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는 일도 없이 오전, 오후, 아이들 어린이집 갔다 오고, 중간에 잠깐 일보고. ytn 라디오 30분 녹음하고, 슈퍼 두 번 갔다오고, 쓰레기 정리해서 내다 버리고. 아이고 삭신이야...

큰 애는 옮긴 어린이집 이틀 째인데, 오늘도 울었다고 한다. 덩치는 산 만한데, 낮 가리고, 새로운 데 가기 싫어하는 것은 나랑 똑같다. 지금도 나는 그냥 혼자 있는 게 제일 좋다.

형제가 어린이집을 같이 옮기지 못하는 지금의 행정은 좀 이상하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싶다. 덕분에 내가 2월 동안은 완전히 골탕 먹을 것 같다. 무슨 엄청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나라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긴박한 일을 해결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어린이집 두 군데 돌아다니느라 떡이 된다. 아,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나가야 해서, 한 시간 덜 잔다. 나같이 싱겁고, 별 볼 일 없고, 딱히 당장 해야 할 군식구가 집에 없으면, 어린이집 가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나는 당분간 이렇게 모자란 사람으로 지내려고 한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부에서 하는 대로 끌려가면서 애 보려다 보면, 돌거나 우울증 걸리거나, 최소한 성질이라도 더럽게 된다. 난 원래 좀 모자라니까, 그냥 삭신이라도 덜 쑤셨으면 좋겠다. 더는 바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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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애가 딱지 치기 하잔다. 나는 tiny little 딱지. 몇 번 해봤는데, 반칙 쓰지 않으면 넘길 수가 없다. 얘가 날 닮은 것 같지는 않다. 나는 딱지 치기 안했다. 이기고는 아주아주 좋아한다. 오늘도 해가 저물었다. 오늘 어린이집 옮기고 울었다. 더 같이 놀아주려고 한다. 그러나 딱지 치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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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비리특별법에 관한 생각

 

(한국경제 자료)

 

공공기관 채용비리에 관한 전수조사 결과가 나왔다. 946곳인 80%가 적발되었고, 총 건수는 4,788개다. 사실상 100%라고 볼 수 있다. 20%는 채용비리가 없었던 것인가, 아니면 안 걸린 것일까? 알 수 없다.

 

공채가 이렇고, 박사 등 전문직 채용은 더한 것으로 알고 있다. 공정한 공채는 드물다. 내정한 경우가 많은데, 내정의 사연도 별로 공정하지 않다고 알고 있다. 채용비리는 불공정 사회의 대표적인 사례다. 공공이든 민간이든, 절차를 만들었으면 그것은 지켜져야 한다. 절차를 아예 생략하고 특채로 가거나, 공채를 했으면 당연히 지킬 건 지켜야 한다.

 

이건 원칙이 그렇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 뒤의 처리에 눈길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수많은 파면과 직위해제가 있을 것이고, 심한 곳은 기관장이 책임을 져야 하는 곳도 있을 것이다. 많은 경우, 기관장이 직접 인사위원회 위원장을 겸하지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만 그 자리를 맡은 부대표들이 책임을 지는 일도 벌어질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자. 대상자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나쁜 놈들 처리하는 문제가 아니라 부당하게 들어간 사람들이 어떻게 되느냐 문제가 아니겠나 싶다. 정서적으로, 당연히 퇴사하는 것이 맞다. 시켜준 사람이 사법처리가 되는 상황인데, 그 수혜자는 별 일 없다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

 

그런데 정부 처리방식이 이상하다. 규정이 없다는 것이다. 이건 행정 상식으로 말이 안 된다. 그렇게 규정이 없거나 과거 일을 다시 처리해야 하는 일을 위해서 특별법이라는 제도가 있다. 이번 전수 조사 건 같은 경우는 기간을 정해놓고 한시적으로 시행하면 절차적으로 크게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인다.

 

여대생의 미혼모 출산이 사회적 충격을 며칠 전에 주었다. 이 사건의 해석을 개인의 문제로 볼 것이냐 아니면 원치 않은 출산이라는 사회적 문제로 볼 것인가, 의견이 갈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밀출산' 특별법이 2월 안에 국회에서 발의될 것이라고 한다. 빛의 속도다.

 

이런 다양한 종류의 특별법이 지금도 발의되고 만들어지는데, 채용비리에 대한 특별법이 만들어지지 못할 이유가 없다. 죄 지은 사람에 대한 일벌백계주의를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무조건 형량만 높인다고 해서 범죄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채용비리로 들어간 직원을 무조건 "별 수 없다"고 감싸고 있는 것은 길게 보면 좋지 않은 일이다. 가장 부드러운 방식으로 권고 해직 같은 형식을 취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건 형사처벌 같은 것은 아니다. 재취업시의 부작용이 염려되면, 더 부드럽게 해도 좋다. 그러나 지금처럼 그냥 뭉개고, 정상적으로 경쟁하고 들어온 직원과 같이 일하라는 것은 좀 아닌 것 같다.

 

일반 직원과 전문직 등, 한국 사회에 만연한 채용비리와 특혜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 그 계기를 지금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냥 넘어갈 일은 절대로 아니다. 예전 모장관 자녀가 특혜 취업으로 난리가 난 적이 있다. 제도 개선 없이 재발 방지라는 약속은 하나마나한 얘기다. 나갈 사람 나가고, 고칠 사람 고치고, 그런 일을 지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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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민 브리핑에 전화 인터뷰를 좀 길게 했다. 토요일자 특집이라나... 문 잠궈 놓고 했더니, 결국 둘째가 아빠가 안 놀아준다고 문 두드리고 난리가 났다. 녹음방송이라서 잠시 세워놓고, 애 달래고. 라디오 전화 인터뷰도 이제는 못하겠다. 거의 다 생방인데. 오늘따라 아내는 토론회가 있어서 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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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닝의 무지막지한 활용법) 

 

1.

행운이나 불운, 별로 과학적인 용어는 아니다. 확률과 누적효과 혹은 후광효과와 같은 간접효과로 설명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전체 데이타를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부는 나중에 사후적으로 알 수도 있지만, 사전적으로 그런 모든 데이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만약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면, 세상에 전쟁은 사라질 것이다. 그건 인공지능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이라고 해서 행운과 불운에서부터 해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행운과 불운이 갖는 법칙적인 양상이 있기는 하다. 이런 것은 깡패와 같다. 혼자 다니지 않고 꼭 몰려 다닌다. 고등학교 다닐 때 버스를 타고 다녔다. 4대의 서로 다른 경로로 집에 갔다. 이 버스들은 종종 깡패들처럼 같이 다녔다. 행운도 몰려서 오고, 불운도 몰려서 온다. 좀 따로따로 다니면 좋겠다. 하여간 몰려 다니면서 나쁜 짓 하는 놈들은 다 깡패들이다.

