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왔습니다. 저의 올해 소망은 아주 소박합니다. 아내가 올해는 건강했으면 좋겠다, 그게 올해 소망의 전부입니다. 작년에는 아내가 응급실에 갔었는데, 올해는 안 그랬으면 좋겠다는 정도입니다. 큰 애 임신 중에도 천식으로 아내는 며칠 입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애들 아픈 거야, 해마다 아프니까 올해도 그 정도 선에서 아플 거 같구요. 

저는 작년에도 그랬지만, 올해도 별 다른 목표는 없습니다. 그냥 정해진 일들을 정해진 속도대로, 물론 그 속도로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렇게 그냥 하는 평범한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욕심 같은 거 털어낸 것도 벌써 몇 년 되는 것 같습니다. 

되고 싶은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올해도 그런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미 많이 가졌는데, 더 가지고 싶어서 발버둥치지 않는 그런 한 해가 되기를 올해도 바랍니다. 

개인적으로는 올해는 문명에 대한 얘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만든 문명을 좀 돌아보는 한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차분한 설날을 맞으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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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출간 일정을 뒤늦게 잡았다. 뒤로 미룰 걸 좀 미루고, 순서도 재배치했다. 

1. 제일 먼저 나올 책은 출산율과 노동 시장의 변화에 대한 책이다. 저출산과 저출생을 구분한다면, 저출생에 관한 얘기일 것이다. <솔로 계급의 경제학>에서 연결되는 책이다. 올해 나올 책 중에서는 가장 이론이 많이 나오고, 가장 혁신적인 책이다. 제목이 마땅치가 않다. 제일 땡기는 제목은 <모두의 문제는 아무의 문제도 아니다>, 이건데, 좀 길다. 

2. 고심 끝에 도서관 경제학을 상반기에 먼저 하고, 젠더 경제학은 다시 내년으로 넘겼다. 개인 일정도 좀 그렇고, 저출산 책에서 연결되는 내용들이 좀 있어서, 아예 거리를 확 떼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로. 도서관 책도 몇 년째 밀리고 밀렸는데, 오세훈을 비롯한 보수 아저씨들이 도서관 닫느라고 한참 열내고 있을 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원래는 ‘책에 대한 책’ 정도의 가제로 책에 대한 가벼운 글들을 모아서 에세이집을 하나 할 생각이 있었다. 그걸 없애고, 책에 대한 얘기들도 다 도서관 책에 몰아넣기로 했다. 중간에 여유가 되면 펜실베니아에 갔다 올 생각은 있는데, 그럴 형편이 될지는 모르겠다. 맨 처음 구상을 할 때, 책 앞머리는 펜실베니아에서 써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사이에 내 형편이 쪼그라 붙어서,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다. 

3. 이것저것 다 내년으로 넘기고 여름부터는 죽음과 늙어감에 대한 얘기들을 모아서 간만에 에세이 한 권 내기로 하였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이제 한참 치매가 진행 중인 어머니 모시고 살아가는 내 애기이기도 하지만, 늙어가는 것에 대한 여러가지 내 생각들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원래는 작년에 해보려고 했는데, 이것저것 귀찮아서 그냥 시간만 끌고 있던 주제다. 정태인 선배의 죽음이 꽤 영향을 미쳤다. “형도 이제 환갑이네요.” 쓰러지기 직전에 그런 얘기를 했던 기억이다. 그때는 나나 정태인 선배나, 그렇게 인생이 덧없이 지나갈 줄 몰랐을 때였다. 

장례식에 우리 집 어린이들 다 데리고 갔었다. 우리 집 어린이들은 집에서 장례 치룬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장례식이 아주 익숙했다. 삶이란 그렇게 덧없는 것. 이재영 죽을 때는 벌써 10년 전이다. 안 되었다는 슬픔만 많았지, 내 일일 것이라는 생각은 많이 안 들었다. 환갑 넘자마자 정태인 선배 쓰러지면서, 나도 내 삶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비슷한 패턴으로 살았는데, 나라고 무슨 고래 힘줄처럼 강하기만 한 건 아니다. 

일부러 한 건 아닌데, 살다보니까 자살에 대한 연구도 꽤 하게 되었고, 우울증 등 정신건강에 대한 얘기도 많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국립정신건강센터 자문을 벌써 3년째 하는 중이다. 얼마 전에 자살특위 위원장을 해달라고 해서, 나에게는 과분하다고 물린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아직 이르다고 하지만, 안락사에 대한 얘기도 좀 하고 싶다. 죽을 날 기다리면서 그냥 앓다고 죽는 건 좀 그렇다. 지금도 연명치료에 대한 서약이 제도로 있다. 이거 신청하면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안 받아도 된다. 남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기는 어렵지만, 나에 대한 얘기들은 할 수 있고, 이제 나도 그런 나이가 된 것 같다. 

