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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3.08 그냥 마음이 허해서... 3
  2. 2012.03.07 삭발을 하다 28
  3. 2012.03.05 큰 마이크와 작은 마이크 3
  4. 2012.02.27 마지막 칼럼을 마치고… 6
  5. 2012.02.27 1년 전의 부부 고양이 1
  6. 2012.02.26 하오의 연정 3
  7. 2012.02.21 검은 고양이의 출현 7
  8. 2012.02.05 세상이 좋아질까? 10
  9. 2012.02.01 남성들만으로 구성되지 않은 조직 4
  10. 2012.01.30 양식과 얘기 1
그냥 마음이 허해서,

타이거 픽쳐서의 오대표가 오늘 찍어준 사진 한 장.

삭발 첫 날,

괜히 이 사진 보면서, 마음이 짠해졌다.

아무 것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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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발을 하다

 

한미 FTA 3 15일 발효된다고 발표되었다. 이미 알고 있던 일이지만, 진짜로 마음이 멍했다.

 

주변 사람들과 좀 상의를 했는데, 그냥 니가 삭발해라

 

나라 경제가 넘어갈지도 모르는데, 경제학자 한 명쯤 삭발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 삭발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건 잘 안다. 그렇지만 내가 진짜 싫었던 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을 지고 가면서, 내 주변에 지나가는 모든 일상적 야만을 참고 견뎌야 한다는 것. 그 무기력감 보다는 차라리 삭발이라도 하는 게 나을 듯 싶었다.

 

그래도 우울과 비장미, 이건 영 내 감성 아니고

 

미장원에 가서 우울하지 않게, 그리고 가능하면 너무 흉하지 않게 하라는 게, 아내가 허락을 해주면서 내린 지침이었다. 삭발아내와 연애하던 시절, 이 여인이 정말로 멋지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바로 새만금 사건으로 아내가 방조제 올라가면서 삭발하던 때였다. 아내는 새만금 방조제 위에서 처음으로 물대포를 맞았다.

 

기왕에 하기로 한 거, 날자를 잡다보니, 한미 FTA 발효일 이전에 방송될 수 있도록 나꼽살 FTA 특별편 녹음을 하기로 했고, 그게 바로 오늘이다.

 

하여간 그리그리하여, 출판사의 도움을 받아서 나꼽살 녹음 스튜디오에서 제일 가까운 미용실에서 약식으로 삭발을 했다. 이게 뭔가 바꾸지 못한다는 걸 너무 잘 알지만, 정말로 무기력과의 싸움과도 같다. 큰 걸 할 수 없더라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아니다. 생각해보면, 사회의 중요한 계기에, 크든 작든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정성을 내놓으면서 살았던 것 같다.

 

김미화 선배, 선대인 등 나꼽살팀이 삭발하는 자리에 같이 해주었는데, 나름고마웠다. 다들 바쁜 사람들이다. 방송 시작한지 벌써 4달이 넘었는데, 아직 전부 같이 앉아서 소주라도 한 번 하는 자리는 물론이고, 회식 한 번도 제대로 못했다. 잠깐 같이 앉아서 차 한 잔 하는 것도 쉽지 않다.

 

FTA와 관련해서, 삭발 한 번 하고 땡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계속해서 사정이 바뀌고, 나도 정신이 없어서 아직 마감을 하지 못하고 있는, ‘모든 괴담의 총합으로 이름 붙인 책을 마감하는 게 우선 급하다. 사실 이번 주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끝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래저래상황이 계속 바뀌어서 아직 못 끝냈다는 건, 비겁한 변명이고팜플렛으로 낼 수 있는 시기를 놓쳐서, 결국은 얘기를 더 키워야 하는.

 

(밀린 책이 한 권 더 있다. 역시 거의 다 써놓고 마무리를 못하는 책 한 권 더. 이건 주제가 좀 다르다.)

 

진짜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후에 지난 번 시나리오를 가지고 소설로 바꾸는 작업. 하여간 나도 가진 재주와 채널을 전부 동원해서, 이 싸움을 이렇게 간단하게 끝내고 싶지는 않아서.

 

안 하던 짓까지 하면서도, 이 난리를 치는 것은, 이 싸움을 그냥 지고 끝내고 싶지는 않아서 그렇다.

