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 하요, 제목이 길기도 하다, 하여간 이런 영화 봤다. 순전히 얼마 전부터 집중적으로 듣던 엔리오 모리코네 음악 때문에 봤다. 어렸을 때 tv에서 죽어라고 해주던 거라서 여기저기 끊어서 보기는 했는데, 전편을 다 본 건 처음이다. 

본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엑소시스트 2>를 몇 년 전에 봤다. 음악이 기똥찼다. ‘리건의 테마’만으로도 충분히 즐기면서 볼 수 있었다. 메뚜기라는 모티브를 사실 이 영화에서 얻었다. 결국 쓸 데게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이것도 엔니오 모리코네 음악이다. 사실 엑소시스트는 3편을 먼저 봤는데, 너무너무 재밌었다. 20대에 3편을 보고, 30대에 1편을 보고, 50대에 2편을 보았다. <엑소시스트> 3편은 그렇게 내 인생 영화가 되었다. 파리에서 극장에서만 세 번을 봤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 이것도 제목 더럽게 기네 – 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 사이의 공통점은 사소하게, 음악이 둘 다 엔니오 모리코네라는 점.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둘 다 대표적인 마초 영화. 하나는 멋지게 총 쏘고 뒤돌아서 사라지는 마초, 다른 하나는 그 마초들이 삶 뒤의 어둡고 쓸쓸하고 혹은 추접한 면을 드러낸. 

음악이 너무 궁금해서 결국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를 봤는데, ‘쓸 데 없이 고스펙’이라는 단어가 생각이 났다. 아니 여자가 기차 역에서 내려 누군가를 찾는 이 장면에서 이 음악이 쓰였단 말이야? 마카로니 웨스턴이라고 사람들이 얕잡아 봤지만, 그 마카로니에는 엔니오 모리코네가 있었다. <역마차>에서 <하이눈>까지, 정통 서부영화에서 사용된 음악들을 전부 오징어 만들어버렸던. 50년 정도 시간이 흘렀는데, 서부영화는 이제 사라지고 아무도 기억 못하는 영화가 되었지만,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은 그것들보다 더 길게 남은. 요요마가 엔니오 모리코네 시리즈 앨범을 냈다. 어지간한 소프라노나 테너들이 소프트 버전 앨범 내면 엔니오 모리코네 노래 한두 개는 꼭 집어넣게 된다. 

배역이 엄청나게 화려하다. 헨리 폰다. 사실 헨리 폰다 악역으로 나온 건 처음 봤다. 나이 먹은 헨리 폰다의 연기 엄청 좋아했다. 그리고 사나이 중의 사나이로 찰스 브론슨이 나온다. 어린 시절 화장품 광고로만 봤지, 정작 영화에서 본 건 몇 개 없다. 

마초 영화이기는 한데, 처음 보는 여배우를 중심으로 얘기가 진행된다. 프로필을 찾아보니까 튀니지 출신이다. 영화에서는 어마무시하게 아우라 넘친다. 결국 한 여인과 그녀 주변을 맴도는 네 남자의 얘기다. 결혼식날 살해당한 남편까지. 

어리버리하게 돈이 많다는 남자한테 속다시피해서 결혼을 한 여자가 남편이 죽고 나서, ‘벌떡’, 그야말로 대지에서 주인이 솟아오르듯이 땅의 주인으로 홀로 서는 얘기다. 모티브로만 따지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같다. 다만 여성의 출신 계급에서 차이가 날 뿐. 

악인이 둘 나오는데, 둘 다 여성을 중심으로 그 잔인하고 강한 내면 속에 담긴 ‘고달픔’ 같은 것을 보여주는 데, 이게 영화의 잔재미기이기는 하다. 그리고 그래서 마초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마초들의 마음 속의 아픔과 갈등, 그래 이건 사나이들의 얘기지! 

결국 나쁜 넘들은 다 죽고, 밑도 끝도 없이 강하고 지혜로운 남자로 설정된 찰스 브론슨은 떠난다. 그리고 새로 생긴 기차역 일대에서 타운을 이끌어나갈 여주인으로 남을 여성이 홀로 서는 모습이 마지막 장면이다. 

여기에 미국 자본주의의 초기 모습이다, 그렇게까지 오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풍푸 파이터>에도 처음 미국이 철도 만들던 시절의 얘기가 배경인데, 거기에 있던 노동자들은 중국인이었는데, 여기에서는 미국인이라는 정도가 차이. 

모티브만 놓고 보면 영화 <실미도>와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거기에는 빛바랜 흑백 사진에 얼핏 나오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 막장 마초들이 살아가는 동기처럼 설정되어 있다. 애인이자 엄마를 생각나게 하는 여인 그리고 그 아련한 기억을 연결시키는 것은 커피. 중간에 커피 한 잔 끓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자가 불 피우다 실패하고, 다시 남자가 세심하게 불쏘시개를 쌓아서 한 번에 불 피우는 장면 등 몇 분을 커피 끓이는 데에 할애한다. 중간에 여자가 원두를 꺼내는 대신 식칼을 꺼내려고 하다가 포기하는 장면.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커피 마시면서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 영화 그것도 서부 영화에서 이렇게 길게 커피 하나로 길게 가는 걸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이탈리나오! 마카로니가 아니라 이탈리안 커피라고 하는 게 더 맞았을 것 같은. 

영화는 사라지고 커피만 남은 대표적인 영화가 <블랙 호크 다운>이 아닐까 싶다. 전투 중의 짧은 휴식에 원두 갈고 커피 내리는 장면이 아주 길게 그것도 몇 번이나 나온다. ‘커피병’이라는 새로운 군 보직이 생겨났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 

마초 영화, 커피 영화 외에도 하모니카가 자주 등장하는, 하모니카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엔니오 모리코네 음악이 아니었다면 확 짜증이 날 수도 있지만, 선율 자체가 너무 고급졌다. 

21세기, 이런 마초 영화는 다시 나오지는 않을 것 같다. 부동산 영화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알박기’ 영화이기도 하다. 사막 지대에서 증기 기관차가 운행하기에 필요한 물이 있는 곳을 미리 점 찍어 역사 부지 일대의 땅을 샀던 어느 알박기 명인의 비극 그리고 그 땅을 둘러싼 난투극, 얘기는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 <1번가의 기적>에서는 임창정 같은 깡패를 보내 도장 찍으라고 협박하고 괴롭히고 그러는데. 여기는 서부극이라 그냥 총 쏴서 죽이고 만다. 

영화가 예쁘면 그림엽서 보는 것 같다는 얘기를 한다. 유사한 느낌인데, 이건 LP판 듣는 느낌이다. 사나이들의 짧은 대사 그리고 귀를 뚫는듯한 짧은 총소리 이어서 엔니오 모리코네의 다음 트랙 노래. 음악 때문에 주기적으로 보고 또 보는 영화는 <매리 포핀스> 정도였는데, 아마 이것도 나이 먹으면서 해마다 한두 번은 계속 볼 것 같다. 영화 음악을 제일 재밌게 드는 방법은 결국 원래 화면과 같이 보는 거 아닌가 싶다. 

음악은 화면에 잘 녹아드는 편은 아니다. 영화 품질에 비하면 몇 배는 될 듯한 고품질의 음악과 가벼운 오케스트라. 다시 50년이 지나면 영화는 완전히 사라지겠지만, 음악은 그 뒤에도 남을 것 같다. 엔니오 모리코네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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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쓰는 것은 어지간히 정신줄이 굵지 않으면 힘들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예전에 소설가 성석재가 그런 얘기를 헸다고 한다. 아버지 얘기하고, 고향 얘기하면 이제 그 작가는 거의 끝난 거라고. 할 얘기가 더는 없다는 거. 쥐어짜고 쥐어짜다 보면, 더는 할 얘기가 없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오기 마련이다. 

책이 거의 팔리지 않으면서 책 한 권 낼 때의 부담감이 나도 커졌다. 출판사에 손해가 가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최근에는 나도 출판사에게 손해가 가는 일이 종종 생겼다. 그러다보니까 책 낼 때의 부담감이 지수적으로 상승했다. 작년에는 책을 못냈다. 좌파 에세이가 작년초에 나오기는 했는데, 재작년에 마무리한 책이라서 작년에는 책이 없다. 책 판매에 대한 부담이 없었다면 작년에도 몇 권 냈었을텐데, 다 올해로 넘겼다. 

그래도 나는 사정이 좀 나은 편이다. 꾸역꾸역, 애들 먹여 살리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소득이 계속 있었다. 애들 태어난 후에 책 내는 속도가 확 떨어져서, 아직은 할 얘기가 없지는 않다. 제 때 책을 못 내서 계약해놓고 소화하지 못한 게 더 많다. 아직은 할 말이 없는 상황까지 만나지는 않았다. 다음 정권 때에는 모르겠지만, 윤석열이 저렇게 아무 거나 막 던지는 동안에는 좀 더 고전적인 얘기들을 할 게 있을 것 같다. 밀린 것들도 좀 많고. 

책을 쓰면서, 특히 마흔이 넘어간 뒤로는 즐거운 마음을 유지하는 게 사실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명랑'이 삶의 기조라서, 우리 집 어린이들과 늘 웃으려고 하고, 혼 내는 건 정말 가끔만 하려고 한다. 그리고 잔소리도 조금만. 

말이 나온 김에. 다 큰 자식들에게 "우리 아이"라고 하는 표현은 가급적 안 하려고 한다. 자식은 자기 소유물이 아닌데,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들이 집단적으로 쌓여서 어른들 보고도 '아이'라고 한다. 큰 애가 초등학교 3학년 된 이후로는 '어린이'라고 꼭 불러준다. 집에서 애들 크게 부를 때도 "어린이들, 모여보세요", 이렇게 말한다. 

아이들 키우기 전에는 자주 보는 사람들이 나에게도 많았다. 이래저래 꽤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지냈는데, 이제는 정말 최소한의 사람만, 그것도 가끔 보면서 지낸다. 예전에는 '온갖 문제 상담소 소장'이라고 그러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내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정태인 선배의 사망 이후로 누군가 만나는 일을 대폭 줄였다. 지난 20년간 그와 거의 비슷한 사이클로 살았다. 박순성 교수와 간만에 밥 한 번 먹으려고 한 자리에 막 박사 논문으로 정신 없던 정태인이 같이 왔다. 점심 자리였는데, 술 좀 더 마시자고 했는데, 나는 애들 봐야 한다고 낮술까지는 못하고 술패들을 남겨놓고 일어난 적이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그게 그와 마셨던 마지막 술이었다. 쓰러지기 몇 주 전인가, 한국은행 피플들과 같이 저녁 약속이 있었다. 정태인은 오후에 낮잠 자고 약속을 까먹었다고 한다.. 아쉽기는 하지만, 조만간 다시 보기로 했다. 그리고 몇 주 후 연구실에서 쓰러졌다. 