좌파 에세이 쓰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마음의 짐을 많이 털어낸 것 같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그런 얘기 없이 좀 어정쩡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좌파 에세이에서 그런 사회적 짐을 많이 덜었다. 이제는 좀 편안하게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얘기인가, 아닌가, 이제 그런 생각만 하기로 했다. 내가 편안해야 읽는 사람도 편안할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편안해야 더 어려운 얘기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박찬일의 노포 책을 읽으면서 배운 게 많다. 잠깐 성공할 수 있고, 잠시 큰 돈을 벌 수 있지만, 오래 가서 50년 넘게 망하지 않은 가게는 그렇게 화려한 데는 아니다. 박찬일의 예전 책도 좀 봤는데, 확실히 노포 얘기를 다루면서 박찬일의 스타일도 좀 변했다. 

내가 다루는 애기는 쉬운 얘기도 아니고, 그렇게 인기 있을 얘기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 얘기를 편안하게 할 수는 있을 것 같다.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시대에 역행하는 것은 아니다. 트렌드와 한 발 떨어져서 가는 게 불안하기도 했었는데, 별로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세상이 더 나아지기를 변하는 사람은 나 혼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박찬일 책을 읽기 이전에 나는 그런 생각을 잘 못했던 것 같다. 올해 쓸 책들은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좀 편안해질 수 있는 데 신경을 좀 쓰려고 한다. 지금까지 그런 생각 잘 못 했다. 나도 좀 배운 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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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산> 다시보는 중이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대사는.. 

왜선 마지막 돌격 전에 기다리지 못하던 원균이 "저자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게냐, 적들이 코 앞인데. 부장은 뭐하는가, 어서 포를 쏴라!", 이렇게 말한다. 원균으로 인하여 학익진이 무너질 상황이다. 

이때 옆에 있던 부장이 명대사를 말한다. 

"그게, 포탄이 떨어져서." 

그후로도 이순신은 한참 더 지나서, 왜선이 100보를 넘고, 50보를 넘어 월선거리가 된 후에 선회 명령을 내리고. 다시 한참이 더 지나서 코앞까지 온 다음에야 발포 명령을 내린다. 그게 한산대첩이다. 

역시 영화 <한산> 최후의 명대사는 원균 옆에 있던 부장이 했던 "그게, 포탄이 떨어져서", 그렇게 엉깠던 거 아닌가 싶다. 

만약 어느 이름 모를 부장님이 우리 시대를 구한다면, 그가 "그게, 포탄이 떨어져서"라고 말하는 순간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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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다 봤다. 

설 전 마지막 일요일이라서, 어머님 모시고 아버지 봉안당에 갔다왔다. 바로 밑의 동생도 한 번은 갔다와야 할 것 같아서, 카니발 빌렸다. 가끔 카니발 렌트하는 일이 생기는데, 매번 버튼이 조금씩 바뀌고, 기능이 추가된다. 가끔 운전하는 처지에서는 조금 피곤함이 느껴지는. 모닝 타다가 카니발 타니까, 차가 왜 이리 잘 나가는지. 모닝 운전하면 풀 악셀을 종종 밟고, 언덕에서도 엑셀 꾹꾹 밟는 습관이 생긴다. 차가 작으면 덜 힘들 것 같지만, 다리는 더 힘들다. 그 습관으로 카니발 운전했더니, 된장, 차가 날라다닌다. 카니발이 이렇게 순발력 좋고 잘 나가던 차였나? 이런, 이건 휘발유 차였다.. 

아침부터 운전만 하고 들어왔지만, 박찬일 책의 잔상이 남아서 마지 읽었다. 어딘지 모르게, 움베르트 에코의 문제 느낌이 들었다. 재밌는 에피소드들이기는 한데, 시칠리 얘기에 문제가 묻어간다는 느낌이 살짝 들었다. 초창기 시절의 박찬일은 글을 이렇게 썼구나, 그런 느낌. 

시칠리는 그야말로 영화 <대부>에서나 봤지, 자세하게 볼 일은 거의 없었다. 이탈리아는 밀라노에만 1주일 정도 있었던 것 같다. 계속 회의에만 붙잡혀 있어서, 밀라노라고 해도 숙소와 회의장 말고는 가본 데가 거의 없다. 밥도 거의 회의장 근처에서 대충대충 먹었고. 

글은 재밌는데, 너무 재밌게 쓰려고 했다는 느낌이 좀 들었다. 좋은 소재를 가지고 있는 기자가 쓴 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스타일의 글들은 매주 신문을 펴면 여기저기서 많이 볼 수 있다는 생각이. 

3일 사이에 연거푸 박찬일 책 세 권을 읽고나서 보니 <내가 노포에서 배운 것들>은 매우 정직한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초창기에 쓰던 글 스타일과 노포 책 사이에는 꽤 큰 변화가 있는 것 같다. 

아마 시칠리에서 처음 출발하던 시절의 얘기를 회상하는 박찬일과 10년에 걸친 노포 취재를 마친 박찬일 사이에도 좀 변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일단은 박찬일 독서는 이걸로 잠시 마무리를 하고, 나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겠다. 며칠 동안 세 권의 책을 읽으면서, 정말이지 잠시 행복했다. 나도 데뷔하던 시절의 생각이 나기도 하고, 살아온 순간들에 대한 반성, 아니 꽤 많은 반성을 했다. 

세 권을 읽고 짧은 느낌을 적자면.. 

