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대장정 코멘터리 북

1.
아침에 둘째 어린이집 데려다 주면서, 문득 이 시기도 언젠가는 끝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팠던 아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정말 내가 많이 놀아주어서 그런지, 하여간 애교가 엄청난다. 아침마다 배 위에 올라와서 깨운다. 이렇게 사는 시기는 얘가 초등학교 2학년 끝날 때까지, 앞으로 4년 정도 남은 것 같다. 그 뒤에는? 별로 생각해놓은 게 없다. 그리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4년 후에 내가 뭘 할지, 그런 걸 뭐하러 지금 미리 생각하나 싶다. 지금은,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는 생각 정도다.

직장 민주주의 책 준비하던 어느 일요일, 심심해서 처음으로 내가 낸 책들을 세봤다. 서른여섯 권 정도 되는 것 같다. 50 권까지는 열네 권 남았다. 대충 둘째 등하교 시키는 거 끝나는 시기랑 얼추 맞을 것 같다.

‘88만원 세대’부터 시작해서 연작으로 12권을 쓰고, 거기에 ‘경제 대장정 시리즈’라는 이름을 붙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게 끝나면 코멘터리 북을 한 권 해보고 싶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 시리즈를 마무리 짓지는 못했다. 문화 경제학까지 쓰고, 시리즈는 일단 세웠다. 문화 경제학 다음 책이 농업경제학이었는데, 그건 올해 나간다. 오랫동안 표류했던 셈이다. 그 뒤로 ‘과학과 기술의 경제학’이 있었고, 맨 마지막이 ‘방송과 언론의 경제학’이었다. 이 마지막 책은 안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3년 전에 애들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방송과 언론에 대해서 불가근 불가원이라는 입장을 정했다. 뭐 원래도 그렇지만.. 방송은 안 하고, 기자들도 일상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 외에 따로 만나지는 않기로 했다.

방송이 한국을 구원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한국 방송.. 사실 개판이다. 방송이 중요하기는 한데, 지금 구조에서 방송을 통해서 뭔가를 한다는 것은 신기루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론은? 방송 보다는 언론이 더 중요하다. 그렇지만 내가 움직여서 뭘 주도적으로 한다는 생각도 버렸다. 그냥, 도와달라고 하면 잠시 도와주고, 말기로..

그리고 그 힘을 전부 책에 쏟기로 했다. 나는 여전히 내가 사는 이 사회가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아지기를 바란다.

청와대 구조나, 현 정부의 힘 쓰는 사람들, 이걸 사실 몰랐어야 했다. 유능한 사람들이 갔으니까, 잘 하겠지, 그래도 이게 어떻게 생긴 정부인데, 적당히 염치 있게 하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살았어야 했다. 하필이면 또 유독 잘 아는 사람들이 요직에 가서..

현 정권 첫 인선 보고, 방송은 안 한다고 마음을 먹었다. 망했다. 저 구조면, 신선이 온다고 해도 살리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그 대신 책을 열심히 쓰기로 했다. 애 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좋은 책을 쓰는 정도일 거라고 생각을 했다.

마지막으로 현 정부에서 중요한 자리가 제안이 온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안 한다고 했다. 지금도 안 하고, 앞으로도 안 할 거라고 그랬다. 그냥 있는 게 좋아서가 아니라,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포자기로 살았던 시절을 다 합치면 6개월이 안 될 것 같다. 나는 한국에 대한 희망을 버린 적이 한 번도 없다. 지금 보다 나은 상태를 만들고 싶었다. 그게 내가 책을 쓰기 시작한 이유고, 지금도 책을 쓰는 이유다.

2.
정말 잘 알았던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가서 양아치 짓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기는 힘들다. 그래도 뭐라고 한 번도 안 했다. 신문에도 그런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얘기는 거의 쓰지 않았다. 그건.. 가쉽이다. 나는 가쉽으로 내게 확보된 지면 같은 것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대충 4년 후 어느 시점쯤 49번째 책을 쓸 것 같다. 50번째 책은 ‘경제 대장정 코멘터리 북’이라고 이름을 붙이려고 한다. 어느 출판사에서, 누구랑 할지는 정해진 게 없다. 제목만 정했다. 2004년부터 책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으니까 대충 20년 정도, 진짜 죽어라고 책을 쓰게 된 셈이다.