 

언제부터인가, 거창하게 생각하는 걸 싫어하게 되었다. 감성에 맞지도 않고, 효과적이지도 않고, 지치기만 한다. 작더라도 의미 있는 일들을 조금씩 하고, 그걸 조금씩 모아서 어느 순간 돌아보니, 세상이 조금 좋아졌군그런 걸 더 선호하게 되었다.

 

내가 언제까지나 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영원히 전선을 치면서 방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 시대의 문제는 우리 시대에 해결하고그럴 수 있었으면 한다.

 

좀 밝고, 재밌게 생각하고, 그렇게 삭발도 좀 즐기자고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돌아오는 차 안에서 붉은 돼지의 엔딩 곡인 가끔은 옛 이야기를’, 카토 토끼꼬의 노래를 들으면서 갑자기 눈물이 픽.

 

이게 뭔 궁상인가 싶지만, 예전에 삭발했던 생각, 단식했던 생각, 단식하는 사람 말리던 생각 등등,

 

이 나이에 이게 뭔짓이래, 그런 생각이 잠시 들면서 눈물이 픽. (나야 워낙 눈물이 많아서, 내 눈물에 별 정도값은 없다.)

 

가끔은 지난 이야기를 할까

늘 찾아가던 옛 친구의 그 가게

마로니에 가로수를 창밖으로 내다보며

커피 한잔으로 하루를 보냈었지

보이지 않는 내일을 무턱대고 찾으면서

다들 희망을 품었었지.

흔들리던 시대의 뜨거운 바람에 휘말려

온몸으로 세월을 느꼈었지.

그랬었지..

 

집에 들어오니까, 야옹구, 야 이 개새, 무섭다고 푸르르 도망을 가버린다.

 

이럴 수가 있어, 매일 니 똥을 치워주는 건, 바로 나라고 나!

 

잠시 후 금방 익숙해졌는지, 낑낑거리며 따라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 아빠, 털갈이를 벌써 했나?

 

요즘은 야옹구도 봄맞이 털갈이를 시작했다.

 

삭발,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머리는 금방 나고, 날씨도 금방 봄이 되고, 사방에는 꽃이 피어날 거다. 진짜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민주화 되었다고 하는 게 언젠데, 그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또 이러고 있다는 게 약간 슬펐고, 이 문제가 그냥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게 더 서러웠다.

 

영화 매트릭스비유를 가끔 들고는 하는데, 자본주의 경제라는 게 진짜로 그렇다. 여기에 한국이라는 아주 독특한 사회를 집어넣으면, 진짜로 ‘2중 매트릭스’ – 등에 좋다는 2중 매트리스가 아니라 인 셈이다.

 

한명숙이 어떤 사람인지, 진짜로 또 하기 싫은 경험을 한 번 더 혹독하게 했다.

 

싸움은 이제 중반부를 슬슬 넘어가는 듯싶다. 아직은 꼬불쳐두고 있는 패들이 좀 남아있다.

 

(타이거 픽쳐스의 오대표가 삭발 직전, 멍 때리고 있는 사진을 한 장 찍어주었다. , 고맙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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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마이크와 작은 마이크

 

칼럼을 오래 쓰다보니, 사물이 칼럼의 눈으로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요즘 민주통합당 하는 거 보면 답답해서, 뭐라도 좀 써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기도 하지만내려놓은 건 내려놓은 거다.

 

시간이 좀 지나면, 이제 새로운 상황에도 익숙해질 것이다. 혼자서 나라 구하는 거 아니라는, 뭐 당연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들을 참으면서 좀 포기하는 데에도 익숙해지려고 한다.

 

처음 나는 꼽사리다시작할 때, 김어준이 마이크의 매력에 대해서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사실 나는 그렇게 큰 마이크를 쥐어본 적이 없어서, 솔직히 그렇게 실감이 가는 얘기는 아니었다. 방송은 이제 좀 자리를 잡는 듯 싶은데, 어쨌든 김미화 누님의 힘에 기대어, 출발은 성공적인 듯 싶다.

 

내가 쥐어본 마이크 중에서 제일 큰 건 어떤 것일까?

 

뉴댈리에서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폐회식 직전에 분과 의장 보고를 한 적이 있었다. 방송은 아니고, 인터넷으로 생중계되는 거였는데, 총회장 앞의 대형 화면에 내 얼굴 보면서 얘기하는좀 복잡미묘한 기분이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영향력은없다.

 

그 회의는 깨진 회의였고, 내가 이끌던 분과는 중반 이후 아예 회의를 열지도 못했다.

