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자들은 모이면 맨날 의리를 말한다. 그렇지만 의리 외치는 사람 중에서 정말로 의리 있는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다. 대개는 돈과 권력이 있을 때 의리이고, 그런 게 사라지면 의리도 봄날에 눈 녹듯이 사라진다. 어느덧 나도 박사 22년차가 되었다. 한국 사회의 한 가운데에서 현장들을 지켜보게 되었고, 그 시간도 이제 짧지는 않다. 내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40~50대 남자들은 보통은 의리가 없고, 그 나이의 여자들은 그보다는 의리가 있다. 한동안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어느덧 나이가 먹어서 정년이 차서 은퇴를 하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뭔가 한 자리 할 것 같거나, 교수 자리라도 좀 더 챙겨줄 것 같은 은퇴 교수 근처에는 남자 제자들이 여전히 길게 줄을 서 있다. 그렇지만 정말로 교과서 그대로 삶을 살았던, 우리 말 그대로 '훌륭하신 스승님'이 은퇴한 뒤에 주로 인사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여자 제자들이다. 의리? 남자들의 의리는 모르겠고, 여자들의 애틋함은 알겠다. 정치계나 언론계에서 별로 주목하지 않는 "우리 선생님이 측은해서", 여전히 스승의 날 찾아가는 여자 제자들이 마음 속에 간직한 애틋함, 그것만은 실체가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은퇴한 후 외롭게 보내는 교수들이 번거로운 일들을 부탁하기 위해서 나한테 많이 연락들을 하신다. 물론 나는 심통 난다. 아니 자기 제자들이 수 십 트럭은 될 사람이 애 보느라고 정신 없는 나한테 부탁을 하신담? 정부에서 일을 해서 그런지, 소리 소문 없이 딱 그 부탁한 일만 처리해주고, 아무 댓가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할아버지들 사이에서 조금 소문이 난 모양이다. 별 건 아닌 부탁들이다. 괜찮은 출판사를 소개해달라거나, 신문에 글을 쓰고 싶은데 좀 알아봐 달라거나, 뭐 그런 정도 수준이다. 좀 귀찮은 정도가 국회의원한테 얘기해달라고 하거나, 그런 정도다. 원래 내가 '아무 거나 상담소 소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별의별 부탁을 다 받으면서 살았다. 내가 성질이 정말로 지랄 맞은 게, 누군가 한테 머리를 숙이거나 내 부탁을 하는 것을 죽기 보다 싫어한다.

 

그런 영감님들한테 내가 조언하는 게, "선생님, 올 연말에는 망년회를 꼭 한 번 하세요", 그렇게 얘기한다. 그리고 나는 잊고 지내는데, 한참 후에 고마웠다는 얘기를 듣게 되고는 한다. 한국에서 제일 중요한 행사는, 남의 결혼식은 아니고, 지인의 부친이나 모친 장례식은 더더군다나 아니고, 회식도 아니다. 바로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하는 망년회다. 송년회, 아니다. 새로운 해를 맞기 위한 송년회는 성공한 사람들이나 힘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영광을 기원하면서 하는 행사다. 잘 나가는 조직이나 방송국에서 하는 '송년의 밤', 이런 데는 안 가도 된다. 그러나 그 해 망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서로 위로하는 망년회, 이건 안 가면 안 된다. 물론 친구들이나 동창들끼리 하는 망년회는 안 가도 된다. 50이 되어서 그거 다 가면, 간질환으로 진짜 망하게 된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망년회, 이것도 못하는 조직은 진짜로 몇 년 안에 망한다. 망한 건 망한 거고, 망한 사람들끼리 내년에는 이러지 말자고 서로 위로하는 망년회, 그 자리를 같이 한 사람들끼리는 울분을 서로 위로하며 의리가 생긴다. 그게 내가 아는 진짜 의리다. 그 의리는 오래 간다. 또 다른 한 해를 같이 지나갈 원동력이 된다.

