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트레이버2

영화 이야기 2017.03.22 11:20 Posted by reti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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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스트 제네레이션 패트레이버, 7편의 영화를 며칠에 걸쳐서 봤다. 2014년에서 2015년, 2년에 걸쳐서 영화 7편이 만들어진 거였다. 딱 둘째 애 태어나고 세 살 될 때까지 그리고 내가 뭐하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던 그 시절에 만들어진 거였다.

봄이 오고, 둘째 아픈 것도 한시름 놓고 나니까 제일 먼저 한 게 실사판 레이버 영화 찾아본 셈이다. 그 동안에 정신이 없어서 이런 거 있는 줄도 몰랐다.

오시이 마모루가 신이라들 하는데, 진짜로 신 맞는 것 같다. 공각기동대는 매트릭스를 비롯해 수많은 얘기들의 원형이 되었다. 그 정도 하면 어느 정도 한 생에서 해야할 정도의 일은 다 한 거다. 그 반에 반에 반에 반도 못하고 그냥 삶을 낭비하게 되는 게 삶이다.

흔히 하는 말로, '한 바퀴 더' 돈다고 한다. 넥스트 제네레이션 패트레이버라는 이 복잡한 제목의 시리즈가, 진짜로 한 바퀴 더 돈 얘기이다.

내 입장에서는 공각기동대보다 더 재밌다. 공각기동대의 최근 시리즈도 봤다. 처음 공안9과가 만들어지는 그 배경에 관한 얘기들이 최근에 다시 하고 있다. 소령이 아직 소령이 아니던 시절...

패트레이버의 특차2과는, 그보다 설정이 훨씬 더 재밌고, 우리의 삶과 더 밀접하다. 그리고 '잉여'와 공무원 사이의 긴장 관계가 더 팽팽하다.

공각기동대는 앞으로 올 미래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전뇌가 더 발달할 것이고, 더 많은 것들이 등장할 것이라고 설정되어 있다.

패트레이버는, 이미 경쟁에서 밀려버린 기술에 관한 이야기이다. 레이버, 이제는 아무도 만들지 않는 두 발로 걸어다니는 게다가 사람이 타고 조용해야 하는 로봇, 경쟁에서 졌다.

언젠가 퇴화하게 될 기술, 이건 지금 우리의 얘기이다. 우리가 하는 많은 일들이 짧으면 10년 길면 20년 내에 사라지게 된다. 그래도 남을 것과 남지 않을 것, 그 불안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오사이 마모루의 얘기는, 그렇게 경쟁에서 애당초 밀려버렸지만, 아직은 문을 닫지 않은 집단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직이지만, 결코 한가하지는 않은.

며칠에 걸쳐 보면서, 진짜로 몸 세포 구석구석의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반지의 제왕, 매트릭스, 해리포터, 그런 세계적 빅히트를 친 연작 시리즈들을 아주 재밌게 봤다. 그런 얘기들은, 대부분 내 얘기는 아니다.

Man of the West...

반지의 제왕의 마지막 전투에서 나오는 대사다. 아주 격론이 붙었던 대사다. 그래, 너희는 서양 넘들이고, 저 중간계 한 쪽 끝의 나쁜 넘들은 동양인이라 이거지.

아무리 보편주의, 범용적 감정을 얘기해도 내 얘기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넥스트 제네레이션 패트레이버는, 딱 우리 얘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 조직, 공기업, 그 중간중간에 잉여 부서들이 있다. 한직, 그렇지만 결코 한가하지 않은...

박근혜와 함께, 한국 자체가 한가한 나라가 되어버렸다. 미국에 끼고 중국에 끼고. 전혀 남의 나라 얘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앞으로 뭘 해야할지, 아니 어떻게 해야할지, 좀 방향이 잡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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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파파 2017.03.22 21: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족보행 로봇의 로망, 아직은 살아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m0ZadoooI0&index=79&list=WL

특차2과와 '국가의 사기'

영화 이야기 2017.03.20 15:33 Posted by reti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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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넥스트 제네레이션 패트레이버 실사판은 편이 있다. 공교롭게, 7편부터 봤다. 그리고 한 편을 더 봤는데, 이게 뭔가, 잘 이해를 못했다.

원래 패트레이버는 극장판은 전부 dvd를 가지고 있고, 그 외에도 볼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찾아봤었다.

주말 내내 애들한테 시달리다가 그 주말의 마지막, 일요일 밤에 아이들 재우고 넥스트 제네레이션 1편의 에피소드 0을 봤다.

