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학

책에 대한 단상 2023. 2. 23. 14:48

글로는 쓴 적이 없는데, 말로는 '기분학'이라는 용어를 가끔 쓴다. 기분은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런 얘기를 설명할 때 쓴다. 부동산과 관련해서 강남과 관련된 많은 얘기들은 기분학인 경우가 많다. 기분은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 경우. 남녀 문제에 대해서도 기분학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많다. 경제적으로 보면 여성의 힘이 남성을 추월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게 대표적으로 기분학이다. 기분은 그런데, 그런 수치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천아람 인터뷰를 몇 개 챙겨봤는데, 그가 젠더에 대해서 하는 얘기들은 대체적으로 기분학에 해당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대착오적"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가 인식하는 이 시대가 적어도 젠더 문제에 대해서는 기분학이 아닐까 싶다. 

안철수가 얘기하는 과학도 상당 부분은 기분학과 가깝다는 생각이. 과학방역 얘기할 때, 그의 과학은 그야말로 통치 집단의 기분에 따라, 그때그때 상황 논리에 더 가까운 것 같아 보였다. 

https://www.khan.co.kr/national/gender/article/202302230550011

 

[‘27년 꼴찌’ 성별임금격차] 여성이 평생 못넘는 벽 ‘28~30세 남성’

여성이 생애 가장 높게 달성할 수 있는 평균임금은 남성이 28~30세에 받는 평균임금의 문턱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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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휴머니즘이라는 표현은 mb 때 kbs 사람들하고 경제방송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처음 생각했던 개념이다. 물론 나는 휴머니즘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동물권은 물론이고 바위와 산 혹은 갯벌의 존재권에 대해서 생각하던 시절이다. 인간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에 경제 휴머니즘에 대한 생각을 한 것은, 상황이 너무 안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얘기를 같이 하던 사람들이 mb 시절 결국은 뿔뿔이 흩어지고, 나는 kbs 사장에게 단디 찍혀서 방송에 나올 수 없게 되었다. 그냥 흐지부지해졌다. 

오랫동안 경제 휴머니즘은 딱히 손을 보지 않고, 가끔 라디오에서 내가 생각하는 경제에 대해서 설명할 때 잠깐씩만 얘기하고는 했다. 휴머니즘은 올드한 용어다. 21세기에 이 용어가 과연 사람들의 마음을 잠시하도 담을 수 있을지, 그런 걸 잘 모르겠다. 경제와 휴머니즘은 결합시켜볼 수 있는 용어이기는 한데, 말 자체가 그렇게 매력적이지는 않다. 

이 올드한 용어를 다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결정적으로 법원의 50억 무죄 판결을 본 이후다. 800 원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버스 운전사의 해고를 합당하다고 했던 법원이 50억 원에 대해서는 뇌물이 아니라고 했다. 물론 검사나 판사나, 다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제대로 된 범죄 입증이 안 되었고, 증거는 불충분해서 다르게 판결을 내릴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게 과연 인간으로서 할만한 합당한 일인가? 법조계 바깥의 시선으로 보면,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것이다. 

오세훈이 이태원 참사에 대한 추도관을 녹사평역 지하 4층에 설치하라고 했다. 그리고 공개된 자리로 나오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그냥 공권력 동원해서 끌어낸다고 했다. 이유야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건 휴머니즘에 반하는 행정이다. 자식과 친지가 죽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야박하게 할 수  있을까? 정치만 있고, 휴머니즘은 없다. 

윤석열 시대에 가장 결여된 것을 하나만 지적하자면 경제 휴머니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법이 앞서고, 그 법은 강자들의 법이다. 그걸 정의라는 이름으로 말할 수 있다. 롤즈식 최소 기준으로 보면 윤석열 행정은 많은 경우 정의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 절차도 약하다. 공론장, 이런 것은 있는 흉내만 내고, 진정한 토론은 없다. 공감은 더더군다나 없다. 

툭하면 ‘빨갱이’라고 그런다. 아주 거친 방식으로 이념이 다시 복귀하는 중이다. 빨갱이라는 말에는 “죽여도 좋다”는 의미가 뒤에 숨어 있다. 세상에 그냥 죽어도 좋은 사람은 없다. 그런 게 휴머니즘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 구하다 죽은 것도 아니지 않느냐”, 그렇게 말할 수는 있지만, 자식이 죽은 부모에게 휴머니즘이라는 생각으로는 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대결을 하고 공격을 하더라도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이 있다면, 그 선이 바로 휴머니즘이다. 

인간의 도리 같은 복잡하고 종합적인 건 사실 나는 잘 모른다. 그렇지만 경제가 어떤 모습으로 가야 최소한의 경제 휴머니즘일지, 그런 건 좀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윤석열 시대에 가장 결여된 것은 경제 휴머니즘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좀 더 해보려고 한다. 법이 경제를 만들어주지 않는다. 법이 말하는 정의와 경제적 정의는 아주 거리가 멀다. 각자 자신의 정의를 주장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래도 최소한의 경제 휴머니즘 정도는 공유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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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적으로 일정을 마음 속으로 잡으면 거기 잘 맞췄던 편이다. 몇 년 전부터 일정을 잘 못 맞추기 시작했다. 지난 연말부터는 집중 자체가 잘 안 된다. 연말에는 우리 집 어린이들 방학이 시작되었다. 어린이들의 방학은 직장인의 휴가와는 다른 것 같다. 휴가 시작할 때와 끝날 때, 뭐가 많이 변하지는 않는다. 그저 휴가는 늘 짧기만 하고, 끝나갈 때면 아쉽기만 하다. 

어린이들의 방학은 좀 다르다. 열 살, 열두 살, 방학 동안 몸무게도 변하고, 키도 변한다. 심지어는 선호하는 책은 물론, 보던 만화의 종류도 바뀐다. 큰 애는 그렇게나 좋아하던 포켓몬을 끊었다. 끊었다기 보다는 시시해진 건데. 포켓몬 만화만 안 보는 게 아니라, 그 동안 모았던 포켓몬 카드를 앨범째 동생에게 주었다. 달라고 했더니 “그래”, 그리고 그냥 줬다. 그만큼 다른 것이 더 재밌어진 거. 몇 년째 하던 레고 대신 며칠 전부터 건담 조립을 시작했다. 직장인에게는 며칠 사이에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스트레스 덜 받는 방학 때 어린이들은 부쩍 키가 큰다. 그리고 키가 크는 만큼 취향도 변하고, 관심도 변한다. 

