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살 큰 애, 어린이집 옮기는 마지막 날. 표정 안 좋다...)
1.
가끔 아내에게 맞고 사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 맞고 살지는 않는다. 우리 집 아이들도 아내에게 맞는 일은 거의 없다. 큰 애가 둘째를 밀어서 아찔하게 위험하게 하는 경우에 볼기 맞는 정도다. 그렇지만 큰 애가 아내에게 맞고 정말 서럽게 운 적이 있기는 하다. 여섯 살 때 큰 애가 장난한다고 갑자기 엄마한테 덤볐다가 순간적으로 2단 옆차기를 배에 맞고 떼굴떼굴 구른 적이 있다. 놀라서 아내의 반사신경이 작용한 것이다. 한국 최초의 여자 유도 금메달을 딴 김미정이 고등학생인 아들이 반항하느라고 덤볐을 때 "기술 들어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같은 일이다. 깜짝 놀라서, 그야말로 기술 들어갔다. 졸지에 배에 2단 옆차기가 들어온 큰 아이는 놀라기도 하고 서럽기도 한지, 아이 같지 않은 '꺼이꺼이'하면서 울음보가 터졌다. 아내도 놀랐다.
"미안해, 엄마가 일부러 한 게 아니야."
엄마는 늘 받아주기만 하는 줄 알았던 큰 애가 진짜로 여섯 살 인생을 곰곰이 되새겨보면서 생각하는 순간이 되었을 것 같다. 웃으면 안 되는데, 웃음을 참느라고 혼났다. 앉은 자리에서 급하게 발차기가 나와서 힘이 실리지는 않았다. 나는 처음부터 별 일 아니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진짜로 별 일 아니다. 그렇지만 서러움이 복받쳤는지, 아프거나 배고파서 혹은 장난감을 압수당해서 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울음이 아들에게 흘러 나왔다. 아내가 다리에 힘을 주면, 어지간한 강판은 그냥 부숴진다. 예전 아파트에 살던 시절이다.
"이거, 힘주면 그냥 부숴져, 돈 들어. 그냥 나오지 그래?"
술 마시고 늦게 들어갔다가, 아내한테 너무 심하게 혼이 났다. 그래서 잠시라도 모면할까, 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구었다. 아마 다른 집에서는 잘 안 벌어질 장면 같은데, 아내가 옆차기로 방문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문을 잠그고 들어가면 아내는 옆차기로 문을 부술 수도 있다. 잠시 생각해봤는데, 문 고치는 비용이 싸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냥 문 열고 나왔다. 어색하지만, 다음 날 문 고친다고 돈 들이는 것 보다는 그냥 혼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내는 태권도 4단이다. 처음 봤을 때에는 2단이었는데, 어영부영 3단을 땄다. 4단은 결혼하고 땄다. 승단시험 볼 때에도 강남에 있는 국기원까지 내가 모시고 갔었다. 보통 결혼하면 여성들은 태권도를 그만두는데, 내가 잘 보필해서 4단까지 무사히 올 수 있게 했다고, 아내의 사범들이 나에게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내가 태어나서 훌륭한 사람, 그것도 진심으로 하는 얘기를 들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아내의 사범들은 무시무시한 사람들이었다. 코포아메리카나 대회에서 쿠바의 카스트로에게 금메달을 안겨주면서 대통령 전용기로 돌아와 카퍼레이드를 한 사범님도 있고, 나중에 하버드 대학에 태권도 과정을 연 사범님도 있다. 4단을 따고 나서 아내도 사범연수를 받고 태권도 사범이 되었다. 가끔 태권도 하는 사람끼리 사범연수 얘기를 하면, 서로 남들이 오해한다고 눈치를 준다. 사 '법' 연수가 아니라 사 '범' 연수라고 반드시 강조해서 말해야 한다. 아내의 뒷배는 무시무시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야말로 의리 하나로 사는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나도 기세에서 그렇게 밀리지는 않는다. 나는 태권도 4단과 결혼한 것이 아니라, 아내를 태권도 4단으로 뒷바라지한 남편이다. 여느 태권도 4단의 남편과는 다르다. 살면서 내가 전설이 될 그런 일은 한 게 없다. 그러나 결혼하고 아내를 뒷바라지해서 결국 사범을 만들어낸 훌륭한 남편이 있다고, 태권도 피플 내에서는 이미 약간이 전설이 되었다. 나는 그게 제일 자랑스럽다. 우리나라에는 성인 태권도가 거의 없고, 성인들이 다닐 수 있는 태권도 도장도 없다시피하다.
