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손석춘의 최근 생각들을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그가, 고민이 많고, 마음 고생도 싶했을 것 같다.

 

'정파적 신문 읽기의 함정'이라는 제목을 가진 여는 글에서는 노무현의 급작스러운 죽음을 놓고, 그러면서 이 책을 준비하면서 그가 생각했을 마음의 고통 같은 것들이 잘 느껴진다.

 

어떻게 하면 정파적인 것들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그 자신은 정파적인 방식으로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라는 점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아슬아슬한 선타기가 첫장부터 예사롭지 않다.

 

마침 오늘은 유시민이 신당에 평당원으로 가입한 날이다. 손석춘과 유시민, 어떤 모습으로 두 사나이가 만나게 될 것인가?

 

2.

안 그래도 신문사를 한 번 정리해볼려고 몇 번이나 마음을 먹으면서도 밍기적 밍기적거리고 있던 중에, 손석춘의 언론의 지식의 눈을 통해서 정리된 언론사는 흥미로웠다. 몇 가지 내가 궁금해하고 있던 것들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이럴 때면 선배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신문의 등장, 대중신문의 등장, 광고의 등장, 이 과정들은 짧게 서술되어 있지만, 핵심적이었다.

 

4월 7일이 한국에서 언론의 날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고, 당연히 그날이 독립신문 창간일이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독립신문에 대한 몇 개의 얘기들은 알고 있는 것이지만, 손석춘의 독립신문에 대한 해석은 흥미로웠다.

 

3.

손석춘의 이 책에서 가장 흥미를 끌고, 또한 그가 근간에서 쉽게 평가하듯 그렇게 간단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진실(truth)이라는 말이다. 그는 이 말을 세 번을 강조해서 썼다.

 

우리의 프레임에서는 흔히 진실의 자리에 '팩트'라는 말을 사용한다. 나는 이것을 몇 년 전부터 의심하고 있었는데, "신문은 내 분야야!"라고 말하는 손석춘은, 역시 진실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Last Concert'의 강연 주제가 진실이었는데, 이 때 차마 팩트와 관련된 몇 가지 얘기들은 너무 무거울 것 같아서 꺼내지 못했다.

 

이 얘기를 '언론과 정당의 경제학'에서 할지, 아니면 '사회과학 르네상스'에서 할지, 그렇게 생각하던 중, 진리라는 손석춘의 얘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4.

머니 투데이가 이렇게 오래된 것인지는 처음 알았다.

 

경제면에 대해서 손석춘 버전으로 '신문읽기'가 한 번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손석춘만큼 부지런하지 못하다.

 

한 문장으로 하면...

 

조선일보를 대하듯, 경제신문을 대하라.

 

5.

국제기사에 대한 분석은, 전체적으로 좀 약해보였다.

 

손석춘은, 해외발 기사에 대해서 약간 좁게 보는 것 같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들이 있을 것 같은데.

 

6.

안티 조선 - 통칭적으로 - 에 대한 평가와 해석은 늘 어렵다.

 

손석춘도, 불안하게 선을 탄다. 역시, 어려운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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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의 독점

독서감상문 2009. 11. 10. 12:41

(진중권의 <교수대 위의 까치>는 빨리 읽어버리기 아까워, 화장실에 놓고 보는 책이다. 즉, 하루에 한 두 페이지 이상 읽기가 어렵다. 아마도 몇 달 동안, 진중권 읽기가 계속될 듯하다.)

 

진중권은 롤랑 바르트를 인용하면서, 사진 작품에 두 개의 층위가 있음을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나는 그 용어를 layer라고 보통은 사용하는데, 포토샵 용어에서 가지고 왔다. (아직은 무엇이라 번역할지, 마음을 정하지는 못했다.)

 

롤랑 바르트의 studium과 punctium은, 내 용어로 하면 1st layer와 2nd layer 정도, 그리고 나는 3rd layer에 더 중점을 두는 편이다.

 

하여간 용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뭔가가 있고, 이것은 끊임없이 해석되고 재해석되는 것이다.

 

자, 이 시점에서 나는 다시 내가 한 공부로 다시 돌아와보게 된다.

 

나의 경제학은 맑스나 아담 스미스 위에 세워져 있지 않고, 케인즈 위에 서 있지도 않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다 통합했다, 예를 들면 지금의 경제원론 체계를 만든, 베블렌의 제자인 슘페터의 제자이자, 스위지의 동창이었던 폴 사무엘슨처럼, 그렇게 통합을 기원한 것도 아니다.

 

나는 딜타이 위에 세웠고, 조선일보의 이한우가 번역한 딜타이 책 보다는 폴 리쾨를 통해서 만난 딜타이 위에 세웠다. (폴 리쾨르는 파리 10대학 총장이었는데, 그가 책으로 먹고 살 수 있게 되자마자 은퇴를 하고 파리 근교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폴 리쾨르의 삶은, 내가 도달하고 싶은 궁극의 이상향이다.)

 

물론 해석학을 세운 것은 딜타이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어쨌든 딜타이-리쾨르로 이어지는 간결한 선 위에 나의 학문을 일단은 세워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수리생태학의 population theory와 최근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오스트롬까지 이어지는 evolutionary game theory 같은 것들을 올려놓았다.

 

해석학이 후기 구조주의자들에게 의심을 받은 것은, '해석의 독점'이라는 관점으로 알고 있다. 말은 복잡하지만, 해석을 누구도 독점하지 말고, 그 독점에 대해서 악랄하게 조롱하고, 저항하라. 아마 그런 게 대체적으로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해석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대체적인 흐름일 것 같다.

 

(물론 대개의 많은 학문들이 그렇듯이, 그 조롱은 다시 독점적으로 사용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진중권이 < 교수대 위의 까치>의 앞 부분에서 강조하고 또한 다시 환기시키는 것은 '해석의 독점'에 저항하고, 스스로 해석자가 되라고 하는 말이다.

 

다시 한 번 롤랑 바르트의 용어를 사용하면, punctium을 회복, 발견, 혹은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와 같은 것을 하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림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맨 처음의 인상이 있을 것이고, 그 속에서 그것에 환원되지 않는 화가와 우리들 사이의 특수 관계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매번의 특수 관계는 개인에 따라서 동일하지 않게 생산되는 것이고, 이것에 재생산이라는 특수성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해석을 독점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런 논쟁이 숨어있게 될 것 같다.

 

나는 해석은 독점되어서는 안된다는 편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 해석을 조금 쉽게 '주석'이라고 바꾸면, 아주 오랫동안 주석은 독점되어 왔다. 독점된 정도가 아니라, 독점된 주해를 따르지 않으면, 목을 치는, 아주 살벌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이건 우리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정약용의 경세유표는 예론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된다. 이게 주석이 독점된 시기에, 가장 맨 위의 보편화된 또 다른 기표로 자신의 담론을 세우는, 목 날라기 싫은 사람의 눈물나는 수법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진중권의 주문대로라면, 이제 교수대 위의 까치는, 정확하게 이 책이 팔려나간 부수만큼의 그런 새롭거나 아니면 자신만의 punctium에 의해서, 그만한 부수의 책으로 확장되고, 새로운 영역이 만들어질 때, 저자의 기도가 온전하게 드러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진중권이 보라고 하고, 새롭게 puncium 혹은 관계를 만들어보라고 한 그 작업을 하기 보다는, 그를 통해서 진중권만을 보려고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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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김훈...