처음에 애들 키우기 시작하면서 할아버지들이 “애 보는 게 그렇게 어려워?”, 그런 얘기를 종종 했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들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까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애를 본다”는 걸 정말로 지켜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할아버지들이 적지 않았다. 똥 기저귀를 한 번도 갈아보지 않고 한세상 떠나는 남자들이 꽤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어린이가 되면서 기저귀가 필요 없게 될 때 얼마나 일상에 큰 변화가 오는지, 그 기쁨을 알려주고 싶은데, 알아 처먹는 할아버지들이 별로 없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 아버지가 똥 기저귀를 한 번도 갈아보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나셨다. 

어린이들 방학 때면 내가 죽어난다. 이제는 기저귀 가는 나이도 아니지만, 집에 있다 나갔다, 하루 종일 둘이 서로 다른 스케쥴로 왔다갔다 하고, 그런 데 맞추다 보면 한두 시간 여유가 나도 뭔가 하기가 어렵다. 그냥 문득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손톱이 길면 자판을 치기가 어렵다. 그래서 손톱을 깎는다. 그리고 다시 손톱이 자란다. 그리고 다시 손톱을 깎는다. 그리고 다시 손톱 깎아야 하는 순간이 왔는데, 컴퓨터에 작업하던 페이지가 거의 그대로인 걸 보면.. 후아.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 

좌절, 절망, 그런 생각들이 지나가지만, 그래도 그렇게 마음이 슬퍼지면, 하루하루가 더 슬퍼진다. 이럴 때면 ‘명랑’이라는 단어가 좀 도움을 준다. 삶은 이기고 지는 게 다가 아니다. 얼마나 재밌게 살고,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마음을 잃지 않는지, 그런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기고 또 이기면 즐거울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삶은 과정일 뿐이고, 궁극적으로 도달하고 싶은 곳이라는 건 없다. 삶에 무슨 목표가 있겠느냐? 

그냥 과정을 즐기려고 한다. 물론 어린이들의 방학을 즐기기는 어렵지만, 한없이 일정이 늘어지는 것과, 그때마다 나머지 일정을 조정하게 되는 과정, 그런 매일매일의 좌절도 그냥 즐기려고 한다. 

예전에는 이럴 때 카페에 노트북 가서 써보기도 하고, 어딘가 지방 같은 데 가서 마무리하고 온 적이 있기도 하다.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한 책들이 대부분 망했다. 그래서 좋으나 싫으나, 그냥 어린이들하고 줄구장창 지지리 궁상을 떨면서 그냥 한다. 매일매일 인상 쓰면서 살 수는 없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면서 또 웃고 지나간다. 

어저께 저출생에 관한 책 제목을 정했다. “모두의 문제는 아무의 문제도 아니다”. 이 생각을 한 건 좀 되는데, 이걸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까, 그 책을 누가 보겠냐, 그런 딜레마에 당연히 빠지게 된다. 논리적인 충돌이고, 이럴 때에 아이러니라는 표현을 쓰면 좋을 것 같다. 그냥 담담하게, 가장 정직한 제목을 쓰기로 결국 마음을 먹었다. 아마 10년 전이면 이런 제목을 못 잡았을 것 같은데, 지금은 가능하다는 생각이 문득. 

과정이 즐겁기 위해서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 이런 걸 좀 배웠다. 한 자락 깔고 기교를 부리거나, 멋을 내는 게, 그게 결국에는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짜로 즐겁다고 하는 게, 진짜로 즐거울 리가 있겠느냐?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나는 못 속인다. 생각이 복잡할수록 더 간단한 원칙을 가지고 생각하지 않으면, 나중에 엉켜서 결국 하나마나한 생각의 연속일 뿐, 결코 미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 같다. 그저 가급적이면 즐겁게 그리고 정직하게. 이제 50대 중반, 내가 삶을 대하는 원칙은 이제 아주 단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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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어린이들 방학이 아직 절반 밖에 안 지났다. 하이고. 정신이 혼미하다. 아내는 2월에 지방 출장이 두 번 있고, 다음 달에는 해외 출장이 있다. 여자가 일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요즘 새삼 지켜보는 중이다. 흔히 유리 천장이라고 쉽게 얘기하지만, 그 구간을 지나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런 생각을 조금씩 해보게 되었다. 이게 다 자본주의라서 그렇다고 간단하게 말하기에는, 그 시스템이 제법 복잡한 것 같다. 

저녁에 나가는 모임이 있고, 아침에 나가는 모임이 있다. 보통은 저녁 때 나가다가, 좀 높은 위치가 되면 아침에도 나간다. 한 번은 외국 인사를 아침 모임에 강사로 부른 적이 있었다. 나중에 그가 물어봤다. 너네는 이렇게 사냐? 응. 왜 이러구 사냐? 그러게. 나도 싫은 데 어쩔 수가 없네. 너 미국 와라, 이게 사람 사는 게 아니다. 내가 초청해줄께. 괜찮아. 나도 조금만 하고 말거야. 

애들 보면서 고정적으로 만나는 걸 다 없앴다. 없앴다기 보다는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렇다. 감소소모라고 말한다면, 한국은 감정 소모가 아주 많은 스타일의 삶을 살아간다. 물론 외국에도 파티가 있기는 한데, 그건 아주 정형화되어서 특별히 형식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감정 소모라고 하지만, 사실 어른들하고 만나면서 감정을 소비하는 건 어린이들하고 지내는 것에 비하면 좀 덜 피곤한 것 같다. 어른들하고는 적당히 얘기하고, 적당히 숨겨도 별 일 없다. 어린이들은 새로운 우주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같아서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미래의 삶에 영향을 준다. 참 웃기는 일이기는 한데, 그게 신경이 바짝 서기는 한다. 