나도 청와대에 아는 사람들이 조금은 있다. 그렇지만 아내를 당하지는 못한다. 가끔 청와대 근처를 지나면 검은 양복을 입고 머리에 기름 발라 넘긴 아저씨가 갑자기 뛰어와서 나를 당황스럽게 한다.
"어, 누나, 저예요, 저."
아내와 같이 운동하던 남자 후배들이 청와대 경호실 같은 데에서 일한다. 이 얘기를 해줬더니, 사람들이 아내가 엄청난 운동권인 줄 잘못 알아들었다. 운동권이 아니라, 운동, 진짜 운동! 한참 아내가 운동 많이 하던 시절은 진짜로 어마무시했다. 궁금하다고 태극권 도장도 다니고, 별의별 희한한 중국 무술 도장들을 다녔다.
나는 어떤 여인과 결혼을 하는지 알았는데, 큰 아이는 어떤 엄마랑 사는지 잘 몰랐다. 결혼 초에 술 먹고 늦게 들어갔더니 정권이 바로 나왔다. 아내는 진짜로 때릴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내가 뭘 잘 모르고 그걸 막았다.
"막아? 부러져."
진짜로 그렇게 아픈 건 처음이었다. 팔굽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았고, 송곳으로 전체를 찌르는 것 같았다. 그 때 마음을 굳게 먹었다. 한 대라도 맞으면 손해다. 한 방이면 간다.
나는 아내가 태권도 5단도 하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 사이에 아이 둘을 낳았다. 게다가 5단부터는 논문도 써야 한다는 것 같다. 아내는 태권도 대신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이 낳은 다음에 요가도 잠깐 하고, 라인 댄스도 잠깐 했다. 결국 발레로 바꾼 건, 운동이 안 된단다. 준비 운동만 하고 막상 본운동을 안 한 댄다. 요즘 아내는 다시 몸 만들기가 한참이다.
가끔 설거지 할 때, 반대편에 있는 냉장고에 다리를 올려놓고 한다. 아찔하다. 페미니즘이나 양성 평등 같은 복잡한 얘기는 난 잘 모른다. 그러나 아내에게 진짜로 맞으면 어디 한 군데는 부러진다는 정도는 나도 안다. 나만 손해다.
2.
아내와 함께 한 약속이 많다. 학번으로 치면 아내와 나는 9년 차이다. 내가 살았던 시대와 아내가 살았던 시대는 다르다. 80년대 한 가운데, 90년대 한 가운데, 우린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산다. 그렇지만 아내는 내가 아내보다 먼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내가 터무니 없이 일찍 죽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아내가 마흔 살이 되었을 때, 대충 이렇게 막 살 거면 이혼하자는 얘기를 했다. 여자로서, 자신이 가장 좋은 때라고 했다. 지금 더 지나서 자신이 어쩔 수 없을 때 내가 죽으면, 자신은 아주 곤란하게 될 거이라고 얘기했다. 맞는 얘기다. 아내가 그냥 하는 얘기는 아니었다. 많은 것을 고민하고 꺼내놓은 얘기다.
우리는 타협이 아니라, 봉합하는 결론을 내렸다. 저녁 9시가 통금 시간이 되었다. 대충은 지키는데, 9시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9시에 출발하는 것으로, 나는 수시로 통금 시간을 어겼다. 그 뒤로 내 삶은 변명투성이 삶이 되었다.
