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양준혁이 가지고 있던 2318 안타 기록을 오늘 박용택이 넘어섰다. 사실 양준혁은 지금처럼 게임이 대폭 늘어날지 잘 몰랐을지도 모른다. 알았더라면 그렇게 일찍 은퇴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무리해서라도 2~3 시즌은 더 했을 것 같다.

 

어쨌든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든다. 요즘 딱히 부럽거나 그런 사람이 없었는데, 박용택은 부럽기도 하고, 멋지다는 생각도 든다.

 

박용택이 막 데뷔하던 시절, 2002년은 나에게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많다. 아마 에너지경제연구원에서 했던 회의에 갔다가 다시 총리실로 돌아오던 날이었을 것이다. 그해 코리안 시리즈에 삼성과 결승에서 만났다. 이상훈이 공을 던졌고, 이승엽이 홈런을 쳤다. 동점. 그리고 다시 마해영이 홈런.

 

그 때 막 한강 건너서 남산 1호 터널 지날 때였는데, 눈물이 너무 많이 나서 운전을 할 수 없었다. 아마 이것저것, 생각이 겹쳐서 그렇게 많이 울었던 것 같다. 하여간 그 시절, 나는 내 인생의 최악의 순간들을 지내고 있었다. 아마 아무리 더 힘들어져도 그 때만큼 힘들지는 않을 것 같다.

 

그 때 박용택이 데뷔를 했다. 그게 한국 시리즈에 그가 올라가보는 마지막이었던 것을 그는 몰랐던 것 같다. 아무도 몰랐다. 우승은 못해도, 그 언저리에 계속 있었다. 그리고 흑역사가 시작되었다.

 

나는 그 다음 해 봄, 노무현 정권에서 인수위랑 첫 인선 명단 보고 바로 사직서 냈다. 그 즈음에 청와대에서 일하면 좋겠다는 얘기랑 조금만 더 기다리면 외국 근무 보내준다는 얘기가 있기는 했다. 글쎄, 그렇게 아쉬움을 조금 더 연장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내 이름을 되찾고 싶었다.

 

2.

막 데뷔한 박용택이 야구하는 기간이 이상훈을 너무 좋아했던 나의 청춘이 완전히 끝난 시점과 이래저래 맞물린다. 그리고 그가 오늘 대기록을 세웠다.

 

나는 이제 그런 건 잘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하루하루를 보낸다.

 

요 몇 주 기분이 아주 좋다. 좀 생각해봤는데, 한 달 전부터 산책을 좀 늘렸고, 몇 주 전부터 줄넘기를 시작했다. 그 외에는 크게 잘 되는 것도 없고, 크게 망하는 것도 없고, 그냥 비슷비슷한 하루의 연속이다. 그냥, 줄넘기를 시작해서, 매일 조금씩 하는 정도로도 나는 기분이 좀 더 좋아졌다.

 

오늘 점심 때 윤호중 의원하고 밥을 먹었다. 그도 좀 고민이 있나 보다. 오늘은 내 얘기도 좀 했다.

 

그렇게 이것저것 다 안 한다고 하면 어떻게?”

 

지난 2년 동안 벌어진 일들을 그동안은 조각조각만 얘기를 해줬는데, 오늘은 따로 할 급한 얘기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약간 모아서.

 

저는, 그냥 이러구 살래요.”

 

요즘 내가 편한 것은, 크게 영광을 구하는 게 없으니까, 크게 망할 것도 없고, 크게 실망할 것도 없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이들이 좀 커서, 주말 오후 내내 집안에서 웃음 소리가 끊이지가 않았다. 방안에 있는 고양이도 아무 문제 없고, 마당 고양이 강북도 요즘은 저녁이면 집에서 쉰다. 가끔 다른 고양이랑 시비가 붙기는 한다. 오늘은 검은 고양이랑 기싸움이 붙어서 내가 개입을 해서, 검은 고양이 쫓아냈다.

 

내 삶은 이만하면 더 바랄 것은 없다. 크게 아픈 데 없고, 30대 이후 처음으로 수영 말고 다른 운동을 조금씩 한다. 스테리칭 운동도 하면서 오매오매, 이 장작대기”, 혼자 웃는다. 유학 시절에는 혼자서 운동을 많이 했다. “죽을 수 없다”, 그냥 이를 악물고 버티고 버텼다. 지금은 그런 이를 악무는 일은 나에게 벌어지지 않는다. 되면 되고, 안 되면 말고. 그렇다고 내가 혼자 뭔가를 다 하냐? 그런 것도 아니다.

 

어제는 전체 회식이 있었다. 1차 끝나고 마무리하면서 기획팀 대표로 아주 짧게, 한 마디 했다. 어느덧 같이 일하는 사람이 50명도 넘었다. 그냥 나는, 티 나지 않게 내가 맡은 역할만 하면 된다.

 

3.

박용택이 한 마디를 했다. 이제는 우승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해보니, 나는 그런 목표도 없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되고 싶은 것도 없고.” 실제로 그렇다. 요즘은 내가 지금 쓰는 책이 마지막 책이 된다고 해도 별 상관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억지로 뭔가 목표를 세우고, 그걸 위해서 기를 쓰는 것, 덜 재밌는 방식이다.

 

요즘은 프로야구에 절절함이 키워드다. 나는 그런 절절함이 없다. 절절함이 의미가 없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하기보다는 좀 더 즐기면서 지내고 싶다.

 

50대 에세이를 쓰면서 내가 많이 변했다. 제일 큰 건, 이제 덜 괴로워하면서 책을 쓰게 되었다. , 그렇다고 해서 엄청나게 갑자기 책이 더 팔리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렇지만 내 책을 10년 가까이 계속 읽어준 동료들이 이번 책은 처음으로 잡자마자 한 번에 다 읽었다는 얘기를 한다. 그거면 된 거다.

 

전에는 책 쓰면서 괴로워하고, 몸부림을 하면서 썼다. 50대 에세이 때, 즐기면서까지는 아닌데, 그래도 그렇게 괴로워하면서 쓰지는 않았다.

 

직장 민주주의는, 보람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참고 써보려고 한 건데, 막상 시작하니까, 내가 얘기에 빠져든다. 독자들도 그렇게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쓰면서 재밌기도 할 뿐더러, 내가 빠져든다. 보람이 문제가 아니다. 이건, 돈 주고도 하고 싶은 일이다.

 

내년도 출간 리스트를 잠시 살펴봤다. 10년을 넘게 책을 썼는데,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나만 쓸 수 있거나, 나만 쓰려고 하는 주제가 남았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물론 잘 팔기도 하면 좋겠지만, 그건 내 힘만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그래도 최소한의 체면 치례 정도라도 할 수 있다는 게 고맙기만 하다.

 

나도 언제까지 책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 짧으면 3~4, 길면 10년 정도 쓸 것 같다. 환갑이 넘어서도 책을 쓰고 있을까?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이미 10년짜리 한 턴을 돌았는데, 또 한 턴을 돌기도 어려울 뿐더러, 하지 않은 주제가 남아있을 것 같지도 않다. 더 할 새로운 얘기가 없으면, 언제든지 펜을 내려놓겠다고 생각하고 산다. 기록? 몇 년 전부터, 그런 것의 의미는 없어졌다. 영광과 화려함, 잠시의 일이다. 시간이 지나고, 다음 흐름이 오면 기억할 사람도 없다. 기억할 의미도 없고.

