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애가 어린이집 가기 싫다고 해서 얘기를 들어봤는데.. 자기가 잘못한 건 맞는데, 선생님이 너무 혼낸다고. 몇 달 전에 반 바꿔달라고 했었는데, 얘기한다고 하더니, 바뀐 게 없나보다.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난감. 내일은 나도 약속 다 비우고, 큰 애랑 어린이집 안가고 집에 같이 있기로 했다. 좋아서 방방 뛴다. 내가 내일 죽었다. 일상이라는 게,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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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모임

젠더 경제학 2018. 12. 16. 22:08

 

조한혜정 선생이 좀 보자고 해서 나갔더니, 엄기호, 신지예 등이 있었다. 엄기호 박사는 진짜 오랜만이고, 신지예는 처음 본다.

 

아마 여성가족부 장관이 자문위원회를 만드는데, 조한혜정 선생이 위원장이 되었나보다. 하여간 이것저것 좀 생각들을 모아 보자는데. 어차피 나도 내년에는 젠더경제학과 10대들을 위한 농업경제학, 두 가지로 고민할 문제들을 좁혀 놓은 상황이라.

 

8살부터 20, 그렇게 고민의 대상을 좁히자는 얘기를 했다. 원래 이런 종류의 연구모임이 생기면 실무 총괄 같은 것을 내가 오래 했었는데, 나도 이제 50이 넘었다. 그냥 되는 대로 구경하면서 생각을 좀 보탤 일이 있으면 그렇게 하면 어떻겠나 싶다. 애 보면서 시간을 많이 쓸 수 있는 형편도 아니고.

 

그래도 재밌는 얘기들은 꽤 나왔다. 엄마들이 육아하는 기간을 단절로 방치하지 말고 이걸 복무 기간으로 계산해주는 것은 어떨까.. 이 연구는 내가 맡기로 했다. 엄마만 그런 게 아니라 아빠도.

 

내가 지금 뭘 하는 중인가? 누가 물어보면 복잡하니까 그냥 애 보고 논다”, 이렇게 말한다. 아마 들은 사람들은 속으로 놀고 자빠졌네”,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예전에는 정부 프로젝트 같은 연구용역이 아니더라도 그냥 뜻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이런저런 연구를 많이 했었다. 그게 선구적인 흐름들을 만들었다. 요즘은 이것도 거의 상업적 활동처럼 바뀌어서, 연구를 위한 사전 연구, 이런 모색이 거의 없어졌다.

 

조한이 우에노 치즈코의 최근 논의를 보면 좀 좋을 것 같다는.. 재미있을 것 같다.

 

아마 포럼 수준의 모임 하나는 만들어질 것 같다.

 

연구 시작할 때 그림을 크게 그리는 사람이 있고, 작게 그리는 사람이 있다. 나는 좀 크게 그리는 편이다. 그리고 아마 지금 한국에서는 내가 가장 과격하게, 그 얘기로 끌어낼 수 있는 최대치를 끌어내려고 하는 편일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정부 등 외부 과제는 안 하고, 돈을 받는 일도 절대 안 하기 때문이다. 필요하면 그냥 내 돈 쓰고 한다. 그래서 눈치 봐야 할 기관이나 총장 같은 대가리가 없다. 필요하면 말고, 아니면 그냥 놀고, 선택 자체가 단순하다.

 

연말, 여전히 나는 돈과는 상관 없는 사소한 모임에서 사소한 얘기를 하면서 살고 있다. 원래 사회랑 호흡하는 학자의 삶이라는 것이, 사실 그냥 사소한 일상적인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들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사소하게 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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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에 대한 연구가 사회과학으로서 한국에 돌아온 내가 처음 해보고 싶었던 연구였다. , 기회가 잘 오지는 않았는데, 나름 혼자서 이것저것 관찰만 했다. 그 때 봤던 10대들이 20대가 되어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88만원 세대가 되었다.

 

그와는 별도로, 농업경제학이라는 책이 진짜 데뷔 초창기부터 해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저렇게 밀려서 지금까지. 순서로는 아픈 아이들의 세대가 데뷔작이 되었지만, 사실 먼저 쓴 것은 음식국부론이었다. 농업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편집 과정에서 집회하는 얘기와 농업 관련된 얘기들이 대거 짤린. 그 때는 내가 힘이 없었다. 내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

 

나중에 csa 관련된 활동을 하면서, 이건 책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김희진하고 농업경제학 책 계약을 했다.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이건 적당한 시기에 마무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올해 여름 고베에 갔다왔다. 그 유명한 고베 생협과 csa를 연결시켜주는 총본진 그리고 마침 바로 그 대표를 만날 수 있었다. , 여기였구나, 전세계적인 그 흐름의 출발지가. 시간이 많지 않아서 오래 보지는 못하고, 그야말로 느낌만 보고 왔다.

 

이 두 개의 엇갈린 길이 2019년 나의 작업에서 딱 만나게 되었다. 농업경제학은 원래는 여성들과 아줌마들의 얘기처럼 하는 게 처음 생각이었는데, 그것보다 더 시급한 게 중3을 축으로 하는 남학생들. 그래서 본격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누구에게 이 얘기를 해줄 것인가, 크게 한 번 급선회를 했다..

 

영국 중산층의 식습관과 도시 연구, 이런 것들이 선행연구였다. 그리고 결국 제이미 올리버가 등장했다. 그래서 바꾼 게, 중학생들의 교과목.. 불량 청소년들에 대한 구호사업처럼 시작한 제이미 올리버의 일이 결국 공교육 전체로 퍼져나간, 그런 사회적 개혁 과정 같은 게 되었다. 그걸로 훈장도 타고, 세계적 스타가 되고..

 

그렇게 제일 시급한 것 그러나 역시 변화를 위해서 장기적인 것, 그걸 농업경제학에 담기로 마음을 먹었다. 제이미 올리버가 했던 일을 왜 우리는 못해?

 

10대에 대한 연구는 보통 인류학에서 많이 하고, 사회학에서도 한다. 그런 연구가 기반이 되어서 많은 청소년 관련 정책이 생겨나고 돈이 들어간다. 우리나라에서는 그게 좀 어렵다.

 

현장에서 보면 주로 정부의 돈이 많이 들어오는 것이 다문화 관련 연구 그리고 젠더 연구, 이런 쪽인 것 같다. 10대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별 거 없다. 그 빈 공간을 그냥 대치동으로 상징되는 사교육이 채운다.

 

내년에는 농업과 젠더, 두 축으로 책을 쓸 거다. 이게 딱 만나는 지점도 사실 중3 남학생들이다. 여기가 분기점이다. 3 남학생들이 여성혐오가 가장 강하다. 막상 만나보면 말도 안 통할 정도다. 너는 남자인데, 왜 여자 응원해? 이런, 얘들 왜 이래.. 이런 변화를 최소한 6~7년 전부터는 목격한 것 같다. 대안학교라고 해서 좀 다를까? 내가 본 바로는 별로 다르지 않다. 뭐가 변화가 생겼다는 것은 알았는데, 그게 뭔지,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88만원 세대를 쓸 때 한국인의 최대 분기점이 대학입학과 대학졸업, 그 시절이라고 생각했다. 2006, 사실 그 때는 그게 맞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좀 아닌 것 같다.