한 권도 돈을 벌기 위해서 쓴 책은 없다. 나는 그걸 ‘경제 대장정’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제 와서 뒤돌아보면, 그걸 나 혼자 한 게 아니다. 내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진짜 많이 도와주기도 했고, 그 길을 같이 걸어온 독자들이 있다. 첫 책은 1쇄 겨우 털었다. 그 때부터 내 책을 읽어준 수많은 독자들과 20년에 걸쳐 그 길을 같이 걸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먹고 살 수 있을지 없을지, 그런 건 독자들 덕분에 걱정하지 않고 살아도 좋았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비굴하게 살지는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 단 한 권도 그런 이유로 책을 쓰지는 않아도 되었다.

지금도, 이 책은 엄청 팔린다, 저 책의 판매는 우리가 보장한다, 이런 제안들 엄청 온다. 외부에서 부탁 받아서 쓴 책은 한겨레가 부탁한 직장 민주주의 책 한 권이다. 뭐, 돈 된다고 쓴 책은 아니고.

그래서 50권째 책을 내면, 잔치 한 번은 하기로 했다. 출판사나 그런 데 도움 안 받고, 그냥 내 돈으로 호텔 같은 데서 밥은 한 번 사려고 한다. 그리고 그 날은 독자들하고 술도 마시려고. 지금까지 독자들하고 술을 마신 적이 없다. 책 나오면 차 한 잔 마시는, ‘독자 티타임’을 늘 했다. 술은 많이 마시지만, 사람들하고 술로 엉키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지금도 모르는 사람하고 술을 마시는 일은 거의 없다. 성격이 더러워서 그렇다. 엄청 까칠하다.

그래도 20년간, 50권의 책을 마무리하는 날이면, 술 한 잔 해도 좋을 것 같다. 아내한테 벌써 허락도 받았다.

3.
대충 이렇게 일정을 잡고 보면, 이젠 진짜 남은 책이 얼마 없다. 지금 쓰기로 확정된 책이 일곱 권 정도 된다. 50권째 빼고 나면, 여섯 권 남는다. 그러니까 아직 주제가 확정되지 않고, 빈 칸으로 남은 게 딱 여섯 권. 누구랑, 뭘 할지 모른다. 확정된 건, 방송이나 언론에 대해서는 쓰지 않는다는 것 정도. 잘 모르는 세계의 일이다.

장관은 모르는데, 차관급 자리로는 몇 번 갈 일이 있었다. 싫다고 했다. 공기업 사장 자리는 딱 한 번 정말로 고민한 적이 있었다. 일주일 고민하고, 미안하다고 했다.

장관이나 차관 한 번 하는 것하고, 50권의 책을 쓰는 것, 나는 후자가 훨씬 명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 권 한 권, 최선을 다해서 한국 사회에 쏘아 올린다. 그걸 20년을 하는 건, 명예로운 일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대장정은 둘째가 세 살 때 폐렴으로 병원에 연거푸 입원할 때부터, 초등학교 2학년 마칠 때까지, 애 보면서 하고 있다. 남들 도와달라는 거 다 도와주고, 챙길 거 다 챙기면서 한다. 내가 무슨 엄청난 일을 한다고, 남들을 희생시키는 삶을 살겠나? 그런 방식으로는 살고 싶지 않다.