 

내 삶에 가장 큰 변화가 그 시절에 생겼다. 결혼하고 9년 만에 아이가 태어났고, 연달아 둘째도 태어났다. 둘째는 날 때 숨을 쉬지 못해서 바로 집중치료실로 들어갔다. 세 살이 되었을 때 폐렴으로 입원을 했다. 그리고 퇴원한지 얼마 안되어 다시 입원을 했다. 요즘 세상에 폐렴은 병도 아니다. 폐렴은 아무 문제도 아닌데, 폐가 다 아물기 전에 다시 폐렴이 오면 이제 천식이 된다. 어린 시절의 폐렴은 감기 수준인데, 천식은 평생 고생을 하게 된다. 아내가 천식이 있다. 큰 아이 가졌을 때 천식이 심해져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움직인 것은 아니다.

 

병원에 입원한 아이의 다리는 정말이지 나무 젓가락처럼 가늘었다. 그 때 진짜로 존재론적인 고민을 했다. 과연 인생에서 뭐가 중요할까? 아이가 천식을 갖게 되면, 평생 나는 후회할 것 같았다. 그래서 외부에서 하던 일들을 모두 정리했다. 매일 움직여야 하는 일은 물론이고, 주기적으로 시간을 정해놓고 하는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아이는 언제 입원할지 몰랐다.

 

그 해에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크게 생각한 일은 크게 안되었고, 작게 생각한 일도 크게 안되었다. 하나를 하면 하나가 안 되었고, 둘을 하면 둘이 안되었다. 나중에는 무서워서 아무 것도 안 했다. ", 아이를 위해서 희생하는 일이야", 이렇게 대범하게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그게 되면 부처님이 되어 벌써 열반했지, 뭐 하러 여기에서 여기에서 이렇게 궁상맞게 살고 있을까?

 

나만 안 되는 게 아니라 내 주변의 동료들도 다 집단적으로 헤맸다. 하다 힘드니까 동료의 아내가 강화도에 용하다는 점집에 갔다 왔다.

 

"동지 때에는 다 되어 있을테니까, 걱장하지 마시고들..."

 

달리 기댈 데도 없으니까, 동지까지 꿈 참았다. 그리고도 동지가 한 번 더 지나갔다. 염병, 다시는 점쟁이 얘기에 귀를 기울이나 봐라. 너무 힘드니까, 사주에 대한 얘기를 만들어보자는 제안들이 있었다. 나는 택도 없는 소리 하지도 말라고 했다. 힘들면 점집 가게 되어 있다. 그게 사람이다.

 

나중에 지나보니까, 그게 아홉수였다. 열 아홉 살 때에는 차에 치어서 죽을 뻔 했다. 그 때부터 나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 되었다. 그리고 50이 될 때, 죽도록 힘들었다. 아이까지 덩달아 힘들었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아홉수는 과학이다. 아멘! 그냥 외울 일이다. 난 행운도 믿지 않고 불운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아홉수는 믿기도 하고, 외우기도 한다. 그건 과학이니까.

 

나는 둘째와 죽어라고 놀아주고, 먹을 것을 챙겼다. 그 후로도 두 번 정도 폐렴이 왔고, 독감으로 응급실에도 한 번 갔다. 그러나 체중이 늘어나면서 병원에 입원은 하지 않고 버텼다. 기분이 너무 좋았는지 밥을 네 그릇 먹은 날이 있었다. 몸무게가 태어날 때 하위 5%였다. 이제는 중간 정도 된다. 나의 아홉수도 끝났다.

 

2.

아홉수를 지내는 동안에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홉수 한 가운데를 지나가는 여름에 내 차를 없앴다. 쓰는 돈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급한 일이 생기면 아내의 경차, 빨간색 모닝을 빌려 탔다. 지방에 자주 가게 된다. KTX를 타면 생기는 마일리지가 교통카드처럼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마일리지 가지고 핸드폰으로 버스와 지하철을 탈 수 있다. 핸드폰은 교통 카드에 비하면 인식이 잘 안 된다. 70살이 되어야 가능한 교통버스 무료 시대에 일찍 들어갔다.

 

경차를 타면 어떤 좋은 일이 있을까? 아침 기도 100일 하는 것보다 낫다. 면벽 수도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깨우치게 된다. 교회나 절에 다니면서 훌륭해진 사람을 보기는 쉽지 않다. 경차를 타면 그것보다는 더 빨리 훌륭한 사람이 된다.

 

길에서 빨간색 모닝에게 양보하는 차는 거의 한 대도 없다. 벤츠는 형님이라고 부르게 되고, BMW는 큰 성님이라고 부르게 된다. 벤츠는 가끔은 모닝에게 차선을 비워주는 거룩하신 일을 하신다. 그래서 마음 속 깊이 형님이라고 부른다. BMW는 아직 양보하는 차를 한 대도 못 보았다. 똥은 더러워서 피한다. 조폭 피하는 것과 같다. 잠깐이라고 긁히거나 스쳐도 집에 있는 스피커를 내다 팔아야 하는 불상사가 일어난다. 나는 누구에게나 양보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양보하다 보면 결구에는 마음도 바뀐다. 큰 성님이, 아마도 급한 일이 있으실 거야. 시내에서 나는 아무도 추월하지 않는다.

 

고속도로에서는 겸손과 자연을 배운다. 빨리 오는 차는 무조건 피해준다. 가끔 1차선에도 들어가지만, 그것은 자연의 법칙에 맞지 않는다. 자연은 원래 느린 것이고, 천천히 변하는 것이다. 생태학을 그렇게 오래 공부했지만, 나는 자연에 대해서 1도 몰랐던 것 같다. 느리게 움직이는 자연과 같아졌다.

 

그리고 나는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절반의 비용을 내면서 감사하고, 주차장에서 반값을 내면서 꼬박꼬박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한다. 나는 한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냥 아내의 차를 빌려 타고 왔을 뿐인데, 그들은 나에게 특혜를 준다. 진정으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모닝에도 같이 타고 가주는 사람은 친구다. 모닝이라서 차를 보여주고 싶지 않고, 같이 가자고 말 하기도 민망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친구 아니다. 지금은 큰 애 덩치가 커져서 카 시트 하나를 떼었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에 카시트가 두 개나 달려 있었다. 그래도 앞에 한 자리 남은 걸 같이 타는 사람은 진정한 친구다. 나는 누가 내 친구고, 누가 친구가 아닌지, 이해하게 되었다.

 

불편함이 없지는 않다. 워낙 엔진 힘이 딸려서 고속도로에서 고속 주행을 길게 하면 무릎과 허벅지가 아프다. 일정을 잘못 잡아서 오후에 울산, 저녁 때 청주에 가야 할 일이 생겼다. 울산과 충주 사이를 한 번도 안 쉬고 최고속도로 주파해야 했다. 모닝은 그 주행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리고 이틀은 운전을 안 했다. 요즘 나오는 모닝에는 기본형 크루즈 정도는 달려 나온다.

 

나 말고 내 주변에서 경차 타는 사람은 두 명이 있다. 이준익 감독은 영화 <소원>을 찍던 시절부터 레이를 타기 시작했다. 지금은 미니쿠페를 탄다. MBC 해직기자인 이상호도 레이를 탄다. 상호와는 고등학교는 달랐는데, 동네 친구였다. 아주 오래된 친구다.