나와 비슷한 사이클로 살던 사람들이 몇 명 있었는데, 친구는 벌써 죽었고, 정태인도 환갑 넘자마자 죽었다. 아무래도 체질이 거의 비슷할 막내 동생은 작년에 크게 두 번 병원 신세를 졌고, 두 번째는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서 진짜로 요단강 건너다가 겨우겨우 돌아왔다. 

지사의 시대는 한국에서 벌써 끝났다. 더 이상 비분강개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거나, 급살을 했거나. 참 비극적이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은 역시 명랑을 유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중압감들 속에서 아직 남은 얘기들을 풀어낸다고 너무 폼 잡지는 않으려고 한다. 되는 데까지 하다가 안 되면 그만이라고, 좀 가볍게 생각하려고 한다. 

가끔은 만년필도 바꾸고, 쓰던 스피커도 좀 바꾼다. 만나는 사람을 바꾸거나 주변 사람을 바꾸는 것보다는 그게 더 낫다. 그렇게 그렇게 쌓이려고만 하는 부담감이나 압력을 좀 낮춘다. 

IMF 끝나고 "부자 되세요" 마케팅이 한참 유행할 때, 들레쥬의 노마디즘이 한국에 잘 못 들어와서 노트북과 여행 마케팅에 접목되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노트북들도 노마디즘을 내걸고, 어딘가 싸돌아다닐려면 이런 건 있어야 하지 않겠니, 그랬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그렇게 카드를 팔았고. "낭만 가득한 여행", 그런 광고도 있었던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하면, 노마디즘은 커녕, 한국 사회에는 아파트가 주인 행세하는 시절이 되었다. 억지로 노마디즘을 대입하면, 전세 주고 전세 가고, 그렇게 한 채 두 채 늘려나가는 정도. 

혼자서 여행을 떠나봤는데, "낭만 가득"이 아니라 "남만" 가득했다. 재미 하나도 없었다. 이래저래 혼자 해외 출장 가는 일이 적지 않았는데, 진짜 재미 하나도 없다. 유일하게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는 건 영국 리즈에서 열린 학회에 갔을 때였는데.. 그건 이미 지난 세기의 일이다. 

재미가 없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 하는 유일한 처방이다. 돈 버는 일이 제일 재밌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속으로 딱하다. 대놓고 돈 버는 게 유일하게 재밌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진짜로 돈도 많이 벌었다. 벌써 이혼했다. 지금도 돈 버는 게 제일 재밌는지 모르겠다. 

책을 계속해서 쓰는 건, 고래심줄 같은 정신력만으로는 어렵다. 대쪽도 부러지고, 심줄도 끊어진다. 인간은 강철이 아니다. 누군가 도울 수 있으면 계속 돕고, 미력이나마 힘이 될 일은 하고. 그리고 돌아서서 그런 일을 했다는 것도 까먹으면 정신 건강에 아주 도움이 될 것 같다. 그게 즐겁고 보람있으면 정말 다행이다. 누군가 고맙다고 말하는 건, 행여나 기대하지 말고. 그런 사람은 고래희, 예전부터 아주 드물다.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건, 즐겁지도 않고, 사실 재미도 없다. 난 좀 그렇다.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301051721011?fbclid=IwAR29aNkyT6VW6LBUnqXEGxdYjpjBiqtiJxRvE0Cdj5JqQFlQyUqk-GTU7KE 

 

정신과 약 먹으면서 버티는 웹툰작가들…우울증 일반인의 3배 높아

“재능이 넘치거나 그림체가 단순한 경우 말고는 60~70컷을 일주일 만에 그린다는 것 자체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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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를 둘러싼 가장 큰 변수들은 인플레이션이나 이자율 자체가 아니라, 세계적인 레짐 체인지일 것 같다. wto가 만들어지는 90년대 초반 이후 세계화 국면이 한참 진행되던 시점까지 다자간 자유무역 질서가 세상을 보는 가장 큰 눈이었다. 

트럼프 때 이게 깨어졌고, 궁극적으로 세계적 레짐이 어디로 갈 것인지 미국도 방향을 못 잡고, 아무도 예측하기 어려운 시기가 좀 흘렀다. 여기에 팬데믹이 등장했다. 변화가 팬데믹 사이클에 맞춰 더 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기준금리 상승은 원튼 원치 않튼 강달러 시대를 만들었고, 이 강달러가 세계적 경제 질서를 급격하게 변하게 만들었다. 일단은 강달러 악셀을 세게 밟았고, 미국이 경제의 주도권을 다시 쥐었다. 냉전 시대 이후에 형성된 세계의 보호자로서의 미국의 모습은 이제 없다. 미국 정치에서 가장 큰 두려움은 트럼프 혹은 그런 스타일의 귀환일 것이다. 지금 강달러에 어려움을 느낄 다른 나라 살필 형편이 아닌 것 같다. 

환경에서 미국과 유럽의 경제 전쟁은 좀 멀게는 오존층 파괴와 관련된 몬트리올 의정서 정도로 올라갈 수 있다. 냉장고를 비롯한 냉매를 사용하는 제한된 제품들이 무역 전쟁의 서막을 알린 것 같다. 그리고 인플레이션 감축법안은 본격적으로 전기차를 둘러싼 유럽과 미국의 무역 전쟁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는 wto나 그딴 국제적 중재 같은 것은 마치 없는 것과 같다. 

유럽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미국이 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영역 내에서 생산된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주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린 마크롱이 맨 앞에 나서 있다. 아주 익숙한 포맷인데, 미래라는 이름으로 지역 생산품과 보조금을 연계시키는 것은 wto 체계에서는 아주 이질적인 것이다. 한국은?

이런 흐름에서 아직은 불확실하지만 룰라의 주도로 중남미 권역에 대한 경제 통일과 함께 단일 통화가 추진 중이다. 워낙 이 지역 경제가 고질적으로 어려워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본다. 과연 룰라의 리더십이 이 정도로 갈 것인지는 여전히 불투명하지만, 각개격파되던 중남미 경제에 새로운 논의의 전환점이 될 것은 분명하다. 

지역화라는 말을 그 전에도 썼지만, 이렇게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지역화는 90년대 이후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변화 속에서.. 한국에 생산지를 두고 남을 기업은 얼마인가, 어느 정도 규모가 될 것인가, 그런 게 새로운 질문이 되었다. 결국 지역별 규모의 경제가 새로운 레짐의 키워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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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ost를 처음 샀던 것은 <커피 프린스 1호점> 때의 일이었다. 원래 나온 오리지널도 샀고, 대사와 함께 같이 나온 익스텐디드 버전도 샀다. 그리고 10년 가까이 운전하면서 주로 들었던 노래도 커피 프린스 1호점 노래였다. 이윤정 피디가 미국 가기 전에 약간의 교류가 있었는데, 그래서 이 드라마를 많이 봤던 건 아니다. 운전할 때 티맵을 주로 쓰는데, 여기에 AI가 시작되면서 음악 듣기가 너무 편해졌다. “아리야, 드라마 커피 프린스 노래 틀어줘”, 이렇게 하면 러브홀릭의 <화분>이 맨처음 나온다. 그렇게 한참을 듣다가 “아리야, 러브홀릭 노래 틀어줘”, 이렇게 듣다 보면 어지간하면 목적기에 도착한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은 2007년에 나왔다. 그 사이 10년이 넘게 지나서 너무 옛날 노래가 되었다. 그 다음에 드라마 ost 앨범을 산 게 <미스터 션샤인>이었다. 멜론으로 충분히 잘 들을 수 있는 데에도 굳이 CD를 산 것은, 나중에 죽기 직전에 이 앨범이 듣고 싶어질 것 같아서 그렇다. 드라마 한참 하던 초기에는 두 장짜리 전곡 수록 앨범이 나왔는데, 내가 샀을 때에는 그건 이미 품절이었고, 화보집이 들어가 있는 한 장짜리 CD 밖에 없었다. 

드라마 대본을 구해서 읽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미스터 션샤인>은 투자 받기 위해서 제작사에서 만든 기획의도 등이 들어간 프리젠테이션 자료도 보았다. 대본을 볼 수 있겠느냐고 부탁을 했더니, 관련 자료까지 따라서 왔었다. 

한동안 드라마 볼 형편이 아니다가 드라마를 다시 본 건 <응답하라 1994> 이후였다. 응사와 응팔 다 재밌게 봤고, 음악도 챙겨서 듣기는 했는데, 대부분 카피 버전이라서 그때 듣고 시간이 지나가면 잊혀질 음악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죽기 전에 응사 음악 틀어줘, 응팔 음악 틀어줘,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대충대충 뭐가 있나, 그렇게 듣다가 강렬하게 드라마 ost를 사고 싶다는 충돌을 갖게 한 것은 드라마 <청일전자 미쓰리>의 <어항>을 듣고 난 후의 일이다. 솔직히 스텔라장이 누군지도 몰랐고, 젊은 가수들 노래 들을 기회도 별로 없었다. <어항>은 녹음 상태가 한국 음악 같지 않게 너무 좋았다. 스텔라장을 꼭 만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항> 녹음한 스튜디오는 가보고 싶었다. 가사가 너무너무 좋았고, 녹음이 기가 막혔다. 그래서 그 후로는 오랫동안 스피커 자리를 옮기거나, 앰프를 바꾸면 모니터용 음원으로 스텔라장의 <어항>을 많이 썼다. <나꼽살>이라는 팟캐스트를 김미화랑 같이 진행할 때, 초기에 <나꼼수>가 녹음하던 스튜디오를 같이 썼다. 파스텔 뮤직이라는 홍대 앞 인디밴드들 주로 녹음하는 곳이었다. <문화로 먹고 살기> 책 작업하면서 장기하 음악 같이 하던 사람들 인터뷰도 했었고, 파스텔 뮤직도 꼭 한 번 가보고 싶었었다. 나중에 몇 달 동안 파스텔 뮤직 스튜디오에서 가게 되어서, 너무 행복했었다. 초기에는 파스텔 뮤직 엔지니어들이 팟 캐스트 편집도 해주었었다. 

