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좋은 문장, 나쁜 문장, 그렇게 구분하기를 많이 했었다. 그리고 나쁜 문장은, 그냥 보기가 싫어졌었다. 나도 나이를 먹었다. 이제는 모든 문장에, 다 각각의 미덕이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싫거나 보고 싶지 않은 문장이라도 어떤 미덕을 가지고 있을지 찾아보기 시작한다. 쓰고 싶지 않은 문장을 억지로 쓰는 사람은 없다. 어떤 한 사람이 자리에 앉아 글을 쓰게 되는 과정까지, 아무런 이유가 없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 이유가 미덕이 된다 (책을 읽는 속도가 요즘 늦어진 이유를 나는 이렇게 변명으로. 그냥 내용만 전달받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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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살던 집에서. 이 시절에는 모든 것이 드라마틱했다. 숨소리마저 파란만장했다. 딱 6년 전의 일이다. 나도, 저 오른 쪽에서 젖을 빨던 아기 고양이 강북도, 이제는 저 시절로 돌아가지 못한다...) 

 

1.

얼마 전부터 어려운 것을 쉽게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쉬운 것을 어렵게 하는 게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책에 관해서는 그렇다.

 

영화에는 13579라는 표현이 있다. 일삼오칠구, 말 그대로 순서대로 나가는 걸 얘기한다. 전통적 방식으로 앞뒤 맞추고, 적절하게 구조를 맞추는 것을 이렇게 부른다. 그리고 이렇게 만든 영화가 끝까지 가면 웰메이드라는 소리를 듣는다. 어지간히 맞출 것은 다 맞춰어 놔서 왠만큼은 한다. 그렇지만 새로운 것은 없다. 당연히 실험적인 것도 없거나 극소로 등장한다. 왠만하기는 한데, 강렬하지는 않다.

 

책이 그렇다. 이것도 일종의 13579가 있어서, 적당한 형식과 양식을 갖추게 된다. 그리고 자꾸 하다 보면 이런 게 익숙한 양식이 된다. 익숙한 게 나쁜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의 효율성과 전달력을 가지니까 그게 일종의 양식화가 된 것이다.

 

어려운 것을 쉽게 하기, 익숙한 양식에 집어넣고 앞뒤를 맞추면 책 한 권이 된다. 그 익숙한 양식에 사람들이 처음 생각했을 것 혹은 처음 제기하는 문제, 그런 어려운 얘기를 집어넣는 것이 어느덧 내가 책을 쓰는 방식이 되었다.

 

어느덧 13579가 되어버린 내 모습.

 

13579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글을 쓰거나 뭔가 만드는 재미는 없다.

 

어느 순간부터, 이게 일종의 직업처럼 되어가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특히 그렇다. 조금만 돈 안될 것 같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은 주제는 그냥 내팽겨쳐져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일본은 촘촘한 나라라서, 아무도 손을 대지 않는 주제가 그리 많지는 않다. 뭔가를 발견했을 때, 이미 누군가가 한 평생 그걸 추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한국은 일본과는 달리, 아주 펑퍼짐한 나라다. 아주 좁은 구멍 몇 개에 모두가 몰려 있고, 그걸 조금만 벗어나면 아무도 없는 곳이 많다. 형편무인지경, 형편이 없는 곳이라서 무인일 가능성이. 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그 주제도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경제적으로 무가치할지 몰라도,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경제적으로 무가치하다는 것은, 인기가 없거나 연구에 돈을 댈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아무도 손 대지 않은 주제들이 우리나라에는 거의 무긍무진이라고 할 정도로 많다. 내가 이제 나이 50이다. 내가 잘 움직여야 봐야 10, 엄청나게 부지런해야 15년 움직일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5년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저자로서 책을 쓰는 시간이 5년이든, 10년이든, 어쨌든 그 길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젠 나도 슬슬 내가 쓰던 것들을 마무리해야 하는 시점이 보이기 시작하고,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을 정리할 시간이 오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나이가 지금이다.

 

13579 방식으로, 펜 내려놓는 순간까지 책을 계속 쓴다고 해서, 나아질 게 뭐가 있느냐, 이런 질문을 나도 나에게 던져보게 된다. 몇 년 전부터, 내가 몇 권의 책을 냈는지도 세어보지 않게 되었다. 나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한 권 한 권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책을 낸다는 것이 나에게 가슴 찡한 기억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통으로 본 그 시간들이 절절한 사연으로 남지도 않는다.

 

굉장히 기능적이고 기계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이준익 감독이 가끔 나에게 라이팅 머신이라고 한다. 큰 의미를 담고 하는 얘기는 아니지만, 잘 생각해보면 욕이다.

 

2.

어려운 것을 쉽게 하는 것은, 가장 효율적인 방식에 관한 얘기다. 그렇지만 요즘 내 고민은, 어떻게 하면 쉬운 것을 어렵게 할 것인가, 양식 실험을 포함해서 조금 더 전위적이거나 실험적인 시도들을 하는 것, 왜 나는 이런 것을 피하는가, 이런 거다. 13579를 깨고,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들을 담아내는 것, 이런 걸 더 해보고 싶다. 물론 힘들다.

 

아이 둘 보면서 뭔가 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 무작정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방식을 쓰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그냥 하던 대로 하고 싶지도 않다. ‘직장 민주주의라는 질문이 딱 이 양식 실험 한 가운데에 있다. 개념 자체가 쉬운 개념은 아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개념도 아니다. 딱딱하다. 그리고 이 얘기를 듣기 전에는 전혀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가 막상 그 얘기를 들으면 마치 아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주는 개념이다. 정의? 당연히 우리 맥락에 맞게 정의되어 있지 않은 개념이다. 그리고 책으로 진지하게 다루는 것도 처음이다.

 

이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양식 실험을 해볼 수 있을까? 오매나야, 하여간 그런 고민 중이다.

 

답은 아직 모른다. 모색해볼 수 있는 시간이 한 달 정도 남아있다. , 나도 몸부림을 치는 중이다

 

(카페에 두 개의 글을 썼다...)

 

http://cafe.daum.net/workdemo/iPgv/17

 

http://cafe.daum.net/workdemo/iPgv/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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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테의 신곡, 참 여러번 시도를 했는데, 아직까지도 정독을 못했다.)

 

1.

나도 가끔 나를 돌아다 본다. 내가 생각하는 내 삶의 가장 큰 특징은 성질 더러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게으르고 성질 더럽고, 나는 원래 이렇게 태어난 것 같다. 하루 종일 놀아도 하나도 안 불안하고, 한 달을 놀아도 안 불안하다. 1년을 놀아도? 더 좋지, 불안해 할 성격이 아니다. 그래서 아내가 제일 큰 불만이다. “니 방이라도 좀 치워라.”

 

영화 <전우치>에 세 신선이 아주 재밌는 대사들을 많이 한다.

 

일을 좋게 좋게, .”

 

화담이 자신이 요괴가 아닌 걸 보이겠다고 손가락에 칼로 상처를 내니까, 신선인 김상호가 한 대사였다. 영화 전개와는 크게 상관 없는 대사이기는 한데, 이 대사가 내 가슴에 깊이 남았다. 일을 좋게 좋게 쫌, 이게 내가 제일 못하는 일이다. 남들 다 넘어가는 일인데 이게 왜 그래, 꼭 그렇게 혼자 딴지 놓고 어깃장 놓는 똘아이들이 있다. 내가 바로 그 똘아이다. 그리고 그 똘아이들 다 모아놓고 그 중의 1등을 꼽으라면 내가 꼽힐지도 모른다. 하여간 일을 좋게 마무리하는 것, 이게 내가 제일 못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기원에는, 어쩌면 천성적으로 타고 태어났을지도 모르는 아주 더러운 성질이 자리잡고 있다. 하여간 뭔가 이상한 것은 그냥 두고 보지를 못한다.

 

2.

성질은 더러운데, 그렇다고 바로 문제를 고치자고 맨 앞에 나서서 솔선수범하는 그런 용감한 반장형 스타일이냐, 이건 또 아니다. <15소년 표류기>에 결국 리더가 되는 브리앙이 나온다. 매사에 반듯하고 용기도 있다. , 성질은 더러운데 거기에 걸맞는 용기는 없다. 뭔가 아닌데, 그렇다고 즉각적으로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고, 이 문제를 풉시다, 이렇게는 또 잘 못했다.

 

그 불균형 사이를 채워 넣은 것이 알코올이었다. 하여간 죽어라고 마셨다. 그리고 나중에는 마실 핑계를 만들기 위해서 또 술을 마셨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급사하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정말로, 죽을 만큼 마셨다.

 

공직을 그만두기로 마음을 먹은 순간이 실제로 사직서를 내기 한참 전이다. 그 시절에는 아직 주5일제가 아니라서 토요일 오전에도 출근을 했다. 기분이 너무 안 좋았다. 그래서 출근하고 커피 한 잔 마시고 상사한테 기분이 불편해서 일찍 좀 들어가보겠다고 했다. , 별 얘기는 없었다.

 

오전 11시에 집에 와서 페트병으로 소주 두 개를 사다 놓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진짜로 죽어라고 술만 마셨다. 너무 빨리 마시고 급하게 마셔서, 중간에 쓰러져서 잤다. 해질 무렵에 깬 것 같다. 또 마셨다. 그렇게 자고 일어나서 또 마시기를 몇 번을 한 것 같다. 다음 날 좀 늦게 일어났다. 아이고, 이제는 술은 더 못 먹을 것 같았다.

 

주섬주섬 좀 씻고, 마침 책꽂이에서 보였던 <단테의 신곡>을 들고 시내로 나섰다. 경북궁 앞 벤치에서 신곡을 읽었는데, 글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한 시간 정도는 책 보는 척하면서 앉아 있었던 것 같다.