 

모닝과 함께 나는 아홉수를 보냈다. 아홉수가 끝나자 아내는 취직이 되었고, 다시 상근을 시작했다. 둘째가 아프면서 아내는 전에 다니는 직장에 사직서를 냈었다. 나도 다시 차가 필요하게 되었다. 다시 모닝을 살려고 했다. 아내가 '쌍모닝' 할 일 있냐고 질색을 했다. 그 꼴은 보기 싫다고, 아내가 버스를 타기 시작했다. 다시 차를 살 명분이 없어졌다.

 

모닝이기는 하지만, 윈터 타이어는 달려 있다. 눈 와도 어린이집은 가야 한다. 윈터 타이어 단 모닝은 전국에 몇 대 없을 거라고 한다.

 

영화 <여배우>에서 윤여정이 이런 얘기를 한다.

 

"내가, 출연료 깎자고 하면 막 화가 나다가도, 그래 내가 피부가 좀 안 좋지, 이러면서 참아."

 

영화 참 많이 봤다. 지금도 많이 본다. 영화 <여배우>가 내 삶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영화가 되었다. 화가 막 나다가도, 그래 참 내가 모닝이지, 이러면 길 가는 모든 차를 다 형님으로 모시면서 살 수 있다. 마음 속으로 배우 윤여정을 선생님으로 모시게 되었다. 생각보다 나는 차별을 많이 받고 살았다. 그걸 부당한 대우라고 생각했는데, 그 때마다, 참 내가 좌파지, 그러고 참았다. 좌파라서 참는 것보다는 모닝이라서 참는 게 훨씬 더 우아하다. 둘째가 아픈 다음에 나는 예전보다 훨씬 잘 참고, 기꺼이 참는 사람이 되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의 마음이라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모닝 타고 다니면 저절로 잘 참는 사람이 된다.

 

3.

경차 전부는 아니고 모닝만 가지고 출고차 통계를 비교해 본 적이 있다. 젊은 여성이 경차를 많이 탈 것이라는 사람들의 생각은 전혀 검증되지 않는다. 다섯 살씩 나이를 끊으면 40대 초반과 50대 초반이 가장 많이 탄다. 40대 후반과 50대 후반은 좀 덜 탄다. 성별 차이는 남자가 약간 많은데, 운전사 비율까지 고려하면 거의 없다고 볼 정도다. 그냥 일반적인 상품 분석을 해보면 연령과 세대 효과는 크지 없고, 경제성 효과가 가장 크다고 보는 게 맞다. 50대 초반은 20대보다 두 배 약간 안되게, 30대보다 월등히 많이 경차를 탄다.

 

이 수치들만 놓고 보면 한국에서 남의 눈치 제일 안 보고 사는 사람들은 40대 초반이다. 40대 중반이 되면 이젠 좀 눈치를 본다. 그리고 다시 50대가 되면 눈치 안 보기 시작한다. 외제차 판매 비율의 추이와 비교를 해보면, 거의 정확하게 역순이다. 노인들이 경차 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거의 안 탄다. 60세 이상부터 경차 비율이 뚝 떨어지고, 65세 이상에서는 이제 2%대다.

 

역시 또 다른 경차인 스파크의 광고는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다. 신구가 손녀가 탈 차를 골라서 며느리에게 사주는 얘기다. 지금 한국의 자연스러운 추세는 그렇다. 나이를 먹으면 경차만 덜 타는 게 아니라, 자 자체를 덜 탄다. 그리고 언젠가, 아예 운전을 할 수 없게 된다. 모건 프리먼이 나오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1989)> 70이 넘어서 운전을 할 수 없게 된 데이지 여사가 새로 온 운전사와 벌어지는 인간적 갈등에 관한 영화다.

 

모닝을 타면서 느낀 것은, 386이라고 불리게 될 내 또래 친구들에게 해줄 얘기가 생겼다는 것이다. 50, 살아남은 자들은 외제차와 관용차를 놓고 경쟁한다. 많은 경우, 관용차를 선호한다. 그게 안되면 더 비싼 외제차를 산다. 그리고 자기 자존심이라고 한다. 수많은 이유를 단다. 수의를 입은 최순실이 "민주주의 특검이 아니다"라고 고함을 쳤다. 그리고 "너무 억울하다"고 말했다. 이것을 지켜보던 청소 아줌마가 짧게 외쳤다.

 

"염병하네."

 

정부 부처에서는 전에는 1급까지 관용차가 나왔다. 그러다가 자기 차에 기사만 제공을 했는데, 세종시로 내려가면서 이제는 장차관에게만 관용차가 나온다. 민간기업에서는 전무급 본부장들부터 관용차가 나온다. 공기업 감사에게도 나온다. 그걸 위해서 경쟁을 한다. 수컷들의 전쟁터 같은 어깨 싸움은 결국 관용차를 놓고 벌이는 자기들끼리의 경쟁이기도 하다. 이럴 필요가 있을까? 대통령이나 국회의장처럼 정말로 경호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경호용 차량이 나가는 것은 맞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자리는 자기 차를 가지고 오고, 차량 기사만 제공해도 좋을 것 같다. 차가 없으면? 렌트 비용을 내면 되지 않는가?

 

70년대 군사정권 이래로 관용차는 권위의 상징이었다. 87년의 주역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관용차를 내려놓으면 사람들이 변화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차가 경차라면? MB가 집권하고 청와대 직원들이 더 작은 차를 타는 흐름을 만들었다. 그들도 그 정도는 했다. 386이라는 이름에는, 이제 저항과 희생이라는 상징은 사라졌다. 권력 투쟁, 자리 독점, 단물만 먹는 세대, 그런 상징이 곧 불을 것이다. 그리고 유럽의 68세대와 노동자 정치인들이 결국 그렇게 된 것처럼, 부패라는 오명이 붙을 것이다. 우리가 관용차를 양보하고, 경차로 바꾸면? 우리의 역사가 생겨난다.

 

노무현 정권 초기에 진짜 젊었던 386 국회의원들이 "우리도 이제는 골프를 쳐야 한다"고 골프장으로들 달려갔다. 바로 정권 말아먹었다. 청렴, 정직, 희생, 이런 건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경차는 눈에 잘 보인다. 교황이 한국에 방문했을 때 소울을 행사용 차량으로 사용했다. 물론 그 뒤에도 소울의 판매가 한국에서 늘지는 않았다. 교황이 아무 생각 없이 작은 차인 소울을 선택했겠는가? 교황청은 상징의 대가들이다. 경차가 상징이 되는 것은 나쁘지 않다.

 

경제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많은 50대 초반은 지금도 경차를 많이 탄다. 자연스러운 흐름이기도 하다. 50, 돈 아껴 쓰기 시작해야 하는 나이다. 아직도 살 날이 많다. 이제 청와대에 가거나 공기업 간부가 되는 내 또래 친구들에게, 관용차 대신 경차를 타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UN 협상가 시절에 느낀 것이다. 미국은 먼 거리 가는 공무원들은 비행기 비즈니스 탄다. 우리는 국장급 이상만 탄다. 미국은 우리보다 부자라서? 작은 정부를 추진하는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국가든 회사든, 비행기 마일리지를 개인에게 준다. 그러나 정부 돈으로 생긴 마일리지를 정부가 갖는 것이 맞는 것 아닌가? 그렇게 모은 정부 마일리지로 힘든 여정을 가는 공무원들은 국장급 아니더라도 비즈니스로 승격시켜 준다. 마일리지를 뺐길 공무원들에게는 섭섭한 일이겠지만, 그게 다 국민의 돈이다.

