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 넘버 38. 용인 아파트 개발현장 인근의 나대지, 어두운 쓰레기 더미 속 - 어느 명함의 독백

 

나는 명함이다. 누구나 그렇게 살겠지만, 나도 최선을 다 해서 산다. 그리고 티 내지 않고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표준에 맞춘다. 국제적으로 가로 9 센티, 세로 5 센티가 국제 표준형이다. 가끔 튀어보기 위해서 표준을 벗어나려는 놈들도 있지만, 대부분 남의 명함철에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바로 버려진다. 자기가 왜 태어났는지, 사명을 잊어버린 등신 같은 놈들이다. 악착 같이 다른 사람의 손에서 살아남아서 몇 달 후, 아니 몇 년 후 주인의 전화번호를 알려주는 것이 우리가 태어난 이유다. 그리고 그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우리는 안심하고 사망한다.

 

나는 전생이 없다. 오피스 물품은 오피스 물품끼리 윤회한다. 우리는 그 윤회의 맨 밑바닥이다. 이 윤회의 끝은 만년필이다. 최근에는 노트북에서 끝나기도 한다. 중간 단계에서는 불을 밝히는 독서등이나 스탠드가 되기도 하고, 프린터가 되기도 한다. 아직 몇 단계 더 넘어야 최종적인 주인의 분신, 만년필이 된다. 만년필 다음은? 자동차나 카메라로 태어난다. 진공관 앰프나 스피커로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그걸 다 마치면? 잘 모른다. 어지간한 큰 공덕을 쌓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는 없지만, 개나 고양이 같은, 정말로 명함 보다는 몇 단계 높은 동물로 태어나기도 한다. 그래도 사람과 다른 것은, 우리의 생애 주기는 짧다. 명함으로 태어나는 것, 진짜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갈 길이 멀다.

 

그렇지만 모든 명함이 이렇게 사무기기 윤회의 길을 걸어 올라서는 것은 아니다. 명함이 되기 위해서는 주인의 손을 한 번은 거쳐서 세상의 빛을 보아야 한다. 꼭 다른 사람에게 건네지지 않아도 괜찮다. 불법 주차를 하면서 자동차 와이퍼에 끼워놓은 명함이 불법 견인을 막으면 대박이다. 바로 볼펜 수준으로 환생할 수 있다. 물론 수 십억짜리 계약을 성사시킨 명함들은 바로 만년필로 태어나기도 한다. 만년필은 우리처럼 주인의 영혼 한 조각이 담기는 게 아니라, 영혼 그 자체이기도 하다. 처음 주인이 명함을 손에 집을 때, 그의 영혼 한 조각이 우리에게 담긴다. 그 전에는 그냥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무기기 윤회의 첫 단계인 것이다.

 

나는 명함이다. 그리고 명함인 것을 자랑스러워 했다. 나에게는 아직 긴 운명 같은 윤회가 길게 남아있었다. 지난 달까지, 나는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으로 내가 명함으로 태어나서 이제 출발점에 서게 된 것을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두 달 전, 드디어 나는 명함 통 맨 앞 줄에 서게 되었다. 통에 들어간지 1주일, 생각보다 시간은 빨리 왔다. 내 앞에 있던 녀석들은 이미 진짜 명함이 되어 주인의 영혼 한 조각과 함께 자기 삶을 시작했을 것이다. 이제 내 차례다, 그랬었다.

 

주인, 아니 그 새끼는 지난 주에 퇴사했다. 그것까지는 알겠는데, 우리를 그냥 버리고 갔다. 나와 내 친구들은 주인의 영혼을 얻기는 커녕, 명함통에서 나와보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대로면 나는 그냥 소멸이다. 그냥 집에 가지고 가서 태우기까지 하지는 않더라도 찢어서 버리기만 해도 나는 다시 명함으로 환생한다. 인쇄소 공장의 좁고 불결한 기계를 지나고 다시 크기에 맞게 재단되는 과정이 공포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 번 더 해볼 수는 있다. 그런데 이 새끼, 아니 이 개자식이 그냥 버리고 가버렸다. 그뿐이냐? 심지어 선물로 받은 만년필도 버리고 갔다. 수 십 년을 돌아서 겨우 만년필로 태어났는데, 잉크 한 번 채워보지도 못하고. 이 대학살을! 이런 무식하고 야만스러운 개새끼는 내 명함 인생에 진짜로 처음 봤다.

 

다른 동료 명함들이 며칠 전부터 내게 복수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같이 쓰레기통에 누워있는 만년필과 서류뭉치들도 나에게 그 얘기를 한다. 난 아직 결심을 못했다. 그러나 결심을 해야 한다면, 아마도 바로 내가 결심을 해야 할 것이다. 왜냐? 난 명함 통 속 맨 위의 명함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도 아니고, 세 번째도 아니고, 바로 내가 맨 앞이다.

 

2.

어느 날 아침이었다. 용인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엄청난 규모의 폐기물 불법 투기가 있었는데, 하여간 거기에서 유일하게 신원이 확인된 게 나라는 거다.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현재로서는 불법 투기의 유일한 용의자되십니다! 그러니까 한 번 경찰서로 오셔서... 니가 올래, 우리가 갈까, 그런 분위기였다. 원래 내가 이런 저런 사건에 연류되어서 경험을 해보는 것을 좋아하기는 한다. 만약 며칠 전에 은평경찰서에 갔던 일만 아니었으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MB 서울시장 시절의 일이다. 그의 뉴타운 사업 1호가 은평뉴타운이었는데, 이게 불법 요소가 한 두 개가 아니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시민단체에서 이 건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철거깡패가 멀쩡하던 동네를 온통 공포 분위기로 몰고 가는 일이 벌어졌다.  드라마에서 맨날 나오는 일 중의 하나였는데, 문제는 다음에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MB의 일이었다. 이래저래 눈치 보면서 빠질 단체와 사람들은 빠지고, 아무 눈치 안 보는 나 같은 막장들이 결국 기자회견에 이름 걸고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으로 MB 쪽의 철거회사에서 소송을 걸어왔다. 시민단체에서는 잘 걸렸다, 이걸로 대법원까지 가자는 건데, 난 그 때 건강이 안 좋아서 무리한 일은 하면 안 되는 때였다. 아내는 대법원까지 가는 건 힘들고, 그냥 약식기소 나오면 벌금 내고 말자고 했다. 결국 벌금 100만원이 나왔고, 그냥 냈다. 나는 MB와 긴 송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MB 대통령 시절, CBS 라디오에서 내가 했던 얘기를 방송통신위원회가 문제 삼아서 결국은 대법원까지 가게 되었다. 박근혜 시절, 대법원에서 이겼다. 그리고 다시 방송으로? 그건 아니다. 이적이 <응답하라 1988>에서 어쿠스틱 기타와 함께 노래 불렀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안 그래도 경찰서 여기저기 골치 아프던 기간이라 나는 용인경찰서 형사한테 설명을 해주었다.

 

"선생님, 거긴 제가 퇴사한지 3년 넘구요. 그 명함은 그 때 사무실 쓰레기통에 버리고 온 거예요."

 

형사는 쉽게 전화를 끊지 않았다. 그래도 내 얼굴은 봐야겠다는 얘기를, 이렇게 돌리고 저렇게 돌리고, 그러고 있었다.

 

"몰라요, 그럼 선생님 하고 싶으신 대로 알아서 하시구요."