 

그 날, 나는 내가 살던 삶을 정리하고 책을 쓰면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 같다. 그 시절에 여러 사건들이 있었는데, 가장 큰 것은 큰 페트병 하나 보다는 많은 소주를 마신 날이었다. 그 때 내 삶이 나빴던 것은 아니다. 최소한 외형적으로는, 근사했다.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3급 부장에서 2급 부장으로 승진을 기다리고 있었고, 장관 표창 받은지 얼마 안되어서 조그만 부서 새로 생기면 본부장으로 발령이 날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UN에서는 정책 분과 의장으로 자리를 잡았고, 선거에서 아시아 대표로 뽑혀서 이사직도 겸하고 있었다. 외형으로는 지금보다는 훨씬 더 폼나는 상황이었다. 그런 데도 만족을 못해? 만족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내 삶을 살고 있지 않았다. 겉멋에 빠져서 자기가 누군지도 잊어버리고 그날그날의 즐거움에 만끽해 있는 꼭두가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도 그러고 바로 뭔가 행동을 했느냐? 솔직히 좀 두려웠다. 몇 달을 더 밍기적거렸다. 그리고 그만두었다. 독일 본에 혼자 출장 갈 일이 생겼다. 베토벤 하우스에 갔었다. 몇 번이나 갔던 곳인데, 거기에서 마음을 먹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 일련의 시간들이 실제로 내가 책을 쓰기 위해서 에너지를 모으기 시작한 첫 원동력이 생겨나는 시간들이었다. 착하고 참하게 살다 보니까 뭔가 세상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해야할 것이 생각나서? 그런 사람이 있을 수는 있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경우는 아니다. 너무 일찍 상층부 혹은 권력의 이상한 모습을 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것은 나이를 먹고 좀 천천히 자신이 숙성된 다음에 봐야 좋은 것인데, 30대 초에 너무 많이, 너무 깊이 봐 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걸 자신의 기회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대개 성격 좋은 사람들이다. 잘 놀고, 활발하고, 실속있고.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 많이 있다. 나는 태생이 성격이 더럽다. 그걸 못 참았다. 그리고 그 옆에서 아양 떨고, 알짱거리는 내 자신을 못 참았다. 배신하고, 또 배신하고, 그리고 다시 배신당하고, 서로 그러면서도 국가라는 틀 내에서 거대한 친구가 되는 과정을 나는 견디지 못했다.

 

그걸 견뎠으면? 그래서 못본 척 참고 알랑방구의 시간을 몇 년 더 보냈으면?

 

페트병으로 소주를 마시는 순간이 몇 년 뒤로 갔을지는 모른다. 독일 본이 아니라 일본 히로시마 같은 곳에서 결심을 했을지도 모른다. 결국에는 같은 일이 벌어졌을 것 같다. 그건 내가 공부를 해서 그런 건 아니다. 나보다 공부 더 많이, 더 길게 한 사람들도 잘 참는다. 내가 특별히 더 정의감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나보다 더 정의감 투철하고, 더 열심히 싸웠던 사람들도 은근 잘 참는 것 많이 보았다.

 

순전히, 내 성질이 더러워서 그렇다. 나는 그걸 참고 있는 그 나를 참을 수가 없었다.

 

만약 내가 그걸 잘 참았다면?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렇다. 아마 나는 내 나이까지도 살지 못했을 것 같다. 아내와 결혼하지도 못했을 것 같고, 지금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있을 것 같지도 않다. 아마 그 전에 술 처먹다고 죽었을 것 같다.

 

성질 더러운 것, 그 성질은 죽일 수가 없다. 그게 되면 내가 벌써 해탈하고 성불했을 것 같다. 그 성질은 안 죽는다. 책은 내 성질과 싸우지 않고, 혼자 하던 싸움을 계속해서 하는 타협점 같은 것이었다. 책은 아무리 성질이 더러워도 고분고분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성질 나는 대로 지랄발광을 해도, 그런다고 책이 되지는 않는다.

 

책은, 내가 가진 더러운 성질을 극한으로 폭발시켜도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 거대한 대양 같은 것이다. 더러운 성질로 시작했던, 하늘이 준 특출한 머리로 시작했든 아니면 정말 인간의 극한에 달한 성실함으로 시작했든, 책은 대양과 같다. 그 출발점에 숫가락으로 물을 보태든 덜든, 아무런 미동도 벌어지지 않는다.

 

나의 습작은 그렇게 사직서를 내고 나서야 시작되었다. 그리고 1년간 습작을 하고 나서, 내 습작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약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새로 습작을 시작했다. 그때쯤, 아내와 결혼했다.

 

지식이나 기교 혹은 성실함으로 책을 몇 년간 쓸 수는 있다. 그러나 길게 책을 쓰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형태는 달라도 나름 한 성질들 하신다는 것이다. 문인들이나 작가들 모이는 술 자리에 잘 안 간다. 성질과 성질이 만나서 극한을 형성하는 것, 이제는 안 보고 싶다. 아무 것도 아닌 얘기 한 마디가 큰 전쟁이 되는 것, 그게 성질과 성질이 만나는 것이다. 인격과 인격의 만남, 이런 건 아니다.

 

지금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본다. 내 특징은 무엇인가? 성질 더럽다는 점이다. 남들 다 좋다고 하는 박원순의 광화문 광장 개편안에 혼자서 이거 아니다고 신문에 글을 썼다. 모두가 좋다고 하는 일에 나 혼자 이거 아니다, 거의 1년에 몇 번씩 벌어지던 일이다. 성질, 죽지 않는다. 사람들과의 불화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할 뿐, 성질 그 자체는 죽지 않는다. 50이 되었는데도 내 안에서 펄펄 살아 날뛴다. 평생을 이렇게 살았는데, 지금 와서 죽을까? 그냥, 불치의 병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처럼, 그걸 가지고 최소한의 불화로 살아갈 뿐이다.

 

, 성질 더러운 사람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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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로서의 내 입장이 크게 한 번 바뀌는 순간이 있었다. 그 이후 나온 첫 책이 바로 사회적 경제 책이다. 아마 내 인생 후반기를 시작한 책이라고 기억할 것 같다...) 

 

1.

흔히들 물들어 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는 얘기를 한다. 정치권에서도 많이 쓰고, 방송계에서도 많이 쓴다. 인기 있을 때 뭘 많이 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30대에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이걸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나에게 많은 사람들이 해준 말도 이 말이다. “물들어 올 때 배 노 젓기”, 나도 그런 인기는 처음이라서 뭘 잘 몰았다.

 

이제 50이 되었다. 지난 날을 되돌아 보면서 반성을 하는 중이다. 앞으로 살아야 할 날이 또 지금만큼 있다고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반성을 하고 내가 잘못한 것들을 다시 잡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제일 잘못한 것 딱 하나를 꼽으면 물들어 올 때 노 젓기’, 이게 책의 세계에서는 말도 안되는 얘기라는 것을 내가 몰랐던 점이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인터뷰를 거의 안 하는 작가였다. 말년에 워싱턴 타임즈가, 하여간 되게 유명한 매체랑 인터뷰를 한 번 했나 보다. 아주 오래되고 넓은 스타들의 넥타이를 맸다. 나는 아이작 아시모프가 넥타이를 맸다는 것만으로도 놀랐다. 하여간 이 낣은 넥타이를 보고 인터뷰를 하러 간 젊은 기자가 놀렸나 보다. 가만히 있을 아이작 아시모프가 아니다.

 

만약 내가 멋진 넥타이를 매고 살았다면 지금의 아이작 아시모프는 없었을 겁니다.”

 

바로 한 방 날렸다. 그런 얘기를 나도 알고는 있었는데, 막상 그런 순간이 오자, 뭘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몰랐다. 기자들이 해주던 조언이 있었다. 방송국에서 해주는 조언들도 있었다. 나쁜 얘기는 아니다. 그리고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애당초 들을 필요가 없는 얘기였다. 그냥 나는 내 길을 가면 되는 거였다. 그렇게 못했다.

 

나와 같은 길을 걷는, 내 앞의 사레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보고 듣고 혹은 모방할 모델이 없었다. 대개 내 앞에 있던 사람들은 열심히 책을 쓰고 기회가 되면 대학에 자리를 잡았다. 그게 마지막 목표였던 것 같다. 대학에 갈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 40대 이후로는 내가 안 갔다. 정확히 말하면, 아내가 말렸다.

 

니 성격에, 니가 총장이라 싸워 안 싸워?”

 

물론 싸우겠지.”

 

그럼 니가 빽이 있어 뭐가 있어, 짤려 안 짤려?”

 

짤리겠지,”

 

그러니 얌전히 살아, 괜히 헛바람 넣는 교수들하고 술이나 처먹으러 돌아 댕기지 말고.”

 

그래서 40대가 되었을 때, 나는 교수는 안 하기로 애저녁에 마음을 먹었다. 동경대 등 외국에서는 연구직 제안이 건너건너 오기는 했는데, 그것도 귀찮아서 안하기로 했다. 그렇게 삶을 한가하게 만들었는데, 언론과 방송에 너무 자주 나가게 되었다. 내가 왜 한가해졌는지, 순간 까먹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 때는 이명박과 박근혜, 어두운 시기였다. 어떻게든지 채널이 열리거나 창구가 열리면, 누구든지 나가서 할 얘기를 해야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변명이다. 결과적으로 내 삶이 파국으로 가게 되었다.

 

2.

내가 나를 진단해보면, 제일 큰 오류는 영점 조준이 틀렸다는 것이다. 사소한 차이지만 나에게는 치명적 오류를 만들어냈다. 책을 누구를 위해서 쓰는가? 나는 시민과 10대들을 위해서 쓴다고 생각한다. 시민이 뭐야? 그냥 우리가 시민운동이라고 말할 때 그 시민이다. TV는 시청자를 보고 얘기하는 거고, 라디오는 청취자를 보고 얘기하는 거다. 어차피 같은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약간씩 다르다. 이런 차이를 나는 잘 몰랐다. 어차피 그게 그거 아냐? 다 국민 아냐?

 

나는 국민을 위해서 책을 쓰지는 않는다. 그런 국가주의의 신봉자는 아니다. 꼭 내 책을 사지는 않더라도 읽기로 마음을 먹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쓰는 것과 불특정 다수를 염두에 두는 것은 약간의 뉘앙스 차이가 있다. 그런 사소한 차이가, 책의 첫머리, 맺음말, 흘러가는 톤, 이런 것에 영향을 미친다.

 

40대의 나는 그런 차이까지는 미세하게 몰랐다. 저자로서의 결정적인 패착은, 팟캐스트 방송이었다. 방송 후반기를 제외하면 기본 기획을 내가 했었다. 책의 독자와 팟캐스트 청취자는 엄밀히 얘기하면 약간은 다른 사람인데, 방송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까, 내 시선이 흔들리게 되었다. 내가 누구를 위해서 말을 하는가? 듣는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과 읽는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점이 있다. 나는 그런 걸 잘 구분하지 못했다.

 

결국에는 망했다. 책이 점점 더 기능적으로 바뀌는 것 같았고, 전에 했던 방식들에 자꾸 의존하게 되었다. 일단은 내가 재미가 없어져서 책을 쓰는 것의 의미를 점점 더 읽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책을 그만 쓸 것인가, 계속 쓸 것인가, 그런 고민을 지난 2년간 했다. 뭐가 문제지, 어디서부터가 잘못 되었지? 꼼꼼하게 나의 많은 것들을 다시 돌아보고, 하나하나 짚어보았다.