 

그냥 내가 지키려고 하는 것은, 내 책을 산 사람들이 보기에 저건 아니지”, 그런 아주 이상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정도 아닐까 싶다. , 특별히 하는 게 없어서, 특별히 이상해지기도 어렵다. 잘 못하는 것, 그거야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얼마 전 청와대에 있는 어떤 아저씨랑 잠시 통화할 일이 있었다. 언제까지 쉴 거냐고 물어본다. 워낙 친한 사람이라, 그냥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 그냥 이렇게 살 거라고. “그래요, 지금은 잠시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 같네요.” 요런 애기를 들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나는 지금 쉬는 것은 아니다. 내 능력이 되는 대로, 내 나름의 방식으로, 열심히 그리고 행복하게 사는 중이다. 야구 용어를 하면, 나는 지금 내 게임 뛰는 중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가끔 책 새로 내면 나에게 몇 권 냈냐고 사람들이 물어본다. 글쎄, 잘 모른다. 10권 때까지는 세었던 것 같은데, 나도 세어보지 않은지 좀 된다. 몇 권 내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쓰고 있는 직장 민주주의가 얼마나 이 사회에 유의미하게 만들어질 것인가, 그게 제일 중요한 일이다.

 

그나저나 박용택,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승하고, 막 신나는 분위기에서 잘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그렇지만 꼴쥐소리 들으면서 꼴지 언저리를 헤매는 팀에서 자기 흐름대로 하는 것은 정말로 어렵다. 박용택의 많은 별명 중에서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광고택이다. 하다 보면 잘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다. 안 될 때, 잘 참으면서 기본 정도라도 하는 것, 그게 사실 어렵다. 그걸 잘 참고 이겨낸 사람이라서, 대단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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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좋은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주 하는 생각은. 어려운 걸 어렵게 쓰는 게 1단계. 어려운 걸 쉽게 쓰는 게 2단계. 어려운 걸 재밌게 쓰는 게 3단계. 웃기든 울리든, 어려운 것을 가지고 감정을 만드는 게 4단계. 이런 것 같다. 2단계까지는 연습하면 되는 것 같은데, 그 뒤로는 이게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재미는 종류가 너무 많다. 그리고 다양하다. 게다가 감정은, 생각보다 보편적이지 않다. 순실이가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이 때 나는 격렬하게 웃음보가 터졌다. 우리 아버지는 그 때 이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아버님 집에 가기 싫어졌다. 그리고 잠시 우울해졌다. 감정은 아주 복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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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새벽에 일찍 일어나 책을 조금 읽었다. 책을 읽는 것은, 자기 시간을 내어놓는 것과 같다. 나에게 책은, 언제나 괴로운 일이다. 내가 모르는 것에 관해서 책을 읽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는 것은, 내가 전혀 모르던 것에 대해서 생각을 죽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고, 잘못 알고 있던 것을 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책 한 권을 읽고 나면, 전혀 모르던 것에 대한 작은 우주가 생기고, 내가 알던 작은 소행성 하나가 산산히 부수어져 나간다. 그것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책을 읽는 가장 나쁜 자세 중의 하나가, 자기가 필요한 것만 읽으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뭔가 실용적인 자세로 장점들만 자기 안에 들어올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나중에 10년 혹은 20년이 지나면 이게 결정적으로 해로운 일이 되었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책의 실용적 장점만이 모여서 지식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 머리에 똥만 차게 된다.

책을 읽는 것은 언제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좋아하는 사람이건 싫어하는 사람이건, 저자를 온전하고 완벽한 한 사람이라고 일단은 전제하고 그의 생각들을 읽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책은 부분적으로 옳고, 부분적으로 틀리다. 시기가 변하면 그 자체로 완벽하게 자신과 맞는 책은 없다. 심지어 자기가 쓴 책도 시기에 따라서 다루는 대상과 생각의 변화 때문에 자기와 맞지 않게 되기도 한다. 남이 쓴 책이야 오죽하겠냐.

그걸 자기가 우월자의 시선으로 재단하고 심판하면서 읽으면, 책의 미덕 자체도 온전하게 자신에게 오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일단은 배운다는 생각 그리고 '온전하게' 하나의 세계관을 맞이한다는 생각으로 읽는 것이 좋은 것 같다. 그렇지만, 이 과정은 고통스럽다. 매번 고통스럽다.

이런 생각을 딜타이 등의 말을 빌려서, 해석학적 전통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키워드 하나면 꼽으면 context,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컨텍스트를 읽을 수 없는데, 텍스트를 어설프게 재단하면서 자신이 더 우월적이라고 생각하면서 건방떨면, 컨텍스트 근처에도 못 가본다. 그렇지만 이 과정은, 여전히 나에게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그래서 여전히 내게 독서는,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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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네이버에 쓰던 불로그 이름이 여기는 등대였다. 등대라는 단어가, 참 좋았다. 요즘은 GPS로 운항을 하니까 등대는 사실 있으나 마나 한 것 같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항해에서 등대는 굉장히 중요한 기능을 했다.

 

등대는 불을 밝히기는 하는데, 자기를 보라고 빛을 보내는 것은 아니다. 자기를 통해서 길을 찾으라고 하는 것, 등대 그 자체는 별 존재는 아니다. 나는 그런 게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했다. 의미? 등대의 의미를 무시하는 항해사는 없다.

 

원래 나는 기동력 좋게 움직이거나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알고 지내는, 그런 스타일은 아니다. 가만히 있는 것을 좋아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좋아한다. 별로 부지런하지 않다. 그리고 같은 일을 계속하는 것, 반복적인 것을 죽도록 싫어한다. 익숙한 것을 싫어하고, 해봤던 것을 또 하는 것을 싫어한다. 어려운 것을 하는 것보다 쉬운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것보다는 반복을 더 싫어한다. 너무 어려서 프로이드를 읽어서 그런지, 반복과 죽음의 본능이라는 생각이 마음 깊이 박혀 있나 보다. 뭔가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을 때, 나는 죽어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다 보니, 엄청나게 많은 자료를 축적하는 방식으로 살지는 않았다. 새로운 것과 최고, 나는 최고의 길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버리고, 새로운 것의 길을 선택한 것 같다.

 

하는 일이나 쓰는 글의 범위 같은 게 계속 바뀌기는 하지만, 내 삶이라는 게 거기서 거기다. 그냥 어디 한 구석에 짱 박혀서 어디다 쓸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뭔가 새로운 혹은 새롭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 을 줄구장창 만들고 있는 일, 그 정도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먹고 사는 게 어느 정도 해결된 이후에 생각에 좀 변화가 왔다. 물론 해결이라고 해봐야 남들에게는 에게, 그 정도, 그 수준을 넘지는 못한다. 하여간 어느 날 미쳤다고 갑자기 나는 이제 벤츠 타야겠어”, 그런 황당한 생각만 하지 않으면 세 끼 밥 먹고 사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그러다 보니까 누가 큰 돈 번다고 얘기해봐야, “너나 열심히 버세요”, 면박 주기 일쑤다. “너는 돈 안 필요해?”, 이렇게 물으면 , 안 필요해요”, 요렇게 대답한다. 진짜 황당한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하면, “너보다는 돈 많아요”, 요띠구로 면박을 주기도 한다.

 

돈을 엄청나게 더 버는 일에 매력을 느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성 아우구투스가 인간을 움직이는 세 가지 동기로, , 명예, 성욕 (libido libidinal)이라고 말했다. 나에게는 돈도 별로고, 명예도 별로다. 그렇다고 갑자기 사랑에 빠질 것 같지도 않고,

 

그러다 보니 내가 사는 모습이, 내용은 몰라도 모양새는 크게 변동이 없다. 사는 집에 그냥 살고, 먹던 거 먹고, 입던 거 입고, 애들 보는 거 계속 보고. 40대까지는 중대한 커브틀기, 이런 게 가끔은 있었던 것 같은데 50이 되니까 그런 것도 없다.

