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6 12 29, 진짜로 낼 모래면 50이 될 그런 날이다. 오후에 두 아이 어린이집 하원 시키느라 잠시 주차하고 있다가 문자 메시지를 하나 받았다.

 

"황준욱 박사가 오늘 10:50 별세했습니다."

 

그가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은 지난 여름에 들었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람들 오지 않았으면 했다고 했다. 나보다 한 학번 위의 선배이다. 같이 공부했고, 같이 축구도 했다. 그는 진짜 마라도나처럼 축구를 잘 했다. 그리고 요리도 잘 했다. 가끔 내가 아이들한테 양 갈비 같은 것을 양념에 재워서 구워주는 적이 있다. 아이들도, 아내도, 아주 잘 먹는다. 그걸 준욱이형한테 배웠다. 유학생 살림이 그렇게 넉넉하지는 않은데, 그 양반은 조금 가격이 싼 양고기를 잘 썼다. 그 때 요리법을 배웠다. 그렇게 긴 기간은 아니지만, 총리실에도 같이 근무했었다. 거기 있는 줄 모르다가, 진짜로 우연히 만났다. DJ 시절, 전자정부 만든다고 한참 난리칠 때, 전자정부 담당 전문가로 파견 근무 나왔다. 경제 조직론을 그와 같이 공부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후에도 종종 만났다. 황준욱, 그는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게 많았다. 늘 나에게 뭔가 하자고 했었는데, 나는 늘 별 관심 없다고 했었다. 경제 전문대학원 같은 것을 만들어보고 싶어했고, 혁신형 교육기구 같은 것도 만들고 싶어했다. 나는 그냥, 내가 벌려놓은 일이나마 망가지지 않게 하느라고 늘 정신이 없었고, 새로운 일을 벌릴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전문 대학원은, 이미 만들어본 적이 있다. 한 번 해 본 일을 또 하는 데 그렇게 매력이 당기지는 않았다.

 

아내와 대학생 아들 하나를 두고, 친구처럼 평생을 살았던 선배가 그렇게 떠났다.

 

친구의 초상에 친구들이 모이는 것은 처음 한 경험은 아니다. 그렇지만 익숙해지지는 않는다. 마흔이 될 때에도 생각을 많이 했다. 진짜로 많이 했었다. 그 때는 뭘 해야겠다, 어떻게 살아야겠다, 욕망과 윤리 이런 것들 사이에서 삶을 돌아보는 게 그 시절에 많이 했던 생각이다. 이제 나도 낼 모래면 50, 쉰이 돤다. 막상 이 새로운 전환점이 되는 순간, 떠나버린 친구들에 대한 생각이 더 많이 난다. 상징적으로 그럴 것이라는 생각은 했었다. 50도 채우지 못하고 떠나간 친구들, 나는 뭔데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가나, 이런 생각도 했던 적이 있었다. 이런 얘기를, 진짜로 낼 모래면 50이 되는 날, 친구들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너나 나처럼, 대충 산 사람이 아니라 아니라 준욱이 형이 먼저 죽다니, ."

 

빈이 소주 한 잔 기울이면서 한 얘기다. 맞기는 맞는 말이다. 나는 대충 살았다. 그리고 나만큼이나 빈도 대충 살았다. 우리와는 다르게, 황준욱, 그는 부지런했고, 규칙적으로 살았고, 진짜로 열심히 살았다. 말도 잘 하고, 잘 생기고, 사람들도 잘 챙겼다. 그리고 축구도 잘 하고공부도 괜찮게 했다. 축구장에서든 삶의 현장에서든, 황준욱, 그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20대 중반 때, 같이 경제학 공부하던 세 명의 친구가 있었다. 나는 흔한 성씨는 아니지만, 다른 두 친구들에 비하면 희성 축에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다. 한 명이 빈, 또 다른 한 명이 옥이었다. 그 시절에는 빈은 결혼을 했었다. 우리는 빈네 집에 가서 밥 먹고, 나오면서 옥이랑 한 잔씩 더 했다. "한국에서 가장 희귀한 성씨는 볍씨", 이런 아재 개그가 우리들에게 따라 다니던 농담이었다. 볍씨가 성으로 있을 리가 없다. 기구하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한국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우씨, 빈씨, 옥씨가 파리까지 와서 그렇게 점심, 저녁 같이 먹으면서 어울려 다니는 게 남들 눈에는 기구해보였나 보다. 다들 가는 미국 유학을 안 가고 파리에서 모인 세 명의 희성 경제학도들게다가 옥은 변과 결혼을 했다. 희성 시리즈는 아직도 계속 된다. , , , 내 주변에 친한 친구들.

 

옥은 지방에서 오느라고 늦었고, 빈과 옥의 아내 변, 그렇게 소주 한 잔을 기울였다. 옥은 OECD에 근무하다가 지방대학 교수다 되었다. 빈은, 그냥 민간연구소에서 정년을 맞을까 하는데, 연구소에서 나이 많다고 자꾸 나가라고 해서 고민이 생겼다. 그의 아들은 이제 대학교 2학년이 된다. 우리 집 애들은, 이제 네 살, 여섯 살이 된다. 갈 길이 멀다. 옥은 조금 얌전하게 살았고, 빈과 나는, 대충 살았다. 정열적으로 살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50을 바라보는 지금,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대충 산 거다. 되면 되고, 말면 말고, 재밌으면 하고, 재미없으면 심통 부리고세 친구는 오랫동안 같이 모이지 못하다가 2년 전부터는 좀 자주 모였고, 자주 봤다. 술도 종종 했다. 옥은 이제 주량이 줄었다. 물론 줄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남들 보다는 많이 마신다.

 

우리가 그렇게 몰려 다닐 때, 바로 위의 선배가 황준욱이었다. 아직 결정된 것이 거의 없던 20대 경제학도들의 세상이 그렇게 소박하지만 꿈만은 찬란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을 어느덧 20년도 더 된 기억으로 돌리며, 상가집에서 소주 한 잔 기울이는 것, 그런 게 50대의 삶이라는 것을 너무 상징적으로 보게 된 것 같다.

 

상가집에서 나와서 빈과 감자탕 집에 들렀다. 소주 한 잔 하지 않고 그냥 집에 가기는 좀 그랬다. 상가집에서 각 1, 나와서 각 1, 여전히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더. 50이 되면 걱정이 줄어들까? 빈은 걱정이 없거나, 걱정이 있어도 하지를 않으면서 살았다. 산업은행을 그만두고 유학 길에 오를 때, 오죽 걱정이 많았겠나. 내 주변에 산업은행 출신들이 몇 명 있는데, 그 중에 삶이 가장 고달픈 것은 빈이었다. 그래도 그는 별로 걱정하지 않고, 어떻게 되겠지, 그러면서 살았다. 우리는 같이 50이 되었다. 빈도 이제는 걱정이 많아졌다.

 

(2016 12 30, 임시연습장 메모)

 

2.

빈의 아들은 아버지인 경제학도와는 달리 사회학도가 되었다. 빈의 아들이 수능시험 보는 전날 그의 아버지는 나와 술 마셨다. 아버지는 무덤덤하게 얘기했지만, 아들의 미래에 아무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아버지를 둔 덕에 아들이 엄청난 사교육을 받거나 그렇게 지내지는 않았다. 고대 합격이 발표되던 날, 그 날도 빈은 나와 술을 마셨다. 좋아했다.

 

옥의 일상적 삶은 잘 모른다. 별로 그렇게 지방대학도 아닌데, 지방대학 교수의 고충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한다. 정년이 보장된 것을 제외하면 엄청나게 다르게 살지는 않는다. 빈의 아들은 아직도 본 적이 없지만, 옥의 고등학생 딸은 그가 데리고 와서 본 적이 있다.

 

옥과 빈은 나와는 학교가 다르다. 나는 어차피 동문회나 동창회 같은 데는 거의 나가지 않지만, 그 친구들은 학교 모임 같은 데에 종종 나가는 모양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별로 볼 일이 없었다. 최근에는 종종 본다. 빈은 집이 아주 가깝지는 않지만, 진짜로 술 한 잔 먹고 싶을 때에는 같이 술 마신다. 옥은 지방에 있어서 그렇게 지나는 길에 만나기는 쉽지 않다. 벌려놓은 행사가 엉망이 되면서 급하게 대타가 필요할 때 나는 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후로는 옥도 가끔 '땜빵'을 나에게 부탁한다. 이래저래 30대에 비해서 좀 더 자주 보게 되었다.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의 박사들, 그냥 아무 것도 없이 보면 최상급 간판들을 달고 있다. 같이 공부하던, 가장 친한 친구들이다. 그래도 애 키우고, 먹고 살 것 걱정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예전처럼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몰려다니지는 않지만, 지금도 한국 경제나 우주의 미래 같은 얘기보다는 먹고 살고, 애들 키우는 그런 소소한 얘기들을 더 많이 한다. 서로 필요해서 만날까? 심심해서 만난다. 가끔은 그냥 이유 없이 옛날 얘기나 하거나 밑도 끝도 없이 술이나 같이 마실 사람들이 필요한 날이 있기는 하다.

 

또 다른 한편에는, 폼 나는 대학이나 남들이 알아주는 전공과는 아무 상관없이 또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그런 친구들이 있다. 친구는 다 같은 친구다. 동선이 겹쳐서 좀 더 자주 만나게 되는 친구가 있고, 그렇지 못한 친구가 있을 뿐이다. 시간은 많은 것을 무디게 만든다. 50, 다시는 안 본다고 했던 친구도 다시 보면 반갑다. 무슨 그렇게 결정적인 싸움이었다고, 이젠 기억도 잘 안 난다. 친구가 많은 게 재산이라고 하는 얘기가 있다. 그런 건 할 일 없는 사람들이 그냥 해보는 얘기다.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친구는 그냥 친구다.

 

50이라는 나이를 넘으면서, 우리는 훨씬 더 평등해졌다. 이제 언제 누구 죽을지 모른다. 이제는 누가 죽었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다. 그래서 친구들끼리 더 자주 만나게 될 것이다. 상가집에서 각 1, 상가에서 나와서 다시 각 1, 어차피 우리는 옛날 사람들이다. 다른 건 21세기로 넘어온다고 해도,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다른 방법을 모른다. 20세기식으로, 1. 그렇다고 더 위의 사람들처럼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는 것은 어색해할 정도로는 신세대다. 미국에서 X세대라는 개념이 처음 나왔을 때, 그게 딱 내 나이부터였다. 80년대, 군인들과 87년이라는 험한 시대를 보내면서 운동권이라는 특징을 가지게 되었지만, 세계적으로는 내 나이부터가 신세대다. 50이 되었지만, 곡을 하게 되지는 않는다. 아무리 친해도 그렇다. 그렇다고 국화꽃 하나 놓고 덤덤하고 쿨하게 나오기에는, 속에서는 울컥 하는 무엇인가가 남는다. 그래서 각 1, 다시 나와서 각 1, 참 올드하다.

 

3.

빈과 옥이 유학 시절의 친구라면, 그 뒤에도 친구가 된 사람들이 있다. 동선이 겹치기 때문에 아무래도 더 자주 만나게 된다. 공무원 중에도 진짜 친구들이 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같이 지냈는데, 친구가 안 되기도 어렵지 않은가. 지나보니까, 친구는 평생 생기는 것이다. 아마 60이 되거나 70이 되어도 친구가 생기고, 동무가 생기게 될 것이다. 사람 사는 건 그런 것 같다.

 

내 친구들 중에는 나에게 자신의 장례를 부탁하는 친구는 없다. 그 대신, 내 장례는 꼭 자기가 근사하게 치루어 주겠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친구들은 몇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더 오래 살 것 같단다. 나는 그 말이 맞다고는 생각한다. 태견하는 친구, 술이라고는 마시지 못하는 친구, 그리고 '운빨'이 너무 좋아서 지금까지 별 거 안 했는데도 잘 살아남은 친구, 아무래도 그들이 나보다는 오래 살 것 같다.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 그래도 내 장례를 자기들이 알아서 해주겠다고 해주는 꼴을 그냥 보고 있기는 좀 그렇다.

 

"난 장례 안 지내."

 

진심이다. 친척이라고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싸우는 게 너무 보기 싫어서 내 생일도 안 한다. 나는 서대문구에 있는 안산 근처에서 태어났으니까, 죽으면 안산 아니면 아무 산이나 대충 뿌려달라고 할 것이다. 기일은 물론, 일절 아무 일 없이 잊혀지는 게 좋다. 그러니까 내 친구들이 내 장례식에 모여서 각 1병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몇 번은 친구들 장례식에 가서 각 1병을 하기는 해야 할 것 같다. 산다는 게 그렇다.

 

나는 오래 살거나, 잘 살거나, 그런 꿈을 가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50이 되면서, 30년만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 친구들은 내가 하는 말에 "옳다"라고 하는 일은 없다. 맞든 틀리든, 내 친구들은 "그건 아니지", 그렇게 일단 부정부터 한다. 우린 그렇게 살았다. 그 녀석들이 수 십년만에 동의한 것은, 진짜로 30년만 더, 아프지 않고, 추례하지 않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내가 80이면 둘째가 35세다. 정말로 운이 좋다면 둘째의 아이들까지 약간은 돌봐줄 수 있을 나이다. 내 삶과 관련해서, 그 정도면 나는 정말로 더 바랄 게 없다.

 

나는 부자로 살 생각도 없고, 힘 있는 권세가로 살 생각도 없다. 그렇다고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아무거시', 그럴 생각은 더더욱 없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이런 기록적인 개소리가 있다. 호랑이를 죽이고 싶어서 만든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랏님이 하시는 말씀을 고분고분 잘 듣고 대충 개처럼 살라고 만든 이데올로기이다. 죽은 사람을 기리는 것은, 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잇속이 되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렇지만 50 7, 5, 두 아이의 늙은 아빠가 된 후, 염치 없이 30년만 더 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평생 안 하던 기도를 가끔 하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오래 살게 해달라는, 그런 허망한 기도는 하지 않는다. 내가 신이라도 그런 황당무계한 기도를 하는 사람을 특별히 잘 봐주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세상이 나아질 것,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 그런 걸 기도한다. 예를 들면, 삼성의 이재용이 2심 재판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후, 나중에 그가 지옥에 가게 해달라고 하는 것, 그런 기도를 주로 한다. 그건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배우 김수미가 영화 <헬머니 - 확인>에서 주옥 같은 대사를 날렸다.

 

"차가게 살어."

 

내 작은 잇속을 위해서 착하게 살겠다고 마음을 먹는 내 모습을 돌아보면, 참 가증스럽다.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없는데, 어쩔 것인가. , 명예, 그 어떤 것도 50이 넘은 사람의 30년을 보호하거나 보장해주지 않는다. 옛날 기준으로 하면, 진짜 이만큼이면 살만큼 산 거다. 세종대왕이 53세에 돌아가셨다. 22세에 왕이 되어, 30년 정도 왕노릇한 거다. 평균 100세를 살지도 모른다는 지금, 우리 모두가 평균적으로 세종 보다 2배는 더 살게 된다. 그러나 그건 평균치다. 개개인의 삶, 마치 잉글 베르그만 감독이 <7의 봉인(1957)>에서 다루었던 죽음처럼 아무 인과관계 없이 그냥 찾아오는 것이다.