 

국제중 등 분기점을 초등학교로 내리려는 명박네들의 가열찬 시도가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내려가지는 않았다. 대체적으로 중3에서 지금은 그 분기점이 갈리는 것 같다.

 

3이면 대충 안다. 자기가 특목고를 가게 될 것인지, 아니면 그냥그냥 살아가게 될지. 그리고 그 미래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감을 잡는 것 같다. 가끔 동료나 친구들의 고등학교 딸하고 식사를 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 대부분 특목고 그것도 기숙학교에 다닌다. 엄청 부자집도 아니지만, 그렇다. 그렇다면 일반고는? 일부러 찾아봐야 만나게 된다.

 

자기가 특목고를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중3 남학생들이 자신이 잘 대접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까? 애정을 충분히 받게 될까? 그 속에서 다양한 경로로 혐오가 생겨나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물론 파편적으로 많이 지적된 얘기지만, 이걸 농업 얘기를 통해서 재구성을 해보려고 하는 게 이번 작업의 목표다. 임시로 정크푸드 세대라는 제목을 달았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건, 군대 얘기다. 한동안 군대의 급식 개선과 관련해서 글도 많이 썼지만 조언도 많이 주었다. 군대 급식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생각도 해보지 못한 장애를 만났다. 급식의 질은 더 좋아지는데, 점점 더 군인들이 급식을 먹지 않으려고 한다는 거다. 그냥 매점에서 사먹는 게 훨씬 더 맛있다는.. 어쩌지, 어쩌지, 발만 동동.

 

이게 시작된 게 군대 이전의 일이다.

 

여러가지 의미로 한국 사회의 변곡점이 중3 남학생에게서 걸린다. 게임만 하는 10대와 로얄젤리 먹고 여왕벌로 사육되는 것 같은 로얄코스 사이의 길이 거기서 갈린다. 그게 굳건할수록, 망조든 사회인데, 뭐 차곡차곡 한국은 그 망조든 사회로 가고 있다. 이제 몇 년 후면 우리 애들들도 거기로 들어가게 된다.

 

뒤에서 5등 딱 이 또래에 들에 관한 개념들을 몇 번 만들고 글도 쓴 적이 있기는 하다. 반응은 영 시원챦았다. 그래서 그냥 정크푸드 세대로 가려고 한다. 내 데뷔작이 아픈 아이들의 세대였다. 미세먼지 문제를 그 때 처음 다루었다. 그 때 내가 보았던 그 아이들이 이제 자라서 딱 정크푸드 세대나이가 된 것이다. 그런 큰 흐름으로 보면 오히려 ‘88만원 세대가 방계 작업이었고.

 

하여간 이렇게 기본 가닥을 잡았다.

 

정크푸드 먹어도 된다. 그러나 정크푸드만 먹는 걸 슬픈 일이고, 정크푸드만 맛있다고 하는 것은 진짜 불행한 일이다. 그런데 이게 한국 청소년들이 걸어가는 길이다. 쯧쯧쯧, 그렇게 할 일은 아니다.

 

이게 21세기 버전의 격차 사회에 대한 얘기고, 계급사회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다.

 

난 원래 바닥부터 박박 기는 스타일의 작업을 더 좋아하고 그게 더 익숙하다. 박사과정 때 내가 속했던 연구소가 파리 10대학의 경제인류학 연구소였다. 맑스계열 연구를 하기는 하는데, 위에서 밑으로 내리는 스타일보다는 좀 박박기로, 현실적인 연구를 하려는 학풍이 좀 있었다. 그게 DNA처럼 내 몸에 남았다.

 

인터뷰도 하고, 현장도 돌아다니고, 핑계 대고 외국도 좀.

 

3이나 고1 자녀 있으신 분들, 사례 댓글로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빼곡빼곡, 사례들로 채우는 책을 만들어보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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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솔직하게 나의 고민을 말해보자면, 지금의 30대, 그들이 20대가 되었을 때, 난 그들을 조금은 이해했던 것 같다. 내가 이해한 그대로 그 시절을 묘사했고, 그게 '88만원 세대'라는 책이 되었다. 사전 연구로, 난 그들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20대, 사실 잘 모르겠다. 변화가 너무 빠르다. 억지로 내가 아는 틀에 우겨넣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그래서 내 출발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10대 연구로 돌아갈 생각이다. 진짜 무명 시절, 그 시절의 10대를 열심히 봤었다.

그냥 그 시절처럼, 내가 출발한 곳으로 돌아가, 다시 10대 연구를. 다음 주에는 전주 완산고에 강연을 간다. 머리 박고, 다시 밑바닥부터, 지금의 10대 연구를 다시 할 생각이다. 그 접점이, 농업이다.

포기할 건 포기하고. 나는 지금의 20대는 정말 모르겠다. 억지로 알려고 해봐야 될 것 같지도 않다. 이제 나는 50대.. 아직 10년은 남았다. 다시 시작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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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고개 시절, 배우 정진영, 이준익과 함께..) 

 

2011년 설날은 영화 <평양성>이 망한 해였다. 이준익은 물론이고, 당시 타이거 픽쳐스를 맡고 있던 조절현도 완전 패닉. 이준익은 은퇴를 선언했고, 전부 멘붕. 이송원과 내가 이 팀에 합류하게 된 것은 <평양성>의 실패로, 더 이상 해 볼 도리가 없던 조철현이 진짜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새로운 사람들과 다시 시작하기로 한.

 

그 시절 나는 김미화 누님과 나는 꼽사리다만들고 있었고, 책도 그런대로 잘 팔렸다. 그리고 경제 대장정이라고 이름 붙인 일련의 시리즈 책들을 순서대로 정리해가던 중이었다. 글쎄, 블랙리스트 사건이 나중에 알려지기는 했지만, .. MB 후반기, kbs 등 몇 군데 출연하기로 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출연진이 바뀌기도 하고, 방송 자체가 없던 일로 되기도 했다. 그 중에 백미는 아예 방송 자체가 없어지기도. 이래저래 괜히 뭐 한다고 해봐야 민폐나 끼칠 것 같아서, tv는 물론이고 공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예 포기한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조철현 등 통료와 이제는 전설이 된 아리랑 고개 사무실에서 지지고 볶고. 돈이 없어서 누구 돈 주고 말고 할 거 자체가 없고, 그냥 몸으로 떼우면서 지지리 궁상을 떨던 시절이다. 배우 정진영이 와서 그 시절 밥 사주고 갔던 정도가 기억으로 남는다. 서로 돈이 없어서 뭐 얻어먹을 데도 없고, 그냥 몸으로 때우던.