 

잘 알아듣기 어려운 얘기를 계속 해서, 결국에는 내가 전화를 끊었다. 대학교 시절에도 나는 내부수배만 받았지, 실제로 검거된 적도 없고, 당연히 감옥에 가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시민 운동 쪽에 있으면서 생각보다 경찰서 갈 일도 많아졌고, 재판에도 종종 나간다. CBS 건은 행정재판에서 증인대에 서기도 했다. 지난 수 십 년 간의 부가가치세 세율추이 그래프와 추세선, 역진세 효과를 가지고 있는 정부조치에 대한 통계 같은 것을 보여주었다. 국회 청문회 증인은 몇 번 했었는데, 실제로 법원에 증인으로 출석한 것은 그게 유일한 경험이었다. 옛날에 어른들은 호적에 붉은 줄 간다고, 범죄자가 되는 것을 아주 무서워했다. 우리는 그런 건 무서워하지 않았는데, 고문은 정신적으로 겁나게 생각했다. 그리고 친구들을 밀고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은 정말로 부담스럽다. 어차피 다 사람 아닌가. 정부가 하는 걸 반대하는 일을 하다 보면 이래저래 경찰서 들락날락 할 일들이 많아진다. 군사정권에서는 그런 일련의 일들이 일종의 사상범처럼 처리되었는데, 요즘은 잡범 처리한다. 도로를 불법으로 건넜다거나, 파업이 경제적 영향을 주었으니, 벌금을 내라... 그런데 이 벌금이 좀 세다, 툭하면 수 십억 대다.

 

용인경찰서에서 다시 전화가 오지는 않았다. 아마 그 때 은평 경찰서 왔다갔다하는 일이 없었으면, 나도 궁금해서 결국에는 용인경찰서에 가서, 거기서 나왔다는 옛날 내 명함을 직접 보는 일이 벌어지기는 했을 것 같다. 회사를 그만 둘 때, 워낙 일찍 결정했기 때문에 무거운 책 같은 짐들은 몇 번에 걸쳐서 집에다 갔다 놨다. 가벼운 건 좀 그냥 뒀었다. 그러다 총무 쪽에서 어차피 그만둘 거, 집에서 좀 쉴 수 있게 이렇게 저렇게 연차 등 휴가 처리를 해줬다. 그래서 약간의 짐이 내 자리에 남았었다. 국무조정실장이 주었던 장관표창장이 그렇게 분실되었고, 별로 신경도 안 썼던 명함 박스가 그 때 남았던 것 같다. 몇 년 후에, 진짜로 그 때 두고 간 명함들을 다시 만날 뻔 했다. 버려진 명함의 복수였을까? 그리고 그걸 막아준 건 당시 진짜로 아끼면서 애지중지 사용하던 후지츠 노트북이었고? 진작에 버리자는 걸, 내가 아껴 아껴 쓰고 있었다. 꽤 팔린 책 대부분이 살살 달래가며 쓰던 그 고물 노트북에서 나왔다.

 

어쨌든 그 명함 사건 이후로, 나는 명함을 덜 돌리게 되었다. 한 때는 나도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명함 뿌리는 게 일인 직업 협상가이기도 했다. 엄청나게 돌렸다. 그 명함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요즘 가끔 만나는 사람들 중에서, 10년 전의 내 명함을 가지고 와서 그 시절의 기억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저 미안할 뿐이다. 게다가, 나는 다른 사람의 명함을 그렇게 소중하게 보관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도저히 정리하기 어려운 정도가 되었는데, 그렇다고 그냥 버리지도 못하겠다. 아내가 대청소하면서, 가끔 뿔난 얼굴로, "이거 어쩔겨?", 이렇게 한 무더기의 명함을 가지고 온다.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명함에는 영혼 한 조각이 담기는 것 같다. 그냥 아무런 종이가 아니다. 그 한 장이 나 같은 경우에는 경찰서에서 좀 오세요, 이런 역할을 했다. 어떤 사람에게는 큰 비즈니스의 기회가 되거나, 출세의 기회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돌고 돌아서 사기꾼 손에서 '호구 리스트' 작성에 기여했을 수도 있다. 어느 편이든, 그냥 종이 쪼가리 하나는 아니다.

 

명함은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준다. 이름을 한글로만 쓴 사람은 주로 국내에서 움직이는 사람이다. 이름을 한문으로만 쓴 사람은, 외국 활동이 중요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만날 일이 없는 사람이다. 한문 이름은 중국과 일본에서 유용하다. 그렇지만 요즘 청년들은 잘 못 읽어서 불편해한다. 상대방을 세밀하게 만나야 하는 사람은 그깟 명함 한 장으로 불쾌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 가능하면 편안하게 볼 수 있게 한다. 명함에 '청소년 선도위'를 비롯해서 이것저것 경력이나 하는 일을 잔뜩 단 명함이 있다. 초짜 변호사이거나 그만큼 자신이 절박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정말로 중요한 일을 할 때에는 결국 단촐하게 명함을 쓴 사람에게 연락하게 된다. 대통령, 국회의장, 장관, 다 명함이 단촐하다. 내가 본 명함 중에서 가장 멋졌던 것은, 미국 유명대학 교수였는데, 그걸 그만두고 정부 협상에 자문하러 다니는 경제학자였다. 말년을 그냥 학교에 있기 보다는 정부에 좀 기여를 하고, 덤으로 전세계 여행도 하고, 그렇게 자신을 설명했다. 실무적이고 기술적인 일에서 나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 미국 국무성만 표기되어 있고, 직함에 Senior Economist라고만 적혀 있었다. 그가 학회를 비롯해서 자신의 업적을 쓰려면 A4 한 장이 넘었을 것이다. 내가 실무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똑똑한 할아버지였다. 미국 국무성 자문 경제학자, 폼은 안 날지 모르지만 아는 것만큼은 진짜 최고였다.

 

3.

명함에 준 사람의 영혼이 한 조각 실려 있을지 아닐지, 진실은 아직도 모르겠다. 그러나 명함이 요물인 것은 맞다. 특히 50이 넘은 사람들에게 명함은 때때로 진짜 요물이 된다. 요물에게 정신이 홀려서 자신의 전 재산은 물론이고 미래의 재산도 절반을 차압 당한 사람들을 몇 명 안다. 흔한 '바지사장' 같은 경우는 기본이다. 예전에는 장부에 이름 올리는 등기이사들이 회사에서 대출할 때 연대보증을 서기 때문에, 왕창 망한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50이 되어서 자기 조직에서 나간 사람들이 근사한 명함을 위해서 너무 많은 희생을 하게 되었다. 너무 이런 피해자들이 많아지니까 제도 개선이 좀 생기기는 했다. 연대 보증도 완화되었고, 월급도 기본 생활은 가능하게 절반 이상은 차압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차압이 된 사람 중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은 차관까지 가는 건 보았다. 그야말로 인간 승리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학문적 양심을 팔았다.

 

조금 더 근사한 명함을 위해서 재단을 만드는 사람도 가끔은 보았다. 그냥 가진 돈 가지고 편하게 살아도 되는데, 그걸 또 쪼개서 '이사장' 같은 직함을 위해서 재단을 만드는 성가신 일을 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성실하게' 살아온 50대는 명함이 없는 상황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뭐라도 한다. 그리고 점점 더 자신의 삶을 불편하게 만든다. 명함이 요물은 요물이다. 종이와 잉크, 명함은 평등하다. 그러나 명함을 든 사람들끼리는 여전히 평등하지 않다. 더 든든한 명함을 가지고 싶어하고, 더 쎈 명함을 가지고 싶어한다. 50이 되면 명함이 진짜로 요물로서의 자기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정년이 65세까지 보장된 교수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조직에 있는 사람들은 50이 되면 쓰던 명함을 내려놓게 되는 순간이 온다.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편안한 마음을 먹는 사람은 득도한 사람이다. 대부분, 그 때부터 다음 명함을 위해서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종이 쪼가리 한 장이 거대한 요물로, 심지어는 꿈자리까지 찾아오게 된다. 열심히 살았던 표준적 50대 남성들은 여기서 대부분 무너진다. 영혼 한 조각이 아니라 영혼이 뭉터기로 명함에게 빨려 들어간다.

