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 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백범 일지 중)

 

 

50대 에세이의 마지막 글을 써야 한다. 이 자리에 백범의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에 대한, 일종의 패로디를 쓰기로 생각한 것은, 처음 50대 에세이를 구상하던 초기 단계였다.

 

내가 특별히 백범을 좋아해서? 별로 그런 건 아니다. 사실 잘 모른다. 그냥, 남들 아는 정도. 특별히 더 많이 알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리고 엄청나게 좋아하거나 흠모하거나, 그렇지도 않다.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열성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은.

 

이상하게 김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좀 있었다. 테러리스트라서 싫다는 의견이 제일 많았고, 과대포장되었다는 의견이 일부. 그리고 무능해서 싫다는 것도. 다 맞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백범 일지가 과연 김구가 쓴 것이겠냐? , 이광수가 적당히 넣을 거 넣고 뺄 거 뺀, 춘원의 작품일 뿐이라는... 그럼 다 개구라?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여간 이 시점에 내가 백범 일지를 다시 읽고 뭔가 생각을 다시 정리해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문화가 강성한 나라이면 좋겠다는 백범의 '내가 만들고 싶은 나라' 21세기적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내가 아는 많은 사람의 글들은 20세기적이거나, 20세기적으로 해석되었다. 대부분의 냉전의 산물이거나 독재 시대의 산물이다. 혹은 동구가 붕괴하기 이전에 팽팽하던 시절의 산물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들을 수용하던 생각 역시, 군인들과의 싸움 속에서 생겨난 것들이다.

 

한국의 역사는 언제 결정적으로 페이지가 넘어갔을까?

 

아주 주관적으로만 생각해보면, 최순실이 이게 민주주의냐고 소리칠 때 청소부 아줌마가 "염병하네"라고 외치던 날, 우리는 이제 다른 시대로 넘어온 것 같다. 최순실에게 당당하게 염병하네, 과연 누가 외칠 수 있었겠나?

 

이제 한국의 역사는 그 뒤로는 가지 않을 것 같다. 뒤로 가지 않는다는 것이, 꼭 좋아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만은 않는다. "염병하네", 그 상태에서 아주 오랜 기간 머물러 있을지도 모른다.

 

50대 에세이를 굳이 쓰기로 마음 먹고, 그것도 아주 공개적인 형태로 쓰기로 마음 먹은 것은, "염병하네"가 최순실만이 아니라 나를 향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그리고 나는 청소 아줌마 뒤로 싹 숨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저 거침없는 염병하네, 그건 나를 향한 것은 아마 아닐 것이야...

 

그래서, 염병하네...

 

내 안에 있는 20세기적인 것들을 한 번쯤, 나도 탈탈 털어내고 싶었다. 그게 50대 에세이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진짜 배경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면?

 

마치, 백범이 내가 원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이렇게 쓴 것처럼, 나도 내 생각을 정리해서 하나를 써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 모두 이런 글을 한 번쯤은 써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야, 그럼! 네가 원하는 것은?

 

아니, 나는 원하는 건 따로 없고, 그저... 이런 것이 개수작이다.

 

개수작과의 결별을 위해서는, 고통스럽고 별로 안 쓰고 싶고, 그리고 남들이 싫어할지 몰라도,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라는 글을 꼭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 하면? 나머지 50년의 삶이 다시 개수작이 될 수도 있다. 그저 하던 대로... 내가 제일 잘 나가, 아니 잘 나갔어, 이런 거적데기 같은 소리나 하면서,

 

그게 이 김구 패로디를 써보고 싶은 이유다.

 

그렇지만 막상 쓸려니까, 역시 무섭다. 그래서 계속 시간을 끌고, 또 시간을 끈다. 백범 일지를 다시 며칠에 걸쳐서 읽은 것, 이런 게 기본적으로는 개수작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읽었나, 그랬다. 당연히 기억 잘 안 나지...

 

그래서 다시 읽어보기는 해야 할 것 같은. 형식적으로는 맞는 얘기인데, 요런 게 개수작이다. 바로 써도 되는 데, 그래도 시간을 좀 끌고, 도망가고 싶은.

 

그러니까 지금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서 내가 진짜 쓰고 싶은 것 그리고 그 배경, 그런 것을 다시 생각하는 것도, 역시 개수작이다.

 

그리고 지금은 오후 1시 반, 점심을 먹어야겠다고 몸에서 나는 신호에 뇌가 열심히 반응하는 것, 이런 것도 개수작이다. 생각은 물론이고, 내 몸도 알아서 개수작을 한다.

 

그래서 이 글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언제 이 개수작이 끝나고 글을 쓰기 시작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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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에세이 스무 번째 글 끝냈다. 사실상 전체의 결론이다. a4 100장을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119장에서 끝났다. 뒤에 하나 덧붙이는 글은 김구 패로디를 해볼려고. 어떤 형식으로 할지는 생각해둔 게 없는데, 어떤 내용으로 할지는 처음부터 정해둔 것이 있고,

50대 에세이를 처음 시작할 때에는 내가 이렇게 50대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을 줄 몰랐다. 준비해 둔 얘기를 10개도 넘게 뺐다. 몇 개는 여기저기 쑤셔넣었는데, 도저히 쑤셔넣을 수 없는 것들은 다음 기회에.

마지막 글은 '인생은 비즈니스가 아니다'와 '바쁘면 지는 거다', 두 개의 제목이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였다. 결국은 미래 가치에 관한 얘기이고 김구 패로디와 연결되는, '바쁘면 지는 거다', 이게 마지막 글이 되었다.

김구의 삶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남들 아는 것보다 더 아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알던 사람들 중에서, 21세기적 가치를 가진 사람의 가장 대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그에 관한 패로디를 써보겠다는 것은, 글을 시작하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다.

영화 <대장 김창수>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이래저래 다섯 번 정도 본 것 같다. 왜 망했을까?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나도 김구를 한 번 다루어보고 싶어졌다.

하여간 글 하나를 남겨놓고 있기는 하지만, 또 하나의 책이 끝났다. 준비 한 것부터 치면 1년 반 정도 되는 것 같다. 책이 끝나면, 정신적으로 탈진 상태가 된다. 알던 것을 다 꺼집어내고 나니까, 이제 뭐하지? 그런 느낌이 잠시...

다음 에세이집은? 아무 생각 없다. 육아 에세이를 준비할 때에는 벌써 50대 에세이에 대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두 책 사이에 나눌 것과 넘길 것, 보완 효과를 보일 것, 그런 것들을 좀 염두에 두었다.

이번에는, 그냥 다 털어넣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다음 주제가 아직 준비가 안 되어서 그렇다. 내 삶이, 아이 키우다 보니 그야말로 하루 버티고 또 다른 하루를 맞게 되는 삶이다.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내년에 뭐할지, 나도 전혀 모른다. 아내가 많은 것을 결정하고, 나는 그냥 맞춘다.

내가 결정한 것은, 별 거 없다. 일본어를 배워야겠다... 근데 어디서 어떻게? 모르겠다. 천천히 생각해보고.

요즘은 내가 드물게 속 편한 시기다. 이 어려운 시기에, 나만 혼자 이렇게 편하게 살아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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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에세이, 열 여덟번째 글 초고 끝냈다.'참으면 암 된다 - 적당주의와 뻔뻐니즘'... 요런 제목이다. 아마 다른 부제를 달았다면, '나는 이청준에게 무엇을 배웠나', 요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이지만, 좀 아플 듯한 비판도 포함시켰다. 뺄까 말까, 마지막까지 고민을 했는데, 넣는 것이 낳을 듯 싶다. 잘 아는 사람을 비판할 때, 여전히 힘들다. 빼는 거야 마지막 순간에 빼도 되니까, 일단은 넣어놓고... 마지막 문단은, 적당하게 마무리지었다.