 

그래서 나온 진단이, ‘물 들어올 때 노 젓기’, 여기서부터 내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이 들어오거나 말거나, 그냥 내 길을 가야하는 거였다. 인기가 있거나 인기가 없거나, 내가 변하는 것도 아니고, 내 책이 변하는 것도 아니다. 인기를 위해서 책을 쓴 것도 아니고, 돈을 벌기 위해서 책을 쓴 것도 아니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방송을 하다 보면 시청률을 인식하게 되고, 생각이 바뀐다. 신문에도 글을 쓰다 보면 조선일보식 열독률 혹은 클릭수 같은 것을 신경 쓰게 된다. 그런 하나하나의 것들이 나의 영점을 흔들리게 만든 요소들이다. 결국 나도 사람이다. 강철도 아니고, 기계도 아니다.

 

그래서 방송, 기고, 이런 것들을 끊었다. 앞으로는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방식으로 살지는 않으려고 한다. 이 얘기의 일부가 <국가의 서기> 서문에 쓴 두껍게 썰기에 관한 얘기였다. 나는 저자로서,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독자에게 얘기하는 사람이다.

 

저자로서 내가 발전하지 못하고, 지체되고, 성숙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지난 2년간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랬더니, 진단은 의외로 간단했다. 내가 누구에게 얘기하고 있는 것인가, 이게 흔들린 거였다.

 

간단한 원칙이다. 신문에 글 쓰려고 책 쓴 거 아니고, 방송에 나가려고 책 쓴 거 아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다. 책을 들어 읽으려고 한 사람들, 그들은 한국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대중인 독자들이다. 나는 독자들에 대한 감사와 의미를 책 데뷔한지 10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흔히 배우나 연예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다. 책을 골라서 집어들고 독서한다는 행위의 거룩함에 대해서, 정말 나도 잘 몰랐다. 얼마나 고급스러운 사람들 앞에 내가 선 것인가, 그렇게 생각을 해야 뭐라도 더 나아가려 하고, 새로운 시도를 겁내지 않고 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을 사줄 것인가, 안 사줄 것인가, 나는 시청률 앞에 선 방송국 PD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게 내가 망한 이유다. 나는 내가 왜 책을 쓰기 시작했는지, 왜 여기에 인생을 걸었는지, 어느 날 잊어버렸다. 그걸 잊지 않기 위해서 지금 이 글을 쓴다.

 

물들어 올 때 노 젓는 거다”,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이제 그런 얘기는 여의도에 가서나 하시라”, 이렇게 얘기해 줄 거다. 책이 물이다. 책이 태풍이다. 노 젓는 것은 언론과 방송이 하는 일이고, 독자들과 함께 그 물을 만들고 물길을 내는 것, 그게 책이다. 정작 책이 물이었고, 사람들이 그 물을 기다린다는 것을 나는 10년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작가가 된다는 것, 그것은 스스로 물이 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노 젓는 사람이 아니다. 물을 만들고 물길을 내는 사람이다. 그 일을 하면서, 나는 바보 같이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게 내가 신문 칼럼과 방송을 끊은 이유다.

 

그리고 다시 돌아보니까 아이작 아시모프 등 유명했던 작가들의 에피소드들이 무슨 얘기였는지, 이제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물 들어 올 때 노 젓는 거, 그거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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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초기 소설에 관한 인터뷰를 보면 한국 독자들에 대한 각별한 감사의 말이 여러 번 나온다. 자신이 전업작가로 살 수 있게 된 건 순전히 한국 독자들 덕분이라는 거다. 그리고 주인공급 캐릭터들에 한국인이 등장한다. 절박함과 절절함의 표현이다.

 

나에게 사석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물어보는 것이 책으로 먹고 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첫 책이 2005년에 나왔으니까 대충 13년 정도 된 것 같다. 그 동안 먹고 살았으니 가능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2년 정도는 당대표 되기 이전부터 문재인을 돕기 위해서 시간과 돈을 썼고, 그 때를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책과 함께 살아온 것 같다. 나나 아내나 돈을 많이 쓰는 편은 아니라서, 아주 넉넉하게 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세 끼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애 둘 키우다 보니, 밥 먹을 때만큼은 우리 집도 중산층처럼 먹는다.

 

내가 처음 데뷔할 때 출판사 md들이 한국에서 처음 등장한 사회과학 전업작가라는 별칭을 붙여주었다. 정말 처음인지는 잘 모른다. 내 앞에 박현채 선생, 정운영 선생, 이런 분들이 계셨다. 이 분들은 딱히 직함이 애매하니까 경제평론가라는 말을 썼다. 나는 평론가라는 말은 정말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경제학자라고 했다. 그 시절에는 다들 대학 교수 이름을 앞에 걸었었다. 정운찬 선생이 나중에 총장 그만두신 다음에 호칭이 애매하니까 경제학자라는 호칭을 썼다. 이제는 그냥 경제학자가 사회적으로 호칭이 되었다. 학자에 가까울 것인가 작가에 가까울 것인가, 가끔 나도 해보는 질문이기는 했다. 지금 와서는 별 의미는 없다.

 

어쨌든 선진국을 비롯해서 많은 나라에서 책 써서 먹고 사는, 소위 전업작가의 숫자는 매우 드물다. 한국에서도 많지 않다고 알고 있다. 흔히 말하는 버는 사람은 벌고, 아닌 사람은 못 버는, 그런 건 아니다. 그 숫자 자체가 워낙 적다. 거의 없고, 아주 일부가 베르베르처럼 전업작가가 되는 데 성공한 정도, 그렇게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사회과학의 경우는, 아직은 나 말고 못봤다. 강준만 선생이 교수를 그만두고 글을 쓰는 경우 같은 건데, 우리나라에도 드물고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글을 쓰기 위해서 교수를 그만둔 사람으로 가장 유명해진 경우는 아이작 아시모프 정도 될 것이다. SF만이 아니라 과학책들도 꽤 썼다. 결국 글을 쓰기 위해서 전업작가가 된 경우다.

 

2.

엉청난 대박을 생각하면서 책을 쓰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하면서 대박을 낸 사람도 가끔은 보았는데, 그걸로 행복해진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으로 10년을 버티기는 불가능하다. 나보다 앞 순위에 있는 사람들은 때때로 등장한다. 그렇지만 오래 버티지를 못한 것 같다. 10년 전에 같이 활동하던 사람들 중에서 아직도 책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버티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냥 기계적으로만 계산을 하면, 1년에 2~3권을 내면 사는 건 가능하다. 그냥 회사 다닌다고 생각하면, 그보다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보고서 쓰거나 분석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고 생각하면 더 편하다. 그 정도는 일해야 구박받지 않고 회사 다닐 듯 싶다.

 

책은 크게 판매 수익과 부가수익으로 나눌 수 있다. 인세와 인세 아닌 것,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하다. 인세는 판매 부수에 따라서 결정된다. 많을 때도 있고 적을 때도 있다. 부가수익이라는 표현이 좀 그렇지만, 어쨌든 책과 관련해서 올릴 수 있는 소득이 존재한다. 인기 개그맨처럼 행사 뛰는 건 아니니까 책과 관련해서 발생하는 기고 등 원고 수입과 강연 수입이 있다. 그리고 드물지만 방송 출연으로 생기는 소득이 있을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10년 넘게 사회과학 전업작가로 버텨온 내 나름의 원칙이 있다. 이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드물지만 성공한 경우니까 참고는 될 것 같다.

 

3.

먼저 방송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나는 시민단체의 현장 싸움을 오래 하면서 새만금이나 골프장, 생태계 보호와 같이 방송에 사회적 이유로 나가야 할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꽤 일찍 방송을 한 경우이기는 한다. 물론 방송 안 느는 대표적인 지진아이기도 하고.

 

처음 시작하는 경우라면 방송 소득은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 좋다. 워낙 작고, 불규칙하다. 그리고 신경이 분산된다. 혹시 자신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대중들에게 더 알리는 것이 책 판매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예외적이고 효과가 있더라도 한시적이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와 같다. 자신이 나가서 다른 사람의 책을 파는 건 도와줄 수 있는데, 자기가 자기 책을 파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그렇게 책을 사지는 않는다. 그리고 시즌제 등 많은 돌발 변수가 있어서 그걸로 삶을 구성하는 것도 쉽지 않다. 10년을 해보고, 나는 방송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나가지 않는다고 원칙을 정했다. 특히 지금, 사람들은 책이 좋으니까 사지 TV에서 얼굴 봤다고 사지 않는다. 그럴 사람은 한국에 한 명도 없다. 방송이 체질이고 카메라나 마이크 앞에 서는 게 좋으면 하는 거지, 책과 관련해서는 방송은 잊는 게 좋다. 자기 책 자기가 팔자고 하면, 흉해 보인다. 그 사람이 공적으로 옳은 일을 할 때 지지하는 것이지, 지지해달라는 말만 듣고 지지할 사람은 없다.

 

새누리당 정권에서는 반대 진영의 방송 출연이 워낙 어려웠다. 그래서 어떻게든 채널이 열리면 무조건 나가라고 주위에서들 권했었다. 나도 그리 내키지 않는 것을 참고 했었다. 그렇지만 이제 정권이 바뀌었다. 선의로 나온다고 생각할 사람 별로 없고, 돈이나 인기를 위해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런 얘기 들어서 좋을 것 같다.

 

방송 다음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칼럼 등 매체 기고다. 내 경우만 놓고 보면, 매체 기고와 책 판매는 통계적으로 무관하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이 글을 보고 사람들이 책을 더 사주지 않을까 생각하는 경우라면, 그런 이유로 쓸 필요는 없다. 대부분의 특a급 소설 작가들이 정기 기고를 하지 않는다. 그게 도움이 되었으면 그들이 했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하고 쓰는 것은 원고료 때문인 경우가 많다. 이건 좀 슬프다. 지난 10년 동안 신문 등 원고료는 거의 오르지 않았고, 어떤 경우는 줄기도 했다. 게다가 보통은 6개월 정도 하고 필진 교체를 한다. 생활비 때문에 기고를 하는 경우, 교체되지 않기 위해서 좀 더 상관들에게 부탁을 해야할 것 같은 유혹을 느낄 것이다. 그런 아쉬운 소리는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신문 등 매체의 칼럼은 정말로 공익적 목적, 무엇인가 꼭 알려야 하는 것 혹은 문화적 다양성을 위해서 새로운 것들을 소개하기 위한 원래의 목적으로 쓰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낫다. 원고료를 놓고 생활비 구성을 꾸리면 나중에 아주 곤란한 상황이 온다. 진짜, 보너스라고 생각하는 것이 낫다. 그리고 많은 경우, 제대로 글을 쓰기 위해서 독서도 하고 취재도 해야 하는데, 결국은 원고비 보다 돈이 더 든다. 안 그러는 경우도 가끔은 있는데, 속에 든 걸 빼먹기만 하거나 맹탕으로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고 있다는 비난을 듣게 된다. 그런 이유로 나는 결국 정기적인 칼럼 기고는 그만두었다. 생활에 크게 도움되지는 않는다.

 

3.