박찬일의 노포책 이후로 나의 삶도 바뀔 것 같다. 사실 모든 책이 삶을 바꾸기는 한다, 아주 조금이라도. 그런 게 없다면, 평론가의 눈으로 독서를 하느라, 정말 중요한 얘기들은 놓친 셈이 된다. 독서가와 평론가는 다른 사람이다. 평을 하기 위해서 책을 보는 게 아니라, 그 독서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조금이라도 개선하기 위해서 책을 보는 것 아니겠나 싶다. 

책으로 내가 크게 바뀐 걸 곰곰이 되짚어보니까, 중학교 때 세익스피어 책, 대학원 때 허쉬만 책 그리고 50대 중반이 되어서 읽은 박찬일의 노포 책, 그런 것 같다. 허쉬만은 학위 받고 정말 허쉬만이 있는 연구소로 포닥 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나이 많아서 이미 새로운 사람은 안 받는다고 하고, 그 다음으로 추천을 받았는데.. 그 후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미국에 포닥가려고 했던 게 아니라 허쉬만에게서 뭔가 더 배우고 싶은 거라서. 그냥 짐 싸서 한국에 돌아왔다. 

박찬일은.. 

내가 글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든 최초의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내 인생도 조금은 바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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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백년식당에서 배운 것들", 다 읽었다. 

책을 재밌게 읽은 게 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내가 읽는 책들은 더럽게 재미 없는 책들이다. 폴 크루그먼 "좀비와 싸우다"가 그나마 좀 재밌게 읽은 책인데, 뒷부분에 짧게 쓴 자신의 자서전 비슷한 내용이 있어서.. 아, 크루그먼이 이렇게 살았구나, 그래서 좀 재미가 있었던. 

내가 보는 책들은 전화번호부만한 게 많고, 재미 대가리 없다. 어렵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그래도 먹고 살기 위해서 읽는다. 

박찬일의 책은, 그냥 읽은 거다. 그냥 읽으면 재밌을 수도 있는데, 나도 읽어야 할 책들이 워낙 밀려 있어서 그냥 읽기가 쉽지 않다. 

사실 나는 책을 즐겨서 읽는 스타일은 아니다. 솔직히 책 안 보고 싶다.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꾹 참고 읽는 편이다. 정말 더럽게 책 안 읽고 싶다. 다시 태어나면 책 안 봐도 되는 직업을 가졌으면 한다. 

박찬일의 책은 나와는 정반대의 스타일의 책이다.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 맛있는 거 따지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맛있다고 하는 집, 안 간다. 욕심이 생겨나는 게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했다. 절대로 줄 서는 집도 안 가고, 소문난 맛집은 일부러 피해서 간다. 

내가 뭔가 맛있게 하려는 건, 일단은 그렇게 안 하면 우리 집 어린이들이 쳐다보지도 않기 때문이다. 

맛에 대한 책인데, 사실 가본 데가 별로 없다. 줄 서는 냉면집 절대 안 가고, 냉면 먹고 싶으면 그냥 집에서 가장 가까운 데 간다. 청진옥은 누가 가자고 하면 가기는 가는데, 사실 내 입맛에는 좀 별로다. 좀 더 매워야..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미슐랭 별 달린 집은 거의 안 간다. 너무 비싸다. 예약하기도 쉽지 않다. 가끔씩 그런 데서 약속이 생겨서 가기는 하는데, 너무 비싼 거 얻어먹은 거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러다보니까 미슐랭 나온 집이라고 tv에서 얘기하면, 일단 채널부터 돌리고 본다. 

비슷한 이유로, 포도주도 일부러 비싼 거 안 마신다. 제일 좋아하던 건 생떼밀리옹인데, 이건 내가 먹기에는 너무 비싸고. 예전에 선물할 때 주로 썼다. 선물만 하고, 정작 나는 20년째 사 먹어 본 적이 없다. 코뜨뒤론느, 이게 내 입맛에는 그런대로 맛있는데, 이것도 한국에서는 생각보다 비싸다. 그리고 거의 없다. 그렇지만 너무 맛없는 포도주는 피하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먹을 수 있는 포도주가 몇 종류 없다. 

어지간한 사람들이 평생 마실 포도주보다 더 많은 양을 20대에 이미 다 마셔버렸다. 그냥 적당한 가격에 왠만한 맛이면 그냥 마신다. 자고 일어나면 다 똑같다.. 비싸든 안 비싸든, 머리 아픈 건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찬일의 책을 한 방에 다 읽은 건, 재밌어서 그렇다. 원래는 앞에 조금만 읽고, 하던 일 마저 할려고 그랬는데, 한 방에 다 읽어버렸다. 몇 권 더 사서 읽으려다가, 워워.. 나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이게 책을 많이 읽으면, 책 쓴 사람의 성격이나 그런 게 어지간해서는 조금은 보인다. 거기에 나온 정보가 필요해서 읽는 거지, 인격적으로는 영 아니다 싶은 사람들이 많다. 유명 저자가 되면, 움베르트 에코 정도 되는 사람 아니면 재수가 없어지나보다. 재수 없는데, 그냥 참고 보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그 사람의 정보나 지식이 나에게는 꼭 필요하니까. 