 

여의도는 4년 내내 거대한 명함 쟁탈전이 벌어지는 곳이다. 별 의미는 없지만 명함은 팔 수 있는 자리가 수 천 개는 된다. 저강도 전쟁이 4년간 벌어지다가 고강도 전쟁이 몇 달간 벌어진다. 살아남은 사람의 영광 뒤로 수 천명이 상처 투성이로 남는다. 청와대는 정년 없이 명함을 발행할 수 있는 사람을 임명하는 권한이 있다. 5년에 한 번 목숨을 걸고, 나머지 5년 동안 줄을 선다. 명함이 요물 아니라고? 20대에 받는 첫 명함과 50대의 마지막 명함의 무게를 생각해보자. 명함 한 장을 위해서 목숨도 걸 수 있는 나이가 50대다.

 

좋든 싫든, 50이 되는 순간, 지금 쓰는 명함을 내려놓는 순간을 준비하기 시작해야 한다. 이 사회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노회한 사냥꾼들 사이의 마지막 전투로 끌려들어가게 된다. 민주투사? 죽어라고 노력하면서 스스로 엄청나게 성숙하게 된 사람이 아니라면, 100%의 확률로 명함 투사로 변하게 된다.

 

명함에 관해서 내가 들은 얘기 중에서 가장 슬픈 얘기는 한국의 보수들이 해준 얘기다.

 

"책이요? 명함 대신 쓰는 거 아니예요?"

 

한국의 돈과 학계는 언제나 그리고 여전히 보수주의자들이 쥐고 있다. 그들이 나에게 진짜로 솔직하게 해 준 얘기는, 명함 대신 돌리는 게 책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5년 후, 한국의 보수 정권은 무너졌다. 책 앞에 한 줄 쓰고 명함 대신 돌린다고 생각하는 보수적 학자들을 앞세우고 통치하기에, 한국은 이미 너무 커졌고 복잡해졌다. 명함 대신 돌리는 게 책이라는 얘기를 듣고, 나는 보수 정권이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명함이 한국에서 얼마나 중요할까? 박근혜 탄핵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은 헌법재판소다. 대통령 탄핵, 과외 금지, 요 정도 사안들이 헌재까지 간다. 누가 명함을 돌릴 것인가, 이 질문이 헌재까지 갔다. 국회의원 예비후보의 배우자는 명함을 돌릴 수 있는데, 이게 배우자 없는 사람에게는 불리하다는 것이다. 결국 명함 사안은 헌법재판소까지 갔다.

 

50, 결국은 자기 명함을 돌아보는 순간이 온다. 나는 누구인가, 헤겔 등 독일 성철학파가 했던 질문은 한국에서는 아예 필요 없는 질문이다. 지금 헤겔이나 칸트가 우리의 50대에게 그 질문을 했다면, 묵묵히 자신의 명함을 꺼내서 그에게 내밀 것이다. 뭐 이런 걸 질문이라고 하시느냐는 표정을 지을 것이다. 나는 명함인가, 명함이 나인가? 내 명함이 나는 아니다. 내가 누구냐고 묻는 데 명함을 들이미는 것은 상대방의 지성을 모독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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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사기 2쇄 찍는답니다. 정말로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다시. 사회적 경제 책이 얼마 전에 3쇄 들어갔구요. 예전에 10쇄는 간단히 넘어가던 시절에는, 쇄 넘어가는 줄도 잘 몰랐고, 그런가보다 했었습니다. 옛날 얘기입니다. 요즘은 책이 진짜로 잘 안 팔립니다. 쇄 넘어갈 때마다 얼마나 많은 분들이 도와주고 계신 건가, 요즘에야 좀 느껴집니다. 역시 좀 어려워져야 고개를 숙이는... 출판사에서 대학생 티타임도 하면 좋겠다고 해서, 그것도 고맙습니다, 말만 그런 게 아니라 마음도 그렇더군요.

한동안 사람들이 한국에서 처음 등장한 사회과학 전업작가라고 했습니다. 요즘은 여기에 더해서, 출판사 사람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했던'이라는 수식어를 더 달아줍니다. 출판계가 다 어렵지만, 사회과학은 초죽음이라고 할 정도로 어렵습니다. 저도 이제 그만 써야겠다고 몇 번 생각을 했는데, 사회과학 md를 비롯한 요 쪽 분야 사람들이, 그래도 명맥이라도 이어갈 수 있게 해주시라, 요렇게 가끔 부탁들을.

저는 아직도 한국의 사회과학 르네상스를 꿈꾸고 있습니다. 좋은 시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꼭 한 번 거쳐가야 하는 관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간만에 날이 풀려 볕이 따사합니다. 우리 사회에도 그런 따사한 볕이 드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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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를 만난 적은 없다. 그러나 그의 시와 글을 좋아하기는 했다. 대학에들어가자마자 연세문학회에 갔었다. 1시간 정도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는데, 그 때 바로 알았다. 내가 여기서 이 사람들과 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언덕길을 내려오고 그 길로 바로 가입한 동아리가 국악반이었다. 시를 쓰더라도 연세문학회에서 쓸 것 같지는 않았고, 어차피 시도 안 쓸 거, 악기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기형도는 만나지 못했지만, 기형도가 만났던 장정일은 만났다. '짧은 여행의 기록'에 시인들만 있는 것 같은 이상한 도시의 천재 소년 장정일... 그랬드랬나보다. 그리고 나는 장정일을 선배라고 부른다. 서로 동선을 맞추다 보니 연세대학교 학생회관 벤치에서 만났다. 그리고는 드립다, 술만 마셨다.

세 번째 술자리였나. 그 때 선배로서 장정일이 그런 말을 했다. 책을 10년쯤 쓰면 밥은 먹고 살게 될 거라고. 듣자마자 나는 그 말이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예로 들었던 게 신경숙이었다. 이청준의 글을 필사하면서 습작 시절을 보냈던 신경숙의 얘기는 워낙 유명한 얘기다. 그 때 나는 괜히 토를 달았다. 신경숙이 다행히 이청준을 필사 대상으로 했으니까 그렇게 되었지, 만약 요즘이라서 김훈을 필사했으면 밥 먹고 살기 어렵지 않았을까요? 20대, 김훈의 글을 아주 좋아했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김훈의 신문기사를 필사하지는 않았다. 유학 시절, 한국의 일간지를 배달받기에는 너무 비쌌다. 김훈의 글을 보기 위해서 당시 시사저널을 구독했다. 그렇지만 나라도 이청준과 김훈 중에서 필사 대상을 선택하라면 당연히 이청준을 골랐을 것 같다.

나도 책을 쓰기 시작한지 10년은 벌써 넘어갔다. 10년간 책을 쓰면 먹고는 살게 된다는 말은, 내 경우는 맞았던 것 같다. 물론 아내의 경차를 빌려타고 다니기는 하지만, 그것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손 벌리지 않고,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 세 끼 밥 먹일 걱정하지 않고 산다. 인류는 100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날 하루 세 끼를 뭐 먹고 사나 고민했었다. 우리가 잠시 잊고 있을 뿐이다.