연예인급으로 방송만 할 거 아니라면 방송이나 원고료가 아주 단기적인 급전 해결 이상은 안된다. 그래서 이런 소득을 기본으로 놓고 10년 정도의 생활을 계산하면 진짜 황망한 경우를 당하게 된다. 장기적으로 이러면 안되지만, 아직은 이런 데는 현실과 거리가 좀 있다. 최저임금을 몇 년 동안 올리자고 죽어라고 외친 작가들의 원고료는 최저임금과 무관하게 결정되는 것이 현실이다.

 

강연은 좀 다르다. 1~2권 나왔을 때에는 강연 요청도 별 게 없고, 단가도 아주 약하다. 그렇지만 몇 권이 나오면 판매와는 상관 없이 강연시장에서는 인기 강연자가 될 수 있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요즘은 강연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들이 생겨났다. 이런 데랑 연계되면 충분히 생활을 할 수 있고, 조금만 더 말랑말랑한 얘기를 할 수 있으면 몇 년 바짝 일해서 집도 살 수 있다. 강연만 가지고 집도 사고, 차도 사고, 가능하다. 그리고 열심히 하는 경우는 운전수 딸린 차도 운용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직업이 경제학자다. -방송, -원고료, 이 조합은 경제적으로는 무의미한 조합이고, -강연, 이 조합은 가능만 하다면 어지간한 회사 부장 자리 정도는 던지고 나와도 될 정도로 의미 있는 조합이기는 하다. 물론 지속적으로 좋은 책을 낸다는 전제 하에서 하는 얘기다. 회사 직원 연수, 지자체 공무원 교육 등 수요는 아직도 무한히 많다.

 

여기서부터가 정신 바짝 차릴 대목이다. 내가 강연에 대해서 정한 제일 큰 원칙은, 유료강연은 안 한다는 것이다. 나는 책을 파는데, 내가 하는 강연까지 독자에게 돈을 받는 건 내 양심상 안 맞는다. 일종의 2중 판매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유료 강연은 안한다. 그리고 좀 미안한 얘기지만, 차비도 안 되는 재능기부급 강연도 안한다. 친한 사람들 도와줄 일 있으면 차라리 그냥 해주지, 재능기부, 이렇게는 안한다. 아직 나는 그 정도로 여유가 있지는 않다.

 

시민단체, 고등학교와 대학교, 가능하면 지역단체와 도서관, 이런 데가 우선 순위다. 사회적 경제 책 같은 경우는 특별히 더 알리고 싶은 생각이 많아서, 이런 건 좀 무리해서 강연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렇게는 안 한다. 그러면 내가 돈 욕심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다.

 

강연자 입장에서 보면 강연은 좋은 시장인 것 같은데, 마찬가지로 강연도 비즈니스가 된 상황에서 기획자의 시선이라는 것도 있다. 보통 강연자의 수명을 2년에서 길면 2년 반 정도 본다. 물론 고르바쵸프나 클린턴처럼 영원한 인기 강사도 있는데, 그건 그 사람들이고.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것이 시효성이 2년 정도 될 것이다. 그 정도 되면 인기도 시들해지고, 하는 얘기도 유행하고 안 맞는다. 2년 동안 바짝 벌 것이냐, 장기전으로 갈 것이냐, 사실은 그 선택을 하는 것이다.

 

내가 내린 선택은, 공익적 이유 아니면 강연은 가급적 안 한다

 

강연은 소모성이다. 가진 것을 소모할 것이냐,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 것이냐, 그 중간에서 선택하는 것이 현실이다. 강연이 사회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걸 직업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작가에게 그렇게 좋은 일은 아닐 뿐더러 위험한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나중에 미사리에서 노래 부르기 위해서는 누구나 아는 히트곡이 두 곡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시작할 때 하나, 마무리할 때 하나, 이래야 미사리에서 쇼를 할 수 있다. 히트곡이 하나만 있는 가수는 미사리에도 서기 어렵다. 강연 시장이 그것과 비슷하다.

 

문화시장의 경제 법칙 그대로다. 문화 시장은 본원 시장이 튼튼해야 파생상품도 커진다. 영화로 치면 극장 관객수, 드라마로 치면 본방 시청률, 이런 거다. 책 시장도 마찬가지다. 본원 상품이 튼튼한 것, 이게 가늘지만 오래가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4.

좋은 책을 쓰는 것, 이거야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다. 한국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책을 처음에 쓰면 팔리고 싶은 책을 먼저 쓰고, 안 팔릴 얘기는 나중에 쓰고 싶은 생각이 든다. 출판사에서도 대부분 그렇게 권한다. 잘 팔릴 책 먼저, 안 팔릴 책 나중에, 이렇게 시도한 사람들이 한 권도 못 내거나 한 권 내고 사라져갔다. 첫 책에 빅히트,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좋은 전략은 아니다. 그게 되면 대졸자 절반은 전업작가를 할 것이다. 좋은 책을 쓰는 것도 어렵지만, 잘 파는 건 더 어렵다. 그리고 도서관이라는 게 존재한다. 생각 보다 특수 영역이다. 

책으로 먹고 살기 위해서 넘어야 할 첫 번째 관문은 많이 파는 것이 아니라 양서를 쓰는 것이다. 양서는 도서관에서 사주고 싶어하는 책이다. 도서관의 각종 위원회나 사서들은 책을 고르는 것이 직업이다. 팔기 위해서 쓴 책을 그들은 얄팍하다고 얘기하고, 읽기는 쉽지 않거나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그 도서관에 오는 분들에게 꼭 읽히거나 추천하고 싶은 책을 양서라고 한다. 양서를 쓰는 사람들은 우선적으로 도서관에서 사준다. 물론 그게 엄청난 권수는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책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 넘어야 할 첫 번째 벽이다. 그리고 일단 양서를 썼으면, 그 정도 수준에서의 최소한의 품질 관리를 해야 한다. 순서를 바꾸어서, 팔릴 것 같은 책을 먼저 쓰고,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뒤에 쓰려고 한다면, 도서관 사서들이 보기에는 없는 예산에 먼저 사줘야 할 양서 작가로 보이지 않는다. 일반적인 상품과 책이 다른 결정적 이유다. 보통 상품에는 도서관이 없다.

 

어떤 책이 양서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금방 알 수 있는 얘기다. 사회에 꼭 필요한 얘기, 더 나왔으면 하는 책, 다양성에 기야하는 책, 이런 책들이다. 물론 기준은 좀 보수적이다. 도서관이 원래 좀 보수적이다.

 

인터넷 서점에서는 양서를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쟝르별 구분과는 달리, 도서관에서 책을 사는, 명문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암묵적인 기준이 하나 있다. 팔리는 책을 먼저 써서 일단 생활을 안정시키고, 그 다음에 진짜 얘기를 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소기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을 많이 보았다.

 

이 개념을 이해한 사람들은, 도서관에서 부탁이 오면 정말 시간이 안 맞는 경우 아니면 어지간하면 간다. 책과 도서관, 끊을 수 없는 관계다. 도서관에서 별로 관심이 없는 책을 쓰면서 오래 버티려면 이제는 절대로 일반화될 수 없는 본인만의 기술과 장점이 필요하다. 이론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못 본 것 같다.

 

책을 파는 것과 좋은 책을 쓰는 것, 둘 중의 하나만 고르라면 역시 좋은 책을 쓰는 것이 길게 가는 길이다. 자신의 책을 소개하는 것과 좋은 책을 쓰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중에 고르라고 하면 역시 좋은 책을 쓰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순전히 이론적인 계산이지만, 정말로 좋은 책을 쓰고 운대와 흐름이 잘 맞으면 지속적으로 1억 원 정도의 소득을 인세로 올리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이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도시민 평균 소득 정도를 인세로 올리는 것은, 이 정도는 해볼 수 있는 영역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걸 위해서는 학위나 전공, 그런 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일본 출판시장이 그렇게 움직이는데, 한국도 점점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 2018년 도서 시장, 교수라고 더 사주고, 박사라고 더 사주는 그런 독자는 이제 없다. 점점 더 전문가 타이틀이 책 판매에 오히려 장애가 되는 시장으로 가고 있다. 규모가 줄어들어서 그렇지, 우리의 출판 시장의 흐름이 건전한 방향으로 가고는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남는 고민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것과 독자들이 읽고 싶은 것, 그 두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좁힐 것인가? 그건 모든 작가들에게 영원한 질문일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제 한 가지다. 돈을 벌기 위해서 책을 쓰면 오래 못 갈 뿐더러 정신 건강에 안 좋다. 하고 싶은 얘기를 하기 위해서 책을 쓰면, 한국의 독자들이 최소한의 삶은 유지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렇게 한국을 믿고 한국의 독자들을 믿고 가는 편이 낫다. 정신건강에도 그게 좋을 뿐더러, 현실적으로도 그게 유효하다.

 

책으로 먹고 살 수 있을까? 대학원 정도의 기본 훈련과 몇 가지의 간단한 원칙만 이해하면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것만 되면, 인생을 조금은 더 즐겁게 그리고 의미있게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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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좀 힘든 일은 지나가서 그런지, 이제는 글을 편안하게 쓰고 싶지가 않다. 물론 내 입장에서 쓰기에 불편한 글에 관한 생각이다. 내가 힘들면 힘들수록, 읽는 사람은 좀 더 편안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굼뱅이도 기는 재주가 생긴다고, 쓴 책이 대충 스무 권 정도 넘어가면 나름대로 틀을 잡고 정형화시키는 요령이 생긴다. 이걸 틀이라고 얘기하면, 그냥 공장 같은 게 된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오븐에 빵을 굽는 것과 제빵 믹스를 사다가 제빵기에 굽는 것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제빵기에 빵을 구우면, 반은 인스턴트다. 그리고 많이 하다 보면 나름 요령이 생겨서, 쉽게도 하지만 맛도 최소한은 넘어간다. 그렇지만 재미는 없다. 개성도 없다.

어지간한 주제도, 이미 성공했던 틀 몇 개 중에 하나를 골라서 집어넣고 대충 돌리면 글 비슷한 게 나온다. 판매로만 생각하면, 그 편이 더 안전하다. 과거의 책들을 보면, 틀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친 것들이 신통치 않다. 그리고 좀 더 안전한 방식으로 간 것들이 기본 이상은 한다.

주제와 양식이라는 두 가지 눈으로 보면, 위험한 주제를 선택하는 방식과, 더 새로운 양식을 선택하는 방식의 결합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문체도 중간에 개입을 한다. 톤앤매너라고 부르는 표현 양식을 이끄는 주된 수단 중의 하나가 문체다.