두 개의 스피커가 있는 스테레오에서는 왼쪽, 오른쪽의 위상을 맞추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다. 오디오 마케팅에서는 한 쪽 벽이 넓은 곳에서 쇼파에 앉아서 음악을 듣는 사진을 주로 쓴다. 그렇게 좌우 벽이 대칭적이고, 딱 쇼파에 앉았을 때 고음이 나오는 트위터가 귀의 위치에 있게 들을 수 있는 자리, 그걸 ‘스윗 스팟’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설치하고 그 자리에서 들어야 좋다는 것이다. 사실 그렇기는 한데, 일상 생활에서 그걸 맞추기가 쉽지 않다. 한 쪽 벽이 막혀 있거나, 책장이 있으면 기본적으로 좌우 맞추는 것도 쉽지 않다. 일단 이것부터 맞추는 게 먼저다. 

그럴 때 주로 쓰는 음원이 스텔라장의 <어항>과 아이유의 가을 아침이다. 이게 특히 녹음이 잘 되어서, 보컬 목소리가 스피커 약간 윗쪽, 머리 위에 잡히면 좌우 정위가 맞는 거다. 이게 안 맞으면, 맞을 때까지 끙끙거리면서 맞을 때까지 큰 스피커 위치를 조금씩 옮기면서 노동 무한반복. 스피커를 자기 있는 쪽으로 살짝 돌리는 걸 ‘토우인’이라고 하는데, 이걸 사용하면 좌우 정위를 맞추는 게 좀 쉬워지기는 하는데, 나는 토우인을 안 하는 쪽 소리를 더 좋아한다. 보컬이 악기에 묻히면 모니터링 음원으로 사용하기가 좀 그렇다. 

가끔 케이블 검은색, 빨간색 색깔을 잘못 맞춰서 좌우가 아예 바뀔 때가 있다. 물론 바보 같은 짓을 한 건데, 가끔은 그런 일도 벌어진다. 그때 왼쪽, 오른쪽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 듣는 노래는 롤러코스터의 <어느 하루>다. “시계 바늘소리 너무 크게 들어와”, 그렇게 시작하는 보컬이 오른 쪽에서 시작한다. 리드 기타는 왼쪽에서 시작한다. 드럼과 기타로만 노래를 진행하다가 나중에 베이스가 들어온다. 이때쯤이면 보통 노래와 같이 보컬이 정가운데로 이동해 있다. 여기에서 별 문제가 없으면, 이 때 스텔라장의 <어항>을 다시 한 번 틀어본다. 

<어항>은 보컬과 피아노로 시작하고, 한 소절 지나고 나면 기타가 들어온다. 그리고 다시 베이스가 들어온다. 스테레오에서는 좌우 정렬 개념만 있는 건 아니고, 음장이라고 부르는 위아래 효과도 있다. 제일 큰 건 역시 보컬이다. 보컬이 윗쪽 부분에 제대로 맺히는 것을 비롯해서 악기들이 정위치에 있는지, 이걸 음상이라고 부른다. <어항>의 녹음이 음상이 잘 살아있어서 여전히 스피커나 앰프 배치 바뀌면 제일 먼저 들어보는 음악이 되었다. 물론 다른 노래로 해도 되는데, 새 스피커 사면 누구나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들을 틀어보게 된다. 예전에 들었던 그 감동이 새 시스템에서 살아있는지, 더 좋아졌는지, 그런 걸 제일 먼저 확인해보고 싶어진다. 

<청일전자 미쓰리>의 <어항>은 음원을 사기는 했는데, 음반은 사지는 않았다. 내가 옛날 사람이라서 여전히 음악을 들을 때, 들을 만한 노래를만을 편집한 플레이리스트 방식으로 듣지는 않고, 앨범 전체를 듣는 방식으로 듣는다. 그래도 계속 들을만한 노래가 3~4개는 되야 앨범을 사지, 하나만 있을 때 앨범을 사기는 좀 그렇다. <청일전자 미쓰리> 망할 뻔한 중소기업을 회생시키는 얘기다. 경제학자라서 재밌게 본 드라마인데, 마침 그 시절이 직장 민주주의 분석 작업하던 때였다. 응팔의 덕선이가 평직원으로 나왔다가 사장이 되어서 회사의 위기를 극복하는 얘기들에서 꽤 많은 생각을 끌어낼 수 있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좀 복잡한 경로로 보게 된 것인데, 제일 큰 이유는 지금처럼 OTT가 유행하기 이전에 OTT 방식으로 만들어진 드라마라서 보게 되었다. 스튜디오드래곤이라서 만든 드라마인데, 그 이유로 본 건 아니고, OTT 투자의 사전 제작방식으로 만들면 어떻게 다른가, 궁금해서 보게 되었다. 드라마 <킹덤>이 막 기획되면서 기본 스토리만 잡혀있던 그런 시절이었다. 

오프닝 음악이 너무 좋았는데, 용재 오닐은 이름만 들었지, 사실 이때 처음 들었다. 드라마 오프닝 볼 때마다 꿈꾸듯 황홀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얘기는 슬픈 얘기다. 삶의 종점인 것처럼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젊은 사나이들, 조선이 망하던 그 시대 얘기가 즐거울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완익을 맡은 김의성의 연기가 너무너무 좋았다. 그래 저게 나쁜 놈이지! 

그전에 유연석 나온 영화를 몇 개 봤는데, 솔직히 좀 별로였다. 응사의 칠봉이 때, 좀 답답하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같은 짝사랑 역할인데 구동매는 정말 가슴이 저렸다. 정의 같은 것은 없는 세상에 관한 이야기지만, 그 연정만큼은 진짜일 것 같았다. 세 사나이의 엇갈리는 삶 속에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음악만이 남았다. 

“단지 나의 낭만은 독일제 총구 안에 있을 뿐이오. 혹시 아오? 내가 그날 밤 귀항에게 들킨 게 내 낭만이었을지..”
“조선 최고 사대부의 아기씨가 하기에는 과격한 낭만 같은데.”

배 위에서 노젖는 유진 초이를 얼굴을 보며 고애신이 했던 대사다. 사랑, 때로는 위험하고 위태롭다. 그때 나왔던 노래가 일레인(Elaine)의 <슬픈 행진>이었다. 내가 살았던 한 순간을 다시 기억할 때, 이런 걸 재밌게 보고 듣던 그 순간이 다시 기억날 것 같다. 이 음악을 들으면서 아직 내가 열심히 살았던 순간, 그런 순간이 기억나면 좋을 것 같다. 

https://youtu.be/z1QWZV300q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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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001년에 산 스피커 하나를 새 거로 바꿀 계획이 있다. 이름이 칼라스 b-2인데, 나중에 나온 칼라스 b-3로 바꿀지, 아니면 안 써 본 새로운 종류의 스피커로 바꿀지, 아직 결정을 못 했다. 사실 대부분의 기간 벽 한 쪽에 있고, 잠깐잠깐만 썼던 스피커다. 늘 새로운 게 밀고 들어와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전에 보다가 말았던 칼라스 다큐를 새로 봤다. 다큐에는 유명해진 다음의 얘기와 사랑 중심으로 얘기가 너무 집중되어 있고, 벨칸토 창법이나 연습하던 시절 혹은 오페라 시스템에 대한 얘기가 너무 없다. 

그래서 가벼운 칼라스 평전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좀 설펴보니까.. 영어로는 많은데,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건 거의 없거나 절판되었다. 그래도 칼라스인데, 하는 생각이 좀 있었는데, 현실을 보니까 칼라스도 별 수 없다, 그런 거 같다. 

칼라스가 뉴욕 출신인 것도 처음 알았고, 그리스 국적을 회복하면서 그리스법이 교회 결혼만 인정을 하기 때문에, 그리스로 국적을 바꾸면서 아예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래도 조금은 더 자세하게 알고 싶은데, 책이 너무 없다. 영어 책을 바도 되기는 하는데, 이제 노안이 심해져서 한 권 읽으려면 거의 한 달 걸리는 것 같다.. 그렇게까지 시간을 쓰기는 어렵고. 

음악 책은 대체적으로 너무 수요가 적어서 그런지, 잘 나오지 않고, 나와도 너무 안 팔린다. 이게 꼭 성악가만 그런 것도 아니다. 그래도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음반이 나오는 사람 중의 한 명이 칼라스다. 디지털 복구판, 새로운 편집판, 매년 몇 장씩 앨범이 나온다. 칼라스 책도 이렇게 안 나오고 안 팔리는데, 예를 들면 르네 플레밍 등 현역 최고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칼라스는 53세에 파리 자택에서 심장 마비로 죽었다. 내 기억 속에는 언제나 칼라스가 나보다 나이가 많았는데, 어느덧 나도 칼라스보다 오래 산 나이가 되었다.  

(칼라스 다큐 보다가 그레이스 켈리에게 보낸 편지가 나왔다. 두 사람이 친구였다니.. 다른 건 안 부러웠는데, 그 우정이 부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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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에 에너지관리공단에 사직서를 내면서 나의 직장 생활은 끝이 났다. 책을 써야겠다고 막연한 생각을 했을 뿐이었지만, 제일 큰 이유는 대인기피증이 점점 더 심해졌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사람들을 만나기가 싫었고, 뭔가 부탁하는 게 싫어졌다. 누군가를 만나야 되면 술을 마셨다. 사람이 좋아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으니까 술을 마시는 상황이 되었다. 그때 이미 3급 부장이었는데, 2급 부장 승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작은 본부 같은 게 생기면 본부장이 될 것 같았다. 기후변화협약이 본격화되면서 새로 생긴 보드 한 곳의 선거에 출마해서 아시아 지역을 대표하는 이사가 되었다. 위로 올라가면서 보수들의 세계로 더 깊게 들어가게 되었고, 정체성의 충돌도 더 커져갔다. 미국 컨설팅 회사에서 취업 제안이 오기 시작했고, 미국 정부에서도 제안이 왔다. 즐겁게 생각하면 충분히 즐거울 수 있는 상황인데, 나는 그게 즐겁지 않았다. 사람들도 점점 더 만나기 싫어졌다. 