20대에 경제인류학 공부를 생각보다 많이 했다. 파리 10대학에서 내가 속해있던 연구소 이름이 경제인류학 연구소였다. 나는 기준이 하루에 세 끼 밥 먹을 걱정을 하는가, 안 하는가, 그렇다. 나머지는? 프레스티지, 허영에 관한 이야기다. 선진국이라고 해도 배고픔으로부터 벗어난 게 그렇게 오래 되지 않고, 우리는 더더욱 그렇다. 지금 선진국이라고 하는 스위스도 20세기 전반은 굶어죽을 정도로 온 국민이 가난했던 나라다.

문학은 뭐고, 예술은 뭐고. 그런 생각을 온 국민이 해보게 되는 것 같다. 아내는 오태석 희곡상을 탔다. 내가 늘 자랑스러워하는 일이다. 아내가 아침에 재수없다는 얘기를 했다. 오태석도 성희롱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언론에서 들어보지 못한 얘기들을 아내에게 들었다.

글에 대한 내 태도는 언제나 같다. 밥이나 먹고 살면 고마운 거다... 친한 친구들은 이제 책 좀 그만 쓰고, 좀 편하게 즐기면서 살라고 한다. 생각만큼 나는 책을 쓰면서 고통스럽지는 않은데, 녀석들은 무슨 판타지가 있는지, 쥐어짜면서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내가 보내는 줄 안다. 고통스러운 것은, 10분만 더 자고 싶은데, 큰 애가 내 얼굴을 쥐어짜고, 둘째가 "아빠 일어나", 그러면서 내 배 위로 올라가 뛰는 것이다. 진지하게 묻는다. 책 안 쓰고, 그냥 편하게 살면 안돼? 지금 나는 태어나서 처음인 것처럼 그렇게 편하게 산다. 이보다 더 편한 삶이 있을까?

사회학 하는 친구들은 내가 아주 나쁜 사례라서 많은 대학원생들을 망치고 있다고 한다. 책을 써도 먹고 살 수 있다는 되지도 않는 환상을 준단다나... 그 환상을 빨리 깨달라고, 진짜로 진지하게 부탁하기도 한다.

책을 10년을 쓰면 먹고는 산다, 장정일의 얘기는 맞는 것 같다. 한국을 발칵뒤집은 최영미의 시 '괴물'이 7만원짜리라고 알고 있다. 최영미쯤 되는데, 원고료가 그렇게 밖에 안돼? 뒤집으면, 그 7만원짜리 시가 한국을 바꾼다. 가성비, 최고다. 예전에 소형의 날치라는 이름의 엑소세가 항공모함을 잡은 적이 있다. 프랑스 엔지니어들이 엑소세의 guidage를 해줬는지 안해줬는지, 외교전으로까지 번진 적이 있다. 시는 엑소세 같은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쓰는 글은? 항공모함 갑판 위에 던져져서 그냥 깨진 코카콜라 병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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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좋은 건 아닌데, 나 같은 경우도 2~3년치 출간 계획이 미리 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책 한 권 준비하는데 필요한 절대 시간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폭풍처럼 조사하고, 바로 쓴다, 뭐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능력이 그렇게 안 된다. 조사하는 절대 시간이 필요하고, 계속 생각을 하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머리 속에 가지고 있는 게 1~2, 출판사랑 얘기하고 또 실제 나오는 데에도 2~3, 그렇게 필요하다. 뚝딱뚝딱, 그걸 할 수 있으면 내 삶이 이렇게 피곤하겠나...

 

하여간 몇 년간 아무 생각 없이 지내다 보니, 나도 출간 리스트가 사라졌다. 그만큼 내가 대충 살고, 막 살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어쨌든 아이들이 조금씩 크면서 나도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올해는 출간 일정이 다 찼다. 송곳 하나 찔러 넣을 공간도 없다. 농업경제학까지, 내년으로 밀리지 않고 올해 소화할 수 있으면 최선이다.

 

내년에는 상반기, 하반기, 그렇게 딱 두 권만 일단 계획을 잡으려고 한다. 둘 다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 만만치 않고, 실제 조사도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무리하지는 않게 잡으려고 한다.

 

도서관의 역사라고 일단 잡아놓은 책은, 권양숙 여사에게 바치는 책의 형식을 가지려고 한다. 겉으로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다. 몇 년 전에 노무현 대통령 자택에서 권양숙 여사와 길게 티타임을 가진 적이 있었다. 원래 계획은 그렇게 길지 않았는데, 이것저것 말씀을 하시다 보니까 아주 길어졌다. 그 때 내가 가졌던 느낌이 있다. 그게 다시 몇 년에 걸쳐서 내 안에서 커지고 커졌다. 우리나라 도서관에 관한 얘기다.

 

도서관과 경제에 관한 이야기가 될텐데, 실제 얘기의 줄기는 '도서관의 역사'라고 하는 쪽이 훨씬 더 비슷하다. mb와 박근혜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들이었고, 치 떨릴 정도로 바보였는지, 도서관을 살펴보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전체적으로는 '지식경제학'이라고 경제학 분류에 해당한다. 그 중 도서관에 특화를 해서 분석을 해보려는 것이고. 이면에는 4차 산업혁명 어쩌구 저쩌구, 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감이 크다. 지식이 뭔데? 기술이 뭔데?

 

권양숙 여사가 한국 경제에 얼마나 중요한 전환점이었고, 큰 기여를 한 것인지, 그걸 분석해보고 싶은 게 내 마음이다. 지나온 날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위해서, 이건 꼭 써보고 싶었다. 바로 쓰지 못하는 것은, 역사라는 이름을 달아서, 나도 자료들 정리하고 조사할 시간이 필요하다.

 

젠더 경제학은, 오래 된 숙제 같은 것이다. 주변의 여성 경제학자들이 나에게 이런 거 정리해보라고 얘기한 게, 그러니까 15년 정도 되나? 그 때 이걸 했으면 아마 어마무시한 이 분야 선구자 같은 사람이 되었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 때는 내가 아직 저자로 데뷔도 하기 전이고, 또 먹고 사는 거 해결하느라고 나도 정신이 없었다.

 

이제는 더 늦추면 안될 것 같다. 뭐는 분석이 가능한 것이고, 뭐는 분석이 불가능한 것이고, 나도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가 되었다. 내년보다 더 늦추지는 않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출판사랑은 얘기도 안 해봤다. 확정 짓지 못하는 것이, 너무 바빠지면 아예 못 쓸 위험도 있어서 그렇다. 한국에서 누가 젠더 경제학을 또 쓰겠나? 기왕에 쓸 거면, 틀걸이를 제대로 잡고 하는 게 낫다는 생각...

 

이런 건 좀 정부에서 지원받고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제대로 하려면 지표도 잡고 지수작업도 잡아서, 팀으로 몇 년 하면 정말 좋을 것 같기는 하다. 혼자서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는 하다.

 

몇 년 전이지만, 오세훈 쪽에서 이런 연구에 관심이 있었고, 좀 도와주겠다는 연락이 건너건너 왔었다. 5천만 원 주겠다나? 에게... 다시는 연락하지 마세요, 확 심통을 냈다. 내가 거지야?