50이 넘으면서, 나는 이제는 쉬운 주제는 선택하지 않는다. 그건 할 이유도 없고. <솔로 계급의 경제학> 이후로 내가 선택하는 주제들은 다루기 까다롭거나, 시대에 너무 앞 선 것들이 대부분이다. 아니면 <농업 경제학>처럼 너무 시대에 뒤늦거나. 하여간 사람들이 별로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주제야 그렇다 치더라도, 양식은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까지 내가 사용한 양식이라는 게, 사실 엄청난 것은 없다. 가끔 전위적 시도를 하는데, 출판사랑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고, 결국은 평범한 방식으로 틀을 변형시키고는 만다. 가장 전위적인 것은 여전히 <아픈 아이들의 세대>였다. 그 시절에 내가 앞으로 살아갈 삶이나 쓰고 싶은 얘기들에 대한 설계도를 은유적으로 담아놓았었다. 기자들이, 아주 학을 떼었다. 그 시절의 전위적인 느낌을 아직도 나는 잘 못따라간다. 정확히 얘기하면, 그 때보다 용기가 줄어들었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아니다 싶으면, 그 때는 원고 바로 들고 바로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속으로, 나는 언제나 이렇게 살겠다고 다짐을 했다. 지나간  시절의 얘기다. 그 때는 내가 30대였다. 지금 그렇게 하면, 주변 사람들이 너무 상처 받는다. 나는 그렇게 생각을 안해도,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주변 사람들이 내 눈치를 본다. 좀 아니다 싶어도, 적당히 하고 마는, 그런 타협적인 자세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2.
다음 달부터는 직장 민주주의에 대한 책 작업을 시작힌다. 한겨레 신문사에 부탁을 받고, 한 달 정도 고민을 하다가 결국 하기로 한 주제다. 이론 작업도 좀 더 정리를 해야 하고, 통계도 어떤 식으로 사용할지, 분석 작업은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다. 한 가지만 안다. 예전에 썼던 <조직의 재발견>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어서 쓰는 책이라는 정도. 그래서 이 주제가 나에게 오게 된 것이기도 하고. 그냥 맨땅에 헤딩하는, 그런 방식은 아니다.

지금 주저하는 것은. 스타일에 관한 문제다.

이것도 어지간히 슬픈 얘기고, 눈물 몇 번은 찔끔 나는 주제다. 회사도 좀 그래요, 그런 얘기다. 그리고 좀 잘 해보자, 그렇게 결론을 낼까? 일단 나부터도, 그런 얘기는 많이 하면 할수록 좋겠지만 그걸 굳이 책으로 읽어야 하고, 그렇게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무슨 엄청난 분석을 해서, 아무도 몰랐던 얘기들을 '턱'하고 세상에 내놓을 수 있을까? 분석의 성공으로는 <국가의 사기>를 뛰어넘기 어렵다. 그건, 그렇게 구성된 책이었다.

그래도 왠만하기는 할텐데, 내가 읽고 싶지 않은 책이 될 위험이 높다. 저자로서, 나도 모르는 결과가 분석을 통해서 나오기를 바라고, 서술 과정에서 전혀 생각지 못했던 또 다른 요소들을 발견하거나, 생각지 못했던 결론이 나오기를 바란다. 그게 아니면, 그냥 식빵 믹스 넣고 제빵기에서 빵 만드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그냥 이제는 세보는 것도 귀찮은 출간 목록에 한 줄 더 넣는 일에 불과하다. 그렇게 기록세울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낭비하기에는 내 인생도 아깝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거기서부터 내 고민이 시작된다. 안해본 방식, 더 힘든 방식, 그런 걸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안 그러면, 내가 재미가 없다. 이미 수없이 했던 일을 약간의 변형만 가지고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일을, 내가 왜 해야하느냐? 그렇게 할 거면, 나는 굳이 책을 쓸 이유가 없다.

하여 지금 고민 중인 것은...

직장 민주주의라는 주제로, 팍 깨게 웃기는 구조를 잡을 수 있느냐는 것. <농업경제학>은 나이를 먹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글로 잡기로 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최소한 이 정도에 해당하는 형식이나 양식 실험을 해볼 수 있을까, 그런 게 지금 직장 민주주의라는 주제 앞에서 내가 하는 고민이다.

회사, 그거 겁나게 드럽고 치사한 거야... 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책을 쓰는 것은 미친 짓이다. 자, 우리 같이 손잡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노력해 보..아..요.. 내 나이가 50이다. 이런 말랑말랑하고 무의미한 결론을 내기 위해서 300페이지가 넘는 글을 쓸 이유는 없지 않은가.

웃으면서 읽기에 좀 더 편안한 양식이 없나, 지금 고민 중이다. '사장님 나빠요', 요거 보다는 좀 더 나가야 할 것 같은. 근데, 생소한 작업이라서, 나도 선뜻 뭐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여전히 고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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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시절

책에 대한 단상 2018. 4. 13. 11:14

(나의 습작은 '생태요괴전'보다 더 기괴한 얘기들의 연속이다...)

 

나는 왜 글을 쓸까? 가끔 나에게 물어본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글 쓰는 걸 좋아했다. 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을 처음 쓴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 것 같다. 그 시절에 라디오 듣는 걸 정말 좋아했는데, 라디오 DJ가 말하는 대본 같은 것을 써보기 시작한 게 맨 처음 쓴 글이다. 별 생각 없이 써본 건데, 쓰면서 재밌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백일장 같은 데에서 상을 막 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평생 시간 나면 하는 일이 글 쓰는 일이었다.

 

내 경우는 글을 쓰고 공부를 한 건 아니고, 글을 쓰다가 공부를 하게 된 경우다. 그래서 무슨 할 얘기가 있어서 글을 쓴다, 이건 사실 뻥이고, 글 쓸 거리를 찾아서 공부를 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도 습작을 한다. 그것도 아주 길게 한다. 다른 사람들은 책을 읽고 필사도 하고 그렇게 하는 것 같다. 나는 거꾸로 했다. 책을 읽고, 그런 글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성질이 지랄 맞아서 그런 것 같다. 좀 다른 방식으로 쓰고 싶어했던 것 같다. 진짜 지랄 맞은 성격이다.

 

그리고 어른이 되었다. 이제 진짜로 하고 싶은 얘기들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하여간 내가 이해한 한국 사회는, 겁나게 드럽고 아주 지랄이 끝까지 간 사회다. 나는 그 얘기를 잘 못했다. 얘기해봐야, 너만 그렇게 생각한다거나, 사회부적응자라고 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쓸 얘기가 더 많아졌다. 진짜로 많아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나에게 죽어라고 글 쓰기를 시켰다. 그리고 자기들은 술 마시러 갔다. 나도 빨리 글을 끝내고 술 마시고 싶었다. 그래서 밤을 새서 글 쓰기를 마치고, 진짜로 술마셨다.

 

처음에는 기관장들만 따로 보는 글을 썼는데, 나중에는 장관만 보는 글을 쓰거나, 장관의 글을 대신 써주는 일을 했다. 좀 지나니까 대통령 보고서를 쓰게 되었고, 나중에는 아예 총리가 보는 보고서를 쓰는 게 일이 되었다. DJ를 먼발치 말고 직접 본 일은 없다. 어쨌든 그가 내가 쓴 글을 좋아하신다는 얘기는 건네 들었다. 대통령 보고서는 워낙 여러 사람이 관여하니까 사실 누구 글이라고 할 것도 없다. 나는 동료들하고 초안을 잡았을 뿐이고, 그 중의 일부만 내가 썼다. 한 번은 청와대에서 별 의미도 없는 보고서 하나를 나보러 가지고 오라고 했다. 지가 청와대만 청와대지, 뭘 오라가라해, 툴툴거렸지만 상사들은 군말 말고 가라고 그랬다. 용인에서 청와대까지, 그 날이 안 잊혀지는 게, 주차장이 너무 좁아서 돌아 나오다가 차 긁었다. 그 후로는 청와대 갈 때에는 다시는 차 안 가지고 간다. 겁나 툴툴 거리면ㅅ너 갔는데, 보고서랑 자료 주니까, 담당 과장이 내 얼굴 뻔히 한 번 보더니 두고 가라는 거다. 이런 된장, 지가 청와대면 청와대지, 용인에서 광화문까지 심부름을 시켜, 그냥 메일로 보내준다는데아주 나중에 건네들었다. 담당자가 글 쓴 사람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어했다고. 어쨌든 그 시절의 그 사건이 큰 사건이기는 했다. 그 후로 대통령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데, 탄성치 개념을 알고 싶어하고 그걸 이해한 유일한 사람은 DJ였을 것 같다.

 

그럼 그 시절에 내가 글을 잘 썼느냐? 나중에 그 시절처럼 글을 쓰지 않기 위해서 몇 년을 고생을 했다. 이런 된장, 뭘 좀 써 보려니까 영 보고서체 아니면 찍땡체다. 뭐야 이거? ‘오염된 글이라는 표현을 쓰면, 그 시절에 내 글이 오염되어 있었다. 뭔 소리인지는 알겠는데, 그야말로 뭔소리인지만 알겠지, 아무 감흥이 없는 글들을 쓰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스케치를 하는데, 내 글은 스케치로 끝이 난다. 공식 보고서 치고는 그래도 여운이 있는 글이기는 한데, 진짜 바짝 메말라 습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글을 쓰고 있었다.

 

2003년 여름부터 새로 습작을 시작했다. 워낙 무식하게 살아온 인생이라서, 습작도 단순 무식했다. 하루에 A4 10. 딱 그 기준에 맞추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의 필명이 비나리였다. 주제를 바꾸어가면서 A4 3~4장 정도 되는 글을 매일 발표했고, 그것 말고도 발표 안 하는 글을 1~2개 정도 썼다. 그 습작 기간이 그 후 10년 정도 되는 책들의 원형들이 만들어지는 시기였다. 그 글들을 그냥 자기들이 실을 수 있게 해달라고 브레이크 뉴스와 대자보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 사람들은, 나보다 더 가난했다. 오후 3시에 만났는데, 아무래도 소주라도 한 잔 사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전골을 시켰던 것 같고, 나는 소주 한 병 정도 마셨던 것 같다. 같이 온 사람 중에 유달리 기뻐하며 소주 두 병을 마신 청년이 있었으니, 그가 변희재였다. , 사람 인생 모른다. 그가 태극기 앞에 저렇게 서있을 줄, 나는 진짜 몰랐다.

 

그 습작기가 1년 정도 간 것 같다. 물론 그 뒤에도 습작 연습은 계속 했고, 아직도 하는 중이다. 2004년 여름에는 책 계약을 하고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5년에 두 권의 책을 냈다. 블로그는 책을 내고 나서 열었다. 지금도 나는 습작을 계속 한다. 아직도 나는 어딘가 있는 것, 어쩐지 본 것 같은 글을 쓰고 싶지 않다. 뭐라도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같은 것을 계속해서는 내가 견딜 수가 없다.