‘명랑’이라는 모토를 달기 시작한 것은 그즈음이었다. 좀 더 즐겁고 경쾌하게 살고 싶어졌고, 한국의 좌파들이 가지고 있는 ‘센치멘탈 블루스’로부터 좀 멀어지고 싶어졌다. 웃기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좀 웃기려는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좀 세상을 사는 방식이 바뀌기는 하였다. 문득.. 궁상 떠는 게 싫어지기 시작했다. 

책을 쓰기로 마음을 먹으면서 새로운 종류의 독서를 시작했다. 그리고 영화를 아주 많이 봤는데, 예전에는 별로라고 생각하던 대중성 높은 영화들을 많이 봤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좀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문정동 살던 시절의 내 삶이었다. 그 시절에는 훨씬 더 가난해지고, 많은 것이 불안했지만, 근거 없는 낙관 같은 게 있었다. 원래도 돈을 많이 쓰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최소한으로 살아가는 데 익숙한 편이다. 그즈음에 아내랑 결혼을 했다. 아내 입장에서는 많이 난감했었을 것이다. 공기업 부장이랑 결혼을 하게 된 건데, 막상 결혼하는 순간에는 나는 습작 중이었다. 그때 아내랑 여행을 많이 다녔고, 영화도 같이 많이 봤다. 

지미 헨드릭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자주 듣지는 않았다. 그의 불행한 삶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는 알았지만, 그의 선율 같은 데에서 딱 느낌이 오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녹음 상태가 너무 안 좋았다. 그래도 공부하는 느낌으로 DVD를 사서 보았고, 우드스탁 라이브도 구할 수 있는 대로 구해서 봤다. 

지미 헨드릭스가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고 “Peace”라고 했던 장면이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그가 미국 국가인 성조가를 전기 기타로 연주하는, 아주 유명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1989년 우드스탁이었다. 피킹에 의한 앰프 파열음이 어마무시했다. 초킹에 의해서 원박은 계속해서 늘어지거나 반복되면서 저주의 느낌이 아주 강렬해졌다. 만약 누군가가 애국가를 가지고 그렇게 변주해서 기타 연주를 했다면 아마 난리가 어마어마하게 났었을 것이다. 이 연주를 여러 번 본 적이 있기는 한데, 지미 헨드릭스 버전으로는 그때 처음 본 것 같다. 이 두 장면이 워낙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이때의 강렬한 감정이 이후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쓰게 된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는 건 평화론은 아니다. 특히나 핵전쟁의 공포와 함께 베트남전 이후로 반전 흐름이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던 시기에는 말이다. 

“피스”에 대한 강렬한 기억을 가진지 며칠 안 되어서 <미스 에이전트>라는, 산드라 블록이 나온 영화를 보게 되었다. 로맨스 코메디를 그렇게 즐겨 보는 편은 아닌데, 산드라 블록의 전작인 <스피드>가 당시 분석하던 책에 국가안보영화로 분류되어 있어서 봤었다. 워낙 재밌어서 연이어 봤는데, 이 영화가 내 인생의 영화 중의 하나가 될 줄 몰랐다. 

미스 에이전트는 테러범을 잡기 위해 미스 USA 대회에 어느 FBI 요원이 위장 잠입하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코메디답게 크고 작은 유모 코드, 산드라 블록 스타일의 블랙 유머가 많이 나온다. 미인 선발대회를 계속 유지할 것인가, 그런 논쟁이 세계적으로 한참이던 시절이다. 여기에 참여한 후보들에게 희망을 물어보면 “세계 평화, 워드 피스”라고 대답하는 게 일종의 불문율이었던 것 같다. 산드라 블록은 이걸 바보들이 하는 대답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화 마지막에 “그리고 세계평화”, 그렇게 대답을 한다. 영화의 원래 제목은 Miss Congeniality, 일종의 화합상 혹은 우정상 정도 된다. 임무 수행 중에 결선까지 올라갔지만 제대로 심사대 위에 서지 못한 산드라 블록을 위해서 다른 후보자들이 “우리들의 친구”라는 의미로 특별상을 주는 게 영화의 마지막이다. 

미국 미인 선발 대회인 미스 USA 와 세계 평화, 이 두 개념이 언뜻 연결되지 않지만, 폐지 위기에 몰린 대회와 이걸 꼭 주최하고 싶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명분이 만나는 점이 ‘세계 평화’였다. 세계 대회도 아니고 일종의 지역 대회인 미국 대회에서 세계 평화라고 말하는 건 뭔가 좀 맥락이 맞지가 않는다. 미국이 한다고 하면 그게 바로 세계적인 일인가? 만약 미스 코리아 대회에서 경상도, 서울, 전라도, 이런 데를 대표하는 각 지역 후보들이 나와서 원하는 꿈이 뭐냐고 할 때 “세계평화”라고 한다면 이게 얼마나 이상해 보이겠는가? 사실 이상한 건데, 그게 이상하다고 말하는 후보는 미스 뉴저지인 산드라 블록 밖에 없었다. 

영화에는 <스타트렉>의 스콧 선장인 윌리암 샤트너가 나온다. 피가디에게 선장을 넘겨주고 난 후, 스콧은 미스 USA 사회보고 있었다. 중요한 역할은 아닌데, 괜히 반가웠다. 배트맨의 영원한 집사 알프레드역을 맡았던 마이클 케인이 산드라 블록을 그야말로 환골탈퇴시키는 최상급 코디로 나온다. 그의 연기가 너무너무 멋있다고 생각했다. 

영화 후반부에 후보들의 합동 공연이 나온다. “One in a million” 백만 명 중의 한 명, 그런 가사가 발라드풍으로 나오고 후보들이 여신 복장을 하고 무대 위에서 대충 걸어다니며 점차적으로 라인을 형성한다. 그리고 신디자이저의 강렬한 음이 터져 나오고 후보들의 라인 댄스가 시작된다. 그리고 무대가 폭발한다. 수상자에 대한 테러가 예고된 상황인데, 산드라 블록은 아직 폭발물이 어디에 있는지 찾지를 못했다. 후딱 댄스를 마추고 다시 폭발물을 찾으러 나서야 하는 긴박감 속에서 평범할지도 모르는 퍼포먼스에 작은 반전이 생겼다. 

뮤지컬 등 영화에는 수많은 댄스가 나온다. 춤 자체로 유명해진 거로는 거의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영화지만 비만 오면 계속해서 나오는 우산을 든 탭 댄스 “Singing in the Rain”과 발레리노의 탈출기 “백야” 같은 게 있다. 젊은 시절의 올리비아 뉴튼 존과 존 트라볼타도 엄청난 춤을 추었다. 그렇기는 한데, 영화에서 춤으로 가장 감정적인 변화를 느꼈던 게 <미스 에이전트>에서 나왔던 댄스였다. 아마 내 상황이 그래서 더욱 이 장면이 재밌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나중에 노래를 찾아봤는데, Bosson, 성도 이름도 없이 달랑 이거 하나 나온다. 스웨덴 가수인데, 자기 노래가 미국 회사와 계약을 했다는 건 알았지만, 산드라 블록 영화에 나오는 줄은 몰랐던 것 같다. 동네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서 자기 음악이 영화에 나와서 기뻤다고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음악이 영화랑 딱 맞을 때 감동이 몇 배로 커지는데, <미스 에이전트>에서는 특별히 더 그렇다. 실제로 이 노래가 미스 스웨덴이었던 전 여자 친구에게 바친 노래였기 때문에 전혀 맥락이 없는 것 아니다. 

히트곡은 사실상 딱 하나인 보손의 “One in a Million”이 내 인생 곡 중의 하나가 된 이유는, 문정동에 살던 시절의 상징 같은 것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회사는 그만두었고, 아직 저자로 데뷔하기 전에 이전에 내가 했던 독서나 심지어 내가 봤던 영화와는 전혀 다른 것들을 보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스타일을 만들려던 시기였다. 아마 1년 전에 봤더라면 이런 로맨스 코메디를 뭐하러 보냐고 그랬을 것 같다. 무슨 얘기를 해야할지, 어떤 스타일로 해야할지, 그런 걸 고민하던 때였다. 아마 이 노래와 후보들의 댄스에서 해답까지는 아니지만, 스타일에서 좀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무슨 엄청난 무대와 스펙타클만으로 사람이 감동하거나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많은 유머와 약간의 진지함, 그런 게 내가 이 영화에서 배웠던 것이고, 그 절정이 “One in a Million”이라는 노래, 아니 그 노래의 활용에 담겨있던 것 같다. 물론 우리는 “많은 유머와 약간의 진지함” 대신에 “아주 많은 진지함 그리고 아주 약간의 유모” 정도로 살아간다. 

결혼하기 전에 아내와 했던 약속이 있다. 물론 아주 많은 약속을 했다. 그 중의 하나가 앞으로 벌어들이는 인세는 전부 아내를 준다는 거였다. 아내가 혹시 이혼해도 평생 내가 버는 인세는 자기 달라고 했다. 그것도 한다고 했다. 아내는 내 직불카드를 가지고 있어서 돈이 들어오면 바로바로 다 빼간다.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강연 같은 데 가다 보면 봉투에 돈을 넣어서 주는 경우가 있다. 거기서 만 원짜리 한 장 뺀 적이 없이 있는 대로 가져다 주었다. 아내랑 <미스 에이전트> 같이 보던 시절, 가난하기도 했고, 불안하기도 했다. 그게 나의 문정동 시절이다. 그때 아내와 가장 재밌게 보았던 영화 중의 하나가 <미스 에이전트>였고, 아내나 나나 그 댄스 신을 가장 좋아했다. 

2004년경에 영화를 보았고, 책으로 데뷔를 한 것은 2005년의 일이다. 2007년에 <88만원 세대>를 발간했고, 그 이후로는 대체적으로 인세 수입과 생활비가 평균적으로 비슷했다. 강연은 책 나왔을 때 의례적으로 하는 것 아니면 신세진 지인의 부탁으로 하는 것 외에는 거의 안 하는, 최소한으로만 했다. 문정동 시절 생각해보면, 돈이 들어온다고 해서 그냥 강연 특히 고액 강연을 찾아다니는 것은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기업 강연은 안 했다. 그렇게 돈이 필요하면 그냥 회사 다니고 사는 게 낫지, 뭐하러 책 쓴다고 이 고생을 했나 싶다. 