50권을 채우고 나면 뭐하고 사나? 그것보다는 나머지 여섯 권에 무슨 얘기를 하나, 그게 더 내 마음이 가는 질문이고, 더 어려운 질문이다. 처음의 12권은 시작하기 전에 스토리 보드를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내가 뭘 할지, 어디로 갈지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스토리 보드가 없다. 그래서 사실은 막막하다. 지금부터 어떻게 이 대장정을 마무리해야할지, 세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한 가지는 정했다. 이제 새로 에디터를 만나고, 새로 익숙해지고, 그런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출판계가 어려워지면서 에디터들의 이동이 너무 많아졌다. 요즘 힘든 건, 매번 새로운 사람하고 익숙해지는 일이다. 이제는, 그렇게 못하겠다. 지금까지 좋은 작업을 했던 동료 에디터들이 많이 있다. ‘88만원 세대’ 작업했던 레디앙의 이광호 선배나 가장 많은 책을 같이 했던 김문식 그리고 여전히 한 권 더 해보고 싶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했던 임윤희, 좋은 기억을 가진 동료들이 많이 있다. 돌아가면서 한 권씩만 해도, 나머지 여섯 권 다 끝난다.

처음에 책 냈을 때, 장정일 선배한테 연락이 왔었다. 그 때 나에게 해준 얘기가, 10년 동안 열심히 책을 쓰면, 밥은 먹고 살게 된다..

해보니까, 진짜 그렇다. 10년쯤 지났을 때, 하루 세 끼 걱정 정도는 안 해도 되는 상황이 되었다.

내가 이런 얘기들을 공개적으로 하는 것은, 마지막 아쉬움 때문에 그렇다.

지금도 교수 되고 싶으면, 적당한 데 부탁하면 된다. 그 정도 성과는 냈다. 그렇지만 그렇게 살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건 아쉽지 않은데, 제자가 없다. 괜찮다. 그런 거 생각하고 살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내가 걸었던 길을, 전혀 새로운 방식이든 혹은 완전히 새로운 시선으로 계속 이어서 걸어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그래서 나의 대장정은 끝나지만, 누군가의 대장정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희망이 있다. 그래야 한국이 망하지 않는다. 여의도에 푹 박혀 있으면 눈이 좁아지고, 불안감이 생기게 된다. 청와대에 푹 박혀 있으면, 자신감이 너무 높아지거나 미움이 너무 많아진다. 내가 본 청와대에 있던 사람들, 특히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은 그 후에 나머지 인생을 지나친 자신감으로 살거나, 실망에 의한 미움을 안고 살아갔다. <반지의 제왕>에 오탕크의 돌을 본 사람들의 불행한 미래처럼. 그게 원래 그렇다. 2000년에 청와대에 갈 일이 있었다. 그 때도 안 갔다. 그 대신 총리실로 갔다. 청와대 갈 생각 있었으면, 그 때 벌써 갔다.

혹시 코멘터리 북에 문재인과 지냈던 몇 년 간의 얘기를 소개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도 성공적으로 대통령직을 마치고, 다음 정권도 어느 정도 안정되면 그 얘기도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주변 사람들이 묻는다. 요즘 뭐 해? 애 봐요.

물론 아이들을 보는 건 맞지만, 애만 보는 건 아니다. 나는 오늘도 내게 주어진 일을 한다. 하라고 시킨 사람은 없다. 그ㄱ렇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것 같아서 한다.

얼마 전에 동료들에게 내 마지막 꿈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있다.

너무너무 힘들 때, 노르망디 해안에서 바다를 보면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던 적이 있었다. 그 때, 죽을 때는 여기와서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말렸다. 류마티즘이 풍토병인데, 습기가 너무 많아서 노년을 보내기에 좋은 조건은 아니라고. 그래요? 그리고 넘어갔다.

나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아무도 모르는 곳, 에트르타 어느 해변가 작은 집 같은 곳에서 정말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말년을 보내고 싶다. 책 50 권의 제목 목록을 남기면, 정말이지 다른 아무 것도 더 남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난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고, 떠들썩하고 요란한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가, 여전히 가장 좋다. 가장 좋아하는 바다, 가장 좋아하는 혼자 있는 시간, 그렇게 마지막 순간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게 내 작은 개인적 소망이다. 그건 내 취향이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노년 때, 뉴욕타임즈인가, 하여간 뭐 그런 언론의 젊은 여기자가 인터뷰를 하러 갔다 보다. 이 영감쟁이가, 진짜 뭔 마음을 먹었는지, 오래 된 넥타이를 다 매고 나갔다. 그랬더니 기자가 그 넥타이를 보고 한 마디 했나보다. 그냥 그러려나, 웃고 넘어가면 될 일을 이 영감쟁이가 뭐라고 또 어마무시한 얘기를 했다.