 

속으로는 생각도 조금씩 바뀌고, 쓰는 글 스타일도 바뀌지만, 크게 보면 30대 중반에 저자로 데부한 이후로, 거기서 거기인 삶을 사는 중이다.

 

소소한 변화들은 있다. 신문에 칼럼 쓰는 일은 그만하기로 했고, 방송도 고정적으로 뭔가 해야 하는 일은 안 하기로 했다. 무의미해서가 아니라 아픈 아이 키우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그렇다. 그리고 일간 혹은 주간으로 변하는 그 사이클을 애 보면서 내가 따라갈 수가 없다. 나는 그보다는 긴 사이클, 2~3년 혹은 5년 이상 걸리는 일들을 주로 한다. 지금 막 내 손에 있는 것들은 빨라야 3년 후 세상에 빛을 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렇게 시간을 비운 대신, 힘 닿는 대로 현장에 가보고, 실무자들 인터뷰 하는 일들을 조금 더 늘렸다. 나는 여전히 책과 자료만 보는 데스크일만 하는 것보다는 직접 현장에 가는 걸 더 선호한다.

 

이렇게 뻔하디 뻔한 삶을 살다 보니까, 본의 아니게 고정점 같은 게 되었다. 세상은 변한다. 끊임없이 변한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도 가끔 있어서 나쁠 것 같지는 않다. 작년부터 정부에서 학계까지 ‘4차 산업혁명이라고 난리들을 친다. 그래야 껍닥을 달아야 정부에서 돈을 준다. 나는 지랄 염병을 한다고 한 마디 한다. 포디즘도 제대로 이해못하는 아저씨들이, 어디서 어디로, 뭐가 변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진짜 염병들을 하신다. 이렇게 안 변하고 있는 사람도 필요할 것 같다.

 

30대 때 썼던 여기는 등대라는 표현이 얼마 전에 다시 생각이 났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변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이 기준점 역할을 하기는 한다. 사명감으로 삶을 살지는 않는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나를 준거점으로 삼는 것 같다.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등대, 등대의 의미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는 요즘 너무 간단한 기준으로 세상이 좋아졌는지, 그렇지 않은지, 쉽게 판단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가끔은 되돌아보면서, 이게 맞는지 아닌지, 생각해보고 싶어질 때도 있다. 사람은 그렇게 단순한 존재는 아니다.

 

거기에 그냥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존재, 우리는 과연 등대가 될 수 있을까? , 쾌속정이나 구축함 혹은 항공모함 같은 배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등대 같은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나는 등대처럼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굳이 배가 되어, 스스로 주인공이 되지 않아도 좋다. 삶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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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은 논리나 감정, 한 가지만 가지고 쓸 수 있다. 그렇지만 책은 논리만 가지고는 못 쓴다. 그리고 교과서나 참고서 아니면 그렇게 논리만 가지고는 읽기가 너무 힘들다. 논리를 세우고, 근거를 만드는 설계는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열심히 하면 할 수 있다. 그러나 감정을 만드는 일은, 이건 설명하기가 어렵다. 노력한다고 해도 안되고, 억지로 끌어내려고 해도 안된다. 억지로 만든 감정은, 잠시만 시간이 지나도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책을 쓰는 것은, 일시적으로 미친 놈이 되는 것과 같다. 많은 창작 작업과 마찬가지다. 그 감정 속으로 들어가는 것, 그게 제일 힘든 일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 만드는 작업을 동시에 두 개를 할 수는 없다. 논리적으로 맞추고 줄기를 세우는 것은 기계적인 작업이다. 이건 할 수 있다. 그러나 써나가는 것을 동시에 할 수는 없다. 두 개의 감정이 섞이면, 이제 슬슬 사람이 미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실제로 쓰는 작업을 동시에 하지는 않는다.

(구상과 조사 같은 것은 몇 개를 병행해서 하더라도, 크게 겹치지는 않는다.)

감정을 만들지 않으면, 설명하거나 설득하려고 하는 경향이 생긴다. 이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해서, 독자들이 설명하는 방식을 더 이상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여기서 근본적인 딜레마가 생겨난다.

설명하지 않고도 설명하는 법, 무슨 파르메니데스의 역설 같은 느낌이다. 10년 전에는, 이렇게까지 감정을 많이 동원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전체적인 어법과 이해하는 방식이 바뀌었다. 논리만 가지고 책을 세울 수가 없다.

감정, 많은 학자나 전문가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 나에게도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 주제 자체가 그렇다. 그래도 하는 데까지는 해보려고 한다.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다보니, 엉뚱하게 다른 실력이 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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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좋은 문장, 나쁜 문장, 그렇게 구분하기를 많이 했었다. 그리고 나쁜 문장은, 그냥 보기가 싫어졌었다. 나도 나이를 먹었다. 이제는 모든 문장에, 다 각각의 미덕이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싫거나 보고 싶지 않은 문장이라도 어떤 미덕을 가지고 있을지 찾아보기 시작한다. 쓰고 싶지 않은 문장을 억지로 쓰는 사람은 없다. 어떤 한 사람이 자리에 앉아 글을 쓰게 되는 과정까지, 아무런 이유가 없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 이유가 미덕이 된다 (책을 읽는 속도가 요즘 늦어진 이유를 나는 이렇게 변명으로. 그냥 내용만 전달받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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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살던 집에서. 이 시절에는 모든 것이 드라마틱했다. 숨소리마저 파란만장했다. 딱 6년 전의 일이다. 나도, 저 오른 쪽에서 젖을 빨던 아기 고양이 강북도, 이제는 저 시절로 돌아가지 못한다...) 

 

1.

얼마 전부터 어려운 것을 쉽게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쉬운 것을 어렵게 하는 게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책에 관해서는 그렇다.

 

영화에는 13579라는 표현이 있다. 일삼오칠구, 말 그대로 순서대로 나가는 걸 얘기한다. 전통적 방식으로 앞뒤 맞추고, 적절하게 구조를 맞추는 것을 이렇게 부른다. 그리고 이렇게 만든 영화가 끝까지 가면 웰메이드라는 소리를 듣는다. 어지간히 맞출 것은 다 맞춰어 놔서 왠만큼은 한다. 그렇지만 새로운 것은 없다. 당연히 실험적인 것도 없거나 극소로 등장한다. 왠만하기는 한데, 강렬하지는 않다.

 

책이 그렇다. 이것도 일종의 13579가 있어서, 적당한 형식과 양식을 갖추게 된다. 그리고 자꾸 하다 보면 이런 게 익숙한 양식이 된다. 익숙한 게 나쁜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의 효율성과 전달력을 가지니까 그게 일종의 양식화가 된 것이다.

 

어려운 것을 쉽게 하기, 익숙한 양식에 집어넣고 앞뒤를 맞추면 책 한 권이 된다. 그 익숙한 양식에 사람들이 처음 생각했을 것 혹은 처음 제기하는 문제, 그런 어려운 얘기를 집어넣는 것이 어느덧 내가 책을 쓰는 방식이 되었다.

 

어느덧 13579가 되어버린 내 모습.

 

13579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글을 쓰거나 뭔가 만드는 재미는 없다.

