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다 꺼내서 썼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왼쪽 눈에 실핏줄이 터졌다. 눈이 시큰시큰한데, 그냥 안약 넣으면서 버텼다. 

그리고는 이런저런 밀린 일들이나 처리하면서 일주일을 그냥 쉴 생각이었는데, 써야할 글이 하나 밀려서, 어제 오후까지 마무리했다. 그리고는 자기 시작했는데.. 

열 한 시간을 내리 잤다. 나는 피로가 밀리면, 하루 넘게 자기도 한다. 자고 밥 먹고, 또 자고, 그러기도 한다. 그런 거 치면, 열 한 시간은 약과다. 

새벽에 일어났더니, 우리 집 어린이들이 이미 다 일어나 있다. 어린이들은 일찍 자는 대신, 엄청 일찍 일어난다. 아침 밥 해줄 시간이다. 주섬주섬, 이것저것 챙겨서 어린이들 아침 밥 줬다. 늘 이렇게 아침을 주는 건 아니다. 내가 자고 있으면,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다. 깨어 있으면 뭐라도 만들어주려고 한다. 아침밥 안 주면, 그냥 자기들끼리 콘프레이크 먹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좀 아프다. 2주 전에 아내가 해외출장 갈 때부터 아침밥을 매일 해주기 시작해서, 이제 3주째 된다. 생활은 그 동안 매우 불규칙했는데, 새벽 여섯 시쯤 일어나 있는 것만 유일하게 규칙적이었던 셈이다. 그 전에 일어나기도 했고, 밥 해주고 자기도 했고. 언제까지 아침을 이렇게 해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그 기간 동안에 술을 거의 안 마셨고, 아침에 밥을 못 할 정도로 때려마신 적이 없었다. 이렇게 길게 술 때려먹지 않은 적이 거의 없을 정도다. 

요즘은 되는 일이 별로 없다. 예전에 이렇게 어려울 때면 뭔가 움직이면서 돌파구를 찾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급변의 시기, 과거적 방식으로 회귀하는 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직 하지 않은 일들의 순서와 강도 혹은 방법을 바꾸는 일들이다. 시대가 변했다는 건 알겠는데, 뭘 해야 의미 있는 일들을 할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누구랑 할지, 무엇을 할지, 어떻게 할지, 천천히 생각을 해보려고 한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시간이 오면 술을 엄청 때려먹었다. 그리고 술의 힘을 빌어, 푹 잤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사람들과 얘기를 하고, 또 여러 사람과 술을 마셨다. 이제는 피로하면 술이 없어도 푹 잔다. 나이를 먹으니까 생겨난 변화다. 몸의 피로가, 술의 도움 업이도 그냥 뻗을 수 있게 만든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차이는 딱 하나다. 술이 떡이 되어서 자고 일어나면 아침밥을 할 여력이 안 된다. 아마 육체적인 이유라기 보다는 정신적인 이유인 것 같다. 힘들어서 술 먹고 일어났는데, 아침밥 준비할 정서적인 준비까지는. 그냥 피곤해서 자고 일어나면, 아침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며칠 째 저녁 먹자마자 잤더니, 아내랑 길게 얘기한 게 벌써 며칠 되는 것 같다. 아내가 감자를 왕창 삶아서 뭔가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감자 껍질을 안 벗겼다. 쭈구리고 앉아서 으깨지다 만 감자껍질을 벗겼다. 감자껍질에 붙은 감자살을 버리기 아까와서 먹는다, 부슬부슬, 맛있게 삶아졌다. 햇감자다. 아, 노지 감자가 이제 나올 시기겠다. 

20대부터 술 때려 마시면서 살았다. 많은 결정을 술과 함께 내렸다. 이제 처음으로 술 안 때려먹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 별 거는 아니고, 게다가 돈이 드는 일도 아니지만, 뭔가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 것 같은 약간 노곤하면서도 상쾌함이 느껴진다. (그래도 가끔은 친한 사람들과 술 때려먹는 일이 아주 없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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