문정동 시절, 많은 책을 보고 많은 영화를 보았다. 강연할 시간이 있으면 책을 좀 더 보거나, 영화라도 좀 더 봐서 새로운 얘기를 만들거나 스타일을 찾는 게 낫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책을 쓰려고 한 것인지, 돈을 벌거나 먹고 살기 위해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책을 쓴 것은 아니다. 한참 내가 인기가 있던 시절에는 강연 전문회사에서 강연 관리에 대한 제안이 많이 왔었다. 그냥 웃고 말았다. 그렇게 할 거면 그냥 취직하고 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자로서 하고 싶은 얘기가 더 이상 없으면 그냥 취직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2022년, 2년씩 재계약하면서 정년까지 갈 수 있는 성결대 교수를 그만두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애들 키우고, 이런 일들이 겹쳐서 도저히 시간 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물론 휴직 같은 게 있으면 1~2년 휴직을 하면 좋겠지만, 계약직 교수한테 그딴 건 없다. 결국 그만두기로 할 때 아내와 보손의 “One in a Million”을 다시 들었다. 굳이 상황을 얘기하지 설명하지 않아도, 아내는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문정동 시절을 떠올리는 가장 강한 상징은 지금 와서 보니까 영화 <미스 에이전트>와 <One in a Million>이었다. 내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그걸 환기시켜 준다. 나는 돈을 벌거나 먹고 살기 위해서 책을 쓴 것은 아니다. 학자로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을 뿐이다. 

베토벤이나 슈베르트 혹은 바그너 같은 음악들이 나를 만들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건 교양 차원에서 혹은 취미 차원에서 들은 것이지, 나를 만든 음악들은 아니다. 학교를 그만두면 생겨나는 가장 큰 변화는 의료보험이 직장 의료보험에서 지역 의료보험으로 바뀌고, 신경 쓰지 않던 국민연금에 대해서 다시 일일이 챙겨야 하는 소소한 일상의 일들이다. 그렇게 다시 문정동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지역 의료보험으로 돌아가면서 다시 “One in a Million”을 들었다. 아마 “One in a Million”을 내 인생의 노래라고 할 사람은 전세계에 몇 명 없을 것 같다. 보손이 그럴 것이고 혹시라도 <미스 에이전트>의 음악감독이 그럴 수 있다. 딱 하나 나온 히트곡이 누군가의 인생에 영향을 미칠 일이 별로 없을텐데, 내 경우에는 사실 그랬다. 그래서 그런 얘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부발전의 사외이사가 된 이후로 아주 짧은 전환기를 제외하면 나는 대체로 소속이 있었고, 직장의료보험에 가입되어 있었다. 성결대학교를 그만두면서 형식적으로는 다시 문정동 시절로 돌아간 것과 같다. 내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무엇이 나를 만들었는지, 다른 건 몰라도 “One in a Million”에 대한 얘기는 꼭 한 번 정리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인지, 성결대에서 마지막 수업을 하고 서해안 고속도로 위에서 “One in a Million”을 다시 들었다. 오십대 중반, 긴 시간을 돌아서 다시 문정동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도 가끔 아내와 문정동으로 다시 이사 가는 것에 대한 얘기를 하기는 한다. 공교롭게도 아내가 문정동에 있는 회사로 옮기게 되어서, 나는 문정동을 떠나서 이제는 1년에 몇 번 가볼까 말까한 상황이 되었지만, 아내는 오랫동안 예전 우리가 살던 아파트 건너편 어딘가의 회사로 매일 출퇴근을 했다. 아내는 고등학교도 그 인근에서 나와서, 전생에 문정동이 있는 것 같다는 얘기를 한다. 무명 시절, 데뷔하기 이전 시절, 무엇을 해야할지, 어떤 스타일로 해야할지 고민하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강연과 방송 진행 등 화려한 생활이 눈 앞에 있던 적이 몇 번 있었지만, 그냥 나는 조용히 처박혀서 글을 쓰는 선택을 했다. 그때마다 손뼉을 치면서 “One in a Million”과 함께 펼쳐지는 미인대회 댄스 신을 보고는 했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이기도 하고, 흐름상 기가 막힌 정서적 반전이 만들어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나도 저런 유쾌하고 편안한 반전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물론 아직도 못 만들었다, 그 정도의 감동은.  

 

https://youtu.be/j336MHEPh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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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큰 맘 먹고 읽기 시작한 것은 중3 때였다. 그때부터 몇 년 동안 수많은 소설을 읽었다. 딱히 뭔가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없었고, 어떤 삶을 살지에 대해서도 거의 생각한 게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동네 책방에서 문고판으로 <독 짓는 늙은이>를 읽은 이후로 정말 많은 소설들을 읽었는데, 막연하게 읽어두면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공부는 수학과 영어만 했다. 고등학교 때 매년 학교 대표로 수학경시 대회에 나가기는 했는데, 경시대회 수학 문제가 너무 어려워서 정말 고생했던 기억만 난다. 아주 나중에 들은 건 예전 동경대 입시 문제 같은 게 나온 거라고 하는데, 정말 아무 준비 없이 대회 나가서 난감해하던 것만 기억이 난다. 그때 수학 공부를 좀 한 덕에 경제학과 박사 과정 때까지, 수학은 크게 어려워하지 않고 꽤 많은 시험들을 무난하게 통과했다. 가장 고민한 것은 대학교 3학년 때의 수리통계학이었다. 이걸 수학과에 가서 듣고 와야 나중에 편하다고 하는데, 나는 쫄아서 그냥 응용통계학과에 개설된 과목으로 들었다. 어렵기는 했는데, 덕분에 통계가 무엇인지 좀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때 선생님이 윤기중 교수였는데, 보수적인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시위하는 학생들에 대한 이해를 해주셨던 것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그의 아들이 대통령이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영어도 공부를 하기는 해야 하는데, 할 방법이 별로 없었다. 중학교 때 무식하게 노트를 놓고 영어 한 줄 쓰고, 해석하는 것을 아랫줄에 쓰는 방법을 썼다. <바보 이반>이 처음에 한 거였는데, 너무 어려워서 책 한 권을 다 끝내지는 못했다. 나중에 특허청 청장이 된 고정식 과장과 공부하던 얘기하다가, 그 양반은 독일어 공부한다고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그렇게 번역하고 외웠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책만 읽어서는 좀 곤란할 것 같아서 찾아낸 게 MBC FM에서 새벽 5시에 해주던 영어회화 방송과 스크린 영어였다. 매달 교제도 팔았다. 5시 40분부터는 토플 수업도 해줬는데, 그건 너무 어려워서 나에게는 무리였다. 그렇게 영어 공부를 시작했는데, 새벽 5시에 정위치에 있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타이머를 구해다가 방에 있는 전축에 연결해서 4시 반에 MBC FM 라디오가 켜지게 했다. 그러면 음향조절 시간이 나왔다. 

루틴처럼 오랫동안 했던 게 4시 반쯤 일어나서 당시 막 나왔던 컵라면을 하나 먹고 정신을 차리고, 5시부터 영어회화와 스크린 영어를 40분 동안 듣던 일이었다. 물론 녹음을 해놓고 나중에 듣듣는 걸 시도할 수도 있었지만, 직접 일어나지 않으면 제대로 안 할 것 같았다. 육개장 사발면이 그 때 먹었던 건데, 물리고 물려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몇 번 먹지 않았다. 지금도 그걸 먹으면 코에서 밀가루 냄새가 터져나올 것 같다. 

그때 MBC FM 음향 조정 시간에 나왔던 음악이 바로 척 맨지온의 “Children of Sanchez”, 산체스의 아이들 영화 음악이었다. 그게 트롬펫보다 약간 작은 후루겔혼이라는 것도 몰랐지만, 신나게 울려대는 드럼 소리에 그냥 기분이 좋아졌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는 한동안 선물할 일이 있으면 두 장짜리 “산체스의 아이들” 앨범을 많이 썼다. 이게 점점 구하기가 어려워져서 그 뒤에는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 앨범으로 선물을 했다. 

인류학 공부를 하면서 “Children of Sanchez”가 유명한 인류학 보고서이고, 출간도 된 책 가족 인터뷰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화로도 나왔는데, 영화는 거의 실패한 것 같다. 프랑스에서 해준 적이 있는데, 중간에 일부만을 본 적이 있다. 아버지가 복권에 당첨된 에피소드 부분을 잠시 봤었다. 중남미 빈곤 문제에 대한 기념비적인 작업인데, <산체스네 아이들>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출간되기도 했다. 영화는 사라졌고, 음악만 남았다. 이 두 장짜리 앨범을 만드는데, 영화 제작 일정상 시간이 없어서 2주만인가, 하여간 아주 짧은 시간에 만들었다고 어디선가 읽은 것 같다 (출처를 다시 찾아봤는데, 내 실력으로는 다시 찾지는 못했다.)

척 매지온의 노래로는 가장 잘 알려진 것이 “Feels so good”과 “Give it all you got”일 것이다. ‘황인용의 영팝스’ 시그널 뮤직이었다. “Feel so good”은 제목 그대로 들으면 정말 기분 좋아지는 음악이다. 원곡은 9분 42초 정도 되는 긴 곡인데, 느리게 시작하는 전조가 1분 30초 정도 이어지다가 기타 반주가 들어오고, 이어 베이스가 들어온다. 그리고 2분 10초 정도, 드디어 척 맨지온의 후루겔혼 연주가 시작된다. 이때부터 주먹 쥔 두 팔을 흔들고 싶어진다. 곡이 뒤로 갈수록 경쾌해지고, 베이스와 엇박으로 들어가는 기타 연주가 정말 날아갈 것 같은 상쾌한 기분을 만들어준다. 

“Feels so good” 싱글 버전에서는 앞의 전주 부분을 없애고 바로 속주부터 시작을 해서 3분 30초 정도로 줄어들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들은 “Feel so good”은 바로 이 버전일 것이다. 라디오에서는 9분짜리 노래를 틀어주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또 다른 버전이 하나 있는데, 이게 척 맨지온이 자신의 아버지 생일을 기념해서 만들었다는 “70 miles young’ 앨범에 실린 돈 포터 버전이다. 