“내가 만약 멋진 넥타이를 매고 살았다면, 지금 사람들이 아는 아이작 아시모프는 없었을 거요.”

멋지다는 생각과 지랄맞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책을 쓰기로 마음을 먹으면서 책과 영화를 봤다. 물론 린간들이 일반적으로 그럴 때 볼 것 같은 전공서적과는 전혀 다른 책들이다. 그 때 <파운데이션>을 읽었다.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아마도 몇 년간, 나는 <파운데이션>의 세상에 살고 있다. 여전히 수학을 붙잡고 있고, 계산을 하고, 기술책을 읽는다. 그리고 아직도 기술 분석을 한다. 많은 사람들이 <파운데이션>을 읽었겠지만, 그걸 보고 진짜로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내 박사 논문의 핵심 주제가 ‘foundation of foundation’이었다. 지금도 그걸 위해 책을 쓴다.

지난 주에 웹튠 제안이 왔다. 아직 초고가 다 안 끝난 책과 그 다음 책은 웹튠으로 제작하고 싶다고 한다. 아직 결정은 안 했다. 다음 주에 얘기 좀 들어보고.

50권의 책을 관통하는 정신은, 단 하나다. 명랑.. 난 심각하고 심오한 것은 싫다. 발걸음도 가볍게, 소풍 가는 것처럼, 그렇게 살고 싶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 심각한 것, 꺼져! 인상 쓰는 것, 지겨워! 내 안의 80년대, 진작에 안녕!

우리는 모두 행복해지기 위해서 산다. 그리고 서로 조금이라도 더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한다. 돈 벌려고 사는 게 아니다. 더 많은 국부를 위해서 노력하는 국가? 천박하기도 하지만, 그런 나라가 잘 사는 꼴이 되지가 않는다. 우리 자녀들의 시대는, 돈 벌려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잘난 척하지 않는 시대가 되면 좋겠다. 나의 소망이다. 그래서 이게 경제학자의 길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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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 기자, 곤도 고타로의 '맛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해제를 쓰는 중이다. 굼뱅이도 기는 재주가 있다고, 내 책은 못 팔아도, 남의 책은 그런대로 잘 팔아주는 편이다. 해 보니까, 추천사는 거의 영향이 없고, 좀 정성들여 쓴 해제는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어린이 기아에 관한 책 등, 스테디셀러로 올라간 책들도 좀 있다.

뒤돌아서 생각해보면, 나는 질투라는 감정이 없는 것 같다. 심통은 가끔 나도, 샘이 난 적이 거의 없다. 부러움은 느껴본 적이 있는데, 질투를 느껴본 게.. 글쎄, 잘 모르겠다. 남 잘 되면 좋다. 그렇지만 부당하다고 느껴질 때에는, 별로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정당한 성공과 승리에는 기꺼이 박수를 친다. 그리고 아픔이 있는 삶의 애잔함에도 박수를 친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책에 관한 얘기로 에세이집을 낼 생각이 있다. 굼뱅이 얘기로 시작할 생각이다.

'맛있는 자본주의'라는 책은, 엄청 웃긴 책이다. 물론 좀 생각해봐야 웃기다. 이걸 어떻게 개막장 분위기로 해제를 쓸지, 생각 중이다. 근엄이고, 우아고, 이제는 다 귀찮다. 나의 근엄은 아이둘 똥 기저귀 치우면서 사라졌다. 그딴 거, 다 귀찮다.

개막장 분위기의 농사 얘기지만, 아사히 신문사에 연재된 얘기다. 그것도 아주 인기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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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보기 시작한지 3년 가까워진다. 앞으로 4년만 더 버티면 둘째 초등학교 2학년이 끝난다. 그리고 몇 년간 어린이집부터 이어진 등하교가 끝날 것이다. 솔직히 애들이 조금 더 크니까, 애들 보는 일이 훨씬 더 편해졌다. 이제는 똥 기저귀 가는 것과 같은 물리적인 일 보다는, 끊임없이 뭔가 물어보는 아이들의 질문에 요령껏 그리고 약간은 철학적으로 답하는 보다 지적이고 정신적인 작업에 가까워졌다.