 

내 친구들에게 잠깐이라도 경차를 소유하는 경험을 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관공서 같은 데 경차 자리가 따로 있다. 아무리 자리 없더라도 주차 관리원이 경차 자리 정도는 어떻게든 마련해준다. 아무 데나 쑤셔 넣고 갔다 올 수 있다. 남이 나를 보는 것은 잠깐이지만, 통장의 돈은 실익으로 남는다. 김기춘은 70이 넘어서도 관용차 타는 맛을 들였다가 감옥 갔다. 그들은 그들의 시대를 아직도 살고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시대를 살아야 한다. 그래도 요즘 경차는 핸들에도 열선 들어가고, 무적의 완소 아이템 '엉뜨'도 있다.

 

우리가 만들어갈 50대는 관용차와 외제차의 시대가 아니라 경차의 시대면 좋겠다. 그래야 나중에 한열이 볼 면이 서지 않겠나? 50대 엘리트들이 경차의 새로운 고객으로 돌아오는 것, 이 정도는 해야 87년의 주역들이 진짜로 지금 세상을 바꾸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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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50대는 요렇게 생긴 차와 함께 시작되었다...)

 

 

1.

50대 에세이 구상을 시작한 것은 2년 정도 되는 것 같다. 지금까지 20대나 30대에게 말을 거는 책들은 꽤 썼다. 그렇지만 내 또래 친구들에게 하는 얘기를 쓴 적은 아직 없다. 50이라는 나이를 맞고 나서, 주변 친구들에게 하고 싶었던 얘기들을 한 번 해보고 싶어졌다.

 

50대는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 또래들이 맞게 된 아주 특수한 50대는? 그리고 앞으로 생겨날 변화들은?

 

대체적으로 이런 것들이 내가 답해보고 싶은 얘기들이다.

 

몇 가지 제목들이 있었는데, 현재로서는 '어영부영 50'가 될 가능성이 제일 많다.

 

부제는 결국 '개수작과의 결별'이 될 것 같다. 이 부제를 집어드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은... 개수작? 과연 나는 그런 위대한 결별을 했을까? 그럼 너는? 그렇게 물어보면 별로 할 말은 없다.

 

뭔가 엄청나게 큰 결심이 있어야 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50년을 살았다면, 앞으로 평균적으로 지금까지 산 만큼, 50년을 더 살게 될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그냥 하던 대로 산다면...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재미가 있겠나 싶다.

 

2.

이번 작업에서는 전체 글은 아니더라도, 주요한 글들은 블로그에 올리려고 한다. 어차피 후반에 빈 내용들을 채워넣고, 다시 수정하는 과정까지 전부 공개하기는 어렵다. 게을러서 그렇다.

 

그렇지만 초고 상태에서 사람들의 의견도 듣고, 넣을 것 뺄 것만이 아니라, 톤이나 내용 같은 것들을 좀 수다스럽게 하고 싶어졌다.

 

어차피 우리 시대의 이야기다. 좀 수다스러워도 좋을 것 같다.

 

블로그에 쓴 글을 책으로 옮기는 것 보다는, 책 초고로 쓴 글을 블로그에 올리는 것에 가까울 것 같다.

 

동아리방이나 학회실에서 속닥속닥, 복닥복닥, 원래 우리 또래들은 좀 수다스럽고 말이 많았다. 87년과 시대의 아픔을 만나면서 깊은 얘기는 아예 하지 않거나, 술 마셔야 얘기하는 습관이 들었던 것인지도.

 

3.

과거의 얘기를 아예 안 할 수는 없지만, 에세이집 전체의 톤은 미래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한다. 안 그러면 뭐하러 골 아프게 이런 글들을 쓸 필요가 있겠나.

 

나도 오지 않은 미래가 궁금하고,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요즘 얘기하는 4차 산업혁명 어쩌구, 그런 소리는 완전히 개소리라고 생각한다. 삶은 기술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건 미래에 대한 얘기는 아니다.

 

존나, 열심히 살아. 안 그러면 너 뒤져. 그리고 니 자식도 뒤져.

 

이런 개소리들은 19세기부터 찬란했다.

 

내가 생각하는 미래에 대한 얘기는 좀 다르다. 좀 더 사회적이고, 좀 더 정치적인 미래에 대한 고민과 불안, 그런 얘기를 하고 싶다.

 

50이 되어서도 원초적인 욕망을 아직 내려놓지 못했거나, 어린 시절의 공포감을 떨구지 못했다면...

 

100년 전만 해도, 이젠 삶을 내려놓고, 손자 보는 재미로 나머지 시간을 버틸 나이다. 의미 없는 것들은 내려놓을 나이도 되었다.

 

4.

하여간 언제까지 쓸지, 언제 나올지, 그런 건 아직 모른다.

 

메모 형식으로 준비한 것들이 좀 있기는 한데, 쓰다 보면 구성과 흐름이 생기기 때문에, 일단 흐름 가는 대로 맡겨놓을 생각이다.

 

하여간 초고는 3월 내에 끝내는 게 목표다. 그렇지만 그건 일단 세워놓은 기계적인 목표고. 중간에 뭔 일이 생기고, 뭔 변덕이 생겨날지, 알게 뭐냐다.

 

한 가지 생각은 있다.

 

이번에는 끝까지 가 볼 생각이다.

 

여러 가지를 고려하면서 얘기를 중간에 세우거나, 멈추거나, 그렇게는 안 할 생각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나도 이 질문에 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근혜는 벌써 내려갔고, 명박도 감옥 갈 것 같다. 그럼 세상 좋아질까? 그 다음에 내 삶은?

 

이런 얘기를 나도 고민해보려고 한다. 삶은 늘 그렇게 구질구질하다. 이번에는 구질구질한 얘기를, 가능하면 추접스럽지 않게 끌고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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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도, 이재영과 같이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다...)

 

1.

전라북도 군산 바로 옆에 새만금이라고 부르는 바다가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있거나 말거나, 그럴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내 삶을 배웠고, 내 삶이 형성되었다. 새만금 방조제 위에 활동가들이 올라갔고, 그 위로 물대포를 쏜 날이 있었다. 그 때 삭발하고 농성하다가 물대포를 맞고 바다에 빠진 사람들이 몇 명 있다.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남인순의 남편이 맨 처음 빠졌다. 그 다음에 빠진 여성 활동가가 있다. 그 다음 해에 나는 그녀와 결혼하였다. 양 쪽 집에서 다 반대가 심해서, 잠시 동거생활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 밤, 집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 열어."

 

조그만 여행용 캐리어 하나 들고 막 집에서 나온 그녀는 그날부터 나와 같이 살았다.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녀에게 꼼짝도 못한다. 동거에서 결혼까지 그리고 지금의 삶까지, 내가 결정한 것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삭발하고 새만금 반대농성하던 그녀는 아름다운 것을 넘어, 진짜로 강하고 잘 나 보였다.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새만금에 걸었다. 삼보일배 행렬이 서울로 들어올 때, 같이 참여한 유일한 유명인사가 당시 민주노동당 대표였던 권영길이었다. 얼마 못하고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아쉽지만, 거기까지. 그 일을 주선한 민주노동당 파트너가 이재영 정책국장이었다. 그 때 처음 만났다.