돈 포터는 우리에게 그렇게 익숙한 음악가는 아닌데, 원래 음악가는 아니고 “산체스의 아이들” 녹음할 때 프로듀서였다는 걸 읽은 적이 있다 (물론 그 자료를 다시 찾지는 못했다.) 워낙 시간이 없어서 프로듀서가 직접 노래를 부른 게 “산체스의 아이들”의 바로 그 보컬이다, 그런 게 내가 읽었던 내용이었다. 그 목소리로 “Feels so good”을 부른 게 바로 “7 miles young” 버전이다. 4분 13초짜리인데, 싱글 버전이 뒤의 속주 부분만을 축약한 거라면, 이 보컬 버전은 전주 부문만을 가지고 축약한 버전이다. 

돈 포터의 첫 가사 Thers’s no place for me to hide”가 나오는 순간, 글쎄, 아련해진다고 할까, 황홀해진다고 할까, 나는 그런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노래 가사는 어느 날 떠나버렸던 연인이 다시 돌아온다는 얘기이다. 가사는 슬펐다, 네가 다시 돌아와서 “쭉 다시 사랑하자”, 그래서 나는 기분이 진짜 좋아졌다, 이런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평범한 얘기이기는 하지만, 또한 비현실적인 내용이기도 하다. 나는 떠난 사람과 다시 만나서 결혼한 사람은 딱 한 번 봤다. 술 마시고 헤어진 게 너무 싫다고 하다가 정말로 성산대교 위에서 뛰어내리려고 한 그 인간을 깜짝 놀라서 등을 잡고 다시 다리 위로 끌어올렸던 기억이 있다. 거짓말 같이 나중에 그 여인을 다시 만났고, 결혼도 했다. 노래 “Feels so good” 같은 얘기이기는 한데, 그가 나머지 인생에 그렇게 행복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떠난 사람이 “And one day you just appear”, 갑자기 다시 돌아와서 다시 사랑하자고 말해야 기분이 그렇게 좋아진다면, 아마 내 평생에 한 번도 기분이 그렇게도 좋은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조건이 너무 어렵다. 누군가 떠나야 하고, 그 사람이 다시 돌아와야 기분이 좋을 수 있다는.. 돈 포터 버전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사는 “Your name is music to my heart”, “당신 이름은 내 가슴의 음작이예요”, 이 부분이다. 매우 느릿느릿하면서도 굵직한 돈 포터의 목소리가 이 가사에는 정말 잘 어울린다. 누군가 떠나지 않고, 누군가 다시 찾아오지도 않지만, 그래도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행복한 순간들을 많이 만났다. 

<산체스의 아이들>에 나왔던 바로 그 보컬의 목소리로 듣는 “Feels so good”, 그걸 들으면 중학교 때부터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서 컵라면 먹으면서 영어 공부한다고 책상에 앉던 그 시절이 다시 떠오른다. 그때는 전두환 이후로 과외가 없던 시절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오랫동안 4시 반이면 일어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나는 ‘아침형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내가 알아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내가 살아가게 된 리듬은 4시쯤 잠 드는 삶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로는 다시는 4시 반에 일어나는 삶을 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 시절에 새벽마다 들었던 “Children of Sanchez”와 “Feels so good”이 내 인생의 음악으로 남았다. 

https://youtu.be/SmrUlWiKZ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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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한 해가 갑니다. 정권이 바뀌었고, 많은 여건들이 바뀌었습니다. 

제 주변에서는 가장 열렬하게 윤석열을 지지하셨던 분은 아버님이었습니다. 박근혜 탄핵 때 헌법재판소에 있었던 수많은 태극기 중의 한 명이 바로 아버님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불화하던 아버님은 암으로 쓰러지신 뒤 6개월 정도 버티다가 떠나셨습니다. 그래도 지난 연말에 받으셨던 항암 치료가 잠시 효과가 있어서 그래도 좀 맑은 정신으로 잠시 주변을 정리하실 수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아버님을 보내드릴 수 있어서, 다시 한 번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립니다. 감상선 치료제를 다시 드시기 시작한 후로 어머님의 치매는 잠시 안정 상태가 되어 어머님이 아버지 장례식장에 오실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코로나 한 가운데에서도 무난하게 화장도 할 수 있어서, 이래저래 감사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아버님이 떠나시고 나서, 사랑하는 막내 동생이 두 번이나 크게 병원 신세를 졌고, 다행히 의식이 돌아와서 남은 생을 즐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에는 우리 집은 꽤 잘 사는 집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많은 집이 그렇지만 아버님 사업이 망하신 이후로는 그냥그냥 어머님 월급으로 살아가는 집이었습니다. 아버님이 남기신 재산을 다 정리하고 보니까 서울에 아파트 한 채 살 돈이 안 되더군요. 제가 다섯 살 때부터 살던 지금 집은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어서 어머님이 여생을 보내기에 좋은 형편은 아닙니다. 이래저래 집값 폭등으로 뭘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어서 어머님 사시는 댁은 내년 아버님 1주기 때 다시 고민하기로 일단 미루어 두었습니다. 

둘째가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천식으로 입원을 했었습니다. 그래도 올해는 좀 일찍 병원에 가서 작년처럼 폐렴 직전까지는 가지 않아서 입원은 했어도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동안에 너무 계속 누워만 있었더니, 둘째는 살이 너무 쪄서 결국 비만 클리닉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아내가 심장이 이상한 것 같아서 병원 응급실에 가기도 했습니다. 

별 하는 일도 없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시간 관리가 너무너무 어려워서 결국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정년까지 보장을 해준다고는 하는데, 그렇게 하다가는 제가 환갑도 못 볼 것 같아서, 이제 더 이상 학생들 만나기 어렵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결국은 정리를 했습니다. 국회 들어가는데, 무직이라고 썼더니 성결대 교수 아니냐고 해서 ‘전직’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저한테 얼마나 삶의 시간이 남아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무직이라는 삶에도 적응을 하려고 합니다. 

세계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이 코로나 이후 다시 귀환을 했고, 저는 아담 스미스 등 고전학파에서 얘기했던 자연 이자율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너무 고달픈 삶을 살 것 같아서 포기한 원래의 제 박사학위 주제가 이런 자연 이자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적정 이자율’에 대한 논의가 좀 있을까 하고 지켜봤는데, 아직은 그렇지 않았더군요. 

미국의 기준금리는 대체적으로 4%에서 5% 사이 어디에선가 정착할 것 같고, 아마 이 상태가 꽤 길어지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몇 년 동안 달러를 둘러싼 음므론이 세계적으로 좀 유행을 하기는 했는데, 그런 정도의 음모는 아니더라도 ‘달러 패권주의’ 정도의 이름 붙일 수 있는 변화가 진행 중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미국은 충분히 버틸 수 있고, 그 중심으로 실물 경제까지 재구성되는 일이 벌어지겠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제로 금리에 익숙해진 경제 시스템이 재조정되는 과정이 좀 둔탁하기는 하고, 수많은 파열음이 벌어지겠지만, 코로나가 만든 진짜 경제적 충격이 이제 오는 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연 이자율에 대한 생각을 조금 더 해보려고 합니다. 루돌프 힐퍼딩을 다시 한 번 읽어볼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지금 와서 힐프덩이 소구력이 있을 것 같지는 않네요. 

윤석열이 수많은 경제 조치를 했고, 앞으로도 또 할 것이지만, 가장 큰 건 역시 중국에 대해서 “우리 길을 간다”고 명확하게 입장을 보인 것 아닌가 합니다. 다른 대안은 별로 없어 보이는데, 천천히 뒷끝이 나오겠지요. 아마 2년 정도 격차를 가지고 본격적인 실물 충격이 오지 않을까 합니다. 아마 그렇게 중국에서 나오는 기업들을 법인세를 낮춰서 다시 한국으로 수용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글쎄요. 경제 이론에 대해서 너무 생각하지 않는, 그야말로 어설프게 시장 경제만 얘기하는 모피아들의 찌라시 수준의 낙관론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충격은 오게 될 것이고, 2년 정도 격차를 두고 본격적으로 터져나오지 않을까, 그렇게 예상합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제로 금리 심지어는 마이너스 금리에 익숙해서 새롭게 변한 경제적 질서에 정서적으로 잘 적응하지 못 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중국 경제와의 새로운 관계가 더해지면, 상당히 큰 변화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걸 윤석열 경제 특유의 노동자 쥐어짜기로 넘어갈 수 있을까. 저는 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게 존재합니다. 노동자 핍박으로 단가 낮추기를 시도하는 건데, 이게 세계적 질서에 이제는 안 맞습니다. 예를 들면, 주3일 노동제, 이런 게 점점 더 현실에서 드러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일주일에 3일만 일을 한다는데, “하고 싶은 자 마음대로 일하게 하라”, 이런 쥐어짜기가 사회적으로 계속해서 통할 수 있을까, 좀 어렵다고 봅니다. 

한 해를 지나면서 생각해보면, 올해는 기존의 ‘불안한 균형’이 결국에는 깨어지고, 이제 새로운 균형으로 전환되는 전환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 교과서에나 보던 스태그플레이션이냐? 저는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경기 침체이고,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다시 원상으로 회복될 것이다, 이런 게 아니라 구조 자체가 변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변화 기간에 기층 민중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낫게 버티는 게 정부의 역할인텐데, 아마 윤석열 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노동자 쥐어짜기’와 감세로 이 파고를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매우 고답적인 결론을 내릴 확률이 높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재인 때는 더 했다”라고, 이제는 돌아가신 저희 아버님처럼 말할 것 같습니다. 문재인 때에는 없었던 새로운 세계적 경제 구조의 변화가 지금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제 아버지에게는 그런 얘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저희 부자는 제가 스무살이 되고 난 이후로는 거의 대화가 없었드랩니다. 

저는 사람들이 “경제는 심리”라고 말할 때, 별로 그렇다고 동의해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매스의 행동으로서의 거시적 현상이 등장한다는 얘기를 케인즈도 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케인즈가 그 모든 것을 심리로 환원해서 설명하려고 했던 것 같지 않습니다. 저는 여전히 경제는 생산구조와 생산관계 그런 가치 측면의 많은 것들이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연 이자율은 그런 개념입니다. 이자율과 중국과의 관계, 그 두 가지가 결국에는 많은 것을 결정할 것이고, 그런 변화가 이제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 2023년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경제에서 국가는 무엇인가, 그 질문이 가장 높아지는 시기는 2024년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간 단계로 많은 것들을 목격하게 될 2023년, 이제 본격적으로 ‘변화’라는 것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는 시기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여러분들도 잠시라도 시간을 내시어 여러분들의 2022년을 정리하고, 더 즐겁고 신나는 새로운 한 해를 맞기 위한 준비를 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저는 2023년은 건강을 회복하는 한 해로 정했습니다. 어린이들 밥 해주고, 학교 데리고 오려면, 조금은 더 버텨야 할 것 같습니다. 