지난 몇 년간, 무슨 책을 쓸지, 무슨 작업을 할지, 주도적으로 한 게 별로 없다. 그 전에 하려고 생각했던 것들을 빠개먹지 않고 어떻게든 마무리 짓는 일들이었다.

요즘은 뭘 하고 싶은 것들이 조금씩 생겨나는 중이다. 뭐,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mb를 모티브로 하는 블랙 코미디, 이런 건 여전히 자신 없다. 내가 뭘 들고 낑낑 거리는 것보다는, 주진우 기자를 해보라고 설득하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싶기도 한.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말이, 맞는 것 같기는 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몇 년째 그냥 비우기만 했더니, 이제야 뭔가 해보고 싶은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럼 누구랑 할까? 이런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인간 다 거기서 거기다. 나도 마찬가지다. 친한 사람, 편한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같이 뭔가 하면 재밌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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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길이 엄청 막혔다. 학교 가는 큰 애는 50분에 간당간당하게 교문에 들어갔다. 대학교 때 미국 영화 보면 엄청 중요한 일 하는 아빠들이 아침에 자녀들 등교시키고 가는 거 보면서, 좀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어떻게 1년 내내 저렇게 할 수가 있지? 프랑스에서 고등학교 교사 부부랑 친하게 지낸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막 들어간 아이가 있었는데, 그 정도가 아니라 월수금, 화목토로 부부가 등하교는 물론이고 시장 보고 밥 하는 것도 나누어서 하는 것 보고.. 이런 게 우리의 미래가 될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게 우리의 미래가 될지는 잘 모르겠다. '솔로 계급의 경제학' 작업하면서, 그 때 본 20살 중 1/3 정도만 결혼을 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럴 것 같다. 스웨덴을 비롯한 많은 유럽 국가의 혼외 출산 국민이 절반을 넘어선다. 통계로만 보면 결혼하지 않는 건 별 상관이 없는데, 연애도 하지 않는 건 좀 그렇다. 요즘 같으면 연애 대신에 혐오로 소일하는 것 같다.

성경에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그랬던 것 같다. 한국에서 성경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혐오를 재생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종교가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자기 보고 싶은 대로,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종교는 그냥 그걸 강화시키는 보조재 같은 거 아닌가 싶다.

우병우, 황교안, 한국 공직 시스템이 만들어낸 대표적인 개똘아이들.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 황교안이 포럼 같은 데 돌아다니면서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자기가 만들고 싶은 경제라고 그러고 다닐 때, 아마도 저 아저씨는 반드시 대선에 나오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교안이 꽃길을 걸었는데, 아마도 이회창이 모델인 것 같다. 그래도 그는 대쪽 검사라는 이미지라도 있었는데. 황교안의 꽃길과 반대편의 진흙탕 길은 이재명이 걷는 것 같다. 정치라, 잘 모르겠다.

죽기 전에 노회찬 대통령 되는 거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뭐, 가능성 1도 없지만, 가끔 '좋은 나라'라는 생각을 하면 노회찬이 대통령을 해야지, 이런 마음도. 이제 그런 택없는 소망 같은 건 안 갖기로 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너무 많이 죽었다.

애들 학교 데려다 주면서 카뮈의 페스트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주 더운 날, 대학교 2학년 때 중앙도서관 지하에서 팥빙수 먹으면서 읽었던 그 기분이 떠올랐다. 세브란스에서 이한열 시체 지키던 그 6월이 지나고 어느 여름 날이었는데, 마치 코 끝에서 세브란스에서 맡았던 소독약 냄새가 나는 기분이었다.