 

더 많은 권한에는 더 많은 책임이 따른다유명한 사람이 한 얘기는 아니고, 그냥 영화 스파이더 맨에 나온 대사였다. 어쨌든, 요즘은 그런 생각을 좀 해본다.

 

하다보니 트위터의 팔로우 숫자도 많아졌다. 그러다보니, 이것저것 도와달라고 하는 사람들도 덩달아 많아졌다. 과연 거기에서 한 마디 하는 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싶지만, 하여간 현실은 그렇다.

 

그거야 바깥을 향하는 마이크이고.

 

그렇다면 내 안을 향하는 마이크는 뭐가 있을까? 텍스트의 형태로만 보자면, 만년필로 끄적끄적 거리면서 노트에 쓰는 것들이 가장 많이 영향을 준다. 최초의 발상이나 책의 전체적인 틀 혹은 제목 같은 게 그런 과정에서 나온다. 첫 생각을 던지고 만들어나가는 순간은, 노트 앞에 혼자 앉아있는 순간들인 경우가 많다.

 

그 다음으로 영향을 많이 주는 것은, 진짜로 임시연습장처럼 쓰는 블로그.

 

다른 사람들도 블로그를 나와 같은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대체로, 여기를 아무도 안 본다는 생각을 가지고 쓴다.

 

물론 하루에 천명 내외의 사람이 오고 가니, 누구나 보기야 하겠지만아무도 안 본다는 생각으로 글을 쓰거나, 이것저것 끄적끄적 거려본다.

 

나는 원래 기똥찬 생각을 한 번에 해내는, 그런 천재형은 절대로 아니고, 시간을 많이 들여서 점근법 같은 방식으로 답을 찾아가는 편이다. 한 번에 쭉 나오면 좋겠지만, 뭐 그럴 능력이 없는데, 어쩌겠는가.

 

그래서 시간을 많이 들여서 착안을 하는 과정에 꽤 많은 공을 털어 넣는다. 물론 늘 같은 상황에 있으면 편하기는 하겠지만, 그건 지겨워서 버티지를 못한다.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여건을 바꾸어보기도 하고, 노트를 바꾸어 보기도 하고만년필은 비싸서 바꾸기가 쉽지 않으니까, 잉크를 좀 바꾸어 보고.

 

정답은 없는 것 같다.

 

어떨 때에는 토론을 아주 많이 하고, 어떨 때에는 혼자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기도 하고.

 

노트에서 블로그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아는 사람들과 상의하거나 토론하는 과정이 들어가기도 한다.

 

어쨌든 여러 사람들의 머리가 모이고, 좋은 의견이든 나쁜 의견이든, 생각이 모이면 최종 결과물이 좋아질 확률이 높다. 물론 그 과정이 늘 부드럽거나 좋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생각을 나누는 편이 훨씬 좋을 듯 싶다. 이건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나는토론이 많고, 반대의견도 많은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하여간 자기 혼자 생각하고, 자기가 대단한 걸 찾아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꼴불견도 없으니 말이다.

 

한나라당, 아니 이제는 새누리당, 거기가 왜 이상하냐? 맨날 비슷한 사람들끼리, 자기들끼리 얘기를 해서 그런 것 아니냐? 민주통합당의 486들이 왜 이상하냐? 여기도 늘 자기들끼리, 있지도 않은 힘을 쓰는 방법에 대해서만 생각을 하다보니 이렇게 된 것 아닌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큰 마이크와 작은 마이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힘에는 큰 힘과 작은 힘이 있는 것 같다. 그건 권력의 문제이다. 분명히 현실에는 위계라는 게 존재하고, 정치적 힘이든 경제적 힘이든, 더 큰 게 있고 작은 게 있다. 그러나 마이크에도 그런 게 있을까?

 

진실이든 아니든, 뭔가 찾아가는 길이라고 할 때, 더 큰 게 있고, 더 작은 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가 마지막에 자식이 뿌리려던 홍보 전단을 뿌리는 장면이 나온다. 더 큰 마이크가 있고, 더 작은 마이크가 있는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뭔가 새로운 것을 해내는 순간, 혹은 새로운 것을 찾아내거나 착안하는 순간, 그 순간에 큰 것, 작은 것, 그런 게 있지는 않다.