중고등학생들에게 선물을 해야 할 일이 생기면 만년필 선물을 한다. 이거 고르기도 만만치 않다. 요즘은 특히 인생 첫 만년필일 가능성이 높다. 너무 고급스럽지 않고, 너무 고풍스럽지 않지만 기술적 완성도도 높은. 그리고도 예쁜. 얼마 전에 고등학교 올라가는 조카에게 만년필을 선물했는데, 역시 고르기가 만만치가 않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막내 이모부가 외국 갔다 오면서 대한항공에서 주는 쉐퍼 만년필을 선물한 적이 있다. 그 양반에게 만년필 선물을 두 번 받았다. 중학교 때에는 파카를 받은 적이 있다. 막내 이모는 폐암으로 오래 살지 못하셨다. 그리고 재혼을 하면서 보게 될 일이 별로 없지만, 그렇게 받은 두 자루의 만년필의 기억은 평생을 가게 되었다. 친가에서는 4년제 대학을 내가 처음 들어갔다. 아버지는 고졸, 어머니는 전문대 졸, 그나마 이 양반들이 집안에서는 나름 공부를 한 편인데, 공부와는 좀 거리가 있는 집안에서 자랐다. 만년필이 내 삶을 조금 바꾼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어린이들 혹은 중고등학생들 만날 일이 있으면 그래서 아주 조심스럽다. 짧은 한 순간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그 작은 우주에서는 아주 큰 사건이 될 수 있다. 감정 소모라는 말을 쓰면, 꼭 먹고 살기 위해서 만나는 것 보다도 더 어린 사람들을 만날 때의 소모량이 더 많은 것인지도 모른다. 

젠더 경제학 출간을 내년으로 미룬 이유 중의 하나가, 이건 인터뷰 작업이 좀 필요한데, 지금 같아서는 인터뷰는 개뿔.. 당장 꼭 만나야 하는 사람들도 못 만나고 있는데. 사실 인터뷰 작업을 안 하고 있는 건, 차 한 잔 마실 일정을 내기 어려운 것도 있지만, 그들이 겪게 된 어려움이나 고통을 듣고, 다시 그걸 구조화시켜서 정리할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역시 감정을 소모해야 하는 일인데, 사실 엄두가 안 난다. 

40대 여성 직장인의 정신질환에 대한 수치 같은 것을 좀 확인해보려고 하다가..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도 상담을 하는 비율이 꽤 된다. 그나마 병원에 가면 좀 낫다.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건, 숨 크게 쉬고, 마음 크게 먹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간만에 김광석 앨범을 듣다보니, 정말 오랜만에 김민기 노래가 듣고 싶어졌다. 학교 앞에 재즈 오즈라고 하는 카페가 있었는데, 줄구장창 김민기 LP만 틀었다. 한 번은 수업 너무 들어가기 싫어서 땡땡이치고 커피 한 잔 마시면서 김민기 노래를 죽어라고 들었던 적이 있었다. 문득 그때가 생각이 났다. 대학교 2학년 때 생각해보면, 나도 참 멀리 왔다는 생각이 문득. 그때는 내가 이렇게 살고 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오전에는 골프 치고, 저녁에는 술 마시는 내 또래 친구들의 삶과는 나는 아주 먼 곳으로 온 것 같다. 젠더 경제학에서는 여성 경제인과 여성 금융인들에 대한 얘기가 한 파트 들어간다. 살다보니 내가 아는 여성들의 상당수가 이런 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아직 그런 감정 소모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결국 내년으로 밀게 되었다. 

내년에는 젠더 경제학과 청년 경제학, 그렇게 두 개로 가게 될 것 같다. 청년 얘기는 몇 년 전 어느 대학 학생상담소의 부탁으로 결국 학교 상담실 문을 두드린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계기가 되었다. 그것도 눈물 나는 얘기들이 많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기존에 있던 시리즈에 약간의 수정을 했다. 

성공하고 잘 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다루어본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내가 다루는 얘기들은 다들 어렵고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다. 대개는 자본주의 문제인데, 그 어두운 곳을 주로 살펴보게 된다. 

그래서 나는 더 행복하려고 하고, 더 편안하려고 한다. 그리고 가능하면 더 명랑하려고 한다. 내가 힘들면 다른 사람 힘든 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내가 편안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 어려운 얘기를 감당하기가 어렵다. 

책으로 돈 버는 것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건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이해하는 한 가지는, 할 얘기가 있어서 책을 쓰는 거지, 책을 쓰기 위해서 할 얘기를 찾는 건 내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 나는 할 얘기가 없어지면 이제 책을 그만 쓸 것 같다. 아직은 못다한 얘기가 좀 남아서 이러고 있다. 

책 쓰는 법에 대한 에세이를 한 번 쓸려고 했었는데, 그건 없앴다. 지금쯤 되면 책을 어떻게 쓰는지 좀 알 것 같았는데, 아직도 잘 모르겠다. 책 쓰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쓴 것도 좀 봤고, 심지어는 동영상 강연도 좀 봤다. 나는 별로 공감은 안 갔다. 나는 저렇게는 못 할 것 같아.. 50권 가까이 썼는데, 책 쓰는 법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약속해놓은 게 있어서, 그건 죽음 에세이로 바꿨다. 책은 잘 모르겠지만, 나이 먹어가는 것,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 그런 건 좀 할 얘기가 있을 것 같다. 

이번 정권이 가기 전에 이승만 책을 낼 생각이 아직도 있다. 진작에 하려고 그랬는데, 부산에서 2~3달 조사를 해야 한다. 딱 계획 짜고 있었는데, 바로 코로나 국면이었다. 애들 두고 움직이려면 조금은 더 커야 할 것 같고, 나의 재정상태도 지금보다는 조금은 더 안정되어야 한다. 하필이면 부산을 중심으로 잡아서, 애로사항이 많다. 그래도 그런 스케일 있는 얘기들도 좀 해보고 싶기는 하다. 다시 한 번 장기 계획으로 밀어 놓는다. 

한동안 출간 스케쥴이라는 게 거의 없이 그냥그냥 애들하고 버티면서 살았는데, 이제 내년 일정까지는 어느 정도는 정리되는 것 같다. 정말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것들만 하면서 살아갈 생각이다. 학교도 그만뒀고, 강연도 안 하고, 방송도 안 한다. 애들 보면서 이런 것까지 하는 건 무리데쓰.. 남들하고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 같은데, 여력이 안 되어서 방법이 없다. 지금까지 보면 책 인세하고 생활비하고 대충 평균적으로는 딱 맞는 것 같다. 물론 평균이다. 안 맞는 해도 좀 있다. 스피커 살 여유까지는 없다. 20년 가까이 새 스피커나 앰프 없이, 그야말로 책 쓰기 전에 가지고 있던 장비들로 버틴 게.. 그럴 여유까지는 없어서 그렇다. 환갑까지 몇 년, 이렇게 지내는 데에 아무 문제 없다. 그저 바란다면, 우리 집 어린이들 방학이 빨리 좀 지나갔으면, 그런 소소한 소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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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왔습니다. 저의 올해 소망은 아주 소박합니다. 아내가 올해는 건강했으면 좋겠다, 그게 올해 소망의 전부입니다. 작년에는 아내가 응급실에 갔었는데, 올해는 안 그랬으면 좋겠다는 정도입니다. 큰 애 임신 중에도 천식으로 아내는 며칠 입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애들 아픈 거야, 해마다 아프니까 올해도 그 정도 선에서 아플 거 같구요. 