혐오로 달려가는 한국은, 페스트에 갇힌 카뮈의 그 어느 도시와 사실 다를 바 없다. 도시 바깥으로 도망갈 것인가, 아니면 이 사람들과 같이 하겠다, 어느 기자에게 인간적으로 던져진 생존의 질문이다. 기자는 잔류를 결정한다. 사실 페스트라는 소설 자체가 이 하나의 질문을 형성시키고, 독자들에게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 질문을 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과도 같다. 그 시절에 나는 페스트를 끝까지 읽지는 않았다. 여기까지 읽고.. 도서관이 너무 덥다, 그냥 잔디밭에 나가서 친구들하고 술 처먹고, 헬렐레.

40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페스트를 다시 읽었다. 쥐가 옮기는 질병 페스트에서, 피를 토하며 죽는 쥐가 처음 등장한 날이 4월 16일이다. 세월호 사건이 난 바로 그 날이다. 순간 소름 돋았었다. 어느 화창한 봄날..

우리는 이 봄날, 서로 사랑하기 보다는, 미워하고 혐오할 대상을 찾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는지도 모른다. 사실 한국에서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혐오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순간이 프로야구 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 시간만큼은, 혐오를 잠시 내려놓고, 응원한다. 잘 좀 해라, 병살 좀 그만 치고. 지겹지도 않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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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쓰다 보면, 늘 그런 건 아니지만 가끔은 지옥에 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절반쯤 지났을 때 종종 그렇다. 다 버리고 새로 할까, 아니면 그냥 갈까, 판단하기 어려운 순간들을 만나게 된다. 어떨 때는 아예 그냥 계약금 다시 돌려주고, 이 책 내지 말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래도 그냥 꾹 참는 건, 내 책들은 책들끼리 서로 징검다리 역할을 하게 설계되어 있다. 중간에 이가 하나 빠지면, 다음 단계로 나갈 수가 없는.. 몇 년에 걸쳐서 그렇게 설계를 해놔서, 나 이거 그만 할래, 그렇게 던져놓고 도망가기도 어렵게 되어 있다. 그럴 때 애들이 좀 봐주냐, 뭐 전혀 그렇지 않다. 주말이면 밥 하고, 애들 보고. 오늘은 청소 한단다. 뭐, 그래도 오늘은 좀 낫다. 조금만 있으면 야구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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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 둘을 초등학교와 어린이집으로 두 군데를 가야하니까 아침 등교 시간이 더 힘들어지기는 했다. 큰 애는 육교 위에서 혼자 내려보내는데, 육교를 내려가기까지 연신 뒤를 돌아다본다. 교문까지 혼자 가는 걸 어려워한다. 이번 달 안에는 육교를 혼자 건너는 연습을 해야 한다.

둘째는 혼자 움직이는 것에 아주 익숙하다. 어린이집 현관문까지만 데려다주면 혼자 자기 방까지 간다. 큰 애는 어린이집 졸업하는 순간까지, 방에다 데려다 달라고 했다. 둘째는 많이 아팠고, 부모 손길도 덜 받았다.

토요타 공장의 일본 분포도와 센다이 공장의 연혁 같은 걸 찾아보려고 했는데, 이게 생각보다 난이도가 높다. 자꾸 미국 토요타 홈페이지로 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센다이 공장 갔을 때 자료들 좀 잘 챙겨둘 걸.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자료가 거의 없다. 그나마 책이라도 좀 있으면 생큐, 책은 물론이고 논문도 관련된 게 전무한 경우가 많다. 유튜브에 다 있다는 사람들 말은 좀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찾거나 보는 자료들이 유튜브에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주변의 작가들이나 기자들 작업하는 거 보면.. 중요하고 알고 싶은 순서대로 찾아가지 않고, 결국에는 일상적으로 접하거나 찾을 수 있는 자료 순서대로 가게 된다. 가고 싶은 데 가는 게 아니라, 갈 수 있는 데 가는..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개념들을 다시 한 번 정리를 해보는데.. 문득 먹고 사는데 크게 구애받지 않고 남들 아무도 관심 갖지 않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세계에서 살아가는 내 삶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요타 센다이 공장이 왜 생겼고, 거기서 무슨 차종을 만들고, 그게 지역 경제와 여건에 무슨 철학에 기반한 것인가?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서 다시 프리우스 플러그인이 갖는 상징적 가치.. 이런 걸 찾는 한국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후키시마 사고는 많은 사람들이 얘기한다. 그러나 프리우스 플러그인과 두 사건이 연관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한국에서는 못 봤다.