"50대, 나는 더욱 적당히 살아갈 것이다. 사랑도 적당히, 분노도 적당히, 하는 일도 적당히, 나는 적당주의가 체질이다. 내가 너무 열심히 살려고 하면 내 안의 암세포들도 겁나게 열심히 살려고 할 것이다. 어이, 암세포 친구, 대충대충 하지? 그들에게 얘기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너무 완벽하게 감정을 조절하고, 싫은 소리도 안 하고 심통도 안 하고, 그렇게는 안 하려고 한다. 너무 참으면, 암 된다. 이제 그냥 참으면서 속으로 삭히는 것도 적당히 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주변의 동료들을 위해서, 심통은 딱 5분만, 그 이상 길게 끌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리고 일년에 딱 몇 번, 나는 나를 믿는다고 말하는 뻔뻔한 짓을 하게 될 것이다. 나의 뻔뻐니즘이다. 그 뻔뻔한 짓을 안 해도 되는 순간, 그게 나의 경제활동이 정지하는 날일 것이다. 죽을 때까지 일하는 것? 미쳤나, 내가 그렇게 살게. 그것도 늙어서 생기는 집착이다. 적당히 하고, 적당할 때, "이만하면 적당하다", 그렇게 말하고 물러서는 것이 좋은 삶이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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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에세이, 열 일곱번째 글 끝냈다. '기다려도 행복은 오지 않는다'고 제목을 달았다.

"사랑에 목숨을 걸 필요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행복에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행복에 목숨을 걸면, 생명은 늘어난다."

이 글은 이런 문장으로 끝난다. 내가 쓰지 않는 오글거리는 방식으로 쓰는 게 원래의 목표였다. 역시 오글거린다. 그걸 참는 게 행복이다. 다음 글은, '참으면 암 된다 - 적당주의와 뻔뻐니즘'이라는 제목을 달려고 한다. 이 글은 마지막 문장이 먼저 생각났던 글이다. "마지막 순간에, 나를 믿는 수밖에 없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뻔뻐니즘이다. 뭔가 만드는 일, 마지막에 나를 믿지 않으면 완성을 할 수가 없다. 물론 믿기지 않는다. 그래도 믿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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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에세이, 열 여섯번째 글 끝냈다. 책의 제목이자, 마지막 장인 4장의 제목이자, 이 글의 제목은 '달달한 50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지었다. 권총 자살한 프랑스 총리에 대한 얘기로 글을 시작했다. 확 무겁게 만들고, 그걸 받아서 몇 번을 꺾었다. 50이라는 나이가 그렇다. 친구의 죽음이나 총리의 권총 자살이나, 그냥 삶의 한부분처럼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너, 그러다 진짜 뒤진다... 이 얘기도 그냥 부드럽게 할 수 있다.

"나는 혹시라도 내가 하는 말에 독설이라도 섞여 있을까 봐, 3살 아기에게 생선 가시 발라주듯이 꼼꼼하게 발라내기 시작했다. 뒤돌아서면서 "근데" 하면서 야박하게 한 마디 하는 거, 그 버릇이 제일 고치기 어려웠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집에서 기다리는 아이들 생각하면서 그냥 씩씩하게 전진하는 것, 한 마디 더 하는 버릇을 겨우겨우 고쳐가는 중이다. 하나마나한 얘기를 꼭 하고야 마는 우리들의 개수작, 이제는 그 개수작과 결별할 시간이다. 아직도 우리는 50년이나 살아야 한다. 이제는 좀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래서 언젠가 '달달한 50대'가 우리들의 새 이름이 되었으면 좋겠다. 개저씨, 꼰데, 386. 86그룹, 다 '알흠답지' 못한 이름들이다. 우리, 같이 좀 살자. 개수작, 사요나라, 아디오스, 아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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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에세이, 마지막 장인 4장의 글 리스트를 확정했다. 포맷상, 다섯 개씩 넣었는데, 여기는 여섯 개. 줄이고 줄이는데, 너무 아까워서 도저히 빼지 못하는 것들만 살아남았다. 여섯 번째 글은, 당연히 김구 선생 패로디다. 제목만 패로디하고, 문체까지 패로디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다섯 개는 먼저 쓰고, 여섯 번째는 김구 선생 자서전을 다시 한 번 꼼꼼이 보고 쓸 생각이다. 너무 어렸을 때 읽어서 느낌이 없다.

4번에 있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남만 가득한 곳으로", 요 얘기는 아주 어려운 얘기가 나올 것 같다. 나는 가능한 한 쉽게 할 생각이지만, 이번에는 노마디즘 얘기를 한 번 할까 싶다.

글 숫자는 하나 늘이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좀 짧게 끊어가는 식으로 하려고 한다. 형식 실험도 할 수 있는 한, 좀 해보고...

1. 달달한 50대, 우리들의 새 이름
2. 행복에 복리 이자를 붙이는 법 
3. 참으면 암 된다 - 적당주의와 뻔뻔주의
4.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남만 가득한 곳으로
5. 버킷 리스트는 바께쓰에
6.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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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둘째 어린이집 오리엔테이션 중이다. 어쨌든 둘째도 어린이집을 옮기기는 하나보다. 30분 거리에 있는 어린이집 두 군데를 아침 저녁으로 뛰면서, 진짜로 캑캑. 게다가 옮긴 큰 애는 매일 같이 울어서, 오후 2시에 데리고 왔다. 이 나이에 뭔 짓인가 싶었다. 이제 요번 달로 이 지랄도 끝나나보다. 사실, 멍하다. 아침에 아내 지하철역, 그리고 순서대로 돌아서 두 군데 어린이집. 하루는 정말 일어나기 싫었는데, 그래도 5분만에 억지로 정신을 차리고. 지난 주에 보니까 입안이 헐었다.

요즘 오는 전화는 잘 받는다. 하는 일이 별로 없으니. 다들 노니까 좋냐고 한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가정주부들이 이런 전화 받고 심통이 났을까, 상상이 간다. 바로 앞에 있었으면 소주병으로 머리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 성숙한 50대. 그려, 잘 지내.

이 생활도 다음 주로 쫑이다. 어린이집 두 군데를 도는 건 이젠 안 해도 된다. 한 군데만. 둘째가 다시 적응하는 기간이 있어서 한동안 오전에 다시 데리고 오는 지옥의 일정이 있기는 하지만, 시간은 금방 간다. 이젠 곧 봄이다.

연애도 별로 한 적이 없어서 손 잡고 어디 걸어가고, 그런 기억도 거의 없다. 애들 손 잡고 엄청나게 빨빨거리고 다닌다. 둘째 손 잡으면 큰 애가 자기도 손 잡아 달란다. 아빠 가방 들었잖아. 그래도...

어저께, 아내가 큰 애 하원 시켜준다는 얘기를 했었나보다.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갔는데, 날 보더니 운다. 엄마 안 와? 그래, 그럼 더 있다 와. 핑... 나는 빛의 속도로 다시 돌아나서려는데, 큰 애가 웃는다. 집에 가자... 하여간 일곱 살이긴 하지만, 대가리 핑핑 돈다. 눈치밥도 많이 늘었다.

이렇게 한 달을 지내니까, 예전에는 없던 생각 하나가 생겼다.

내가 살아있구나...