 

보통 추억은 지나면 적당한 기억으로 미화되거나 아련한 기억으로 남는데, 그 때는 너무 힘들어서 그런지 그런 것도 없다. 그렇게 몇 년을 헤매다가 나중에는 도저히 이렇게는 안 되겠다, 이사가자.. 그래서 지금의 충무로 사무실로 그 꼬질꼬질한 일상을 버티던 사단들이 전부 이동을 했다. 그렇게 너무너무 힘들고 배고팠고, 그래서 또 서로 싸우게 되었던 아리랑 고개 시절은 끝났다. 그 때 얼마나 힘들었고, 얼마나 싸웠는지 아직까지도 약간의 앙금들이 남아있을 정도다.

 

<모피아>는 그 아리랑 고개 시절에 썼다. 처음에는 간단한 경제 코미디 같은 거 해보자고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된 것인데, 쓰면서 나도 오기가 생겼다. 버전을 거듭하면서 나도 정색을 하고. 마지막 버전까지 가면서, 하여간 나도 고생 할만큼은 했다는 생각이.

 

MB 말기, 마지막 작업은 큰 아이가 태어나는 것과 시간이 맞물렸다. 거기다 이사도 했다. 아내는 병원에 있었고, 나는 아주 복잡한 종료의 부동산 거래를 하면서 진짜 땀 뺐다.

 

그리고는 좀 한숨 돌릴까 싶었는데, 대선판이 커졌다. 문재인과 안철수의 단일화 실패 이후, 국민연대라는 조직을 만들고 거기에서 대선을 총괄하기로 했는데, 엉겁결에 그 기구의 공동대표를 맡게 되었다. 예전 대선으로 치면 선대위원장에 해당하는 자리다. 나꼽살하고, 소설 발간 막바지 준비하는 와중에 선대위원장 역할을 하고. 그리고 막 태어난 아이는 백 일을 향해서 막 달려가고 있었고. 어수선의 절정이었다.

 

다행히 <모피아>는 반응이 좋았고, 드라마 판권도 금방 팔렸다. 영화 판권은, 드라마랑 기간이 겹쳐서 좀 더 후에 팔기로 했는데, 결국 그렇게 가지는 않았다. 대선은 지고, 모두가 멘붕, 그 시절에 <모피아>가 그런대로 버티면서 나는 차분하게 그 겨울을 버텼다.

 

박근혜 시대에 내가 쓴 얘기를 원본으로 드라마 편성이 잡히지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MB 시대에 내가 움직일 공간이 거의 없었는데, 박근혜 때는 더 했다. 집권한 몇 달간은 그래도 좀 괜찮았는데, 그 후에는 좀 치사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조여왔다.

 

그리고 <불황 10>이라는 책이 전환점을 만들어주었다. 둘째가 본격 아프기 전까지, 그런대로 난 큰 변화없이 살던 대로, 그런 느낌이었다. 물론 그 후에 그 모든 것들은 일단 올스톱’.

 

2년 전 여름이었다. 이젠 정권도 바뀌었고, <모피아> 얘기 다시 살려보자는 얘기들이 있었다. 나도 좀 고심을 했다. 아내에게 물어봤더니 미쳤냐”, 이런 소리 들었다. 얘기를 계속 만들어야지, 옛날에 했던 거 쪼물닥거리는 건 영 아니라는.. 그래서 그 해 여름과 가을 사이에 새로 만든 얘기가 <당인리>.

 

그리고 계속 손에 쥐고 있었다. 아직은 시기가 좀 이르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래서 원래 D-day로 잡은 게 올해 12월이었다. 엄청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저렇게 일정을 잡아보니까 그랬다. 그런데 그렇게 못 했다.

 

아이 둘 데리고 뭔가 한다는 게, 늘 일정보다 늦어지게 된다. 생각보다 어렵다. 몸도 힘들지만, 실랑이하고 있다 보면 좋은 심리상태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나, 그런 마음이 종종 든다. 그 상태에서 애 보는 건 할 수 있는데, 생각을 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좀 돌발 변수가 생겼다. ‘국가의 사기는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작업이 되었다. 진짜 죽는 줄 알았다. 50대 에세이는 생각보다 훨씬 짜증나는 작업이 되었다. 중간에 에디터가 바뀌었고, 그나마 마무리한 에디터는 책 나오자마자 퇴사. 완전히 새로 쓰는 정도로 중간에 크게 한 번 판갈이. 하기 싫은데, 그래도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직장 민주주의는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작업이 되었다. 자존심을 걸고, 최대한 읽기 편하게 그리고 최대한 낮은 시선으로, 크게 한 번 탈탈 털었다. 그리고 연말이 되었다. 나는 기진맥진.

 

좀 쉬고 싶은데, 이게 쉴 여지가 별로 없다. 아내도 회사 다니느라고 힘들어서 그런지, 요즘은 청소 제대로 안 해놓고, 음식들 냉장고에 정리 안 했다고 집에 오자마자 막 소리지르고 그런다. 어렵겠지, 그러고 참기는 하지만, 몇 년째 웃는 얼굴만 보여줬더니, 스트레스 받는 사람들이 소리를 나한테 막 지른다. 아니면 인상 쓰거나. 다들 힘들다. 그래도 그나마 크게 힘들지 않고, 스트레스 덜 받고 버티는 나한테 막 뭐라고들 한다. 그리고 애들도..

 

아빠, 코 묻혔어.”

 

큰 애는 내 바지에 코딱지 붙이고 좋다고 한다. 둘째도 코딱지 붙인다고 막 쫓아온다. 도망간다. 이게 뭔 일이래.. 이러고 산다. 행정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정말 최악의 상황인데, 이게 몇 년째 되니까 특별히 더 힘든 건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작업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솔직히, 요즘 나는 따로 작업실 낼 형편은 안 된다. 카메라 렌즈 하나를 더 살 필요가 생겼는데, 150만 원 넘는다. 예전 같으면 모델 넘버 나오면 바로 샀는데, 지금은 그러면 당장 생활비가 달랑달랑하다. 술도 한동안 일본 사케 마셨는데, 얼마 전부터 다시 그것도 소주로 내렸다. 돈이 좀 넉넉해져도 내가 쓰는 돈은 별로 늘이지 않다가, 약간 부족해지면 내가 쓰는 돈부터 먼저 줄인다. 그렇게 지낸지 5년쯤 되는 것 같다. 그냥 참고 지낸다. 나한테 작업실이 필요할까?

 

돈도 돈이고, 애들도 봐야 하고, 이래저래 나와는 좀 거리가 먼 세계의 일이다. 고양이랑 같은 방 쓴다. 서로 나오라고 난리다. 그래도 이런 건 애교라서 즐겁게 생각할 여지가 있기는 하다.