책을 읽으면서 저자를 존경하게 되는 건 매우 드문 경험이다. 그 사람의 지식은 필요해도, 나는 저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 그런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다. 특히 그 쓴 사람을 직접 알면.. 아이고, 존경하기 쉽지 않다. 

음식 책도 사실 꽤 많이 읽었다. 읽다가 집어던진 적이 있다. 뭐, 이런 양아치가 다 있나.. (딱 그 사람이 스캔들이 생겼을 때, 안타깝다는 생각은 했다.) 

박찬일의 노포 얘기를 보면서, 꼭 그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돼지국밥 별로 안 좋아한다. 원래도 안 좋아했는데, 몇 달 동안 맛없는 돼지국밥을 매주 먹어야 했던 때가 있었다. 아주 학을 떼었다. 내 인생에 돼지국밥은 다시는 없는 걸로.. 

돼지국밥 얘기가 맨 앞에 나왔다. 글이 재미가 없었으면, 그냥 넘어가고 싶었다. 

추어탕도 좀 그랬다. 추어탕을 안 먹는 건 아니지만, 박찬일이 맛있다고 하는 스타일의 추어탕에는 구미가 전혀 안 갔다. 

입맛이야 뭐 사람마다 다 다른 거니까. 

대구탕이라고 해서 예전에 한참 웃었던 대구의 육계장은 좀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실 대구에서 그 대구탕을 맛있게 먹은 적은 없고, 울산의 현대자동차 인근에서 쇠고기 국밥인가, 그런 이름의 국밥을 아주 맛있게 먹은 적이 있다. 굵은 고기가 뭉텅이로 나오는, 책에 나오는 것과 아주 비슷하다. 

냉면집에 잘 안 가는 건, 그렇게 유명한 냉면집에 가서 맛있게 먹은 기억이 별로 없는 데다다.. 누군가 같이 가면, 어휴 지겨워, 뭔 설명이 그렇게 긴지. 맛 별로라니까.. 그래도 여름에 냉면집에 가는 건, 콩국수집이 잘 없어서 그렇다. 그리고 콩국수는 짜장면 맛있는 집에서 먹는 게 제일 맛있다. 면이 유명 콩국수집하고 급이 다르다. 콩국은 콩국수 전문점이 잘 낼지 모르지만, 면은 역시 짜장면집이.. 내 입맛은 그렇다. 우동도 냉우동을 최고로 친다. 얼음에 담그면 우동 면발이 좀 약해도, 엄청 맛있어진다. 라면도 마찬가지다. 냉라면, 신주꾸에서 먹었던 그 맛이 아직도 입에 선한.. 

책이 거의 끝나갈 때쯤 장충동 족발집 얘기가 나온다. 거긴 맛있지. 시간강사 시절, 동국대에서 여러 학기 수업을 했었다. 틈틈이 먹었다. 

나랑 입맛이랑 취향이랑 별로 안 맞아도 책을 빨려들듯이 재밌게 읽은 건, 그가 하는 얘기가 맞기 때문이다. 문화의 일종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도 일종의 민중사라는 것. 

더 중요한 건, 참 욕심 없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이고, 그런 게 글 속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나서.. 이런 사람들이 좀 더 많아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글은 꾸밈없고 단백한 게 최고라고 생각한다. 이유 없이 멋부리는 글을 아주 싫어한다. 그런 면에서 박찬일은 거의 교과서다. 멋부리는 문체는 한 때 '보그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보그에서 많이 썼고, 패션지에 아주 많다. 그래도 그건 아름다움을 다루는 일이라서 그런가보다 한다. 

박찬일의 문체는 '노포'를 닮았다. 그래서 그의 글만 보고 있어도 왠지 그 가게 어느 한 쪽에 앉아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포는 그렇게 화려한 곳이 아니다. 나무꾼들이 모여들었고, 그곳에 식당이 생기고, 그렇게 생겨난 곳들. 거기에 삶이 있는 거 아닌가 싶다. 그야말로 '진국'이라는 말이 생각날 정도. 

박찬일의 책을 읽고 나서, 나도 나 자신을 좀 돌아보게 되었다. 혹시 겉멋 같은 게 아직 빠지지 않은 게 있나, 의미 없는 허세가 남은 게 있을까. 

박찬일의 책은 심신수양이 필요한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 잔뜩 오염된 삶을 살면서, 왠지 불안해하고, 주변에서 '멘토' 같은 거 찾는. 노포들이 성장하고 살아남는 길은 그 진국 같은 것이다. 귀찮은 거 하고, 싫어도 버티고, 더 편한 거 알아도 피하고.. 물론 어렵다.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게 진국 아닌가 싶다. 

글은 박찬일처럼 써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책을 덮었다. 조만간 그의 책을 몇 권 더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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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책에 대한 단상 2023. 1. 10. 10:08

작업실을 따로 안 만든 제일 큰 이유는 돈 때문이다. 책 인세라는 게 뻔해서, 구조적으로 옆으로 새는 돈들을 줄여야 장기적으로 편안해진다. 나라고 사고 싶은 게 없지는 않은데, 아직 그럴 형편이 아니다. 20년 넘은 앰프와 스피커를 아직도 껴안고 있는 건, 그게 더 좋아서가 아니라 그럴 형편이 아니라서 그렇다. 비싼 만년필을 써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럴 때면 그냥 새 잉크를 사서 기분 전환을 하고 만다. 잉크가 아무리 비싸봐야. 