 

현실에서, 나쁜 놈이라고 먼저 죽고, 좋은 놈이라고 천천히 죽고, 그런 것은 없다. 전또깡, 바로 그 전두환은 아직도 한참 더 살 것 같다. 그래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전략은, "차가게 살어", 이것 밖에 없다. 되는 대로 살고, 대충 살고, 그리고 기도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내가 빈과 옥을 위해서 소주 각 1병을 할 확률 보다는 그들이 나를 위해서 각 1병을 할 확률이 훨씬 높다. 친했던 친구를 보내고 각 1병 하는 것, 사실 80이 될 때까지는 안 하고 싶다. 좋은 놈이든 나쁜 놈이든, 많이 벌었든 적게 벌었든, 이혼을 했든 안 했든, 지금 50인 친구들과 80까지는 어떻게든 그냥그냥 버텼으면 좋겠다. 방법은? 나도 가끔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 어느 추운 날의 기도

 

정말 추운 날이다. 내일은 더 추워진단다. 집은 따뜻하다. 일곱 살 큰 애는 혼자서 책 보고 있고, 다섯 살 둘 째는 혼자 로봇 장난감 가지고 놀다가 손이 끼었다고 울면서 뛰어온다. 일하다 늦게 들어온 아내는 내가 비벼준 비빔밥을 맛있다고 크게 한 입 먹었다. 나만 혼자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도 괜찮나,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특별히 되고 싶은 것도 없지만, 특별히 미워하는 것도 없는 삶이 되었다. 누가 뭐라고 하면, 그냥 그러세요 하고 만다. 뭔가 갖고 싶은 게 생기면, 너무 비싸, 이러고 만다. 행복하기 위해 먼저 불행해져야 하는 건 이젠 좀 지겹다. 그리고 더 큰 행복을 위해서라고, 더 큰 혐오를 갖는 것도 이젠 좀 피곤하다. 추운 날, 따뜻한 집에 있으면 더 바라는 게 없다. 아이들 뛰어 노는 소리가 들리고, 냉장고에 적당히 먹을 게 있고, 집은 따뜻한데, 뭘 더 바랄 것인가? 천국의 모습을 누군가가 그린다면 이것과 많이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재용이 감옥에서 풀려났다. 아주 희한한 판결이 나왔다. 그들을 위해서도 잠시 기도. 지옥갈겨! 잠시 생각하다가 기도를 한 마디 더 한다. 생지옥 갈겨! 그들의 부모들을 위해서도 잠시 기도. 아멘...

 

천국을 먼 곳에서 찾을 이유가 없을 것 같다. 추운 겨울, 잠시만 돌아보면 사방에 보살이고, 천국은 천지에 널렸다. 추운 날, 더욱 감사하고, 힘든 사람들에 대해서 잠시라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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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사기'도 나왔으니, 늘 하던 대로 조촐하게 독자 티타임 한 번 할까 싶습니다. 이번에는 장소를 좀 바꿔볼까 싶은데, 사정상 주중에 해야할 것 같은. 주중에 모이면 무슨 요일, 몇 시가 제일 나을까요? 2~3주 후 정도 생각하는데요.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편하신 시간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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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 일하기 시작한 것은 2010년 연말 정도였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까? 그 해에 영화 <평양성>이 기록적으로 망했다. 나에게는 외형적으로 별 특별한 일이 있지는 않았는데, 그 해가 내가 책을 내지 않은 거의 유일한 해였다. 어쨌든 여러 경로로 삶의 마지막 구텅이 혹은 돌아나올 수 없는 코너에 몰린 사람들이 같이 일을 하기로 했다.

 

그 때 우리가 했던 약속은 딱 하나였다. 했던 걸 또 하지는 않는다...

 

이건 아주 불리한 조건이다. 같은 걸 또 하고 또 해야 실력이 늘 것 아닌가? 그래야 돈도 좀 벌고. 어쨌든 뭔가 새로운 걸 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칠 것 같은 똘아이들이 그렇게 동료가 되었다. 좀 있으면 10년이다.

 

아내는, 나를 '병신'이라고 불렀다. 하는 것도 없이 몰켜 다니면서 술만 마셨다. 침 좀 뱉었다는 표현이 싸움 좀 하는 건달을 의미했다. 가끔은 정말로 침만 뱉었던 건달도 있다고 한다. 진짜, 술만 마셨다. 아내는 올해 '비리비리'로 한 단계 올려주었다. 비리비리해서 뭘 못하는 거지, 아주 병신은 아니라는. 이 얘기를 듣는데, 10년 가까이 걸렸다.

 

한 걸 또 하지 않는다...

 

내가 나를 위해서 지키려고 했던 하나의 원칙이 있다면, 그게 바로 한 걸 또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걸 또 해야 하는데... 그렇지만 그러면 내가 너무 불쌍할 것 같다. 바로 돈 들어오고, 바로 승진하고, 에 또, 그런 그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단호하게 "싫어요"라고 했던 게, 나중에 너무 불쌍하고 비참하게 느껴질 것 같다.

 

그 때 하지 그랬어.

 

그 땐 잘 몰랐어요...

 

이렇게 대답해야 진실인 상황으로 몰리면, 내가 너무 불쌍할 것 같다. 그래서 여전히 한 걸 또 하지는 않는다는 자세를 지키려고 한다. 물론 생각만 그렇다. 지나와서 보면, 별 볼 일 없는 걸 이렇게 고치고, 저렇게 고치고, 또 크게 보면 거기서 거기인 일들을 했다. 그래서 비리비리했다.

 

한 걸 또 하지 않는다. 이건 어쩌면 나에게는 좀 쉬운 일이다. 잘 한다, 멋지게 한다, 근사하게 한다, 그럴 듯하게 한다, 이런 건 어렵다. 20대에는 나에게도 좀 재능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할 줄 아는 게 너무 없다... 제빵 학교에 다닐까도 했고 와인 소몰리에 같은 것을 전문적으로 배워볼까 했더니, 담배 끊으란다... 바로 포기. 요리를 체계적으로 배울까 했더니, 이것도 담배 끊으란다. 바로 포기.

 

진짜로 나는 대충 살았다. 싱가포르의 대학에 교수로 갈 수 있었다. 어럅쇼, 가보니까 싱가포르는 도시 전체가 금연. 그렇게까지 열심히 살고 싶지는 않았다. 금연이야 할 수도 있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 담배를 끊는다면, 나이 많이 먹은 어느 날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될 것 같았다.

 

별로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포기한 길들은 창피해서 일일이 말하지도 못한다. 하버드는 정말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안 갔고, 하다 못해 동경 대학 연구원은 정말로 더 소소한 이유로. 그래서 행복해졌을까? 밥은 먹고 살았다.

 

가지 않은 길을 회상하면서 사는 건 슬픈 일이기도 하고, 비참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싫은 게, 영광스러웠던 일들을 그리워하면서 사는 일이다. 그건 비참한 걸 넘어서, 병신 곱배기, 병신 삼승, 병신 사승, 그런 것 같다. 게다가 지난 일들에 뻥까지 보탠다면... 밥 숫갈 내려놓아야지, 그런 맘으로 지금도 하루하루를 산다.

 

했던 일을 다시 하지 않기, 반복하지 않기, 이런 건 제대로 되든 아니든, 설래임이 있다.

 

경제학자로서, 나는 여전히 C급이라고 생각한다. A, B, 내 앞에 나래비를 서 있다. 그래도 좋다. C급이라도, 아직도 재밌게 분석할 것들이 있고, 해보지 않은 시도들이 조금 더 남아있다. C급 경제학자가 좋은 점은, 몸이 가볍다. 사소한 이유라도 누군가 간절히 원한다면, 기꺼이 나는 분석한다. 단 한 명이라도... 그리고 어떻게든 뚫고 나갈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저자로서는, 같은 것을 반복하기 위한 것에 대한 두려움을 아예 가질 필요가 없다. 나는 그렇게 성공적인 저자는 아니다. 영광이 있어야 뭘 반복하든지 말든지 할텐데, 그렇게 돌아가고 싶은 과거 같은 게 거의 없다. 그래도 아직 판돈 다 털려서 패 접어야 하는 상황까지 가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50대 에세이는 이런 삶의 한 흐름에 매듭을 한 번 지어보자는 생각으로 시작된 것 같다. 위아래로도 평등하고, 주변으로도 평등하기 위해서 기를 썼던 50대가 나 말고도 또 있었을까? 하여간 나는 아무도 내 위에 두지 않으려고 하고, 아무도 내 밑에 있게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고 혼자 일하는 것도 아니다. 이제 10년 가까워지는 비리비리한 동료들이 있고, 매 번의 작업도 좋든 싫든, 같이 일한다. 불편하지 않을까? 여럿이 움직이면 불편하기는 하지만, 혼자 움직이면 사실 아무 것도 못한다. 어디엔가 처박히고 딱 좋다.

 

어영부영 50, 낯선 21세기라는 두 개의 제목으로 각각 다섯 개씩의 글을 썼다. 요렇게 두 뭉치가 전반부다. 내가 절치부심하면서 고민하는 것은 딱 한 가지다. 이걸 이렇게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매 번의 글이 그러면 좋겠지만, 진짜로 내가 어영부영 사는 것처럼, 그렇게 시도하지만 결과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 쓰기 전에는 모른다. 써놓고도 잘 모를 때도 있다.

 

다른 분야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글을 쓰는 것과 같이 뭔가를 만들 때, 제일 어려운 것은 감정이다. 출판사랑 계약을 하거나, 뭔가 투자를 받기 위해서 기획서를 쓸 때, 논리적인 것의 얼개는 어느 정도는 마무리되어 있는 상태다. 이거 말 되는데... 그 정도는 되어야 누군가의 지갑에서 돈이 나올 것 아닌가. 나는 대가가 아니니까, 사진 한 장 혹은 스팟 한 모습, 이렇게 누군가를 움직이지는 못한다. 최소한 논리적으로는 뭐가가 정리가 되어야, 나도 움직인다는 생각을 하고, 상대방도 나와 약속을 한다. 이게 되었으니까 다음 단계로 가는 건데...

 

감정은 어렵다. 매번 감정이 생기지는 않는다. 생활인들이, 당연한 것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감정을 일정 기간 동안 유지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뭔가 만드는 순간, 약간은 뽕 맞는 순간 같은 것을 일시적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게 너절한 싸구려가 아니기 위해서는, 같은 것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것 같이, 무의식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원칙이 필요하다. 그건 생명과 같다. 이걸 버리느니, 내가 죽고 말겠다, 그 정도로 강렬하지 않으면, 무의식부터 흔들린다. 나머지는 다 장식품이 되어버린다.

 

하여간 우여곡절 끝에, 50대 에세이는 절반을 지났다. 잠시 숨 고르기 중이다. 사실 시작하기 전에, 책과 장의 제목 정도가 결정되지 않은 상태지, 어느 얘기들을 넣을 것인지는 어느 정도는 결정이 되어있다. 그리고 처음 펜을 들기 시작하면서, 뒷 쪽이 부지런히 재배치된다. 절반이 끝나면, 후반부는 배치는 물론이고 톤까지 거의 결정이 된다.

 

그렇게 해놓고, 내가 내 생각을 이기기 위한 진짜 작업이 시작된다. 원래는 이걸 쓰기로 했는데, 그걸 '쓰레기'로 느끼게 만들 정도로 더 기가 막힌 것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래야 글이다. 원래 쓰기로 한 것을 쓰기로 한 그 자리에 맞춰서 쓰는 것, 그건 기계적인 일이다. 펜을 습관적으로 놀리는 것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내가 설정한 것을 내가 이겨내야, 그게 글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만 하고... 맨 번 나는 나한테 지고, 하나마나한 결과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내가 내 삶을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하고, 그냥 그냥 수없이 많은 저자 중에 한 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도 한 번쯤은, 내가 나를 이기고 싶다. 열 개의 글을 더 쓰려고 한다. 아직 열 번의 기회는 남았다. 아직 나는 시간이 많고, 숨도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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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우석훈)

 

1.

2000년 가을에 헤이그에 2주 정도 머무른 적이 있었다. 정부 대표로 UN 협상에 나서던 시절의 일이다. 청와대가 나한테 주었던 미션은 클린턴이 DJ에게 보낸 친서에 대한 뭔가 좀 폼 나는 후속 조치를 발굴하라는 것이었다. 우리 회사는 나에게 좀 더 명확한 지침을 주었다.

 

"네도(NEDO - 일본신에너지기구)보다 나은 행사를 진행할 것."

 

헤이그는 이준 열사 얘기 외에 거의 아는 것이 없는 상태로 갔다. 비행기로 물건을 옮겨야 하니까 엄청난 장비를 가지고 갈 수는 없었다. 얇은 낚싯대와 휴대용 조명틀을 결합시킨 팜플렛 전시대를 수원 어딘가에 있는 작은 부품 회사에서 미리 만들어 가지고 갔다. 당시만 해도 정부에서 운영하는 설명 부스라는 게 그렇게 화려하지 않았고, 실제 용무가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명함 교환하고 약간의 인사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지금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조잡한 전시대였지만, 일본 산업부가 한국한테 홍보전에서 밀렸다는 데 좀 기분이 상했던 것 같다. 하여간 그 때 협상가들 사이에서 이 부스가 약간 시선을 끌었다. 한국이 어떻게 생각하고 선택할 것인가, 관심 갖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어쨌든 그 시즌에서 아직은 무명이던 내가 전문 협상가로 약간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 다음 시즌부터는 총리실 소속으로 협상에 가게 되었고, 분과 의장을 하게 되었다. 선거에도 나가서, 아시아 대표 중의 한 명이 되기도 하였다. 헤이그에서 마라케시 그리고 뉴델리까지 이어지는 그 몇 년이 공식적인 내 삶에서 가장 화려한 때였던 것 같다.

 

그 시절에 나는 30대 초반이었다. 아직 아픈 데도 없고, 각막도 아직은 멀쩡해서 소프트 렌즈를 끼어도 크게 불편을 느끼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DJ가 정권을 잡았던 국민의 정부, 그 정부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게 안에서 충돌하는 것도 거의 없었다. 만약 그 시절이 MB나 박근혜 시절이었다면, 속에서 부대끼는 것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은 희미해져 간다. 내가 내려놓고 온 자리라서 그런지, 그렇게 크게 그립지는 않다. 무엇보다, 기억들이 점점 흐려져 간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그렇게 강렬했던 기억들도 억지로 기억해야 잠깐 기억나지, 일상 속에서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헤이그를 지금 돌아보면 다른 장면이 기억난다.