 

지난 10년 동안, 기관장 끼고 보수 쪽 사람들은 연말이면 송년회 했다. 내 주변에는 누군가 잘리고, 지원 끊어져서 하던 일 엎어지기도 하고, 하다 못해 속상해서 병이라도 나서, 늘 연말이면 망년회였다. 그나마 망년회 아니었으면 여러 사람 정신질환으로 치료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래, 우린 그렇게 지난 10년을 버텼다.

 

2.

내가 망년회를 챙기기 시작한 것은 팀장 시절부터이다. 직급으로 하면 부장인데, 그 조직에서는 부장 보다는 팀장이 더 높았다. 보직 없는 부장도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과장이 팀장이고 그 밑에 부장이 올 수도 있지만, 2000년대 초반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팀장이기는 팀장이지만, 나는 나이도 어리고, 외부에서 온 사람이다. 게다가 언제 그만두고 나갈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아서, 나랑 잘 지내봐야 평생 자기 승진을 챙겨주지는 못할 거라고 모든 사람들이 생각했다.

 

대부분의 공조직들이 연초에 인사발령이 나기 때문에 연말이면 이제 자기가 그 팀에 남을지 옮길지, 어느 정도는 알게 된다. 나는 로비력 같은 게 아예 없었기 때문에 연말이면 잘 나가는 사람들은 승진할 팀으로 옮겨가고, 다른 팀장들이 끌어가지 않은 사람들 즉 남은 사람들 중심으로 나의 팀의 구성되었다. 물론 나도 틈틈이 반칙을 했다. 나는 경력직 공채를 열어서, 이렇게 저렇게 사람들을 중간에 보강했다. 그래서 연말이면 우리 팀은 아주 이질적인 사람들이 모여서 일하는 희한한 팀이 되고는 했다.

 

다른 팀은 그 시절, 모여서 룸살롱에 가기도 했다. 여직원들이 있는데도 여직원은 빼고 남자들끼리 룸살롱에 간다. 나는 룸살롱은 딱 질색이었다. 그래서 그 중간에 타협을 본 것이, 망년회 때에는 가고 싶은 데에 간다는 거였다. 모두가 원하는 타협점으로 의견을 모아진 것이 분당 나이트클럽이었다. 좀 더 나이가 많은 팀은 공무원들이 주로 가는 인덕원에 있는 카바레 같은 곳이었는데, 그래도 그 나이들은 아니라서 분당 나이트 클럽이 결국 모두가 원하는 타협점이 되었다. 나이트클럽은 당연히 법인 카드로 결재하는 사업비를 못 쓴다. 그래서 여름부터 볼펜 사고 샤프심 사라고 나오는 수용비를 모으기 시작했다. 목표는 백만 원이다. 택시비 같은 것을 조금씩 모으기도 했다. 그래도 그런 푼돈 모아서 백만 원을 만들려면 벅차다. 진짜 꼬깃꼬깃, 잔돈푼을 모아서 분당 나이트 클럽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돈들을 모았다. 나중에는 내가 그냥 정부에서 하는 일명 '쿠폰 프로젝트'를 하기도 했다. 몇 십만 원에서 몇 백만 원 수준으로 전문가가 정부에 제출하는 소형 보고서를 이렇게 부른다. 돈 세탁된 돈 백만 원, 그렇게 갔던 분당 나이트에서의 일탈, 그게 우리 팀의 망년회였다. 팀장이 총리실에 파견 나가 있던 시절에도 팀은 돌아갔다. 그 해에도 우리는 분당 나이트클럽에 갔다.

 

내가 떠난 후, 그들의 절반은 국제기구로 갔고, 또 다른 절반은 컨설팅 회사로 갔다. 그리고 몇 명은 끝까지 남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들에게 좋은 팀장은 아니었던 것 같다. 30대 초반의 그 시절은 나에게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갔고, 나도 더 이상 분당 나이트를 갈 일은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시절의 기억이 내가 매년 치루는 망년회에 노스탈지아처럼 남았다. 그 때도 연말이면 망했지만, 지금도 해마다 망한다. 너무 좋은 일들만 만발해서 나도 진짜로 새로 오는 한 해를 기쁘게 맞이할 순간, 송년회를 치룰 수 있게 되면 나도 망년회를 안 할 것 같다. 아직 그런 날이 오지는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안 올지도 모른다.

