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를 위한 독서 에세이

1.
출판사 레디앙하고 나하고는 특수 관계다. 책을 쓰기 전에 이재영과 친구로 지냈다. 알고 있는 게 너무 많기도 하고, 인격적으로도 나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다정, 다감 그리고 풍부한 감성.. 내가 모토로 삼는 ‘명랑’이 이재영이라는 인간 그 자체에게서 온 것이다. 이재영을 알기 전에는 명랑한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 파리에서 송두율 선생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명랑 스타일은 아니었다. 홍세화 선생도 밝기는 하지만, 명랑과는 좀 거리가 있는 듯. 게다가 내가 당신을 보던 시절에는 사모님이 편찮으셔서 그런지, 늘 삶의 걱정이 많았다.

‘88만원 세대’는 이재영에게 월급을 주어야 한다는 긴박감으로 마무리하게 된 책이다. 그리고 실제로 책 후반 작업을 이재영이 했다. 그게 레디앙에서 나왔다. 이광호 선배가 이재영에게, 같이 하자고 처음 제안하던 순간은 석촌 호수 뒤쪽의 어느 술집이었다. 그 자리에도 내가 있었다. 뭐, 목수정이 첫 책을 레디앙에서 내기 위해서 모였던 날에도 같이 있었다. 여의도 어느 골목의 닭갈비집인가, 하여간 닭 가지고 뭐 하는 집. 목수정과는 통화만 몇 번 하다가 실제 본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하여간 레디앙은 이래저래 특수관계가 된 출판사다. 그런 레디앙이 문 닫게 생겼다고 한다. 사는 게 뭔가 싶다. 한 때는 진보 정당의 거의 유일한 포탈이었던 곳이기도 한데, 진보의 위기와 출판계의 위기, 그런 게 섞여서 생겨난 현상일 것 같다. 뒷짐지고 모른 척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고. 그래서 가지고 있던 리스트 중에서 그나마 시간 안에 너무 무리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 하나를 꺼내 들게 되었다. 그게 ‘10대들을 위한 독서 에세이’다.

2.
모티브는 예전부터 있었는데, 스타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하게 영화평론가 전찬일 선생에게 헤세 책에 대한 서평을 부탁받았다. 책에 들어갈 건데, ‘수레 바퀴 밑에서’를 골랐다. 서평하고는 좀 다르게, 이게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뭐 그런 얘기들을 주섬주섬 짧게 썼다. 이게 쓰면서 약간 ‘작두발’ 받아서 쓴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는 건 몰라도, 몇 사람에게는 좀 임팩트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편집하면서 전찬일 선생한테, 이거 마지막으로 들여다보면서 눈물이 났다는 연락이 왔다. 감성이 생길 수는 있지만 울기까지야? 역시 부산영화제와 오래 인연을 가졌던 영화평론가의 감성이 남다르시긴.. (예전에 나도 전찬일 선생 초청으로 부산영화제에 갔던 적이.)

그래서 디자인된 책이 ‘10대들을 위한 독서 에세이다’. 에세이 형식을 빌린 건, 서평은 정말로 내가 싫어하지 않는 형식이라서. 50이 넘어서 보니까, 이 책이 나에게 무슨 영향을 미쳤는가, 그런 내용이 주가 된다. 책 내용이야 어차피 책 읽을 것을 전제로 하는데, 굳이 다를 필요가 없고.

내가 생각하는 핵심은, 내 가슴에 손을 얹어보고 정말로 수 십년이 지나서 지금 더 의미가 있거나, 나에게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미쳤던 책들..

3.
전면으로 나올 책이 ‘해저 2만리’와 ‘15소년 표류기’일 것 같다. 읽으라고 권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런 게 있는 걸 알기라도 하라고 권하는 책으로 다윈의 ‘비글호 여행기’가 들어갈 것 같다.

전부 다 내가 10대에 읽은 책으로만 할 생각은 아니다. 나이 먹어서 읽었는데, 10대 때 읽었으면 좋았을 것 같은 책들도 일부. 파운데이션이 들어갈 거고, 듄이 들어갈 거고, 에코의 책이 들어갈 거다. 그리고 아마도 은하영웅전설도.

과학 책도 일부 넣을 생각이다. 세이건의 부인이기도 했던 린 마굴리스 여사 책이 들어갈 거고, 여성 천문학자와 천문학의 현대적 발견과 관련된 천문학 책 한 권 골라서. 도넬라 메도 여사의 책이나 글을 꼭 넣고 싶은데, 번역된 게 없다. 정 안되면 우드 스탁에 대해서 썼던 신문 칼럼 한 개를 내가 직접 번역해서라 넣을까 싶은.