 

일요일 오후, 사람들이 유명한 온천에 간다고 해서 나도 그냥 따라갔다. 요즘 패션 용어로 하면 잇 아이템, 뭐 그런 거라고 했다. 이천의 미란다 온천보다는 좀 덜하지만 유럽임을 감안하면 굉장히 화려한 대중 목욕탕이었다. 가운데 진짜로 수영을 할 수 있는 좀 넓은 풀이 있다. 나를 당황스럽게 만든 것은, 여기가 남녀가 같이 들어가는 곳이었다는 점이다. 프랑스에는 대중 목욕탕이 없다. 독일 온천도 남녀 구분이 없기는 하지만, 내가 가본 곳들은 대개 작았다. 그리고 주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았다. 조용히 한쪽 구석에 박혀 있으면 특별히 문화적 충격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헤이그는 좀 달랐다.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젊은 사람들이 많았다. 20대 초반의 여성들이 진짜로 넓은 풀에서 수영을 했다. 이걸 어색해하는 게 맞는지, 어색해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인지,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 때의 난감했던 순간이 가끔 기억에 난다. 단어를 선택하기도 어렵다. 나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자연스럽고, 누드라고 하기에는 느낌을 전달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벗은 몸이라고 하기에는, 일상적이지 않다. '태초의 아담과 이브와 같은', 이런 표현은 너무 호들갑스럽다.

 

그 때 나도 옷을 벗고 온천의 엷은 푸른 빛 대형 통문창 너머로 바라본 북해의 모습이 지금도 눈 앞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북해의 유전에 관한 내용을 읽을 때, 내 머리에서 떠오른 북해가 아직도 그 모습이다. 난감하든, 곤란하든, 하여간 뭐라고 표현하든 그 때의 곤혹스러웠던 순간이 나에게도 어지간히 강렬한 기억이었던 것 같다.

 

이 느낌이 선진국을 보았을 때의 특별함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문화권의 충돌 때문이었는지, 지금도 가끔 생각해보게 된다. 파리에서 6년 반을 살았다. 부활절 휴가를 즈음해서, 드디어 파리에도 햇살이 비치기 시작한다. 잔디밭에 사람들이 옷을 전부 벗고 태양 아래 누워있는 모습을 보면, 자연스럽게 나도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처럼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는 그런 추위는 아니다. 기온으로는 대부분의 겨울 기간이 0도 이상이기는 한데, 우산을 쓰기도 좀 애매해서 결국 맞게 만드는 그런 실비가 자주 내린다. 그리고 해가 내려 쬐는 일은 거의 없다. 그나마도 오후 4시쯤 지나면 해는 이미 저버릴 준비를 한다. 손이나 발이 시려운 게 아니라, 뼈가 춥다. 노르망디 사람들 얘기 들어보면, 그나마 파리는 좀 낫다는 거다. 류마티즘 환자가 왜 많은가, 그런 얘기를 할 정도로 으슬으슬 춥다. 그러다 드디어 태양이 비추는 계절이 오면, 옷 아니라 옷 할아비라도 벗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햇살이 그립다.

 

그런 데에는 꽤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헤이그 온천에서 만났던 그 장면의 당혹스러움은 몇 배를 뛰어넘었다. 네덜란드에 사는 한국 사람들에게도 그런 게 고민이란다. 몇 년 지나니까 온천에 가는 것은 즐거운 일인데, 한국인을 만나면 당황스럽단다. 네덜란드라는 장소, 자기들끼리는 익숙한 네덜란드의 문화, 여기에서 느닷없이 알몸으로 만나게 된 한국인 남과 여, 당황스러울 것 같다. 그리고 피하고 싶은 장면일 것이다. 헤이그에서 어쩔 수 없는 당황스러움을 경험한 이후로, 외국에서는 온천을 아예 안 가게 되었다.

 

네덜란드에 대해서 엄청나게 많은 공부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OECD 일반 국가보다는 조금은 더 안다고 생각을 했었다. 내가 본 그 어느 책이나 글 귀에도 북해가 보이는 헤이그의 온천 문화에 대해서 보지는 못한 것 같다. 선진국에 대해서 내가 뭘 알고 있을까? 어쩌면 잘 모를지도 모른다. 경제는 몸이 입는 옷 같은 것이다. 옷을 보면 신분과 재산을 조금은 알 수 있다. 문화는 영혼이 입는 옷 같은 것이다. 영혼이 보이지 않듯이, 문화도 잘 보이지 않는다. 옷을 벗고 목욕탕에 들어갔다가 20대 초반의 여성들이 똑같이 옷을 벗고 들어온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문화를 처음 보았던 것 같다.

 

2.

네덜란드가 우리나라에서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논의된 것이 한 번 있다. 노무현 정부 초기에 '네덜란드 모델'이라는 이름으로, 고용의 유연성은 높이고, 사회적 훈련을 강화하는 방안에 대해서 청와대가 대대적으로 논의를 시작했다. 그 때 스웨덴 전문가, 프랑스 전문가, 독일 전문가, 이런 유럽의 각 국을 꿰뚫고 있는 듯한 사람들이 TV에 나와서 네덜란드 모델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네덜란드에 대한 논의는 하지 않았다. 사실 우리가 아는 것들은 우리의 많은 지식들이 그렇듯이, 피상적이다. 때때로 유럽의 많은 나라들을 분류하고, 그 차이점들을 비교해서, 우리에게 맞는 방법을 찾자는 시도가 있다.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알기 어렵다. 만화 <은하철도 999>의 오프닝 송의 목소리로 훨씬 더 잘 알려진 김국환이 노래 <타타타>에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선진국이라는 용어 자체가 그렇다. 유럽이라고 해도 말도 다르고, 역사도 다르다. 그리고 경제가 작동하는 방식도 일괄적이지 않다. 굉장히 많은 나라들을 1인당 국민소득이라는 잣대 하나를 들이대고 여기는 선진국, 여기는 개도국, 그렇게 얘기하고 분석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무례할 뿐더러 비과학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경제는 조금은 알 수 있다. 문화는 정말로 알기 어렵다. 파푸아뉴기니의 트로브리앤드 제도에서 원주민 연구로 유명해진 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라고 정말로 그 원주민들의 문화를 이해했을까? 그의 연구는 이후 수많은 인류학자들의 1차 자료 역할을 했지만, 그도 원주민들을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경제로 줄을 세우면, 우리는 이제 선진국이다. 경제는 옷 같은 것이다. 경제라는 옷을 걸치면 우리는 선진국 국민이 된다. 그리고 그 옷을 벗으면? 선진국 국민이든 그렇지 않은 국민이든, 옷을 벗고 따뜻한 온천 물 안에 들어가면 별 차이 없다. 그래도 미세하게 알 수 있지 않느냐고? 그것을 철학적으로는 편견이라고 부른다. 그래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면, 그건 오만이라고 부른다. 모른다.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건 내가 인종주의자가 아니거나, 겸손하거나, 아니면 무슨 대단한 깨달음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게 인류학자인 레비 스트로스가 구조주의를 만들면서 가졌던 기본 가정이다. 사람은 다 같은데, 언어와 제도 혹은 경제와 같은 구조틀 안에서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구조주의 특히 후기 구조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여전히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근본적인 평등주의자이다. 내 앞에 선 사람은, 그 사람이 선진국 국민이든 저개발 국민이든, 나이가 많든 적든,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한다. 무시하는 일도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지나치게 깍뜻하게  대하지도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게 나의 예법이 되었다. 사장들이나 장관들은 날 싫어한다. 쟨 뭔데 저렇게 목이 뻣뻣해? 나는 10대나 20대를 만나도 반드시 존댓말을 쓰고, 할 수 있는 한 진심으로 대하려고 한다. 나와 반대로 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그들이 다 인생에서 성공한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델이 되고, 케이스가 된다. 1인당 GDP 3만 달러는 그런 의미다. 아랫 사람 쥐어짜고, 가난한 사람들 쥐어짜는 우리의 방식이 얼마나 더 오래 갈지, 얼마나 더 멀리 갈지, 아직은 의구심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여기까지만이라도 오고 싶다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좋든 싫든,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은 우리의 문화다. 지금 우리는 분기점에 서 있다. 10년 전 우리 앞에 서 있던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다. 그들보다는 트로트를 덜 좋아하고, 홍준표를 덜 좋아한다. 그러나 그들만큼 우리도 군사 문화에 익숙하고, 가부장제가 편안하다. 10년 후에 이 자리에 올 지금의 40대들, 그들은 우리 보다는 군사 문화에 훨씬 덜 익숙하다. 80년대, 전투경찰의 군대식 1자형 대열 혹은 다이아몬드 대열에 맞서, 우리도 군집진, 장사진, 원형진, 다양한 방식의 군대식 진을 짰다. 군대와 군대가 부딪혔다. 저 쪽에서 백골단이 뛰어나올 때, 이 쪽에서는 '애국청년'들이 꽃병 들고 본진을 보호하기 위해서 같이 뛰어나갔다. 상처는 남는다. 그 상처는 흔적이 된다.

 

지금의 40대는 전쟁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전면적 전투가 사그라진 이후다. 그 시기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다양성이 튀어나왔고, 김광석을 밀어내고 서태지가 들어섰다. 돈만 있으면 외국에 자유롭게 갈 수 있게 되었고, 배낭여행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그 나이에 외국에 그렇게  MT 가는 기분으로 가보지 못했다. 그들이 대학에 가려고 할 때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이 나왔다. 그들만큼 대학입시 줄세우기에 거부감을 가져던 세대는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 뒤에도 그런 흐름은 없었다. 행시를 사모하지 않았고, 공무원을 그리워하지 않았고, 군인은 물론 운동권 투사에게도 열광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도 상처가 남았다. 경제, IMF 경제위기는 그들의 다양성에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긴 것 같다.

 

이게 지금의 기성세대 혹은 곧 기성세대가 될 사람들이 겪었던 문화이고 사건이다. 그 수많은 논쟁과 비관적 예측 속에서도 나는 늘 낙관적이었고, 우리의 미래를 밝게 생각했다. 그건 10년 후, 앞으로 50대가 될 지금의 40대들이 우리 보다는 덜 군사문화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집단적으로 덜 획일적이고, 더 유연하다. 물론 그들도 50이 되면 변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 시대보다 사회의 문화는 더 나아질 것이다. 그게 내가 가졌던 낙관의 근거다. 많은 내 친구들은, 우리의 후배들이 운동을 계승하지 않고,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도 투철하지 않고, 너무 자기중심주의적이고, 이런 이유들로 우리의 미래가 어두울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한동안 우리의 미래가 아주 어둡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구의 생각이 과연 옳았는지, 그건 아직은 알 수 없다. 우리가 80이 되었을 때, 그 때 다시 생각해보면 좀 더 분명해질 것 같다.

 

3.

공상과학영화에 미래의 모습이 종종 등장한다. 그 시기에도 버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코카콜라다. 그리고 가끔 소니도 나왔다. 요즘 만들어지는 미래 영화에 소니가 나올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아이폰과 함께, 소니도 버티기 어려워졌고, 삼성LG 이후로 소니 TV의 시대도 갔다. 엘빈 토플러의 등장 이후,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너무 기술주의 관점으로 흐른 경향이 있다. 기술은 변화하지만 사람들은 많이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회는 그보다 더 조금 변한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풍경 중에서 30년 후에도 남아있을 것이 어떤 것이 있을까? 여의도 한 가운데 있는 국회, 저건 저 자리에 있을까? 세종시로 행정부가 이전한 이후 국회도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국회 분원도 만들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저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미세먼지 가득한 한강 너머로 서강대교 위를 넘어다니는 차들을 보고 있을 것이다. 삼성, 현대, 이런 회사들은 그 때까지 남아있을까? 외국에서는 골드스타라고 불렀던 회사가 있었던 것을 아는 청년이 얼마나 될까? 금성사, 그게 LG의 바로 그 G. 모를 일이다. 심지어 30년 후에 우리에게 대통령이라는 말 자체가 남아있을지도 아무도 보장 못한다. 의원내각제가 도입된다면 더 이상 대통령이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게 될 것이다.

 

비행기에서 한국의 상공을 내려다본 사람들이 흔히 한국적인 것으로 지적하는 것은 바짝바짝 붙어있는 아파트다. 이건 정말 한국적이다. 이건 30년 후에도 남아있을 것이다. 더 붙으면 더 붙지, 갑자기 아파트들이 줄어들거나, 좀 더 먼 이격거리를 두고 서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비행기 위에서 본 우리 모습에는 밭떼기가 보인다. 소농 중심의 가족 농업 그것도 규모가 크지 않은 한국의 조방적 농업이 보여주는 특유의 모습이다. 이건 30년 후에도 남아있을까? 모른다. 농업이 어느 정도로 버틸지도 불확실하고, 대기업 중심의 기업농으로 바뀔 수도 있다.

 

비행기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땅에 발을 딛고 한 발 한 발 걸어가면 보이는 한국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 뭐가 있을까? 밤마다 줄이어 서 있는 교회의 십자가 그리고 그 보다 더 많은 편의점...

 

"But the Way                그런데 말이지

Seven-Eleven                7시부터 11시까지, 11시부터 7시까지

Day and Night              자본은 해가 지는 법이 없지, 깜박 깜박

Circle K                       계속해, 계속 돌아가야 도태되지 않는데

LG 25                         카운터의 청년은 졸린가보다"

 

('관록 있는 구두의 밤 산책', 최영미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

 

시인 최영미가 한국에 막 생겨나기 시작하는 편의점을 불편하게 생각하기 전까지, 나는 편의점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내 마음 속에 있던 그 불편함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최영미의 시를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무디고 둔하고, 직관 같은 것들을 소홀히 여기고 있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언제든지 들러다오, 편리한 때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아무 데나 멈추면 돼

(최영미 '24시간 편의점')

 

프랑스 쪽 알프스 지역의 주요 도시인 그르노블에 몇 달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6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이고, <적과 흑>을 쓴 스탕달의 도시다. 금요일 오후부터 월요일 오전까지는 여는 가계가 없다. 시내에 가면 몇 군데 열기는 했는데, 버스가 거의 없다. 영국 코벤트리에 있는 워릭 대학에서 토요일날 하루를 묶고, 일요일날 버스를 타려고 했다. 런던에 가야 한다. 버스가 너무 안 와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투다이스 선다이", 순간 당황했다. 런던식 영어 억양에는 그래도 좀 익숙해져 있었는데, 영국 지방의 투박한 영어는 사실 처음이었다. 죽기 위해선, 태양이 죽는, 순간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 아저씨는 한 번 더 나에게 같은 말을 해주었다. 그 때야 알아들었다. Taday is sunday, 오늘은 일요일입니다... 일요일 날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면? 그래도 다 살아간다. 쮜리히에 한 달 정도 머물 때, 초반에는 정말 익숙하지 않아서 고생을 했다. 나도 너무 대도시에서만 살았고, 번화한 곳에서만 살았던 것 같다. 6시 즈음이면 슈퍼마켓이 거의 문을 닫고, 7시가 넘으면 동네 구멍가계도 문을 닿는다. 시내 아주 번화가에 가야 문을 연 식당이나 카페 같은 데가 있다. 독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베를린 같은 대도시의 번화가에나 문을 연 술집들이 있지, 조금만 민가 쪽으로 들어가면 열어놓은 가계가 거의 없다. 독일 맥주집에서 바로 그 독일 맥주를 마시지 돌아왔다고 아쉬움을 얘기하는 한국 사람들이 많다. 원래 그렇다.