살아있기는 한가보다, 고통이 느껴지는 걸 보니. 그렇게 또 하나의 겨울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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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에세이는 이제 거의 마무리 분위기다. 일단 공개는 여기까지로. 나도 비장의 꽁수 하나는 남겨둬야. 4장 제목은 '달달한 50대'로 할 생각이고, 책 전체 제목도 '달달한 50대'. 삶의 기조를 명랑으로 정한 뒤, 거의 20년만에 달달함으로 바꾸는 거다. 30대 때에는 나만 명랑해도 되는데, 그러기에는 50대에는 조금 더 무거움이 있는 것 같다. 자 같이 손잡고 달달.

원래 4장 제목은 '개수작과의 결별'로 잡았는데, 이런 내가 개수작하고 결별을 못하겠는. 술도 팍 끊지는 못하겠고, 조금씩은 마셔야겠는.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그것도 암이 된다.

옛날부터 나는 근엄한 거, 확 머리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별 것도 없는데, 왜들 글케 폼들은 잡는지. 막상 내가 폼 잡을 나이가 되니까, 야야, 난 이거 못하겠다...

몇 년 전에 삶이 너무너무 무료해서, 국방대학원에 진짜로 가볼까 생각을 했었다. 예전에 재밌게 보던 해전사 전공으로. 물어보니까, 내가 국방대학원 가면 경력상, 안 받아줄 수는 없는데, 군인 아저씨들 충격받아서 곤란하다는. 그래도 악착같이, 좀 받아주세요, 갈까 싶었는데... 얼래, 갑자기 이전을 가버린다나? 논산인가... 집 근처라서, 악착같이 국방대학원 가려고 했었다. 결단코, 국방대학원 나 때문에 갑자기 이전 결정 난 것은 아니다. 아니, 장군님들 추천서 받아온다니까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군인 아우들 거느리고 국방대학원 모임 회장한 양반이 있었다.

국방대학원의 면학 분위기를 좀 명랑하게 바꿔보고 싶었는데, 후루룩, 저희 이사가요, 미안.

하여간 나머지 글들은, 이를 악물고 명랑 분위기로. 다 필요 없다, 웃는 게 남는 거다. 못 웃기면 내가 여기서 칵 디져버릴랑께...

웃기기는 어렵지만, 명랑분위기로 최대한 가보려고 한다. 그리하여 확 달려가기 전에, 오늘 저녁은 며칠 참았으니 술부터 한 잔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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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태학의 기본은 머리 수 세기다. 시간이 흐르면서 개체수가 어떻게 변해가는지가 기본 중의 기본이다. 피식자와 포식자의 관계, 흔히 프리데이터-프레이 모델이라고 부르는 가장 대표적인 모델인 로테카-볼태라 모델인데, 정말로 아름다운 곡선들이 나온다. 이 세계에서는 늑대가 토끼를 잡아먹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 얼마나 시스템이 오래 갈 것인가, 그것만이 문제다. 동물 생태계에는 노화 현상은 없고, 보통은 사이즈에 대한 얘기만 한다. 가장 쉽게 동물 생태계의 사이즈를 보는 것은 최상위 포식자의 존재 유무다. 호랑이나 곰이 최상위 포식자로 존재하는 시스템의 크기가 가장 크다. 늑대가 최상위인 곳은 그보다 사이즈가 작다. 멧돼지가 최고의 포식자인 생태계는, 정말로 아주 아주 작은 스몰 사이즈다. 고라니인 경우는? 포식자 없는 동물 생태계는 보존 지역일 뿐이다. 그렇다고 곰을 방사한다는 발상은, 이건 좀 기형적이다. 곰이 산다고 해서 동물 생태계 사이즈가 더 커지지는 않는다.

 

시스템의 변화하는 것과 개체의 변화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개별적 존재는 공룡처럼 계속 자라는 것 즉 정비례 곡선인 경우와 뱀 같은 파충류처럼 계단식 성장을 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죽을 때까지 자란다. 그리고 포유류는 로지스틱 함수, 역으로 된 S자 곡선에 따라 일정 수준이 지나면 성장을 멈춘다. 경제가 포유류의 로지스틱처럼 생겼느냐 아니면 공룡처럼 순증형이냐, 오래 된 논쟁이다. <국부론>의 아담 스미스는 로지스틱처럼 생겼다고 썼다. 물론 <국부론>의 이 부분까지 읽는 사람은 전세계적으로 몇 명 없다. 자연에 존재하는 많은 유기체들의 경제학자들이 쿠츠네츠 함수라고 부르는 역 U자형, 엎어높은 컴()처럼 생긴 모습을 갖는다. 열심히 올라가다가 피크점에 달하면 내려온다. 이런 피크점이 한 번 더 있으면 쌍봉형 모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많은 자연계의 현상은 피크점에 도달하면 내려오게 된다.

 

인간의 삶이 꼭 피크점이 하나인 것만은 아니다. 2 전성기 같은 게 있을 수도 있다. 프로야구 투수들은 나이 먹어서 속도를 포기하고 제구력이나 변화구 구종 추가 같은 방식으로 두 번째 전성기를 맞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야구 선수는 되는데, 사람은 안 돼? 물론 된다. 사람의 삶은 자연 현상보다는 복잡할 수 있다. 어쩌면 인생, 그 자체가 생태학이나 경제학보다 더 복잡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학문에서는 그런 개인이 가지고 있는 복합성은 무시한다. 특출난 개인이 있거나 특별한 개인이 있더라도 시스템의 운명에 큰 차이가 있거나 변화가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한 인생을 제대로 관찰하는 데 연구자 한 명의 인생만으로도 부족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좋은 줄 알아도 못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의 삶을 세밀하게 관찰한 소설이 경제학 보다 더 낫다는 말에는 동의!

 

인간을 변화하는 하나의 시스템이라고 보고, 피크점이라는 기준을 들이대면 어떻게 보일까? 20대의 특징은 아름다움일 것 같다.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다. 드문 경우라고 알고 있지만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키가 자랐다. 꽤 자랐다. 심지어는 유학 가서도 약간 자랐다. 내가 아름다웠던 순간이 있다면, 그 시절일 것이다. 20대에 성장과 노화가 엇갈리는 선이 온다. 더 이상 자라지는 않지만 아직 늙은 것은 아닌, 그 선이 교차하는 순간, 모든 사람은 아찔하도록 아름답다. 그 순간의 생각도 예리할 정도로 아름답다. 성장과 노화의 교차선, 모든 감각이 최고조에 달하고, 그 불균형이 극도로 달했을 때, 사람은 아름다워지는 것 같다. MB 20대 얼굴 사진 검색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도 20대에는 아름다웠을까? 가끔 현대건설 대표로 행사에 참석해서 순실이 얼굴과 교차로 나온 MB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 그 순간의 그의 모습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30대 한국인은 머리가 피크에 도달하는 것 같다. 신체의 모든 기능이 노화하기 시작했어도 머리 만큼은 더 발달하는 것 같다. 몸이 위축되기 시작하니까, 모든 에너지를 뇌로 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도 살아야겠다! 심지어 머리카락을 새로 만들 힘까지 뇌로 보내는 것 같다. 탈모가 시작된다. 차라리 머리를 좀 덜 쓰고, 더 많은 에너지를 모근으로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불수의근이 있는 것처럼, 자꾸 머리카락이 머리를 위해서 희생한다. 30, 내면보다는 외면을 사람들이 더 중요하게 여긴다. 만약 우리가 그 나이에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어떨까? 소용 없는 회상이다. 20대에는 술을 마시면 토한다. 30대에는 이제 토하는 일도 힘이 없어서 못한다. 술 먹고 토하는 것, 가장 아름다운 나이인 20대의 특권이다. 어지간히 먹어서는, 육체가 배출도 못하고, 그냥 버텨, 나도 힘들어... 위장과 식도도 더 이상 토악질을 하기에는 너무 늙어버렸다. 그 나이가 대충 30대다. 위장이 남은 에너지를 전부 머리로 보낸다. , 같이 좀 살자, 술 좀 그만 먹어, 생각 좀 해라. 몸의 다른 부위가 에너지를 더 많이 보내면 보낼수록, 번민이 많아진 머리는 자꾸 술집으로 몸을 이끈다. 그렇게 먹을 수 없는데도 30대가 죽어라고 술을 먹는 것, 머리가 피크에 달하는 시기라서 그렇다. 천재들이 보통 33세에 죽는다. 예수도 그랬고, 모차르트도 그랬다. 하다못해 우리들에게 어린이라는 단어를 만들어주고 색동회까지 만들어주신 소파 방정환도 33세에 죽었다. 진짜 천재가 모든 것을 이루고 떠나는 나이, 그게 30대다. 40, 안스럽지만 이제 천재들은 이미 사라졌고, 그냥 남은 사람들끼리 이렇게 저렇게 세상을 꾸려가는 것 아닌가?