독서감상문 2009. 11. 9. 19:16

http://www.yes24.com/ChYes/ChyesView.aspx?title=003004&cont=3925

 

yes24에 김훈에 대한 리포트가 하나 올라왔다.

 

와 재밌다.

 

장정일의 신작 소설책을 읽으면서 간만의 충격에 전율을 느끼면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충격감과 절망감들을 느꼈다.

 

그리고 그와 비교할 수 있는 또 다른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잠시 김훈을 떠올렸다.

 

김훈, 참 재밌는 사람이다.

 

김훈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여전히 뻥은, 한국에서 김훈이 최고다. 조선일보는 황석영, 백기완 이런 사람들을 구라꾼이라고 부르지만, 원단 구라는, 김훈이 원단 구라이다.

 

옛날 사람들 중에서, 김훈의 원형에 해당하는 사람을 생각해보면, 아마 이병주가 아닐까?

 

장정일은, 구라와는 또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아닐까? 하여간 아직은 충격파에 휩쌓여, 생각이 잘 정리되지는 않는다.

 

어쨌든, 간만에 펌질이다.

 

(나는 김훈의 팬은 아니라 오히려 그의 스토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는. 내가 알고 있는 진짜 김훈의 모습은, 김훈은 그의 소설에서든, 간담회에서든, 단 한 번도 꺼내지를 않는 것 같다. 딱 한 번, 어느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사케에 대한 얘기를 할 때, 그 김훈은 내가 아는 김훈의 모습과 가장 유사했다.)

 

 

그랬다. (할 수)없는 것은 (할 수)없는 것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고 성립되지 않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신문에 쓸 수 없는 것들, 써지지 않는 것들, 말로써 전할 수 없고, 그물로 건질 수 없으며, 육하의 틀에 가두어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다가갈 수 없고, 긍정할 수 없는 죽음도 있으며, 해석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죽음도 있었다.

바다사자는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고 허우적거렸고, 일어설 수 없는 몸을 일으키려는 몸부림도 쳤다. 아들의 개죽음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오금자도 있었고, 딸의 개죽음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방천석도 있었다. 추적할 수 없고 전할 수도 없는 세상을 말할 수밖에 없는 문정수도 있었고,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노목희도 있었다.

『공무도하』(김훈 지음/문학동네 펴냄)는 그랬다. 이해를 바라지도 않고, 억지로 설명을 하려 하지도 않았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폭력적이 되곤 한다. ‘나를 설득해 봐’라며 이해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강요하기도 하지만, 책은 그런 태도와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어쩐 일인지 뜬금없이, ‘세상에 해가 되는 일을 하느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경구가 떠오르기도 하는.

지난달 26일 서울 홍대 부근의 ‘카페 홍’에서 『공무도하』 출간 기념으로, ‘김훈, 소설가로 사는 법을 이야기하다!’라는 주제로 독자 만남의 시간이 있었다. 아주 분명하고 의심이 없는 태도로 일관했던 그는, 좋아하지도 않을, 힘들었을 이 만남을 감내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행사는 출판사의 상업적 동기가 있다. 책을 써서 원고를 서랍에 넣어둔 게 아니고 출판사에 넘긴 것도 상업 행위에 가까운 거다. 왜냐면 나는 소설을 썼을 때 많은 독자에게 읽히고 싶은 욕망이 있는 거잖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상업적 유통망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럴 때 상업적 유통망은 건전한 거다. 상업적 동기가 있다는 것도 건전한 거다. 상업적이라고 해서 비루하고 추잡한 게 아니다. 이런 자리에 나온 것이 비루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물론 힘든 일이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상업적 동기를 놓고, 비루하다, 고매하다,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일상 속에서 필요한 것이다.”

나 역시 이것은 삶을 버티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아무 쪽도 편들지 않는 그런 글을 쓸 수 있을까. 당신의 마음에 들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않는다. 독자들과 김훈 작가가 나눈 만남을 그저 나의 시선으로 전할 뿐. 독자들이 던진 비슷한 류의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을 묶었다. 막막하긴 해도 최소한 치사하지는 않아서 나는, 썼다. “그래도 기사는 쓰지 마. 치사해. 막막한 쪽이 치사한 쪽보다는 견딜 만할 거야.”(p.129) 당신이 싫어도, 나는 어쩔 수 없다. (※ 사진제공 : 문학동네)

『공무도하』, 40여 년을 묵혀둔 발효소설

『공무도하』는 40여 년 마음에 남아있던 것을 끄집어낸, 말하자면 ‘발효(숙성)소설’이다. 언젠가는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알다시피, 우리가 알고 있는 「공무도하가」라는 고전가요에서 비롯됐다. 나루터에서 벌어진 익사 사고에 대한 이야기. 출전문헌인 『고금주(古今注)』는 이렇게 전한다. 어느 날, 백수 광부가 강에 뛰어들어 죽고, 백수 광부의 아내가 함께 죽었다. 그 광경을 뱃사공인 곽리자고가 보고 자신의 아내인 여옥에게 이야기했고, 여옥이 그 여인의 슬픔을 ‘공후’라는 악기에 맞춰 노래한 것이 공무도하가이다.

“(백수 광부) 부인의 죽음은 백수 광부를 말리려다 그런 것인지, 백수 광부가 죽은 것이 슬퍼서 투신자살한 것인지 경위가 분명하지 않다. 그 경위가 항상 궁금했다. 이야기는 아름답지만 슬프다. 여옥이는 뱃사공 아내인데, 공후라는 하프 같은 악기를 능숙하게 연주할 수 있었다. 이는 일반 가정에서 보기 어려운 악기였을 텐데 뱃사공 아내가 그걸 탔고, 노래는 삽시간에 동네에 퍼져, 매우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었다.”


책을 읽고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다. 등장인물의 이름에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노목희, 장철수, 박옥출, 오금자, 방천석 등. 마침 한 독자가 물었다. 등장인물의 이름에 특별한 이유라도? “사실 이름을 짓기 싫어서 아무렇게나 했다. 특별한 느낌을 갖는 이름은 공을 들여 짓기도 한다. 노목희라는 여자의 ‘목’ 자는 먹일 목(牧) 자다. 목동 할 때, 가축이나 짐승을 거두어 먹인다는 뜻이고. ‘희’ 자는 계집 희(姬) 자. 나머지 이름은 대충 지은 거다. 이름 짓기는 정말 싫다. 특히 여자 이름은 더 그렇다. 소설에 여자가 나오면 이름을 짓는 데 너무 힘들다. 나오더라도 처음에 빨리 죽어야 돼. (웃음) 여자가 없어지면 소설 쓰기가 편해. 되도록 안 나오게 하려고 했는데, 앞으로는 나오게 하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소설에서 노목희는 언제나 문정수를 먹인다. 늦은 밤, 갈 곳을 찾는 어린 양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를 하사하는 존재. 짐승을 거두어 먹이는 목희. 그렇구나. 『공무도하』의 끝을 놓고, 희망과 절망 중 어느 것에 가깝냐는 질문에 그는, “희망이나 절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일상”이라고 답했다. 그는 수평선 너머 등대의 불빛처럼 인간이나 인류를 인도하는 희망 따윈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일상처럼 무서운 운명은 없다고 본다. 그 안에 희망도, 절망도 있는 거다. 동양인들에겐 등댓불 같은 희망은 없다. 그런 희망이 없어도 건전한 사회일 수 있다. 동양인이 생각하는 희망은 인의예지로, 참 아름다운 것이다. 멀리 있는 오랜 생명과 투쟁의 과정을 거쳐 쟁취해야 될 목표나 도덕이 아니고, 이 자리에서 우리들 사이에서 실현되어야 할 덕목이다. 희망의 등대와는 전혀 다르고 고귀한 것이다. 일상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 다음 소설에는 약간의 희망을 말하고 싶다. 물론 그 희망이 일상의 구체성을 배반하지는 않을 것이다.”