저는 작년에도 그랬지만, 올해도 별 다른 목표는 없습니다. 그냥 정해진 일들을 정해진 속도대로, 물론 그 속도로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렇게 그냥 하는 평범한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욕심 같은 거 털어낸 것도 벌써 몇 년 되는 것 같습니다. 

되고 싶은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올해도 그런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미 많이 가졌는데, 더 가지고 싶어서 발버둥치지 않는 그런 한 해가 되기를 올해도 바랍니다. 

개인적으로는 올해는 문명에 대한 얘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만든 문명을 좀 돌아보는 한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차분한 설날을 맞으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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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책에 대한 단상 2023. 1. 10. 10:08

작업실을 따로 안 만든 제일 큰 이유는 돈 때문이다. 책 인세라는 게 뻔해서, 구조적으로 옆으로 새는 돈들을 줄여야 장기적으로 편안해진다. 나라고 사고 싶은 게 없지는 않은데, 아직 그럴 형편이 아니다. 20년 넘은 앰프와 스피커를 아직도 껴안고 있는 건, 그게 더 좋아서가 아니라 그럴 형편이 아니라서 그렇다. 비싼 만년필을 써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럴 때면 그냥 새 잉크를 사서 기분 전환을 하고 만다. 잉크가 아무리 비싸봐야. 

이제 작업실을 만들기를 포기한 것은 애들 봐야하는 상황에서, 작업실이나 이런 거 생각할 처지가 아니라서 그렇다. 아무리 집 가까운 데 구한다고 하더라도, 왔다갔다, 번거롭다. 둘째는 버스는 타는데, 차 많이 다니는 길을 가기에는 아직은 좀 무리다. 

책 마무리할 때면 나도 집중해서 긴 시간이 필요하기는 하다. 전에는 카페에 가서 써보기도 하고, 지방에 며칠 가서 마무리하고 오기도 했다. 그렇게 한 책이 공교롭게도 다 망했다. 꼭 그래서 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망하는 게 확실한 길을 일부러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림을 그려서 엄청난 공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자료를 두기 위해서 방대한 공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책도 많이 버렸고, 이제는 수없이 책을 사고, 또 그만큼 뭉텅이로 버리는 데에도 익숙해졌다. 현실에 맞추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여전히 매주 몇권씩은 책을 산다. 그나마 책이 있으면 상당히 해피한 경우다. 

아침에 둘째는 학교에서 하는 주산 교실에 갔다. 가는 건 아내가 출근하면서 데리고 갔고, 10시 반에 데리고 와야 한다. 시간이 잠시 나는데, 나도 사람이라.. 짧게 짧게 남는 시간에 집중이 쉽지 않다. 목요일에는 둘째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한다. 그 와중에 회의 나와달라는 넘들은 또 왜 이리 많은지. 

메일에 자동으로 "집필 중"이라고 답 메일이 가도록 하고, 전화 치운 사람들 심정이 이해가 된다. 그렇다고 우리 집 어린이들 전화를 안 받을 수는 없고. 

어린이들 방학 때에는 늘 이렇게 고롭다. 이게 작업실을 구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다. 아니, 삶에는 해결이라는 게 없을지도 모른다. 그냥 아직 오지 않은 다음 문제를 기다리면서 잠시 마음의 평온을 누리는 것일 뿐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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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 하요, 제목이 길기도 하다, 하여간 이런 영화 봤다. 순전히 얼마 전부터 집중적으로 듣던 엔리오 모리코네 음악 때문에 봤다. 어렸을 때 tv에서 죽어라고 해주던 거라서 여기저기 끊어서 보기는 했는데, 전편을 다 본 건 처음이다. 

본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엑소시스트 2>를 몇 년 전에 봤다. 음악이 기똥찼다. ‘리건의 테마’만으로도 충분히 즐기면서 볼 수 있었다. 메뚜기라는 모티브를 사실 이 영화에서 얻었다. 결국 쓸 데게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이것도 엔니오 모리코네 음악이다. 사실 엑소시스트는 3편을 먼저 봤는데, 너무너무 재밌었다. 20대에 3편을 보고, 30대에 1편을 보고, 50대에 2편을 보았다. <엑소시스트> 3편은 그렇게 내 인생 영화가 되었다. 파리에서 극장에서만 세 번을 봤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 이것도 제목 더럽게 기네 – 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 사이의 공통점은 사소하게, 음악이 둘 다 엔니오 모리코네라는 점.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둘 다 대표적인 마초 영화. 하나는 멋지게 총 쏘고 뒤돌아서 사라지는 마초, 다른 하나는 그 마초들이 삶 뒤의 어둡고 쓸쓸하고 혹은 추접한 면을 드러낸. 

음악이 너무 궁금해서 결국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를 봤는데, ‘쓸 데 없이 고스펙’이라는 단어가 생각이 났다. 아니 여자가 기차 역에서 내려 누군가를 찾는 이 장면에서 이 음악이 쓰였단 말이야? 마카로니 웨스턴이라고 사람들이 얕잡아 봤지만, 그 마카로니에는 엔니오 모리코네가 있었다. <역마차>에서 <하이눈>까지, 정통 서부영화에서 사용된 음악들을 전부 오징어 만들어버렸던. 50년 정도 시간이 흘렀는데, 서부영화는 이제 사라지고 아무도 기억 못하는 영화가 되었지만,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은 그것들보다 더 길게 남은. 요요마가 엔니오 모리코네 시리즈 앨범을 냈다. 어지간한 소프라노나 테너들이 소프트 버전 앨범 내면 엔니오 모리코네 노래 한두 개는 꼭 집어넣게 된다. 