 

90년대 초반 파리 샹젤리제에 영국계 매장인 버진이 들어올 때, 정말로 프랑스 전체가 찬반 논쟁에 들어갔다. 영국 회사라서 그런 건 아니고, 12시까지 가계문을 열겠다는 버진의 영업 방침 때문에 그렇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버진은 프랑스의 심장이라고 하는 샹젤리제에 매장을 열었다. 10년을 못 버티고 결국에는 철수하게 되었다. 12시까지 문을 연다고 해도 사람들이 그 전에 집에 들어가는데, 떼돈 벌기는 어렵다.

 

편의점이 제일 잘 발달한 나라는 일본이고, 그 다음이 한국일 것이다. 편리, convenierce를 파는 가계, 편의점이 잘 발달한 나라가 사실은 편한 나라들은 아니다. 사람들은 일찍 일찍 집에 들어가고, 해가 지면 집에 가거나 연애를 하거나, 아니면 자기 하고 싶은 거 하는 나라, 이런 데는 편의점이 거의 없다. 대형 마트도 시내에서 멀리 있고, 골목에 있는 슈퍼도 그렇게까지 밤 늦게까지 열어놓지 않는다. 그러면 불편해서 어떻게 해? 1인당 소득 7만 달러, 8만 달러, 그렇게 간 나라들은 대부분 이렇다. 편의점 없어서 조금 불편할지 몰라도, 사람들 삶은 훨씬 더 편하다. 해지기 전에 일 끝내고, 일 년에 한 달 이상 휴가 간다. 저녁이 있는 삶 정도가 아니라, 점심도 집에 가서 먹는 게 최근 유행이 되기 시작했다. 편의점이 있어서 편한 나라와 편의점이 없어도 편한 나라, 두 가지가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갈림길이다.

 

너무나도 바쁘게 돌아가면서 쥐어짜고 쥐어짜서 선진국이 된 한국, 이 모습은 낯설다. 우린 아직 일을 너무 많이 하고, 또 너무 바쁘다. 50이 되면 슬슬 은퇴를 준비하면서 퇴직 후 연금 생활을 계획하기 시작하는 선진국 국민의 모습과 달리, 전전긍긍하며 퇴직 후의 날들만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 좀 이상한 선진국 중산층 50대의 모습, 낯설다.

 

30년 후, 여전히 우리에게 편의점은 도시 생활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샹젤리제에 진출한 영국의 버진처럼 결국은 뒤로 물러나게 될 것인가? 그 시절의 우리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 전에 읽는 책이 제레미 리프킨의 <유러피안 드림>이었다고 한다. 그 여운이 아직도 남는다. 50대 편의점 사장과 20대 편의점 알바가 최저임금을 놓고 첨예하게 만난다. 그 편의점은 앞으로 30년 후에 어떻게 될까? 그게 우리가 지금부터 걸어가는 삶의 미래다. 아직은 어색한 선진국, 그곳에서 우리의 21세기는 이제 시작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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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 대방출 그리고 "변희재가..."

 

1.

지난 대선에서 아내는 심상정에게 투표하였다. 나는 아내에게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아내의 결정이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내도 나에게 별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87년에 나는 대학교 2학년이기는 했지만 투표권이 없었다. 한 살 먼저 들어갔다. 니는 투표를 거른 적은 없다. 백기완에게 투표했고, 권영길에게 투표했다. 민주당 대선 후보에게 투표한 것은 노무현, 문재인, 딱 두 번이다. 앞으로의 선거에서는 누구에게 투표할까? 아직은 모른다. 아마도 안철수에게 투표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것도 100%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가 어느 날 노회찬과 단일화하고, 진보 통합후보가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10년 후에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확률은 희박하다. 그러나 박원순과 안철수가 서울 시장 선거에서 단일 후보를 만들어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정치의 시간은 사람의 시간과는 다른 것 같다.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가 깃발을 들고 "이래라, 저래라", 돌 잔치를 진두지휘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쟌다르크가 그랬다. 그래도 그 때는 신의 계시라는 상징이라도 있었다. 이화학당 고등부의 유관순 누님이 3.1절 만세운동을 이끌 때, 17세였다. 신생정당의 돌풍, 막 데뷔한 정치지도자의 약진, 돌도 지나지 않은 어린아이가 모세처럼 사람들을 이끌고 홍해를 가르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10년 후 대선, 정치에 대해서 우리가 지금 알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은 녹색당이다. 2011년 창당한 이후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 사이에 다른 정당들이 다 재창당을 했고, 하다못해 정의당도 그 이후에 생겨났다. 10년 후, 어쩌면 녹색당 말고는 다른 정당은 다시 신생정당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우리의 역사는 그랬다.

 

이제 50, 그렇지만 내가 10년 후 대선에 대해서 나에게 질문하는 이유는, 앞으로 내 일생을 뒤흔들 가장 큰 외부 변수가 이 요소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내 삶을 가장 크게 뒤흔든 사건은 2007년 겨울, 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된 사건이다. 술만 죽어라고 먹고, 안 죽은 게 다행이다. 이재영을 비롯해서 진짜 내 영혼의 친구와 같았던 사람들은 그 기간을 못 버텼다. 나는 왜 살아남았을까? 내가 좀 더 이기적이라서 그랬던 것 같다. 속상하면 술 마신 것은 똑 같았는데, 나는 그냥 자버렸다. 다른 차이는 없는 것 같다. 너는 이기주의적으로 살았어, 누군가 그렇게 얘기하면 나도 할 답변은 없다. 상징이 아니라 액면가 그대로, 진짜로 지난 10년 동안 죽을 뻔 했다. 실연의 충격도 이렇게 10년씩 가지는 않는다. 실업의 충격이나 어지간한 경제적 교란 효과도 사라지고 남을 시간이다. 코리안 시리즈에서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패배했다고 하더라도, 그 아픔이 10년씩 가지는 않는다.

 

수많은 친구들의 아픔을 뒤로 하고 50이 된 후, 진짜로 나는 꿈이나 희망 같은 게 사라졌다. 원래도 없었는데, 이루어야 하는 것, 그런 게 아무 것도 없다. 그 동안에 한국의 청년들은 과거 우리가 '조국'이라고 불렀던 그 나라를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드디어 우리가 이겼나? 이기긴 뭘 이겼나. 순실이가 먹다 남긴 '찌그레기'를 국가라고 부여 쥐고 있을 뿐이다. 정치인으로서 권영길은 진짜 허당이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에게 한 마디는 남겼다.

 

"그래서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이 땅에서 이제 막 사회적 삶을 시작하는 20대들이 5년 후에 묻고, 10년 후에 또 물어볼 것이다, 살림살이는 좀 나아졌느냐고요. 그래도 물어보면 좀 다행일 것이다. 지금처럼 대충대충 하면, 10년 후에 그들은 물어보지도 않을 것이다. 파도는 흘러간다. 오늘의 파도와 10년 후의 파도가 같을 것인가?

 

2.

10년 후면 나는 60이 된다. 지금 50대는 60대가 된다. 산수다. 과거의 흐름에 의하면, 그 때쯤 정권이 바뀔 확률이 높다. 10년 동안 한국의 보수들이 절치부심해서, 이제는 집권해도 사기 치지 않거나 멍하고 있지 않아질 가능성이 있을까?

 

10년쯤 되는 장기적 변화가 발생할 때에는 먼저 반성 같은 게 생긴다. 물론 세상에 진심으로 반성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겉모습은 반성처럼 생겼어도, 1) 나 진짜 힘들어, 2) 가만두지 않겠어, 요런 두 개의 메시지로 구성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어차피 형식적이다. 그래도 그거라도 하는 집단과, 그나마도 귀찮다고 안 하는 경우는 좀 다르다. 한국의 보수에, 아직까지는 형식적인 메시지라도 반성하는 사람은 보지 못한 것 같다. 복수심만으로 변화가 생기지는 않는다. 많은 경우, 자기가 뭔가 잘 하기 보다는 상대방의 실수를 기다리는 전략을 많이 쓰게 된다. 지난 대선 이후, 한국의 보수가 취한 자세는 이 '웨이팅 전략'이다. 당분간 큰 변화가 생겨나지는 않을 것 같다. 말은 멋있게 썼지만, 지금 자유한국당의 당대표인 홍준표나 그런 급의 사람이 반성에 관한 얘기다. 아직 안 벌어졌다. 그래서 다음 대선에 큰 변화가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10년 후는?

 

경제학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개념 중의 하나가 시간 개념이다. 물론 물리학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엄청나게 정밀하고, 비가역적인 흐름 혹은 공간과 연동되는 아인슈타인급 시간에 관한 얘기는 아니다. 짧은 시간과 긴 시간에 대해서 배운다. 단기는 1년 미만의 기간이다. 가격, 주가, 집값, 이런 금융과 관련된 지표들만 변한다. 장기는 10년 정도다. 기술 수준이 변한다. 생산함수에서 기술수준이 상수에서 변수로 바뀐다. 이보다 더 긴 시간이 있다. 10년 이상, 보통은 30년 정도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인구 구조가 변한다. 노동함수에서 인구를 변수로 바꾼다. 10년은 그런 시간이다. 인구 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않고, 기술 조건은 바뀌는 시간이다.

 

디케이드(decade)라는 별도의 이름이 있을 정도로 10년은 긴 기간이다. 한 집단이 부패하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고, 실패를 사람들이 인지하기에 너무너무 넉넉한 시간이다. 그래서 "지겹다, 지겨워", 이 말은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꺼내게 될 때까지, 지겨울 정도로 긴 시간이다. 아버지 부시를 이기고 미국의 대통령이 된 빌 클린턴의 시대는 경제적 호황의 시기였다. 뉴 이코노미라는 말이 나왔고, 거시경제는 연일 기록을 갱신했다. 주기적으로 경기 순환이 오게 된다는 경제학 교과서를 바꿔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눈으로 보는 경제는 좋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삶도 좋아지지는 않을 것 같다. 다시 아들 부시의 시대가 왔다. 그도 연임했다. 도대체 사람들의 삶은 언제 나아지는겨? 백인 노동자 중산층 등 미국 민주당을 굳건히 지지하던 사람들이 트럼프에게 몰표를 주었다. 미국은 8, 한국은 10, 실망하고 반대하기에는 너무너무 충분히 긴 시간이다.

 

우리가 60살이 되었을 때, 광화문에서 또 촛불을 들게 될 것인가? 아니면 우리끼리 청계천 광장 어느 한 구석에서 "솔아 솔아", 이러면서 80년대에, 그 때는 내가, 이런 궁상맞은 짓을 또 해야 하겠는가? 실패는 정치인이 하지만, 시대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고 간다. 나는 60이 되어서 명박 같은 사람이 다시 대통령이 되는 시대를 맞고 싶지 않다. 이미 벌써 여러 놈 갔다. 60대에 명박급 혹은 트럼프급의 정권이 오면, 진짜로 이제는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이승을 많이 하직할 것 같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우리는 정멸적으로 살았다. 희망이 큰 만큼 실망도 크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잘 통제하고 제어하는 법을, 우리가 살았던 그 20세기에는 배우지 못했다.

 

지금부터의 10, 이제는 진짜로 우리가 사회의 맨 상위층에서 치루는 우리 시대의 마지막 싸움이다. 정치를 위해서 뭔가 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그게 더 나은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좋다. 조금 양보하고, 조금 내려놓고, 조금 실천하고, 전혀 무리한 얘기는 아니지 않은가?

 

3.

한국인은 정치인을 싫어하고 국회의원을 싫어한다, 그리고 정당을 싫어한다. 국회의원 의석수 늘리는 것에 대한 여론조사는 80% 정도가 싫다고 단호하게 답변한다. 이 정도로 높게 혐오를 받고 있는 또 다른 집단은 공무원 정도다. 공무원 증원에 대한 답변도 80% 정도가 아니라고 답한다. 홍준표가 이끄는 자유한국당은? 이 정도로 혐오 수치가 높지는 않다. 물론 혐오의 깊이가 더 깊을 수는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 체계에서 싫어도 한 표, 아주 싫어도 한 표, 죽도록 싫어도 한 표, 정도의 차이를 살피지는 않는다.

 

이런 상황이라서, 정당, 바로 그 당이 한국에서는 아주 취약하다. 집권당일 때에는 공무원들과 국책연구원들이 붙어 있어서 좀 나은 것 같지만, 야당이 되면 정말 별 볼 일 없다. 그래서 자체적으로 정책을 만들어내는 힘이 약하다. 그러다 보니까 선거를 억지로라도 치르기 위해서 대선 캠프가 커지고, 캠프 중심으로 정권이 움직여나가게 된다. 정책 능력만 놓고 보면 여전히 정의당이 가장 낳고, 민주당과 한국당은 매우 낮은 상황이다. 분야별로 약간의 우위가 있기는 한데, 어차피 도토리 키재기다. 한국에서 정책은 정의당과 시민단체가 주로 만든다. 그럼 그걸 진보든 보수든, 거대 정당에서 받아간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한국의 정당은 정책 측면에서 호치키스와 빨간펜만 들고 있는 것과 같다. 받아다가 빨간펜으로 찍찍, 넣고 빼고, 이게 큰 선거에서 한국 정당들이 처해진 현상이다.

 

어떻 때에는 이 빨간펜마저도 통째로 외부에서 사온다. 종범실록으로 유명해진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이 바로 이 케이스다. 삼성의 이재용이 집행유예로 집에 가는 동안, 안종범은 1심에서 징역 6년이 나왔다. 안종범은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정책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미국식 중도좌파 정도 되는 아주 잘 나가던 학자였다. 기재부 장관했던 최경환 따위와는 비교 자체가 안 될 정도로 괜찮은 학자다. 안종범, 완전히 망했다. 냉정히 얘기하면, 박근혜 정부 마지막 순간에 경제수석을 했던 강석훈과도 비교불가, 몇 줄 상급의 학자다. 그렇지만 그는 무리하지 않았고, 감옥에는 안 갔다. 공무원들은 사실 다 빠져나갔고, 청와대 경제수석 안종범, 연금관리공단 문형표, 이런 학자들이 주로 감옥에 갔고, 실형도 세게 나왔다. 공무원들 얘기다. 학자들은 갔다 쓰기가 쉽다는 것이다. 공무원만큼 민첩하지 못한 학자들만 감옥 갔다. "피할 재주도 없고, 뺄 돈도 없는 병신 같은 학자들", 이게 공무원들 입에서 나온 안종범 사건에 대한 평이었다. 오죽 하면 패로디 시가 다 나왔겠나 싶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그렇게 뜨거운 사람이었더냐?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안종범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그렇게 뜨거운 수첩이었더냐?

(페이스북, 안종범 패로디 시)

 

선거 때마다 수많은 빨간펜과 호치키스들이 캠프로 영입되었다. 국제적 명성과 학문적 수준으로만 놓고 보면, 안종범이 역대 최강이었을 것이다. 아마 안종범이 이런 외부영입이 아니라 그래도 새누리당에서 같이 한솥밥 먹는 시절을 좀 길게 지냈다면 지금처럼 6년형이 덜커덕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종범이 빨간펜 하던 그 선거에서 박근혜는 2% 차이로 이겼다. 사람들은 국정원 불법댓글로 그 차이가 났다고 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정책이 눈으로 보면, 2%는 안종범이 만든 2%일 수도 있다. 위의 2%와 아래 2%, 어느 게 진짜 스모킹 건이었을까? 모를 일이다.