책을 읽고 당신은 바뀔 수 있는가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책을 읽기 전과 후가 바뀌지 않는다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는 걸까. 그는 주희의 『근사록』을 꺼낸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주희가 제자들에게 그런다. 논어와 맹자를 읽고 나서 읽기 전과 마찬가지 인간이라면 구태여 그 어려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너 자신이 (책을 읽고 나서) 변화를, 새로움을 이뤄낼 수 없다면 그 책은 무의미한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보여주는 거다.”

그러니까 근본적인 책 읽기가 필요하다는 것. 지식이나 오락을 위해 책을 읽을 수도 있겠지만, 책을 통한 존재의 바뀜, 실존적인 변혁이 보다 근본적으로 요구된다는 것. “나는 책을 많이 읽었는데, 길을 본 적이 없다. 책 속에는 글자가 있다. 말의 구조물이 있는 거다. 지식은 있으나 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길은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땅 위에 있는 거다. 나와 자식, 친구, 이웃 사이에 길이 있는 거다. 책 속에 길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삶의 길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 길은 있으나 마나다. 책 속에 있다는 길을 이 세상의 길로 끌어낼 수 있느냐, 내가 바뀔 수 있느냐가 문제다. 혹시 말을 잘못 알아듣고 김훈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쓰는 사람은, 정말 책을 읽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웃음)”

그런 한편으로 ‘지금’ 우리가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는, “필사적으로 온 힘을 바쳐서 소설을 읽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고 답한다. “젊은이들이 책을 안 읽는다고 온 나라가 개탄하는데, 그들은 근본적으로 대중문화의 권역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본다. 그것은 매우 건강한 삶의 태도다. 책보다는 음악이나 영화에 빠져 있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고 본다. 꼭 책을 읽어야 건전한 거라고 보진 않는다. 소설을 보면서 현실의 의미를 돌이켜 볼 수도 있겠지만, 극단적으로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될 수 없다고 본다.”

그가 요즘 읽고 있는 책은, 파브르의 곤충기와 식물기, 그리고 장자란다. “요즘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는데, 곤충과 식물에 대해 그렇게 스토리텔링이 잘되고 재미있게 쓴 책은 처음 봤다. 장자도 뛰어난 스토리텔러고. 그래서 요즘은 스토리텔링 어떻게 해야 할지 연구 중이다. 여러분도 한 번 봐라.” 아울러, 과학 기술과 관련된 책을 보는 것을 즐긴단다. 서점에 가면, 항해사, 조종사, 소방관 등의 자격시험 문제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비록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지만, 그는 가령 항해사 자격시험 문제집을 보면서, 배가 깜깜한 밤에 바다를 뚫고 나가는 것을 본다. 그리하여, “서정시집을 보는 것보다 그게 더 문학적이다.”라고 말한다.

김훈에게, 글을 쓴다는 것

그는 기자를 직업으로 가졌고, 기행문 혹은 에세이를 썼고, 소설을 지었다. 글로 벌이를 하면서 살았고, 살고 있다. 방송 작가를 하고 있다는 한 독자가 그 차이점과 어떤 직업을 가졌을 때 유쾌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의 대답은 분명하다. “직업은 유쾌한 것이 없다. 밥벌이는 지겨운 거다. 정말 징글징글한 거다.” 그건 결코 변하지 않을 세상의 진실이자, 그의 진심이 아닐까.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그는 이것을 말한 바 있다.

“나는 신문기자를 25년쯤 했는데, 왜 기자가 됐고, 왜 에세이를 쓰느냐고 물어보는데, 그런 질문은 질문으로서 성립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내가 왜 소설 쓰냐고 하면, 그것이 밥을 벌어 먹고 사는 생계의 수단이다. 그렇게 얘기하면 저속하고 속물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다고 욕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건전하고 상식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 물론 돈을 벌어 밥을 먹기 위한 목적을 향해서 글이나 소설을 쓰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걸 써서 밥을 먹을 수 없다면 나는 안 한다. 왜? 딴 것을 해서 밥을 먹어야 하니까. 그건 정당한 생각이다.”

누군가는 밥을 굶어가면서 목숨을 바쳐가면서 글을 쓰고, 소설을 짓는 사람도 있었고 지금도 있겠지만, 그는 “나는 그런 선배를 존경하지만 뒤따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기자가 됐던 것 또한, 군대를 제대하고 길바닥을 헤매다가 취직한 곳이 신문사였단다. 배가 고파서! “돌이켜보니 그렇더라. 그런 세계를 과장하고 미화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글 쓰는 것을 소홀히 한다는 것은 아니다. 잘 쓰기 위해 노력한다. 인간의 삶은 저속하고 진부하고 일상적인 것과 싸우면서 이뤄진다. 유쾌한 직업은 없을 거다.”


한 독자는 그의 글에는 냄새에 대한 묘사가 많은 것 같다며,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에게 냄새는 아주 중요한 감각이다. 이성적인 감각기관인 시각에 비해, 냄새는 짐승에 가깝고, 본능적인 것으로 그것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삶의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중시한단다. 개는 사람보다 후각이 200배 이상, 청각은 50배 발달했는데, 사람보다 수백 배 많은 삶의 체험과 질감과 느낌이 축적돼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언어가 없어 표현하지 못할 뿐. 개만도 못한 것이 사람이지만, 말을 하기 때문에 개보다 뛰어난 것이라고.

“우리말은 냄새를 표현하는 말이 너무 빈약하다. 비린내, 구린내 등 대여섯 어휘밖에 없다. 모든 냄새를 다른 사물을 이용해 표현할 수밖에 없다. 썩은 고기 냄새, 꽃향기와 같이. 맛도 그렇다. 프랑스 말을 잘하는 친구에게 와인 맛과 향기를 표현하는 어휘를 모아달라고 했더니 300개를 모아왔다. 오랫동안 와인을 마셔서 발달했겠지만, 된장, 김치를 수백 년 먹었으면 그만한 어휘가 발달해야 하는데 우린 없다. 우리말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섬세하며 과학적이라는 말은 다 거짓말이다. 우리말을 폄하하는 게 아니고, 한국어는 한참 더 보완하고 많은 진화의 과정을 거쳐야 할 미완성의 언어다.”

아울러, 그는 우리 언어가 대역폭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설이나 문학을 쓸 수 있는 글, 문학적 어휘가 따로 있다고는 생각 안 한다. 내 소설에는 모든 기술용어, 외래어, 은어가 서슴없이 들어가 있다. 앞으로도 많은 외래어 등을 쓰려고 한다. 많은 외래어를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넓어져야 한다. 한글로 좋은 말을 쓰려면 한문이나 외국어를 잘해야 한다.”