 

그와 나 사이에 오고 간 메일들은 실수투성이였고, 배꼽을 넘어 사람들 영혼을 쏙 빼놓은 사연들이 많았다. 이재영은 삼보일배를 '일보삼배'라고 썼는데, 그나 나나, 이 소소한 실수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 메일 그대로 삼보일배 활동가들에게 보냈는데, 난리가 났다.

 

"아니, 삼보일배가 아니라 일보삼배를 해야 권영길이 나온다는 거야?"

 

그들은 이 말을 이렇게 이해했다. 세 번 걸어가고 한 번 절하는 삼보일배도 힘들어 죽겠는데, 민주노동당은 이걸 더 높여서, 한 번 걷고 세 번 절하는 일보삼배를 기대하고 있다... 밤중에 급하게 전화가 왔다.

 

", 진짜로 일보삼배를 해야 하는 거야? 여기 스님들, 신부님들, 다 죽어!"

 

작은 실수 때문에 현장에서는 긴 토론을 했다. 그리고 일보삼배는 어렵겠다고 이쪽에 양해를 구하기로, 진짜 큰 맘 먹고 전화한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착했다. 

 

2.

이재영은 내가 하던 일을 많이 도왔고, 나도 이재영이 하던 일을 많이 돕게 되었다. 일보삼배 건 이후로도, 이재영의 손에 들어가면 실수든 기획이든, 심각한 일들이 왁자지껄한 코믹 에피소드로 바뀌었다. 그 이후로 몇 년간, 거의 대부분의 일을 이재영과 같이 했다. 여행도 많이 다녔다. 내가 송파구 살던 시절이었는데, 이재영네 집은 바로 옆 동네의 임대주택이었다. 당시 민주노동당 당사가 MB가 집권할 때부터 쓰던 바로 그 한나라당 당사였다. 지금은 한나라당 당사가 된 그 건물 사무실 근처에서도 술 마시고, 집 근처에서도 술 마시고, 엄청나게 마셨다.

 

우리는 결혼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재영도 연애를 시작했다. 결국 둘 다 결혼을 했다. 송파구에 살다가, 강북으로 이사를 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서로 얘기를 했다. 그래서 같이 송파구를 떠나서 서로 멀지 않은 동네로 이사를 갔다. 아이도 낳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얘기를 했다. 이재영은 딸과 아들을 낳았다. 우리 집은 아이가 늦게 태어났다. 아들 둘을 낳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나 이재영이나, 삶이 거의 하나가 되다시피 했다.

 

나는 이재영의 부탁으로 민주노동당 당원이 되었다. 그리고 같이 2004년 총선을 준비했다. 그 때부터 몇 년간이 이재영과 그를 후배들이 정말로 꽃처럼 아름답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정말로 꽃처럼 아름다웠다. 스웨덴의 사민주의를 이상형처럼 생각했다. 나는 스웨덴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꿈은 정말로 별처럼 빛났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스웨덴이 만든 압솔류트 보드카를 사 주는 일 정도였다. 나는 스웨덴에 가 본 적도 없고, 그들만큼 소소하게 알지는 못했다.

 

그 시절에 우리는 재밌는 개념들을 많이 만들거나 도입했다. 탈핵이라는 말을 그 때 처음 썼다. 그 전까지는 반핵이라는 말을 주로 썼다. 시민단체는 반대만 해도 되지만 실제로 국회의원을 배출하는 공당에서는 반대만으로 안되고, 그 다음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탈핵이라는 용어를 썼고, 중간 위기 때 버퍼로 사용할 LNG 발전, 그게 내가 만들었던 기본안이었다. 환경성 질환이라는 용어도 그 공약집에서 만들었다. 그 전에는 공해병이라고 불렀는데, 일본 느낌도 많이 나고 환경의 폐해를 너무 좁게 해석하게 되는 문제가 있었다. 몇 년 후 환경부에서 이 용어를 공식적으로 썼고, 관련된 기구도 만들었다. 미세먼지 문제도 그 때 많이 논의했었다. 그런 이유로, 네 첫 책이 미세먼지에 관한 책이 되었다. 결국 그 얘기를 가지고 저자로 데뷔하게 되었다.

 

내가 새로 이사간 집은 마당이 있는 전세집이었다. 지금만큼 유명해지기 전의 노회찬과 이재영과 그 마당에서 삼겹살을 구워먹은 날이 있다. '불판'으로 약간 유명해진 노회찬이 그 날은 고기 굽는 걸 담당했다. 정말 잘 구웠다. 어쩌면 내 삶에서 그 날이 가장 행복하고 화사한 날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스필버그의 영화 <에이아이>에서 소년 로봇 데이빗은 단 하루, 엄마와 하루를 같이 지내는 선택을 한다. 나도 내 생의 단 하루를 고르라면, 그 날을 고를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진보정당이 초창기 시절에 주유소가 보이는 작은 사무실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 시절 공식적인 상근자는 노회찬과 이재영 둘이었다.

 

3.

2004년 총선에서 딱 노회찬까지 국회의원이 된다. 그리고 한동안의 평온한 시기가 지난 후, 나중에 민주노동당 분당으로 가고, 결국 몇 번에 걸친 분당으로 치닫게 되는 바로 그 사건이 시작된다. 이재영은 당 정책국장에서 해임된다. 그는 더 이상 당내 주류가 아니었다.

 

이제는 이재영 먹여 살리는 일이 당장의 시급한 일이 되었다. 이재영은 레디앙이라는 인터넷 신문의 기자가 되었고, 나는 레디앙에서 책을 냈다. 그렇게 같이 준비한 책이 <88만원 세대>였다. 원래는 좀 더 복잡한 계획이 었었는데, 이재영의 월급이 급하게 되면서 나도 급작스럽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책을 준비하자는 첫 얘기를 이재영과 했는데, 결국 책의 최종 편집도 그가 하게 되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책은 정말 잘 팔렸고, 이재영이 레디앙에서 월급 받는 데 문제가 없게 되었다. 그는 매 주 여러 인사들을 만나면서 인터뷰 기사를 썼고, 나는 그와 나누었던 얘기들을 계속 책으로 냈다.

 

한동안 이재영은 방이동에서 여의도까지 자전거로 출퇴근을 했다. 그 때는 술 한 번 마시는 게 진짜 거창한 행사였다. 일단 여의도까지 차를 몰고 가서, 왜건형 차 뒷트렁크에 자전거를 쑤셔 넣었다. 그리고 그의 집에 가서 자전거를 내려놓고, 다시 우리 집에 와서 차를 주차를 한다. 술 먹는 준비 작업까지 최소 두 시간은 걸리지만, 그 불편 정도는 돈이 없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재영은 거의 돈이 없었고, 나도 늘 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술은 너무 먹고 싶은데, 둘 다 돈이 없었다. 그렇다고 돈 있는 누군가를 부르는 것은 창피한 일이었고. 이재영이 잠시 기다려보라고 하고 은행으로 갔다. 은행에서 나오면서 진짜로 해사하게 밝은 표정으로 주먹을 쥐고 말했다.