 

어느 순간부터, 이게 일종의 직업처럼 되어가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특히 그렇다. 조금만 돈 안될 것 같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은 주제는 그냥 내팽겨쳐져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일본은 촘촘한 나라라서, 아무도 손을 대지 않는 주제가 그리 많지는 않다. 뭔가를 발견했을 때, 이미 누군가가 한 평생 그걸 추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한국은 일본과는 달리, 아주 펑퍼짐한 나라다. 아주 좁은 구멍 몇 개에 모두가 몰려 있고, 그걸 조금만 벗어나면 아무도 없는 곳이 많다. 형편무인지경, 형편이 없는 곳이라서 무인일 가능성이. 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그 주제도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경제적으로 무가치할지 몰라도,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경제적으로 무가치하다는 것은, 인기가 없거나 연구에 돈을 댈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아무도 손 대지 않은 주제들이 우리나라에는 거의 무긍무진이라고 할 정도로 많다. 내가 이제 나이 50이다. 내가 잘 움직여야 봐야 10, 엄청나게 부지런해야 15년 움직일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5년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저자로서 책을 쓰는 시간이 5년이든, 10년이든, 어쨌든 그 길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젠 나도 슬슬 내가 쓰던 것들을 마무리해야 하는 시점이 보이기 시작하고,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을 정리할 시간이 오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나이가 지금이다.

 

13579 방식으로, 펜 내려놓는 순간까지 책을 계속 쓴다고 해서, 나아질 게 뭐가 있느냐, 이런 질문을 나도 나에게 던져보게 된다. 몇 년 전부터, 내가 몇 권의 책을 냈는지도 세어보지 않게 되었다. 나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한 권 한 권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책을 낸다는 것이 나에게 가슴 찡한 기억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통으로 본 그 시간들이 절절한 사연으로 남지도 않는다.

 

굉장히 기능적이고 기계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이준익 감독이 가끔 나에게 라이팅 머신이라고 한다. 큰 의미를 담고 하는 얘기는 아니지만, 잘 생각해보면 욕이다.

 

2.

어려운 것을 쉽게 하는 것은, 가장 효율적인 방식에 관한 얘기다. 그렇지만 요즘 내 고민은, 어떻게 하면 쉬운 것을 어렵게 할 것인가, 양식 실험을 포함해서 조금 더 전위적이거나 실험적인 시도들을 하는 것, 왜 나는 이런 것을 피하는가, 이런 거다. 13579를 깨고,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들을 담아내는 것, 이런 걸 더 해보고 싶다. 물론 힘들다.

 

아이 둘 보면서 뭔가 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 무작정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방식을 쓰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그냥 하던 대로 하고 싶지도 않다. ‘직장 민주주의라는 질문이 딱 이 양식 실험 한 가운데에 있다. 개념 자체가 쉬운 개념은 아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개념도 아니다. 딱딱하다. 그리고 이 얘기를 듣기 전에는 전혀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가 막상 그 얘기를 들으면 마치 아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주는 개념이다. 정의? 당연히 우리 맥락에 맞게 정의되어 있지 않은 개념이다. 그리고 책으로 진지하게 다루는 것도 처음이다.

 

이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양식 실험을 해볼 수 있을까? 오매나야, 하여간 그런 고민 중이다.

 

답은 아직 모른다. 모색해볼 수 있는 시간이 한 달 정도 남아있다. , 나도 몸부림을 치는 중이다

 

(카페에 두 개의 글을 썼다...)

 

http://cafe.daum.net/workdemo/iPgv/17

 

http://cafe.daum.net/workdemo/iPgv/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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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테의 신곡, 참 여러번 시도를 했는데, 아직까지도 정독을 못했다.)

 

1.

나도 가끔 나를 돌아다 본다. 내가 생각하는 내 삶의 가장 큰 특징은 성질 더러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게으르고 성질 더럽고, 나는 원래 이렇게 태어난 것 같다. 하루 종일 놀아도 하나도 안 불안하고, 한 달을 놀아도 안 불안하다. 1년을 놀아도? 더 좋지, 불안해 할 성격이 아니다. 그래서 아내가 제일 큰 불만이다. “니 방이라도 좀 치워라.”

 

영화 <전우치>에 세 신선이 아주 재밌는 대사들을 많이 한다.

 

일을 좋게 좋게, .”

 

화담이 자신이 요괴가 아닌 걸 보이겠다고 손가락에 칼로 상처를 내니까, 신선인 김상호가 한 대사였다. 영화 전개와는 크게 상관 없는 대사이기는 한데, 이 대사가 내 가슴에 깊이 남았다. 일을 좋게 좋게 쫌, 이게 내가 제일 못하는 일이다. 남들 다 넘어가는 일인데 이게 왜 그래, 꼭 그렇게 혼자 딴지 놓고 어깃장 놓는 똘아이들이 있다. 내가 바로 그 똘아이다. 그리고 그 똘아이들 다 모아놓고 그 중의 1등을 꼽으라면 내가 꼽힐지도 모른다. 하여간 일을 좋게 마무리하는 것, 이게 내가 제일 못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기원에는, 어쩌면 천성적으로 타고 태어났을지도 모르는 아주 더러운 성질이 자리잡고 있다. 하여간 뭔가 이상한 것은 그냥 두고 보지를 못한다.

 

2.

성질은 더러운데, 그렇다고 바로 문제를 고치자고 맨 앞에 나서서 솔선수범하는 그런 용감한 반장형 스타일이냐, 이건 또 아니다. <15소년 표류기>에 결국 리더가 되는 브리앙이 나온다. 매사에 반듯하고 용기도 있다. , 성질은 더러운데 거기에 걸맞는 용기는 없다. 뭔가 아닌데, 그렇다고 즉각적으로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고, 이 문제를 풉시다, 이렇게는 또 잘 못했다.

 

그 불균형 사이를 채워 넣은 것이 알코올이었다. 하여간 죽어라고 마셨다. 그리고 나중에는 마실 핑계를 만들기 위해서 또 술을 마셨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급사하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정말로, 죽을 만큼 마셨다.

 

공직을 그만두기로 마음을 먹은 순간이 실제로 사직서를 내기 한참 전이다. 그 시절에는 아직 주5일제가 아니라서 토요일 오전에도 출근을 했다. 기분이 너무 안 좋았다. 그래서 출근하고 커피 한 잔 마시고 상사한테 기분이 불편해서 일찍 좀 들어가보겠다고 했다. , 별 얘기는 없었다.

 

오전 11시에 집에 와서 페트병으로 소주 두 개를 사다 놓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진짜로 죽어라고 술만 마셨다. 너무 빨리 마시고 급하게 마셔서, 중간에 쓰러져서 잤다. 해질 무렵에 깬 것 같다. 또 마셨다. 그렇게 자고 일어나서 또 마시기를 몇 번을 한 것 같다. 다음 날 좀 늦게 일어났다. 아이고, 이제는 술은 더 못 먹을 것 같았다.

 

주섬주섬 좀 씻고, 마침 책꽂이에서 보였던 <단테의 신곡>을 들고 시내로 나섰다. 경북궁 앞 벤치에서 신곡을 읽었는데, 글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한 시간 정도는 책 보는 척하면서 앉아 있었던 것 같다.