다만, 젊은 세대들이 많이 쓰는 말 줄임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드러냈다. “자기네들끼리 쓰는 암호처럼 되어 가고 있다. 그건 잘못된 거다. 말은 교양과 인격을 나타내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말을 통해 감정이나 느낌에 대한 표현은 잘해도 사유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미숙한 것 같다. 점점 깊이가 없어져 간다.”

김훈이 말하는 김훈

한 독자가 보수·마초적이라는 일각의 비판에 대한 그의 생각을 물었다. “가히 틀린 것 같지 않다. 보수는 경험에 의해 판단하는 것이다. 멀리서 비추는 희망의 등대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지나간 삶이 더럽고 비루해도 그걸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보수적인 기질과 성향을 가진 사람이지만 보수주의자는 아니다. 보수의 틀에서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나의 성향이고 정서다. 또 마초라고 하는데, 그런 소리 들을 만하다. 여성을 그릴 때 나는 여성 생명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한다. 특히 젊은 여성의 생명력은 아름답고 건강하다. 생명을 다루다 보니, 짐승 같은 거다. 나의 작가적 미숙함 때문에 마초로 오해를 받는데, 어떤 여자들은 마초가 좋다고 그러대. (웃음)”

아내의 영향에 대해 묻는 질문에도, 그는 아내의 영향이 별로 크지 않고, 스스로 가부장적인 남자라고 단언한다. “그건 아버지, 집안의 혈통에 유전되고 있는 가부장적인 질서에 의한 거다. 그게 편안하다. 절대 여자를 무시하지도 않고, 다치게 하지 않게 한다. 여자를 학대하거나 폭력을 쓰는 것은 건달이다. 가부장은 여자를 보호하면서 지배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평화와 행복이 있다. 내 아내는 그런 가부장적인 질서 아래 사는 여자인 셈이다.”

독자와 김훈 작가의 관계는 어떠할까. 서운한 독자가 있을지 몰라도 그의 생각은 확고하다. 어느 연령대 독자가 많을 것 같으냐는 질문에, 그는 “독자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단다. 인터넷에 연재를 하면서도 댓글을 쓴 적이 없고, 그것이 설혹 독자에게 무례한 처사일 수 있지만, 독자의 반응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태도다. “소통은 끌어안고 뒹굴어야 가능한 것이 아니고, 독립된 이성을 가진 개체들이 적당히 아름다운 거리에 떨어져 있을 때, 소통이 가능하다. 여러분과 다른 생각일지는 몰라도, 군중들이 한자리에 모여 같은 구호를 외치고 뒤엉키는 건 소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젊은이라고 특별히 애정을 갖고 있지도 않는단다. “50대와 20대가 인류학적으로 어떤 다른 점이 있는지 모르겠다. 젊은 독자들이라고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는다. 나는 젊은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미워하거나 무시하지도 않는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건 나도 좋아할 수 있지만, 젊은이들을 보면 내가 저렇게 무질서하고 계통이 없는 나이를 지나갔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젊음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런 나이를 지났다는 것에 크게 안도하고, 여러분을 보면 아름답고 발랄하나, 어떻게 늙어가나 하고 걱정도 된다. 나는 나이가 들어서 좋다.”

재미있는 질문이 있었다. 김훈에게 사랑이란? 그는 소름이 끼쳐서, 닭살이 돋는 것 같아서 글을 쓰면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쓰지 않았단다. 왜냐면, “그 단어가 너무 사회적으로 타락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단어가 그렇게 무참히 타락해버리다니…….”

그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욕망과 아집에 대해, 남발된 사랑에 넌더리를 쳤다. “대표적인 게 우리나라 주부들의 모성애인데, 그게 나라를 망쳐가고 있지 않으냐. 학교에서 치맛바람 일으켜 사교육비를 올리고 사회적 폐해를 일으키면서 우리 사회가 진화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내 자식을 위하고 사랑하는 것도 개들도 다 한다. 인간의 모성애가 위대할 수 있으려면 옆집 자식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대학시험 보는데 엿 붙여 놓고 빌고 그러잖나. 그것이 사랑이라는데, 그건 사랑이 아닌 정신병이다. 남녀 간의 사랑에도 그런 게 있을 거다. 욕망과 아집을 사랑이라는 것으로 위장해서 미화하는 게 있을 거다. 사랑을 부정하는 게 아니고 그것이 미치는 사회적 폐해를 말하는 거다. 대중가요 대부분이 사랑 노래잖나. 꼭 연애 중독자 세상 같다. 대중 정서가 어찌 사랑뿐이겠느냐. 연애 중독자의 세상이 된 거다.”

신문 기사의 스트레이트 문장처럼 쓴 사랑, 연애, 치정의 소설을 보고 싶다는 바람도 나왔다. “스트레이트는 정말 쓰고 싶고 좋아하는데 자신이 없다. 스트레이트 문장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내장돼 있다. 『공무도하』를 쓰면서도 그런 걸 해 보려고 애를 썼는데, 뜻대로 안 됐다. 연애는 심정묘사여야 하는데, 남녀관계를 스트레이트로 쓰다가 실패한 흔적이 나온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남녀 간 연애 속마음이 꼼지락거리는 거, 속살 떨리는 거, 못 쓰겠다. 잘 쓰는 사람도 있지만, 난 못 할 것 같다.”

무엇이 행복인지도 물어보자. “나는 행복을 추구하며 살진 않았다. 그렇다고 불행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꾸역꾸역 산다. 그래야지 무슨 수가 있겠나.” 그는 강 냄새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의 글에서 강을 묘사한 것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특히 그는 상류를 좋아한단다. 연어처럼 강의 상류로 거슬러 오르면, 강물이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느낌이 들고, 노을이 지는 강 주변에서 자전거를 타면 노을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새로운 시간이 몸속으로 들어와, 지나간 것을 청산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것 같다. 그때가 제일 신바람 난다. 강에서 놀 때, 저녁이 오고 별이 뜨면 참 좋다. 사는 게 덜 힘 든다. 삶의 하중이 덜 느껴진다. 나도 글이 안 써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일 안 한다. 그냥 논다. 나는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잘 놀아야 조화로운 사람이 된다고 생각한다.”

꾸역꾸역, 다시 일상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 홍대 부근은 번잡했다. 그날 내겐, ‘꾸역꾸역’이라는 표현이 착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삶이, 일상이, 미화되거나 과장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잃을 게 없다고 생각했던 시큰둥한 삶에도, 결코 잃고 싶지 않은 절실한 무엇이 존재한다는 깨달음은 언제나 늦게 찾아온다고도 생각하지만, 삶이 지속돼야 할 이유가 굳이 따로 있다고 여기진 않는다. 그냥 사는 거다. 그게 삶이니까. 부모 잘못 만난 죄, 그따위도 없고,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행, 그따위도 없다. 어떻게든 버티고 견뎌야 하는 것이 내겐 일상이자 삶이다.