 

<모피아><당인리>는 크게 다르지 않은 작업이다. 그 시절의 동료들이 지금도 그대로 있고, 그래도 다들 그 때보다는 상황이 훨씬 나아지기는 했다. 덜 싸운다. 다만 내가 그 때보다 몇 배로 힘들 뿐이다. 그 때는 아이가 없었고, 주머니 사정도 훨씬 나았다. 나꼽살 같은 방송도 이제는 안 하고, 책 시장은 비교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어졌다. 그래서 인심도 더 사납다. 돌아보면 열악한 요소가 너무 많다. 그렇지만 책을 쓰는 건, 지금 이 시기에 이 얘기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땅히 넘길 다른 사람도 별로 없다.

 

나는 연말에 한 번 크게 그리고 여름에 한 번 좀 작게, 일정을 전체적으로 조율한다. 꼭 필요한 얘기라도 지금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뒤로 넘긴다. 농업경제학이 그렇게 넘기고 넘겨서 내년까지 밀렸고, 나머지 것들도 당장 필요한 거 아니면 다 뒤로 넘긴다.

 

<당인리>는 지금 필요한 얘기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지난 2년 동안 넘겼듯이 또 뒤로 넘겨도 되지만, 이제는 더 넘기기가 쉽지 않다. <당인리> 얘기 후반에 서브 플롯으로 등장하는 발전소가 바로 이번에 비정규직 청년이 죽은 바로 그곳이다. 2년 전, 누적된 문제들이 이제 슬슬 터질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이제 더 미루면 안 될 것 같다.

 

새로 주변을 돌아보며 정리정돈하는 중이다. 그 김에 잠시 <모피아> 시절을 돌아보았다. 대략 6년 전, 그 기간을 나는 죽지 못해서 살아남은 것 같다. 정말 꾸역꾸역, 모멸과 조롱을 일삼는 사람들의 잔인한 말들을 버티면서 지내왔다. 그래도 내 마음에 원망이나 회한 같은 것은 없다. 그래도 나는 행복한 편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조롱하거나 욕한 적은 없다. 가끔 견디기 어렵게 힘들지만, 대체적으로 명랑한 편이다. 그리고 살면서 웃을 일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그 정도면 썩 괜찮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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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애가 만든 스타워즈 제국군 부대. 깜짝 놀랐다. 요즘 장난감 너무너무 잘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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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egye.com/newsView/20181214003407

 

“수평적 기업문화 선택 아닌 필수… 변화 수용해야”[차 한잔 나누며]

군대문화 만연해 있는 한국 직장/공채·연봉제 등 수직 구조 강화/젠더 민주주의, 직장 민주화 핵심/임금격차·유리천장 등 해소해야/강한 위계 현대 기업에 맞지 않아/혁신하는 조직만이 살아남을 것

관련이슈  : 차 한잔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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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12-14 20:15:22      수정 : 2018-12-14 20:15:22

 

‘꼰대, 진상, 갑질….’ 직장 상사 앞에 붙여도 어색하지 않은 수식어들이다. 한국 직장 문화가 그만큼 고달픔을 반증한다. 우리 조직문화는 군대를 닮았다. 상명하복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하고, 윗사람이 부당해도 토 달지 않는 게 살아남는 길이다. 촘촘한 위계질서 속에 수많은 이가 고통을 삼키며 속으로 곪고 있다.

경제학자 우석훈은 한국 직장의 상명하복 문화·갑질 문화가 없어지려면 직장 민주주의 인증제·팀장연수원을 도입하고 여성이 일하기 좋은 직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재문 기자

경제학자 우석훈이 이런 문화를 바꿔야 한다며 팔을 걷어붙였다. 사회 전반의 민주화 지수는 훌쩍 높아졌는데 어째서 직장 문화만 구시대적인지 의문을 제기하며 신간 ‘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춘다’를 내놓았다.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우석훈은 “아직 군대문화를 바꾸자고 얘기하기엔 많이 이르다”며 “한 4, 5년쯤 있다가 책을 내려고 했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남자는 (군대식 조직에) 불편함이 전혀 없어요. 대학생들도 익숙해지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죠. 또 신엘리트인 민주당 계열의 많은 사람도 불편해하지 않아요. 이들이 (대학 시절) 군인들과 싸우다 보니…. 운동권 내 위계가 확실했죠.”

 

한국 직장의 경직된 군대 문화는 일제강점기에 이식되고 군사정권과 함께 자랐다. 공채 문화는 선후배 기수라는 또 다른 수직 문화를 만들었다. 이에 더해 차등화된 연봉제는 팀장의 권력을 강화시키며 수직 구조를 강화했다. 우석훈은 “회사에서 토요일에 등산 가는 나라는 OECD 국가 중 우리밖에 없고 일본도 이 수준은 아니다”라며 “한국이 기념비적으로 이상한 회사 문화”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4, 5년 후에는 다르리라 본다. 그는 “변화는 밑에서부터 온다”며 “지금 대학생들은 학번이 없어지고 서로 ‘∼씨’라고 부르는데 이들이 회사에 들어갈 때쯤 사회가 많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변화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과장 이상 직원은 이상적인 회사로 ‘가족 같은 회사’를 원해요. 반면 대리 이하가 바라는 건 ‘사생활 보장’이에요. 지금 20·30대 초반 직원들은 (회사 사람들과) 밥 먹기도, 영화 보기도 ‘단톡방’도 싫어해요. 그런데 50대 이상은 이런 변화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고, 40대들은 자기네 회사가 망해가는 중이라 생각하죠. 젊은 사원들이 자세가 안 돼서요. 요즘 회식을 유지할 수 있는 회사가 많지 않아요.”

그가 생각하는 직장 민주주의는 ‘여직원들이 억지로 웃지 않는 것, 군대식 모델의 상명하복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해법은 과격하지 않았다. 그는 ‘팀장·젠더·오너 민주주의’ 세 범주에서 제도 변화를 제안했다. 팀장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직장 민주주의 인증제’ 도입과 국가 차원의 ‘팀장 연수원’ 설립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공공기관에 가족친화 인증을 의무화했듯 얼마나 수평적 조직인지 인증받도록 하자는 말이다.

“요즘 신입직원들이 많이 그만두는데, 사장과 싸우거나 3세 승계에 반대해 그만두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바로 위에서 괴롭히니까 그렇죠. 팀장에게 관리 책무가 있다는 걸 우리 사회가 한번도 논의한 적이 없어요. 교육이 무슨 효과가 있겠냐 하지만, 알려주는 것과 그렇지 않은 건 사고 발생 확률에서 차이가 나죠.”

젠더 민주주의는 여성이 일하기 좋은 조직이 되면 다른 사회적 약자의 환경도 함께 개선되기에 제안했다. 우석훈은 육아로 여성이 일을 포기하지 않고 여성 임원의 숫자가 늘며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지켜지면 직장 민주화도 자리 잡으리라 봤다.