 

아직도 전국 단위의 조사 같은 것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기는 한데, 5억 밑으로는 엄두도 나지 않을 정도로 방대한 작업이다. 딱 마음 먹었다. 10억 정도 제대로 할 수 있게 해주는 경우 아니면, 시도도 하지 않는다. 선의로 뭔가 해보려고 하면, 공무원들은 꼭 학자를 거지로 대한다. 거지 취급을 받으면서까지 굽신굽신 비위 맞춰가면서 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규모를 아주 작게 잡으면, 차라리 그냥 틀걸이에 대한 얘기만 하고 실증 분석은 안 하는 게 낫다. 이런저런 이유로 젠더 경제학은 아직도 확정을 짓기가 쉽지는 않다.

 

여유가 되면, 내년에도 에세이집 한 권쯤은 내고 싶기는 하다. 그렇지만 아직 주제가 잡힌 것은 없다. 억지로 생각해서 밀어 넣는 것은 좀 아닌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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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사기', 독자 티타임 가질까 합니다. 특별한 건 아니고, 책 나올 때 조촐하게 늘상 하던 작은 행사입니다. 부담 가지실 건 없고, 그냥 얼굴 보면서 차나 한 잔.

 


여러분의 의견상, 토요일 오후로.

3월 3일 오후 3시
김영사

북촌 나들이 한다고 생각하시면, 편하실 것 같네요. 아울러 김용민과 제가 갖게 된 특별한 뒷얘기도 공간과 함께...

 

 

※ 오실 분들, 댓글 남겨주시면 차 준비할 때 좀 도움이 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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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이 된 한국인. 한 번쯤은 고민하는 주제인데, 형식만 반대이고. 죽을 때까지 얼마 부족할지 계산하는 사람과 죽을 때까지 얼마 남을지 계산하는 사람이 있다. 대차대조표 차액 계산인데, 계산 내용은 같고, 플러스 마이너스, 부호만 반대다. 그런데 그 비율이 어느 정도일까 싶다. 1:99에서 10:90 사이의 어느 비율이 아닐까 싶다. 상위 10%라고 해봐야, 연소득만 놓고 보면 암 것도 아니다. 소비를 줄이지 않으면, 여기도 방법 없다. 한국 경제 기본 메카니즘이 99%의 것을 뺐어서 결국 상위 1%에게 가게 만드는 거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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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에세이, 반 턴 돌았다. 9개 정도의 글이 남았는데, 쓰려고 준비해놓은 꼭지는 18개다. 우째스까. 그나마 룸살롱 같은 대형 꼭지를 몇 개 날렸는데도 그렇다. 내용이 형식을 만들지만, 형식은 내용을 수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직 쓰지도 않고 메모 정도만 있는 것들이니까, 그냥 확 9개 날려? 글이, 부족해도 고민이고, 남아도 고민이고. 진짜, 걱정을 사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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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6 12 29, 진짜로 낼 모래면 50이 될 그런 날이다. 오후에 두 아이 어린이집 하원 시키느라 잠시 주차하고 있다가 문자 메시지를 하나 받았다.

 

"황준욱 박사가 오늘 10:50 별세했습니다."

 

그가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은 지난 여름에 들었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람들 오지 않았으면 했다고 했다. 나보다 한 학번 위의 선배이다. 같이 공부했고, 같이 축구도 했다. 그는 진짜 마라도나처럼 축구를 잘 했다. 그리고 요리도 잘 했다. 가끔 내가 아이들한테 양 갈비 같은 것을 양념에 재워서 구워주는 적이 있다. 아이들도, 아내도, 아주 잘 먹는다. 그걸 준욱이형한테 배웠다. 유학생 살림이 그렇게 넉넉하지는 않은데, 그 양반은 조금 가격이 싼 양고기를 잘 썼다. 그 때 요리법을 배웠다. 그렇게 긴 기간은 아니지만, 총리실에도 같이 근무했었다. 거기 있는 줄 모르다가, 진짜로 우연히 만났다. DJ 시절, 전자정부 만든다고 한참 난리칠 때, 전자정부 담당 전문가로 파견 근무 나왔다. 경제 조직론을 그와 같이 공부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후에도 종종 만났다. 황준욱, 그는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게 많았다. 늘 나에게 뭔가 하자고 했었는데, 나는 늘 별 관심 없다고 했었다. 경제 전문대학원 같은 것을 만들어보고 싶어했고, 혁신형 교육기구 같은 것도 만들고 싶어했다. 나는 그냥, 내가 벌려놓은 일이나마 망가지지 않게 하느라고 늘 정신이 없었고, 새로운 일을 벌릴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전문 대학원은, 이미 만들어본 적이 있다. 한 번 해 본 일을 또 하는 데 그렇게 매력이 당기지는 않았다.

 

아내와 대학생 아들 하나를 두고, 친구처럼 평생을 살았던 선배가 그렇게 떠났다.

 

친구의 초상에 친구들이 모이는 것은 처음 한 경험은 아니다. 그렇지만 익숙해지지는 않는다. 마흔이 될 때에도 생각을 많이 했다. 진짜로 많이 했었다. 그 때는 뭘 해야겠다, 어떻게 살아야겠다, 욕망과 윤리 이런 것들 사이에서 삶을 돌아보는 게 그 시절에 많이 했던 생각이다. 이제 나도 낼 모래면 50, 쉰이 돤다. 막상 이 새로운 전환점이 되는 순간, 떠나버린 친구들에 대한 생각이 더 많이 난다. 상징적으로 그럴 것이라는 생각은 했었다. 50도 채우지 못하고 떠나간 친구들, 나는 뭔데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가나, 이런 생각도 했던 적이 있었다. 이런 얘기를, 진짜로 낼 모래면 50이 되는 날, 친구들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너나 나처럼, 대충 산 사람이 아니라 아니라 준욱이 형이 먼저 죽다니, ."

 

빈이 소주 한 잔 기울이면서 한 얘기다. 맞기는 맞는 말이다. 나는 대충 살았다. 그리고 나만큼이나 빈도 대충 살았다. 우리와는 다르게, 황준욱, 그는 부지런했고, 규칙적으로 살았고, 진짜로 열심히 살았다. 말도 잘 하고, 잘 생기고, 사람들도 잘 챙겼다. 그리고 축구도 잘 하고공부도 괜찮게 했다. 축구장에서든 삶의 현장에서든, 황준욱, 그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20대 중반 때, 같이 경제학 공부하던 세 명의 친구가 있었다. 나는 흔한 성씨는 아니지만, 다른 두 친구들에 비하면 희성 축에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다. 한 명이 빈, 또 다른 한 명이 옥이었다. 그 시절에는 빈은 결혼을 했었다. 우리는 빈네 집에 가서 밥 먹고, 나오면서 옥이랑 한 잔씩 더 했다. "한국에서 가장 희귀한 성씨는 볍씨", 이런 아재 개그가 우리들에게 따라 다니던 농담이었다. 볍씨가 성으로 있을 리가 없다. 기구하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한국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우씨, 빈씨, 옥씨가 파리까지 와서 그렇게 점심, 저녁 같이 먹으면서 어울려 다니는 게 남들 눈에는 기구해보였나 보다. 다들 가는 미국 유학을 안 가고 파리에서 모인 세 명의 희성 경제학도들게다가 옥은 변과 결혼을 했다. 희성 시리즈는 아직도 계속 된다. , , , 내 주변에 친한 친구들.