 

물론 책과 칼럼은 다르고, 매체나 양식에 따라서 전하고 싶은 얘기나 하고 싶은 얘기 혹은 그 얘기들을 전개하거나 정리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

 

다섯 살짜리가 문득 나에게 건네는 말이나 이명박이 하는 말이나, 어떤 말이 더 클까? 뭔가 배우는 순간이라는 것은, 큰 마이크와 작은 마이크라는 논리와는 확실히 다른 것 같다.

 

새로운 생각이 생겨나거나, 뭔가 해보고 싶은 결정적 순간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시작은 언제나 그렇게 미약한 것이므로

 

물론 나도 모든 사람들이 하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다 귀기울여 듣지는 못한다. 그랬다가는용량 초과에, 인격 초과인 상황이 올 가능성이 100%일 테니까. 그렇지만 큰 마이크와 작은 마이크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지금까지, 수 년간 익숙하게 살고 있던 삶의 양식이나 표현 방식을 던져버리고, 마이크를 내려놓을 준비를 하다보니과연 큰 마이크가 있고 작은 마이크가 있나,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못된 사람과 좋은 사람이 REK로 있을까 싶다. 못된 생각을 많이 하면 못된 사람이 되고, 좋은 생각을 많이 하면 좋은 사람이 되는 거 아닌가?

 

큰 마이크를 쥐기 위해서 자꾸 못된 생각을 하면, 마이크는 커질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스스로 더 이상 버티지 못하는 순간이 오게 될 것 같다. 우파들이 더 큰 힘, 더 큰 권력을 탐하다가 자기 스스로 그 화를 참지 못하고 붕괴하는 게 대충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블로그라는 양식은, 이게 언제까지 문명적으로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운용하기에 따라서는 참 여러 가지 목적으로 전환될 수 있는 개방적 포맷이다. 요즘 같으면 트위터에 밀려 작은 마이크 같아 보이는

 

그러나 뭔가를 생각하거나, 뭔가를 만들어나간다고 할 때, 큰 것과 작은 것의 차이는 없다.

 

큰 마이크라고 생각했던 조선일보 맛탱이 가는 거 봐라.

 

힘을 탐하는 것이 주는 허탈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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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칼럼을 마치고

 

경향신문에 연재하는 몇어찌 50회째 원고를 끝냈다.

 

2005년에 서울신문에 첫 칼럼을 쓰면서, 거의 매주 어디엔가 칼럼을 썼다. 참 오래도 썼다.

 

꽤 전부터, 이 칼럼을 마지막 칼럼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경제학자로서의 내 삶을 대선 때까지로 맞추어놓고 있던 것은, 이번 정권이 시작할 때부터였다. 미루어두었던 은퇴, 이제는 내려놓을 때가 된 듯하다.

 

제일 먼저 정리한 게 학교 수업이고, 그 다음에 강연들. 예전에 신세졌던 사람의 부탁을 받거나,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면 강연도 많이 정리했다.

 

이번에 칼럼을 정리한다.

 

이렇게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자연스럽게 학자로서의 삶을 정리해가는 중이다.

 

사람의 욕심이라는 게 끝이 없다. 쥐면 더 쥐고 쉽고, 뭔가 내려놓으면 아쉬울 것 같아서, 더 얹어야 직성이 풀리는 게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나는 칼럼들이 좀 있다. 나름 보람도 있었고, 칼럼이라는 글의 양식에서 몇 가지 시도도 해보았다.

 

그러나 모든 시작하는 것에는 끝이 있는 법.

 

사실 학자 혼자서 해볼 수 있는 시도는 안 해본 게 없을 정도로, 여러가지를 해봤지만이미 한계에 왔다. 같은 얘기를 반복하거나, “그게 내가 예전에 했던 얘기야”,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다.

 

학교 바깥에서 공동 연구를 하기는 쉽지 않고, 그렇게 쓸 돈도 없다. 그렇다고 지금이라도 머리를 숙이고 학교로 들어가느니

 

그냥 내려놓는 편이 훨씬 깔끔하다.

 

원래는 바로 귀농할 생각을 했었는데, 아내가 취직을 했고, 아내는 그 일을 조금 더 해보고 싶어한다. 나는 그냥 집에서 밥이나 하고, 집안 살림하고그냥 놀 거다.

 

영화와 관련된 일은, 얼마나 오래 할지는 잘 모르겠다. 영화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진짜 영화하는 사람들이 미친 것처럼, 그렇게 영화에 미치지는 않았다.