김훈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가 장철수 같다는 생각을 했다. 노목희에게 “난 아무래도 이 세상을 단념할 수가 없어.”라고 말을 건네던. 또 “세상을 긍정하니까 단념할 수 없는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이런 세상은 아니야.”(pp.30~31)라고 말을 잇던 그 장철수. 무엇보다 장철수가 장례식에서 읊었던 이말. “(…) 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은 치사하고, 인간은 던적스럽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다. 시급한 현안문제다. (…)”(p.35) 곧, 그것은 김훈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독자와의 관계에 대한 그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소통’을 거들먹거리며 공허한 말의 유희로 누군가와 꼭 인연을 맺어야 하는 것이 삶은 아니니까, 소설가의 임무도 아니니까. ‘작가의 말’에서 그는 표현했다. “나는 나와 이 세계 사이에 얽힌 모든 관계를 혐오한다. 나는 그 관계의 윤리성과 필연성을 불신한다. 나는 맑게 소외된 자리로 가서, 거기서 새로 태어나든지 망하든지 해야 한다. 시급한 당면문제다.”

때론 나는 외롭다고 징징대면서 타인을 욕망하는 인간들이 역겹다.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나도 그럴 때가 있으면서도. 『공무도하』의 어떤 인물들은 그래서 좋았다. 공연한 일로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지지 않아서. 나는 간혹 누군가로부터 듣는 “모든 인연을 소중히 생각한다.”라는 말도 허풍이고, 개소리라고 생각한다. 그 천연덕스러운 거짓에 배시시 웃고 마는 나도 개 같은 놈이지만.

사실 나는 김훈 작가의 모자 사이로 삐져나온 흰 머리칼이 가장 부러웠다. 그의 어떤 말이나 글보다, 그 흰머리가 주는 시간의 체적과 일상을 견딘 흔적이 내 마음을 끌었다. 그것이야말로 일상이 아니겠는가. 대항할 여지도 없고, 벗어날 틈도 없는, 일상의 그 무엇. 하다못해, 국가가 그렇게 요구하고, 혹자는 이걸 하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말하는 결혼도, 실상은 ‘감정을 죽이고 일상이 강해지는 그런 것’ 아니겠나. 일상은 그렇게 힘이 세다. 나는 또 하루를 버텼다. 일상을 건넜다. 나는 강을 건넌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일까. 이 책을 읽고 나라는 인간은 읽기 전과 마찬가지일까, 그렇지 않은 것일까. 삶의 하중이 덜 느껴지고 사는 게 덜 힘든 밤, 그것이 궁금해졌다. “강경감의 말처럼, 해망은 해망의 방식대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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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그체처럼 패션지에서 사용하는 문체는 잘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다. 그러나 때론 그런 문장이 더 편할 수가 있다.

 

책을 내고 싶거나, 책을 내려고 생각하는 사람, 그 사람들에게 김학원의 <편집자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그야말로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다.

 

1.

책과 관련해서, 나에게도 고민이 많다. 몇 가지 중요한 문제들은 아직도 잘 해결을 못했고, 출판사와 에디터와의 관계, 그리고 어떻게 하면 무례하지 않으면서도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 불만들을 해결할 것인지, 좀 생각해보는 편이다.

 

<편집자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내가 가졌던 질문에 대한 모든 해답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는 내가 알고 싶은 것들을 알려주는 책이다.

 

즉...

 

저자들에게는 필독서이다. 저자와 작가, 즉 author와 writer 사이에는 약간의 미묘한 뉘앙스 차이가 있다. 픽션과 논픽션이라고 재미없게 구분하는 방법들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것보다는 더 미묘한 것 같다.

 

작가에게도 에디터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사회과학이나 인문서적을 만들 저자들에게, 이 책은 사실상 필독서이다.

 

이건...

 

무조건 봐야 하는 책이다.

 

2.

김학원이 그리는 출판계는 유토피아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이상적인 상태이다. 물론 나도 그리 세상이 움직일 것이라고 어느 정도는 생각하지만. 내가 만난 현실은 책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터프'했다.

 

출간과정이 우아한 일들의 연속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금물이다.

 

멱살을 잡고 싸우거나, 아니면 그냥 침묵하거나. 그런 터프한 의사결정 과정이 몇 번은 등장하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나는 그냥 참고, 속으로 삭이는 편이다.

 

아마 상대방도 같은 상황일 것이고, 그럴 때 싸워봐야 결국 답이 안 나오는 그런 상황에 봉착하게 될 것이 뻔하므로, 내 경우에는 어지간하면 참는다. 그러나 참는다고 해서 그 감정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보다는 에디터 쪽에서, 그리고 출판사 쪽에서 참는 일이 더 많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은, 그런 팽팽한 신경전에 관한 책이지만, 어쨌든 문체는 우아하고, 그려진 상황은 이상적이다.

 

3.

어쨌든 저자들은 저자들 사이의 네트워크가 생긴다. 그리고 동시에 에디터들 역시 에디터들의 네트워크를 가지게 된다. 두 개의 네트워크가 충돌하면, 대책이 없다. 그런 싸움을 최대한 피하면서, 책들이 만들어진다.

 

저자는 에디터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이다. 어쩌면 저자들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되어있는 셈인데, 저자들이 에디터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훨씬 적은 것이 현실이기는 하다.

 

4.

한 때는 나도 출판사를 차리는 것이 로망이던 시절이 있었다. 유학 시절부터, 아주 오래되었던 로망이다.

 

이 로망을 접었다. 너무 어렵고, 너무 고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출판사의 로망을 접었다.

 

직접 출판사를 내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한에서는 모든 에디터들과 친구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출판사를 내겠다고 하는 순간, 잠정적 경쟁자로 바뀌면서 친구같이 지냈던 에디터들을 잃게 되고, 잘 되어봐야 사장과 에디터의 관계로 돌변하게 된다. 별로 이문이 남는 행위는 아닌 것 같아보였다. 또 다른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출판사의 꿈을 깨끗하게 접었다.

 

그리고 잡지를 만들고 싶은 꿈을 꾸었다. 이 꿈도 접었다.

 

잡지의 편집장이 되거나 아니면 출간인이 되면, 너무 많은 사람들과 부드러운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건, 참으로 피곤한 일이다.

 

이래저래 다 접고 나니, 마흔이 되고 나니, 할 일이 사라져버렸고, 하고 싶은 일도 사라져버렸다.

 

뭔가 하기 위해서 억지로 꿈을 만드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할 일이 없으면, 그냥 쉬면 된다. 그리고 아주 적게 먹으면 된다.

 

그래도 아직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는 꿈은, 갈리마르 같은 프랑스 출판사에서 종종 하는, 콜렉션의 디렉터가 되는 일이다.

 

한국에서는 거의 없지만, 유럽에서는 아주 성공적인 콜렉션에는 학자들이 디렉터 역할을 맡는다. 언젠가 그런 걸 해보면 좋겠다는 꿈은 아직 버리고 있지는 않다.

 

어떤 식으로든, 나의 로망은 오랫동안 책과 잡지라는 두 개의 매체와 관련되어 있었다.

 

영화는...

 

팬으로서 열심히 지지하고, 재밌게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좋은 감독들이 있고, 그들이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아주 지랄맞다록 극장에 자주 가거나 DVD를 열심히 사주는 것, 그런 일은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다.

 

5.

어떤 사람은 책이 재미있어서 본다고 하는, 정말 부럽고도 부러운 경지에 올라가신 것 같다.

 

나는 그런 경지는 아니다. 내가 보는 책들은, 정말 재미없고, 또 어지간하면 전화번호부를 가볍게 넘어갈 정도로 두껍고, 정말로 내가 필요한 내용은 그 중에 딱 두 세 페이지 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그 두 세 페이지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연필로 열심히 무엇인가를 풀어봐야 하는 경우가 많다.