 

"우리는 지는 법이 없지~!"

 

민주노총에서 그가 얼마 전에 했던 강연료 20만원이 막 입금되었다. 석촌호수 근처에서 진짜 재밌게 놀았다. 그 후로 "우리는 지는 법이 없습니다!", 이 말이 나와 이재영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 되었다. 책에 사인할 때, 이 글귀를 자주 쓴다. 그 시절, 나와 이재영은 지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아니, 그런 상상을 싫어했다.

 

그 시절에 이재영과 했던 약속이 있었다. 우리가 아주 나이를 먹으면 무엇을 할까, 그런 얘기를 했었다. 우리나라에서 사민주의 정당도 자리를 잡고, 녹색당도 자리를 잡으면, 그 때는 정말 아무 고민 없이 공산당을 만들면 좋겠다는 얘기들을 서로 했었다. 조선 공산당 말고, 그냥 제도화되어서 약간씩 부패도 한 그런 유럽식 공산당, 그런 게 있으면 좋을 것 같다. 그게 그와 했던 거의 유일한 약속이었다. 유럽에서 공산당은 그렇게 참신하지도 않고, 어느 정도는 기득권이기도 하다. 그 정도 정당 하나는 언젠가 한국에도 있으면 좋지 않을까?

 

4.

이재영은 공식적으로는 국졸이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전부 검정고시로 나왔다. 대학은 서울대에 입학은 했지만, 운동 하느라고 졸업은 못했다. 최종 학력이 인정되지 않으면 중간 학력도 인정되지 않아서 자신은 국졸이라는 것이 이재영의 주장이었다. 물론 아무도 확인하지 못한 얘기다.

 

원래도 학력, 학벌, 그런 얘기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이재영과 지내면서, 진짜로 나도 학교, 학벌, 학번, 나이, 이런 거 전혀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그런 거 물어보지도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에 어떻게 하면 웃길까, 어떻게 하면 웃을까, 그런 걸 더 많이 고민하게 되었다. 소수파에서도 소수파, 마이너에서도 마이너, 그렇게 살았다. 환경운동은 좌파 내에서도 소수다. 진짜로 명랑한 삶은 이재영에게서 보았다.

 

이재영은 인민노련 출신이다. 말만 그래서 가끔 '인민'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인천 지역을 의미한다. 워낙 이재영과 그의 친구들과 같이 다녔더니, 나중에는 나도 인민노련 계열로 분류되었다. 인천에 있던 공돌이 이재영이 울산 지역에 작전을 하기 위해서 처음 경주로 내려간 얘기는 감동적이다. 그 얘기를 가지고 <이상한 나라의 인민노련>이라는 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표지에는 이재영과 노회찬의 얼굴을 넣고, 버스 광고를 꼭 하고 싶었다. 진짜로 노회찬 얼굴이 버스에 달려서 질주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책은 쓸 수 없게 되었다. 그 비밀조직의 은밀한 사연들을 얘기해줄 사람이 없다.

 

2012년 대선을 며칠 앞두고, 이재영은 죽었다. 암이었다. 그 해 여름에 큰 아이가 태어났다. 우리 집 큰 애는 아빠의 친구 이재영을 한 번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상한 나라의 인민노련>의 주인공은 너무 일찍 죽었다. 이재영이 죽으면서 나는 공산당을 만들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 나는 아무에게도 지켜야 할 약속이 남지 않게 되었다. 그는 MB 시대를 버텨내지 못했다.

 

50이라는 나이는 그런 나이다. 정말로 친했던 친구나 지인 한 두명은 이미 세상을 떠난 이후, 그게 청춘의 꽃 같은 삶과 다른 점 아닐까? 내 친구들은 참 많이도 죽었다. 민주노동당에 재영이가 두 명이 있었다. 정책을 맡았던 이재영, 조직을 맡았던 오재영, 나는 두 명의 재영이와 다 친했다. 오재영은 다음 주에 술 마시기로 한 전주에 과로로 죽었다. 광우병 싸움으로 유명해진 수의사 박상표는 자살했다. 꽃 같고 아름다웠던 친구들이 50이라는 나이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우리끼리 이제 보이면, 너무나 친했던 친구나 지인이 한 두 명 죽는 건 술자리 화제거리 축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그게 20대나 30대와 우리가 다른 점이다. 이젠 죽음에 좀 더 익숙해진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죽음도 준비해가기 시작한다. 이젠 남의 일이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에 나오는 대사가 진짜로 이젠 남의 일이 아니다.

 

"좋은 놈들은 벌써 다 죽었어."

 

이재영의 죽음과 함께, 내가 누렸던 명랑의 시대도 끝이 났다. 그리고 "우리는 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 한 문장만 가슴에 남았다. 그와 내가 같이 만든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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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박의 시대를 맞아, 많은 것이 바뀌었다. 가장 큰 것은, 친구가 죽었다...)

 

앞의 글... http://retired.tistory.com/1931

 

2.

궁상도 끝까지 가면 미학이 된다. 궁상주의 미학, 진짜로 우리는 슬픈 척하고 못난 척하는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궁상이 통하지 않으면 갑자기 민중을 들이대며 자존심 싸움을 벌였다. 극단적으로 낮은 곳으로 가거나, 극단적으로 높은 곳으로 가는, 그런 게 다 궁상주의 미학의 주요 요소들이었다. 궁상의 꽃은 '센치'였다. 이건 멋있다는 얘기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센치멘탈 블루스라는 표현이 있다. 센티멘탈의 센티를 ''리고 쓰면 안 된다. 그러면 '센치'한 느낌이 안 난다. 가을에는 본격 센치였고, 겨울에는 눈 와서 센치, 봄에는 남들 봄놀이 간다고 센치 그리고 여름에는 더워서 센치, 마이마이에 테이프를 꽂고 센치멘탈 블루스의 세계에서 나올 줄 몰랐다.

 

멋장이를 의미하는 댄디라는 단어는 90년대 중반 정도에 유행을 했던 것 같다. 아마도 최초로 댄디라는 단어를 달아도 좋은 정치인은 YS였을 것 같다. 하여간 웃겼고, 옷도 잘 입었다. 그리고 잘 생겼다. 해방 이후로 한 방에 그렇게 많은 사람을 웃긴 정치인은 아직도 없었을 것 같다. 2012년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박근혜는 사자가 아니다. 아주 칠푼이다. 사자가 못 된다."

 

그 때 우리는 YS가 한 칠푼이라는 말의 의미를 잘 몰랐다. 원래는 팔푼이라는 말을 썼는데[, 거기에서 1푼 뺀 것이 칠푼이다. 팔푼이만도 못하다는 YS의 말이 무슨 말인지, 진짜로 아무도 몰랐던 것 같다. 순실이 사건이 나고 나서야 그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YS의 유머 속에 얼마나 큰 통찰력이 있었던 것인지를 뒤늦게 알게 되었다.