얼마 전에 미세먼지 책 낼 생각 없느냐는 얘기를 들었다. 일정상 도무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현실이 그렇다. 내가 2005년 에 미세먼지 책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낸 사람이고, 그걸로 저자 데뷔했었다. 미세먼지 문제로 제일 고민 많이하던 시절은 2001년으로 올라간다. 총리실에 있던 시절이다. 그 후로 3년간 고민을 했고, 결국 그게 데뷔작이 되었다. 그 책을 다시 내고 싶지 않은 것은, 미세먼지에 대한 얘기도 있지만, 저자로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작업을 하겠다는 대략이 밑그림도 그 책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보는 한국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 그걸 지금 다시 하기는 어렵다.

먹고 살기 위해서 지금 하는 일들의 일정을 맞추지 않아도 상관 없는 것, 그것만 해도 내 삶은 이미 충분히 행복하다.

물론 지금 당장 뭘 해야 우리 집이 먹고 살 수 있으면, 아내가 아침마다 날 좀 덜 구박할지도 모른다. 빨리빨리 일어나, 오늘도 디비 처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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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신문에서 칼럼 연재 부탁이 왔는데, 지금 너무 많이 써서 어렵다고 답장을 썼다.

칼럼이 대충 쓰거나 신경 써서 쓰거나, 사실 별 차이는 없다. 좀 더 핫한 주제인가, 아닌가, 결과적으로는 그 차이가 더 크다. 그렇지만 쓰는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더 의미 있는 글을 쓰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하나마나한 얘기는, 진짜 좀 그렇다. 누가 싫다, 뭐가 아니다, 이런 즉자적인 얘기들로 지면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몇 년째 일을 줄이는 중이다. 줄이고 줄여도, 다른 데서 자꾸 늘어나서 실제로 양 자체가 준 것 같지는 않다. 약속 특히 점심 약속은 이제 그만하기로 했다. 아내도 그러라고 한다.

"밥이나 사줄께 함 와라", 요런 부탁도 그만 듣기로 했다. 다이어트까지는 아니더라도, 살도 좀 빼야 하는데, 언제까지, 아 네네.. 처묵처묵하면서 살 수는 없다. 밥 못 먹는 인생도 아니고.

술 약속도 정말 최소한으로만 남기고. 예전 동료들과는 '비포 더 돈', 한강에 아스라이 새벽에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귀가하는 걸 최고로 치던 시절. 차 마시고 얘기하자, 이게 여전히 안 된다. 그렇게 지냈던 시간의 무게가 여전히 무겁다. 사선을 같이 넘던 처지에, 그냥 모른다고 그러기도 좀 그렇고.

어떻게든 일감을 하나라도 더 많이 확보해야 하는 처지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내 허랑방탕한 입장에 대해 얘기하는 게 좀 미안하다. 그냥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 같은 게 더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치기 어려운 볼은 안 치고, 잡기 어려운 볼은 포기하고..

할 수 있는 것만, 최소한의 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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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쓰다 보면, 갑자기 머리가 휙 돌아서 기가 막힌 전환점을 쓰게 되는 순간이 있다. 피가 확 돈다. 그런 게 한 열번 쯤 와야 책이 된다. 이런 흐름의 디테일은 미리 계산할 수가 없고, 기획할 수도 없다. 좀 전에 그런 순간이 왔다. 오 예..

조직관리하는 사람들이나 마케팅하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만드는 순간만의 매력이나 쾌감 같은 게 있다. 도저히 미리 계산할 수 없고,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빈 구멍을 채우기 위해서 뭔가 생성되는 순간.