“남녀 임금 격차가 너무 커요. 사회 전체적으로 힘들고 춥고 돈 적게 주는 일은 여성들, 약자들이 해요. 편하고 좋은 일자리는 주로 남자들이 가지니, 상위로 갈수록 다 남자들이 올라가죠. 수치로 따져보면 별 거 안 하고 돈 많이 가져가는 건 남자들 아니에요? 나중에는 여성들이 하는 일에 비해 돈을 많이 받아간다고 얘기해야 할 순간이 올 수도 있어요. 하지만 10, 20년 내에는 아니에요.”

마지막으로 오너 민주주의를 위해 유명무실해진 사외이사제와 감사제를 강력 보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우석훈은 “IMF 같은 대형 위기 재발을 막자는 취지로 1999년 사외이사제가 도입됐는데 20년 지나보니 사외이사가 오히려 공식 로비 창구가 됐다”며 “감사 역시 브레이크 역할을 제대로 못하니 오너 일가의 횡포가 벌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제도만 정비해도 지금보다 개선 여지가 많아요. 아마 이게 다음 대선의 주제가 될 거예요. 97년 체제를 20여년 운영해보니 그때 몰랐던 부작용들이 생긴 거죠. 회사가 어떤 틀을 가질 거냐는 상법과 전체 운영 기조를 바꾸는 거라서 결코 작은 얘기가 아닙니다.”

우석훈은 수평적 기업 문화는 이제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라고 강조했다. “국민소득 7만, 8만 달러 국가 중 한국 같은 회사는 없다”며 “옛날같이 큰 공장을 돌리는 데는 군대식 문화가 잘 맞았지만 지금은 공장조차 스마트 팩토리가 들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군대식 조직으로는) 혁신경제로 갈 수가 없어요. 위계를 따라가다 망하거나, 외부의 변화를 받아들여 혁신 속도를 높이거나. 선택지가 둘밖에 없는 거예요. 기분에 따라 선택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는 직장 민주주의가 곧 천국의 도래는 아니라고 했다. 다만 “회사를 덜 지옥처럼 만들 수 있다”고 장담했다.

“회사란 곳은 (늘) 괴로워요. 조직이 변해도 (직장에) 안 오고 싶고, (일을) 안 하고 싶은 건 마찬가지일 테죠. 하지만 지금은 힘들게 들어갔는데 너무 괴로워서 그만두잖아요. 굳이 지금처럼 고통받으며 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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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 카메라 쓰던 시절, 세검정 옛날 내 방. 여기서 책 10권 넘게 쓴 것 같다.. 아이 태어나기 전.) 

 

나한테 왜 계속 책을 쓰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게 제일 대답하기 애매한 질문이다. 수없이 많은 답변을 해봤는데, 아마도 가장 진실된 답변은 그냥 책 쓰는 게 좋아서”, 이런 것 같다. 이걸로 먹고 살아야 한다는 헝그리 정신이 가장 표준 답변이기는 한데, 나는 그런 헝그리 정신을 가졌던 적이 한 번도 없다. 책만 그런 것도 아니다. 나는 내가 하는 거의 대부분의 일을 대충대충 한다. “이거 아니면 나는 죽는다”, 그런 생각 자체가 싫다. 그리고 너무 몰입해서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치는 그런 바보 같은 일도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대충대충, 건성건성, 되거나 말거나, 그런 자세로 살아간다. 그런 내가 책에서 만큼은? 에이, 그럴 리가 있나. 그렇게 목숨 걸고 책을 쓰면, 3권에서 4권 사이, 자살하고 싶은 순간을 한 번쯤은 맞게 된다. 책 쓰는 게 뭐라고, 자살 충동을 느끼고, 우울증 가고, 집안 식구들 달달 볶고.. 그건 아니다. 권장생 선생이 그러시지 않았나, 인생은 소풍 같은 것이라고. 인생의 소풍인데, 책이 목숨 걸? 그런 건 아니다. 그러면 2~3년 하다가 극도의 회의감에 빠져서 결국 가보지 않은 길을 내려놓게 된다. 대충, 살살, 그게 10년 이상 책을 쓰는 첫 번째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책에 관한 책>10년 넘게 책을 쓰면서 생겨난 약간의 노하우에 관한 책이다. 굼뱅이도 기는 재주가 있다고, 많이 쓰다보니까 요령 같은 것도 생기고, 패턴 같은 것도 생겼다. 그리고 저자로서 가져야 할 마음 가짐 같은 것도 조금은 알게 되었다. 소설가가 되는 것과 교양이나 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쓰는 것은 좀 다르다. 소설 작법이나 시나리오 작법 같은 것은 꽤 나온 책이 많은데, 교양 분야는 아직 생각해본 사람이 없다.

 

예를 들어보자. ‘필자라는 표현을 쓸까 말까? 나는 라고 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요런 문장을 본격 책에서 처음 쓴 사람이 나다. 신문에도 나는 라고 쓴다. 요즘은 필자라는 일본식 표현을 쓰는 사람이 많이 줄었지만, 내가 데뷔하던 시절, ‘라고 쓰는 것은 매우 어색한 일이었다. 주로 비평하는 문학 쪽 선생님들이 나를 보면서 요즘 것들, 기본이 안 되어서”, 아주 혀를 끌끌 찼다. 대놓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거는 영어구요, 불어는 on,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주어 처리를 합니다”, 내가 싸가지 맞기는 맞다. 환갑 가까운 초절정 유명 평론가들에게도 불어 문장으로 되치기를 했다. 영어의 피동형과 우리 말의 주어에 관한 얘기다. 왜 건방지게 라고 하느냐고 아주 지랄들을 하셨다. 그래서 근대 이후에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해진 글에 관한 얘기로 뭐라고 되받아줬다. 물론 누구나 다 아는 에밀 졸라의 <J’accuse>에 관한 얘기다. 나는 고발한다, 누가 고발하죠? Je, 에밀 졸라가 는 이라고 했다. 에밀 졸라가 그 사건은 고발되었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시일야방성대곡, ‘오등은이라고 시작된다. ‘를 왜 쓰느냐, 무슨 소리예요? 선생님은 지금 영어 얘기하시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말로 글 쓰는 사람들이구요. 불어, 독어, 다 그렇게 안 해요. Je, ich.. 베토벤이 ich liebe dich라고 했지요, 사랑하게 되었다라고 안 했어요. 뭔 소리예요? 나도 참 성질 지랄맞다. 하여간 그 사건으로 데뷔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할아버지들한테 개싸기지로 단디 찍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책에서 내가혹은 나는으로 시작하는 문장들은 그렇게 스타일이 되었다.

 

내 책은 일반적인 책에 비하면 파격 투성이다. 물론 나는 더 파격으로 가고 싶은데, 아직도 가슴이 좀 쫄려서, 더 과감하고 더 과격하게 못 간다.