배역이 엄청나게 화려하다. 헨리 폰다. 사실 헨리 폰다 악역으로 나온 건 처음 봤다. 나이 먹은 헨리 폰다의 연기 엄청 좋아했다. 그리고 사나이 중의 사나이로 찰스 브론슨이 나온다. 어린 시절 화장품 광고로만 봤지, 정작 영화에서 본 건 몇 개 없다. 

마초 영화이기는 한데, 처음 보는 여배우를 중심으로 얘기가 진행된다. 프로필을 찾아보니까 튀니지 출신이다. 영화에서는 어마무시하게 아우라 넘친다. 결국 한 여인과 그녀 주변을 맴도는 네 남자의 얘기다. 결혼식날 살해당한 남편까지. 

어리버리하게 돈이 많다는 남자한테 속다시피해서 결혼을 한 여자가 남편이 죽고 나서, ‘벌떡’, 그야말로 대지에서 주인이 솟아오르듯이 땅의 주인으로 홀로 서는 얘기다. 모티브로만 따지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같다. 다만 여성의 출신 계급에서 차이가 날 뿐. 

악인이 둘 나오는데, 둘 다 여성을 중심으로 그 잔인하고 강한 내면 속에 담긴 ‘고달픔’ 같은 것을 보여주는 데, 이게 영화의 잔재미기이기는 하다. 그리고 그래서 마초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마초들의 마음 속의 아픔과 갈등, 그래 이건 사나이들의 얘기지! 

결국 나쁜 넘들은 다 죽고, 밑도 끝도 없이 강하고 지혜로운 남자로 설정된 찰스 브론슨은 떠난다. 그리고 새로 생긴 기차역 일대에서 타운을 이끌어나갈 여주인으로 남을 여성이 홀로 서는 모습이 마지막 장면이다. 

여기에 미국 자본주의의 초기 모습이다, 그렇게까지 오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풍푸 파이터>에도 처음 미국이 철도 만들던 시절의 얘기가 배경인데, 거기에 있던 노동자들은 중국인이었는데, 여기에서는 미국인이라는 정도가 차이. 

모티브만 놓고 보면 영화 <실미도>와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거기에는 빛바랜 흑백 사진에 얼핏 나오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 막장 마초들이 살아가는 동기처럼 설정되어 있다. 애인이자 엄마를 생각나게 하는 여인 그리고 그 아련한 기억을 연결시키는 것은 커피. 중간에 커피 한 잔 끓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자가 불 피우다 실패하고, 다시 남자가 세심하게 불쏘시개를 쌓아서 한 번에 불 피우는 장면 등 몇 분을 커피 끓이는 데에 할애한다. 중간에 여자가 원두를 꺼내는 대신 식칼을 꺼내려고 하다가 포기하는 장면.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커피 마시면서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 영화 그것도 서부 영화에서 이렇게 길게 커피 하나로 길게 가는 걸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이탈리나오! 마카로니가 아니라 이탈리안 커피라고 하는 게 더 맞았을 것 같은. 

영화는 사라지고 커피만 남은 대표적인 영화가 <블랙 호크 다운>이 아닐까 싶다. 전투 중의 짧은 휴식에 원두 갈고 커피 내리는 장면이 아주 길게 그것도 몇 번이나 나온다. ‘커피병’이라는 새로운 군 보직이 생겨났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 

마초 영화, 커피 영화 외에도 하모니카가 자주 등장하는, 하모니카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엔니오 모리코네 음악이 아니었다면 확 짜증이 날 수도 있지만, 선율 자체가 너무 고급졌다. 

21세기, 이런 마초 영화는 다시 나오지는 않을 것 같다. 부동산 영화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알박기’ 영화이기도 하다. 사막 지대에서 증기 기관차가 운행하기에 필요한 물이 있는 곳을 미리 점 찍어 역사 부지 일대의 땅을 샀던 어느 알박기 명인의 비극 그리고 그 땅을 둘러싼 난투극, 얘기는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 <1번가의 기적>에서는 임창정 같은 깡패를 보내 도장 찍으라고 협박하고 괴롭히고 그러는데. 여기는 서부극이라 그냥 총 쏴서 죽이고 만다. 

영화가 예쁘면 그림엽서 보는 것 같다는 얘기를 한다. 유사한 느낌인데, 이건 LP판 듣는 느낌이다. 사나이들의 짧은 대사 그리고 귀를 뚫는듯한 짧은 총소리 이어서 엔니오 모리코네의 다음 트랙 노래. 음악 때문에 주기적으로 보고 또 보는 영화는 <매리 포핀스> 정도였는데, 아마 이것도 나이 먹으면서 해마다 한두 번은 계속 볼 것 같다. 영화 음악을 제일 재밌게 드는 방법은 결국 원래 화면과 같이 보는 거 아닌가 싶다. 

음악은 화면에 잘 녹아드는 편은 아니다. 영화 품질에 비하면 몇 배는 될 듯한 고품질의 음악과 가벼운 오케스트라. 다시 50년이 지나면 영화는 완전히 사라지겠지만, 음악은 그 뒤에도 남을 것 같다. 엔니오 모리코네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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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쓰는 것은 어지간히 정신줄이 굵지 않으면 힘들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예전에 소설가 성석재가 그런 얘기를 헸다고 한다. 아버지 얘기하고, 고향 얘기하면 이제 그 작가는 거의 끝난 거라고. 할 얘기가 더는 없다는 거. 쥐어짜고 쥐어짜다 보면, 더는 할 얘기가 없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오기 마련이다. 

책이 거의 팔리지 않으면서 책 한 권 낼 때의 부담감이 나도 커졌다. 출판사에 손해가 가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최근에는 나도 출판사에게 손해가 가는 일이 종종 생겼다. 그러다보니까 책 낼 때의 부담감이 지수적으로 상승했다. 작년에는 책을 못냈다. 좌파 에세이가 작년초에 나오기는 했는데, 재작년에 마무리한 책이라서 작년에는 책이 없다. 책 판매에 대한 부담이 없었다면 작년에도 몇 권 냈었을텐데, 다 올해로 넘겼다. 