 

촛불집회 이후 열린 대선까지 가는 과정은, 정책의 눈으로 보면 시민단체 등 각종 단체들의 창고대방출이었다. 10년 혹은 그 이상 지난한 현장 싸움에서 만들어진 공약들이 거의 대부분 문재인 진영으로 넘어갔다. 진짜로, 탈탈 털어서 더 넘겨주었다.

 

대표적인 것이 알바연대의 일부 활동가들이 주장하던 '최저임금 1만원'이다. 나도 최저임금 만원을 주장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을 딱 한 명이 받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계산을 했었다. 그게 그 시절에는 얼추 만원이었다. 알바연대는 좀 다른 방식으로 만원이라는 상징을 뽑았는데, 그 실무자가 만나자고  했었다. 만나기로 약속한 수요일 직전의 주말, 알바연대 대변인이었던 권문석은 과로로 잠자다 사망하였다. MB 집권 초기의 일이다. 그 사연이 너무 안타까워 활동그룹 밑에서부터 권문석을 생각하며 '최저임금 만원'이 퍼져나갔다. 민주당은 그걸 받았다. 물론 그들도 빨간펜만 한 것은 아니다. 과반 이상의 국회의원들이 반대했지만 결국은 공약으로 채택했다. 지금은 민주당 대표 정책으로 알려져 있지만, 학교급식 정책도 유사한 경로로 대표적 진보 정책이 되었다.

 

각 분야별로, 진짜로 '문캠'에 공약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세게 받은 것, 약하게 받은 것, 진짜로 받은 것, 하나마나하게 받은 것,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보수정부 10년 동안 축적한 공약들이 그 때 다 넘어갔다. 완판인지는 모르겠지만, 창고대방출인 것은 맞다. 그 중의 일부 단체 인사는 청와대나 고위직으로 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단체들은 그냥 공약만 주고 말았다. 촛불집회, 그 충격과 안타까움 속에서 운동권 단체들은 자신들이 줄 수 있는 공약들을 엄선해서 문캠으로 보냈다. 분야별로 있는 장애인 단체나 자영업자 단체 등 직능단체들도 그 때는 좀 달랐다. 보통 이런 직능단체는 외부의 이미지와는 달리 선거 때에는 주로 한국당 쪽으로 줄을 서는데 촛불집회 이후의 대선에는 문캠에도 자신들의 공약을 많이 보냈다. 그래서 정권이 바뀌었다. 대통령도 만들었다.

 

이제 시민단체들이 빈곤하게 되었다. 원래는 정부나 정당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우수한 정책과 대안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다 털어주고 나니까 남은 게 별로 없다. 물론 아직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제도의 대부분도 아직 법률로 전환되지는 않았다. 지금은 "하기로 한 걸 제대로 해라" 혹은 "이 정도로는 안 된다, 더 세게 해라", 그런 얘기 외에 별로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대표적인 것이 탈핵 운동이다. 하기로 했는데, 왜 이렇게 밖에 못하냐? 냉정하게 따지면, 더 할 얘기가 별로 없다. 더 깊게, 그런 고민은 할 수 있지만, 패러다임아 바뀌거나 근간이 바뀔 정도로 획기적인 얘기는 나오기 어렵다. , 이제 10년간 뭐하지? 하던 거 더 잘?

 

한국의 보수가 지난 10년간, 딱 이렇게 하다가 망했다. 노무현 시절, 보수들이 뉴라이트 만들고, 분야별로 이런저런 의제들을 막 던질 때, 나름 신선했다. 그리고 집권하자마자, 원래 하기로 한 걸 제대로 하자,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하기로 한 걸 제대로 하자, 기본에 충실하자, 이런 얘기로 세상이 변하지는 않는다. 좋든 싫든, 새로운 것을 만들고, 안 가본 길을 제시하고, 사람들과 같이 하기 위해서 더 넓게 노력할 때, 그 때야 세상은 제 자리에서도 서 있는다. 지금 하는 거 문제 없잖아, 이런 마음으로 지내면 정권 망하고 나라 망하는 데 10년이면 충분하다.

 

굉장히 빠른 시간 안에 집권당이 뭔가 새로운 것들을 막 제시하고, 진짜 세상 바뀌나 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근데 이건 어렵다. 청와대도 그렇고 민주당 본진들도 이래저래, 좀 바쁘시다. 시민단체들이 지난 10년 동안 배 골아가면서 했던 것처럼 앞으로의 10년을 '빡시게', 목숨 걸고 다시 한 걸음 한 걸음 가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우린 이제 그렇게 하기에는 나이를 먹었다.

 

공교롭다. 한 때 한국 최대의 회원조직이라는 환경운동연합의 회원 평균 나이가 딱 내 나이와 같다. 엄청나게 회원탈퇴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들어오는 젊은 회원도 별로 없다. 내가 나이를 먹어가듯이, 한국의 많은 시민단체들도 같이 나이를 먹어간다. 그리고 회원들도 나이를 먹어간다. 그들은 그들이고, 우리는 우리고, 그런 게 아니다. 한 때 40대 파릇파릇한 느낌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던 최열, 박원순, 그들도 이제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내 나이는 그들이 대표하던 시절을 넘었다. 우리는 같이 나이 먹고 있다. 지난 10, 그래도 억지로 죽어라고 버텼다. 4대강 같은 데에서 현장 싸움하고, 그 와중에 정책 대안 법률을 제시하고, 그게 좋아서 한 것은 아니다. 시대가 너무너무 어려워서 마지막 힘을 쥐어짠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회비가 많이 줄어서, 없는 회비를 줄여가면서 버텼다. 이 임금으로, 더 이상 젊은 활동가들 충원하기가 쉽지 않다.

 

태극기 집회에 할아버지들이 많았고, 변희재가 있었다. 어머니 몰래 아버지가 태극기 집회에 나섰다가, 그 해 설날 어머니가 며느리들에게 일러주었다.

 

"할아버지들만 있는 그런 데를 뭐 하러 가셨어요, 시아버님?"

 

제수씨가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또박또박 한 얘기였다.

 

"변희재가..."

 

아버지가 한 얘기는, 할아버지만 있는 게 아니라 변희재도 있었다는 말이었다. 아버지 입에서 변희재라는 이름이 나올 줄은 나도 정말 몰랐다. 심각한 상황이라서 웃으면 안 되는데, 안 웃을 수가 없었다. 상황은 그렇게 얼버무려졌다. 아버지는 우리들 앞에서 어머니에게 다시는 태극기 집회를 안 나가시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도 몇 번 더 나간 것으로 알고 있다. 아버지는 내가 TV 토론에 나오는 걸 늘 보는 건 아니시지만, 변희재 나오는 건 별의별 것까지 다 찾아보신다.

 

창고대방출 후, 한국의 시민단체를 포함해서 지역의 맣은 풀뿌리 조직들이 걸어가는 외형적 미래가 바로 그 태극기다. 10년 후면, 우리는 지치고 늙어간다. 그리고 "이건 나의 정권이야, 내가 너무너무 사랑하는 정권이야", 이렇게 자부심과 애정만을 가지고 이 시간을 보내면 어떻게 될까?

 

"변희재가..."

 

20대를 시작으로, 50대 패악질과 곤때스러움 못 참겠다고 등 돌리고 떠나가기에 10년은 너무너무 충분한 시간이다. 10년 후, 갤럽의 문화 조사 같은 항목에 "50386"에 대한 여론조사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지금 우리가 사는 것처럼 20세기 스타일로 산다면, 한국 역대 최고의 혐오집단인 국회의원과 공무원을 제치고, 80% 이상의 국민의 "싫어요"라고 대답할 확률은 거의 100%. 우리가 우리를 돌아보자. 지금 우리 모습에, 어디 하나 다른 사람들이 존경은 커녕, 연민을 가질 모습이 있나? 우린 더 이상 젊지 않고, 매력적이지도 않다. 그리고 많은 습관은 20세기에 형성되었다. 그런데 실질적 힘까지 생기면? 나는 무섭다.

 

한국의 보수, 다른 건 몰라도 돈은 월등히 많다. 언제 안종범 보다 두 배는 강력한 '슈퍼 안종범'이 등장해서 투표율 2%가 아니라 4% 정도는 가뿐히 좌지우지 할지 모른다. 영국 보수당에서 데이비드 케머런이 당대표로 갑자기 등장하면서 노동당을 제치고 수상이 되었을 때가 44세였다. 한국의 보수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끝까지 몰리는 곳, 그곳에서 젊은 영웅이 나온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를 나를 위해서 투표해달라고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10년 후, 우리는 우리 자식들에게 부모를 위해서 투표해달라고 설득할 수 있을까? 설득하면 안 된다. 그런 세상을 지금부터 만들어나가야 한다. 만약 설득하면? 그게 태극기다. 좌파 태극기, 진보 태극기, 그 모습을 우리가 10년 후에 만나게 된다. 아직 길은 열려 있다. 창고 대방출, 그 텅 빈 창고 앞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이다. 시민단체에서 우리를 대표해서 뭔 가 해줄 거야? 20년 이상 지켜온 그 창고에, 지금 신상은 없다. 너무 오래 되었거나, 안 팔릴 물건이거나...

 

나는 아버지처럼, "변희재가...",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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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가끔은 기도한다...)

 

1.

살면서 지켜 본 아내는 참 강한 사람이다. 대충대충 살아온 나보다는 몇 배는 더 강하다. 그러나 아이들은 더 강하다. 그리고 인정사정 없다. 부모 사정 같은 건 봐주지 않는다.

 

몇 주 전 일요일 밤이다. 아내가 정말로 '엉엉' 소리내면서 크게 울기 시작했다. 이제 일곱 살이 된 큰 아이는 이것저것 해달라는 게 너무 많아졌다. 그리고 말도 잘 안 듣는다. 다섯 살 둘째는 말 듣는 것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두 아이가 같이 있으면 2배가 아니라 3승 아니 4승으로 힘들다. 아내는 30분이 넘게 울었다. 두 아이는 결국 손 들고 벌섰다. 아이들도 울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은 거대한 울음 바다가 되었다. '행복한 우리 집'의 화목했던 일요일 밤의 모습이다.

 

나 때문에 아내가 운 적이 몇 번 있기는 하다. 100%, 내가 술 마시고 늦게 들어간 날의 일들이다. 그래도 그렇게 크게 우는 걸 보기는 처음이다.

 

"엄마가 너네들한테 뭘 잘 못 했니?"

 

울다가 아내가 꺼낸 말이다. 애들은 영문을 모른다. 나도 울고 싶은 적이 몇 번 있기는 했다. 그러나 운다고 뭐가 달라질까 싶었다. 그리고 아내가 별 거 하지도 않고서 티 낸다고 놀릴 것도 무서웠다. 왜 나는 애들을 이렇게 열심히 볼까? 별 다른 선택이 없어서 그렇다. 아이들이 늦게 태어나서 외가든, 친가든, 좀 더 아이들을 보는 것 자체가 무리다. 장모님이 많이 도와주신다. 그래도 숨이 턱턱. 아이 둘 볼 때, 둘이 보면 둘이 다 뻗고, 셋이 보면 셋이 뻗고, 넷이 보면 한 명이 좀 쉴 여유가 생긴다. 누군가 놀러 와서 네 명이 볼 여유가 생겼을 때, 아이들은 두세 배로 늘어난다. 국가도 더 이상 도와주지는 않는다. 시장에 지원을 받기에는 내가 "도니가 음따". 그리고 마을 공동체 혹은 육아 공동체, 그런 건 너무 멀리 있다.

 

아이를 낳지 않으면 어른이 되지 않았다고 무시하는 전통이 우리 나라에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평등 사회를 못 만든 것이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비로소 어른이 된다는 의미, 그거 순전히 꼰대적 발상이다.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성숙해가는 느낌 보다는, 내가 해체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왜 해? 방법 없잖아. 진짜로 나는 하루하루가 내가 해체되는 것 같았다. 조폭들 용어로는 그걸 인수분해라고 하는 것 같다. 조직에서 밑의 부하들이 강제로 다 떨어져나간 중간보수들을 인수분해 당했다고 한다. 죽이지는 않고, 그냥 혼자 있게 고립시키는 작전이다. 영화 <신세계 (2021)>에서 인수분해 되었던 장이사가 뭘 좀 해보려고 하다가 정말로 죽게 된다. 인수분해, 진짜 찰 지게 나왔던 대사였다.

 

2.

50, 내 위에 아무도 없고, 내 밑에 아무도 없다. 굳이 따지자면 어머니, 아버지 등등 내 위에도 한참 많다. 내 밑, 굳이 따지자면 고등하교 후배, 대학교 후배, 기타 등등, 엄청나게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내가 50이 된 지금, 그들이 내 밑일까? 그런 위계가 새삼 의미가 있지는 않을 것 같다.

 

몇 년 전까지, 나도 식구 같이 지내던 한 편들이 있었다. 그리고 위, 아래, 속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형식으로는 칼 같이 지켜지는 세계에 속해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이제 진짜로, 문자 그대로, 내 위에도 아무도 없고, 내 밑에도 아무도 없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의도적이고 주체적으로 이러한 삶을 만든 것일까? 나는 별 생각 없이 산다. '인수분해' 된 것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그리하여 21세기 들어서, 나는 처음으로 평등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내가 평등 속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평등 안으로 밀려들어간 것이 조금 더 정확한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도 일을 한다. 그리고 혼자 일하지는 않는다. 내 주변에는 많은 동료들이 있고, 적지 않은 친구들이 있다. 애 보다가 잠깐 잠깐 만나서 고민하는 사이라서, 대부분의 관계가 임시적이기는 하지만, 누군가의 주도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우리들 사이에서 평등을 내 건 적은 없다. 우리는 나중에 그걸 '오대오'라고 불렀다. 누구나 5의 역할을 한다. 물론 상징적이다. 애 보면서 움직이는 나는 '깨꿈발'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서, 실제로 5의 기여도 못한다. 그냥 오대오라고 불렀다. 누가 5인지는 모른다. 그냥 5.

 

좀 멋있게 표현하면 우리가 살았던 80년대 혹은 그 이전의 관계를 수직적 위계 관계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게 군대와 교회다. 현대 조직론에서는 그렇게 분석을 한다. 물론 군대와 교회 사이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같은 수직적 위계 조직이지만, 교회에서는 말단에 있는 신도들에게도 예수처럼 되라고 한다. 군대에서는 하급 병사들에게 장군처럼 되라고 하지는 않는다. 좀 더 솔직하게, 그냥 장군님을 본 받으라고 한다. 현대적 의미에서 군대와 교회만 분석하면 군대가 조금은 더 모던하다. 평등한 군대를 상상하기 어렵듯이, 평등한 교회도 상상이 어렵다. 그래도 군대에서는 천천히 인권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있지만, 교회는 군대보다 인권에 대한 얘기가 더 어렵다. 절도 마찬가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다. 우리 니라의 기업은 일제의 영향을 받아서 군대식 조직 위해 자신의 조직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주 나중에, 몇 개의 기업이 군대 조직 위애 교회 모델을 덧붙였다.