 

지리하고, 재미없고, 게다가 두서없이 이어지는 라이벌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 누군지도 모르는 그 라이벌을 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전부 찾아봐야 한다면, 우와. 자본론이 사람들에게 쉽게 잡히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렇다.

 

존 스튜아트 밀의 정치경제학 원론 같은 경우는 더욱 황당하다. 책의 1/3 분량은 대부분 생시몽에 대한, 약간은 치사하면서도 끈질긴 공격으로 채워져 있다.

 

게다가 이 생시몽의 인용은 몇 페이지씩 끝없이 이어지는, 불어 원문으로 채워져 있다. 영어와 불어를 동시에 읽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어쩌란 말이냐.

 

재미없고, 흥미도 없고, 게다가 내용도 어렵고, 틈틈히 왜 내가 이걸 읽고 있어야 하는지, 회의가 가득 드는 책들이 내가 읽는 책들이다. 난 아직 이런 책들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정말 읽기 싫고, 지겹지만, 참고 읽는 책들이다.

 

김학원의 <편집자란 무엇인가>는, 다행히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위트가 많고, 아, 그랬구나, 책과 출판계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좀 알고 있으면, 어떤 소설보다도 흥미로운 장면들이 많다.

 

이보다 100배는 재미없었다고 하더라도, 내 입장에서는 꾹 참고 읽었어야 할 것 같은데, 다행히도 책은 무척 재밌다.

 

6.

출판사와의 communication, 특히 에디터와의 communication은 언제나 숙제이다. 난 그 문제를 잘 풀지 못하는 편이다. 불만이 없어야 하는데, 실제로 나는 불만이 있는 편이기 때문이다. 보통은 내가 참았다고 생각하는데, 아마 상대편에서는 훨씬 많이 참았다고 생각할 것 같다.

 

원래 파트너 사이에 이런 오해와 긴장이 많기 딱 좋은 관계이다.

 

이것저것 여러 가지로 돌아볼 기회가 되었고, 나 스스로를 많이 돌아보게 하는 책인 것 같다.

 

이런 기술적인 얘기들까지, 책으로 간편하게 볼 수 있으니, 진짜 한국 많이 좋아졌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정말이다. '저자'들을 위한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다. 예비 저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최소한 2~3년간의 모색기의 오류는 줄여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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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 책을 얼마 전부터 읽기 시작한 것은, steady state라는 단어의 용법들을 찾아보다가 빅뱅과의 논쟁사 자체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기왕 보는 김에 좀 더 찾아보면 좋을 것 같아서 천문학을 좀 들여다보는 중인데, 워낙 나도 문과쟁이라서 천문학에는 잰병이다.

 

박창범의 <인간과 우주>와 사이먼 싱의 <우주의 기원 빅뱅>을 고른 것은 별 다른 이유는 없고, 서점에서 내 수준에서 읽을 수 있는 책들을 대충 집어들은 것이다.

 

어땋게 보면 프레드 호일이라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내가 갑자기 개과천선해서, 아, 자연과 우주에 대해서 더 많이 알면 좋겠구나, 그런 것은 아니고 빅뱅과 steady state 사이에서 벌어졌던 이 호화찬란한 논쟁 자체를 더 재밌게 생각한다는... 그런 음흉하고도 음험한 이유로 책을 보니, 방정식을 제대로 들여다보려고 한 것은 아니고. 그야말로 불량 독자다.

 

생각해보니까,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고등학교 때 읽은 이후로 입문 수준이나마 천문학 책을 집어들은 것도 처음인 것 같다. 어설프게 물리학 공부 하면서 본 거, 양자역학 책에서 지겹도록 나온 우주기원에 대한 애기, 그리고 과학논쟁사나 인식론 같은 데서 나온 얘기들 어깃장으로 모아서 알고 있던 게 내가 알던 천문학의 전부였던 셈이다.

 

사실, 박창범 교수의 책은 나온지 10년 정도 된 거고, 그 이후에 논쟁이 어떻게 되었는지가 여전히 궁금해서 사이먼 싱의 책을 집어든 것이기는 한데. 어쨌든 여전히 '지금'과는 약간의 격차가 있기는 하다.

 

그리고 나서 다른 책을 찾느라고 책장을 뒤지다보니, 개마고원에서 나온 <그림으로 보는 우주과학사>와 기타 초보자들을 위한 유사한 책이 몇 권이 더 있었다. 사실 내 수준에서는 이 정도 수준이면 딱 아닌가?

 

(이렇게 뒤지다가 아내가 사놓은 수학사 책 한 권을 읽게 되었는데, 엉겹결에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등장하는 과정을 보면서... 사실 내가 보고 싶던 내용은 수학사 책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강생심이다. 대중을 위한 책을 보면서, 최근 천문학의 논쟁들을 좀 알면 좋겠다는, 이런 택도 없는 희망을 갖다니!

 

하여간 몇 년 동안 하다보니 주로 읽은 과학 분야의 책들이 생물학 관련된 책들이었는데, 물리학적 사유에서 나온다고 하면서, 지나치게 생물학이나 생태학 책만 읽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꽤 전부터 누군가 선박의 역사니, 철강의 역사니 그런 책들 필요하면 준다고 했는데, 안 그래도 책장이 좁아서 도저히 정리불가인 상태라서, 괜찮습니다... 라고 했던 게 기억이 났다.

 

기왕 얘기 나온 김에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과학 다큐멘타리에는 이데올로기가 없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물론 그나마 이제는 KBS나 EBS나 다큐멘타리는 대폭 줄인다고 하니, 과학 다큐멘타리 보고 싶으면 다시 BBC나 NHK를 뒤져서보는 수밖에 없는 그런 나라로 가고 있는 셈이지만.

 

영화가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운 것처럼, 과학 다큐멘타리도 펀딩 과정이 필요하고, 제작 승인이 필요하기 때문에, 제작자가 특별히 그런 것으로 덧칠하고 싶은 생각이 없더라도, 자연히 '우주 과학 입국' 그런 필터를 끼워서야 겨우 제작하게 된다. 순수한 천문학에 대한 관심이라는 것은 정말로

사이언티스트' 일각에서만 해당되는 일일 것이고, 과학자는 물론이고 다큐멘타리 제작자도 실제로 이데올로기 심지어는 정책 홍보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은 것 같다.

 

비유를 들어보면,

 

최근에 항일투쟁과 관련된 다큐멘타리를 제작한 제작자와 좀 얘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꼭 그렇게 민족주의 코드를 강하게 넣으실 필요가 있었나요?

 

안 그러면 시청률이 전혀 안 나오는데, 어떻게 해. 결국 좀 넣어주는 수밖에.

 

제작 과정에서 제작자가 알면서도 결국 흔한 상업성 코드를 집어넣게 된다. 보는 사람이 알아서 필터링해서 보면 좋겠다는 게 제작자가 설명한 취지였다.

 

천문학에 관한 국내 저술에서도 그런 여러가지 제약 조건들이 있을 것 같다.

 

박창범의 <인간과 우주>는 그런 면에서 비록 오지이기는 했고, 관심은 없었지만 한국의 천문학이 그나마 이데올로기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시절의 마지막 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요즘에 이런 책을 쓴다면, 당연히 우리별 시리즈에 대한 얘기가 길게 나올 것이고, 우주를 잘 안다는 것이 국민경제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고, 허블 망원경이 미국 경제에 얼마나 기여를 했고, 등등의 얘기가 부록처럼 죽 따라붙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과학은 과학일 뿐이다라는 명제가 있다.