 

독자가 읽을 수 없으면, 그건 쓰나마나, 독자에게 감정이 안 생기면 그것도 쓰나마나. 내가 책을 쓰는 기준은 토요일 밤에 시작해서 일요일 아침에 한 숨에 읽을 수 있는 것, 그게 아니면 안 쓴다. 물론 일부러 거꾸로 간 경우도 없지 않지만, .. 그 책은 망했다. 결국 12권으로 기획된 경제 대장정 시리즈가 그 실패로 서게 되었다. 언젠가 해보고 싶은 코멘터리 북도, 바이바이.

 

그렇게 꾸역꾸역 오다 보니 36권을 썼다. 감정, 밀도, 흐름, 시퀀스, 꺾기, 이런 내가 사용하는 기법들이 있다. 그렇지만 그런 기능 보다 100배는 중요한 게 일관성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삶이라는 게 그렇게 일관된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내 삶도 책을 쓰기 시작할 때에는 엉망진창이었다. 논리는 일관성을 가질 수 있지만, 삶이 일관성이 없으면 그 논리도 상황 논리에 빠진다.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안 그럴 수가 없다. 몇 년 하고 좌판 걷을 거면 몰라도, 10년이 넘어가면 논리적 일관성만으로는 일관성을 유지할 수가 없다.

 

결국 저자가 되는 것은 책을 완성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저자를 완성시키는 과정이다. 그게 제일 어렵다.

 

그래서 책은 연예인이나 배우와는 다르다. 책은, 연기하는 것이 아니다. 연구하는 사람, 서술하는 사람, 그 삶이 그대로 책에 투영된다. 연기와도 다르지만, 보고서와도 다르다. 보고서는 기능적이다. 누가 쓰느냐고 별로 안 중요하고, 기능과 결론만 중요하다. 책은 다르다. 그리고 그 인생이 거짓 인생이면, 책도 거짓이다. 책을 둘러싼 저자와 독자와의 메타 텍스트는 그렇게 형성된다. 거짓말을 한 번 할 수는 있지만, 10년 넘게 하기는 어렵다.

 

굼뱅이도 기는 재주가 있다, 이런 얘기를 두 번 하고 싶다. 책에 관한 것 한 번, 영화에 관한 것 한 번, 막상 해보니까 이렇더라.. 영화는 한 10년 후쯤, 그 때쯤 하면 어떨까 싶다. 나도 지식과 경험이 좀 더 쌓이고..

 

책은?

 

기능적으로는 지금 바로 써도 된다. 앞으로 내가 14권의 책을 더 쓰면 50권이 된다. 그 동안에 변화는 오겠지만, 기술이나 기량이 점프하듯이 늘지는 않을 것 같다.

 

내가 체득하고 이해한 기술만 가지고도 많은 사람들이 책 쓰는 시간을 1/3 이하로 줄여줄 자신이 있다. 일반인도 자신이 살아온 삶을 가지고 어느 정도 이상 수준의 책을 쓸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 기능에 관한 교과서라는 게, 원래 그런 거다.

 

내가 남자 애들 둘 보면서도 올해 책 3권을 냈다. 내년도 3권이다. 이렇게 하는 건, 엄청나게 내가 아는 게 많거나, 머리가 거의 천재급, 절대 이런 건 아니다. 기능으로 처리할 수 있는 건 기능으로 처리하고, 좀 더 감정적인 것이나 섬세한 데에 많은 시간을 들이기 때문이다. ‘굼뱅이의 기는 재주에 관한 책이 의미가 없거나, 뭔가 더 많이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못 쓴다. 요즘 내 책이 엄청나게 잘 팔리거나 그렇지는 않다. 책 시장이 힘들어서 그런 것도 있고, 내 인기가 바닥을 달리는 이유도 있고. 좀 복합적이다. 나도 그 상황은 안다. 그래도 꾸준히 하다 보면 티핑 포인트가 오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인생이 원래 좀 그렇다. 참고 기다리면 된다.

 

책에 관한 책을 지금 낼 수는 없다. 지 책도 못 파는데, 누구한테 책이 이러쿵 저러쿵, 지랄하네,그런 헛소리 취급 당하기 딱 좋다. 그래서 티핑 포인트가 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중이다. 이번 직장 민주주의 책에서 그런 티핑 포인트가 올까 싶었는데, 아직은 아니다. 1~2년 내에 오기는 할 것 같다.

 

그 티핑 포인트를 넘기면 쓰고 싶은 책이 또 하나 있다. 몇 년 전에 일본에서 제안이 왔던 책인데, <촌놈들의 제국주의> 일본판.. 그냥 하면 되는 일인데, ‘책에 관한 책처럼, 이것도 티핑 포인트 이후에 내야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쟁여놓고 있다.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누군가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인생에도 사이클이 있다. 책에도 사이클이 있다. 어려울 때는 고개 숙이고, 힘들 때는 버티고, 잘 나갈 때에는? 그 때도 고개 숙여야 한다. 그래야 멀리 간다.

 

나는 별 욕심은 없다. 내 인생을 돌아보면서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 두 개를 생각해보니까, 국민 경제가 IMF급으로 망하지 않는 것 그리고 살아서 전쟁 나지 않는 것, 이 두 개다. 나는 그렇지 않은 세상을 위해서 성실히 는 아니고 살살’ – 살아갈 뿐이다.

 

돌아보면, 내가 많은 사람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하는 건, 내 삶 그 자체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서 있기 때문이다.

 

초창기에 장정일 선배가 그런 얘기를 했다. “10년간 꾸준히 책을 쓰면, 부자는 아니더라도 밥은 먹고 살게 될 거다..” 실제 지내보니까 그렇다. 10년이 넘도록, 밥 먹고 걸 걱정하지는 않았다. , 워낙 쓰는 돈이 적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도움 덕분인지, 그야말로 뼈저리게 느껴질 정도다.

 

마치 장정일 선배가 나에게 도움을 주었듯이, 나도 다음에 올 사람에게 작은 참고자료는 남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책은 개똥이라고 생각하는 순실이 시대도 지났고, 책이 뭐여, 아직도 책 보는 사람 있나, 이러고 있는 시대를 지나고 있다. 그들에게 책이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인가, 보여주고 싶다. 책 한 권 남기는 게 평생 소원인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그게 한국의 힘이고, 저력이다. 나는 그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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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 논문 막 제출했던 시절..)

 

꿈에 다섯 살 때 살았던 외할머니 댁에 있는 다리 위를 운전하면서 지났다. 개봉동. 어린 시절, 나는 외할머니가 키워주셨다. 마포구청에서 받은 장한 어머니상 표창장이 방 한 귀퉁이에 걸려 있었다. 가끔 꿈을 꾸면 개봉동 살던 시절로 돌아가기도 한다. 나는 외할머니 작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큰 애는 오늘 어린이집 신발장 앞에서 오늘은 그냥 집에 있으면 안되냐고 울었다. 이럴 때는 난감하다. 그냥 뭐라고 막 하면서 혼내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그냥 데리고 집에 올 수도 없고. 이따 일찍 데리러 간다고 했다. 그러면 교실 앞까지라도 데려다 달라고 한다. 그렇게 했다.