가내에 평화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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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음악 2 – Smoke gets in your eyes, 모제 불어 시절

대학교 4학년 때 확정한 것은 아니지만 프랑스로 유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좀 사연이 많았지만, 결국에는 프랑스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당연하겠지만 제일 먼저 한 일이 불어를 배우는 일이었다. 

프랑스 유학 가는 사람들이 주로 가는 데가 프랑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운용하는 알리앙스 프랑세즈였는데, 학교 다니면서 그렇게 갈 수 있을 정도로 평소에 준비를 하지는 않았었다. 종로 외국어 학원에 갔었는데, 길 건너 편에 있는 파고다 학원에도 잠시 갔었다. 학교 수업을 듣기에는 파고다 편이 약간 더 시간 여유가 있었는데, 그래도 결국 종로학원을 다닌 건, 버스에서 내려서 거기가 좀 덜 걸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때 불어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어서, 크게 알아보기도 어렵고, 복잡하게 할 상황이 아니었다. 

사실 그 직전까지도 그때까지도 국악과 대학원으로 진학할지 그냥 국내 대학원 갈지, 유학갈지 잘 결정되지 않은 상태로 4학년이 되었었다. 실기는 해금으로 연습곡 받아서 연주하면 되는 거고, 대위법이나 화성학 등 이론 시험은 외우면 된다고들 얘기해주었다. 그 정도로 막연하게 생각하고 음대 대학원 시험요강을 받아보니까 피아노 실기가 있었다. 이런 젠장. 음대 선배들이 그 정도 피아노는 그냥 이론 외우듯이 외우면 된다고 했다. 정간보가 아닌 서양식 악보를 봐야하는 이유가 생겨서, 악보 읽기용으로 들어간 실기 시험이라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피아노 학원을 잠시 다니기는 했는데, 선생님이 자로 손등을 너무 많이 때려서, 이렇게는 못하겠다고 그만둔 적이 있었다. 

수많은 우연이 겹쳐서 결국 불어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이게 쉽지가 않았다. 7시에 시작하는 걸 듣으면 8시에 끝난다. 그리고 버스 타면 딱 9시 1교시 수업에 맞춰 갈 수가 있다. 그렇게 맞춰서 가려면 집에서 6시에는 버스를 타야 한다. 개근은 못했고, 술 많이 마신 날들 몇 번은 빼먹었다. 

그때는 모제 불어라는 책을 배웠다. 알리앙스에는 좀 더 최근의 교제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런 건 잘 몰랐고, 그냥 학원에서 하는 대로 했다. 지하철 일반칸과 특등칸의 표를 사는 법, 그런 얘기들이 앞부분에 나와 있는데, 그런 건 없어진지 이미 오래라는 설명을 들으면서도 그 책으로 배웠다. 불어는 초장에 외우는 게 많다. 무조건 외워두면 나중에 쉬워진다고 그랬는데, 그렇기는 하다. 외우는 건 격변화하는 독일어가 더 많은 것 같기는 한데, 독일어는 분리 전철이라는 기상천외한 동사 변화의 벽을 잘 못 넘어갔다. 분리 전철, 비분리 전철 외우는 거에 비하면 불어는 훨씬 외울 게 적다. 독일어는 남성, 여성에 중성까지 있는데, 불어는 중성은 없다. 좀 낫다. 그리고 예외나 변칙이 거의 없다.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외울 수 있는 범위다. 영어는 현재 분사 가지고 별의별 활용을 다 하는데, 불어에는 그런 건 없다. 다 상황에 맞춰서 일일이 구절을 만들어준다. 그런 몇 가지만 생각을 하고 일단 죽어라고 외우면 말은 못해도 읽고 쓰는 건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 그렇게 종로학원 다니기 시작한지 1년 뒤에 파리 10대학 입학시험을 봤는데, 하여간 내가 꼴지는 아니었다. 나중에 외국인들끼리 대학원에서 어학수업을 들었는데, 싱가포르 여학생이 자기가 꼴찌라고 말해서, 아 나는 아니었군, 그랬다. 턱걸이로 붙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1년 뒤에는 석사 논문을 써서 제출했는데, 이게 점수를 아주 잘 받았다. 평균 점수를 왕창 올려줬다. 다른 언어 같았으면 택도 없었을 것 같다. 불어에는 변칙이 거의 없어서 죽어라고 외우면 일단은 버틸 수 있다. 

그렇게 새벽부터 일어나서 불어학원 다니던 시절, 내 워크맨에 가지고 다니던 카세트 테이프가 일종의 재즈 컴파일레이션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꾸벅꾸벅 졸면서 들었는데, 앞뒤로 들으면 딱 60분이라서 집에서 종로까지 테이프 하나로 버틸 수 있었다. 성산대교가 대충 중간 정도에 있었는데, 그때쯤 잠도 살짝 깼다. 아침에 성산대교를 넘어가면서 들었던 노래가 “Smoke Gets in Tour Eyes”였다. 테이프에는 곡명과 가수만 나오고, 설명은 껍데기에 있는데, 껍데기까지 가지고 다니지는 않는다. 워낙 느낌이 좋아서 나중에 확인을 했다. 연주자는 David Sanborn. 색스폰으로 매우 성공한 연주자고, 그래미상을 여덟 번이나 받았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내가 알 게 뭐냐! 그냥 느낌만으로 듣던 시절이었는데, 전형적인 퓨전 재즈 연주였다. 

그 카세트에는 가토 바비에리가 연주한 산타나의 Europa도 들어 있었는데, 산타나를 워낙 좋아해서 사실 오이로파 연주곡으로 들어보려고 산 테이프였다. 몇 개의 곡이 귀에 착착 감겨서 몇 달 동안 새벽에 종로어학원 가면서 들었던 건데, 제일 기억에 남는 게 “Smoke Gets in Your Eyes”였다. 아마 CD였으면 유학갈 때 가지고 갔을지도 모르는데, 테이프 수명이 있어서 그걸 가지고 가지는 않았다. 

나중에 찾아서 들어보려고 했는데, 데이빗 산본 버전의 노래는 앨범으로는 구할 수가 없었다. 그의 다른 노래들을 들어봤는데, 딱히 내 취향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Smoke gets in Your Eyes”는 기분이 찜찜하거나 힘들 때 수 없이 다른 버전으로 듣는, 내 나름의 취미 생활이 되었다. 

이 노래는 원래 제롬 컨(Jerome Kern)이라는 미국 작곡가가 만든 노래다. 많은 사람들이 제롬 컨의 주요 곡들을 앨범으로 냈는데, 내가 들어본 것 중에서는 미국의 실비아 맥네어(Sylvia McNair)가 만든 제롬 컨 송북이 제일 편하고 좋다. 실비아 맥네어는 송북을 일종의 시리즈처럼 두 장을 냈는데, 제롬 컨과 해롤드 아를렌(Harold Arlen)의 두 장이 있다. 해롤드 아를렌은 오즈의 마법사에 나온 “Over the Rainbow”와 “Come Rain or Come Shine”의 작곡가다. 이 두 장의 송북은 피아노와 더블 베이스 두 가지만으로 반주가 진행되는데, 피아노가 무려 앙드레 프레빈이다. 

원래 연주곡으로 들었던 거라서, 가사는 사실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 연주곡으로 들을 때는 Oscar Peterson Trio, 역시 제롬 컨 송북 버전으로 많이 듣는다. 얼 클루(Earl Klugh)의 솔로 재즈 기타 연주도 매우 특색 있는 스타일로 들을 수 있다. 보컬 버전으로는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한 번씩 부른 노래라서, 잘 모르는 가수를 찾아볼 때 좀 도움이 된다. 레슬리 가렛이 좀 더 스탠다드한 느낌이라면, 조수미는 약간은 분위기를 띄워서 불렀다. 웅산 버전도 국내 오디오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스피커 테스트용으로 많이 사용되는 걸로 알고 있다. 

조수미 노래는 40대까지는 거의 안 들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조수미가 부른 “Smoke Gets in Your Eyes”를 들으면서 다른 노래들도 즐겨듣게 되었다. 조수미의 노래 중에서 가장 즐겁게 듣는 노래는 “Missing You” 앨범에 나온 “피래우스의 아이들”이다. 원래는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에 나온 노래로 알고 있다. 이 노래만큼은 역대 조수미가 가장 잘 불렀다고 생각한다. 왠지 흥이 필요할 때 주로 듣는다. 

팝송이나 락에서는 누가 부른 노래를 다시 부르면 카피 버전으로 하나 좀 낮춰보는 경향이 있는데, 재즈에서는 그런 건 없는 것 같다. 누구나 다 부르는 노래들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부른다. 아마 가장 많은 버전으로 들어본 노래가 나에게는 “Some Gets in Your Eyes”가 아닐 것 같다. 이제 환갑이 보이는 나이가 되었는데, 이걸 들을 때면 대학교 4학년 성산대교 위에 돌아가는 느낌이 잠시 들기도 한다. 

아내는 이런 나를 보면 질색을 한다. 맨날 그렇게 옛날 노래만 들어서 어쩔겨, 그렇게 혀를 차고 간다. 그렇기는 한데, 나도 맨날 긴장하면서 살 수만은 없어서, 음악 들을 때만이라도 좀 편하고 익숙한 것을 찾게 된다.

https://youtu.be/thguZyRuBH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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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i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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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많은 노래가 삶의 중요한 부분에 끼어들게 된다. 나도 참 많은 노래를 들었는데, 지금 와서 돌아보면 가장 중요한 노래가 문득 미니 리퍼튼의 “Lovin’You”였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듣던 많은 노래들은 LP를 샀거나 혹은 CD를 샀거나, 아니면 음원이라도 산 노래들이다. 많은 노래들은 LP를 사던 순간의 기억 같은 것과 같이 있다. 이 노래는 어떻게 듣게 된 건지, 어디서 난 건지, 그것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노래를 꼽으라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이 노래였던 것 같다. 