뭐지? 이 익숙하고, 오래 전부터 내 피부였던 느낌은?

나중에 보니 감독이 오시이 마모루, 공안 9과의 얘기를 극장으로 옮긴, 바로 그 공각기동대의 오시이 마모루였다.

영화를 보면서, 아니 책이든 소설이든 아니면 시든, 어떤 얘기라도 지난 몇 년 동안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나? 곰곰이 생각해본다.

98년이었던 것 같다. TV판 에반게리온을 처음 봤을 때, 그 느낌과 유사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강렬했다.

수 년 아니 수십년 동안 잠자고 있던 세포 하나하나가 다시 깨어나는 느낌?

내용상 유사한 것은, 2000년인가, <춤추는 대수사선>을 봤을 때...

그 때의 강렬함이 내 안에서 자라고 자라서, 몇 년 후 결국 공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2.
넥스트 제네레이션 시리즈의 백미는 1편이 에피소드 0이다. 에피소드 제로, 이걸 봐야 그 뒤에 이어지는 허무 시리즈의 줄기가 잡힌다. 나도 이걸 안 보고 뒤의 얘기를 먼저 봤더니, 도통 뭔지 감을 못 잡았다.

얘기는 한직에 관한 얘기이다. 한직이기는 하지만, 진짜로 한가하지는 않다. 두 개의 레이버를 운용하기 위해서 3명씩 두 조, 그 두 조가 24시간 비상 대기한다. 물론 비상 상황은 몇 년째 벌어지지 않는다.

편의점을 딱 두 명이 운용하는 것과 같다고 영화는 설명한다. 별로 하는 일도 없는데, 바쁘기는 겁나게 바쁘고, 비상 운용체계이다, 몇 년째.

<춤추는 대수사선>이 헤이세이 공황 이후의 일본 관료의 고민을 담고 있다면, 넥스트 제네레이션 패트레이버도 마찬가지다. 대수사선에서는 일선서의 애환과 본청 사이의 갈등이 중심이다.

패트레이버는 더 하다. 일선에 있는 경찰서가 없어지지는 않지만, 레이버는 이미 기술적 실패에 대한 논쟁이 끝난 상황이라 - 필요없다고 - 부처가 언제 해체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무의미하지만, 최선을 다 한다...

울 뻔했다. 그리고 조금은 울었다.

난 늘 한직에 있었다. 대기업에 있을 때나, 정부 기관에 있을 때나, 심지어는 연구원 부원장을 할 때나, 늘 한직이었다.

그런데 한직이 한가하지는 않았다. 그런 걸 뭐하러 하느냐는, 남들의 관심 밖에 있는 일들을 했는데, 언제 부서가 없어질지 몰라서 진짜로 죽어라고 밤새고 일했다.

한직이 가끔 바빠진다. 회장 보고 할 때, 장관 보고 할 때 혹은 대통령 보고 할 때, 밤 샌다.

영화 에피소드 2는, 이 한직이 가끔 바빠지는 순간을 그리고 있다. 무의미하지만, 안할 수는 없으니까 밤을 새는...

장관 보고로 가장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장하준 교수의 아버님께서, 장관이 되어 상관으로 모시던 시절이 있었다. 겁나 밤 샜다. 장관이 바보면 바보라서 밤 새는 게 힘들고, 바보가 아니면 바보가 아니라서 또 힘들고.

그리고 전체적으로는...

무의미한 일이다.

3.
내 삶은 전체적으로 '한직'이 딱 맞는다. 늘 한직에 있었다. 환경, 에너지, 이런 게 전형적인 한직이다. 아, 그렇다고 해서 바쁘지 않은 건 아니다. 여의도에서는 연구직, 이게 전형적인 한직이다.

지금은?

지금도 한직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들 키우고, 기저귀 갈고, 동화책 읽어주고, 빨래 개키고, 그런 데 쓴다.

한직이라고 안 바쁜 건 아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일본은 90년대 이후 계속 공황이다. 그러다보니 공직과 대기업의 구호와 위상 그리고 내부적 논의가 많이 바뀌었다.

일상의 한직화?

넥스트 제네레이션 패트레이버 시리즈가 딱 그거다. 우리나라에서는 영화화될 가능성 제로, 그렇지만 일본에서는 이 얘기를, 아 딱 내 얘기도, 그렇게 받아먹을 사람들이 있다.