 

옥은 지방에서 오느라고 늦었고, 빈과 옥의 아내 변, 그렇게 소주 한 잔을 기울였다. 옥은 OECD에 근무하다가 지방대학 교수다 되었다. 빈은, 그냥 민간연구소에서 정년을 맞을까 하는데, 연구소에서 나이 많다고 자꾸 나가라고 해서 고민이 생겼다. 그의 아들은 이제 대학교 2학년이 된다. 우리 집 애들은, 이제 네 살, 여섯 살이 된다. 갈 길이 멀다. 옥은 조금 얌전하게 살았고, 빈과 나는, 대충 살았다. 정열적으로 살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50을 바라보는 지금,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대충 산 거다. 되면 되고, 말면 말고, 재밌으면 하고, 재미없으면 심통 부리고세 친구는 오랫동안 같이 모이지 못하다가 2년 전부터는 좀 자주 모였고, 자주 봤다. 술도 종종 했다. 옥은 이제 주량이 줄었다. 물론 줄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남들 보다는 많이 마신다.

 

우리가 그렇게 몰려 다닐 때, 바로 위의 선배가 황준욱이었다. 아직 결정된 것이 거의 없던 20대 경제학도들의 세상이 그렇게 소박하지만 꿈만은 찬란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을 어느덧 20년도 더 된 기억으로 돌리며, 상가집에서 소주 한 잔 기울이는 것, 그런 게 50대의 삶이라는 것을 너무 상징적으로 보게 된 것 같다.

 

상가집에서 나와서 빈과 감자탕 집에 들렀다. 소주 한 잔 하지 않고 그냥 집에 가기는 좀 그랬다. 상가집에서 각 1, 나와서 각 1, 여전히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더. 50이 되면 걱정이 줄어들까? 빈은 걱정이 없거나, 걱정이 있어도 하지를 않으면서 살았다. 산업은행을 그만두고 유학 길에 오를 때, 오죽 걱정이 많았겠나. 내 주변에 산업은행 출신들이 몇 명 있는데, 그 중에 삶이 가장 고달픈 것은 빈이었다. 그래도 그는 별로 걱정하지 않고, 어떻게 되겠지, 그러면서 살았다. 우리는 같이 50이 되었다. 빈도 이제는 걱정이 많아졌다.

 

(2016 12 30, 임시연습장 메모)

 

2.

빈의 아들은 아버지인 경제학도와는 달리 사회학도가 되었다. 빈의 아들이 수능시험 보는 전날 그의 아버지는 나와 술 마셨다. 아버지는 무덤덤하게 얘기했지만, 아들의 미래에 아무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아버지를 둔 덕에 아들이 엄청난 사교육을 받거나 그렇게 지내지는 않았다. 고대 합격이 발표되던 날, 그 날도 빈은 나와 술을 마셨다. 좋아했다.

 

옥의 일상적 삶은 잘 모른다. 별로 그렇게 지방대학도 아닌데, 지방대학 교수의 고충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한다. 정년이 보장된 것을 제외하면 엄청나게 다르게 살지는 않는다. 빈의 아들은 아직도 본 적이 없지만, 옥의 고등학생 딸은 그가 데리고 와서 본 적이 있다.

 

옥과 빈은 나와는 학교가 다르다. 나는 어차피 동문회나 동창회 같은 데는 거의 나가지 않지만, 그 친구들은 학교 모임 같은 데에 종종 나가는 모양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별로 볼 일이 없었다. 최근에는 종종 본다. 빈은 집이 아주 가깝지는 않지만, 진짜로 술 한 잔 먹고 싶을 때에는 같이 술 마신다. 옥은 지방에 있어서 그렇게 지나는 길에 만나기는 쉽지 않다. 벌려놓은 행사가 엉망이 되면서 급하게 대타가 필요할 때 나는 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후로는 옥도 가끔 '땜빵'을 나에게 부탁한다. 이래저래 30대에 비해서 좀 더 자주 보게 되었다.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의 박사들, 그냥 아무 것도 없이 보면 최상급 간판들을 달고 있다. 같이 공부하던, 가장 친한 친구들이다. 그래도 애 키우고, 먹고 살 것 걱정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예전처럼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몰려다니지는 않지만, 지금도 한국 경제나 우주의 미래 같은 얘기보다는 먹고 살고, 애들 키우는 그런 소소한 얘기들을 더 많이 한다. 서로 필요해서 만날까? 심심해서 만난다. 가끔은 그냥 이유 없이 옛날 얘기나 하거나 밑도 끝도 없이 술이나 같이 마실 사람들이 필요한 날이 있기는 하다.

 

또 다른 한편에는, 폼 나는 대학이나 남들이 알아주는 전공과는 아무 상관없이 또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그런 친구들이 있다. 친구는 다 같은 친구다. 동선이 겹쳐서 좀 더 자주 만나게 되는 친구가 있고, 그렇지 못한 친구가 있을 뿐이다. 시간은 많은 것을 무디게 만든다. 50, 다시는 안 본다고 했던 친구도 다시 보면 반갑다. 무슨 그렇게 결정적인 싸움이었다고, 이젠 기억도 잘 안 난다. 친구가 많은 게 재산이라고 하는 얘기가 있다. 그런 건 할 일 없는 사람들이 그냥 해보는 얘기다.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친구는 그냥 친구다.

 

50이라는 나이를 넘으면서, 우리는 훨씬 더 평등해졌다. 이제 언제 누구 죽을지 모른다. 이제는 누가 죽었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다. 그래서 친구들끼리 더 자주 만나게 될 것이다. 상가집에서 각 1, 상가에서 나와서 다시 각 1, 어차피 우리는 옛날 사람들이다. 다른 건 21세기로 넘어온다고 해도,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다른 방법을 모른다. 20세기식으로, 1. 그렇다고 더 위의 사람들처럼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는 것은 어색해할 정도로는 신세대다. 미국에서 X세대라는 개념이 처음 나왔을 때, 그게 딱 내 나이부터였다. 80년대, 군인들과 87년이라는 험한 시대를 보내면서 운동권이라는 특징을 가지게 되었지만, 세계적으로는 내 나이부터가 신세대다. 50이 되었지만, 곡을 하게 되지는 않는다. 아무리 친해도 그렇다. 그렇다고 국화꽃 하나 놓고 덤덤하고 쿨하게 나오기에는, 속에서는 울컥 하는 무엇인가가 남는다. 그래서 각 1, 다시 나와서 각 1, 참 올드하다.

 

3.

빈과 옥이 유학 시절의 친구라면, 그 뒤에도 친구가 된 사람들이 있다. 동선이 겹치기 때문에 아무래도 더 자주 만나게 된다. 공무원 중에도 진짜 친구들이 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같이 지냈는데, 친구가 안 되기도 어렵지 않은가. 지나보니까, 친구는 평생 생기는 것이다. 아마 60이 되거나 70이 되어도 친구가 생기고, 동무가 생기게 될 것이다. 사람 사는 건 그런 것 같다.

 

내 친구들 중에는 나에게 자신의 장례를 부탁하는 친구는 없다. 그 대신, 내 장례는 꼭 자기가 근사하게 치루어 주겠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친구들은 몇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더 오래 살 것 같단다. 나는 그 말이 맞다고는 생각한다. 태견하는 친구, 술이라고는 마시지 못하는 친구, 그리고 '운빨'이 너무 좋아서 지금까지 별 거 안 했는데도 잘 살아남은 친구, 아무래도 그들이 나보다는 오래 살 것 같다.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 그래도 내 장례를 자기들이 알아서 해주겠다고 해주는 꼴을 그냥 보고 있기는 좀 그렇다.

 

"난 장례 안 지내."

 

진심이다. 친척이라고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싸우는 게 너무 보기 싫어서 내 생일도 안 한다. 나는 서대문구에 있는 안산 근처에서 태어났으니까, 죽으면 안산 아니면 아무 산이나 대충 뿌려달라고 할 것이다. 기일은 물론, 일절 아무 일 없이 잊혀지는 게 좋다. 그러니까 내 친구들이 내 장례식에 모여서 각 1병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몇 번은 친구들 장례식에 가서 각 1병을 하기는 해야 할 것 같다. 산다는 게 그렇다.