 

영화를 만드는 일보다도, 영화에 관련된 책은 좀 재밌게 써보고 싶은 것들이 좀 있다.

 

어쨌든 학자로서의 삶은 이제 조금씩 내려놓으려고 한다.

 

대장정 시리즈에 마무리하지 못한 책들이 좀 남아있고, 번외편 책들이 마무리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그 뒤에, 경제학 책을 계속 쓸 것 같지는 않다. 더는 아는 얘기도 없고, 더 해놓은 연구도 없고, 그 뒤로 더 연구를 할 계획도 없고.

 

효과적이었는지 혹은 효율적이었는지, 그건 모르겠다. 다만 내게 주어진 시대를 열심히 살기는 했던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퇴로를 막아놓고, 뒤로 가지 않는 그런 글들을 쓴 것 같다. 내려놓는 순간을 정해 놓으면, 눈치 볼 게 확 줄어들고, 신경 써야 할 것도 줄어든다.

 

처음 시작할 때 생각해보면, 나도 참 멀리 와 있는 것 같다. 옳은 데 와 있는 것인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멀리 온 건, 맞는 것 같다.

 

그 동안 칼럼을 쓰면서, 꼭 남기고 싶은 한 마디가 뭘까, 생각해봤더니

 

신문의 칼럼 원고료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싸다는 사실. 이건 좀 시정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신문에 글을 쓰기 위해서는, 당장 뭔가 더 조사를 하거나 아니면 과거에 알고 있던 것을 꺼내놓아야 하는데

 

우리 신문에 글 쓰는 걸 영광으로 알라, 이런 편집국의 자세는 좀 아닌 듯 싶다.

 

물론 말은, 신문이 어려워서 원고료가 그렇게 밖에, 그렇게 하기는 하지만

 

가슴으로 느껴지는 편집국 간부들의 말은,

 

당신한테 특별히 지면을 주니 영광으로 아시고

 

괄호 열고, “여기 글 쓰고 싶은 사람들은 많으니까…”

 

그건 좀 아닌 듯 싶고, 모 신문사들처럼 짧은 글에 100만원 이상씩 주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지금보다 원고료가 3배 정도는 올라야 할 것 같다. 잠깐 계산해봤는데신문사에서 돈이 없어서 원고료를 적게 지불한다는 말은, 사실 경제학자로서 잘 납득이 가지는 않았다. 칼럼 원고료 3배로 올라도, 신문사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몇 년간 해보고 갖게 된 생각은,

 

당신 아니더라도 글 쓸 사람 많으니깐, 영광으로 아시라

 

요게 신문 원고료가 지독하게 짠 진짜 이유인 것 같다.

 

다음 번에 칼럼을 쓰게 될 사람들을 위해서, 마지막 칼럼을 접으면서 요 말 한 마디는 남겨놓고 싶다.

 

어쨌든, 지난 몇 년간 과도한 영광을 누렸다.

 

칼럼도 권력이라면 일종의 권력이다. 나는 내 몸에 붙은 짐들을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그렇게 펜대를 내려놓을 마지막 순간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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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의 부부 고양이 사진이 남아 있는 게 있어서...


작년 겨울을 나고, 봄에 본 부부 고양이의 모습이다.

이 때만 해도, 이 부부가 자식을 낳고, 새끼를 거느린 가족이 될 지는 나도 몰랐다.

엄마와 자식, 이렇게 사는 가족들은 이 마당에 가끔 있었는데...




이 녀석이, 카리스마로는 이 동네 짱을 먹은 녀석이다.

지금은 구청에서 중성화 수술을 당하고, 좀 초라해졌지만, 이 때만 해도 카리스마 장난 아니다.

 

 



처음 내 앞에 나타났을 때는, 진짜 삐쩍 골아서 남루한 모습이었지만...

겨울 한 철 잘 먹였더니, 정말 한 꺼풀 벗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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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는 집에서, 올해는 이사를 가려고 한다. 몇 년간 같이 살았던 고양이 식구와 헤어지게 될지, 어떻게 될지, 아직은 잘 모른다.

어쨌든 마지막 겨울이 될지도 몰라서, 올 겨울에는 얘네들 엄청 잘 챙겨 먹었다.

어차피 자연에서 혼자 살던 넘들이라...

그래도 사람 마음이 그렇지가 않아서, 겨울에 얼어죽지는 않게 하겠다고, 가을부터는 정말 성실하게 밥을 줬다.