 

30이 지나도 머리가 계속 좋아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 그건 머리가 아주 나쁘거나, 한국 사람이 아니다. 정상적으로 술을 마시는 한국인의 머리는 30대가 피크다. 그리고 점점 나빠진다. 그걸 감안하고 계획을 세워야 하고, 그걸 염두에 두면서 작전을 짜야 한다. 나이 먹으면 이해력이 좋아진다느니, 지혜가 늘어난다느니, 깨달음이 생겼다느니, 그런 얘기들을 한다. 원래 늙으면 그렇게 말이 맞아지는 법이다. 두뇌의 피크치는 30대에 지난다. 싫어도 우리 모두는 언젠가 대머리가 된다. 결혼하기 전에 대머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면 남자들은 영혼도 팔 수 있다. 그리고 탈모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추거나, 이미 진행된 탈모에 자기 마음을 맞추면서 살아야 한다. 아니면 정말 괜찮은 가발을 쓰고 정서를 거기에 맞추거나. 머리도 마찬가지다. 점점 안 좋아지는 머리에 맞추면서 사는 거지, 자기만 혼자서 머리가 더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인생만 고달파진다.

 

40에는 무엇이 피크에 달할까? 지표상으로는 한국 직장인의 연봉이 최고치에 달한다. 50대 평균 보다는 40대 평균치가 높다. 그렇지만 이건 경제적인 것이다. 신체적으로 40대가 최고치에 달하는 것은 밸런스일 것 같다. 몸도 적당히 노화되기 시작했고, 머리도 상당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퇴화의 시작이지, 퇴행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인간의 삶이 가장 균형적이고, 정서적으로도 안정된 나이일 것이다. 최고의 밸런스를 가질 나이다. 40대 후반 혹은 50대 초반, 호르몬이 분비에 변화가 오게 된다. 남자들은 익숙하지 않은 여성 호르몬의 분비로 예상치 못했던 마음의 동요를 겪는다. 여성들도 여성 호르몬의 감소로 밸러스가 갑자기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 전까지, 인간의 육체는 최고의 밸런스를 갖는다. 지덕체, 문무겸비, 외유내강, 혼연일체, 이렇게 전통적으로 좋다고 하는 덕목들이 대부분 밸런스에 관한 얘기다. 40대에 인간이라는 동물은 최적의 밸런스를 갖는다. 대통령하기 딱 좋은 나이다. 캐네디가 43살에 대통령이 되었다. 그 시절 미국, 정말 복 받은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40대 총리는 여전히 계속 등장한다.

 

, 그렇다면 50대에는 무엇이 최고조에 달할까? 육체적으로만 보면, 흰머리가 최고조에 달한다.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있던 치아는 이미 더 이상 버팉 수 없어서 몇 개는 이별했다. , 다리, 근육, 연골, 관절, 아직 버티고 있는 것을 감사하면서 고맙게 쓸 나이다. 아직 치매는 본격 오지 않았더라도, 부분적인 알콜성 치매는 다들 조금씩 가지고 있다. 머리를 얘기하기에는 이제는 진짜 쑥스러운 나이다. 두뇌회전 보다는 치매가 훨씬 더 가까운 곳에 있다. 그래도 아직 사람들이 봐줄만한 것은 흰 머리다. 그 나이에도 인격수련이 덜 되고, 20대 때 했던 것처럼 민감하게 여기저기 참견질 하면 자기 성질에 자기 머리가 못 견디고, 아디오스! 60대에 흰머리라도 남아있던 시절을 못 견디게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경제적 지표상으로는 50대가 자산상으로는 피크치에 달한다. 상대적으로 재산은 좀 많다. 그리고 아직 빚이 좀 적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 않는다. 한국의 60대의 경제 지표는 소득이 급격히 느는 대신에 부채가 빠른 속도로 늘어난다. 일본의 60대와는 다르다. 물론 지금 60대가 그렇다는 얘기고, 지금의 50대가 10년 후일 때 경제지표가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 이론적으로만 보장이 없다는 얘기다. 지금 50대 하는 것만 외형적으로 봐서는, 10년 후에 이 추세가 더 나빠지면 나빠지지, 좋아질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지나간 20대를 그리워하고, 오지 않을 30대를 그리워할 것인가? 흰머리라도 남았던 이 시기를 그래도 가장 좋았던 시기라고 회상하면서 앞으로 딱 살았던 만큼, 50년을 더 살게 된다. 할렐루야, 아멘!

 

2.

학부 1학년 때, 우리 친구들은 경제학이라는 이 이상한 학문에 대해서 푸념이 많았다. 너무 평균치가 많고, 우리의 상식과는 다른 결론을 답이라고 써야 학점이 나왔다. 물론 완전 보수 쪽 선생님이라서 자기 수 틀리면 D학점과 F학점을 남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꼭 그런 거 아니라도, 직관적이지도 않고, 경험적 지식과는 다른 내용이 너무 많았다. 그나마 선형대수나 수리통계학 같은 수학 많이 들어간 과목에서 나오는 증명식 같은 게 예술적이라고 위안을 삼기도 했다. 수학 증명식이지만, 우린 대부분 일단 외워놓고 언젠가 이해 갈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버텼다. 사회학과나 정외과 친구들은 무슨 수학을 그렇게 많이 하냐고 놀려댔다. 그 시절에는 수학 많이 나오는 과목이 제일 좋았다. 그냥 풀면 점수 나오는 거라서, "저는 좌파 아니예요", 이렇게 군사정부 시절에 서술식 답안에 사상 고백을 할 일이 없었다. 생각하는 대로 쓰라고 해놓고서는 생각하는 대로 쓰면 너무 점수를 안 줬다.