 

글쎄...

 

이 명제를 천문학에 대입하면, 천문학은 천문학일 뿐이다...

 

이런 시기가 한국에도 최소한 90년대 중후반까지는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많은 천문학자들은 여전히 배고플 것이지만, 지금도 천문학은 천문학인지, 우주과학은 우주산업이 아닌지, 그리고 그 한 가운데에는 여전히 국가가 자리잡고 있고, 또한 정치가 자리잡고 있는지.

 

어차피 뻔한 질문이지만, 그런 생각을 잠시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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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국에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가 이렇게 안 팔리고, 사람들이 잘 안 읽는지, 영원한 미스테리 같다.

 

언제 같이 이 책을 읽고, 왜 한국 사람들은 기번을 읽지 않는가, 머리 맞대고 그 설명을 좀 찾아보면 좋겠다.

 

이 책은 무수히 많은 얘기들의 원형 중의 원형이고,수많은 원형을 만들고, 그 원형은 다시 또 파생되어 또 다른 세계의 원형이 되었다.

 

왜 이 책이 이렇게 주목을 받지 못할까? 미스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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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윤형의 <뉴 라이트 사용후기>는, 책을 2/3 정도 읽었다가 들고 다니느라고 책을 잃어버렸다. 재밌게 읽은 책인데, 다 읽으면 쓴다고 하는 게 책을 다시 사지 못해서 어영부영 시간만 지나가 버렸다. 마침 <히로히토와 맥아더 정권>이라는 책을 아주 재밌게 읽어서, 두 가지 얘기를 엮어서 현대사에 대한 글을 한 번 쓰려고 생각하다가, 그냥 시간만 하릴없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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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사 마코토의 <반빈곤>이라는 책의 해제를 다는 중이다.

 

해제에는 일본과 미국을 비교하는 작업을 해보는 중인데, 그 중 이미 번역된 레베카 솔닛과 유아사 마코토를 비교하는 일이 중심 선을 형성하고 있다.

 

최근에 일본과 관련해서 하고 싶던 얘기는 대부분 유아사의 해제에 넣었다. 나는 일본 전문가가 아니라서, 아마 별도로 일본에 관한 책을 쓰게 될 것 같지는 않고, 내가 아는 내용도 책 한 권 분량이 되지는 않는다.

 

일본 정책과 관련해서 몇 개는 한겨레 칼럼에 시리즈로 정리해볼 생각이기는 하다. 하여간 정말로 중요한, 그리고 경천동질할 내용들은...

 

어쩌면 한국 언론에 스트레이트 기사로 한 줄짜리도 안 나오냐. 일본에서는 완전 난리인지, 연일 지인들한테 이거 말 되냐, 안 되냐, 얘기 좀 해달라고 멜이 날라드는데. 지독한 인간들이다. 지독하게 못되었든지, 지독하게 게으르던지, 아니면 정말로 언론통제가 있던지.

 

한겨레, 경향, 니들도 다 나빠!

 

어째 이럴 수가 있냐.

 

아마 오늘 내가 해제를 출판사에 건네면, 빠르면 요번 달 내에 유아사 마코토의 책이 나올 것 같다.

 

한국인이 보기에 편한 방식은 아니고, 마이크로 영역의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고, 무엇보다 유아사가 누군지 모르면 읽기가 쉬운 책은 아니다. 한국 책들은 어쩔 수 없이 너무 흥미위주로 흐르고 있어서 별로 그렇지 않은 일본 책들은 너무 무겁다고 한 번에 던져버릴 것 같다.

 

어쨌든 유아사 마코토의 책과 레베카 솔닛의 <어둠 속의 희망>을 동시에 가져다 놓고 읽으면, 아... 하는 깨달음이 있고, 내가 혹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느낌이 좀 올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럴까? 어지간하면 그럴 것 같은데, 요즘 같아서는 좀 자신은 없다만... 어차피 큰 돈 드는 것도 아니니, 이 두 권의 책을  동시에 놓고, 책 표지에 두 손을 올려놓고, 가만히 마음의 소리를 들으면. 뭔가 올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나에게는 뭔가 왔다. 아, 그렇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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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수 경제연구소라는 곳이 있다. 대체적으로 중도 우파에서 중도 좌파 정도의 시각을 가진 글들이 많이 모이는 곳인데, 아마 한국에서 일반인이 접할 수 있는 경제 기사로는 디테일이 가장 좋은 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증권회사나 보험회사에도 경제학자들이 많다. 이런 데 수석 이코노미스트 같은 거 하거나 아니면 상무나 전무 정도 되면, 연봉이 좀 괜찮다. 전부 물어본 거는 아니라서 샘플에 좀 문제가 있을 수는 있는데, 하여간 내가 아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6억원 내외를 연봉으로 받는 거 같다. 평균 내면 시니어급이면 연봉 3억부터 시작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사람들이 써놓은 글이나 아니면 방송에서 경제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들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데, 또 막상 만나서 얘기할 기회가 생기면 그렇게 황당한 사람들은 아니다. 이게 참...

 

아주 극우파에 자리한 경제학자나 아주 극좌파에 자리한 경제학자들을 제외하면, 술 마시면서 이것저것 얘기할 때, 생각보다 그렇게 견해의 차이가 많지는 않다. 물론 글이나 방송에서는, 완벽하게 입장이 갈리지만, 경제가 그렇게 극단적인 것이 아니라서 중국 경제, 일본 경제, 심지어 부동산에 대해서 얘기할 때에도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견해가 비슷하다.

 

차이라면, 명박을 위해서 조언할 것인가, 민주당을 위해서 조언할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일반인들을 위해서 조언할 것인가?

 

한국 증시에 대한 해석에서 정말로 일반인들에게 조언하는 사람은 '시골의사 박경철' 정도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가 정치권에 아부하거나, 증권회사에게 잘 보여야 할 이유는 없을테니 말이다. 실제로도 그는 '개미' 혹은 평범한 개인들을 자신의 고객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쨌든, 경제는 언제나 정치경제학이라고 하는 것처럼, 증권사나 부동산 회사의 크고 작은 정보들 속에도 정치적 견해와 의도가 빼곡하게 들어가 있다. 꼭 작전이 아니더라도 회사의 희망과 개인의 소망, 이런 게 켜켜히 얽힌다.

 

물론... 우리끼리 만나는 술자리에서는 그런 작전을 펼치는 사람은 없다. 그래봐야 경제학자들은 별 큰 돈도 없고, 게다가 선수들이니까 여기서 정말 특종급의 정보를 가지고 말 하지 않는 한, 어설픈 썰레발은 잘 통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참 신기하다. 별도의 자리에서는 그렇게 솔직한 사람들이 어째 신문이나 방송에 나올 때에는 또 그렇게 살짝 몇 글자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신념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정치적인 뉘앙스를 보이는지.

 

가만히 돌아보면, 내가 현대의 연구소에 있던 시절, 나도 그런 짓을 하기는 했던 것 같다. 기자들을 만나거나 공무원을 만날 때, 몇 개의 단어 혹은 약간의 뉘앙스 차이로 오해를 유도하는 그런 짓을 하기는 했던 것 같다. 총리실에 있던 시절에도, 그런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가슴에 손을 얹기는... 못하겠다.