혹시라도 이혼을 하게 되면, 지금까지의 소득은 물론이고, 미래에 발생할 소득도 모두 아내에게 주기로 했다. 아이 둘을 맡은 아내에게,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나는 뭐 먹고 살아? 그러니까 잘 하란 말이야! 말 대답 해봐야 맞아 죽는다.
내가 가진 것 모두 그리고 앞으로 발생할 모든 것도 아내에게 주기로 했다. 그 와중에 남은 것은,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절반의 명의, 공동명의의 절반이다. 물론 그것도 행사할 수 없는 권리이고, 별 의미는 없는 자산이다. 그러면 혹시라도, 불안하지 않은가? 잘 하란 말이야!
이러면 뭐가 많이 바뀌었을까? 원래도 내 소득은 전부 아내에게 갔고, 나는 용돈 타서 썼다. 말만 그렇게 한 거지, 실제로 현실이 바뀌는 것은 별로 없다. 용돈이 더 늘거나 줄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 소득이 많이 줄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쓰는 돈을 극단적인 미니멀리즘 수준으로 줄였다. 5살. 7살, 아이들은 점점 더 많이 먹는다. 옷과 신발도 점점 더 비싸진다.
통금시간과 재산분배는 요식적이고 실효성 없는 행위였지만, 실제로 의미 있는 행위도 있었다. 2016년 4월, 총선이 끝난 후 나는 정말로 아내를 위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 총선에서 나는 민주당 정책공약단 부단장으로, 사실상 정책 라인을 총괄했다. 우여곡절이 많았다. 다행히 선거는 최악은 면했고, 당시 새누리당은 1당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그 몇 년간 파트너처럼 일했던 정세균, 그가 국회의장이 되었다. 태어날 때 숨을 못 쉬고 바로 집중치료실로 갔던 3살, 둘째는 폐렴으로 연달아 입원을 했다. 아내는 결국 회사를 퇴직했다.
아내가 퇴직하기 전, 우리 집은 아내가 버는 돈으로 먹고 사는 데 충분했다. 그 시절 아내가 출퇴근용으로 산 차가 바로 지금의 모닝이다. 나는 밖에서 하던 일들을 내려놓고 아내가 다시 취업할 수 있게 돕기로 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은, 두 아이를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내서 돌보는 일이다.
아내가 취업을 위한 준비를 하는데 시간을 좀 쓰기 시작한 다음 해, 아내는 작은 연구소에 비상근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원래는 좀 더 긴 시간을 가지고 충분히 준비하려고 했는데, 정부의 어린이집 기준이 바뀌었다. 취업하지 않은 엄마들은 하루 종일 아이를 맡길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지났다. 애들 어린이집 등원을 원래는 아내와 오전, 오후로 나누어서 했었는데, 그걸 내가 다 맡기로 했다. 아내는 탄력시간제이기는 하지만, 다시 상근을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은 이 계산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내가 소득이 더 많으니까, 내가 일을 더 하고, 아내가 아이를 보는 게 맞지 않느냐고 했다. 그건 단기적 계산이다. 아내가 나보다 10년 더 일을 할 것이다. 그리고 소득이 좀 적더라도 아내가 경제적 능력을 갖는 편이 아이들을 위해서도 나을 것 같다. 내가 떼돈을 벌거나, 고액 연봉을 받으면 되지 않느냐?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 능력을 과하게 생각해준 얘기라서 고맙게는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떼돈을 기대하면서 내 삶을 꾸린 적은 한 번도 없다.
시간강사 시절, 도저히 강사 수입으로는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취직시켜주는 대로 가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시간 강사 시절보다 조금 낫게 살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 마음은 변한 적이 없다.
내가 아내를 사랑해서 혹은 아내를 위해서 희생을 감수한 것일까? 나는 내가 가진 약간의 양식과 계산을 통해서 아내의 재취업을 지지하고 돕기로 결정한 것이다.
3.
"어디 가서 100만 원만 벌어오면 되겠네."
아내가 상근을 시작하기 직전, 연봉 협상이 다 끝나고 나한테 한 얘기다. 원래도 작은 연구소라서 많이 주지는 못하고, 탄력근무를 하니까 더 줄었다. 아내는 딱 우리 집 생활비 정도를 생각했는데,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얼추, 100만 원이 비었다.