 

나는 오래 살거나, 잘 살거나, 그런 꿈을 가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50이 되면서, 30년만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 친구들은 내가 하는 말에 "옳다"라고 하는 일은 없다. 맞든 틀리든, 내 친구들은 "그건 아니지", 그렇게 일단 부정부터 한다. 우린 그렇게 살았다. 그 녀석들이 수 십년만에 동의한 것은, 진짜로 30년만 더, 아프지 않고, 추례하지 않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내가 80이면 둘째가 35세다. 정말로 운이 좋다면 둘째의 아이들까지 약간은 돌봐줄 수 있을 나이다. 내 삶과 관련해서, 그 정도면 나는 정말로 더 바랄 게 없다.

 

나는 부자로 살 생각도 없고, 힘 있는 권세가로 살 생각도 없다. 그렇다고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아무거시', 그럴 생각은 더더욱 없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이런 기록적인 개소리가 있다. 호랑이를 죽이고 싶어서 만든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랏님이 하시는 말씀을 고분고분 잘 듣고 대충 개처럼 살라고 만든 이데올로기이다. 죽은 사람을 기리는 것은, 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잇속이 되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렇지만 50 7, 5, 두 아이의 늙은 아빠가 된 후, 염치 없이 30년만 더 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평생 안 하던 기도를 가끔 하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오래 살게 해달라는, 그런 허망한 기도는 하지 않는다. 내가 신이라도 그런 황당무계한 기도를 하는 사람을 특별히 잘 봐주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세상이 나아질 것,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 그런 걸 기도한다. 예를 들면, 삼성의 이재용이 2심 재판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후, 나중에 그가 지옥에 가게 해달라고 하는 것, 그런 기도를 주로 한다. 그건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배우 김수미가 영화 <헬머니 - 확인>에서 주옥 같은 대사를 날렸다.

 

"차가게 살어."

 

내 작은 잇속을 위해서 착하게 살겠다고 마음을 먹는 내 모습을 돌아보면, 참 가증스럽다.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없는데, 어쩔 것인가. , 명예, 그 어떤 것도 50이 넘은 사람의 30년을 보호하거나 보장해주지 않는다. 옛날 기준으로 하면, 진짜 이만큼이면 살만큼 산 거다. 세종대왕이 53세에 돌아가셨다. 22세에 왕이 되어, 30년 정도 왕노릇한 거다. 평균 100세를 살지도 모른다는 지금, 우리 모두가 평균적으로 세종 보다 2배는 더 살게 된다. 그러나 그건 평균치다. 개개인의 삶, 마치 잉글 베르그만 감독이 <7의 봉인(1957)>에서 다루었던 죽음처럼 아무 인과관계 없이 그냥 찾아오는 것이다.

 

현실에서, 나쁜 놈이라고 먼저 죽고, 좋은 놈이라고 천천히 죽고, 그런 것은 없다. 전또깡, 바로 그 전두환은 아직도 한참 더 살 것 같다. 그래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전략은, "차가게 살어", 이것 밖에 없다. 되는 대로 살고, 대충 살고, 그리고 기도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내가 빈과 옥을 위해서 소주 각 1병을 할 확률 보다는 그들이 나를 위해서 각 1병을 할 확률이 훨씬 높다. 친했던 친구를 보내고 각 1병 하는 것, 사실 80이 될 때까지는 안 하고 싶다. 좋은 놈이든 나쁜 놈이든, 많이 벌었든 적게 벌었든, 이혼을 했든 안 했든, 지금 50인 친구들과 80까지는 어떻게든 그냥그냥 버텼으면 좋겠다. 방법은? 나도 가끔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 어느 추운 날의 기도

 

정말 추운 날이다. 내일은 더 추워진단다. 집은 따뜻하다. 일곱 살 큰 애는 혼자서 책 보고 있고, 다섯 살 둘 째는 혼자 로봇 장난감 가지고 놀다가 손이 끼었다고 울면서 뛰어온다. 일하다 늦게 들어온 아내는 내가 비벼준 비빔밥을 맛있다고 크게 한 입 먹었다. 나만 혼자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도 괜찮나,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특별히 되고 싶은 것도 없지만, 특별히 미워하는 것도 없는 삶이 되었다. 누가 뭐라고 하면, 그냥 그러세요 하고 만다. 뭔가 갖고 싶은 게 생기면, 너무 비싸, 이러고 만다. 행복하기 위해 먼저 불행해져야 하는 건 이젠 좀 지겹다. 그리고 더 큰 행복을 위해서라고, 더 큰 혐오를 갖는 것도 이젠 좀 피곤하다. 추운 날, 따뜻한 집에 있으면 더 바라는 게 없다. 아이들 뛰어 노는 소리가 들리고, 냉장고에 적당히 먹을 게 있고, 집은 따뜻한데, 뭘 더 바랄 것인가? 천국의 모습을 누군가가 그린다면 이것과 많이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재용이 감옥에서 풀려났다. 아주 희한한 판결이 나왔다. 그들을 위해서도 잠시 기도. 지옥갈겨! 잠시 생각하다가 기도를 한 마디 더 한다. 생지옥 갈겨! 그들의 부모들을 위해서도 잠시 기도. 아멘...

 

천국을 먼 곳에서 찾을 이유가 없을 것 같다. 추운 겨울, 잠시만 돌아보면 사방에 보살이고, 천국은 천지에 널렸다. 추운 날, 더욱 감사하고, 힘든 사람들에 대해서 잠시라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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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사기'도 나왔으니, 늘 하던 대로 조촐하게 독자 티타임 한 번 할까 싶습니다. 이번에는 장소를 좀 바꿔볼까 싶은데, 사정상 주중에 해야할 것 같은. 주중에 모이면 무슨 요일, 몇 시가 제일 나을까요? 2~3주 후 정도 생각하는데요.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편하신 시간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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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 일하기 시작한 것은 2010년 연말 정도였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까? 그 해에 영화 <평양성>이 기록적으로 망했다. 나에게는 외형적으로 별 특별한 일이 있지는 않았는데, 그 해가 내가 책을 내지 않은 거의 유일한 해였다. 어쨌든 여러 경로로 삶의 마지막 구텅이 혹은 돌아나올 수 없는 코너에 몰린 사람들이 같이 일을 하기로 했다.

 

그 때 우리가 했던 약속은 딱 하나였다. 했던 걸 또 하지는 않는다...

 

이건 아주 불리한 조건이다. 같은 걸 또 하고 또 해야 실력이 늘 것 아닌가? 그래야 돈도 좀 벌고. 어쨌든 뭔가 새로운 걸 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칠 것 같은 똘아이들이 그렇게 동료가 되었다. 좀 있으면 10년이다.

 

아내는, 나를 '병신'이라고 불렀다. 하는 것도 없이 몰켜 다니면서 술만 마셨다. 침 좀 뱉었다는 표현이 싸움 좀 하는 건달을 의미했다. 가끔은 정말로 침만 뱉었던 건달도 있다고 한다. 진짜, 술만 마셨다. 아내는 올해 '비리비리'로 한 단계 올려주었다. 비리비리해서 뭘 못하는 거지, 아주 병신은 아니라는. 이 얘기를 듣는데, 10년 가까이 걸렸다.

 

한 걸 또 하지 않는다...