 

그 날, 나는 내가 살던 삶을 정리하고 책을 쓰면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 같다. 그 시절에 여러 사건들이 있었는데, 가장 큰 것은 큰 페트병 하나 보다는 많은 소주를 마신 날이었다. 그 때 내 삶이 나빴던 것은 아니다. 최소한 외형적으로는, 근사했다.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3급 부장에서 2급 부장으로 승진을 기다리고 있었고, 장관 표창 받은지 얼마 안되어서 조그만 부서 새로 생기면 본부장으로 발령이 날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UN에서는 정책 분과 의장으로 자리를 잡았고, 선거에서 아시아 대표로 뽑혀서 이사직도 겸하고 있었다. 외형으로는 지금보다는 훨씬 더 폼나는 상황이었다. 그런 데도 만족을 못해? 만족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내 삶을 살고 있지 않았다. 겉멋에 빠져서 자기가 누군지도 잊어버리고 그날그날의 즐거움에 만끽해 있는 꼭두가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도 그러고 바로 뭔가 행동을 했느냐? 솔직히 좀 두려웠다. 몇 달을 더 밍기적거렸다. 그리고 그만두었다. 독일 본에 혼자 출장 갈 일이 생겼다. 베토벤 하우스에 갔었다. 몇 번이나 갔던 곳인데, 거기에서 마음을 먹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 일련의 시간들이 실제로 내가 책을 쓰기 위해서 에너지를 모으기 시작한 첫 원동력이 생겨나는 시간들이었다. 착하고 참하게 살다 보니까 뭔가 세상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해야할 것이 생각나서? 그런 사람이 있을 수는 있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경우는 아니다. 너무 일찍 상층부 혹은 권력의 이상한 모습을 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것은 나이를 먹고 좀 천천히 자신이 숙성된 다음에 봐야 좋은 것인데, 30대 초에 너무 많이, 너무 깊이 봐 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걸 자신의 기회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대개 성격 좋은 사람들이다. 잘 놀고, 활발하고, 실속있고.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 많이 있다. 나는 태생이 성격이 더럽다. 그걸 못 참았다. 그리고 그 옆에서 아양 떨고, 알짱거리는 내 자신을 못 참았다. 배신하고, 또 배신하고, 그리고 다시 배신당하고, 서로 그러면서도 국가라는 틀 내에서 거대한 친구가 되는 과정을 나는 견디지 못했다.

 

그걸 견뎠으면? 그래서 못본 척 참고 알랑방구의 시간을 몇 년 더 보냈으면?

 

페트병으로 소주를 마시는 순간이 몇 년 뒤로 갔을지는 모른다. 독일 본이 아니라 일본 히로시마 같은 곳에서 결심을 했을지도 모른다. 결국에는 같은 일이 벌어졌을 것 같다. 그건 내가 공부를 해서 그런 건 아니다. 나보다 공부 더 많이, 더 길게 한 사람들도 잘 참는다. 내가 특별히 더 정의감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나보다 더 정의감 투철하고, 더 열심히 싸웠던 사람들도 은근 잘 참는 것 많이 보았다.

 

순전히, 내 성질이 더러워서 그렇다. 나는 그걸 참고 있는 그 나를 참을 수가 없었다.

 

만약 내가 그걸 잘 참았다면?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렇다. 아마 나는 내 나이까지도 살지 못했을 것 같다. 아내와 결혼하지도 못했을 것 같고, 지금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있을 것 같지도 않다. 아마 그 전에 술 처먹다고 죽었을 것 같다.

 

성질 더러운 것, 그 성질은 죽일 수가 없다. 그게 되면 내가 벌써 해탈하고 성불했을 것 같다. 그 성질은 안 죽는다. 책은 내 성질과 싸우지 않고, 혼자 하던 싸움을 계속해서 하는 타협점 같은 것이었다. 책은 아무리 성질이 더러워도 고분고분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성질 나는 대로 지랄발광을 해도, 그런다고 책이 되지는 않는다.

 

책은, 내가 가진 더러운 성질을 극한으로 폭발시켜도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 거대한 대양 같은 것이다. 더러운 성질로 시작했던, 하늘이 준 특출한 머리로 시작했든 아니면 정말 인간의 극한에 달한 성실함으로 시작했든, 책은 대양과 같다. 그 출발점에 숫가락으로 물을 보태든 덜든, 아무런 미동도 벌어지지 않는다.

 

나의 습작은 그렇게 사직서를 내고 나서야 시작되었다. 그리고 1년간 습작을 하고 나서, 내 습작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약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새로 습작을 시작했다. 그때쯤, 아내와 결혼했다.

 

지식이나 기교 혹은 성실함으로 책을 몇 년간 쓸 수는 있다. 그러나 길게 책을 쓰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형태는 달라도 나름 한 성질들 하신다는 것이다. 문인들이나 작가들 모이는 술 자리에 잘 안 간다. 성질과 성질이 만나서 극한을 형성하는 것, 이제는 안 보고 싶다. 아무 것도 아닌 얘기 한 마디가 큰 전쟁이 되는 것, 그게 성질과 성질이 만나는 것이다. 인격과 인격의 만남, 이런 건 아니다.

 

지금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본다. 내 특징은 무엇인가? 성질 더럽다는 점이다. 남들 다 좋다고 하는 박원순의 광화문 광장 개편안에 혼자서 이거 아니다고 신문에 글을 썼다. 모두가 좋다고 하는 일에 나 혼자 이거 아니다, 거의 1년에 몇 번씩 벌어지던 일이다. 성질, 죽지 않는다. 사람들과의 불화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할 뿐, 성질 그 자체는 죽지 않는다. 50이 되었는데도 내 안에서 펄펄 살아 날뛴다. 평생을 이렇게 살았는데, 지금 와서 죽을까? 그냥, 불치의 병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처럼, 그걸 가지고 최소한의 불화로 살아갈 뿐이다.

 

, 성질 더러운 사람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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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로서의 내 입장이 크게 한 번 바뀌는 순간이 있었다. 그 이후 나온 첫 책이 바로 사회적 경제 책이다. 아마 내 인생 후반기를 시작한 책이라고 기억할 것 같다...) 

 

1.

흔히들 물들어 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는 얘기를 한다. 정치권에서도 많이 쓰고, 방송계에서도 많이 쓴다. 인기 있을 때 뭘 많이 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30대에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이걸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나에게 많은 사람들이 해준 말도 이 말이다. “물들어 올 때 배 노 젓기”, 나도 그런 인기는 처음이라서 뭘 잘 몰았다.

 

이제 50이 되었다. 지난 날을 되돌아 보면서 반성을 하는 중이다. 앞으로 살아야 할 날이 또 지금만큼 있다고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반성을 하고 내가 잘못한 것들을 다시 잡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제일 잘못한 것 딱 하나를 꼽으면 물들어 올 때 노 젓기’, 이게 책의 세계에서는 말도 안되는 얘기라는 것을 내가 몰랐던 점이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인터뷰를 거의 안 하는 작가였다. 말년에 워싱턴 타임즈가, 하여간 되게 유명한 매체랑 인터뷰를 한 번 했나 보다. 아주 오래되고 넓은 스타들의 넥타이를 맸다. 나는 아이작 아시모프가 넥타이를 맸다는 것만으로도 놀랐다. 하여간 이 낣은 넥타이를 보고 인터뷰를 하러 간 젊은 기자가 놀렸나 보다. 가만히 있을 아이작 아시모프가 아니다.

 

만약 내가 멋진 넥타이를 매고 살았다면 지금의 아이작 아시모프는 없었을 겁니다.”

 

바로 한 방 날렸다. 그런 얘기를 나도 알고는 있었는데, 막상 그런 순간이 오자, 뭘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몰랐다. 기자들이 해주던 조언이 있었다. 방송국에서 해주는 조언들도 있었다. 나쁜 얘기는 아니다. 그리고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애당초 들을 필요가 없는 얘기였다. 그냥 나는 내 길을 가면 되는 거였다. 그렇게 못했다.

 

나와 같은 길을 걷는, 내 앞의 사레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보고 듣고 혹은 모방할 모델이 없었다. 대개 내 앞에 있던 사람들은 열심히 책을 쓰고 기회가 되면 대학에 자리를 잡았다. 그게 마지막 목표였던 것 같다. 대학에 갈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 40대 이후로는 내가 안 갔다. 정확히 말하면, 아내가 말렸다.

 

니 성격에, 니가 총장이라 싸워 안 싸워?”

 

물론 싸우겠지.”

 

그럼 니가 빽이 있어 뭐가 있어, 짤려 안 짤려?”

 

짤리겠지,”

 

그러니 얌전히 살아, 괜히 헛바람 넣는 교수들하고 술이나 처먹으러 돌아 댕기지 말고.”