에피소드0을 보면서, 몸 안에 수 년 동안 잠자고 있던 세포들이 막 깨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오 예, 한직. 이게 나의 가장 익숙한 정체성이다. 나, 이런 거 좋아, 딱 좋아.

4.
몇 년째,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 앞에 섰는데, 마땅한 답을 못찾았다.

패트레이버 에프소드 0을 보면서 이 질문에 답을 찾았다.

한직.

공각기동대의 공안9과보다 훨씬 내 삶에 싱크로율이 높은 특차2과 얘기, 진짜 재밌다.

딱 작년 요맘 때, 류승환 감독이랑 사기꾼 얘기를 하면서 '경제 사시꾼'이라고 가제를 잡아놓은 책이 있었다. 출판사와 계약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사기'라고 약간 바뀌었다.

어떻게 풀지, 큰 기둥이 세워지지 않아서 계속 미루고 있던 책이다.

한직, 이 생각이 들자마자, 사기꾼 얘기의 주요 줄기들이 딱 맞춰졌다.

오 예, 구성 끝...

점심 때 이 책의 에디터 만나서 밥 먹었다.

이보 보행 로봇이 왜 시대에 뒤떨어졌는가? 인간의 바보 같은 생각...

재밌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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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경제 책의 마지막 절은 '신들의 경제' 정도의 제목을 달고 종교 얘기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종교 얘기에 얽히는 게 귀찮기도 하고, 또 몇 년된 정보들을 다시 최근형으로 업데이트 할려면 에고고...

그래도 마음을 먹은 것은, 내가 왜 책을 쓰느냐는 근본적인 질문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내가 책을 쓸까? 모른다. 올해까지는 쓸 것 같고, 내년은 나도 모른다. 수 년에 걸쳐 이것저것, 출판사와 계약된 책들은 올해 다 끝난다. 내년에는 출간 계획이 없다. 2005년부터 시작해서 출간 계획이 없는 해는 내년이 처음이다. 갑자기 마음이 엄청나게 바뀌지 않으면 내년 출간계획을 따로 잡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쓸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다.

모르는 게 흠은 아니다. 모든 일을 다 알 수도 없고, 모든 것을 다 예상할 수도 없다. 모르는 게 흠은 아니지만, 모르는 데도 아는 척하는 것은 흠이다. 다음 정권은 어떻게 될까? 모른다. 잘 하기를 바라지만 잘 할지 못할지, 모른다. 어떻게 될지 미리 예상하고 설정할 수는 없다. 급격한 변동이 올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 이상은 나도 모른다. 그러니 미리 예상을 하고, 출간 일정을 세울 수는 없다.

입문서나 청소년용 책, 그런 가벼운 책에 대한 요구를 많이 받는다. 사회과학 방법론에 대해서 딱 한 번 입문서를 쓴 적이 있다. 정말 예외적인 경우다.

처음 책 쓰기 시작하면서, 입문서를 쓰거나 좀 더 대중적으로 편안한 책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들 때, 책 쓰는 일을 내려놓겠다고 나하고 했던 약속이 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책 쓸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아방가르드라는 말을 참 좋아했다. 물론 그렇게 아방가르드처럼 살지도 않았고,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경제라는 주제를 다루는 내 입장은, 가장 첨예한 전선, 바로 그 대치점 맨 앞에 서 있을 거 아니라면 안 다룬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렇게 치열한 전장 한 가운데 어딘가에 서 있지 않을 거라면, 굳이 경제학자라는 이름을 달고 있을 필요도 없고, 그걸 또 어렵게 많은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책으로 낼 필요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만큼은 지금도 변한 것은 없다.

삶은 지난 10년 동안 많이 변했다. 한 때 시민운동의 상근활동가였고, 연대 조직의 사무국장도 했다. 현장 한 가운데에서 살았고, 늘 내 몸은 전국의 현장 어딘가에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더는 현장에 서 있기가 어려워졌다.

맨 앞에 있는 치열한 얘기들 혹은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논의되지 않짐나 궁극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주제들을 연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별 재미는 없다. 그렇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굳이 내가 책을 쓰고, 시간을 들일 이유는 없다.