 

비주류 학자들이 모인 학회에서 우리는 젊었을 때, 동고독락이라는 농담을 많이 했다. 같이 고생을 하지만, 기쁨을 같이 나누기는 어려웠다. 누군가 높은 자리에 갈 때, 즐거움을 같이 나누려고 하면 큰 일 난다는 얘기를 농담처럼 했다. 어려움을 같이 나누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즐거움까지 같이 나누려면 정말로 대형 스캔들에 들어가게 된다. 그 얘기가 나에게는 일종의 DNA처럼 되었다. 슬프고 어려운 일을 같이 나누지,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같이 나누지는 않으려고 한다. 어쩌면 평생 나는 망년회만 공식행사로 하면서 살 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게 더 좋다. 망했을 때 망년회도 못하는 조직은, 진짜로 망한다. 그렇게 서로의 마음이 멀어지면, 아무 일도 같이 할 수 없다.

 

언젠가 내 건강이 더 나빠져서 정말로 1년에 딱 한 번만 술을 마셔야 할지도 모르는 순간이 올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그걸 망년회 때 마실 것이다. 만약에 아예 술을 못 마시게 되면? 그래도 그 해에 망한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하는 망년회는 계속 할 것 같다. 내 주변, 누군가는 망할 수밖에 없다.

 

3.

바캉스는 불어다. 바캉스 문화를 만든 것이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프랑스라서 그렇게 말한다. 아르바이트는 독일어다. 일본과 독일 사이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이 말이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프리랜서는 영어다. 거의 대부분의 모든 나라에서 프리랜서는 그냥 영어를 바로 쓴다. 미국식 특수 관계가 이 단어에 녹아 있다. 말 그대로 프리랜서를 혼자 일하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세상에 혼자 일하는 것은 없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더군다나 혼자 일하는 경우는 없다. 경제학 교과서에서 늘상 인용하는 가상의 인물, 로빈슨 크루우소우가 아니라면 이 사회에서 혼자 일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50이 되면 프리랜서로 전향하는 것을 생각하고, 조직에서 나와 혼자 일하는 것을 전제로 상상을 시작한다. 그건 미국식 노동체계에서 만들어낸 환상이고, 은유적 표현에 대한 오해다. 월급을 받지 않는다는 특수 고용이지, 혼자 일하는 것은 없다. 작업을 혼자 하는 스타일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게 혼자 일하는 것은 아니다. 혼자 일하는 것, 그건 착각이다. 자본주의는 돈에 의해서 움직인다. 그 얘기는 시장이 존재하고, 그 시장을 구성하고 작동시키는 각종 제도가 있다는 말이다. 극단적으로 혼자 일하는 경우의 예를 들자면, 돈 많은 사람의 완전한 개인 운전사 정도일 것이다. 개인 비서만 하더라도 여러 사람들과 연락하고 협조하면서 일을 하게 된다.

 

자유롭게 혼자 일한다, 이건 순전히 개인의 착각이다. 아무리 단순한 일이라도 최소 3~4명이 같이 호흡을 맞춰야 하고, 임시적인 관계라도 한 배를 타게 된다. 큰 조직에 속한 것과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혼자 일하는 것은 아니다. 일시적인 상하 관계가 형성될 수도 있고, 정말 지긋지긋한 갑을 관계에서 을 처지가 될 수도 있다. 차라리 혼자이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혼자 일하는 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큰 조직에서 일했든 작은 조직에서 일했든, 50대에는 자기가 속한 조직에서 한 번쯤은 떠나게 된다. 그리고 점점 더 작은 조직으로 그리고 점점 더 임시조직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곳에서 지나온 조직의 노스탈지아를 습관적으로 하는 것은 바보다. 지금 자기와 일하는 사람을 동료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노골적으로 하는 것은, 정말 바보다. 옛 애인의 좋은 점을 매번 말하는 바보와 연애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아내에게 첫사랑이 얼마나 멋있는지 얘기하는 것은 바보다. 그런 바보 같은 얘기를, 성공했던 남자들은 종종 한다. 자신이 얼마나 최고의 사람들하고 일했는지를 말하는 것은, 지금 "너희들이 영 못마땅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자신이 나온 좋은 고등학교, 좋은 대학에 대한 얘기는 동창회에서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지금 자신과 일하는 동료들에게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얘기다. 그런 마음이 아니었고,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면 더 바보다. 일부러 상처 줄 마음이 아니었는데, 지금 자신의 소중한 동료들에게 왜 상처 줄 얘기를 하는가?