 

그 시절의 몸부림이 극한까지 간 책이 <생태요괴전>이다. 생태경제학을 요괴와 흡혈귀 은유를 가지고 쓴 책은 없다. 내가 아는 것을 다 녹여낸다는 마음으로 썼다. 좀 팔렸다. 그렇지만 이 책이 그 후 10년의 내 삶을 결정하는 책이 될 줄은, 그 때는 몰랐다. 이 책을 본 사람들이, 쟤는 영화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래서 그 후에 시나리오를 정말로 직업으로 쓰거나 다듬을 수 있게 되었다. 그와는 별도로 영화제에도 초청받아서 가게 되었다. 나중에 내 삶을 돌아보면, 결국 내가 먹고 사는데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해준 책으로 이 책이 기억날 것 같다. 지금까지는 그렇다. 적절한 시기가 되면 <88만원 세대>로 받은 인세는 청년단체나 시민단체에 기부할 생각이다. 그 생각은 진작에 했는데, 아이들이 연거푸 태어나면서 아직도 실행을그래도 꼭 할 거다. 그것도 내 양심이다.

 

지금 돌아보면, 내 삶의 대부분은 혼자 앉아서 몸부림을 치면서 만들었던 습작들에 있다. 내 습작들은 기괴한 상상, 끔찍한 환상 혹은 전혀 구조화되지 않은 단편, 그런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도 나는 몸부림을 친다. 같은 것을 또 하거나, 익숙한 것을 다시 하지 않는 것, 그게 내 습작의 원칙이다.

 

내년에 낼 책 중에 농업경제학이 있다. 생태요괴전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시작을 했는데, 아직도 손도 못 대고 있는. 이제 겨우 한 것은, 일정을 잡은 것이다.

 

지금까지 해놓은 것은, 이건 편지글로 해야겠다는 정도다. 아빠와 아들의 대화는 이미 쟝 지글러가 <세상의 절반은 왜 굶주리는가>에서 했다. 편지글 습작은 꽤 전에 한 적이 있다. 이 때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딸을 설정하고 아빠가 편지보내는 것이었는데, 된장딸은 결국 태어나지 않았다.

 

아직 정확히 아이의 나이를 정하지는 않았는데, 대학교 1학년 정도로 할까 싶다. 내가 사랑하는 둘째가 대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아빠가 농업에 대해서 해주는 편지들, 그런 정도로. 진짜 나도, 몸부림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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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교재로나 읽히는 농업경제학을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을 책으로 바꿀 것인가, 10년도 더 된 나의 해묵은 과제다. 아직도 해법을 못찾고 있다...)

1.

많은 문화 창작은 누가 이것을 볼 것인가, 관객과 관련되어 있다. 당연한 얘기다. 몇 년 전 연극계에서는 아침 10시에 하는 연극 공연을 선보였다. 아침에 출근과 등교 준비를 끝낸 아줌마들을 좀 더 연극계로 끌어들이기 위한 시도였다. 신선했다. 이런 것을 전문 용어로 관객 개발이라고 불렀다. 연극을 보지 않는 사람들이 좀 더 연극을 보러 왔으면 좋겠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객 개발과 같은 문제는 한국의 문화 영역 전반에서 벌어지는 고민이다. 경제적으로 더 어려운 연극이 더 치열했을 뿐이다.

 

책에서도 이 문제가 생겨난다. 사람들이 점점 더 책을 읽지 않으면서 독서 캠페인 같은 얘기들이 많이 나온다. 무의미한 얘기는 아니다. 개별적으로 이 문제에 소극적으로 접근하면 타킷 독자에 대한 마케팅 강화 같은 형식이 된다. 누가 읽을 것인가, 그걸 좁혀서 더 그 독자에 맞추자는 방식이다.

 

이러한 마케팅 접근이 나쁜 것은 아닌데, 나는 그렇게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늘상 이 문제로 출판사와 갈등한다. 연령별, 성별로 읽을 사람을 정하고 거기에 맞추는 시도가 나쁘지는 않지만, 그러면 저자 자신이 얄팍해진다. 나는 여전히 최소한 한 나라 안에서는 보편적이고, 관심만 있으면 누구나 볼 수 있게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꾸 얄팍해지면, 나중에는 쓸 내용 자체가 말라버린다. 그런 점에서는 나는 여전히 고전적이다. 그렇지만 누가 읽을 것인가, 이런 걸 고민하지는 않을 수 없다.

 

2.

<88만원 세대>를 처음 준비할 때, 몇 개 출판사와 얘기가 있었었다. 그 때는 결론을 놓고 이견이 있었다. 출판 쪽 사람들은 이 책이 대학생에 대한 권면과 같은, 이러면 안된다, 그런 기성세대의 관점으로 마무리가 되기를 바랬다. 무슨 엄청난 철학적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에도 대학생은 책을 안 본다는 게 거의 정설이었다. 어차피 책을 살 사람들은 기성세대니까 그 사람들의 관점에서 책을 마무리해야 나머지 내용이라도 사람들이 볼 수 있다는 거다. 대학생들이 책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큰 전제 하에서 생겨난 일이다. 나는 내 양심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도 그렇지만 지금도 독자들이나 국민들을 힐난하거나 욕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그런 얘기를 하기 위해서 지난한 분석 작업을 하거나 원고 작업을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나중에 문제적 요소가 된 바리케이드와 짱돌에 관한 장 하나를 더 추가했다. 원래의 원고는 정책 대안들을 얘기하고 끝나는 형태였다. 출판사 사람들하고 얘기하고, 차라리 내가 원고를 다 버리면 버리지 그렇게는 절대로 안하겠다고 오히려 더 청년들의 사회적 활동 쪽을 추가했다. 그거 보면, 나도 어지간히 똘아이다. 누가 뭐라고 하면 방향을 돌리는 게 아니라, 그 방향으로 더 나가버리는 반항적 성격! 내가 생각해도 나도 참 지랄맞다.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게, 소위 딜리버리 문제라고 하는, 책이 필요한 독자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이 질문과 관련되어 있다. 복지 분야에서 딜리버리 문제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송파 세 모녀 사건 같은 것에 대한 논쟁의 핵심이다. 선별적 복지를 할 때 어떻게 꼭 필요한 사람에게 복지를 배달할 것인가, 이 설계가 쉽지 않다.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받아가는 동안, 꼭 필요한 사람에게는 행정적 절차나 규정 미비 등 여러가지로 배달이 안 되는 일이 벌어진다.

 

일반적으로 한국 출판계에서 주요하게 책 안 읽는 3대 집단은 다음과 같다.

 

1. 대학생

2. 농민

3. 민주당 당원

 

대학생은 원래는 사회과학의 주력 독자였는데, IMF 경제 위기 이후로 책 안 읽는 집단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이 경향성은 점점 더 강화된다. 최근에는 거의 대학생 독서 절벽이라고 할 정도로 안 읽는다. 여기에서부터 청년들의 문제는 물론이고, 전문적 서적의 고사 같은 일들이 시작된다. “대학교 교제 같다”, 이 얘기는 자발적으로는 아무도 안 읽을 것 같다는 표현이다.

 

농민은, 사실 당연한 일이기는 한데, 이게 딜레마다. 농민들이 책을 안 읽으니까 농업에 관한 책은 정말로 큰 맘 먹고 쓰거나, 음식 책처럼 달달하게 가는 수밖에 없다. 농업의 위기 원인 중의 하나가 농민들이 책을 안 읽는 것과 관련되어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농민들에게 책 좀 읽으세요,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민주당 당원은 왜 책을 안 읽을까? 계량적으로 수치를 확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예전의 민주노동당 당원 지금의 정의당 당원들이 민주당 당원 보다는 책을 많이 읽는다는 판단들은 일부 있다. 물론 민주당 당원들도 가끔 응원과 지지의 성격으로 특정 책을 많이 사주기는 하는데, 다양한 층위의 독서와는 좀 차이가 있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당 당원, 이 집단은 책을 가장 많이 읽고, 가장 많이 사는 집단으로 분류된다. 이건 독자 성별 조사 같은 것으로는 잘 안 잡힌다. 최근에는 좀 변했겠지만 한국의 주요 사무실의 부장이나 이사 같은 사람들이 대부분 박근혜 지지하는 보수층인 시절이 있었다. 이들은 자기 돈으로 사는 것 보다는 훨씬 더 많이, 자기 사무실이나 자료실을 통해서 책을 산다. 월간조선류 시장 같은 거라고 보면 된다. 누가 샀는지 정확하게는 집계 못해도 사기는 샀고, 읽기는 읽는. 몇 년 전 출판 분석 많이 하던 사람이 나에게 해준 말이, 내 책도 아마도 보수 쪽에서 더 많이 읽었을 것이라고사실 나도 그렇게 알고 있다. 이건 팬과는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구매 패턴이다. 저놈의 자식이 뭐라고 하는지 좀 보자

 

출판사에서 이런 것은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민주당 당원은 심정적으로는 가까운데 책은 안 보고, 보수는 심정적으로 너무 먼데 그래도 거기는 책을 좀 사보고.

 

프랑스는 사회당 당원들이 정말 책을 많이 본다. 그래서 그 쪽 책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고, 그런 것들이 세계적 빅 히트를 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그런 정치적 성향과 독서가 좀 반대 방향으로 가서, 좀 더 진지하게 주제를 다루고 싶은 민주당 계열 학자들이 결국 펜을 꺾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 같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가설만 있지, 아무도 진짜 이유는 모른다. 어쨌든 민주당 당원들은 팬덤 패턴 분석이 조금 더 정확하지 독자 패턴 분석으로 뭔가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3.

배달 문제는 크게 집단으로 분류해볼 수도 있지만, 좀 더 섬세하게 접근할 수도 있다. , 누군가 불법 다단계에 심하게 빠져 있는 사람들에 대한 본격적인 진단을 한다고 해보자. 이 책이 출간될 수 있을까? 근본적인 딜레마가 발생한다. 다단계 중독인 사람이 과연 책을 읽을 정신이 있을까? 그리고 그런 중독 상황에서 책 좀 본다고 자신의 생각이나 행위가 바뀔까? 여기까지 배달하기가 너무 어렵다. 그래서 경제 다루는 사람들도 다단계 문제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공익적 가치는 충분히 있는데, 배달이 거의 불가능하다. 알고는 있지만 다루기는 쉽지 않다.

 

배달의 문제는 출판사는 물론이고 저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준다. 물론 부정적 영향이다. 주로 뭔가 해야겠다고 결심하는 방향보다는, 뭘 하지 말아야겠다, 뭘 못하겠다, 이런 형태로 나타난다. 책이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특징이 결국 배달, 딜리버리의 문제로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교적 초기에 쓰기로 마음을 먹고도 아직도 미적미적거리고 있는 주제가 농업경제학이다. 이것도 근본적으로는 배달 문제를 넘어서기가 어려워서 그렇다. ‘농업경제학 2019’라는 제목으로, 무조건 내년에는 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배달과 판매 생각하면 안 하는 게 맞는데, 그러면 사람이 얄팍해진다. 다루기 어렵고 팔기 어려운 주제들, 꺼내기 쉽지 않은 문제들을 다루는 편이 그래도 좀 더 오래 가기에는 도움이 된다. 그렇게 하면, 결국에는 실력이 는다.