종교와 경제, 전격적으로 한 권으로 다루어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그건 좀 어려울 것 같다. 나는 늘 치열한 현장에 서 있었다, 그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사회적 경제의 마지막 절은 종교 얘기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앞으로도 이럴 생각이다. 치열한 얘기 아니면 굳이 내가 할 필요는 없다. 언제부터인가, 책 한 권 낼 때 연구조사 등 내가 쓰는 돈이 더 많아졌다. 내 책은, 준비하는데 돈 많이 들어가는 책이다. 그만큼 치열한 얘기니까, 내 돈을 써가면서 연구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거라면, 논쟁을 피하거나 숨어가면서 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간만에, 내가 왜 책을 쓰는가,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는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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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의무사무관 2017.03.16 17: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료와 의료정책에 대해 쓰실 생각은 없으시간요?
    공공행정은 딱히 현실감이나 능력은 없는 분들이 여기저기서 지대나 뜯을려고 하고
    그나마 양심을 지키고 살았던 일정수의 민간 종사자들도 하나둘 나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대로 10년만 가면 소신껏 진료하는 의사들 씨가 마를지도 모릅니다.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

영화 이야기 2017.03.15 12:11 Posted by reti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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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 가장 큰 일이 있다면, 1995년 BBC 드라마로부터 시작한 일종의 다시 연대기를 거의 한 바퀴 돈 것이다. 드라마도 다 봤고, <브리짓 존스의 다이어리>도 다시 몇 번씩 돌려가면서 봤다. 심지어 <킹스맨>도 봤다. 다아시, 바로 콜린 퍼스의 이야기이다. 브리짓 존스 3편이 작년에 나왔으니까, 95년의 BBC 드라마부터 물경 20년간 다아시는 콜린 퍼스가 했었다. <킹스맨>의 극중 캐릭터 이름이 다아시가 아닌 게 서운할 정도였다. 그 때 방한한 콜린 퍼스의 인터뷰 방송까지 찾아서 봤다.


다아시 혹은 콜린 퍼스, 이 얘기는 다시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까지 이어졌다. 원래 소설이 있고, 소설 역시 엄청 히트쳤다고 들었다. <오만과 편견> 패로디는 엄청나게 나왔고, 아직도 나오는 중인가 보다. 다아시를 엄청 좋아하거나, 영국 B급 코메디, 소위 화장실 유머를 그닥 안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도대체 이 돈 들여서 이런 영화를 왜 만들었어, 캐 박살 날 영화다.


<고무 인간의 최후>를 끝까지 볼 수 있는 사람에게 다아시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좀비 영화는 아무 것도 아니다. <고무 인간의 최후>를 만든 피터 잭슨이 뉴라인시네마에서 <반지의 제왕> 만든다고 했을 때, 배신이라고 한바탕 난리들 났었다. 대중적인 감성은 아닐지 몰라도, <고무 인간의 최후>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나름 폭넓게 존재한다.


나는 <고무 인간의 최후>를 보았을 정도가 아니라 DVD로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 이건 간만에 엔돌핀 팍팍 돌게 하는, 도대체 내가 누구이고, 어디에서 출발했는가, 나의 감성의 기원에 관한 영화이기도 했다.


그래, 저 장면에서 바로 "19세기 영국에서는...", 이렇게 역사 왜곡 들어가야지, 갖다붙이기, 그래 바로 저거야. B급 정서에서는 은유와 직설, 이런 게 탁탁 들어가면서 "그래, 저런 게 순실이야", 요 정도로 바로 꺽고 들어가줘야 한다.


원작에서 백작부인 캐서린 드뵈프 매우 강직하고 매력적인 사람으로 나온다. 물론 하는 역할은 좀 그렇다 싶지만, 직설적으로 말하는 와중에서도 나름 상대방을 배려하고, 그리하여 결코 밉지만은 않은 캐릭터이다. 캐서린 여사와 엘리자베스의 논쟁, 이 밀리지 않는 최강의 여상 캐릭터 둘의 설전이 원작에서는 클라이막스에 해당한다.


좀비판 오만과 편견에서는 캐서린 여사가 아예 영국 최강의 여전사이며, 사상최대의 좀비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초강력 캐릭터로 나온다.


오 예, 캐서린 드푀프, 이 정도 해줘야지! 거럼 거럼, 원작을 정말 충실하게 잘 해석했다니까! (이 장면을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나말고 동아시아에 또 있을지는 모르겠다.)


심지어는 캐서린 여사는 애꾸눈 안대까지 하고 나온다. 오 마이 갓! 혹시나 모르고 그냥 넘어갈 관객을 위해서 짚고 넘어간다.


"안대는 기능성이예요, 패션이예요?"


"당연히 기능성이지."