 

70년대와 80년대, 지난 20세기 후반은 사회의 군대화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대형 교회가 등장한 이후, 사회의 교회화가 진행된 것 같다. MB가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 이후, 우리의 전면적인 사회의 교회화와 함께 21세기를 맞았다. 할렐루야! 하나님 밑에는 예수님이 계시고, 그 밑에는 목사님이 계시고, 그 밑에는 장로님과 권사님이 계시고, 그리고 다시 그 밑에는 집사님이 계신다. 중간에 아직 목사님의 위대하신 위계까지 올라가지 못하신 전도사님이 계시다. 그리고 우리는? 평신도 아니면 아직 회계하지 못해서 영혼이 지옥의 저승불 어디론가 갈 죄 많은 양들이다, 아멘.

 

인류학에서는 이걸 사냥꾼과 채취꾼 모델로 나눈다. 여기서부터는 머리 아프다. 남자는 사냥을 담당하고, 여자는 열매를 모으고 일을 하는 채취를 담당한다. 그렇다면 사냥과 채취, 누가 더 시원 사회의 경제에 더 기여를 하였느냐, 이런 걸 따지면 경제인류학이나 생태인류학 같은 것들이 나온다. 그리하여 "도대체 남자는 어디에 쓸모가 있느냐"는 현대 인류학과 페미니즘의 질문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사냥꾼의 후예이거나, 채취꾼의 후예가 된다.

 

이도 저도 싫어서 혼자 있는 사람은? 왕따다. 49년을 사냥꾼으로 살았던 나는, 이제 아이들에게 인수분해된 이후로 수렵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왕따가 된다. 그렇지만 일찍이 헤겔이 말했다. 주인과 노예 중에서 진짜로 진리를 얻어서 자유롭게 되는 사람은 노예이고, 내 몰린 사람이라고. , 헤겔 만쉐이! 왕따가 되고서야, 나는 21세기의 지평선을 보게 되었다. 거기에 평등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누구나 적당히 세 끼 먹고 살다가, 때 되면 떠나게 되는, 그 존재론적이면서도 본질적인 평등이 있다. 예수가 말하지 않으셨던가. 먼저 온 자 나중 되고, 나중 온 자 먼저 된다고. 성경에 있는 말이다.

 

3.

나는 내가 누구인가, 그런 질문을 20대 이후로는 계속 했던 것 같다. 독일 성찰학파의 출발을 만든 질문이다. 나는 그런 질문이 되게 중요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남자 아이 둘을 데리고 50줄을 넘으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누구인가는 지금 하나도 중요한 일이 아니다. 몇 시에 어린이집에 갈 것인가, 토요일 저녁 메뉴는 뭘로 할 것인가, 일요일 점심은 뭘 만들 것인가, 이런 것만 중요하다. 나머지는? 일단 아이들 저녁에 재워놓고 생각하자.

 

50이 되면서, 내 삶에 근본적인 변화가 하나 생겨났다. 사회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일 아니면 하기가 싫어졌다. 물론 별로 의미가 없는 일도 있을 수 있고, 별로 재미가 없는 일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하기 싫은 일이지만 참고 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나에게 다 마찬가지인 것은, 어떤 일을 하든, 조각난 시간에 잠깐 일을 하는 나에게 많은 돈을 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과 관련된 일, 한국에서는 영혼을 팔 거나, 양심을 팔 거나 아니면 24시간을 전부 팔지 않으면 괜찮은 돈을 주지 않는다. 49을 넘으면서, 그 표현이 정중하든 혹은 직접적이든, 아니면 남을 통해 넌지시 말하든 "너 말고도 이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은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비겁하니까, 속으로만 "그러세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50에서 한 발씩 한 발씩 걸어갈 때마다, 군대나 교회 혹은 그렇게 생긴 조직에 속하지 않으면 점점 더 "너 말고도 이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은 많아"라는 얘기를 듣게 된다. 그게 우리의 50이다. 열심히 살면 10, 정말 운 좋으면 15년까지 유예할 수 있다. 그 이후로는 대체적으로 사람은 평등해진다. 어차피 큰 돈 못 받을 것,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다는 일만 하고 싶어졌다. 어차피 조금 받을 것, 사회적으로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면 좀 우울해진다. 그리고 그런 궁상 따위 떨고 있기에, 나에게도 시간이 별로 없다.

 

'일생의 과업'이라는 게 있을까? 근대를 만들면서 서양에서는 소명(calling)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이게 한국에 들어와서는 근대식 공장 교육의 적성 같은 개념과 결합되면서, 마치 신이 우리에게 준 고유한 능력과 영역 같은 게 있다는 미신이 되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이 아이는 어떤 과업을 신에게 타고 태어났습니다.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걸 일찍 발견하고, 빨리빨리 영재로 키우고, 그리하여 이 소중한 아이가 자신의 적성과 소명을 빨리 찾아 이 인류의 발전에 이바지하길! 아멘. 나는 고등학교 때 육사 그것도 싫으면 공사라도 가면 좋겠다는 아버지를 비롯한 집안 어른들의 말을 거역하면서부터 길 잃은 탕아가 되었다. 다행히 나는 눈이 나빠서 어른들은 잠시 그 꿈을 포기했다. 그리고 끝끝내 행정고시도 보지 않겠다고 얘기하면서, 아버지와 어른들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50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일생의 과업 따위는 없다. 신은 나에게 개떡 같은 시력과 엉망진창인 기억력을 주었고, 이제 그 시력과 기억력도 노안과 알콜성 치매로 거의 무의미해지기 직전에, 남자 아이 둘을 던져놓았다. 나에게 신이 준 마지막 소명이 있다면? 설거지와 밥하기? 지하철 역 앞에서 매일매일 만나는 신이 그 정도로 한가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일생의 과업이 없다는 생각이, 대충 살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루에 세 끼, 간식 두 번, 낮잠 한 번, 이거라도 제대로 하려면 입에 단내가 나도록 뛰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시간이 끝나면? 나는 60이 되어있을 것이고, 일생의 과업이 있느냐 없느냐, 이런 성립하지도 않는 명제 가지고 고민하지도 않을 것이다.

 

일생의 과업은, 20대에게만 유효한 말이다. 아직 살 날이 많기 때문에, 그의 '일생'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충분히 무게감 있는 말이다. 50이 넘은 사람의 일생은, 어차피 남은 시간이 얼마 없기 때문에, 일생이든 이생이든 혹은 반생이든, 별 의미는 없다. 객관성을 보여주는 저울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아직도 혹시 50년을 더 살아야 하지 않는가? 100세가 되어도 그 영혼이 탐나서 메피스토텔레스가 유혹하는 파우스트라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난 파우스트급은 아닌 것 같다.

 

평생을 바쳐서 해야 할 일, 그런 게 불행히도 내게는 없다. 만약 있었다면? 이미 없는데 뭘 자꾸 '있었다면' 같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질문을 할까? 소명이 있어야 행복한 것은 아니다. 평생 할 일이 있어야 삶이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기어코 그 일을 완수해야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다.

 

소명이라는 질문은 21세기적이지 않다. 나에게 소명이 있다고 말하면, 소명을 받지 못했다고 말할 것이 분명한 저 많은 사람들을 자신보다 열등하게 생각하게 된다. 소명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적이지는 않다. 우리가 지금부터 살아갈 21세기는, 소명을 받은 사람은 열심히 자신의 소명대로 일을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의미와 이유대로 살아가게 될 것 같다.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자신에게 일생의 과업이 있지 않다는 것을 50에 아는 것이 60에 아는 것보다는 낫다는 점이다. 60살에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없다. 그러나 50, 아직 10년은 남아 있다. 소명 같은 것 없어도, 평생의 과업 없어도, 충분히 재밌고, 즐겁고, 의미 있게 살 수 있다. 신이 세상에 우리를 내보낼 때, 사냥하고 서로 어깨싸움하라고 보낸 것 같지는 않다. 한 번 더 예수의 말을 빌리면,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라",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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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에세이, 여덟 번째 글의 제목을 잡았다. '일생의 과업, 그런 거 없다'. 원래는 아내 이야기가 요 자리에 올 거였는데, 룸쌀롱 얘기를 빼면서 이 자리가 비었다. 딱 요기가 중반부로 넘어가고, 후반부로 달려갈 첫 동력을 얻는 자리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야 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유달리 길게 뭘 쓸지 고민하게 되기도 하였다.

최소한 20개 이상의 주제가 이 자리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갔다. 너 아니고, 너도 아니고, 어럅소, 너는 진짜 아니다... 그 지랄을 며칠간 했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거짓말도 안되고, 진심이 아니어도 안되고, 폼 잡아도 안되고, 나만 재밌어도 안되고, 니미럴... 뭐, 이렇게 조건이 까다로워?

그러다 아예 며칠 때려칠까, 이러는 순간에 잠시 스쳐지나가는 제목이 일생의 과업, 이딴 거, 개소리, 요런 류의 생각이. 50이 되면, 남은 목숨 다 바쳐서, 이런 게 없어지는 게 정상적이다. 남은 목숨이 얼마 없는데, 바치긴 뭘 바쳐.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는 거지. 아니면 하던 거 하거나.

그리고 그걸 평생의 소명이라고 치장한다. 그렇게 해서 그냥 살던 대로 산다.

60이 되면, 아마도 뭔가 크게 바꾸기는 이제 어려운 시간이 된다. 그래서 그냥 하던 대로, 일생의 과업을 위해서, 그렇게 산다. 그렇게 살아도 되나? 이런 질문이 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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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에세이, 딱 1/3 정도 지나는 시점이다. 4개로 나누어서 20개의 글을 쓸 생각이다. 이미 쓴 것과 아직 배치하지 않은 제목들을 다시 돌아봤다.

1. 어영부영, 50살이 되었다
2. 센치멘탈 블루스와 궁상의 시대
3. 우리는 지는 법이 없습니다!
4. 아홉수와 경차
5. 스텔라 인생관의 종말과 통닭집 사장
6. 우리의 21세기는 이제야 시작한다
7. 어디 가서 100만 원만 벌어와

엘레꽝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남만 가득한 곳으로
창고 대방출
편의가 있는 곳에 편안함이 없다
돈으로 결정되지 않는 삶
딱 30년만 더 살고 싶다
다운사이징 50대

아직 제목을 못 잡은 글들이 몇 개 있다. 그리고 큰 것들 몇 개는, '국가의 사기' 정리하라다 빼서 써 버렸고. 룸쌀롱 얘기를 빼면서 톤의 기조는 살렸는데, 어깨걸이로 치로 나갈 지점이 얇아졌다. 한 번 더 쳤어야, 팍 치고 나가는 지점이 생기는데, 받침대가 약하다.

치고 나갈 때 '창고 대방출'이 결정적으로 때리면서 승의 승, 바로 이거야 하고 나갈 수 있는데, 지금은 밟고 나갈 발판이 없다.

100만원을 밟고 나갈 수는 없는. 홉, 스텝, 점프, 3단 뛰기의 3요소 중 스텝이 하나 필요하다. 개운하고 가볍게 딱 뛸 수 있는 얘기가 필요하다.

점프 앤 스파이크, 여기에서의 스파이크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데.

바로 들어갈까 하다가, 잠시 정리하면서 스텝용으로 쓸 수 있는 얘기를 다시 생각해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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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살 큰 애, 어린이집 옮기는 마지막 날. 표정 안 좋다...)

 

1.

가끔 아내에게 맞고 사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 맞고 살지는 않는다. 우리 집 아이들도 아내에게 맞는 일은 거의 없다. 큰 애가 둘째를 밀어서 아찔하게 위험하게 하는 경우에 볼기 맞는 정도다. 그렇지만 큰 애가 아내에게 맞고 정말 서럽게 운 적이 있기는 하다. 여섯 살 때 큰 애가 장난한다고 갑자기 엄마한테 덤볐다가 순간적으로 2단 옆차기를 배에 맞고 떼굴떼굴 구른 적이 있다. 놀라서 아내의 반사신경이 작용한 것이다. 한국 최초의 여자 유도 금메달을 딴 김미정이 고등학생인 아들이 반항하느라고 덤볐을 때 "기술 들어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같은 일이다. 깜짝 놀라서, 그야말로 기술 들어갔다. 졸지에 배에 2단 옆차기가 들어온 큰 아이는 놀라기도 하고 서럽기도 한지, 아이 같지 않은 '꺼이꺼이'하면서 울음보가 터졌다. 아내도 놀랐다.

 

"미안해, 엄마가 일부러 한 게 아니야."

 

엄마는 늘 받아주기만 하는 줄 알았던 큰 애가 진짜로 여섯 살 인생을 곰곰이 되새겨보면서 생각하는 순간이 되었을 것 같다. 웃으면 안 되는데, 웃음을 참느라고 혼났다. 앉은 자리에서 급하게 발차기가 나와서 힘이 실리지는 않았다. 나는 처음부터 별 일 아니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진짜로 별 일 아니다. 그렇지만 서러움이 복받쳤는지, 아프거나 배고파서 혹은 장난감을 압수당해서 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울음이 아들에게 흘러 나왔다. 아내가 다리에 힘을 주면, 어지간한 강판은 그냥 부숴진다. 예전 아파트에 살던 시절이다.

 

"이거, 힘주면 그냥 부숴져, 돈 들어. 그냥 나오지 그래?"

 

술 마시고 늦게 들어갔다가, 아내한테 너무 심하게 혼이 났다. 그래서 잠시라도 모면할까, 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구었다. 아마 다른 집에서는 잘 안 벌어질 장면 같은데, 아내가 옆차기로 방문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문을 잠그고 들어가면 아내는 옆차기로 문을 부술 수도 있다. 잠시 생각해봤는데, 문 고치는 비용이 싸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냥 문 열고 나왔다. 어색하지만, 다음 날 문 고친다고 돈 들이는 것 보다는 그냥 혼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내는 태권도 4단이다. 처음 봤을 때에는 2단이었는데, 어영부영 3단을 땄다. 4단은 결혼하고 땄다. 승단시험 볼 때에도 강남에 있는 국기원까지 내가 모시고 갔었다. 보통 결혼하면 여성들은 태권도를 그만두는데, 내가 잘 보필해서 4단까지 무사히 올 수 있게 했다고, 아내의 사범들이 나에게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내가 태어나서 훌륭한 사람, 그것도 진심으로 하는 얘기를 들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아내의 사범들은 무시무시한 사람들이었다. 코포아메리카나 대회에서 쿠바의 카스트로에게 금메달을 안겨주면서 대통령 전용기로 돌아와 카퍼레이드를 한 사범님도 있고, 나중에 하버드 대학에 태권도 과정을 연 사범님도 있다. 4단을 따고 나서 아내도 사범연수를 받고 태권도 사범이 되었다. 가끔 태권도 하는 사람끼리 사범연수 얘기를 하면, 서로 남들이 오해한다고 눈치를 준다. '' 연수가 아니라 사 '' 연수라고 반드시 강조해서 말해야 한다. 아내의 뒷배는 무시무시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야말로 의리 하나로 사는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나도 기세에서 그렇게 밀리지는 않는다. 나는 태권도 4단과 결혼한 것이 아니라, 아내를 태권도 4단으로 뒷바라지한 남편이다. 여느 태권도 4단의 남편과는 다르다. 살면서 내가 전설이 될 그런 일은 한 게 없다. 그러나 결혼하고 아내를 뒷바라지해서 결국 사범을 만들어낸 훌륭한 남편이 있다고, 태권도 피플 내에서는 이미 약간이 전설이 되었다. 나는 그게 제일 자랑스럽다. 우리나라에는 성인 태권도가 거의 없고, 성인들이 다닐 수 있는 태권도 도장도 없다시피하다.