어디 가서 100만원을 벌어오지? 물론 아이들 본다고 해도 그 이상은 번다. 큰 소리 탕탕 쳤다. 얘기치 않은 일이지만, 공교롭게도 바로 그 다음 달, 나의 소득은 0원이었다. 그런 때도 가끔 있다. 외부 웹 드라이브를 쓰는데, 해외 결제 자금 2천원이 빠져나가지 못했다고 문자가 떴다. 아이고. 창피해서 아내에게 말도 꺼내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다른 게 또 못 나갈지 몰라서 아내에게 죽는 소리를 했다. 그리고 궁상 떨었다. 아내는 웃었다. 내 통장에 200만원을 넣어주었다.
한 달에 100만원만 벌어오면 되는 삶, 그게 나의 50대가 되었다. 해방의 느낌은 아니다. 거친 남자 아이 둘을 맡는 거라서, 다리는 천근만근이다. 홀가분한 것도 아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수도원, 몽생미셀에 갔을 때, 거기서 방을 빌려주는 것을 보았다. 몇 달간이라도 거기에서 너무너무 살고 싶었다. 시도는 했는데, 여건이 안되었다. 몽생미셀 높은 탑의 창문에서 홀연히 바다를 보면서 지내면 홀가분할 것 같기는 하다. 그런 건 아니다. 어깨 위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추운 날 노천온천에서 한 시간 이상 땀을 흘리고 났을 때 드는 아무 생각 없음, 그런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린이집을 옮기기로 했다. 원래도 알았지만 실제로 옮겨보니까 진짜로 한국의 행정은 여전히 좀 너무했다. 형이 먼저 옮겨가야 둘째의 우선 순위가 높아져서 빨라야 한 달, 늦으면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자리가 먼저 난 아주 먼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었다. 좀 편하기 위해서 집 근처로 애들 어른이집을 옮기는데, 그 때까지 나는 아침 저녁으로 두 군데를 돌아야 한다. '일시적 오버 티오 허용', 요런 작은 문구 하나면 해결될 일을 아직도 안 한다. 그들에게는 작은 일일지 모르지만, 나는 아침 저녁으로 지옥의 레이스를 하게 되었다. 한 달에 100만원만 벌어도 되는 상황을 음미하며, 음, 이제 내가 21세기에 왔군, 이러고 싶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의 행정은 20세기적인 것 같다. 전산으로 움직이고, 인터넷으로 개방한다고 해서 21세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내가 잘 난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남편들도 있다고 들었다. 잘 이해는 가지 않는 마음이다. 난 좋다. 아내가 강한 것도 좋고, 글을 잘 쓰는 것도 좋고,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좋다. 남들 보기에는 넉넉하지 않은 돈이겠지만, 그래도 다시 경제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도 좋다.
그리고 내가 100만 원만 벌어도 되는 상황이 된 것도 좋다. 원래도 크게 바라는 것도 없고, 크게 되고 싶은 것도 없다.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돈의 크기가 욕망의 크기다. 욕망이 커서 더 큰 돈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돈을 결정해놓고 거기에 욕망의 크기를 정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제 100만 원 만한 욕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걸 욕망이라고 사람들이 부를까? 내가 어렸다면 왜 사람이, 아니 남자가 왜 그렇게 쫀쫀해, 그렇게 사방에서 난리를 쳤을 것이다. 나도 이제 나이 50이다. 나에게 추례하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쫀쫀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렇게 결정을 하고, 아내는 나에게 몇 달만이라도 술을 끊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렇게 한다고 했다. 마지막 날, 정말 친한 친구 두 명과 남대문 시장의 정말 허름한 횟집에서 소주를 마셨다. 진짜 맛있었다. 술을 영영 끊지는 못할 것 같다. 진짜로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21세기,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나는 이제 21세기로 간다. 그 준비가 되었다. 한국의 청년들이 21세기로 넘어오는데 필요한 돈이 88만원이었다. 돈으로 21세기를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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