 

한 번은 점수가 너무 이상해서 교수를 찾아갔다. 주섬주섬, 답안지를 꺼내시더니, 나에게 답안지를 보여주셨다. 채점하다 말고 빨간펜으로 죽 그어진 긴 줄이 보였다. 그나마 열심히 써서 이 점수라도 준 거라는 말도 있었다. 그가 나를 미워한 것은 아니다. 내 생각을 미워한 것일 뿐이다. 선생님은 나에게 회개하라는 얘기를 하셨다. 날 사랑해서 이 점수를 주는 것이라는 말도 하셨고, 교회에 같이 가자고도 하셨다. 대학원에 꼭 들어오라는 말도 하셨다. 당신이 나를 빛으로 인도해준다고 하셨다. 점수는 최악이었지만, 그가 나를 미워해서 그런 얘기를 한 것이라는 정도는 나도 이해했다. 아주 오랜 세월에 지난 후, 학회 끝나고 다시 만난 적이 있다. 나는 옛날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힐튼 호텔 로비에서 위스키 한 병을 사주셨다. 사람의 망각은 좋은 것이다. 나는 그 위스키를 마시고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그날 학교 정문으로 내려오면서 유학을 가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그날까지 모르고 있었다. , 내가 미션 스쿨에 다니고 있었지. 아멘! 주여 함께 하소서.

 

사람들은 자신은 평균치와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와 별로 다르지 않다. 물론 어떤 경우에도 극값 혹은 코너 솔류션 같은 것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건 극히 예외적이다. 그리고 육체의 연령은, 생각보다 과학적이다. 정신의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건 잠시간의 시간에 가능한 것이다. 뚱뚱해져 버린 프로야구 감독들, 그들의 정신력이 나만 못하겠는가? 4시간 넘게도 진행되는 프로야구를 월요일 빼고 매일매일 지켜보는 사람들, 정신력 갑이다. 우리 중에 프로야구 감독보다 정신력 뛰어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별로 없다고 본다.

 

육체적으로는 이미 하강 곡선이 예전에 지났고, 머리는 그나마 치매 안 걸린 것을 하루하루 감사하면서 살아야 하는 나이가 50이다. 나는 다르다? 다르지 않다. 전에 살았던 수많은 한국의 50대들이 그런 마음으로 살면서 사회적으로 손가락질 당하는 집단이 되었다. 평균치보다 아래인 것을 걱정해야지, 평균치보다 위인 것을 자랑할 나이는 아니다.

 

그렇게 약하게 마음을 먹으면 정신적으로 확 늘어버릴 것 같다는 사람을 보았다. 그 정도면 병이다. 탐욕, 욕심, 집착, 성욕, 많은 경우 이런 것들은 마음이 만드는 것이라서 육체의 피크가 지난 다음에도 계속 커질 수 있다. 좋은 것은 점점 사라지고, 나쁜 것은 점점 늘어나는 것, 우리가 MB와 함께 이미 한 번 보지 않았는가? 끝까지 20만원 밖에 없다고 하는 전두환과 함께 본 것 아닌가? 사람, 다 거기서 거기다. 이걸 받아들여야, 지금부터 15년 정도 남들한테 손가락질 안 받고 경제생활을 더 할 수 있게 된다.

 

3.

영화 <라디오 스타(2006)>는 흥행은 별로였지만, 최고 인기 예능방송과 제목 그대로 라디오 방송이라는 파생 상품을 만든 영화다. 한물 간 가수왕 박중훈과 그보다 더 한물 간 매니저 안성기의 얘기다. 영화 개봉 전 시사회 때 직업 매니저들을 많이 초청했다. 그들이 이 영화를 보고 폭포와 같은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 들었다. 실제 영화는 지역색 강한 얘기들을 만들자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졌지만, 실제 의도는 뒤에 숨어서 누군가를 돕는 매니저에 관한 이야기였다.

 

영화 초입에 결국 미사리 카페까지 몰린 박중훈이 결국 참지 못하고 난리를 친다. 카페 주인은 좀 화난 정도가 아니라 진짜로 많이 화가 난다. 예전의 동료였지만, 가수 최곤을 결국 경찰서 유치장까지 집어넣는다. 그래서 돈을 물어주고 나와야 하는 상황까지 내몰리게 된다. 이 때 카페 주인이 하는 말이 있다.

 

"한 물 갔으면 좀 찌그러지는 맛이 있어야지, 이거야 원."

 

성공한 사람들은 지금은 100세 시대라서, 나이도 옛날 같이 생각하면 안 된다는 얘기를 종종 한다. 그들 식으로 계산하면 아마 반 정도 나누면 될 것 같다. 40이면 옛날 20, 50이면 예전 25, 그렇다는 거다. 그런 식으로 계산하면 세종은 요즘 나이 90세에 한글을 창제하시고... 그런 식이면 이순신 장군은 104세에 명량해전을 이끄시고, 이렇다는 얘기다. 심심해서 하는 얘기지만, 하여간 전혀 말이 안 되는 얘기다. 그리고 과학적이지도 않다. 내가 50이니까 옛날 25세에 해당한다는 얘기인데, 정말로 꽃처럼 아름답던 나의 25세와 지금의 흰 머리 난 나를 어디를 놓고 비교한단 말인가! 내가 지금 아무리 늙고 한물갔다고 해도, 꽃처럼 아름답던 나의 젊은 시절에 대한 모욕이다. 50 50, 나의 나이는 호모 사피엔스 표준형이다. 경제 시스템이 변한다고 해서 인간의 육체도 변하지 않는다. 조금 더 처 먹어서 더 윤택하고, 더 부유하고 그래서 성인병에 더 많이 노출될 뿐이다.

 

이런 모습은 국회에 가면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만 45세 이하를 청년이라고 규정한다. 그 기준이라면, 내가 <88만원 세대>를 청년, 그야말로 당사자의 입장에서 썼다는 말이다. 그 때 내가 30대 후반이었지만, 우리 경제의 문제라고 생각은 했지, 바로 내 문제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나마 여기는 좀 낫다. 홍준표가 자유한국당 당대표 되면서 청년 당원의 기준으로 50세로 올렸다. 오매나야. 내가 지금 자유한국당으로 가면 바로 청년이 된다. 한국의 자유로운 보수들의 세계에서, '마음만 청춘'이 아니라 진짜로 내가 청년이 된다. 그런 정도의 시선이면, 43세에 대통령을 했던 미국의 케네디는 청년 정도가 아니라 보이스카우트 수준이다. 이게 지금의 현실이다. 농담 삼아 하는 얘기가 아니라 진짜로 정치 특히 보수 쪽 정치에서 현실의 기준이 이렇다. 한참 농업경제학 공부할 때 농촌 지역에 자주 갔었다. 농촌 지역에 청년회장이 50, 55, 이러는 것은 본 적이 있다. 자기들이 그 동네에서 가장 젊다는 거다. 다 웃었다. 농촌의 현실이 그렇기는 한데, 지금 국회의 현실도 그렇다. 대선에서 졌으면 좀 부드러워져야 할 것 같은데, 그들은 청년 기준을 그나마 50세로 올렸다. 영 목이 뻣뻣하다. 그나마 청년당원을 35세로 규정한 정의당이 좀 사회의 기준과 비슷하다.

기대수명과 고령화 추세만 보면 자신이 상대적으로 젊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진다. 마음은 알겠지만, 경제적 추세는 그와는 반대다. 이미 직장인 기준으로 40대의 평균 연봉이 50대보다 많다. 법적 정년은 60세까지 점차적으로 올라가겠지만, 실질적인 정년은 구조조정과 감원 등으로 더 내려올 것이다. 경제적 지위가 내려가면 곧이어 사회적 지위도 내려간다. 힘은 빠지지만 나이만 먹는, 그 현상이 점점 더 밑으로 내려온다.