50권 정도를 다룰 건데, 한국 책이 문제다. 연암 박지원의 소설 하나랑 난중일기는 일단 넣을 생각이다. 그리고 자산어보도. 자산어보를 굳이 넣는 것은, 이 책이 도대체 어떤 책인지 제대로 된 설명을 아직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현대 소설은 좀 애매하다. 박경리 선생이 토지를 다음 주부터 다시 한 번 볼 생각이다. 신소설과 일제시대 소설 중에서 진짜로 내가 영향을 받은 걸 집어넣을까 싶고. 박민규 소설과 가장 최근의 소설로는 ‘82년생 김지영’을 넣으려고 한다. 어지간해서는 우는 일이 거의 없던 내가, 결국 이 소설 읽고 얼마 뒤에 울었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50권 – 실제로는 8권짜리부터 20권짜리들이 들어가니까 책이 50권인 건 아니고 – 정도를 추리고, 꼭지는 30개 내외로 해볼까 싶다. 그 정도면 너무 두껍지 않은 책 한 권이 되지 않을까 싶다.

3.
경제학 논문을 읽으면서 우는 일은 벌어지기 어렵다. 울었던 것은 아니지만 딱 이거다 싶은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1995년 박사 논문 제출하고 나서 미국경제학회지 몰아서 읽던 중에 경제학의 반성과 관련된 콜로키움 특집이 있었다. 거기서 ‘other-wise bright student’라는 표현을 봤다. 뭐, 그 얘기를 한국에서도 가끔 해봤는데, 내가 표현을 잘 못해서 그런지, 전혀 사람들에게 감흥을 이끌어내지 못한. 그냥 나만 혼자 감동한 얘기였나봐, 그렇게 가슴에 놓고 산 게 20년이 넘는다.

얘기는 간단하다. 미국 주류 남성이 아닌 학생들, 유색인과 여성들, 이들이 경제원론 시간에 들어오면..

뭐, 좋은 대학의 경제원론 수업까지 왔으니까 당연히 bright student이기는 할텐데, 기존에 경제학을 공부하던 나름 상층부 주류 남성들이 아니니까, other-wise.. 이 사람들은 경제원론 듣자마자, 당연히 똑똑하니까, 아 이 수업은 나를 위한 수업이 아니구나, 바로 수강철회하고 나가버린다고 한다.

이 현상을 최근에 유심히 지켜보던 노교수가 펜을 들었다. 야 이 양아치들아, 니들이 바로 기득권이여.. 지금 경제원론으로는, 아니 지금의 경제학 프로그램으로는 ‘다른 방식으로 똑똑한 학생들의 관심을 전혀 못 끈단 말이여. 젠더 경제학 같은 게 필요하다는 얘기의 앞머리에 달린 논문이었다. 그게 미국경제학회에서 발표되었고, 당시에는 대대적인 관심을 끈.

그 논문이 나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다. 나에게 욕하는 많은 주류 인사들은, 저 린간은 왜 스스로 비주류의 세계로 들어가서 인생 망치고 사는가, 한탄을 하거나 욕을 디지비게 하거나. 이제 내 인생은 50이 넘어서 다시 주류 세계로 돌아간다고 해봐야, 내가 재미 없어서 못 한다. 그렇지만 다른 세계에도, 니들이 내깔려 둔 그 세상에도 bright student가 있음이라!

4.
제목은 아직 모르겠지만, 하여간 부제는 정해졌고.

일정이 좀 더럽게 엮였다. 올해는 당인리, 내년에는 이승만, 그렇게 소설 두 권을 메인으로 잡으면서 나머지 일정들은 다 뒤로 미루어 놓았다. 그러니까 책 한 권 쓸 시간이 난 게 아니라, 많은 에디터들과 출판사들의 양해 덕분에 잠시 책 쓸 일정들이 생긴 건데.. 그래도 레디앙 문 닫게 방치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감? 그렇게 시간을 좀 냈다.

당인리와 농업경제학은 가을까지는 우야둥둥, 마무리가 끝날 것 같다. 그렇게 올해는 책 두 권만 내고 시마이.. 하려고 했는데, 실제 출간은 모르겠지만 급하면 당겨서 연내에라도 작업을 할 수 있게, 가을에 독서에세이 작업을 하려고 한다.

개인적인 의미는 이렇다. 농업경제학이 10대들 얘기를 주로 다룰 거라서, 그 감성으로 10대들을 위한 독서 에세이까지 붙여서 한 번에 작업을. 그리고 당인리는 30대~40대 여자들에 관한 얘기가 메인이라서, 그 느낌을 더 발전시켜서 내년에는 젠더 경제학으로. 그리고 10대 얘기와 30대~40대 여성의 두 테마를 크게 한 번 다룬 다음에, 그 얘기들의종합판으로 내년 말에 도서관 경제학을.

그 다음에는? 아직 잘 모르겠다. 미루고 미루다, 이제는 계약을 해야 하는 소설책들이 몇 권 있고. 사회과학은 젠더 경제학과 도서관 경제학 이후로는 아직 일정이 없다. 직장 민주주의 책이 너무 안 팔려서 별 방법 없이 강연도 했다. 그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해서, 사회과학 책은 솔직히, 무서워서 아직 엄두가 안 난다. 예전에 준비해둔 일정만 진행하고, 추가적으로는 주제를 못 잡고 있다.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면 뭔가 또 생각이 날 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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