 

나도 청와대에 아는 사람들이 조금은 있다. 그렇지만 아내를 당하지는 못한다. 가끔 청와대 근처를 지나면 검은 양복을 입고 머리에 기름 발라 넘긴 아저씨가 갑자기 뛰어와서 나를 당황스럽게 한다.

 

", 누나, 저예요, ."

 

아내와 같이 운동하던 남자 후배들이 청와대 경호실 같은 데에서 일한다. 이 얘기를 해줬더니, 사람들이 아내가 엄청난 운동권인 줄 잘못 알아들었다. 운동권이 아니라, 운동, 진짜 운동! 한참 아내가 운동 많이 하던 시절은 진짜로 어마무시했다. 궁금하다고 태극권 도장도 다니고, 별의별 희한한 중국 무술 도장들을 다녔다.

 

나는 어떤 여인과 결혼을 하는지 알았는데, 큰 아이는 어떤 엄마랑 사는지 잘 몰랐다. 결혼 초에 술 먹고 늦게 들어갔더니 정권이 바로 나왔다. 아내는 진짜로 때릴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내가 뭘 잘 모르고 그걸 막았다.

 

"막아? 부러져."

 

진짜로 그렇게 아픈 건 처음이었다. 팔굽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았고, 송곳으로 전체를 찌르는 것 같았다. 그 때 마음을 굳게 먹었다. 한 대라도 맞으면 손해다. 한 방이면 간다.

 

나는 아내가 태권도 5단도 하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 사이에 아이 둘을 낳았다. 게다가 5단부터는 논문도 써야 한다는 것 같다. 아내는 태권도 대신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이 낳은 다음에 요가도 잠깐 하고, 라인 댄스도 잠깐 했다. 결국 발레로 바꾼 건, 운동이 안 된단다. 준비 운동만 하고 막상 본운동을 안 한 댄다. 요즘 아내는 다시 몸 만들기가 한참이다.

 

가끔 설거지 할 때, 반대편에 있는 냉장고에 다리를 올려놓고 한다. 아찔하다. 페미니즘이나 양성 평등 같은 복잡한 얘기는 난 잘 모른다. 그러나 아내에게 진짜로 맞으면 어디 한 군데는 부러진다는 정도는 나도 안다. 나만 손해다.

 

2.

아내와 함께 한 약속이 많다. 학번으로 치면 아내와 나는 9년 차이다. 내가 살았던 시대와 아내가 살았던 시대는 다르다. 80년대 한 가운데, 90년대 한 가운데, 우린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산다. 그렇지만 아내는 내가 아내보다 먼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내가 터무니 없이 일찍 죽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아내가 마흔 살이 되었을 때, 대충 이렇게 막 살 거면 이혼하자는 얘기를 했다. 여자로서, 자신이 가장 좋은 때라고 했다. 지금 더 지나서 자신이 어쩔 수 없을 때 내가 죽으면, 자신은 아주 곤란하게 될 거이라고 얘기했다. 맞는 얘기다. 아내가 그냥 하는 얘기는 아니었다. 많은 것을 고민하고 꺼내놓은 얘기다.

 

우리는 타협이 아니라, 봉합하는 결론을 내렸다. 저녁 9시가 통금 시간이 되었다. 대충은 지키는데, 9시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9시에 출발하는 것으로, 나는 수시로 통금 시간을 어겼다. 그 뒤로 내 삶은 변명투성이 삶이 되었다.

 

혹시라도 이혼을 하게 되면, 지금까지의 소득은 물론이고, 미래에 발생할 소득도 모두 아내에게 주기로 했다. 아이 둘을 맡은 아내에게,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나는 뭐 먹고 살아? 그러니까 잘 하란 말이야! 말 대답 해봐야 맞아 죽는다.

 

내가 가진 것 모두 그리고 앞으로 발생할 모든 것도 아내에게 주기로 했다. 그 와중에 남은 것은,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절반의 명의, 공동명의의 절반이다. 물론 그것도 행사할 수 없는 권리이고, 별 의미는 없는 자산이다. 그러면 혹시라도, 불안하지 않은가? 잘 하란 말이야!

 

이러면 뭐가 많이 바뀌었을까? 원래도 내 소득은 전부 아내에게 갔고, 나는 용돈 타서 썼다. 말만 그렇게 한 거지, 실제로 현실이 바뀌는 것은 별로 없다. 용돈이 더 늘거나 줄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 소득이 많이 줄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쓰는 돈을 극단적인 미니멀리즘 수준으로 줄였다. 5. 7, 아이들은 점점 더 많이 먹는다. 옷과 신발도 점점 더 비싸진다.

 

통금시간과 재산분배는 요식적이고 실효성 없는 행위였지만, 실제로 의미 있는 행위도 있었다. 2016 4, 총선이 끝난 후 나는 정말로 아내를 위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 총선에서 나는 민주당 정책공약단 부단장으로, 사실상 정책 라인을 총괄했다. 우여곡절이 많았다. 다행히 선거는 최악은 면했고, 당시 새누리당은 1당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그 몇 년간 파트너처럼 일했던 정세균, 그가 국회의장이 되었다. 태어날 때 숨을 못 쉬고 바로 집중치료실로 갔던 3, 둘째는 폐렴으로 연달아 입원을 했다. 아내는 결국 회사를 퇴직했다.

 

아내가 퇴직하기 전, 우리 집은 아내가 버는 돈으로 먹고 사는 데 충분했다. 그 시절 아내가 출퇴근용으로 산 차가 바로 지금의 모닝이다. 나는 밖에서 하던 일들을 내려놓고 아내가 다시 취업할 수 있게 돕기로 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은, 두 아이를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내서 돌보는 일이다.

 

아내가 취업을 위한 준비를 하는데 시간을 좀 쓰기 시작한 다음 해, 아내는 작은 연구소에 비상근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원래는 좀 더 긴 시간을 가지고 충분히 준비하려고 했는데, 정부의 어린이집 기준이 바뀌었다. 취업하지 않은 엄마들은 하루 종일 아이를 맡길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지났다. 애들 어린이집 등원을 원래는 아내와 오전, 오후로 나누어서 했었는데, 그걸 내가 다 맡기로 했다. 아내는 탄력시간제이기는 하지만, 다시 상근을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은 이 계산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내가 소득이 더 많으니까, 내가 일을 더 하고, 아내가 아이를 보는 게 맞지 않느냐고 했다. 그건 단기적 계산이다. 아내가 나보다 10년 더 일을 할 것이다. 그리고 소득이 좀 적더라도 아내가 경제적 능력을 갖는 편이 아이들을 위해서도 나을 것 같다. 내가 떼돈을 벌거나, 고액 연봉을 받으면 되지 않느냐?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 능력을 과하게 생각해준 얘기라서 고맙게는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떼돈을 기대하면서 내 삶을 꾸린 적은 한 번도 없다.

 

시간강사 시절, 도저히 강사 수입으로는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취직시켜주는 대로 가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시간 강사 시절보다 조금 낫게 살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 마음은 변한 적이 없다.

 

내가 아내를 사랑해서 혹은 아내를 위해서 희생을 감수한 것일까? 나는 내가 가진 약간의 양식과 계산을 통해서 아내의 재취업을 지지하고 돕기로 결정한 것이다.

 

3.

"어디 가서 100만 원만 벌어오면 되겠네."

 

아내가 상근을 시작하기 직전, 연봉 협상이 다 끝나고 나한테 한 얘기다. 원래도 작은 연구소라서 많이 주지는 못하고, 탄력근무를 하니까 더 줄었다. 아내는 딱 우리 집 생활비 정도를 생각했는데,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얼추, 100만 원이 비었다.

 

어디 가서 100만원을 벌어오지? 물론 아이들 본다고 해도 그 이상은 번다. 큰 소리 탕탕 쳤다. 얘기치 않은 일이지만, 공교롭게도 바로 그 다음 달, 나의 소득은 0원이었다. 그런 때도 가끔 있다. 외부 웹 드라이브를 쓰는데, 해외 결제 자금 2천원이 빠져나가지 못했다고 문자가 떴다. 아이고. 창피해서 아내에게 말도 꺼내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다른 게 또 못 나갈지 몰라서 아내에게 죽는 소리를 했다. 그리고 궁상 떨었다. 아내는 웃었다. 내 통장에 200만원을 넣어주었다.

 

한 달에 100만원만 벌어오면 되는 삶, 그게 나의 50대가 되었다. 해방의 느낌은 아니다. 거친 남자 아이 둘을 맡는 거라서, 다리는 천근만근이다. 홀가분한 것도 아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수도원, 몽생미셀에 갔을 때, 거기서 방을 빌려주는 것을 보았다. 몇 달간이라도 거기에서 너무너무 살고 싶었다. 시도는 했는데, 여건이 안되었다. 몽생미셀 높은 탑의 창문에서 홀연히 바다를 보면서 지내면 홀가분할 것 같기는 하다. 그런 건 아니다. 어깨 위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추운 날 노천온천에서 한 시간 이상 땀을 흘리고 났을 때 드는 아무 생각 없음, 그런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린이집을 옮기기로 했다. 원래도 알았지만 실제로 옮겨보니까 진짜로 한국의 행정은 여전히 좀 너무했다. 형이 먼저 옮겨가야 둘째의 우선 순위가 높아져서 빨라야 한 달, 늦으면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자리가 먼저 난 아주 먼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었다. 좀 편하기 위해서 집 근처로 애들 어른이집을 옮기는데, 그 때까지 나는 아침 저녁으로 두 군데를 돌아야 한다. '일시적 오버 티오 허용', 요런 작은 문구 하나면 해결될 일을 아직도 안 한다. 그들에게는 작은 일일지 모르지만, 나는 아침 저녁으로 지옥의 레이스를 하게 되었다. 한 달에 100만원만 벌어도 되는 상황을 음미하며, , 이제 내가 21세기에 왔군, 이러고 싶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의 행정은 20세기적인 것 같다. 전산으로 움직이고, 인터넷으로 개방한다고 해서 21세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내가 잘 난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남편들도 있다고 들었다. 잘 이해는 가지 않는 마음이다. 난 좋다. 아내가 강한 것도 좋고, 글을 잘 쓰는 것도 좋고,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좋다. 남들 보기에는 넉넉하지 않은 돈이겠지만, 그래도 다시 경제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도 좋다.

 

그리고 내가 100만 원만 벌어도 되는 상황이 된 것도 좋다. 원래도 크게 바라는 것도 없고, 크게 되고 싶은 것도 없다.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돈의 크기가 욕망의 크기다. 욕망이 커서 더 큰 돈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돈을 결정해놓고 거기에 욕망의 크기를 정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제 100만 원 만한 욕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걸 욕망이라고 사람들이 부를까? 내가 어렸다면 왜 사람이, 아니 남자가 왜 그렇게 쫀쫀해, 그렇게 사방에서 난리를 쳤을 것이다. 나도 이제 나이 50이다. 나에게 추례하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쫀쫀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렇게 결정을 하고, 아내는 나에게 몇 달만이라도 술을 끊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렇게 한다고 했다. 마지막 날, 정말 친한 친구 두 명과 남대문 시장의 정말 허름한 횟집에서 소주를 마셨다. 진짜 맛있었다. 술을 영영 끊지는 못할 것 같다. 진짜로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21세기,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나는 이제 21세기로 간다. 그 준비가 되었다. 한국의 청년들이 21세기로 넘어오는데 필요한 돈이 88만원이었다. 돈으로 21세기를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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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숨이 막혀 헉 헉, 못 살겠어요

뭐라고? 헤어지자구?

등 뒤에서 하나둘 창문이 스르르 닫히는, 혁대가 딸각 풀어지는 소리 헉헉, 그러나 말로 번역될 수 없었던 말들, 때리지 마 제발 때리지만 말아요

도둑맞은 첫사랑이 부패하기 시작하는 냄새 진동하던 그 여름의 오후, 기억을 통과한 상처는 질겨져 있다 저기 저 방충망 바깥에서 윙윙대는 모기처럼 지금은 위험할 것도 없는데......

 

(최영미 시짐 <서른, 잔치는 끝났다> '사랑이, 혁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시집을 끼고 사는 삶을 살지는 못했다. 그래도 일상에 시를 자주 읽으면서 살 것 같기는 했는데, 막상 서른이 되니까 그렇게 시를 많이 읽지 못했다. 바쁘다는 건 다 거짓말이고, 시인들이 날 것으로 던지는 시대의 진실에 마주 서기가 무서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현대가 첫 직장이었다. 번듯하고 연봉 잘 주는 직장에 가면서 좋았던 점도 있었지만, 상처도 분명히 생겼던 것 같다. 시를 가까이 하지 못한 것은 그 상처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황석영 선생에게 시인과 소설가의 차이에 대해서 들을 기회가 있었다. 87, 시인들은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 연단 앞 쪽에들 앉았다고 한다. 그리고 소설가들은 조금이라도 많이 보기 위해서 연단 뒷줄에들 서 있었다고 한다. 그런가 보다 했다. 어차피 우리는 연단 근처에 있던 것이 아니라 저 멀리에 서 있었다.

 

1994년에 최영미의 시집을 읽고서 나는 충격에 빠졌다. 많은 사람들은 이 시집을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표현으로 기억한다. 상업적이고 트렌드를 만든 시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 시는 별 거 없다. '사랑이, 혁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 시가 시집의 나머지 최영미의 시 그리고 그녀의 문학적 삶을 이해하게 되는 단서라고 생각한다.

 

"때리지 마 제발 때리지만 마세요."

 

최영미는 나도 읽었던 원전 중의 일부를 번역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운동권 선배와 짧은 결혼생활을 했던 정도로 알고 있다. 아마 엄청나게 잘 나고, 엄청나게 많은 것을 알고 있던 남자였을 것이다. 혁대로 상대방을 때리는 일, 시인이 결국 펜을 들게 한 사건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보다 약간 먼저 나온 김형경의 소설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도 충격적이었다. 80년대, 운동권, 대학생, 복잡한 해석들이 있다. 그렇지만 나에게 이 소설은 간단하지만 충격적인 얘기였다. 별로 사랑하지 않는 남자 선배가 후배를 강간했고, 그래서 진정으로 서로 사랑했던 사람들은 결혼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강간을 했던 남자 선배와 여자는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어쨌든 삶을 꾸려나가게 된다. 이건 문학적 봉합이다. 그들은 과연 행복하게 되었을까? 1993년에 김형경의 데뷔작은 운동권 문학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나는 그 수많은 운동권 강간 사건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봉합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의 얘기를 바로 다음 해인 최영미의 시, '사랑이, 혁명이, 시작되기도 전에'에서 들을 수 있었다. 그렇구나!