 

국회의원이 되고 싶은 사람은 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도 된다. 딱 봐도 자기는 장관은 한 번 할 것 같은 사람도 다르게 생각해도 된다. 이런 데는 작동 방식 자체가 좀 다르다. 그러나 그 길이 아니라면, 50대가 갖는 최대의 덕목은 '찌그러지는 맛'이다. 한 물 갔으면 좀 찌그러지는 맛이 나는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기능을 좀 더 활용할 수 있다. 좀 찌그러면 10, 제대로 찌그러지면 15년은 자신이 하는 것과 비슷한 일을 더 일할 수 있다. 제도가 거기에 맞춰져서 변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후배들에게 찌그러진 모습을 보이기 싫은 사람들은 전혀 다른 직종에서 단순 기능직을 하게 된다. 거기서는 맘대로 해도 된다. 어차피 돈을 조금 준다. 그렇지만 그런 거 다 싫다고 창업하는 것 특히 프랜차이즈 창업은 진짜 아니다. 그냥 퇴직금과 모아놓은 돈을 가지고 비실비실, 시름시름 사는 것보다 더 나쁜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확률, 99.99%이다.

 

20대는 아름다운 시간이다. 행보나 보들래르처럼 아름다운 시간이다. 그들이 지금의 50대와 일하고 싶을까? 30대는 머리가 핑핑 도는 나이이다. 그들에게 머리 자랑하는 50대는, 병신이다. 40대는 마지막으로 밸런스가 딱 맞는 나이다. 다행스럽게도 대한민국 경제의 야전사령관들은 그들이다. 그래서 아직 우리가 망하지 않은 것이다. 이 사람들과 동료로, 수평으로 같이 일하는 것만이 50대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활용하는 길이다. 최고의 경쟁력은 찌그러지는 맛이다. 어차피 우리는 이미 아니면 수년 내에 한 번쯤 한 물 간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할 줄 모르거나 아무 실력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 실력은 자신이 찌그러질 때, 비로소 사회화되고 시장 안에서 상품화된다. 40대 이하, 전부 일하기 싫다는 50대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10년 조금 욕심 내면 15년 더 현역으로 일하고 싶다. 큰 돈 바라지도 않는다. 한 달에 100만원 이상, 이거면 만족한다. 내가 찌그러지기만 하면 그 일을 할 수 있는데, 내가 머리에 권총 맞았다고 큰 소리 치고, 자존심을 내세우겠는가? 당연히 나는 한 물 갔으니까, 찌그러진 맛이 나는 삶을 살도록 나를 디자인했다. 그래서 요즘 나와 일하는 에디터들의 만족도가 조금은 높아졌고, 같이 일하고 싶은 저자가 되었다. 나랑 고만고만한데 아직 덜 찌끄러진 저자들이 있다. 20, 30대 에디터들이 기피한다. 요즘 청년들은 예전과 많이 다르다. 어차피 그 돈 모아서 집 살 것도 아니니까, 싫으면 그만이다. 대표나 사장이 달래도, 싫으면 싫은 거다. 나도 그들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시절, 머리 팽팽 잘 돌아가는 시절, 왜 한 물 간 '꼰대들' 비위 맞추면서 인생을 낭비할 것인가? 나라도 그들 입장이면 그렇게 할 것이다. 자존심 세우고 단순 노무직으로 일하는 것과 찌그러진 맛을 경쟁력으로 내세우며 그래도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 뭐가 낫겠는가? 당연히 나는 찌그러진다.

 

50대가 가장 잘하는 것, 그건 찌그러지는 것이다. 육체적으로도 그렇고, 정신적으로도 그렇다. 화는 안 날까? 물론 나도 가끔은 화가 난다. 아직 덜 찌그러져서 그런 것이다. 나는 반성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돌아본다. 7, 5, 두 아이가 편하게 자는 모습을 보면 찌그러지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그래, 내가 죄가 많아서 남들 아이 다 낳을 때 팽팽 놀다가, 이제야 애를 키우니 좀 더 찌그러져야겠지... 그래도 사람 마음이라, 속에서 열불이 나기도 한다. 그럴 때는 이렇게 혼자 속삭인다.

 

그래 참, 지식을 개똥으로 알고, 문화를 자판기에 돈 넣으면 나오는 코카 콜라로 아는 나라에 살지. 문화강국을 얘기한 김구 선생은 총 맞아 돌아가셨고...

 

이렇게 생각하고, 소주 몇 잔 털어 마시면 다음 날 조금 더 부드럽게 찌그러질 수 있다.

 

50대의 찌그러지는 맛, 이것은 생태적으로,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최적의 해법이다. 아름다운 20대는 찌그러지면 안 된다. 그들에게는 날 것의 맛이 나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잘 돌아간다. 머리 잘 돌아가는 30대가 벌써 찌그러지면 안 된다. 기술강국, 너무 멀어진다. 밸런스의 40, 그들이 찌그러지면 한국 경제의 기초 밸런스가 무너진다. 과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너무 슬프거나 너무 노하지도 않는, 그 밸런스, 그게 현장 사령관인 한국 40대의 강점이다. 그들도 찌그러지면 안 된다. 50, 이제는 찌그러지는 맛 외에 다른 걸 하면 안 된다. 좀 찌그러져서, "여기서 저 그냥 이 일 하고 있을께요", 그런 게 서로를 위해서 좋다.

 

물론 부모가 손자에게 상가를 물려줄 수 있거나, 당장이라도 건물 몇 채를 물려줄 수 있다면 찌그러지지 않아도 좋다. 원래 개망나니는 50이 되어도 개망나니다. 그저, 남 때리고 다니지나 않는 것으로 만족하며, 국가 부가가치세와 재산세 납세에 도움을 주면 그만이다. 안 찌그러져도 된다. 그렇지만 난 그런 거 없다. 기꺼이 찌그러지고, 20대와 30, 청년들하고 기꺼이 같이 일을 할 것이다.

 

"선생님, 좀 귀여운 맛이 있어요."

 

정말 잘 찌그러지면 어느 날 술 마시다가 젊은 동료들이 이런 말을 하게 된다. 그날 나는 집에 와서 너무너무 기뻤다. 이제야 내가 좀 마음 속에서부터 제대로 찌그러지고 있구나. 그 때 내가 15년은 더 일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제일 먼저 한 게, 술을 좀 줄이기 시작했다. 100만원이라도 매달 벌 수 있고, 그걸 15, 내 경제생활은 보너스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보다는 돈을 더 많이 벌 때가 많다. 내 가슴 속에 자리잡으려던 암세포가 떨어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50대 한국인, 역시 찌그러지는 맛이 진정한 장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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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자들은 모이면 맨날 의리를 말한다. 그렇지만 의리 외치는 사람 중에서 정말로 의리 있는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다. 대개는 돈과 권력이 있을 때 의리이고, 그런 게 사라지면 의리도 봄날에 눈 녹듯이 사라진다. 어느덧 나도 박사 22년차가 되었다. 한국 사회의 한 가운데에서 현장들을 지켜보게 되었고, 그 시간도 이제 짧지는 않다. 내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40~50대 남자들은 보통은 의리가 없고, 그 나이의 여자들은 그보다는 의리가 있다. 한동안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어느덧 나이가 먹어서 정년이 차서 은퇴를 하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뭔가 한 자리 할 것 같거나, 교수 자리라도 좀 더 챙겨줄 것 같은 은퇴 교수 근처에는 남자 제자들이 여전히 길게 줄을 서 있다. 그렇지만 정말로 교과서 그대로 삶을 살았던, 우리 말 그대로 '훌륭하신 스승님'이 은퇴한 뒤에 주로 인사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여자 제자들이다. 의리? 남자들의 의리는 모르겠고, 여자들의 애틋함은 알겠다. 정치계나 언론계에서 별로 주목하지 않는 "우리 선생님이 측은해서", 여전히 스승의 날 찾아가는 여자 제자들이 마음 속에 간직한 애틋함, 그것만은 실체가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은퇴한 후 외롭게 보내는 교수들이 번거로운 일들을 부탁하기 위해서 나한테 많이 연락들을 하신다. 물론 나는 심통 난다. 아니 자기 제자들이 수 십 트럭은 될 사람이 애 보느라고 정신 없는 나한테 부탁을 하신담? 정부에서 일을 해서 그런지, 소리 소문 없이 딱 그 부탁한 일만 처리해주고, 아무 댓가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할아버지들 사이에서 조금 소문이 난 모양이다. 별 건 아닌 부탁들이다. 괜찮은 출판사를 소개해달라거나, 신문에 글을 쓰고 싶은데 좀 알아봐 달라거나, 뭐 그런 정도 수준이다. 좀 귀찮은 정도가 국회의원한테 얘기해달라고 하거나, 그런 정도다. 원래 내가 '아무 거나 상담소 소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별의별 부탁을 다 받으면서 살았다. 내가 성질이 정말로 지랄 맞은 게, 누군가 한테 머리를 숙이거나 내 부탁을 하는 것을 죽기 보다 싫어한다.