일요일, 오늘 따라 담벼락 위에 있던 아빠 고양이가 먼저 왔다.

보통은 엄마 고양이와 아들 고양이가 먼저 오는데...

아빠는 이 식구들과 언제까지 같이 살 수 있을지 모른다.

봄이 되면 새로운 짝짓기가 시작될 거고, 아빠는 영 쓸 데가 없다.

게다가 가을에 구청에 끌려가서 중성화 수술도 해서...

이 가족에서는 군식구인 셈이다.



하여간 혼자서 식사를 마쳤다.

아빠는 혼자 먹는 경우가 많다. 식구들이 다 먹은 다음에 먹거나, 아니면 혼자 와서 따로 먹고 가거나...


다 먹고 휴식 중. 먹을만큼 먹었다 싶었다.



잠시 후에 엄마 고양이가 나타났다. 

소, 닭 보듯 하나 싶었는데...


엄마 고양이가 아빠 고양이한테 뽀뽀...

부부의 정, 진짜 애틋했다.

2년 넘게 보던 부부 고양이인데, 이런 모습은 나도 처음 봤다.

프랑스식 비주라고나 할까...

어쩌면 긴 겨우내, 영하 10도 이하를 버텨낸 것은,

자기들끼리 체온을 나누며 부등켜 안고 지냈던 시간들일까?


엄마, 밥 먹으러 간다 싶었는데...


간만에 같이 하는 식사라서 그런지,

금방 먹고 포만감에 기지개켜던 아빠 고양이가 다시 먹기 시작한다.

동물도,

꼭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 것만은 아닌 듯 싶다.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 것만은. 아. 니. 다.

 

잠시 후, 아들 고양이가 나타났다.

(아, 삥이 나무에 가서 맞아버렸다... 이제 나도 눈이 많이 나빠져서, 수동으로는 촛점을 거의 못 잡고, 그냥 기계에 맡겨두는데, 가끔 반셔터 미스로, 결정적인 장면에 요딴 일들이 생긴다.)

 


아들 고양이가 잠시 나를 쳐다본다.

세 마리의 고양이 중에서, 나를 제일 좋아하는 게 이 아들 고양이다.

반면에 내가 가장 애뜻하게 생각하는 것은, 언제 이 가정에서 쫓겨나지 모르는 불안한 균형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아빠 고양이...

늘 넉넉하게 먹이를 주려고 하는 것은,

수용능력에 한계를 느낄 때 가장 먼저 쫓겨날 것이 아빠 고양이라서...

 

이번에는 아빠가 고개를 들고 나를 본다.

자식, 많이도 먹는다...

 


엄마의 몸단장. 하루에 고양이는 몸단장으로 1시간 정도는 쓴다는 것 같다.

아, 나는 몸단장으로 하루에 몇 분을 쓸까?

(1분도 안 쓰는 날도 많은 듯 싶다. 고양이한테, 이런 건 좀 배워야 한다.)


모든 행복을 다 느낀 하오의 아빠 고양이,

이제 당당하게 퇴청하신다.


아들도 먹을만큼 먹었다.

이사 가게 되면, 수의사들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이 녀석들을 데리고 갈까 고민하게 만든 게, 바로 이 아들 고양이 때문이다.

지난 여름, 장마가 한참일 때 세 마리가 우리 집 거실 앞에서 태어났다.

며칠을 새끼 고양이들의 울음과 함께 장마철을 지냈는데...

결국 가을이 오기 전, 두 마리는 구름다리 건너고,

이 녀석 혼자 남았다.

사라져버린 두 마리를 생각하며, 열심히 걷어 먹였는데...

그래서 이 녀석은 덩치는 부모들만해도, 자연에서 혼자서는 못 살아간다.


아들 고양이도 스트레칭.

아직 살짝 영하의 날씨이지만, 영하 15도씩 한참 가는 겨울을 버텨낸 녀석들에게는,

이제 세상은 이미 봄이다.

밥도 넉넉하게 먹었겠다,

정말로 여유롭다.

 

 



이 녀석들 말고도 마당에 사는 고양이가 몇 마리 더 있다.

겨울에 이 녀석들이 먹은 사료가, 오늘 세어보니 30킬로그램 정도 된다.

어쨌든...

다들 무사히 이 번 겨울은 넘겼다.