19세기 영국 사교계 여성들의 과장스러울 정도의 패션이 나름 기능성이었다는 꼼꼼함, 이 장면에서 문득 그 시대를 살았던 경제학자, 톨스타인 베블렌을 연상.


영화 시간 대에 집어넣기 위해서 중요한 장면들은 많이 스킵하고 넘어가지만, 결정적 장면들은 대부분 살렸다. 아, 이런 패로디 소설이나 영화를 볼 사람들은 이미 원전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을 것이라는 전제. 그냥 보면, 다아시가 도대체 왜 강물에 뛰어들어? 그 날이 엘리자베스가 나중에 실제로 다아시를 사랑하게 된 첫날.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든 소감, 내가 누구이고,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그걸 다시 깨달았다.


비주류의 비주류, 그게 내가 가지고 있는 많은 감성과 느낌의 출발점이다. 비주류만 해도 벌써 주류 축이지, 뭐. 비주류 축에도 끼지 못하는, 진짜 축에도 못끼는. 그게 내 감성이고, 그럴 때 딱 좋다.


영화 <황산벌>에 악의 축에 관한 대사가 나온다. 그리고 곧 이어,


"이런, 축에도 끼지 못하는..."


난 이 축에도 끼지 못하는, 이 감성이 딱 좋다. 한국에서는 영국식 B급 코미디, 축에도 못 들어간다. 90년대, 2000년대, 프랑스의 극단적 예술영화와 영국식 B급 코미디 그리고 간간히 나오는 이해 난이도 너무 높은 독일 영화, 이런 게 헐리우드가 싫으면서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었다. 그 시절에는 일본 문화가 수입금지라서, 일본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었다.


그 때부터 나는 B급 영화, 그 중에서도 화장실 유머 범벅이고, 도대체 왜 만들었을까, 기획의도 같은 게 잘 안보이는 영화들을 좋아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그렇게 살았다.


유학은 왜? 목표, 그딴 거 없었다. 그냥 되는 대로 살고, 흐르는 대로 흐르고, 가끔 수틀리면 팍 개겼다. 입 다물고 살지만, 가끔 개기는 일도 안 하지는 않았다.


그 시절에 내 피에 흐르는 극단적 비주류 감성, 오 예,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 이걸 보면서 다시 살아났다.


도대체 이런 걸 왜 만들었어? 너는 다아시 다시 한 번 안보고 싶어. 네네, 보고 싶어요, 소희 선생님 (둘째 아이의 작년 담임이신데, 새학기 들어 담임이 바뀌니까 어린이집 가기 싫다고 요즘 난리다...)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아니라 자기가 보고 싶은 거, 다 맞다고 할 때, 아니 난 그냥 딴 거 할래요, 이런 축에도 못끼는 사람들의 많이 가볍고, 약간 저질스러운 정서, 이게 그냥 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에는 이런 캐릭들이 많이 나온다. 간만에 긴장 풀고 편하게 영화 봤다. 딱 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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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이 어린이집에서 요즘 "박근혜는 퇴진하라", 요게 놀이로 꽤 인기를 끈다. 거짓말 할머니(=최순실) , 대통령 할머니, 이런 용어로 어떤 일이 돌아가고 있는 중인지, 기본적인 설명은 해주었다. 요 '거짓말 할머니'라는 용어도 어린이집에서 유행이다.

둘째가 워낙 호흡기가 안 좋아서, 촛불집회에 한 번도 데리고 가지 못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어쨌든 6살짜리 반에서 "박근혜는 퇴진하라", 그런 놀이가 한참인다. 큰 애는 이 말 뜻을 못 알아들었다.

"박근혜는 돼지 나와라, 박근혜는 돼지 나와라."

집에서 이러고 있다. 촛불집회 구경 못시켜준 아빠 잘못이다, 돼지 그만 나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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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통사람 2017.03.15 11: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이들도 옳고 그른건 다 알더라구요.
    조만간 나오겠죠?

    <오늘 한 푼 벌면 내일 두 푼 나가고>
    다 읽었습니다. 유쾌한 부분도 있었고
    마지막 에필로그에 미세먼지 언급해주셔서 반가웠네요.

    둘째아드님 환절기에 안아프길 바랄게요.

  2. Favicon of http://retired.tistory.com BlogIcon retired 2017.03.15 11: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 감사합니다. 미세먼지 얘기는, 별로 주목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꼭 하고 싶었어요. 둘째는, 열흘간 이어지던 감기가 주초에 끝나고, 일단 한시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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