 

궁상주의 미학이나 댄디즘 모두 IMF 경제위기 이전의 얘기다. IMF와 함께 궁상주의의 시대도 끝났고, 댄디즘의 시대도 끝났다. 흥청망청할 정도로 풍요를 누리던 한국 경제는 21세기의 문턱을 제대로 넘지 못했다. 그리고 한국의 미학은 길을 잃었다. 궁상도 아름다움의 한 방법이고, 댄디즘도 한 방법이다. 집단과 대중의 미학이 사라진 다음, 아름다움의 시대는 끝이 났고, 마케팅만 남았다. 궁상주의 미학의 시대에는 사람들의 궁상을 마케팅이 따라왔다. IMF 경제 위기 이후, 마케팅이 아름다움을 지정했고, 사람들은 따라갔다.

 

몸에 맞지 않는 미학, 사람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을 잊게 되었다. 생각과 삶 그리고 아름다움이 제각각 놀고, 그것들이 제일기획 같은 기획사 데스크에서 만들어지면서 미학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사라졌다. 궁상주의 미학이 멋지지는 않다. 그래도 그것에는 미학이라고 부를만한 요소가 있는데, 한국의 마케팅은 아직 미학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루이 비통에 입성하며 그 자체로 하나의 미학이 되어버린 마크 제이콥스의 그런지(grunge) 패션, 아직 우리에게는 너무 먼 곳의 이야기이다. 샤넬이 시대가 여전히 흘러가고 있지만, 우리는 박근혜와 함께 난데없는 한복 세계화 바람이 불었다. 사회의 미학은 없고, 자본의 미학은 천박했다. 그러다 보니 시대의 미학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홍준표가 자기 네 당 행사인 '청년 아무 말 대잔치'에 가서 진짜 아무 말을 막하고 왔다.

 

"시골 가서 개량한복 입은 사람은 전부 좌파라고 보면 된다."

 

홍준표가 하고 싶은 말의 느낌은 알 것 같다. 그렇지만 자기들이 여당이던 시절에 추진하던 한복 세계화와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말이다. MB 때는 한식 세계화를, 박근혜 때는 한복 세계화를 정부에서 세게 밀었다. 홍준표는 자기 편 쪽으로 드리볼하고 들어간 셈인데, 나는 홍준표의 미학은 무엇인가, 물어보고 싶어졌다. 아름다움, 과연 이 시대의 미학은 무엇일까?

 

3.

30대가 되었을 때, 나는 궁상은 궁상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상명하복이 너무너무 싫어지기 시작했고, 엄숙한 것이 견디기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센치는 청승일 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 멋이 없던 것이었나, 아니면 21세기에 들어오니까 멋이 없어진 것일까? 청승맞은 것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내가 가지고 있던 원래 감성하고도 잘 안 맞는다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었다. 만약 그 시절 내 삶이 편안했더라면 그냥 익숙한 감성과 미학을 고수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내가 하는 일에 내가 만족할 수가 없었다. 지금 돌아 보아도 그 시절의 하루하루는 전부 다 지워버리고 싶다. 그 시절에만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생각해도 힘들고 지겨웠다. 시간이 지나면 과거의 많은 것들이 아련해지면서 그리워지기 마련인데, 지금도 그립지 않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가끔 그 시절로 돌아가는 꿈을 꾸기는 한다. 악몽이다.

 

1년만 더 채우고 일했으면 기술사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시점이었다. 다른 건 아쉬운 게 없는데, 기술사 자격증을 볼 자격을 생각하면서 마지막까지 고민을 했다. 지금은 한국에너지공단으로 이름을 바꾼 에너지관리공단에 결국 사직서를 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정도의 생각만 했지, 뭘 구체적으로 생각해놓은 것은 없었다. 살면서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는 데도 내린 결정이 가끔 있다. 그래도 이 때 사직서를 낼 때처럼 아무도 찬성하지 않은 경우는 없었다. 회사의 조건이 나쁜 것도 아니고, 내 처지가 그렇게 비극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고 싶었다. 왠 만큼 사는 것, 적당히 누리는 것, 그게 아니라 행복하고 싶었던 것 같다. 행복? 아직도 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엄청나게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어쨌든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면 3급 부장에서 2급 부장으로, 슬슬 승진이 기다리고 있던 시점에 내가 내린 결정을 이해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했다. 아주 가끔,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했다. 시민단체와 일했고, 녹색당 만드는 일을 했다. 그리고 친구가 도와달라고 해서, 그 시절의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출할 때 같이 했었다. 하고 싶은 일이었다. 물론 폼은 안 나고, 누가 알아주는 일도 아니지만, 나는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행복했다. 내가 왜 공부를 했는지, 내가 왜 태어났는지 좀 알 것 같았다. 내 주변에는 환경운동 등 시민단체와 민중운동 혹은 노동자 정치를 하는 수많은 도시빈민들로 넘쳐났다. 그들과 무엇인가 하는 일은 보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결혼도 했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이었지만, 나는 건강을 조금 잃었다.

 

그 때 내 삶의 기조가 된 것이 명랑이었다. 명랑하고 싶었고, 명랑한 일만 하고 싶었다. 명랑하게 된 것인지, 명랑을 추구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궁상주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된 것은 맞는 것 같다. 그 시절에 쓴 글을 모은 책이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였다. 아직 30대였다. 궁상주의 미학으로 30대를 시작했지만, 30대를 마칠 때에는 명랑주의에 더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댄디즘 같이 개성과 화려함을 추구할 형편은 못 된다. 그건 잘 생기고, 잘 난 사람들에게는 정말 어울릴지도 모른다. 남 앞에 서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누군가를 이끄는 것도 행복하지 않다. 그냥 나는 20대를 보내면서 내 몸에 꾸질꾸질하게 배어있던 궁상을 조금이라도 털어내고 싶었고, 센치해야 멋져 보일 것 같은 착각을 줄이고 싶었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명랑은 그 중간에서 찾아낸 타협점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시민단체와 질 것이 거의 뻔한 싸움에 앞에 서 있을 때, 민주노동당이 처음으로 원내에 국회의원을 만들 때, 나는 행복했다. 그 행복이 명랑을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 이명박이라는 질척질척거리는 시대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30대의 미학을 내 삶의 마지막까지 끌고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진지하고 엄숙하고, 훈계조라고 하더라도, 난 혼자서라도 충분히 명랑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것 같았다. 혼자 놀기는 진짜 잘 하는 일이다. 명박 시대, 불의 혹은 부정, 부패, 그런 단어로 이해하기 참 어려운 시대다. 거대한 늪같이 질척거리던 시대였다. 그리고 그 시대가 끝나기 전에, 친구가 죽었다. 나의 명랑 시대도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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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센치멘탈 블루스, 궁상의 시대

 

 

 

1.