 

그래서 40대가 되었을 때, 나는 교수는 안 하기로 애저녁에 마음을 먹었다. 동경대 등 외국에서는 연구직 제안이 건너건너 오기는 했는데, 그것도 귀찮아서 안하기로 했다. 그렇게 삶을 한가하게 만들었는데, 언론과 방송에 너무 자주 나가게 되었다. 내가 왜 한가해졌는지, 순간 까먹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 때는 이명박과 박근혜, 어두운 시기였다. 어떻게든지 채널이 열리거나 창구가 열리면, 누구든지 나가서 할 얘기를 해야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변명이다. 결과적으로 내 삶이 파국으로 가게 되었다.

 

2.

내가 나를 진단해보면, 제일 큰 오류는 영점 조준이 틀렸다는 것이다. 사소한 차이지만 나에게는 치명적 오류를 만들어냈다. 책을 누구를 위해서 쓰는가? 나는 시민과 10대들을 위해서 쓴다고 생각한다. 시민이 뭐야? 그냥 우리가 시민운동이라고 말할 때 그 시민이다. TV는 시청자를 보고 얘기하는 거고, 라디오는 청취자를 보고 얘기하는 거다. 어차피 같은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약간씩 다르다. 이런 차이를 나는 잘 몰랐다. 어차피 그게 그거 아냐? 다 국민 아냐?

 

나는 국민을 위해서 책을 쓰지는 않는다. 그런 국가주의의 신봉자는 아니다. 꼭 내 책을 사지는 않더라도 읽기로 마음을 먹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쓰는 것과 불특정 다수를 염두에 두는 것은 약간의 뉘앙스 차이가 있다. 그런 사소한 차이가, 책의 첫머리, 맺음말, 흘러가는 톤, 이런 것에 영향을 미친다.

 

40대의 나는 그런 차이까지는 미세하게 몰랐다. 저자로서의 결정적인 패착은, 팟캐스트 방송이었다. 방송 후반기를 제외하면 기본 기획을 내가 했었다. 책의 독자와 팟캐스트 청취자는 엄밀히 얘기하면 약간은 다른 사람인데, 방송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까, 내 시선이 흔들리게 되었다. 내가 누구를 위해서 말을 하는가? 듣는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과 읽는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점이 있다. 나는 그런 걸 잘 구분하지 못했다.

 

결국에는 망했다. 책이 점점 더 기능적으로 바뀌는 것 같았고, 전에 했던 방식들에 자꾸 의존하게 되었다. 일단은 내가 재미가 없어져서 책을 쓰는 것의 의미를 점점 더 읽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책을 그만 쓸 것인가, 계속 쓸 것인가, 그런 고민을 지난 2년간 했다. 뭐가 문제지, 어디서부터가 잘못 되었지? 꼼꼼하게 나의 많은 것들을 다시 돌아보고, 하나하나 짚어보았다.

 

그래서 나온 진단이, ‘물 들어올 때 노 젓기’, 여기서부터 내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이 들어오거나 말거나, 그냥 내 길을 가야하는 거였다. 인기가 있거나 인기가 없거나, 내가 변하는 것도 아니고, 내 책이 변하는 것도 아니다. 인기를 위해서 책을 쓴 것도 아니고, 돈을 벌기 위해서 책을 쓴 것도 아니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방송을 하다 보면 시청률을 인식하게 되고, 생각이 바뀐다. 신문에도 글을 쓰다 보면 조선일보식 열독률 혹은 클릭수 같은 것을 신경 쓰게 된다. 그런 하나하나의 것들이 나의 영점을 흔들리게 만든 요소들이다. 결국 나도 사람이다. 강철도 아니고, 기계도 아니다.

 

그래서 방송, 기고, 이런 것들을 끊었다. 앞으로는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방식으로 살지는 않으려고 한다. 이 얘기의 일부가 <국가의 서기> 서문에 쓴 두껍게 썰기에 관한 얘기였다. 나는 저자로서,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독자에게 얘기하는 사람이다.

 

저자로서 내가 발전하지 못하고, 지체되고, 성숙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지난 2년간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랬더니, 진단은 의외로 간단했다. 내가 누구에게 얘기하고 있는 것인가, 이게 흔들린 거였다.

 

간단한 원칙이다. 신문에 글 쓰려고 책 쓴 거 아니고, 방송에 나가려고 책 쓴 거 아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다. 책을 들어 읽으려고 한 사람들, 그들은 한국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대중인 독자들이다. 나는 독자들에 대한 감사와 의미를 책 데뷔한지 10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흔히 배우나 연예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다. 책을 골라서 집어들고 독서한다는 행위의 거룩함에 대해서, 정말 나도 잘 몰랐다. 얼마나 고급스러운 사람들 앞에 내가 선 것인가, 그렇게 생각을 해야 뭐라도 더 나아가려 하고, 새로운 시도를 겁내지 않고 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을 사줄 것인가, 안 사줄 것인가, 나는 시청률 앞에 선 방송국 PD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게 내가 망한 이유다. 나는 내가 왜 책을 쓰기 시작했는지, 왜 여기에 인생을 걸었는지, 어느 날 잊어버렸다. 그걸 잊지 않기 위해서 지금 이 글을 쓴다.

 

물들어 올 때 노 젓는 거다”,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이제 그런 얘기는 여의도에 가서나 하시라”, 이렇게 얘기해 줄 거다. 책이 물이다. 책이 태풍이다. 노 젓는 것은 언론과 방송이 하는 일이고, 독자들과 함께 그 물을 만들고 물길을 내는 것, 그게 책이다. 정작 책이 물이었고, 사람들이 그 물을 기다린다는 것을 나는 10년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작가가 된다는 것, 그것은 스스로 물이 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노 젓는 사람이 아니다. 물을 만들고 물길을 내는 사람이다. 그 일을 하면서, 나는 바보 같이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게 내가 신문 칼럼과 방송을 끊은 이유다.

 

그리고 다시 돌아보니까 아이작 아시모프 등 유명했던 작가들의 에피소드들이 무슨 얘기였는지, 이제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물 들어 올 때 노 젓는 거, 그거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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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초기 소설에 관한 인터뷰를 보면 한국 독자들에 대한 각별한 감사의 말이 여러 번 나온다. 자신이 전업작가로 살 수 있게 된 건 순전히 한국 독자들 덕분이라는 거다. 그리고 주인공급 캐릭터들에 한국인이 등장한다. 절박함과 절절함의 표현이다.

 

나에게 사석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물어보는 것이 책으로 먹고 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첫 책이 2005년에 나왔으니까 대충 13년 정도 된 것 같다. 그 동안 먹고 살았으니 가능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2년 정도는 당대표 되기 이전부터 문재인을 돕기 위해서 시간과 돈을 썼고, 그 때를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책과 함께 살아온 것 같다. 나나 아내나 돈을 많이 쓰는 편은 아니라서, 아주 넉넉하게 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세 끼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애 둘 키우다 보니, 밥 먹을 때만큼은 우리 집도 중산층처럼 먹는다.

 

내가 처음 데뷔할 때 출판사 md들이 한국에서 처음 등장한 사회과학 전업작가라는 별칭을 붙여주었다. 정말 처음인지는 잘 모른다. 내 앞에 박현채 선생, 정운영 선생, 이런 분들이 계셨다. 이 분들은 딱히 직함이 애매하니까 경제평론가라는 말을 썼다. 나는 평론가라는 말은 정말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경제학자라고 했다. 그 시절에는 다들 대학 교수 이름을 앞에 걸었었다. 정운찬 선생이 나중에 총장 그만두신 다음에 호칭이 애매하니까 경제학자라는 호칭을 썼다. 이제는 그냥 경제학자가 사회적으로 호칭이 되었다. 학자에 가까울 것인가 작가에 가까울 것인가, 가끔 나도 해보는 질문이기는 했다. 지금 와서는 별 의미는 없다.