그래도 나는 사정이 좀 나은 편이다. 꾸역꾸역, 애들 먹여 살리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소득이 계속 있었다. 애들 태어난 후에 책 내는 속도가 확 떨어져서, 아직은 할 얘기가 없지는 않다. 제 때 책을 못 내서 계약해놓고 소화하지 못한 게 더 많다. 아직은 할 말이 없는 상황까지 만나지는 않았다. 다음 정권 때에는 모르겠지만, 윤석열이 저렇게 아무 거나 막 던지는 동안에는 좀 더 고전적인 얘기들을 할 게 있을 것 같다. 밀린 것들도 좀 많고. 

책을 쓰면서, 특히 마흔이 넘어간 뒤로는 즐거운 마음을 유지하는 게 사실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명랑'이 삶의 기조라서, 우리 집 어린이들과 늘 웃으려고 하고, 혼 내는 건 정말 가끔만 하려고 한다. 그리고 잔소리도 조금만. 

말이 나온 김에. 다 큰 자식들에게 "우리 아이"라고 하는 표현은 가급적 안 하려고 한다. 자식은 자기 소유물이 아닌데,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들이 집단적으로 쌓여서 어른들 보고도 '아이'라고 한다. 큰 애가 초등학교 3학년 된 이후로는 '어린이'라고 꼭 불러준다. 집에서 애들 크게 부를 때도 "어린이들, 모여보세요", 이렇게 말한다. 

아이들 키우기 전에는 자주 보는 사람들이 나에게도 많았다. 이래저래 꽤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지냈는데, 이제는 정말 최소한의 사람만, 그것도 가끔 보면서 지낸다. 예전에는 '온갖 문제 상담소 소장'이라고 그러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내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정태인 선배의 사망 이후로 누군가 만나는 일을 대폭 줄였다. 지난 20년간 그와 거의 비슷한 사이클로 살았다. 박순성 교수와 간만에 밥 한 번 먹으려고 한 자리에 막 박사 논문으로 정신 없던 정태인이 같이 왔다. 점심 자리였는데, 술 좀 더 마시자고 했는데, 나는 애들 봐야 한다고 낮술까지는 못하고 술패들을 남겨놓고 일어난 적이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그게 그와 마셨던 마지막 술이었다. 쓰러지기 몇 주 전인가, 한국은행 피플들과 같이 저녁 약속이 있었다. 정태인은 오후에 낮잠 자고 약속을 까먹었다고 한다.. 아쉽기는 하지만, 조만간 다시 보기로 했다. 그리고 몇 주 후 연구실에서 쓰러졌다. 

나와 비슷한 사이클로 살던 사람들이 몇 명 있었는데, 친구는 벌써 죽었고, 정태인도 환갑 넘자마자 죽었다. 아무래도 체질이 거의 비슷할 막내 동생은 작년에 크게 두 번 병원 신세를 졌고, 두 번째는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서 진짜로 요단강 건너다가 겨우겨우 돌아왔다. 

지사의 시대는 한국에서 벌써 끝났다. 더 이상 비분강개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거나, 급살을 했거나. 참 비극적이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은 역시 명랑을 유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중압감들 속에서 아직 남은 얘기들을 풀어낸다고 너무 폼 잡지는 않으려고 한다. 되는 데까지 하다가 안 되면 그만이라고, 좀 가볍게 생각하려고 한다. 

가끔은 만년필도 바꾸고, 쓰던 스피커도 좀 바꾼다. 만나는 사람을 바꾸거나 주변 사람을 바꾸는 것보다는 그게 더 낫다. 그렇게 그렇게 쌓이려고만 하는 부담감이나 압력을 좀 낮춘다. 

IMF 끝나고 "부자 되세요" 마케팅이 한참 유행할 때, 들레쥬의 노마디즘이 한국에 잘 못 들어와서 노트북과 여행 마케팅에 접목되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노트북들도 노마디즘을 내걸고, 어딘가 싸돌아다닐려면 이런 건 있어야 하지 않겠니, 그랬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그렇게 카드를 팔았고. "낭만 가득한 여행", 그런 광고도 있었던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하면, 노마디즘은 커녕, 한국 사회에는 아파트가 주인 행세하는 시절이 되었다. 억지로 노마디즘을 대입하면, 전세 주고 전세 가고, 그렇게 한 채 두 채 늘려나가는 정도. 

혼자서 여행을 떠나봤는데, "낭만 가득"이 아니라 "남만" 가득했다. 재미 하나도 없었다. 이래저래 혼자 해외 출장 가는 일이 적지 않았는데, 진짜 재미 하나도 없다. 유일하게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는 건 영국 리즈에서 열린 학회에 갔을 때였는데.. 그건 이미 지난 세기의 일이다. 

재미가 없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 하는 유일한 처방이다. 돈 버는 일이 제일 재밌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속으로 딱하다. 대놓고 돈 버는 게 유일하게 재밌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진짜로 돈도 많이 벌었다. 벌써 이혼했다. 지금도 돈 버는 게 제일 재밌는지 모르겠다. 

책을 계속해서 쓰는 건, 고래심줄 같은 정신력만으로는 어렵다. 대쪽도 부러지고, 심줄도 끊어진다. 인간은 강철이 아니다. 누군가 도울 수 있으면 계속 돕고, 미력이나마 힘이 될 일은 하고. 그리고 돌아서서 그런 일을 했다는 것도 까먹으면 정신 건강에 아주 도움이 될 것 같다. 그게 즐겁고 보람있으면 정말 다행이다. 누군가 고맙다고 말하는 건, 행여나 기대하지 말고. 그런 사람은 고래희, 예전부터 아주 드물다.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건, 즐겁지도 않고, 사실 재미도 없다. 난 좀 그렇다.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301051721011?fbclid=IwAR29aNkyT6VW6LBUnqXEGxdYjpjBiqtiJxRvE0Cdj5JqQFlQyUqk-GTU7KE 

 

정신과 약 먹으면서 버티는 웹툰작가들…우울증 일반인의 3배 높아

“재능이 넘치거나 그림체가 단순한 경우 말고는 60~70컷을 일주일 만에 그린다는 것 자체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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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를 둘러싼 가장 큰 변수들은 인플레이션이나 이자율 자체가 아니라, 세계적인 레짐 체인지일 것 같다. wto가 만들어지는 90년대 초반 이후 세계화 국면이 한참 진행되던 시점까지 다자간 자유무역 질서가 세상을 보는 가장 큰 눈이었다. 