몇 미터 앞에서 또래 친구가 죽었을 때의 그 느낌이 그렇게 오래 갈 줄은 몰랐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학교마다 이렇게 저렇게 친구나 동료가 죽었다. 분신도 많았고, 의문사 얘기들이 끊이지 않았다. 80년대는 그렇게 시대의 비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나는 학생운동에서 일찍 나와서 민중운동을 시작했다. 순전히 경제학을 전공한다는 이유만으로 버스 노동자들 소위 도시 빈민들에게 경제학을 같이 공부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서울민중연합이라는 단체가 막 만들어지던 시절이었다. 그래 봤자 스무 살인데, 집 나와서 그런 일을 하던 게 지금 생각해보면 약간은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내가 뭘 알았겠나? 어쨌든 버스 노동자들을 비롯한 소위 도시 빈민들의 삶을 그 때 보았다. 내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그렇게 생겨났다. 나만 그런 것도 아니다. 언제 감옥에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가만히 있기가 좀 어려웠다.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더라도 같은 삶을 살까? 남들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아마도 비슷한 일을 했을 것 같다. 너무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다고 친구들끼리는 친하게 지냈을까? 생각이 달라서 친하게 지내기 어려웠고, 분파가 달라서 또 서로 상처내면서 싸웠다. 군인들하고도 싸우고, 친구들끼리도 싸웠다. 그 시절에는 왜 그렇게 서로들 싸웠는지 잘 모르겠다.

 

실연하고 연인을 떠나 보내는 노래, 분노를 더 키워서 언젠가는 이기자는 노래, 노래도 딱 두 종류만 있는 것 같았다. 책도 감당할 수 없게 두껍고, 어려운 책들만 읽었다. <자본론>은 약과에 속했다. 이건 가감승제만 알면 읽을 수 있었다. 문과쟁이에게 수학 공부는 너무 어려웠다. 재미는 있지만, 즐겁게 하기가 좀 그랬다. 그래도 대학원에 갈 생각도 있고, 기회가 되면 박사까지 진학할 생각이 있었으니까 수학을 틈틈이 공부했다. 경제학과는 수학만 웬만큼 하면 뒤가 너무 어렵지는 않다. 그래도 선형대수나 수리통계학 같은 것은 좀 낫다. 뭘 안다고 헤겔의 <정신현상학> 같은 책들을 그 때 보았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틈틈이 본 철학 책들이 대부분 전화번호부 같다. 박사 과정 때 도움이 되기는 했는데, 그 나이에는 진짜 무리였다.

 

연애도 안 했다. 안 하려고 안 한 건 아닌데, 짝사랑이 길어졌다. 이래저래 늘 슬펐다. 해 본 적도 없는 연애인데, 누가 떠났다는 노래를 들으면 진짜로 귀에 짝짝 붙었다. 그리고 그렇게 슬픈 사랑을 하는 사람이 멋있어 보였다. 고독한 전사, 이런 게 멋져 보였고, 실연의 아픔을 딛고 집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어깨에서 광채가 나는 것 같았다. 아마 요즘 식으로 정신진단 받으면 다들 우울증 중증 정도 나왔을 것 같다. 즐거우면 안될 것 같고, 웃어도 안될 것 같았다. 다들 골 난 듯한 표정을 했고, 누가 누가 더 힘드나, 이런 걸 가지고 경쟁을 했던 것 같다. 거대한 못난이 게임, 그 속에 들어가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위로 같은 건 할 줄 몰랐다. 누가 힘들다고 하면, "내가 더 힘들어", 그렇게 내민 손을 탁 쳐버리는 짓들을 하고는 했다. 누가 힘들다고 하면, 그러니, 정말 힘들겠구나, 그런 말을 하는 걸 배우지를 못했다. 나이 먹어서 꼰대가 될 준비가 그렇게 시작된 것이 아닐까?

 

덕분에 실연을 노래한 가수들이 돈을 벌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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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장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

 

 

(장석준이 번역한 책이다. 이런 책이 있는지도 몰랐었다...)

 

작업장 민주주의에 대한 책을 써보자는 제안이 왔다. 보통은 고민하지 않고, 감사한 말씀이지만, 저는 능력이... 요렇게 바로 답변을 한다. 이게, 내가 성격이 좀 더러워서 그렇다. 무슨 고상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시작한 책들은, 어쨌든 마무리는 짓게 된다. 스타일상,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장면과 마무리에 사용할 내용이 잡혀야 책 작업을 시작한다. 그게 안 잡히면 아예 시작을 안 한다. 몇 년이 걸리더라도 강렬한 인상이 있어야 크게 헤매지 않고 종점으로 가게 된다. 물론 하다 보면 결론이 바뀌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런 게 없으면 마무리 자체가 어렵다.

 

남이 제안한 내용들이 부실하거나 의미가 없어서 안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안에서 튀어나온 것이 아니면, 별 신경도 안 쓰게 되는 경우도 많고, 신경을 쓰더라도 결국 마무리를 못하게 되는 일이 많아서였다. 지금까지 작지 않은 책을 쓴 것 같다. 그 중에서 누가 해보자 거나 출판사에서 기획해서 쓴 책은 한 권도 없다. 이렇게 하다 보면 좋은 점이 한 가지가 있다. 책이 잘 될 수도 있고, 잘 안 될 수도 있는데,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은 누구한테 핑계를 댈 수가 없다. 내가 뭘 잘 못했을까, 무슨 생각을 잘 못 했을까, 그렇게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원래의 패턴대로라면, 못 한다고 바로 말하는 게 답인데...

 

며칠째 고민 중이다. 안 할 이유는 아주 많다.

 

민주주의 얘기를 너무 많이 한다. 민주주의가 나쁜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별 내용 없이 그냥 민주주의라고 밀어붙이고 갖다 붙이는 것을 너무 많이 봤다. 그런 하나마나한 얘기에 메뉴 하나를 더 올리게 될 위험이 아주 많다. 내가 하면 다를 것이다?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

 

여기에 별 시덥지도 않은 소소한 이유들도 따라붙는다. 경제학과 민주주의, 사실 본질적인 얘기는 아니다. 정치학이나 사회학처럼 민주주의를 소소하게 분석하는 훈련도 별로 받은 적이 없고, 그렇게 절차와 과정을 나누는 것에 대단한 흥미를 느끼지도 않는다.

 

그래도 고민을 하는 이유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회사, 여전히 개판이다. 이젠 좀 괜찮아질만도 한데, 여전히 개판이다. 치사하고 은밀하고, 뒷거래 많고... 마슬로의 동기 이론이 나온 게 언제인데, 과연 보편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회사가 자신의 삶을 고양시키는 곳이라고 생각할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회사 가는 거 아닌가?

 

문제를 풀 수는 없더라도 완화시키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문제는, 읽고 보고, 만나야 할 작업량이 너무 많을 것 같다는 점.

 

예전에 남재희 장관이 내 책에 추천사 달아주면서 부지런한 사회부 기자 같다고 쓴 적이 있다. 실제로 그 시절에는 어지간한 기자보다 더 많이 현장을 돌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사례들을 조사했다.

 

이제는... 애 둘 키우는 아빠가, 도서관 가기도 쉽지 않은데. 언감생심이다. 이미 알고 있던 사람에게 전화로 물어보는 것도 쉽지 않은데...

 

하면 거의 처음부터 이론 작업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과연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겁부터 난다. 하여... 계속 고민 중이다.

 

나도 이제 50이다. 아픈 데도 많고, 무리할 수도 없고, 아이들도 봐야 한다. 돈도 조금씩은 벌어야 하고. 하여,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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