이제 작업실을 만들기를 포기한 것은 애들 봐야하는 상황에서, 작업실이나 이런 거 생각할 처지가 아니라서 그렇다. 아무리 집 가까운 데 구한다고 하더라도, 왔다갔다, 번거롭다. 둘째는 버스는 타는데, 차 많이 다니는 길을 가기에는 아직은 좀 무리다. 

책 마무리할 때면 나도 집중해서 긴 시간이 필요하기는 하다. 전에는 카페에 가서 써보기도 하고, 지방에 며칠 가서 마무리하고 오기도 했다. 그렇게 한 책이 공교롭게도 다 망했다. 꼭 그래서 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망하는 게 확실한 길을 일부러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림을 그려서 엄청난 공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자료를 두기 위해서 방대한 공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책도 많이 버렸고, 이제는 수없이 책을 사고, 또 그만큼 뭉텅이로 버리는 데에도 익숙해졌다. 현실에 맞추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여전히 매주 몇권씩은 책을 산다. 그나마 책이 있으면 상당히 해피한 경우다. 

아침에 둘째는 학교에서 하는 주산 교실에 갔다. 가는 건 아내가 출근하면서 데리고 갔고, 10시 반에 데리고 와야 한다. 시간이 잠시 나는데, 나도 사람이라.. 짧게 짧게 남는 시간에 집중이 쉽지 않다. 목요일에는 둘째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한다. 그 와중에 회의 나와달라는 넘들은 또 왜 이리 많은지. 

메일에 자동으로 "집필 중"이라고 답 메일이 가도록 하고, 전화 치운 사람들 심정이 이해가 된다. 그렇다고 우리 집 어린이들 전화를 안 받을 수는 없고. 

어린이들 방학 때에는 늘 이렇게 고롭다. 이게 작업실을 구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다. 아니, 삶에는 해결이라는 게 없을지도 모른다. 그냥 아직 오지 않은 다음 문제를 기다리면서 잠시 마음의 평온을 누리는 것일 뿐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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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 하요, 제목이 길기도 하다, 하여간 이런 영화 봤다. 순전히 얼마 전부터 집중적으로 듣던 엔리오 모리코네 음악 때문에 봤다. 어렸을 때 tv에서 죽어라고 해주던 거라서 여기저기 끊어서 보기는 했는데, 전편을 다 본 건 처음이다. 

본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엑소시스트 2>를 몇 년 전에 봤다. 음악이 기똥찼다. ‘리건의 테마’만으로도 충분히 즐기면서 볼 수 있었다. 메뚜기라는 모티브를 사실 이 영화에서 얻었다. 결국 쓸 데게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이것도 엔니오 모리코네 음악이다. 사실 엑소시스트는 3편을 먼저 봤는데, 너무너무 재밌었다. 20대에 3편을 보고, 30대에 1편을 보고, 50대에 2편을 보았다. <엑소시스트> 3편은 그렇게 내 인생 영화가 되었다. 파리에서 극장에서만 세 번을 봤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 이것도 제목 더럽게 기네 – 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 사이의 공통점은 사소하게, 음악이 둘 다 엔니오 모리코네라는 점.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둘 다 대표적인 마초 영화. 하나는 멋지게 총 쏘고 뒤돌아서 사라지는 마초, 다른 하나는 그 마초들이 삶 뒤의 어둡고 쓸쓸하고 혹은 추접한 면을 드러낸. 

음악이 너무 궁금해서 결국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를 봤는데, ‘쓸 데 없이 고스펙’이라는 단어가 생각이 났다. 아니 여자가 기차 역에서 내려 누군가를 찾는 이 장면에서 이 음악이 쓰였단 말이야? 마카로니 웨스턴이라고 사람들이 얕잡아 봤지만, 그 마카로니에는 엔니오 모리코네가 있었다. <역마차>에서 <하이눈>까지, 정통 서부영화에서 사용된 음악들을 전부 오징어 만들어버렸던. 50년 정도 시간이 흘렀는데, 서부영화는 이제 사라지고 아무도 기억 못하는 영화가 되었지만,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은 그것들보다 더 길게 남은. 요요마가 엔니오 모리코네 시리즈 앨범을 냈다. 어지간한 소프라노나 테너들이 소프트 버전 앨범 내면 엔니오 모리코네 노래 한두 개는 꼭 집어넣게 된다. 

배역이 엄청나게 화려하다. 헨리 폰다. 사실 헨리 폰다 악역으로 나온 건 처음 봤다. 나이 먹은 헨리 폰다의 연기 엄청 좋아했다. 그리고 사나이 중의 사나이로 찰스 브론슨이 나온다. 어린 시절 화장품 광고로만 봤지, 정작 영화에서 본 건 몇 개 없다. 

마초 영화이기는 한데, 처음 보는 여배우를 중심으로 얘기가 진행된다. 프로필을 찾아보니까 튀니지 출신이다. 영화에서는 어마무시하게 아우라 넘친다. 결국 한 여인과 그녀 주변을 맴도는 네 남자의 얘기다. 결혼식날 살해당한 남편까지. 