트럼프 때 이게 깨어졌고, 궁극적으로 세계적 레짐이 어디로 갈 것인지 미국도 방향을 못 잡고, 아무도 예측하기 어려운 시기가 좀 흘렀다. 여기에 팬데믹이 등장했다. 변화가 팬데믹 사이클에 맞춰 더 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기준금리 상승은 원튼 원치 않튼 강달러 시대를 만들었고, 이 강달러가 세계적 경제 질서를 급격하게 변하게 만들었다. 일단은 강달러 악셀을 세게 밟았고, 미국이 경제의 주도권을 다시 쥐었다. 냉전 시대 이후에 형성된 세계의 보호자로서의 미국의 모습은 이제 없다. 미국 정치에서 가장 큰 두려움은 트럼프 혹은 그런 스타일의 귀환일 것이다. 지금 강달러에 어려움을 느낄 다른 나라 살필 형편이 아닌 것 같다. 

환경에서 미국과 유럽의 경제 전쟁은 좀 멀게는 오존층 파괴와 관련된 몬트리올 의정서 정도로 올라갈 수 있다. 냉장고를 비롯한 냉매를 사용하는 제한된 제품들이 무역 전쟁의 서막을 알린 것 같다. 그리고 인플레이션 감축법안은 본격적으로 전기차를 둘러싼 유럽과 미국의 무역 전쟁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는 wto나 그딴 국제적 중재 같은 것은 마치 없는 것과 같다. 

유럽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미국이 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영역 내에서 생산된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주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린 마크롱이 맨 앞에 나서 있다. 아주 익숙한 포맷인데, 미래라는 이름으로 지역 생산품과 보조금을 연계시키는 것은 wto 체계에서는 아주 이질적인 것이다. 한국은?

이런 흐름에서 아직은 불확실하지만 룰라의 주도로 중남미 권역에 대한 경제 통일과 함께 단일 통화가 추진 중이다. 워낙 이 지역 경제가 고질적으로 어려워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본다. 과연 룰라의 리더십이 이 정도로 갈 것인지는 여전히 불투명하지만, 각개격파되던 중남미 경제에 새로운 논의의 전환점이 될 것은 분명하다. 

지역화라는 말을 그 전에도 썼지만, 이렇게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지역화는 90년대 이후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변화 속에서.. 한국에 생산지를 두고 남을 기업은 얼마인가, 어느 정도 규모가 될 것인가, 그런 게 새로운 질문이 되었다. 결국 지역별 규모의 경제가 새로운 레짐의 키워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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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ost를 처음 샀던 것은 <커피 프린스 1호점> 때의 일이었다. 원래 나온 오리지널도 샀고, 대사와 함께 같이 나온 익스텐디드 버전도 샀다. 그리고 10년 가까이 운전하면서 주로 들었던 노래도 커피 프린스 1호점 노래였다. 이윤정 피디가 미국 가기 전에 약간의 교류가 있었는데, 그래서 이 드라마를 많이 봤던 건 아니다. 운전할 때 티맵을 주로 쓰는데, 여기에 AI가 시작되면서 음악 듣기가 너무 편해졌다. “아리야, 드라마 커피 프린스 노래 틀어줘”, 이렇게 하면 러브홀릭의 <화분>이 맨처음 나온다. 그렇게 한참을 듣다가 “아리야, 러브홀릭 노래 틀어줘”, 이렇게 듣다 보면 어지간하면 목적기에 도착한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은 2007년에 나왔다. 그 사이 10년이 넘게 지나서 너무 옛날 노래가 되었다. 그 다음에 드라마 ost 앨범을 산 게 <미스터 션샤인>이었다. 멜론으로 충분히 잘 들을 수 있는 데에도 굳이 CD를 산 것은, 나중에 죽기 직전에 이 앨범이 듣고 싶어질 것 같아서 그렇다. 드라마 한참 하던 초기에는 두 장짜리 전곡 수록 앨범이 나왔는데, 내가 샀을 때에는 그건 이미 품절이었고, 화보집이 들어가 있는 한 장짜리 CD 밖에 없었다. 

드라마 대본을 구해서 읽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미스터 션샤인>은 투자 받기 위해서 제작사에서 만든 기획의도 등이 들어간 프리젠테이션 자료도 보았다. 대본을 볼 수 있겠느냐고 부탁을 했더니, 관련 자료까지 따라서 왔었다. 

한동안 드라마 볼 형편이 아니다가 드라마를 다시 본 건 <응답하라 1994> 이후였다. 응사와 응팔 다 재밌게 봤고, 음악도 챙겨서 듣기는 했는데, 대부분 카피 버전이라서 그때 듣고 시간이 지나가면 잊혀질 음악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죽기 전에 응사 음악 틀어줘, 응팔 음악 틀어줘,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대충대충 뭐가 있나, 그렇게 듣다가 강렬하게 드라마 ost를 사고 싶다는 충돌을 갖게 한 것은 드라마 <청일전자 미쓰리>의 <어항>을 듣고 난 후의 일이다. 솔직히 스텔라장이 누군지도 몰랐고, 젊은 가수들 노래 들을 기회도 별로 없었다. <어항>은 녹음 상태가 한국 음악 같지 않게 너무 좋았다. 스텔라장을 꼭 만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항> 녹음한 스튜디오는 가보고 싶었다. 가사가 너무너무 좋았고, 녹음이 기가 막혔다. 그래서 그 후로는 오랫동안 스피커 자리를 옮기거나, 앰프를 바꾸면 모니터용 음원으로 스텔라장의 <어항>을 많이 썼다. <나꼽살>이라는 팟캐스트를 김미화랑 같이 진행할 때, 초기에 <나꼼수>가 녹음하던 스튜디오를 같이 썼다. 파스텔 뮤직이라는 홍대 앞 인디밴드들 주로 녹음하는 곳이었다. <문화로 먹고 살기> 책 작업하면서 장기하 음악 같이 하던 사람들 인터뷰도 했었고, 파스텔 뮤직도 꼭 한 번 가보고 싶었었다. 나중에 몇 달 동안 파스텔 뮤직 스튜디오에서 가게 되어서, 너무 행복했었다. 초기에는 파스텔 뮤직 엔지니어들이 팟 캐스트 편집도 해주었었다. 