 

매년 나는 망년회를 2~3개 정도 한다. 둘째가 폐렴으로 두 번째 병원에 입원하던 날, 나는 내가 하던 사회적 행위들을 다 접었다. 언제 아이 병원비 크게 내야 할지도 모르는 아빠가 하는 대부분의 사회적 행위는, 다 허례고 허식이다. 명절이면 후배 부부의 사과 과수원에서 지인들에게 보내던 선물을 끊었다. 건너건너서라도 결혼이나 상가 소식 같은 것을 알게 되면, 꼭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얼마씩 보내는 것도 끊었다. 아이 아픈 아빠가 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다 알게 되는 사람들의 생일 선물 같은 것도 일절 끊었다. 유일하게 안 끊은 것이 망년회다. 일은 같이 하는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 속에서 내가 아직도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망년회마다 약간씩 표현은 바뀌지만, 꼭 내가 하는 말이 있다.

 

"올해 저는 대한민국 최고인 여러분과 같이 일했습니다. 최고들과 같이 일해서 정말로 감사하고 즐거운 한 해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 얘기를 하려고 나는 매년 망년회를 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팀장 시절부터 그랬다. 나는 대한민국 최고가 아니지만, 나랑 일해준 사람들은 대한민국 최고라고 생각했다. 이건 진심이다. 물론 우리도 다 안다. 대한민국 최고는 지금 근사한 곳에서 송년회하고 있지, 이런 좁은 삼겹살 집에서 소주 잔 기울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늘 대한민국 최고와 일한다고 생각하면서 산다. 아주 많이 망한 해에는 아주 많이들 울었고, 별로 망하지 않은 해에는 몇 명만 그리고 조금만 울었다. 2012년 대선이 끝나고 나꼽살 망년회를 했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 김미화, 선대인 그리고 스탭들이 같이 했다. 그날 미화 누님이 울었다. 나도 많이 울었다. 그렇다. 망한 해에는 서로 모여서 같이 위로하면서 우는 거라도 같이 해야 한다. 그래야 그 다음에 안 망한다.

 

나는 늘 대한민국 최고와 일했다. 그래도 매년 망했다. 이건 누가 봐도, 내가 망해서 그런 거다. 나와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매 번 그들이 대한민국 최고라고 말하는 것은 서로 민망한 일이다. 1년에 한 번, 나는 그 얘기를 기회를 만든다. 공교롭게도 매년 우리는 망했다. 그래서 당신이 대한민국 최고라는 말을 듣고, 괜히 울음을 흘렸다. 망한 해에 망년회를 하면서 울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는 안다. 그는 언젠가 대한민국 최고가 될 거다. 내가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언젠가 같이 울던 그 동료들이 연말이면 송년회에 가고, 시상식에 가기를 나는 희망한다. 그렇지만 아마도 나는 오랫동안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지키면서, 망년회를 가질 것 같다. 어느덧 동고독락이 나의 좌우명이 되었다. 어려울 때 우리 같이 하고, 즐거울 때에는 정말로 온전히 네가 기뻐할 수 있으면 좋겠어.

 

망해가는 한국 출판계 그리고 더더욱 망한 한국 사회과학, 그 한 구석에 영광이 들 일은 별로 없다. 그렇지만 언젠가 한국 사회과학에 르네상스가 올 때까지, 나는 계속 망년회를 하고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언제나 나는 대한민국 최고와 일을 한다. 돌아보면, 언제나 나는 대한민국 최고들과 일을 했다. 그 중에는 가끔 대한민국 최고 울보와 최고 술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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