나는 학교 가는 걸 그렇게 싫어했다. 큰 애가 어린이집 안 가고 싶어하는 건 나 닮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학교 들어가면 더 할 것 같다. 나는 학교 가기 싫었던 게 대학교 가서 없어졌다. 운동권에 술군 스타일로 학교 다니니까, 학교가 너무 재밌었다. 그 시절에 많은 운동권들이 그런 것처럼, 수업도 잘 안 들어갔다. 꼭 뭐가 있어서 안 들어간 것도 아니고. 그 대신 도서관에서 꽤 긴 시간을 보냈다.

유학가니까, 진짜 천국이었다. 대학원 첫 학기 때 헤맸던 걸 제외하면, 수업도 들어가다 말다 했다. 어차피 수업 듣는다고 시험 잘 보는 것도 아니고, 논문 잘 써지는 것도 아니고. 내 맘대로 공부했는데, 점수는 무쟈게 잘 나왔다. 대학원 1년, 코스웍 1년, 그래도 억지로 수업도 좀 들어가고 그러던 시간도 끝나고, 망빵 자유의 시간이 왔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통털어, 나는 박사과정 3년이 최고로 즐거웠다. 수업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

물론 한국에서 대학원 나왔으면.. 좃됐다, 이런 소리 입에 달고 살았을 것 같다. 학과에 설치던 연구소는, 진짜로 공부하다 뭐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러 가고, 자료 찾아주고. 도움 많이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박사과정 그냥 뺑뺑 돌리는.

수업 제안이 오기는 왔는데, 그냥 나는 학위 논문 일찍 쓴다고, 안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용돈이라도 번다고, 아무 수업이나 걸리는 대로 막 해야 한다. 그나마도 요즘은 자른다고 난리다.

박사과정 때 너무 행복하게 지냈던 것 같다. 아마 내가 암으로 먼저 죽은 친구들과 달리, 이 나이에도 아직 버티는 것은 짧지만 너무 행복한 시간의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학위가 끝나고, 마침 출범한지 얼마 안되는 WTO에 추천받아 갈 일이 생겼다. 프랑스는 아니지만 다른 나라에서 교수 제안도 왔다. 일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프랑스에서도 연구원 정도는 갈 수 있었는데, 당시 정권이 좀 거지 같아서 국적을 바꿔야 했다. 그건 좀 아니다 싶었다.

결국 그냥 한국에 왔고, 가을부터 강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학교에서는 그래도 나름 잘 해줬다. 암 것도 아닌 그냥 초보 시간강사인데, 방도 줬다. 나중에 건교부 장관한 서승환 선생이 불쌍하다고, 자기네 방에 있던 책장도 하나 빼주었다. 학부 시절부터 나를 정말로 싫어하던 선생이 몇 명 있었다. 그렇지만 나머지 선생들은, 이상하게 강사하던 나한테 잘 해주었다.

그 해에 한국에서 경제학 사전이나 프랑스에 관한 종합적인 책 중 프랑스 관련된 것, 경제학 관련된 것은 거의 내가 썼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죽어라고 썼다.

그 몇 달 사이에, 이렇게 살다가는 내 정신이 너무 피폐해져서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무 데나 제일 먼저 오는데 간다고, 간단한 원칙을 정했다. 그 때 나를 뽑아준 사람이 이계안이다. 좀 복잡한 사연이 있는데, 하여간 그렇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다 반대했다. 기업에 뭐하러 가냐.. 제일 반대한 사람이 있다. 그 반대가 애정이라는 것은 안다. 고맙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이회창 환경특보가 되었다. 어색했다. 그래도 그 양반 덕분에 현대 있던 시절에도 계속 강의를 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도 봐주고, 학교에서도 봐주고, 강의를 두 개나 했다. 연대 하나, 동국대 하나.

풍요의 시대, 그 시절에 나는 회사에 있었다. 진짜로 풍요로왔다. 아무리 써도 통장에 돈이 넘쳐났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돈이 너무 많아서, 집을 샀다. 그 집이 커지고 커져서, 지금 사는 집이 되었다. IMF 이후에 나와 같은 길을 간 후배들은 나보다 몇 배는 열심히 사는데, 나처럼 풍요롭고 편안한 기간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하는 것 같다.

IMF 이후, 회사가 어려운 순간이 왔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회사에서는 현대건설 기획실, 현대자동차 그리고 대북사업단이라는 세 가지 카드를 제시했다. 그 때 사장으로 간 이계안 따라서 현대자동차 갔으면? 내 인생은 좀 다른 식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현대건설 기획실로 가라고 했다. 좋은 기회라고. 좋은 기회는 개뿔, 인생 패대기치면서 살았을 거다. 내가 만약 토건을 반대하는 쪽이 아니라, 토건을 기획하는 쪽으로 최선을 다 했다면? 어쩌면 한국은 지금보다 더 개판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그냥 있기도 싫고.. 이런 와중에 에너지관리공단에서 팀장 제안과 청와대 근무 제안이 거의 동시에 왔다. DJ 정부였다. 사람들은 다 청와대 가라고 했는데, 나는 "머리에 총 맞았어, 새벽부터 출근하게", 그냥 에너지관리공단 부장으로 갔다. 가서 첫 달에, 월급봉투 보고 깜짝 놀랐다. 이게 월급이야, 보너스야? 그래도 나중에는 꽤 올려주기는 했다.

그 후에 청와대 갈 일이 몇 번 더 있었는데, 다 안 갔다. 갈려면 옛날에 벌써 갔어, DJ 시절에. 몇 년 후에 총리실과 청와대 그리고 외교부에서 거의 동시에 제안이 왔었다. 그 때도 총리실로 갔다. 청와대, 아침 근무 싫어.. 나라를 위해서 일하다가 암 걸려 죽을 일은 없다.

그렇게 사는 게 좋으면 지금도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요 몇 달 사이에도 연구원장 제안이 왔었다. 못 이기는 척하고 약간 빼면서 여지를 남기는 게 일반적인 해법인데, "머리에 총 맞았어요, 싫어요", 여지가 없이 야박하게 단칼에.

아침에 아이들 어린이집 데려다주면서 차분 - 아니 번잡스럽게 - 하루를 시작하는 지금의 삶이 나는 좋다. 그리고 회사에서 일하는 아내에게 등원 보고를 문자로 넣는다. 수 백명 아니 수 천 명이 나를 보고 있는 순간보다, 식구 몇 명, 동료 몇 명 사이에서 다른 사람 도와주고 있는 내 삶이 더 진실하다.