 

그런 영감님들한테 내가 조언하는 게, "선생님, 올 연말에는 망년회를 꼭 한 번 하세요", 그렇게 얘기한다. 그리고 나는 잊고 지내는데, 한참 후에 고마웠다는 얘기를 듣게 되고는 한다. 한국에서 제일 중요한 행사는, 남의 결혼식은 아니고, 지인의 부친이나 모친 장례식은 더더군다나 아니고, 회식도 아니다. 바로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하는 망년회다. 송년회, 아니다. 새로운 해를 맞기 위한 송년회는 성공한 사람들이나 힘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영광을 기원하면서 하는 행사다. 잘 나가는 조직이나 방송국에서 하는 '송년의 밤', 이런 데는 안 가도 된다. 그러나 그 해 망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서로 위로하는 망년회, 이건 안 가면 안 된다. 물론 친구들이나 동창들끼리 하는 망년회는 안 가도 된다. 50이 되어서 그거 다 가면, 간질환으로 진짜 망하게 된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망년회, 이것도 못하는 조직은 진짜로 몇 년 안에 망한다. 망한 건 망한 거고, 망한 사람들끼리 내년에는 이러지 말자고 서로 위로하는 망년회, 그 자리를 같이 한 사람들끼리는 울분을 서로 위로하며 의리가 생긴다. 그게 내가 아는 진짜 의리다. 그 의리는 오래 간다. 또 다른 한 해를 같이 지나갈 원동력이 된다.

 

지난 10년 동안, 기관장 끼고 보수 쪽 사람들은 연말이면 송년회 했다. 내 주변에는 누군가 잘리고, 지원 끊어져서 하던 일 엎어지기도 하고, 하다 못해 속상해서 병이라도 나서, 늘 연말이면 망년회였다. 그나마 망년회 아니었으면 여러 사람 정신질환으로 치료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래, 우린 그렇게 지난 10년을 버텼다.

 

2.

내가 망년회를 챙기기 시작한 것은 팀장 시절부터이다. 직급으로 하면 부장인데, 그 조직에서는 부장 보다는 팀장이 더 높았다. 보직 없는 부장도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과장이 팀장이고 그 밑에 부장이 올 수도 있지만, 2000년대 초반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팀장이기는 팀장이지만, 나는 나이도 어리고, 외부에서 온 사람이다. 게다가 언제 그만두고 나갈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아서, 나랑 잘 지내봐야 평생 자기 승진을 챙겨주지는 못할 거라고 모든 사람들이 생각했다.

 

대부분의 공조직들이 연초에 인사발령이 나기 때문에 연말이면 이제 자기가 그 팀에 남을지 옮길지, 어느 정도는 알게 된다. 나는 로비력 같은 게 아예 없었기 때문에 연말이면 잘 나가는 사람들은 승진할 팀으로 옮겨가고, 다른 팀장들이 끌어가지 않은 사람들 즉 남은 사람들 중심으로 나의 팀의 구성되었다. 물론 나도 틈틈이 반칙을 했다. 나는 경력직 공채를 열어서, 이렇게 저렇게 사람들을 중간에 보강했다. 그래서 연말이면 우리 팀은 아주 이질적인 사람들이 모여서 일하는 희한한 팀이 되고는 했다.

 

다른 팀은 그 시절, 모여서 룸살롱에 가기도 했다. 여직원들이 있는데도 여직원은 빼고 남자들끼리 룸살롱에 간다. 나는 룸살롱은 딱 질색이었다. 그래서 그 중간에 타협을 본 것이, 망년회 때에는 가고 싶은 데에 간다는 거였다. 모두가 원하는 타협점으로 의견을 모아진 것이 분당 나이트클럽이었다. 좀 더 나이가 많은 팀은 공무원들이 주로 가는 인덕원에 있는 카바레 같은 곳이었는데, 그래도 그 나이들은 아니라서 분당 나이트 클럽이 결국 모두가 원하는 타협점이 되었다. 나이트클럽은 당연히 법인 카드로 결재하는 사업비를 못 쓴다. 그래서 여름부터 볼펜 사고 샤프심 사라고 나오는 수용비를 모으기 시작했다. 목표는 백만 원이다. 택시비 같은 것을 조금씩 모으기도 했다. 그래도 그런 푼돈 모아서 백만 원을 만들려면 벅차다. 진짜 꼬깃꼬깃, 잔돈푼을 모아서 분당 나이트 클럽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돈들을 모았다. 나중에는 내가 그냥 정부에서 하는 일명 '쿠폰 프로젝트'를 하기도 했다. 몇 십만 원에서 몇 백만 원 수준으로 전문가가 정부에 제출하는 소형 보고서를 이렇게 부른다. 돈 세탁된 돈 백만 원, 그렇게 갔던 분당 나이트에서의 일탈, 그게 우리 팀의 망년회였다. 팀장이 총리실에 파견 나가 있던 시절에도 팀은 돌아갔다. 그 해에도 우리는 분당 나이트클럽에 갔다.

 

내가 떠난 후, 그들의 절반은 국제기구로 갔고, 또 다른 절반은 컨설팅 회사로 갔다. 그리고 몇 명은 끝까지 남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들에게 좋은 팀장은 아니었던 것 같다. 30대 초반의 그 시절은 나에게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갔고, 나도 더 이상 분당 나이트를 갈 일은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시절의 기억이 내가 매년 치루는 망년회에 노스탈지아처럼 남았다. 그 때도 연말이면 망했지만, 지금도 해마다 망한다. 너무 좋은 일들만 만발해서 나도 진짜로 새로 오는 한 해를 기쁘게 맞이할 순간, 송년회를 치룰 수 있게 되면 나도 망년회를 안 할 것 같다. 아직 그런 날이 오지는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안 올지도 모른다.