 

(배달의 문제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유료 독자의 문제라는 것도 있다. 이건 다음 번 주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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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물질

책에 대한 단상 2018. 4. 10. 11:04

 

(내가 얘기하는 이물질과 사진의 이물질은 아무 상관은 없다...)

 

이물질

 

요즘 나는 부쩍 이물질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기능적이고 효율적인 단어이기는 한데, 정서적으로 아름답지는 못한 표현이다. 처음에 책을 쓸 때에는 특별히 생각하지 않다가 고치는 과정에서 많이 쓰게 되는 표현이다. 특정한 개념을 설명하거나 감정을 만들기 위해서 본 라인에서 약간 빠져나와서 다른 얘기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원래는 이렇게 우회해서 많이 돌아갈수록 후반부에 더 풍부한 사례와 함께 감정을 만들기가 좋다. 그게 책과 논문이 다른 점이다. 논문은 가능하면 직선으로 가지만, 책은 그렇게 가면 너무 매말라서 읽기가 어렵다. 그리고 그 결론이라는 게, 사실은 읽는 사람 마음 속에서 무슨 효과가 나야 의미가 있는 거라서, 이것 저것 다 자르고 결론만, 그러면 정말 장작개비처럼 매마른 애기가 된다.

 

초고를 쓰고 나면, 이제 다시 얘기가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를 살펴보게 된다. 얘기를 풍부하게 할 것 같아서 집어넣었는데, 감정만 소모하고 본 가지로 돌아오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생겨나게 된다. 이런 걸 이물질이라고 부른다. 이런 게 이물질인지 핵심요소인지 사실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무의미한 것을 처음부터 그 자리에 배치하고 쓰는 사람은 없다. 돌았냐? 쓸 데 없는 얘기를 쓰게. 책이 대충 300페이지라고 보면, 생각보다 짧다. 죽 달려가도 꼭 필요한 얘기들을 결국에는 분량 조절하기 위해서 빼야 하는데, 꼭 필요하지 않은 얘기를 누가 쓰겠나? 그래도 애초에 생각했던 것 같은 효과가 발생하지 않는 서브라인들이 생겨난다. 이 순간이 고통스럽다. 너는 이물질이야 하고 날려버릴지, 아니면 좀 더 손을 봐서 본문의 내용과 좀 더 호응을 하게 다듬을지, 판단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 판단이 어렵다. 어쨌든 이물질이라고 판단되면, 어느 저자가 상관없이 가차 없이 날린다. 이물질 같은 데에도 느낌이 있어서 남겨둔 것들이 있다. 나중에 독자들이 그 부분이 좋았다고 얘기하는 경우가 생긴다.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물질을 처리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냥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달려가면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좀 다른 방식으로 읽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남겨진 이물질이 보너스 같은 요소일 수도 있다.

 

요즘 방식으로 책을 편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과학계에서 최고의 책으로 치는 다윈의 <비글호 여행기>가 있다. 여행기랑 상관 없는 개인 얘기들이 많이 나온다. 요즘 책 편집 같이 하면 비글호 여행기는 온갖 이물질 투성이이고, 이것도 자르자, 저것도 자르자. 그 두꺼운 책이 남는 게 없을 것이다. 과학계에 남을 명저 중의 명저다. 마찬가지 관점으로, 벤자민 프랭클린의 자저선을 보면 온통 이물질 투성이다. 어디 그런 책만 그러겠느냐? 심지어 <자본론>도 논리의 전개에 방해가 되는 이물질 덩어리이다. 게다가 결론도 불투명하다. 아마 요즘 책 편집하는 방식으로 하면 <자본론>에는 필요 없는 서문들, 길게 늘어진 수다들, 별 효과적이지 않는 인용들, 다 날라가고 100페이지 미만이 될 것이다. 그랬다면 <자본론>을 읽고 혁명을 꿈꿨던 청춘이 지금과 같이 많았을까? 좋은 책, 고전이 된 책, 어떻게 보면 이물질 덩어리다. 그런 이물질이 거의 없는 것은, 최근에 읽은 시나리오인 사무엘 바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진짜 중요한 대목인데도 아주 짧게 처리하고 넘어간다. 정보가 너무 중요한 것인데, 설레발 없다. 진짜 기능적으로 딱 필요한 얘기들만 들어가게 설계되어 있다. 영어와 불어, 모국어와 외국어를 바꿔가며 글을 쓰는 사무엘 바케트가 이 대목에서 특별히 한 얘기가 있다. 외국어로 글을 쓰면 복잡한 수식 같은 것을 줄여서 간결해지는 장점이 있다고 (그래, 잘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세익스피어도 참 이물질 없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기능적으로 필요한 요소들만으로 구성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세익스피어가 사람이 아니라고 하나보다.

 

글과 책은 다르다. 원고지 10매짜리 글에는 이물질이 들어갈 요소가 없다. 밥 먹고 잠깐 커피 한 잔 마시러 나갔다 오는 산책과 같다. 그러나 책은 다르다. 34일 혹은 일주일 이상 걸릴 긴 여행이다. 목표만 보고 달리면, 중간에 왜 달리는지 이유를 잊어버린다. 사람들은 책을 던져 버린다. 중간에 잡념도 하고, 일상 생활을 하고, 그러다 다시 책을 집는다. 쉬어갈 공간도 필요하고, 책과는 상관 없지만 자신의 소양에 도움이 되는 얘기들이 더 의미 있을 수도 있다. 에코  책을 그렇게 많이 읽었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건 에코 아내 얘기다. 위스키라고 사과 주스나 포도 주스를 주고, 일절 술을 못마시게 하는 아내에 대한 불평. 그리고 책을 쓰는 데 방해를 하는, 어수선하고 번잡스러운 자식의 친구들. 그래서 우리는 에코는 따로 작업실이나 집무실을 두지 않고 그냥 집에서 글을 쓴다는 것을 알았다. 이게 무슨 중요한 지식이야?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에코를 이해하고, 에코의 글들이 좀 달라 보이는 효과를 갖게 한다.

 

그래서 책은 어떻게 보면 이물질과의 전쟁일 수도 있다. 다 걷어내면 못 읽는다. 그대로 두면, 그래도 번잡스러워서 못 읽는다.

 

(원래 이렇게 마무리할 생각은 아니었고, 일상 생활에서의 이물질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점심 약속이 생겨서 이만 나가봐야 한다. 나 자신의 이물질처럼 느껴지는 일상의 쓸쓸함을 쓰려고 했는데, 본문 자체가 이물질이 되어버렸다. 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꺼내지도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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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가려고 한 것은 아닌데, 강화도 전등사에 갔다가 정족산사고를 들르게 되었다. 뭔가, 잠시 느껴지는 게 있었다...)

 

1.

5, 7, 두 아이들과 여행을 떠나기로 하였다. 큰 아이가 어린이집을 옮기고 나서, 적응을 잘 못한다. 새로 옮긴 어린이집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 전에 있던 어린이집이 워낙 좋았다. 아침마다 몇 시에 데리러 올 건지, 더 일찍 올 수는 없는지, 아이의 관심은 오로지 하원 시간이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늦을 것 같으면, 아침에 어린이집 안 간다고 운다. 방법이 없다. 오후에 길이 막혀서 약간이라도 늦으면 아이는 울고 있다. 담임 선생님이 나한테 막 뭐라 뭐라 한다. 내가 이렇게 혼이 날 정도로 큰 잘못을 저질른 건가, 가끔 황망하기도 하다. 어쨌든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더 많이 놀아주고, 더 많이 여행 다니고. 마침 봄도 오고 해서,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더 많이 여행을 갈 생각이다.

 

집에서 가깝고, 익숙한 강화도 전등사에 갔다. 일부러 가려고 한 것은 아닌데, 전등사가 지켜온 정족산사고를 보게 되었다. 작년 11월에 애달 데리고 갔다가 전주사고를 본 적이 있다. 아련한 생각들이 난다. 여기 오기 전 들렀던 강화문학관에서 팔만대장경 경판이 머리 속에서 겹쳐진다. 책이란 게 뭘까?

 

2.

한국에서 책은 위기다. 사회과학도 위기고, 그림책도 위기고, 심지어는 아이들 보는 동화책도 위기다. 386들이 부모가 되면서 한동안 동화책의 전성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도 다 옛날 얘기이거나, 기대가 너무 많아서 생겨난 신화 같은 얘기다.

 

하루걸러 들려오는 얘기들이, 누가 누가 책을 더 이상 안 쓰기로 했다, 누가 그냥 취직했다. 그런 얘기들이다. 이러다가 정말 작가 중에서 굶어 죽는 사람 나오겠다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전업작가들이 맞게 된 최대의 위기 국면이다.

 

사실 나도 책을 계속 써야하는지, 2년 전부터 고민을 했다. 내가 처음 나왔을 때, 출판사 MD들이 한국에서 처음 등장한 사회과학 전업작가라는 얘기를 하고는 했다. 여전히 사회과학 전업작가라는 이름을 들을 정도이기는 한데, ‘가난한이라는 수식어를 달아주어야 한다. 수식어 하나를 더 단다면 강연 안하는정도 될 것 같다. 강연을 아예 안하지는 않는데, 고등학교나 시민단체 같은 데에서 부탁 오는 것을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해주는 정도다. 게다가 나는 돈 받고 강연 듣는, 소위 유료강연은 안 한다. 책을 사면서 돈을 낸 건데, 무슨 돈을 또 받아, 그런 생각이 강하다.