2000년대에 차에서 쓰는 CD 플레이어처럼 생긴 MP3 플레이어가 잠시 출시된 적이 있었다. 그러면 차에서 180곡 내외를 들을 수 있다. 게다가 좋은 건, 시동을 꺼도 끝난 부분에서 시작할 수 있다. 여기서 음원을 뽑아서 카세트 테이프처럼 생긴 카트리지로 소리를 릴레이하는 방식이다. 그 시절만 해도 CD 플레이어가 달린 차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차가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를 달 수 있었다. 거기서 MP3를 들을 수 있다니, 거의 혁명 같은 일이었다. 이 MP3 플레이어는 온도에 약해서 잘 망가졌고, 아마 세 대를 샀던 기억이다. 플레이어 자체는 그렇게 비싸지 않았는데, 이것 때문에 차에 좋은 스피커를 달고, 앰프도 다 새 거로 바꾸게 되었다. 나중에는 차값보다 오디오 값이 더 비싸게 되었던. 

그렇게 차에 묻어온 MP3 중에 “러빙유”가 있었다. 요즘은 차에 가수와 곡명은 물론이고 앨범 레이블까지 다 뜬다. 그 시절에는 그딴 건 없었다. 물론 파일을 열어서 보면 알 수야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열심히 살지는 않았다. 영동 고속도로를 가면 대관령 구간을 넘어가야 한다. 그 구간에서 이 MP3 플레이어는 평균적으로 두 번 정도는 튀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정지했다. 별 수 없던, 그런 시절이었다. 요즘은 핸펀에서 블루투스로 연결하니까 아무리 거친 구간이라도 튀고 말고, 그딴 건 없다. 

누군지도 모르고, 뭔 얘기인지도 모르고 그냥 들었는데, 나는 무슨 유명한 소프라노가 부른 건가, 그랬다. 나중에 보니까 미니 리페튼이라는 싱어송 라이터가 초창기에 자기 딸을 키우면서 만든 노래였다. 그딴 것도 다 몰랐다. 

2001년, 2002년, 그 시절 나는 겉으로는 화려하게 살고 있었는데, 정서 상태는 완전 개판이었다. 대통령은 김대중이었는데, 초장에 청와대 근무에 대해서 “싫어요”, 그러고 말았드랬다. 이유는 별 게 아니다. 7시에는 출근해야 한다는. 총 맞았어요, 그런 짓을 하게, 그러고 말았다. 대통령 만찬에 갈 기회가 지금까지 몇 번 있었는데, 그것도 다 안 갔다. 그것도 별 이유는 아니다. 그런 만찬 한 번 가서, 술도 한 잔 얻어마시고 오려면, 최소 다섯 시간을 금연을 해야 한다. 한 시간 전에는 오라고 그러고, 어딘지도 모르는 데서 대충 대기하라고 그러고, 그러다가 결국 담배를 피울 수 있게 되는 시간이 대충 따져보니까 다섯 시간 정도 된다. 미쳤어? 물론 엄청 중요한 일이라면 다섯 시간 아니라 열 시간도 참을 수 있는데, 그게 고작 밥 한 그릇 먹기 위해서라면.. 일 없슈, 그러고 말았다. 청와대 만찬이라는 게, 한 번 싫다고 하면 어지간하면 다시 권유하는 일은 없다. 그런 이유로 대통령 만찬에 안 갔다고 하면 사람들이 웃을텐데, 어쨌든 나는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문재인 대통령 되기 전에 둘이서 소주 한 잔 마신 적이 있다. 그 전에 가끔 그가 나에게 뭘 해주면 되겠느냐고 할 때마다 나중에 여유 되면 소주나 한 잔 사주세요, 그랬드랬다. 그리고 정말로 소주 한 잔 샀다. 나는 그걸로 그에게 받을 건 다 받았다고 생각한다. 

2000년부터의 몇 년간, 나는 정체성의 불편함이 극도에 달하던 시절이고, 뭘 하고 살지 심하게 방황하던 시절이었다. 흔히 말하던 보수들의 세계에 너무 깊이 들어가 있었고, 이제는 어떤 식으로든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나도 느끼던 시절이다. 하다못해, 내가 상공회의소의 주포였었다. 상의의 중요한 발표들을 토론회에서 내가 하던 시절이었다. 전경련에서 술 마실 때면 뭐 해주면 여기서 일할 수 있겠냐, 그런 거 물어보기도 했다. 웃기만 했었다. 

개인적인 삶도 개판이었다. 일요일 오후마다 어머니가 집에 오셔서 결혼하라고 아주 난리를 치셨다. 몇 달 그러고 버티다가, 도저히 못 살겠다 싶어서, 토요일 밤 12시면 여행을 떠났다. 그 시간에 떠나면 밤새 전국 어디든지 갈 수 있다. 강진 같은 데도 갈 수 있다. 진도 평택항도 그때 처음 갔었고, 사람 없을 만한 여행지들은 그 시절 대부분 가봤다. 그렇게 밤새 운전하고 가서 아침에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을 때 아침을 사 먹었다. 적당히 여기저기 보고, 저녁까지 대충 먹고 해 떨어지면 집에 들어왔다. 

그 직전까지는 토요일이 근무일이었다. 가가 싫어도 토요일날 죽어라고 출근해서 좀 버티다가 돌아오던 시절이었다. 집에 오면 술 때려 마시고 놀고 싶은데, 다음 날 어머니가 오시니까 좀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밤 12시에 운전하고 나가는 삶, 그렇게 살았다. 술은 일요일 밤에 마셨다. 

시간은 얼마 없고, 도저히 힘들어서 술은 마셔야겠고… 그때 주로 마시던 술이 보드카와 포카리스웨트를 혼합한 소위 “뿅가리스웻”, 정말 TV 틀어놓고 이거 마시면 달달하던 입맛이 어느 덧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약 느낌이 어떤 건지 직감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그 불안하던 정서에서 “러빙유”가 흘러나오면,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마음이 정말 편해졌고, 좀 더 달달한 인생을 살고 싶다는 느낌이 강렬혀졌었다. 

물론 그때는 스피커가 좀 도움을 줬다. 프라이드 웨건을 타고 있었는데, 자료집 실던 뒷부분의 한쪽에다 인클로져가 어마무시하게 큰 우퍼를 달았었다. 원래 자료집이나 책 같은 거 실으려고 웨건을 샀던 거였는데, 결국은 그 자리의 일부를 스피커가 차지했다. 일반 승용차에도 이런 스피커를 다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는데, 뒷자리를 전부 가려서 운전할 때 위험하다. 나 말고 그런 스피커를 달고 있는 차는 아주 오래 전 문정동에서 지프 랭글러에서 한 번 본 적 있다. 나 말고도 미친 넘이 또 한 명 있군, 그렇게 웃고 넘어갔다. 

새벽에 대관령 넘어갈 때 미니 리페턴의 “러빙유”가 나오면, 정말 삶을 재밌게 살고 싶고, 뭔가 잘 해 보고 싶고, 그런 생각이 가득해진다. 그런 기억이 워낙 강해서 그런지, 나중에 신혼여행도 강릉으로 갔다. 사람들은 뭐라고들 했는데, 그때 아내에게는 나중에 길게 간다고 했었다. 결국 취리히에 한 달, 파리에 한 달, 그렇게 따로 여행을 갔다. 나는 약속한 건 지키는 편이다. 

몇 달 아니, 몇 년간 고민이 많았는데, 결국 사직서를 내는 걸로 그 시절을 마무리했다. 정부에서는 좀 참고 넘어가면 해외 파견 자리를 챙겨준다고 했었는데, 고맙지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시민운동으로 돌아와서 활동을 시작했고, 그때부터 책 쓰는 준비를 시작해서, 2005년에 첫 책이 나오게 되었다. 

그 시절을 생각해보면, 결국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노래는 즐겨 듣던 락도 아니고, 재즈나 칼라스 같은 성악곡도 아니었던 것 같다. 누군지도 잘 모르고, 뭐 하자는 노래인지도 모르고 그냥 어떻게 생긴 건지도 모르면서 들었던 미니 리퍼튼의 “러빙 유”가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노래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그에 마야라는 이름의 딸에 대한 노래였다는 것은 아주 나중에 알았다. 어쩐지, 그 노래를 들으면서 생기는 감정이 더 좋은 연애를 하고 싶다거나, 누군가를 강렬히 사랑한다, 그런 느낌이라기 보다는 좀 더 편안하고 그런 삶에 대한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그게 어린 딸에 대한 노래였던 거, 난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런 정서가 생겨난 것은 진짜다. 

살다 보면, 삶의 카르푸르, 사거리 같은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순간 같은 게 있다. 나에게는 2001년의 복잡한 상황이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문득, 그 안에서 괜히 희망 혹은 위로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 계기가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림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시가 될 수도 있다. 나에게는 도대체 왜 나에게 온 것인지, 유래도 정확히 모르는 노래 한 곡이 그 역할을 했다. 

미니 레퍼튼 “러빙유” 싱글이 나온게 1974년인데, 그녀는 암으로 5년 후에 사망하게 된다. 짧은 삶을 살다가 갔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녀의 삶은 30대 초반의 내 삶을 좀 더 밝고 건전한 방향으로 구원하는 역할을 했다. 

내 인생의 노래를 고르라면 아무래도 Lynyrd Skynyrd의 “Free Bird”가 될 거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었는데, 막상 50대 중반에 다시 돌아보니, 그야말로 이유도 모르고 들었던 “러빙유”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평소 같으면 이런 노래 간지러워서 어떻게 듣드냐고 했었을지도 모르지만, 삶이 이래저래 엉망진창이던 순간, 헤비메탈과 국악 사이에 끼어 있던 노래 한 곡이 내 삶의 경로를 바꾸게 된 것 같다. 

사실 “러빙유”는 차에서만 들었고, 집에서는 거의 들은 적이 없다. 언젠가는 CD 한 장 살 생각이다. 

결국 회사는 그만두었고, 결혼은 했는데, 아이가 태어난 것은 결혼하고 9년만의 일이었다. 연달아 둘째가 태어나서 아이 둘을 키우는 아빠가 되었다. 아들을 키워서 그런지, “러빙유”, 그런 감정이 드는 일은 거의 없다. 이 아이들이 날 좀 그만 괴롭히면 좋겠다는 생각만 많이 들었다. 




 

https://youtu.be/kE0pwJ5PMD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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