 

비주류 학자들이 모인 학회에서 우리는 젊었을 때, 동고독락이라는 농담을 많이 했다. 같이 고생을 하지만, 기쁨을 같이 나누기는 어려웠다. 누군가 높은 자리에 갈 때, 즐거움을 같이 나누려고 하면 큰 일 난다는 얘기를 농담처럼 했다. 어려움을 같이 나누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즐거움까지 같이 나누려면 정말로 대형 스캔들에 들어가게 된다. 그 얘기가 나에게는 일종의 DNA처럼 되었다. 슬프고 어려운 일을 같이 나누지,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같이 나누지는 않으려고 한다. 어쩌면 평생 나는 망년회만 공식행사로 하면서 살 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게 더 좋다. 망했을 때 망년회도 못하는 조직은, 진짜로 망한다. 그렇게 서로의 마음이 멀어지면, 아무 일도 같이 할 수 없다.

 

언젠가 내 건강이 더 나빠져서 정말로 1년에 딱 한 번만 술을 마셔야 할지도 모르는 순간이 올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그걸 망년회 때 마실 것이다. 만약에 아예 술을 못 마시게 되면? 그래도 그 해에 망한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하는 망년회는 계속 할 것 같다. 내 주변, 누군가는 망할 수밖에 없다.

 

3.

바캉스는 불어다. 바캉스 문화를 만든 것이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프랑스라서 그렇게 말한다. 아르바이트는 독일어다. 일본과 독일 사이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이 말이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프리랜서는 영어다. 거의 대부분의 모든 나라에서 프리랜서는 그냥 영어를 바로 쓴다. 미국식 특수 관계가 이 단어에 녹아 있다. 말 그대로 프리랜서를 혼자 일하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세상에 혼자 일하는 것은 없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더군다나 혼자 일하는 경우는 없다. 경제학 교과서에서 늘상 인용하는 가상의 인물, 로빈슨 크루우소우가 아니라면 이 사회에서 혼자 일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50이 되면 프리랜서로 전향하는 것을 생각하고, 조직에서 나와 혼자 일하는 것을 전제로 상상을 시작한다. 그건 미국식 노동체계에서 만들어낸 환상이고, 은유적 표현에 대한 오해다. 월급을 받지 않는다는 특수 고용이지, 혼자 일하는 것은 없다. 작업을 혼자 하는 스타일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게 혼자 일하는 것은 아니다. 혼자 일하는 것, 그건 착각이다. 자본주의는 돈에 의해서 움직인다. 그 얘기는 시장이 존재하고, 그 시장을 구성하고 작동시키는 각종 제도가 있다는 말이다. 극단적으로 혼자 일하는 경우의 예를 들자면, 돈 많은 사람의 완전한 개인 운전사 정도일 것이다. 개인 비서만 하더라도 여러 사람들과 연락하고 협조하면서 일을 하게 된다.

 

자유롭게 혼자 일한다, 이건 순전히 개인의 착각이다. 아무리 단순한 일이라도 최소 3~4명이 같이 호흡을 맞춰야 하고, 임시적인 관계라도 한 배를 타게 된다. 큰 조직에 속한 것과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혼자 일하는 것은 아니다. 일시적인 상하 관계가 형성될 수도 있고, 정말 지긋지긋한 갑을 관계에서 을 처지가 될 수도 있다. 차라리 혼자이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혼자 일하는 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큰 조직에서 일했든 작은 조직에서 일했든, 50대에는 자기가 속한 조직에서 한 번쯤은 떠나게 된다. 그리고 점점 더 작은 조직으로 그리고 점점 더 임시조직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곳에서 지나온 조직의 노스탈지아를 습관적으로 하는 것은 바보다. 지금 자기와 일하는 사람을 동료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노골적으로 하는 것은, 정말 바보다. 옛 애인의 좋은 점을 매번 말하는 바보와 연애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아내에게 첫사랑이 얼마나 멋있는지 얘기하는 것은 바보다. 그런 바보 같은 얘기를, 성공했던 남자들은 종종 한다. 자신이 얼마나 최고의 사람들하고 일했는지를 말하는 것은, 지금 "너희들이 영 못마땅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자신이 나온 좋은 고등학교, 좋은 대학에 대한 얘기는 동창회에서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지금 자신과 일하는 동료들에게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얘기다. 그런 마음이 아니었고,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면 더 바보다. 일부러 상처 줄 마음이 아니었는데, 지금 자신의 소중한 동료들에게 왜 상처 줄 얘기를 하는가?

 

매년 나는 망년회를 2~3개 정도 한다. 둘째가 폐렴으로 두 번째 병원에 입원하던 날, 나는 내가 하던 사회적 행위들을 다 접었다. 언제 아이 병원비 크게 내야 할지도 모르는 아빠가 하는 대부분의 사회적 행위는, 다 허례고 허식이다. 명절이면 후배 부부의 사과 과수원에서 지인들에게 보내던 선물을 끊었다. 건너건너서라도 결혼이나 상가 소식 같은 것을 알게 되면, 꼭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얼마씩 보내는 것도 끊었다. 아이 아픈 아빠가 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다 알게 되는 사람들의 생일 선물 같은 것도 일절 끊었다. 유일하게 안 끊은 것이 망년회다. 일은 같이 하는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 속에서 내가 아직도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망년회마다 약간씩 표현은 바뀌지만, 꼭 내가 하는 말이 있다.

 

"올해 저는 대한민국 최고인 여러분과 같이 일했습니다. 최고들과 같이 일해서 정말로 감사하고 즐거운 한 해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 얘기를 하려고 나는 매년 망년회를 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팀장 시절부터 그랬다. 나는 대한민국 최고가 아니지만, 나랑 일해준 사람들은 대한민국 최고라고 생각했다. 이건 진심이다. 물론 우리도 다 안다. 대한민국 최고는 지금 근사한 곳에서 송년회하고 있지, 이런 좁은 삼겹살 집에서 소주 잔 기울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늘 대한민국 최고와 일한다고 생각하면서 산다. 아주 많이 망한 해에는 아주 많이들 울었고, 별로 망하지 않은 해에는 몇 명만 그리고 조금만 울었다. 2012년 대선이 끝나고 나꼽살 망년회를 했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 김미화, 선대인 그리고 스탭들이 같이 했다. 그날 미화 누님이 울었다. 나도 많이 울었다. 그렇다. 망한 해에는 서로 모여서 같이 위로하면서 우는 거라도 같이 해야 한다. 그래야 그 다음에 안 망한다.

 

나는 늘 대한민국 최고와 일했다. 그래도 매년 망했다. 이건 누가 봐도, 내가 망해서 그런 거다. 나와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매 번 그들이 대한민국 최고라고 말하는 것은 서로 민망한 일이다. 1년에 한 번, 나는 그 얘기를 기회를 만든다. 공교롭게도 매년 우리는 망했다. 그래서 당신이 대한민국 최고라는 말을 듣고, 괜히 울음을 흘렸다. 망한 해에 망년회를 하면서 울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는 안다. 그는 언젠가 대한민국 최고가 될 거다. 내가 한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언젠가 같이 울던 그 동료들이 연말이면 송년회에 가고, 시상식에 가기를 나는 희망한다. 그렇지만 아마도 나는 오랫동안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지키면서, 망년회를 가질 것 같다. 어느덧 동고독락이 나의 좌우명이 되었다. 어려울 때 우리 같이 하고, 즐거울 때에는 정말로 온전히 네가 기뻐할 수 있으면 좋겠어.

 

망해가는 한국 출판계 그리고 더더욱 망한 한국 사회과학, 그 한 구석에 영광이 들 일은 별로 없다. 그렇지만 언젠가 한국 사회과학에 르네상스가 올 때까지, 나는 계속 망년회를 하고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언제나 나는 대한민국 최고와 일을 한다. 돌아보면, 언제나 나는 대한민국 최고들과 일을 했다. 그 중에는 가끔 대한민국 최고 울보와 최고 술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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