석사 1학기 시험 몇 개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과목이 1등이었다. (프랑스는 시험 보고 나면 점수를 다 과사무실 앞에 붙여서 공개한다.)

 

자본론은 2학년 2학기 때 도서관에서 읽었다. <국부론>은 유학 가서 읽었는데, 하여간 그 시절 나온 책은 다 읽은 것 같다. 그렇지만 솔직히, 그건 공부라기 보다는 독서에 가까웠다.

 

노트를 다시 산 건, <촌놈들의 제국주의> 준비를 시작하면서 산 것 같다. 지금 쓰는 크로스 아포제 만년필이 그 때 산 거다. 좀 쓰다 잃어버릴 줄 알았는데, 어캐어캐 아직도 내 몸에 붙어있다.

 

<불황 10> 때부터 노트를 안 쓴 것 같다. 큰 애 태어난 시기와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시기가 대충 비슷하다. 하여간 노트고 뭐고, 죽지 못해 사는 시기였던 것 같다. 나도 내가 뭐하는 줄 모르고 대충 산 시기이고. 노트만 안 쓴 게 아니라, 가방도 안 썼다. 방송하면서 가방을 쓰기는 했는데,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았다. 방송할 때 합숙갈 때 외에는 빈손으로 다녔다. 당연히 노트도 쓸 수가 없었고.

 

물론 그 시기에도 노트를 아예 안 쓴 건 아니다. 인터뷰할 때에는 노트를 쓴다. 그리고 라미 만년필을 썼다.

 

<당인리>를 준비하면서 만년필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래도 본격적으로 노트를 쓸 생각은 아니었는데, 보령이라는 도시가 끼어들면서 도저히 내 머리만으로 정리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당인리>2년 정도 준비한 거라서, 기본적인 얼개는 물론이고 자료 준비까지 다 끝났다고 생각을 했다. 요이 땅..

 

그런데 뭔가 잘 안 된다. 전사로 설계해놓은 것을, 동료들은 그걸 뒤에서 흩어서 보여주지 말고 그냥 셋업에서 사용하자는 거다. 고래에?

 

보령이라는 도시에 대한 얘기를 해야 하는데, 보령이라.. 이건 또 뭐지? 에 또, 에 또..

 

2016년 봄, 둘째가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하면서 내가 하던 일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리를 할지, 아내에게 그냥 피박쓰라고 하던지.

 

그 때 애들 다 데리고 아내와 보령의 한화콘도에 며칠 갔다. 그래서 보령에 여행을 간 적이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 때는 내가 머리가 복잡해서, 바닷가 풍경 잠깐 본 거, 재래시장에서 물고기 산 거, 그런 작은 풍경 외에는 기억나는 게 없다.

 

태안과 당진은 좀 안다. 서산도 좀 알고. 그런 데 얘기로 시작할 생각이었는데, 계획이 바뀌면서 보령이 그 자리를 차고 들어왔다.

 

머리가 혼돈스럽다는 표현을 쓴다. 살면서 머리가 혼돈스럽다는 생각을 한 적은 별로 없다. 난 언제나 뭘 해야 할지 알고 있었고, 설령 방향이 크게 바뀌더라도 뭘 준비하거나 아니면 그냥 기다리거나, 어쨌든 뭘 해야 할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설사 뭘 해야할지 모르더라도, “그냥 버틴다혹은 기다린다아니면 움직인다”, 이런 최소한의 원칙이나 기준을 늘 정해놓고 있었다. 머리가 혼돈스러운 경험은 별로 없다.

 

내가 진짜로 혼돈스러웠던 순간, 그건 대학교 1학년 2학기 끝나고 삭발을 하기까지의 그 며칠 간이었다. 유학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며칠 생각해서 간다, 안 간다, 원칙을 정하고 학위 받을 때까지, 지지리 고생은 했지만 혼돈스러운 적은 없었다. 시간강사하던 시절도 그랬다. , 이건 아닌 것 같다, 취직을 해야겠다.. 그래서 제일 먼저 갈 수 있는 곳에 갔다. 물론 괴로운 시간들도 많이 있었다. 그렇지만 혼돈스럽지는 않았다.

 

보령이라는 도시의 이름을 접하고, 잠시 혼돈스러워졌다. 2년 전에 내가 설계를 잘 못 했다는 건데.. 된장. 그래, 나도 이제 50이다. 이제 더 이상 내 머리도 노트 50개쯤은 머리 속에서 동시에 기록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상태가 아니다..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다시 노트를 사러 갔다.

 

평생 노트를 샀다. 아내와 결혼을 하게 된 것도, 모닝 글로리를 가지고 썼던 짧은 꽁트였다. 이화여고 얘기를, 이화고녀로 뒤틀어서 모닝 글로리의 창업 스토리를 짧게 쓴 글 아내에게 주었다. 아내는 그 때 나가 천재인 줄 잘못 알았던.. (지내보니까 그런 건 아니라는 걸 절절하게 알게 된. 그 정도가 아니라, 이런 병신이 세상 천지에 또 어딨냐 싶은.. 아내도 살아야겠다, 일단 돈부터 몰수!)

 

그래도 노트를 사는 순간이면, 삭발하고 대학교 매점에서 노트를 고르던 그 열아홉 살의 그 순간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난 그 때 경제학이 뭔지도 몰랐고, 이걸로 평생을 살아갈지도 몰랐다. 마르크스, 아담 스미스, 존 스튜어트 밀,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살아가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멀고 먼 길을 돌아서, 다시 노트 앞에 선다. 새로 산 노트 앞에 맨 처음 쓸 글자는 보령이다.

 

그리고 맨 처음 생각나는 장면은, 박경리 선생이다. 이 양반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원주 사람들 잔디밭에 모아 놓고 대화 비슷한 강연을 한 게 방송으로 남아있다. 겁나게 재밌고, 느껴지는 것도 많은 방송이다. 토지 문학관에 가서 좀 지내도 된다고 했는데, 나는 회의만 하러 갔다.

 

일산에서 인공폭포를 지나 광화문까지 오는 버스 안에서 벌어진 얘기는,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히다. 얘기는 통영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그 통영 얘기는 좀 실망이었다. 통영을 러시아 대문호들 얘기를 섞어서 문장과 문체에 대한 얘기를 하시는데, 그 얘기를 저렇게 어렵게 밖에 못하실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죽기 전에 혹시라도 사람들에게 내 얘기를 해야 한다면 저렇게 어렵게 얘기하지 말아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리고 어렵지 말고.

 

노트를 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프지 말고, 어렵지 말고..

 

초등학교 3학년이면 알아먹을 수 있는 얘기를 하고 싶다. 난 내가 얼마나 많이 알고, 얼마나 복잡한 것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어렵지 말고, 그건 내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그래서 다시 노트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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