물론 이런 게 엄청난 돈이 되지도 않고, 기가 막히다고 평가해주는 사람도 없다. 그야말로 디테일 설계에서 어벙벙한 공간을 메꾸는 디테일을 만드는 순간. 그래도 이런 게 꽉 쪼여져서 만들어지지 않으면, 새로운 것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난 이런 게 좋아서, 관리직 같이 돈 만지고 힘 쓰는 길로 가지 않았다.

어디다 얘기하기도 어렵다. 무슨 문제를 해결했는지 설명을 하려면, 앞뒤로 복잡한 얘기를 하도 많이 해야 해서. 그리고 전체적인 맥락에서만 중요한 거지, 그 context를 벗어나면 아무 것도 아닌 얘기가 된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기쁜 순간을 1년에도 몇십 번 만난다. 그래서 내가 아직 쓰러지지 않고, 웃고 사는 건지도 모르겠다. 인생, 돈은 진짜 별 거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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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s에서 하는 '북소리'라는 책 소개 방송이 있다.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한국에 마지막 남은 책소개 방송이다. 보수 정권이 책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그 기간을 지나면서 결국 공중파에서 책과 관련된 방송은 다 없어졌다.

그러면 정권 바뀌면 좀 살렸냐? 뭐, 전혀. 다들 뭐 하느라고 바쁘신 건지.

하여간 '북소리'에서 자문위원회를 구성한다고 연락이 왔다. "영광입니다"라고 짧게 답변을 주었다.

요즘 예능방송 자막에 '방송국 놈들'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때마다 웃는다. 나도 오늘은 그 얘기하고 싶다. '방송국 놈들", 책 좀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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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호도 이제 나이를 먹는다. 우리, 다 나이를 먹는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어렴풋하게나마 홍대 앞에서 만났던 청년 느낌이 조금은 났었다. 이제 우리에게 그런 어렴풋한 느낌 같은 건 사라져버렸다.

우리 시대가 풍요로왔던 것은, 그래도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만나고, 기록하던 지승호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들 지 잘난 맛에 살던 시절.

언젠가 내가 지승호에게 다시 인터뷰집 하자고 부탁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아직은 그런 때는 아니다. 나는 지금 애들 손 붙잡고 격랑의 시절을 보내는 중이다. 언젠가 다시 인터뷰집을 낼 때에는, 인세를 나누는 일 같은 건 하지 않고.. 전부 그에게 주는 계약을 할 생각이다.

나는 그 시절을 행복하게 건너왔다. 인세를 조금 더 받거나 덜 받거나, 강연비를 받거나 무료로 하거나, 살아가는 데 아무 차이도 없다.

그가 환갑을 바라볼 때쯤, 좀 더 편안하게 삶을 즐길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인터뷰 작가의 괴로움과 즐거움: 지승호 인터뷰

[나와 너]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1914년 5월 어느 날, 하나님의 존재를 믿느냐는 한 목사의 질문을 받는다. 그리고 어떤 깨달음에 도달한다.

“만약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제3인칭으로서 그(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신을 믿는다는 것이 그 분과 대화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면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곳에선가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떨리는 목소리가 기어코 입 밖으로 터져나올 테고, 그 고백은 누군가에게 벅찬 기쁨이나 깊은 슬픔을 만들어내고 있을 테지만, 부버는 “사랑은 ‘나’에 집착하여 ‘너’를 단지 ‘내용’이라든가 대상으로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사랑은 ‘나’와 ‘너’ 사이’에 있다.”고 선언한다.

사랑은 주어와 목적어 사이에 이루어지는 감정의 소유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나라는 주어가 너라는 목적어에게 내 진심이라는 ‘사랑’을 던지는 그런 행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지난주, 지승호 작가를 만났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인터뷰 단행본을 펴낸 작가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인간과의 관계, 특히 대화에 관해 누구보다 오랫동안 고민하고, 직업으로서 작업해온 사람이라는 의미다. 인터뷰는 늘 사람과의 관계에 관해 고민해야 하는 작업이면서, 특정한 인격을 ‘정보’로 대상화하는 작업이다. 왜냐하면 독자들이 궁금한 건 그 인터뷰이에 관한 어떤 정보이거나 그 인터뷰이가 말해주는 어떤 정보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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