 

나는 딱 한 번 혁대로 맞아본 적이 있다. 6학년 때 아버지에게 맞았는데, 다음 날 아버지는 날 데리고 냉면집에 갔다. 그게 처음 냉면을 먹어본 날이었다. 무슨 일이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버지에게 맞은 기억은 별로 없다. 그렇게 폭력적인 양반은 아니었고, 적어도 내 기억에는 어머니를 때린 적도 한 번도 없었다. 아마도 아버지에게 뭔가 심경적으로 어려운 일이 벌어졌을 거라고, 그 정도로 이해한다.

 

성추행, 성희롱, 우리가 살았던 그 80년대는 그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혁대로 때리는 일도 벌어졌다는 것을 최영미를 통해서 알게 된 후, 정말로 나는 충격이었다. 이런 일들은 내부에서 조용히 무마되는 경우가 많았다. 혁대 혹은 그 이상의 운동권 데이트 폭력 사건은 2010년대까지도 계속되었다. 폭행사건, 이런 것들은 내부적으로 무마되었고, 당사자들과 일부 관계자 선에서 징계가 내려갔다. 그리고 이 사회는 거의 몰랐다.

 

1994, 최영미가 '때리지 마'라고 외치던 순간, 우리에게 21세기는 부쩍 다가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외침은 21세기 하고도 18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에게 21세기가 왔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는 아직도 20세기에 살고 있었다. 공장으로 내려간 비밀조직 내에도, 유명한 노조 지도부에서도 성폭력 사건은 끊임없이 벌어졌다. 민중 운동에서 시민 운동으로 큰 틀이 바뀌었지만, 그 시대의 찬란한 전통은 끝나지 않았다. 좋아했던 후배 활동가가 성희롱 사건으로 단체를 결국 떠나게 된 게 몇 년 안되었다.

 

21세기적인 최영미의 시를 우리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도 최영미의 시집을 읽었다. 최영미가 혁대로 맞았던 사건을 절절하게 썼다는 대목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의 잔치가 끝났다는 것을 슬퍼하기만 했지, 그녀가 보았던 그 시대의 아픔에 대해서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 같다.

 

2.

우리는 모두 약간씩 운동권이었다. 우리가 싸웠던 사람들에 비해서 도덕적 우월성이 우리에게 있을까? 남자 엘리트 운동을 했다는 점에서, 크게 우월하게 내세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상처가 남는다. 자기 상처가 아프다는 얘기만 했지,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데, 진짜로 우리는 별 거 없었다.

 

21세기가 왔다. 달력에서만 왔다. 진보와 보수가 10년씩 정권을 나누어 가졌다. 80년대를 사는 사람들과 70년대를 사는 사람들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80년 광주로부터 자신의 출발점을 찾는 엘리트들 그리고 72년의 유신으로부터 자신의 근거를 찾는 사람들이 순차적으로 정권을 잡았다. 술자리에서 찬란한 80년대를 논하는 사람들과 화려했던 70년대를 논하는 사람들, 우리에게 21세기는 오지 않았다. 시대는 지체되고 정체되었다. 박근혜는 새마을 운동과 함께 더 앞으로, 60년대로 가고 싶어했다. 이건 좀 너무했다. 70년대, 80년대까지는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허용하더라도, 60년대는 좀 심하다. 김기춘이 결국 감옥에 가게 된 이유가 이런 너무한 과거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청년들은 70년대, 80년대, 다 아무 상관도 없다. 그들은 대한민국이라는 이 땅에서 자신들이 아무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게 '헬조선'이라는 용어 아닌가? 청년들이 이번 생은 망했어, 이생망을 외치고 있을 때, 남성 엘리트들은 70년대와 80년대를 가지고 온갖 사상 투쟁을 벌였다. 한국이 진보와 보수로 나뉘었을까? 혹은 좌우로 나뉘었을까? 남성 엘리트들의 권력 다툼과 자기들끼리의 어깨 싸움만 있었지, 그렇게 이념으로 우리가 나뉜 적도 없는 것 같다.

 

우리의 21세기는 2016 5, 강남역에서 오기 시작한 것 같다. 노래방 화장실에서 그냥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한 여성이 살해당했다. 강남역 출구에 여성들이 포스트잇을 붙이기 시작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그 공포감, 그것이 외면화되면서 사회로 드러났다. 2000년 밀레니엄이라고 불꽃놀이도 하고 수많은 행사를 했다. 시대는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니다. 정부가 하는 관제행사, 자본이 하는 마케팅 행사, 시대가 그렇게 오지는 않는다.

 

그 사이에 촛불집회가 있었고, 정권이 바뀌었다. 서지현 검사가 오래된 성희롱 사건을 고백했다. 그리고 여성들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이 외침은 20년 전에 나왔어야 했다. 1998, IMF 경제 위기 한 가운데에서 DJ가 집권했다. 그 때 나왔어야 했다. 그러나 그 시절은 여전히 남성 엘리트들의 시대였다. 좌파든 우파든, 좋은 대학 나오고, 10대 때 공부 잘 했던 남성들이 모든 것을 쥐었다. 우리는 아주 짐승처럼 살 거나, 그보다는 약간 덜 짐승처럼 살 거나, 둘 중의 하나의 길을 걸었다. 70년대나 80년대나, 교활하거나 약간 덜 교활하거나, 그런 사람들에게 유리한 시대였다.

 

누가 누구에게 손가락질 하겠나?

 

그 얘기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21세기가 온다는 것이 왜 여성의 문제이기만 한 것인가? 이렇게 물어볼 수는 있다. 노동운동, 인권운동, 환경운동, 평화운동, 심지어는 지역의 작은 풀뿌리 운동까지, 내부의 성폭행, 성희롱 사건으로 골머리 한 번도 안 썩어 본 단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할 정도 아닌가?

 

우리의 몸만 21세기로 왔지, 정신과 영혼 모두 20세기 저 언저리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낭만과 행복도 심지어는 개수작까지, 우리는 20세기형 인간들이었다. 첫사랑, 그리움, 아름다웠던 추억들과 함께 개수작까지, 우리 몸에 훈장과 상처처럼 덕지덕지 붙어있다. 이게 떨어질까? 잘 안 떨어진다.

 

3.

내가 가장 최근에 본 성희롱 사건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내 주변의 사람들과 친한 변호사들까지 붙어서 같이 고민한 사건이다.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우리는 편의상 그를 '성희롱'이라고 불렀다.

 

과거의 일은 차치하고, 내가 이 일을 알게 된 것은 4년 정도 되었다. 직원 회식이 있던 날, 성희롱은 비정규직 직원을 회식이 있다고 불렀는데, 막상 도착해보니까 유흥 주점이었다. 그곳에 성희롱과 여성은 단 둘이 있게 되었다. 회사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아주 큰 회사의 자회사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회사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의 대표적 회사인 것은 맞다. 성희롱은 정규직이었고, 행정을 담당하고 있었다. 많은 성희롱 사건은 술이 중간에 끼지만 이 사건은 술과는 상관없이 사전이 계획된 것이다. 구조적이고 상습적인 사건에 대해서 이 일을 접하게 된 우리 모두는 많은 충격을 받았다.

 

많은 여직원들이 이 일을 더 이상 묵과할 수는 없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회사에서 생겨난 이 일에 본사의 오래된 여직원들이 사건에 개입하였다. 고졸 출신으로 이제는 간부가 된 선배 여직원들이 여성을 만났고, 자신들의 얘기를 해주면서 위로도 하고 힘도 보탰다.

 

며칠 후 성희롱은 여성의 집을 찾아갔고, 부모를 만났다. 그래서 결론은? 비정규직인 여성은 퇴사했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덮여졌다. 자회사는 감사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여러 경로로 본사 감사실로 제보가 들어갔다. 자회사는 감사가 별도로 없기 때문에 감사업무를 행정이 담당하는데, 성희롱이 바로 그 감사 업무를 겸임하고 있었다. 자기가 자신을 감사해야 하는 구조적 문제가 발생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모든 사건은 종료하였다. 당사자가 직접 나서서 움직이기 전에 외부의 제3자가 실제로 사회에 공개하는 일 외에 행정적으로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이 법률적 자문 결과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성희롱은 우리 말 그대로, "잘 먹고 잘 산다." 20대 비정규직 여성, 30대 파견직 여성, 이들은 누가 보호할 것인가? 방송을 하면서 톨 게이트에서 근무하는 파견적 여성들의 성희롱 사건들을 접하게 되었다. 노래방 2차 등등 차마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진짜로 형편무인지경의 일들이 비정규직 여성과 정규직 남성 특히 관리직 남성 사이에서 횡행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펼쳐진 21세기였다. 70년대 서울에 일하러 온 '공순이들' 사건은 소설에서만 접했다. 여성의 경제활동은 늘어나지만 비정규직 비율도 함께 올라간다. 눈 감고 있는 것 외에 우리가 무슨 일을 했나? 이제 50이 된 우리들이 행정직을 하고 중간 관리자를 하는 시기에 벌어진 일들이다. 우리는 약간 비겁했거나, 많이 비겁했거나, 그렇게 40대를 보냈다. 성희롱의 당사자는 아니더라도 각자의 조직에서, 그걸 관리하고 처리해야 하는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그 많은 비정규직을 포함한 여성들의 성폭행과 성희롱 사건을 누가 덮고, 누가 쉬쉬했겠나? 우리는 아무도 이 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21세기? 직원 회식한다고 나갔더니 유흥주점에 행정직원이 혼자 기다리고 있는 그 황당한 사건을 경험한 비정규직 여성에게 물어보라. 이게 21세기냐?

 

4.

우리 모두가 완벽하게 무오류이며 무결점이 되는 사회를 상상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잘못도 하고, 가끔은 너무 미안하고 창피한 실수도 한다. 사랑과 추행이 밀리미터 단위로 잴 수 있는 그런 명확한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자주 만나는 사람을 사랑하거나 그리워하는 것,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아름답게 생각했던 짝사랑, 거기서 한 발만 더 나가면 지금 기준으로는 스토커다. 이젠 더 이상 아름답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 발만 더 나아가면 경범죄, 주거침입죄, 협박죄, 이런 처벌이 따를 수도 있다. 사랑한다고 계속 이메일 편지를 쓰면 법은 사이버 스토킹으로 규정한다. 그리운 마음은, 그야말로 마음만... 그게 21세기다.

 

70년대든 80년대든, 남성 엘리트 사회를 모델로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왼쪽에 설 것인가, 오른 쪽에 설 것인가, 위계가 확실하고, 위아래가 질서 정연한 사회 모델이다. 우리는 몸만 21세기로 왔지, 위 아래 구분을 철저하게 지키는 그 20세기적 위계 질서를 그대로 가지고 왔다. 얼래? 그런데 사회적 기준이 변했네? 70년대가 보수의 시대라서 그렇다고 치자. 그들은 늘 자기 자리에 있고 싶어했다. 시대보다 뒤에 있는 것, 그들에게 흠도 아니다. 우린, 원래 이래요! 80년대는 진보의 시대를 상징한다. 그러나 어느덧 우리도 나이를 먹었다. 그리고 시대가 변했다. 우리는 집단적으로, 정서적으로, 시대보다 뒤에 놓이게 되었다. 그게 강남역에서 시작된 21세기의 서막이다.

 

우리가 술 마시면서 즐겁다고 하는 옛날식 유머, 반 이상은 이 시대가 성희롱이라고 부르는 내용들이다. 학술적으로 얘기하면 아나싱크로니, 시대착오다. 부드럽게 얘기하면 개저씨들의 아재 개그다. 그리고 정서적으로 말하면, 개수작들이다. 그런데 그런 농담을 안 하면 왠지 경직된 것 같고, 노는 것 같지가 않다. 그게 우리가 맞게 된 50대다.

 

공부 같이 한 친한 친구가 있었다. 정말로 친했고, 1년 정도를 붙어 다닐 정도로 너무너무 친했다. 그 친구는 이대를 꼭 '계화여대'라고 불렀고, 기생들이 다니는 학교라고 했다. 약간 어색하기는 했는데, 그 시절에는 정색을 하면서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냥, 시골 출신이라서 그렇게 생각하나 보다, 그러고 넘어갔다. 지금 그런 말 하면 큰 일 난다. 공식적으로 내가 대학에 연구원으로 등록된 마지막 직장이 이화여대였다. 마지막 대학원 강의도 이대에서 했다.

 

우리가 20세기에 두고 왔어야 하는 건데 21세기로 가지고 온 것은 우월감이다. 그걸 거기에 두고 왔었어야 했다. 그러나 희망의 21세기, 밀레니엄이라고 하는 데 너무 기분이 좋아져서, 이것저것 다 싸질머 매고 21세기로 왔다. 정작 밀레니엄 버그 때문에 큰 일 난다는 얘기를 하면서 20세기적 가치를 너무 많이 가지고 왔다. 수많은 성폭행과 성희롱 사건의 핵심에는 우월감이 있다. 그 반댓말은 평등이다. 한 때 사회가 우리를 '평등파'라고 부를 정도로, 진짜로 평등, 평등, 평등만 외쳤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성에서, 단 한 번이라도 평등을 생각해 본 적이 있었을까?

 

나는 경차를 몇 년간 타고 다니면서 평등의 소중함을 배웠다. 평등하게만 대해주세요... 생각해보니까 나도 늘 우선순위였고, 특별 대우를 받고 살았다. 힘들어? 뭘 잘 몰라서 했던 찌질한 변명에 불과하다. 경차를 타고 나서야 삶의 평등, 일상성의 평등, 이런 것들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국의 수많은 조직의 관리자와 의사결정자들은 곧 우리 또래, 내 친구들이 될 것이다. 더 이상 성폭력 은폐 사건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이제부터는 더는 할 변명이 없다. 그래야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 정도에 맞춰서 겨우겨우 변한 것이 된다. 그게 엄청난 일인 것도 아니지 않은가?

 

50대가 되어서도 사랑을 할 수 있다. 그리워할 수도 있다. 못 견디게 그리울 수도 있다. OECD 평균 혼외출산율이 40% 정도 된다. 이혼하는 것도 사회적으로는 아무 문제 아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평등한 것이어야 한다. 평등한 영혼의 평등한 사랑, 그것이 21세기가 시작되는 출발이다.

 

21세기는 평등의 세기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21세기가 가장 결핍한 요소가 평등이기 때문이다. 20세기는 차별이 늘어나는 시대였다.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 경제적인 요소가 더 많아졌다. 그래서 21세기는 평등을 갈구하고, 평등을 찾는 시대가 될 것이다. 순실이도 민주주의라는 말은 알았다. 그러나 순실이가 평등이라는 단어를 알았겠나? 그런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봤겠나? 에이 21세기인데, 평등 같은 그런 옛날 말이! 아니다. 순실이와 순실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단 하나의 개념은 바로 평등이다.

 

1994, 시인 최영미는 때리지 말라고 노래했다. 그 얘기가 21세기적인 것이다. 그 노래는 지금도 유효하다. 그리고 정말로 그 노래가 사회의 핵심으로 가는 시대가 열린다. 우리는 그 시대를 열지 않았다. 너무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노력할 뿐이다. 여성 비정규직, 여성 조교, 여성 작가, 여성 스탭, 이들과 평등할 수 있는가? 누구에게 우리처럼 하라는 시대는 20세기에 끝났다. 이제 우리의 21세기가 시작된다.

 

여기에 와야 한다. 그래야 다음 길이 열린다. 그게 우리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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