두 개의 스피커가 있는 스테레오에서는 왼쪽, 오른쪽의 위상을 맞추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다. 오디오 마케팅에서는 한 쪽 벽이 넓은 곳에서 쇼파에 앉아서 음악을 듣는 사진을 주로 쓴다. 그렇게 좌우 벽이 대칭적이고, 딱 쇼파에 앉았을 때 고음이 나오는 트위터가 귀의 위치에 있게 들을 수 있는 자리, 그걸 ‘스윗 스팟’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설치하고 그 자리에서 들어야 좋다는 것이다. 사실 그렇기는 한데, 일상 생활에서 그걸 맞추기가 쉽지 않다. 한 쪽 벽이 막혀 있거나, 책장이 있으면 기본적으로 좌우 맞추는 것도 쉽지 않다. 일단 이것부터 맞추는 게 먼저다. 

그럴 때 주로 쓰는 음원이 스텔라장의 <어항>과 아이유의 가을 아침이다. 이게 특히 녹음이 잘 되어서, 보컬 목소리가 스피커 약간 윗쪽, 머리 위에 잡히면 좌우 정위가 맞는 거다. 이게 안 맞으면, 맞을 때까지 끙끙거리면서 맞을 때까지 큰 스피커 위치를 조금씩 옮기면서 노동 무한반복. 스피커를 자기 있는 쪽으로 살짝 돌리는 걸 ‘토우인’이라고 하는데, 이걸 사용하면 좌우 정위를 맞추는 게 좀 쉬워지기는 하는데, 나는 토우인을 안 하는 쪽 소리를 더 좋아한다. 보컬이 악기에 묻히면 모니터링 음원으로 사용하기가 좀 그렇다. 

가끔 케이블 검은색, 빨간색 색깔을 잘못 맞춰서 좌우가 아예 바뀔 때가 있다. 물론 바보 같은 짓을 한 건데, 가끔은 그런 일도 벌어진다. 그때 왼쪽, 오른쪽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 듣는 노래는 롤러코스터의 <어느 하루>다. “시계 바늘소리 너무 크게 들어와”, 그렇게 시작하는 보컬이 오른 쪽에서 시작한다. 리드 기타는 왼쪽에서 시작한다. 드럼과 기타로만 노래를 진행하다가 나중에 베이스가 들어온다. 이때쯤이면 보통 노래와 같이 보컬이 정가운데로 이동해 있다. 여기에서 별 문제가 없으면, 이 때 스텔라장의 <어항>을 다시 한 번 틀어본다. 

<어항>은 보컬과 피아노로 시작하고, 한 소절 지나고 나면 기타가 들어온다. 그리고 다시 베이스가 들어온다. 스테레오에서는 좌우 정렬 개념만 있는 건 아니고, 음장이라고 부르는 위아래 효과도 있다. 제일 큰 건 역시 보컬이다. 보컬이 윗쪽 부분에 제대로 맺히는 것을 비롯해서 악기들이 정위치에 있는지, 이걸 음상이라고 부른다. <어항>의 녹음이 음상이 잘 살아있어서 여전히 스피커나 앰프 배치 바뀌면 제일 먼저 들어보는 음악이 되었다. 물론 다른 노래로 해도 되는데, 새 스피커 사면 누구나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들을 틀어보게 된다. 예전에 들었던 그 감동이 새 시스템에서 살아있는지, 더 좋아졌는지, 그런 걸 제일 먼저 확인해보고 싶어진다. 

<청일전자 미쓰리>의 <어항>은 음원을 사기는 했는데, 음반은 사지는 않았다. 내가 옛날 사람이라서 여전히 음악을 들을 때, 들을 만한 노래를만을 편집한 플레이리스트 방식으로 듣지는 않고, 앨범 전체를 듣는 방식으로 듣는다. 그래도 계속 들을만한 노래가 3~4개는 되야 앨범을 사지, 하나만 있을 때 앨범을 사기는 좀 그렇다. <청일전자 미쓰리> 망할 뻔한 중소기업을 회생시키는 얘기다. 경제학자라서 재밌게 본 드라마인데, 마침 그 시절이 직장 민주주의 분석 작업하던 때였다. 응팔의 덕선이가 평직원으로 나왔다가 사장이 되어서 회사의 위기를 극복하는 얘기들에서 꽤 많은 생각을 끌어낼 수 있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좀 복잡한 경로로 보게 된 것인데, 제일 큰 이유는 지금처럼 OTT가 유행하기 이전에 OTT 방식으로 만들어진 드라마라서 보게 되었다. 스튜디오드래곤이라서 만든 드라마인데, 그 이유로 본 건 아니고, OTT 투자의 사전 제작방식으로 만들면 어떻게 다른가, 궁금해서 보게 되었다. 드라마 <킹덤>이 막 기획되면서 기본 스토리만 잡혀있던 그런 시절이었다. 

오프닝 음악이 너무 좋았는데, 용재 오닐은 이름만 들었지, 사실 이때 처음 들었다. 드라마 오프닝 볼 때마다 꿈꾸듯 황홀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얘기는 슬픈 얘기다. 삶의 종점인 것처럼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젊은 사나이들, 조선이 망하던 그 시대 얘기가 즐거울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완익을 맡은 김의성의 연기가 너무너무 좋았다. 그래 저게 나쁜 놈이지! 

그전에 유연석 나온 영화를 몇 개 봤는데, 솔직히 좀 별로였다. 응사의 칠봉이 때, 좀 답답하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같은 짝사랑 역할인데 구동매는 정말 가슴이 저렸다. 정의 같은 것은 없는 세상에 관한 이야기지만, 그 연정만큼은 진짜일 것 같았다. 세 사나이의 엇갈리는 삶 속에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음악만이 남았다. 

“단지 나의 낭만은 독일제 총구 안에 있을 뿐이오. 혹시 아오? 내가 그날 밤 귀항에게 들킨 게 내 낭만이었을지..”
“조선 최고 사대부의 아기씨가 하기에는 과격한 낭만 같은데.”

배 위에서 노젖는 유진 초이를 얼굴을 보며 고애신이 했던 대사다. 사랑, 때로는 위험하고 위태롭다. 그때 나왔던 노래가 일레인(Elaine)의 <슬픈 행진>이었다. 내가 살았던 한 순간을 다시 기억할 때, 이런 걸 재밌게 보고 듣던 그 순간이 다시 기억날 것 같다. 이 음악을 들으면서 아직 내가 열심히 살았던 순간, 그런 순간이 기억나면 좋을 것 같다. 

https://youtu.be/z1QWZV300q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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