어리버리하게 돈이 많다는 남자한테 속다시피해서 결혼을 한 여자가 남편이 죽고 나서, ‘벌떡’, 그야말로 대지에서 주인이 솟아오르듯이 땅의 주인으로 홀로 서는 얘기다. 모티브로만 따지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같다. 다만 여성의 출신 계급에서 차이가 날 뿐. 

악인이 둘 나오는데, 둘 다 여성을 중심으로 그 잔인하고 강한 내면 속에 담긴 ‘고달픔’ 같은 것을 보여주는 데, 이게 영화의 잔재미기이기는 하다. 그리고 그래서 마초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마초들의 마음 속의 아픔과 갈등, 그래 이건 사나이들의 얘기지! 

결국 나쁜 넘들은 다 죽고, 밑도 끝도 없이 강하고 지혜로운 남자로 설정된 찰스 브론슨은 떠난다. 그리고 새로 생긴 기차역 일대에서 타운을 이끌어나갈 여주인으로 남을 여성이 홀로 서는 모습이 마지막 장면이다. 

여기에 미국 자본주의의 초기 모습이다, 그렇게까지 오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풍푸 파이터>에도 처음 미국이 철도 만들던 시절의 얘기가 배경인데, 거기에 있던 노동자들은 중국인이었는데, 여기에서는 미국인이라는 정도가 차이. 

모티브만 놓고 보면 영화 <실미도>와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거기에는 빛바랜 흑백 사진에 얼핏 나오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 막장 마초들이 살아가는 동기처럼 설정되어 있다. 애인이자 엄마를 생각나게 하는 여인 그리고 그 아련한 기억을 연결시키는 것은 커피. 중간에 커피 한 잔 끓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자가 불 피우다 실패하고, 다시 남자가 세심하게 불쏘시개를 쌓아서 한 번에 불 피우는 장면 등 몇 분을 커피 끓이는 데에 할애한다. 중간에 여자가 원두를 꺼내는 대신 식칼을 꺼내려고 하다가 포기하는 장면.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커피 마시면서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 영화 그것도 서부 영화에서 이렇게 길게 커피 하나로 길게 가는 걸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이탈리나오! 마카로니가 아니라 이탈리안 커피라고 하는 게 더 맞았을 것 같은. 

영화는 사라지고 커피만 남은 대표적인 영화가 <블랙 호크 다운>이 아닐까 싶다. 전투 중의 짧은 휴식에 원두 갈고 커피 내리는 장면이 아주 길게 그것도 몇 번이나 나온다. ‘커피병’이라는 새로운 군 보직이 생겨났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 

마초 영화, 커피 영화 외에도 하모니카가 자주 등장하는, 하모니카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엔니오 모리코네 음악이 아니었다면 확 짜증이 날 수도 있지만, 선율 자체가 너무 고급졌다. 

21세기, 이런 마초 영화는 다시 나오지는 않을 것 같다. 부동산 영화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알박기’ 영화이기도 하다. 사막 지대에서 증기 기관차가 운행하기에 필요한 물이 있는 곳을 미리 점 찍어 역사 부지 일대의 땅을 샀던 어느 알박기 명인의 비극 그리고 그 땅을 둘러싼 난투극, 얘기는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 <1번가의 기적>에서는 임창정 같은 깡패를 보내 도장 찍으라고 협박하고 괴롭히고 그러는데. 여기는 서부극이라 그냥 총 쏴서 죽이고 만다. 

영화가 예쁘면 그림엽서 보는 것 같다는 얘기를 한다. 유사한 느낌인데, 이건 LP판 듣는 느낌이다. 사나이들의 짧은 대사 그리고 귀를 뚫는듯한 짧은 총소리 이어서 엔니오 모리코네의 다음 트랙 노래. 음악 때문에 주기적으로 보고 또 보는 영화는 <매리 포핀스> 정도였는데, 아마 이것도 나이 먹으면서 해마다 한두 번은 계속 볼 것 같다. 영화 음악을 제일 재밌게 드는 방법은 결국 원래 화면과 같이 보는 거 아닌가 싶다. 

음악은 화면에 잘 녹아드는 편은 아니다. 영화 품질에 비하면 몇 배는 될 듯한 고품질의 음악과 가벼운 오케스트라. 다시 50년이 지나면 영화는 완전히 사라지겠지만, 음악은 그 뒤에도 남을 것 같다. 엔니오 모리코네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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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쓰는 것은 어지간히 정신줄이 굵지 않으면 힘들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예전에 소설가 성석재가 그런 얘기를 헸다고 한다. 아버지 얘기하고, 고향 얘기하면 이제 그 작가는 거의 끝난 거라고. 할 얘기가 더는 없다는 거. 쥐어짜고 쥐어짜다 보면, 더는 할 얘기가 없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오기 마련이다. 

책이 거의 팔리지 않으면서 책 한 권 낼 때의 부담감이 나도 커졌다. 출판사에 손해가 가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최근에는 나도 출판사에게 손해가 가는 일이 종종 생겼다. 그러다보니까 책 낼 때의 부담감이 지수적으로 상승했다. 작년에는 책을 못냈다. 좌파 에세이가 작년초에 나오기는 했는데, 재작년에 마무리한 책이라서 작년에는 책이 없다. 책 판매에 대한 부담이 없었다면 작년에도 몇 권 냈었을텐데, 다 올해로 넘겼다. 