 

어쨌든 선진국을 비롯해서 많은 나라에서 책 써서 먹고 사는, 소위 전업작가의 숫자는 매우 드물다. 한국에서도 많지 않다고 알고 있다. 흔히 말하는 버는 사람은 벌고, 아닌 사람은 못 버는, 그런 건 아니다. 그 숫자 자체가 워낙 적다. 거의 없고, 아주 일부가 베르베르처럼 전업작가가 되는 데 성공한 정도, 그렇게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사회과학의 경우는, 아직은 나 말고 못봤다. 강준만 선생이 교수를 그만두고 글을 쓰는 경우 같은 건데, 우리나라에도 드물고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글을 쓰기 위해서 교수를 그만둔 사람으로 가장 유명해진 경우는 아이작 아시모프 정도 될 것이다. SF만이 아니라 과학책들도 꽤 썼다. 결국 글을 쓰기 위해서 전업작가가 된 경우다.

 

2.

엉청난 대박을 생각하면서 책을 쓰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하면서 대박을 낸 사람도 가끔은 보았는데, 그걸로 행복해진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으로 10년을 버티기는 불가능하다. 나보다 앞 순위에 있는 사람들은 때때로 등장한다. 그렇지만 오래 버티지를 못한 것 같다. 10년 전에 같이 활동하던 사람들 중에서 아직도 책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버티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냥 기계적으로만 계산을 하면, 1년에 2~3권을 내면 사는 건 가능하다. 그냥 회사 다닌다고 생각하면, 그보다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보고서 쓰거나 분석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고 생각하면 더 편하다. 그 정도는 일해야 구박받지 않고 회사 다닐 듯 싶다.

 

책은 크게 판매 수익과 부가수익으로 나눌 수 있다. 인세와 인세 아닌 것,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하다. 인세는 판매 부수에 따라서 결정된다. 많을 때도 있고 적을 때도 있다. 부가수익이라는 표현이 좀 그렇지만, 어쨌든 책과 관련해서 올릴 수 있는 소득이 존재한다. 인기 개그맨처럼 행사 뛰는 건 아니니까 책과 관련해서 발생하는 기고 등 원고 수입과 강연 수입이 있다. 그리고 드물지만 방송 출연으로 생기는 소득이 있을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10년 넘게 사회과학 전업작가로 버텨온 내 나름의 원칙이 있다. 이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드물지만 성공한 경우니까 참고는 될 것 같다.

 

3.

먼저 방송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나는 시민단체의 현장 싸움을 오래 하면서 새만금이나 골프장, 생태계 보호와 같이 방송에 사회적 이유로 나가야 할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꽤 일찍 방송을 한 경우이기는 한다. 물론 방송 안 느는 대표적인 지진아이기도 하고.

 

처음 시작하는 경우라면 방송 소득은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 좋다. 워낙 작고, 불규칙하다. 그리고 신경이 분산된다. 혹시 자신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대중들에게 더 알리는 것이 책 판매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예외적이고 효과가 있더라도 한시적이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와 같다. 자신이 나가서 다른 사람의 책을 파는 건 도와줄 수 있는데, 자기가 자기 책을 파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그렇게 책을 사지는 않는다. 그리고 시즌제 등 많은 돌발 변수가 있어서 그걸로 삶을 구성하는 것도 쉽지 않다. 10년을 해보고, 나는 방송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나가지 않는다고 원칙을 정했다. 특히 지금, 사람들은 책이 좋으니까 사지 TV에서 얼굴 봤다고 사지 않는다. 그럴 사람은 한국에 한 명도 없다. 방송이 체질이고 카메라나 마이크 앞에 서는 게 좋으면 하는 거지, 책과 관련해서는 방송은 잊는 게 좋다. 자기 책 자기가 팔자고 하면, 흉해 보인다. 그 사람이 공적으로 옳은 일을 할 때 지지하는 것이지, 지지해달라는 말만 듣고 지지할 사람은 없다.

 

새누리당 정권에서는 반대 진영의 방송 출연이 워낙 어려웠다. 그래서 어떻게든 채널이 열리면 무조건 나가라고 주위에서들 권했었다. 나도 그리 내키지 않는 것을 참고 했었다. 그렇지만 이제 정권이 바뀌었다. 선의로 나온다고 생각할 사람 별로 없고, 돈이나 인기를 위해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런 얘기 들어서 좋을 것 같다.

 

방송 다음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칼럼 등 매체 기고다. 내 경우만 놓고 보면, 매체 기고와 책 판매는 통계적으로 무관하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이 글을 보고 사람들이 책을 더 사주지 않을까 생각하는 경우라면, 그런 이유로 쓸 필요는 없다. 대부분의 특a급 소설 작가들이 정기 기고를 하지 않는다. 그게 도움이 되었으면 그들이 했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하고 쓰는 것은 원고료 때문인 경우가 많다. 이건 좀 슬프다. 지난 10년 동안 신문 등 원고료는 거의 오르지 않았고, 어떤 경우는 줄기도 했다. 게다가 보통은 6개월 정도 하고 필진 교체를 한다. 생활비 때문에 기고를 하는 경우, 교체되지 않기 위해서 좀 더 상관들에게 부탁을 해야할 것 같은 유혹을 느낄 것이다. 그런 아쉬운 소리는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신문 등 매체의 칼럼은 정말로 공익적 목적, 무엇인가 꼭 알려야 하는 것 혹은 문화적 다양성을 위해서 새로운 것들을 소개하기 위한 원래의 목적으로 쓰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낫다. 원고료를 놓고 생활비 구성을 꾸리면 나중에 아주 곤란한 상황이 온다. 진짜, 보너스라고 생각하는 것이 낫다. 그리고 많은 경우, 제대로 글을 쓰기 위해서 독서도 하고 취재도 해야 하는데, 결국은 원고비 보다 돈이 더 든다. 안 그러는 경우도 가끔은 있는데, 속에 든 걸 빼먹기만 하거나 맹탕으로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고 있다는 비난을 듣게 된다. 그런 이유로 나는 결국 정기적인 칼럼 기고는 그만두었다. 생활에 크게 도움되지는 않는다.

 

3.

연예인급으로 방송만 할 거 아니라면 방송이나 원고료가 아주 단기적인 급전 해결 이상은 안된다. 그래서 이런 소득을 기본으로 놓고 10년 정도의 생활을 계산하면 진짜 황망한 경우를 당하게 된다. 장기적으로 이러면 안되지만, 아직은 이런 데는 현실과 거리가 좀 있다. 최저임금을 몇 년 동안 올리자고 죽어라고 외친 작가들의 원고료는 최저임금과 무관하게 결정되는 것이 현실이다.

 

강연은 좀 다르다. 1~2권 나왔을 때에는 강연 요청도 별 게 없고, 단가도 아주 약하다. 그렇지만 몇 권이 나오면 판매와는 상관 없이 강연시장에서는 인기 강연자가 될 수 있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요즘은 강연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들이 생겨났다. 이런 데랑 연계되면 충분히 생활을 할 수 있고, 조금만 더 말랑말랑한 얘기를 할 수 있으면 몇 년 바짝 일해서 집도 살 수 있다. 강연만 가지고 집도 사고, 차도 사고, 가능하다. 그리고 열심히 하는 경우는 운전수 딸린 차도 운용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직업이 경제학자다. -방송, -원고료, 이 조합은 경제적으로는 무의미한 조합이고, -강연, 이 조합은 가능만 하다면 어지간한 회사 부장 자리 정도는 던지고 나와도 될 정도로 의미 있는 조합이기는 하다. 물론 지속적으로 좋은 책을 낸다는 전제 하에서 하는 얘기다. 회사 직원 연수, 지자체 공무원 교육 등 수요는 아직도 무한히 많다.

