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독자 티타임을 했는데, 약간 놀랄 일이 생겼다. <슬기로운 좌파 생활>은 망한 책이기는 하지만, 내게는 의미가 있는 책이다. 내가 누군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런 걸 정리한 에세이집이다. 나한테는 전환점이 되는 큰 의미가 있는데, 사람들에게는 별로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후로는 에세이집을 못냈다.
그 책을 보고 나머지 책을 찾아봤다는 독자가 오셨다. 아이고. 책 내용에는 별 문제가 없는데, 결국 내가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세이 중에 명사 에세이라는 분류가 있다. 첫 에세이집 <1인분 인생> 냈을 때 괜찮았다. 그때만 해도 나도 명사로 분류하면 턱걸이로 명사에 들어가는 것 가았다. 지금은 명사, 택도 없다. 결국 책이 아니라, 내가 문제인 셈이다. 어쩔 거냐. 그냥 그렇게 된 건데.
며칠을 깊게 생각했는데, 결국 도서관 책 다음에 출간하기로 되어 있는 죽음 에세이를 올해 연말로 출간을 연기하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질까? 그래도 지금 바로 내서 망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뭔가 기대할 수 있는 시간을 좀 갖기로 했다.
고칠 때에도 좀 더 직진스타일로, 좀 더 전복적으로 그리고 ‘개막장’ 스타일을 더 적극적으로 반영해서 고치기로 마음을 먹었다. 직진과 유머, 그리고 “그건 아니라고 본다”, 그렇게 좀 더 명확하고, 좀 더 전복적인 스타일로 가기로 했다. 독자들이 볼지 안 볼지, 그런 걸 너무 신경 쓰고 있었다는 반성이 있었다. 워낙 안 팔리니까, 나도 별 수가 없었었다.
프랑스에서 대학원 입학할 때에는 불어 공부한지 얼마 안 되어서, 그냥 소리소문 없이 조용히 있었다. 입학 시험 정말 가까스로 붙었는데, 나중에 외국인 학생끼리 모아서 하는 어학수업에서 내가 꼴찌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나는 꼴찌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나 보다. 그래도 워낙 꼴통스럽게 2학기부터는 열심히 손 들고 질문도 하고, 그렇게 보냈다. 석사 논문이 워낙 높은 점수를 받아서, 졸업할 즈음에는 문제적 학생이 되어 있었다.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얘기를 입에 달고 살았었다.
부당하고 이상한 것에 대해서 그냥 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총리 회의에 배석해 있다가, “총리님, 그건 안 됩니다”, 벌떡 일어나서 얘기한 적이 있었다. 하이고. 나도 어지간히 꼴통이었다. 그때 있던 심의관과 경제조정관이 “쟤 말이 맞습니다”, 이렇게 해주어서 그냥 넘어갔다. 사실 누군가 안 된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기는 했다. 그게 김대중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시껍한 일이기는 한데, 그 후에 장관 표창을 받았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해야 한다는 심정으로 살았다.
영화 <졸업>의 그 개막장 스토리를 보면서, 이 개막장의 시대에 무엇을 내가 잊고 있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만난 개막장에 대해서 좀 더 전복적이고, 개김성을 생각해야 했다. 이제 무난하게 말하면, 무난하게 망하는 나이가 되었다. 아닌 건 좀 더 아니라고, 좌우 돌아보지 않고, 좀 더 재밌는 스타일로 말해야 한다, 이런 게 요즘 내가 얻은 교훈이다.
최근에 출간 리스트를 약간 조정을 하면서, 농업 경제학을 다시 리스트에 올렸다. 농민들은 책을 안 읽으니까, 그야말로 깝깝한 책 주제로는 가의 역대급이다. 죽음도 밝고 전복적으로 다룰 수 있다면, 농업도 다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희망을 다시 가져보게 되었다.
책이 내용을 파는 것이 아니라 스타일을 파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내 책이 어려운 것은, 스타일의 실패라는 게 내 생각이다. 윤석열이 저러고 있는 동안에, 너무 얌전하고 너무 조근조근, 다 잘 될거야, 이렇게 택도 없는 애기들을 하고 있었다는 반성이 들었다.
박근혜가 막장이라면, 윤석열은 진짜 개막장이다. 저 정도로 확 맛이 간,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몰랐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암덩어리가 뇌에까지 도달한 것 같은 한국, 빨간약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항생제 같은 게 전혀 안 먹히는 거, 당연한 거 아니겠느냐.
명사가 되는 건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더 전복적이고 확 깨는 스타일을 만드는 건 내가 해볼 수 있는 일이다. 그야말로 몸부림을 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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