 

내가 나를 위해서 지키려고 했던 하나의 원칙이 있다면, 그게 바로 한 걸 또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걸 또 해야 하는데... 그렇지만 그러면 내가 너무 불쌍할 것 같다. 바로 돈 들어오고, 바로 승진하고, 에 또, 그런 그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단호하게 "싫어요"라고 했던 게, 나중에 너무 불쌍하고 비참하게 느껴질 것 같다.

 

그 때 하지 그랬어.

 

그 땐 잘 몰랐어요...

 

이렇게 대답해야 진실인 상황으로 몰리면, 내가 너무 불쌍할 것 같다. 그래서 여전히 한 걸 또 하지는 않는다는 자세를 지키려고 한다. 물론 생각만 그렇다. 지나와서 보면, 별 볼 일 없는 걸 이렇게 고치고, 저렇게 고치고, 또 크게 보면 거기서 거기인 일들을 했다. 그래서 비리비리했다.

 

한 걸 또 하지 않는다. 이건 어쩌면 나에게는 좀 쉬운 일이다. 잘 한다, 멋지게 한다, 근사하게 한다, 그럴 듯하게 한다, 이런 건 어렵다. 20대에는 나에게도 좀 재능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할 줄 아는 게 너무 없다... 제빵 학교에 다닐까도 했고 와인 소몰리에 같은 것을 전문적으로 배워볼까 했더니, 담배 끊으란다... 바로 포기. 요리를 체계적으로 배울까 했더니, 이것도 담배 끊으란다. 바로 포기.

 

진짜로 나는 대충 살았다. 싱가포르의 대학에 교수로 갈 수 있었다. 어럅쇼, 가보니까 싱가포르는 도시 전체가 금연. 그렇게까지 열심히 살고 싶지는 않았다. 금연이야 할 수도 있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 담배를 끊는다면, 나이 많이 먹은 어느 날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될 것 같았다.

 

별로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포기한 길들은 창피해서 일일이 말하지도 못한다. 하버드는 정말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안 갔고, 하다 못해 동경 대학 연구원은 정말로 더 소소한 이유로. 그래서 행복해졌을까? 밥은 먹고 살았다.

 

가지 않은 길을 회상하면서 사는 건 슬픈 일이기도 하고, 비참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싫은 게, 영광스러웠던 일들을 그리워하면서 사는 일이다. 그건 비참한 걸 넘어서, 병신 곱배기, 병신 삼승, 병신 사승, 그런 것 같다. 게다가 지난 일들에 뻥까지 보탠다면... 밥 숫갈 내려놓아야지, 그런 맘으로 지금도 하루하루를 산다.

 

했던 일을 다시 하지 않기, 반복하지 않기, 이런 건 제대로 되든 아니든, 설래임이 있다.

 

경제학자로서, 나는 여전히 C급이라고 생각한다. A, B, 내 앞에 나래비를 서 있다. 그래도 좋다. C급이라도, 아직도 재밌게 분석할 것들이 있고, 해보지 않은 시도들이 조금 더 남아있다. C급 경제학자가 좋은 점은, 몸이 가볍다. 사소한 이유라도 누군가 간절히 원한다면, 기꺼이 나는 분석한다. 단 한 명이라도... 그리고 어떻게든 뚫고 나갈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저자로서는, 같은 것을 반복하기 위한 것에 대한 두려움을 아예 가질 필요가 없다. 나는 그렇게 성공적인 저자는 아니다. 영광이 있어야 뭘 반복하든지 말든지 할텐데, 그렇게 돌아가고 싶은 과거 같은 게 거의 없다. 그래도 아직 판돈 다 털려서 패 접어야 하는 상황까지 가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50대 에세이는 이런 삶의 한 흐름에 매듭을 한 번 지어보자는 생각으로 시작된 것 같다. 위아래로도 평등하고, 주변으로도 평등하기 위해서 기를 썼던 50대가 나 말고도 또 있었을까? 하여간 나는 아무도 내 위에 두지 않으려고 하고, 아무도 내 밑에 있게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고 혼자 일하는 것도 아니다. 이제 10년 가까워지는 비리비리한 동료들이 있고, 매 번의 작업도 좋든 싫든, 같이 일한다. 불편하지 않을까? 여럿이 움직이면 불편하기는 하지만, 혼자 움직이면 사실 아무 것도 못한다. 어디엔가 처박히고 딱 좋다.

 

어영부영 50, 낯선 21세기라는 두 개의 제목으로 각각 다섯 개씩의 글을 썼다. 요렇게 두 뭉치가 전반부다. 내가 절치부심하면서 고민하는 것은 딱 한 가지다. 이걸 이렇게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매 번의 글이 그러면 좋겠지만, 진짜로 내가 어영부영 사는 것처럼, 그렇게 시도하지만 결과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 쓰기 전에는 모른다. 써놓고도 잘 모를 때도 있다.

 

다른 분야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글을 쓰는 것과 같이 뭔가를 만들 때, 제일 어려운 것은 감정이다. 출판사랑 계약을 하거나, 뭔가 투자를 받기 위해서 기획서를 쓸 때, 논리적인 것의 얼개는 어느 정도는 마무리되어 있는 상태다. 이거 말 되는데... 그 정도는 되어야 누군가의 지갑에서 돈이 나올 것 아닌가. 나는 대가가 아니니까, 사진 한 장 혹은 스팟 한 모습, 이렇게 누군가를 움직이지는 못한다. 최소한 논리적으로는 뭐가가 정리가 되어야, 나도 움직인다는 생각을 하고, 상대방도 나와 약속을 한다. 이게 되었으니까 다음 단계로 가는 건데...

 

감정은 어렵다. 매번 감정이 생기지는 않는다. 생활인들이, 당연한 것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감정을 일정 기간 동안 유지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뭔가 만드는 순간, 약간은 뽕 맞는 순간 같은 것을 일시적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게 너절한 싸구려가 아니기 위해서는, 같은 것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것 같이, 무의식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원칙이 필요하다. 그건 생명과 같다. 이걸 버리느니, 내가 죽고 말겠다, 그 정도로 강렬하지 않으면, 무의식부터 흔들린다. 나머지는 다 장식품이 되어버린다.

 

하여간 우여곡절 끝에, 50대 에세이는 절반을 지났다. 잠시 숨 고르기 중이다. 사실 시작하기 전에, 책과 장의 제목 정도가 결정되지 않은 상태지, 어느 얘기들을 넣을 것인지는 어느 정도는 결정이 되어있다. 그리고 처음 펜을 들기 시작하면서, 뒷 쪽이 부지런히 재배치된다. 절반이 끝나면, 후반부는 배치는 물론이고 톤까지 거의 결정이 된다.

 

그렇게 해놓고, 내가 내 생각을 이기기 위한 진짜 작업이 시작된다. 원래는 이걸 쓰기로 했는데, 그걸 '쓰레기'로 느끼게 만들 정도로 더 기가 막힌 것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래야 글이다. 원래 쓰기로 한 것을 쓰기로 한 그 자리에 맞춰서 쓰는 것, 그건 기계적인 일이다. 펜을 습관적으로 놀리는 것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내가 설정한 것을 내가 이겨내야, 그게 글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만 하고... 맨 번 나는 나한테 지고, 하나마나한 결과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내가 내 삶을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하고, 그냥 그냥 수없이 많은 저자 중에 한 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도 한 번쯤은, 내가 나를 이기고 싶다. 열 개의 글을 더 쓰려고 한다. 아직 열 번의 기회는 남았다. 아직 나는 시간이 많고, 숨도 길다.

Posted by reti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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