그래도 나는 사정이 좀 나은 편이다. 꾸역꾸역, 애들 먹여 살리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소득이 계속 있었다. 애들 태어난 후에 책 내는 속도가 확 떨어져서, 아직은 할 얘기가 없지는 않다. 제 때 책을 못 내서 계약해놓고 소화하지 못한 게 더 많다. 아직은 할 말이 없는 상황까지 만나지는 않았다. 다음 정권 때에는 모르겠지만, 윤석열이 저렇게 아무 거나 막 던지는 동안에는 좀 더 고전적인 얘기들을 할 게 있을 것 같다. 밀린 것들도 좀 많고. 

책을 쓰면서, 특히 마흔이 넘어간 뒤로는 즐거운 마음을 유지하는 게 사실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명랑'이 삶의 기조라서, 우리 집 어린이들과 늘 웃으려고 하고, 혼 내는 건 정말 가끔만 하려고 한다. 그리고 잔소리도 조금만. 

말이 나온 김에. 다 큰 자식들에게 "우리 아이"라고 하는 표현은 가급적 안 하려고 한다. 자식은 자기 소유물이 아닌데,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들이 집단적으로 쌓여서 어른들 보고도 '아이'라고 한다. 큰 애가 초등학교 3학년 된 이후로는 '어린이'라고 꼭 불러준다. 집에서 애들 크게 부를 때도 "어린이들, 모여보세요", 이렇게 말한다. 

아이들 키우기 전에는 자주 보는 사람들이 나에게도 많았다. 이래저래 꽤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지냈는데, 이제는 정말 최소한의 사람만, 그것도 가끔 보면서 지낸다. 예전에는 '온갖 문제 상담소 소장'이라고 그러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내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정태인 선배의 사망 이후로 누군가 만나는 일을 대폭 줄였다. 지난 20년간 그와 거의 비슷한 사이클로 살았다. 박순성 교수와 간만에 밥 한 번 먹으려고 한 자리에 막 박사 논문으로 정신 없던 정태인이 같이 왔다. 점심 자리였는데, 술 좀 더 마시자고 했는데, 나는 애들 봐야 한다고 낮술까지는 못하고 술패들을 남겨놓고 일어난 적이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그게 그와 마셨던 마지막 술이었다. 쓰러지기 몇 주 전인가, 한국은행 피플들과 같이 저녁 약속이 있었다. 정태인은 오후에 낮잠 자고 약속을 까먹었다고 한다.. 아쉽기는 하지만, 조만간 다시 보기로 했다. 그리고 몇 주 후 연구실에서 쓰러졌다. 

나와 비슷한 사이클로 살던 사람들이 몇 명 있었는데, 친구는 벌써 죽었고, 정태인도 환갑 넘자마자 죽었다. 아무래도 체질이 거의 비슷할 막내 동생은 작년에 크게 두 번 병원 신세를 졌고, 두 번째는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서 진짜로 요단강 건너다가 겨우겨우 돌아왔다. 

지사의 시대는 한국에서 벌써 끝났다. 더 이상 비분강개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거나, 급살을 했거나. 참 비극적이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은 역시 명랑을 유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중압감들 속에서 아직 남은 얘기들을 풀어낸다고 너무 폼 잡지는 않으려고 한다. 되는 데까지 하다가 안 되면 그만이라고, 좀 가볍게 생각하려고 한다. 

가끔은 만년필도 바꾸고, 쓰던 스피커도 좀 바꾼다. 만나는 사람을 바꾸거나 주변 사람을 바꾸는 것보다는 그게 더 낫다. 그렇게 그렇게 쌓이려고만 하는 부담감이나 압력을 좀 낮춘다. 

IMF 끝나고 "부자 되세요" 마케팅이 한참 유행할 때, 들레쥬의 노마디즘이 한국에 잘 못 들어와서 노트북과 여행 마케팅에 접목되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노트북들도 노마디즘을 내걸고, 어딘가 싸돌아다닐려면 이런 건 있어야 하지 않겠니, 그랬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그렇게 카드를 팔았고. "낭만 가득한 여행", 그런 광고도 있었던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하면, 노마디즘은 커녕, 한국 사회에는 아파트가 주인 행세하는 시절이 되었다. 억지로 노마디즘을 대입하면, 전세 주고 전세 가고, 그렇게 한 채 두 채 늘려나가는 정도. 

혼자서 여행을 떠나봤는데, "낭만 가득"이 아니라 "남만" 가득했다. 재미 하나도 없었다. 이래저래 혼자 해외 출장 가는 일이 적지 않았는데, 진짜 재미 하나도 없다. 유일하게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는 건 영국 리즈에서 열린 학회에 갔을 때였는데.. 그건 이미 지난 세기의 일이다. 

재미가 없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 하는 유일한 처방이다. 돈 버는 일이 제일 재밌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속으로 딱하다. 대놓고 돈 버는 게 유일하게 재밌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진짜로 돈도 많이 벌었다. 벌써 이혼했다. 지금도 돈 버는 게 제일 재밌는지 모르겠다. 