 

그런 점에서 다른 글이나 책들도 그렇겠지만, 전문가의 세계에서도 그리고 학자의 세계에서도 자유인은 잘 없다.

 

회사나 기관에 소속된 분석가가 자기 맘대로 얘기했다가는 바로 위의 상관에게 심하게 터지게 된다.

 

교수들도 마찬가지이다. 정부 연구용역을 시작하게 되면, 할 수 있는 얘기의 범위와 방향에 제약이 걸린다. 물론 그런 제약이 없더라도 기꺼이 그럴 사람도 많지만, 그러지 않을만한 사람도 용역 발주자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게 되는 것 같다.

 

명박 시대에는 그런 영향의 정도가 조금 더 커진 것 같다.

 

얼마 전에 아주 친한 지인이 청와대에 초청을 받아서 갔다 왔다. 원래도 우파이기는 했는데, 그 이후로 말의 뉘앙스가 조금 더 변했다. 학자라면 그래서는 안된다... 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는 학자이기 이전에 생활인이기도 하다. 그래, 당신도 먹고 살아야겠지.

 

이런 이유로 경제에 대한 얘기들은, 그 얘기가 맞고 틀리는가 보다는 그게 누가 한 얘기인가가 더 중요해진다.

 

장관 시절에는 너무 바빠서 못 보다가 퇴임한 이후에나 만나게 되는 양반들이 있다. 물론 대개는 장관이 끝나고 나면 산하기관 기관장으로 한두턴 더 돌기는 하지만, 이미 장관 자리에서 물러나오면 총리나 부총리로 갈 거 아니라면, 사실상 퇴물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삶의 회한을 담아서 지난 날을 회고하며, 자신의 영광을 곱씹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이런 양반들에게, 그 때는 왜 그러셨어요라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너라고 별 수 있었겠냐?

 

한나라당이나 장관이나, 우리는 쉽게 확신범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진짜 확신범은 세상에 그렇게 많지 않다. 이상한 일을 하면서도, 표 때문에, 여론 때문에, 청와대의 눈치 때문에, 적극 그것을 옹호하는 경우가 많다.

 

본인도 괴롭지만, 하여간 그걸 세상 사람들은 "총대 맨다"라고 부르고. 명박이 가장 좋아하는 측근 인사 스타일은 바로 이 총대 매는 스타일이라고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총대 매는 것을, 명박은 "일을 한다"라고 이해한다.

 

현대 시절, 건설 용역이나 기타 등등, 수없는 문제가 생기고 사장 대신 감옥 가는 부하직원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워보였겠는가?

 

용산 현장에서 그리고 비슷한 사건에서 명박은 "일하다 문제 생기는 것은 문제 삼지 않겠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총대 맨 사람과 총대 매게 시킨 사람들 사이의 눈물 나는 우정이다.

 

뭐, 부작용은, 그러다보니 시키지도 않았는데, 적극적으로 삽질 하는 고위직들이 종종 등장하고, 과잉 충성이 등장하는 것이기도 하겠다.

 

말이 좀 길어졌다.

 

선대인의 <위험한 경제학 1, 2>는, 경제학자 내에서 비교적 합리적이라고 자칭타칭 불리는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지금 동의하고 있는 내용에, 선대인 특유의 종합적 분석과 언론 등의 사회적 맥락에 대한 해석이 결합된 책이다. 어느 정도는 암묵적으로 합의된 내용이 70% 그리고 선대인의 연구와 해석이 30% 정도 결합되어 있는 그런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자, 돌아서서 선대인만한 책을 쓸 사람이 한국에 몇 명이나 있을지 생각해보자.

 

얼핏 꼽아도 20~30명 정도 되는 것 같은데, 그 중에 절반은 너무 바빠서 도저히 책을 쓸 형편이 안된다. 그리고 그 중에 20~30%는, 국록을 먹고 있는데, 연봉은 작아도 국록을 먹고 있는 처지에서, 명박에게 대놓고 경제 기조를 바꾸라고 했다가는 자신만이 아니라 연구원 원장과 자기 팀까지 한 방에 날아가는 참상이 벌어지게 된다. 돌리고 돌려서, 예를 들면, 책 한 권에 비유적 문장 2~3개 삽입할 수 있는 게 전부일 것이다. 경제학자도 '학자'라서, 자신의 양심상 도저히 그 얘기를 안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일반인은 도저히 알아먹지 못할 문장 한 두개를 집어넣는다.

 

정말로 선대인만한 책을 쓸 사람을 딱 한 명만 꼽아보자면...

 

이한구다. 이한구가 다 옳은 것은 아니다. 몇 개는 나와는 견해가 분명히 그리고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명박의 경제가, 이거 아니다라고 생각하면서 선대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한국 경제의 모습과 90% 가까이 비슷한 얘기를 쓸만한 사람은 이한구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한구는 바쁘다. 직책도 높고, 한나라당 윤리위원회에 회부되거나 고진화처럼 강제탈당 당할 각오를 하지 않은 이상, 이한구는 점잖게, "좀 이상하쟎아요"라고 한 마디 하는 것 외에 선대인처럼 친절하게 책을 쓰지는 못할 것 같다.

 

그래서 2009년 한국 경제에 대한 종합적 조감도와 일반인들이 알고 싶어하는 증권과 부동산, 그리고 2010년 경제의 흐름에 대해서 써놓은 책 중, 자유인이 쓴 책은 선대인이 유일한 셈이다.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어쨌든 김광수 경제연구소에서 선대인을 영입할 때, 상당한 자유와 자율권 같은 것들을 어느 정도는 보장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김광수 경제연구소 자체가 디테일을 강조하는 실용주의라서, 정치적 고려가 그렇게 많은 곳은 아니다.

 

2010년 경제 상황에 관해서는 선대인과 다른 견해가 나에게도 좀 있지만, 그것은 시간의 차이와 양상의 데테일의 차이이다.

 

하여간 선대인은.

 

신문과 방송, 즉 공적인 곳에는 나오지 않는, 많은 한국 경제학자들의 상식적이며 암묵적인 합의를 온전히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나는 한국에 선대인이라는 경제학자가 있는 것이 너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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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읽은 책에 대해서 얘기하는 일은 거의 없는데...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 이건 간만에 wish list, 보고 싶은 책으로 찜.

 

사람은 늘 생각만 하고, 늘 공부만 하고, 그리고 늘 돈만 벌고 살 수 있는 기계가 아니다.

 

문득 내 삶에 들어온 길거리표 고양이 한 마리가,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하게 만든다.

 

요즘 케이블에서 해주는 강희제를 너무 재미있게 보고 있는 중이고, 우리 집의 최근 트렌드는 단연 강희제이다.

 

(1주일 동안 샤넬이 핫 했는데, 요즘은 강희제가 핫 이고, 금주의 it이다.)

 

덕분에 고양이가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고양마마 납시오...

 

기침하시옵나이까. 고양마마.

 

고양마마,  식사 투정 좀 그만하시길 바라옵나이다. 마당 고양이들 보기가 민망하옵나이다.

 

고양마마 시리즈, 최근 우리 집의 대박 시리즈이다.

 

강희제 투로 책 제목을 바꾸면,

 

고양마마,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신, 이만 물러가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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