 

여기서부터가 정신 바짝 차릴 대목이다. 내가 강연에 대해서 정한 제일 큰 원칙은, 유료강연은 안 한다는 것이다. 나는 책을 파는데, 내가 하는 강연까지 독자에게 돈을 받는 건 내 양심상 안 맞는다. 일종의 2중 판매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유료 강연은 안한다. 그리고 좀 미안한 얘기지만, 차비도 안 되는 재능기부급 강연도 안한다. 친한 사람들 도와줄 일 있으면 차라리 그냥 해주지, 재능기부, 이렇게는 안한다. 아직 나는 그 정도로 여유가 있지는 않다.

 

시민단체, 고등학교와 대학교, 가능하면 지역단체와 도서관, 이런 데가 우선 순위다. 사회적 경제 책 같은 경우는 특별히 더 알리고 싶은 생각이 많아서, 이런 건 좀 무리해서 강연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렇게는 안 한다. 그러면 내가 돈 욕심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다.

 

강연자 입장에서 보면 강연은 좋은 시장인 것 같은데, 마찬가지로 강연도 비즈니스가 된 상황에서 기획자의 시선이라는 것도 있다. 보통 강연자의 수명을 2년에서 길면 2년 반 정도 본다. 물론 고르바쵸프나 클린턴처럼 영원한 인기 강사도 있는데, 그건 그 사람들이고.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것이 시효성이 2년 정도 될 것이다. 그 정도 되면 인기도 시들해지고, 하는 얘기도 유행하고 안 맞는다. 2년 동안 바짝 벌 것이냐, 장기전으로 갈 것이냐, 사실은 그 선택을 하는 것이다.

 

내가 내린 선택은, 공익적 이유 아니면 강연은 가급적 안 한다

 

강연은 소모성이다. 가진 것을 소모할 것이냐,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 것이냐, 그 중간에서 선택하는 것이 현실이다. 강연이 사회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걸 직업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작가에게 그렇게 좋은 일은 아닐 뿐더러 위험한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나중에 미사리에서 노래 부르기 위해서는 누구나 아는 히트곡이 두 곡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시작할 때 하나, 마무리할 때 하나, 이래야 미사리에서 쇼를 할 수 있다. 히트곡이 하나만 있는 가수는 미사리에도 서기 어렵다. 강연 시장이 그것과 비슷하다.

 

문화시장의 경제 법칙 그대로다. 문화 시장은 본원 시장이 튼튼해야 파생상품도 커진다. 영화로 치면 극장 관객수, 드라마로 치면 본방 시청률, 이런 거다. 책 시장도 마찬가지다. 본원 상품이 튼튼한 것, 이게 가늘지만 오래가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4.

좋은 책을 쓰는 것, 이거야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다. 한국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책을 처음에 쓰면 팔리고 싶은 책을 먼저 쓰고, 안 팔릴 얘기는 나중에 쓰고 싶은 생각이 든다. 출판사에서도 대부분 그렇게 권한다. 잘 팔릴 책 먼저, 안 팔릴 책 나중에, 이렇게 시도한 사람들이 한 권도 못 내거나 한 권 내고 사라져갔다. 첫 책에 빅히트,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좋은 전략은 아니다. 그게 되면 대졸자 절반은 전업작가를 할 것이다. 좋은 책을 쓰는 것도 어렵지만, 잘 파는 건 더 어렵다. 그리고 도서관이라는 게 존재한다. 생각 보다 특수 영역이다. 

책으로 먹고 살기 위해서 넘어야 할 첫 번째 관문은 많이 파는 것이 아니라 양서를 쓰는 것이다. 양서는 도서관에서 사주고 싶어하는 책이다. 도서관의 각종 위원회나 사서들은 책을 고르는 것이 직업이다. 팔기 위해서 쓴 책을 그들은 얄팍하다고 얘기하고, 읽기는 쉽지 않거나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그 도서관에 오는 분들에게 꼭 읽히거나 추천하고 싶은 책을 양서라고 한다. 양서를 쓰는 사람들은 우선적으로 도서관에서 사준다. 물론 그게 엄청난 권수는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책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 넘어야 할 첫 번째 벽이다. 그리고 일단 양서를 썼으면, 그 정도 수준에서의 최소한의 품질 관리를 해야 한다. 순서를 바꾸어서, 팔릴 것 같은 책을 먼저 쓰고,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뒤에 쓰려고 한다면, 도서관 사서들이 보기에는 없는 예산에 먼저 사줘야 할 양서 작가로 보이지 않는다. 일반적인 상품과 책이 다른 결정적 이유다. 보통 상품에는 도서관이 없다.

 

어떤 책이 양서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금방 알 수 있는 얘기다. 사회에 꼭 필요한 얘기, 더 나왔으면 하는 책, 다양성에 기야하는 책, 이런 책들이다. 물론 기준은 좀 보수적이다. 도서관이 원래 좀 보수적이다.

 

인터넷 서점에서는 양서를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쟝르별 구분과는 달리, 도서관에서 책을 사는, 명문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암묵적인 기준이 하나 있다. 팔리는 책을 먼저 써서 일단 생활을 안정시키고, 그 다음에 진짜 얘기를 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소기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을 많이 보았다.

 

이 개념을 이해한 사람들은, 도서관에서 부탁이 오면 정말 시간이 안 맞는 경우 아니면 어지간하면 간다. 책과 도서관, 끊을 수 없는 관계다. 도서관에서 별로 관심이 없는 책을 쓰면서 오래 버티려면 이제는 절대로 일반화될 수 없는 본인만의 기술과 장점이 필요하다. 이론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못 본 것 같다.

 

책을 파는 것과 좋은 책을 쓰는 것, 둘 중의 하나만 고르라면 역시 좋은 책을 쓰는 것이 길게 가는 길이다. 자신의 책을 소개하는 것과 좋은 책을 쓰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중에 고르라고 하면 역시 좋은 책을 쓰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순전히 이론적인 계산이지만, 정말로 좋은 책을 쓰고 운대와 흐름이 잘 맞으면 지속적으로 1억 원 정도의 소득을 인세로 올리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이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도시민 평균 소득 정도를 인세로 올리는 것은, 이 정도는 해볼 수 있는 영역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걸 위해서는 학위나 전공, 그런 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일본 출판시장이 그렇게 움직이는데, 한국도 점점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 2018년 도서 시장, 교수라고 더 사주고, 박사라고 더 사주는 그런 독자는 이제 없다. 점점 더 전문가 타이틀이 책 판매에 오히려 장애가 되는 시장으로 가고 있다. 규모가 줄어들어서 그렇지, 우리의 출판 시장의 흐름이 건전한 방향으로 가고는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남는 고민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것과 독자들이 읽고 싶은 것, 그 두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좁힐 것인가? 그건 모든 작가들에게 영원한 질문일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제 한 가지다. 돈을 벌기 위해서 책을 쓰면 오래 못 갈 뿐더러 정신 건강에 안 좋다. 하고 싶은 얘기를 하기 위해서 책을 쓰면, 한국의 독자들이 최소한의 삶은 유지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렇게 한국을 믿고 한국의 독자들을 믿고 가는 편이 낫다. 정신건강에도 그게 좋을 뿐더러, 현실적으로도 그게 유효하다.

 

책으로 먹고 살 수 있을까? 대학원 정도의 기본 훈련과 몇 가지의 간단한 원칙만 이해하면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것만 되면, 인생을 조금은 더 즐겁게 그리고 의미있게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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