책을 계속해서 쓰는 건, 고래심줄 같은 정신력만으로는 어렵다. 대쪽도 부러지고, 심줄도 끊어진다. 인간은 강철이 아니다. 누군가 도울 수 있으면 계속 돕고, 미력이나마 힘이 될 일은 하고. 그리고 돌아서서 그런 일을 했다는 것도 까먹으면 정신 건강에 아주 도움이 될 것 같다. 그게 즐겁고 보람있으면 정말 다행이다. 누군가 고맙다고 말하는 건, 행여나 기대하지 말고. 그런 사람은 고래희, 예전부터 아주 드물다.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건, 즐겁지도 않고, 사실 재미도 없다. 난 좀 그렇다.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301051721011?fbclid=IwAR29aNkyT6VW6LBUnqXEGxdYjpjBiqtiJxRvE0Cdj5JqQFlQyUqk-GTU7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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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이 넘치거나 그림체가 단순한 경우 말고는 60~70컷을 일주일 만에 그린다는 것 자체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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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를 둘러싼 가장 큰 변수들은 인플레이션이나 이자율 자체가 아니라, 세계적인 레짐 체인지일 것 같다. wto가 만들어지는 90년대 초반 이후 세계화 국면이 한참 진행되던 시점까지 다자간 자유무역 질서가 세상을 보는 가장 큰 눈이었다. 

트럼프 때 이게 깨어졌고, 궁극적으로 세계적 레짐이 어디로 갈 것인지 미국도 방향을 못 잡고, 아무도 예측하기 어려운 시기가 좀 흘렀다. 여기에 팬데믹이 등장했다. 변화가 팬데믹 사이클에 맞춰 더 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기준금리 상승은 원튼 원치 않튼 강달러 시대를 만들었고, 이 강달러가 세계적 경제 질서를 급격하게 변하게 만들었다. 일단은 강달러 악셀을 세게 밟았고, 미국이 경제의 주도권을 다시 쥐었다. 냉전 시대 이후에 형성된 세계의 보호자로서의 미국의 모습은 이제 없다. 미국 정치에서 가장 큰 두려움은 트럼프 혹은 그런 스타일의 귀환일 것이다. 지금 강달러에 어려움을 느낄 다른 나라 살필 형편이 아닌 것 같다. 

환경에서 미국과 유럽의 경제 전쟁은 좀 멀게는 오존층 파괴와 관련된 몬트리올 의정서 정도로 올라갈 수 있다. 냉장고를 비롯한 냉매를 사용하는 제한된 제품들이 무역 전쟁의 서막을 알린 것 같다. 그리고 인플레이션 감축법안은 본격적으로 전기차를 둘러싼 유럽과 미국의 무역 전쟁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는 wto나 그딴 국제적 중재 같은 것은 마치 없는 것과 같다. 

유럽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미국이 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영역 내에서 생산된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주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린 마크롱이 맨 앞에 나서 있다. 아주 익숙한 포맷인데, 미래라는 이름으로 지역 생산품과 보조금을 연계시키는 것은 wto 체계에서는 아주 이질적인 것이다. 한국은?

이런 흐름에서 아직은 불확실하지만 룰라의 주도로 중남미 권역에 대한 경제 통일과 함께 단일 통화가 추진 중이다. 워낙 이 지역 경제가 고질적으로 어려워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본다. 과연 룰라의 리더십이 이 정도로 갈 것인지는 여전히 불투명하지만, 각개격파되던 중남미 경제에 새로운 논의의 전환점이 될 것은 분명하다. 

지역화라는 말을 그 전에도 썼지만, 이렇게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지역화는 90년대 이후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변화 속에서.. 한국에 생산지를 두고 남을 기업은 얼마인가, 어느 정도 규모가 될 것인가, 그런 게 새로운 질문이 되었다. 결국 지역별 규모의 경제가 새로운 레짐의 키워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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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야근이다. 회 시켜 먹기로 어린이들과 합의를 봤다.

광어회 배달이 왔다. 맛은 있는데, 이게 포장이 너무 많다. 하나하나 포장 뜯다가, 매운탕은 끓이지도 못했다. 새우 까주고 나니까 뭘 먹을 기력이 없다. 그냥 상추 찢어넣고 회 조금 넣어서 후다닥 회덮밥 해 먹었다. 어린이들 아직 먹고 있을 때 이제는 다시 남은 회 챙겨넣고, 쓰레기 버리고, 남은 음식 싸넣고. 그렇게 하면 어린이들 식사 마쳤을 때 대충 식탁 정리가 끝난다. 가게에서 소주도 한 병 보내줬는데, 그런 건 열어볼 엄두도 못 냈다. 


좀 우아하게 회도 좀 먹어가면서, 이런 저녁 시간은 여전히 상상 속에만 있다. 포장 뜯는 게 끝나는 순간, 다시 포장 뒷정리해야 하는 어린이들과의 저녁 식사. 배는 찼는데, 뭘 먹었는지 모르겠다. 분명 멍게도 회덮밥에 때려넣어서 같이 먹었던 기억인데. 아스라한 기억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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