국가를 위해서 뭘 해야하는 거 아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종종 있다. 너보다 내가 국가를 위해서 더 많은 걸 해.. 의미 있는 책 쓰고, 가치 있는 얘기 만드는 게 우리 사회를 위해서 더 많은 기여라고 생각한다.

어린이집 현관에서 그냥 오늘은 집에 있으면 안되느냐고 울고 있는 큰 애를 보면서, 내가 살아온 삶이 잠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이 아이도 거칠고 허당스러운 한국이라는 곳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될 거다. 고집스러운 엄마와 아빠 때문에 남들이 다 권하는 로얄스러운 그딴 거는 이 아이의 인생에 없다.

오늘 하루, 그냥 애들 둘 데리고 집에서 놀아줄 수는 없을까? 고민했다. 아니야.. 나는 비정한 판단을 했다. 그냥 어린이집 교실까지 데려다주고 돌아나왔다.

어제 이런 생각을 잠시 했다. 세상에 목숨을 걸고 자기 인생을 살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 하나하나의 사연이 모두 우주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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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올 것이 왔다. 일곱 살 큰 애는 며칠 전부터 게임기를 사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못들은 척 하지만, 이게 고민은 고민이다. 다들 그렇게 노는데, 얘만 안 사주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일단 시작하면 벌어질 일도 뻔하기는 한데.

 

우리 집 애들은 사립학교도 안 갈 거고, 그냥 되는대로 동네에 있는 학교 그냥 다닐 거다. 로얄코스와는 거리가 먼. 왜 애들을 그렇게 방치하느냐고 벌써부터 아우성이다. 된장. 윗길과 아랫길, 벌써부터 아랫길이 뻔히 보인다고, 나를 한심 맞게 바라본다. 그러거나 저러거나, 나는 최대한의 자유와 여유를 보장해주려고 한다. 그렇지만 이 길의 끝에는, 핸펀과 게임기가 있다. 우리 집 애들만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그러면 그게 과학 하는 마음은 아니다. 로또식 요행수지.

 

부모님 말 잘 듣고, 비싼 학교 다니고, 공부 열심히 하는 중3 남학생이, 잘 찾아보면 어딘가 있기는 할 거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한국의 중3 남학생들은 열심히 게임을 하고, 책 같은 것은 구닥다리라고 생각하고, 여성들을 열심히 혐오할 것이다. 우와. 그 엄청난 적개심, 내가 깜짝 놀랐다. 고등학교 가면? 대안학교 남학생들도 근본적으로 그런 여성혐오에서 많이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2병이라는 말이 있다던데, 하여간 게임기 붙잡고 있는 중3, 어마무시하게 살벌하다.

 

모르겠다. 청와대에 가신 높은 아저씨들은 자녀들이 다들 좋은 학교 다니고 공부 잘 해서 그런지, 방치된 공교육의 남학생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 듯 싶다. 우리 애는,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론 나도 노력을 하겠지만, 세상의 흐름에서 저 혼자 비껴날 수 있겠나 싶다.

 

동네에 수학학원이 있다. 별로 성적은 오르지는 않는데, 애들이 학원은 잘 간댄다. 아줌마들이 곗고 보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들이다. 피자 파티도 자주 하고, 이렇게 저렇게 연애하기 좋은 여건을 조성해주는 것 같다. 하여간 학원에 열심히들 간다. 그래, 가기만 하는 게 어디야. 어떤 아줌마가 정답을 말했다. 학원 안 가고 땡땡이가 기본인데, 그래도 이 성적 오르지 않는 학원에는 열심히들 간단다. 이게 우리 아들들이 몇 년 후에 정면으로 만나게 될 현실이다. 그리고 나의 현실이 될 것이다.

 

성적으로는 여학생한테 밀리고, 돌아서면 게임기, 어쩔 것이냐, 이 운명적 위치 앞에서! 그나마 힘 좀 있다는 한국의 엘리트들은 쯧쯧쯧, 우리 애는 안 그래. 그게 좀 아니다 싶으면, 잽싸게 외국으로 고고씽. 이게 이완용급이 안 되어서 그렇지, 대체 뭐여!

 

여성들을 혐오하며 게임기 붙잡고 있는 공교육의 무수히 많은 우리의 중3 남학생들, 문제아로 찍히고, 사회적 관심도 없고, 그냥 방치. 그렇다고 거기에서 영국 등 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화장실 유머로 대표되는 서브 컬처가 나오는 것 같지는 않고. 뭐야?

 

영국도 우리랑 사정이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이 때 등장한 영웅이 있었으니, 바로 제이미 올리버. 학교에서 학생들이 먹고 있는 것은 음식도 아냐.. 영국에 일대 충격을 가지고 왔다. 그리하야 중학교용 교과목 가정요리기술이라는 정식 교과목이 탄생하게 되었다. 바라바라바라밤!

 

영국에 벌어졌던 농업 혁명과 같은 일과 제이미 올리버의 사회적 등장, 이런 게 뒤져보면 광우병 사태와 뿌리가 다르지 않다. 대충 먹지, 아무 거나 먹지, 그러다 광우병과 함께 영국 농업 폭망!

 

그 뒤에 사회적 변화가 왔고, 제이미 올리버와 함께 그 태풍의 핵은 바로 중학생이 되었다. 그것도 건들건들, 미래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던 방치된 그 공교육의 현장에서.

 

이게 내가 해보고 싶은 농업경제학 책의 기본 밑바탕이다. 제이미 올리버도 했는데, 우리는 왜 못해? 그리고 나는 왜 못해?

 

그리하야, 나도 되든 말든, 3 남학생들에게.

 

공부 잘 하고, 책 열심히 읽는 그런 중3 말고, 그냥 사회가 포기하고, 부모들만 속 태우는 바로 그 친구들을 위하여.

 

그들 손에 어떻게 책이 들어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모른다. 배달방식은 오리무중이다. 하여간 부모든 친구든, 어떻게든 그 손에 책이 들어갔다고 가정하고..

 

그리고 그들이 주말 하루에 읽을 수 있고, 뭔가 가슴에 남을 수 있는 책. 나는 농업경제학을 그렇게 하려고 한다. 되면? 나는 제이미 올리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가 영국에 뿌린 씨앗의 의미를 이해한 최초의 조선 경제학자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학자, 99%핸드폰 팔아 쌀 사먹으면 된다고 믿고 있다. 안 그런 사람들, 손에 꼽는다, 꼽아.

 

최근에 생긴 나의 믿음이 하나 있다.

 

한국의 위기를 돌파하는 장기적이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은,

 

모두가 포기한 중3 남학생이 똑똑해지는 것, 아니면 우리 다 망한다. (그리고 나는 중3부터는 투표권을 주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할 생각이다..)

 

 

(7살 큰 애, 얘가 중3이 되어서 열심히 책 읽고, 공부 착실히 하는 그런 소년이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게임기 달고 있는 중3 남학생이 될 가능성이 확률적으로는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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