 

작년 말에, 언제까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계속 책을 쓰겠다고 결심하는 순간이 있었다. 내 주변의 친구들은 다 반대했다. 반대의 의미는 명확했다. 이게 돈이 안된다, 애들 둘을 어떻게 키우려고 하냐? 무책임하게

 

솔직히 애들 키울 생활비까지 걱정하면서 살아야하는, 그런 정도는 아니다. 그냥 먹고 살만은 하다. 벤츠나 그런 거 사야겠다고 갑자기 정신이 해까닥하는 경우만 아니면, 별 걱정은 없다. 지금처럼 아내의 모닝 가끔 얻어 타면서 살면, 별 걱정은 없다. 어쨌든 계속해서 책을 잘 쓰면 좋겠다, 이렇게 얘기해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친구 한 명은, 당장 벤츠를 사라고 했다. 그래야 정신을 차릴 거라고. 벤츠도 사고, 골프도 치고, 에 또 뭐 그런 그런 것도 다 하면 지금처럼 벌어서는 택도 없다. 그래서 좀 남자로서, 어른으로서, 욕망이라는 것을 가지라고 한다. 그게 성공이라고. 그래서 벤츠를 사면 결국 벤츠만큼 돈을 벌게된다는, 별 말도 안되는 경제 강의를 내 앞에서친구야, 미안한데, 내가 경제학 박사 20년차다. 나는 머리에 총맞았냐고 그랬다. 내가 총맞았냐, 벤츠를 타게. 지금 행복한데, 불확실한 먼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지금의 행복을 포기할 것인가! 총 맞았거나, 미친 사람이 하는 행동이다. 부모가 돈 벼락을 주거나, 하늘이 돈 벼락을 내려도 나는 그렇게는 안 살 것 같다. 그 돈이면 세상을 위해서 얼마나 할 수 있는 좋은 일이 많은데

 

어쨌든 나는 계속해서 책을 쓰기로 작년 말에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목표는 딱 우리 집 생활비만큼. 목표는 그런데, 좀 안 맞아도 별 상관 없다. 내 마음이 그렇다. 한국에 처음 등장한 사회과학 전업작가로서, 그렇게 살아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그걸로 족하다. 이 얘기도 크게 하지 어려운 게, 주변의 저자나 작가들의 삶이 진짜로 너무너무 힘들다. 최선을 다 하지만 안 되는 걸 어떻게 해, 그런 얘기를 들을 때, 힘들고 미안하다. 세상이 원래 그래, 배울 만큼 배우고 할 만큼 한 40, 50줄의 작가들이 이런 얘기를 서로 위로라고 하는 게 정상적으로 보이는가? 뭔가 이상한 것이다. 꼭 대학 입시 앞두고 점수가 잘 안 나올 때, 대학 졸업하고 취업 잘 안될 때 청소년과 청년들이 하는 것 같은 얘기를, 나름 스타급 작가들이 지금 서로 위로라고 하고 있다. 다른 얘기를 하기는, 너무 서로 미안하다. 세상이 원래 그래, 그런 얘기가 참 하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다르게 할 수 있는 얘기가 별로 없다.

 

3.

책은 한 사람이 모을 수 있는 지식을 최대한도로 담아내는 최고의 매체다. 물론 누구나 그 정도는 인정한다. 그래서 책이 많아질수록 그 사회가 힘 있는 사회다. 19세기에 전성기를 맞은 나라들 대부분, 그 시절에 자신들의 출판문화도 전성기였다. 좀 더 다양한 종류의 지식이나 경험이 책으로 나올 수 있는 나라, 그 나라가 잘 사는 나라다. 잘 살아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그렇게 책이라는 매체를 중심으로 지식을 모아 나가다 보니까 잘 사는 나라가 된 것 아닐까 싶다.

 

책은 전세계적으로 약해지는 흐름에 놓여있기는 하다. 그렇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그 속도가 너무 빠르다. 이건 비정상적이다. 원래 그래, 그게 아니라, 우리만 그래그게 좀 더 정확한 진단일 것 같다.

 

4.

태풍이라는 은유를 요즘 좀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태풍의 눈이라는 얘기를 참 좋아했다. 영화 <퍼펙트 스톰>에 가장 슬픈 태풍의 눈 얘기가 나온다. 즐거운 버전의 얘기도 있다. 진짜로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정작 그걸 만드는 사람들만 잘 모르는 경우. 태풍의 눈이라서 그렇다고들 한다.

 

요즘은 태풍의 씨앗 혹은 태풍이 만들어지는 순간, 그런 얘기를 가끔 생각한다. 북태평양 어느 한적한 섬 앞바다, 그곳에서 태풍의 씨앗이 만들어진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피어 오르는 물기운 중의 하나가 결국 태풍이 된다. 어느 씨앗이 태풍이 되었는지, 언제 되었는지, 사실 아무도 모른다. 태풍이 태풍으로서 형성이 되고 자리를 잡아야 그 때부터 위성 관측이 시작된다. 친구 중에 태풍이 오는 경로를 확인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취미인 사람이 있다. 작은 태풍이 거대한 태풍으로 자라날 때 즐거워한다. 태풍의 피해자들이 보면 미친 놈이기는 할텐데, 위성으로 태풍 관찰하는 게 거의 유일한 취미다. 그런 사람도 태풍의 씨앗은 모른다.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모르는 것이지, 없는 것은 아니다.

 

방송과 책을 비교해보자. 방송은 태풍을 쫓아다니는 것이다. 태풍이나 태풍급, 그 정도가 된 것들 것 쫓아다니는 행위를 우리는 방송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방송 하는 사람들의 머리는 이미 다 된 것들 혹은 터지기 직전의 마지막 몽우리, 이런 것을 찾는데 특화되어 있다. 태풍이 아닌 것은 손도 대지 않는다. 그걸 옆에서 보면, 좀 웃기기는 하다. 자기는 태풍이 아닌데, 태풍들만 만나다 보니, 자기가 태풍급이라고 즐거워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좀 험하게 말하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우리가 방송에서 보는 것들은, 그 세계에서는 태풍이 된 사람들을 본다. 그래서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노래가 되는 것이다.

 

책은 방송과는 다르다. 책을 쓰기로 마음을 먹고, 책을 쓰고, 출간하는 과정, 이것들은 북태평양 어느 곳에서 태풍의 싹을 만드는 일과 같다. 너절하고, 전혀 멋진 일이 아니다. 다만 그 후에 생겨날 태풍을 생각하면서 고단하고 지난한 과정을 참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태풍의 싹이 전부 태풍으로 자라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런 상상 없이는, 춥고 배고프고 고단한 과정을 견뎌내지 못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태풍의 싹의 일부가, 당대 혹은 후대에라도 태풍이 된다. 보람 있는 일이다.

 

태풍을 보는 눈과 태풍의 싹을 만드는 눈은 다르다. 좋고 나쁘고의 문제는 아니다. 방송은 트렌드를 쫓아간다. 책은 트렌드를 만든다. 그래서 선진국들이 여전히 책을 중요한 매체로 생각하고,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 아닌가?

 

5.

지역의 소소한 이야기, 지역색과 향토색 가득한 이야기, 이런 건 요즘 책이 안된다. 로컬의 문제, 아무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평생을 사진만 찍은 사진 전문가가 알게 된 세상에 대한 지혜, 이런 것도 책이 안된다. 책으로서의 의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보려고 하는 사람이 적어서 그렇다. 쉽게 버리기 어려운 얘기들이 요즘에는 책이 안된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 모두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게 된 사회, 그 사회가 진짜로 강한 사회다. 우리에게는 더 소소하고 더 많은 지식이 필요한데, 지금 한국 사회는 그런 지식들이 사회화되기에는 너무 체질이 허약해져 버렸다. 그러면 잘 될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구한말에 한국에 온 선교사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한국에 관한 책을 쓰고 그런 것들이 발간되었다. 우리는 소중한 자료라고 한다. 뒤집어서 생각해보자. 한국인이 외국에 와서 보고 느낀 것, 그런 것이 지금 우리에게서 출간될 수 있을까? 꼭 하멜 표류기 같인 희귀성이 있는 것 아니더라도 나름 그 나라에서 발간이 되고, 우리에게 소중한 자료로 남아있다. 지금 우리는?

 

우리는 지금 태풍만 찾아 헤맨다. 그러다 길을 잃는다. 다들 미래학만 하려고 한다. 정부나 민간이나. 현재를 잃어버린 나라가 미래만 찾는다. 앞길이 어두울 때 종교만 찾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책을 계속해서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는 뭔가 만드는 것, 얘기든 내용이든 논리든, 그런 일을 좋아했다. 태풍이 되든 태풍이 되지 않든, 태풍의 씨앗을 설계하고 만드는 일은 내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 그것이 태풍이 되든 되지 않든, 그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태풍의 씨앗을 만드는 일, 그건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하고 보람된 일 중의 하나다. 그걸로 먹고 살 수 있으면, 정말 감사한 일이다.

 

최근에 느낀 게 있다.

 

책은 정직해야 하고, 내용도 정직해야 한다. 그래야 태풍이 되지 않더라도 미풍이라도 된다. 그리고 그 미풍이라도 필요했던 사람의 눈에 전달될 수 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책 만들 때 사용하는 기법 같은 것들을 될 수 있으면 빼고, 담백하게 만들기로 마음을 먹었다. 태풍이 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나는 태풍의 씨앗을 뿌리는 마음으로 내 일을 한다.

 

우리는 세계사에서 드물게 실록을 만들고, 그것을 죽어라고 보존했던 사람들의 후손이다. 그게 뭐 팔리겠냐, 우리의 선조들이 순실이나 근혜처럼 국가를 가볍게 생각했다면 우리는 벌써 망했을 것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기 위해 목숨 걸고 팔만대장경을 찍었던 사람들의 후손이다. 그게 우리의 DNA 안에 흐를 것 같다.

 

사람들이 책을 더 많이 읽고, 삶을 바꾸는 일은 아직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태풍이 여러 개 필요하다. 그 태풍의 눈을 만드는 사람들의 삶은 순결하고, 정직하다. 지금 이 시대에 아직도 책을 쓴다고 마음을 먹는 사람들, 나는 그들을 존경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매체로서의 책이 망하는 속도가 한국에서는 너무 빠르다. 벌써. 나의 경험담은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일이다.

 

나만 해도 그렇다. 요즘 내 책들이 예전 책보다 훨씬 공도 많이 들어가고, 품도 많이 들어간다. 예전에는 지금처럼 정성 들여 책 내용을 구상하고, 고치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보다 훨씬 잘 팔렸고, 영향력도 높았다. 지금은, 예전의 3~4권 만들었을 힘을 책 하나에 쏟는다. 그래도 버티기 힘들다. 할 수 없다. 시대가 변했다.

 

예전에는 책의 의미에 대해서 지금처럼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요즘 생각해보니까, 지금 책을 만드는 것은 태풍의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 예전에는 태풍의 눈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책인, 이제 태풍은 아니다. 그래서 책을 만드는 행위가 태풍의 눈 같은 것은 아니다. 조용하고, 계속 조용하고, 앞으로도 조용할 것이다. 전혀 다른 시선과 전혀 다른 각오로, 태풍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 책 만드는 행위에 더욱 가까워졌다.

 

그리고 이 일은 혼자 하면 의미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자신의 최선을 담아서 책을 내기 시작하는 것, 그렇게 점이 선이 되고, 선이 면이 되는 변화에서 의미가 생긴다. 나는 아직도 거대한 태풍을 기다린다. 태풍이 지나고 나면, 미세먼지가 사라지고, 푸른 하늘이 나타난다. 나는 아직도 그런 맑은 하늘에 대한 꿈을 거두지 않았다.

 

 

(강화문학관에 갔다가 팔만대장경 장판 하나가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팔만대장경이 강화도에서 만들어졌다고, 그냥 잠시 스쳐지나갔듯이 보기만 했었다. 진짜로 만져볼 수도 있고, 먹물로 종이에 찍을 수도 있다. 아이들이 정말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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