녀석들과 함께,

나야말로 삶에 대해서 많이 배웠다.

동네에 소문이 나서 그런지,

골목길 다닐 때면 꽤 많은 고양이들이 나한테 인사를 하고 간다.

아주 춥거나 힘들 때, 우리 집에 와서 뭐 좀 챙겨먹고 가는 녀석들...

겨우내,

내가 진짜 많이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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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마당에 검은 고양이가 나타난 것은 지난 가을이 끝날 무렵이었다.

일년에 몇 번, 마당을 차지하기 위한 고양이들의 쟁탈전이 벌어지고, 2년 전에 이 싸움에서 승리한 누렁이가 일가를 이루고 산다.

물론 그렇다고 이 가족들만 마당에 사는 건 아니다.

나는 늘 먹이를 주기 때문에, 나름대로는 친하게들 지낸다.

사건이 벌어진 것은, 일요일 오전, 검은 고양이가 마침 혼자 있던 아들 고양이를 밀쳐내기 위한 싸움을 걸었다.




늘 나를 보자마자 도망가던 검은 고양이에게 무슨 심경이 변화가 생겼는지, 혹은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다른 동네의 고양이들도 먹고 갈 수 있게 나는 먹이를 넉넉하게 주는 편이다.

오늘 처음으로 사진을 찍을 잠깐의 시간을 낼 정도로, 검은 고양이가 가깝게 왔다.

(물론 실제로는 300미리 정도 되는 줌을 썼으니까, 사진으로 보이는 것처럼 가깝게 있지는 않다.)


사진을 보고서야, 엄청 큰 상처가 생긴 줄 알았다.

삶이란...

치료를 해주고 싶지만, 그럴 방법은 없다.


오후에 나오는데, 가족 고양이와 검은 고양이들이 마당에서 같이 쉬고 있었다.

하여간 변화가 생기기는...

아빠 고양이는 보이지 않고, 엄마 고양이와 아들 고양이가.

상처가 안 스러워서 특식으로 주는 사료를 줬다.

팽팽한 분위기...

누렁이들은 사료는 양보해도, 캔까지 양보하지는 않을 모양새다.


짜리하게 경계하고 있는 게 엄마 고양이.

그냥 내 마음에는, 검은 고양이의 상처가 안되서 뭐라도 좀 주고 싶었던 거지만.

그거야 내 생각이고.


사진으로 보니, 검은 고양이의,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아보이는, 맨살이 그대로 드러난 상처가 더 안스러워 보인다.

상처난 고양이는 물론이고, 꼬리 잘린 고양이 등, 동네에서 숱하게 보기는 하지만.

어쩐지 내가 거두어 먹이는 고양이의 아픔이, 남의 일 같지는 않다.



남 먹는 거 보지 말라고...

그래도 이 녀석들이, 혈연이 아닌 다른 고양이가 이렇게 가깝게 오도록 하는 건 처음 보았다.

며칠 이렇게 실낭이를 하다가, 그냥 식구처럼 살게 될 듯 싶다.



엄마는 벌써 다 먹었고, 아들이 남은 걸 핥는 중이다.

검은 고양이, 뭔가 냄새에 이끌렸는지, 나도 좀 줘...

해보지만 소용없다.



엄마 고양이가 아들이 남은 걸 다 먹을 때까지, 검은 고양이를 견제한다.

이 집 아빠 고양이는, 2달 전 구청에 끌려가서 중성화 수술을 하고 왔다.

그렇지만 여전히 동네 짱이라, 카리스마 만빵이다.


식사 끝...

물론 사료가 충분히 있어서, 검은 고양이도 굶거나 그럴 상황은 아니다.

그렇지만 상처가 너무 안되어서 따로 뜯어준 특식은, 구경도 못했다.


어쨌든 어제와 같은 전투 분위기는 아니고,

옆에까지 오도록... 사실은 많이 친해진 거고, 많이 익숙해진 것.

싸우면서 정든다는.


이 고양이 가족들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른다.

봄이 오면 또 새로운 짝들을 찾기 시작할 거고, 엄마들이 아기를 가지게 되면,

가족 구성에 전혀 새로운 변화들이 온다.


안방에 사는 야옹구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마당 고양이들.

carrying capacity, 수용능력이라는 생태학에서 사용하는 아주 딱딱한 개념 같은 것을 떠올리고 싶지는 않다.

삶...

이 단어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내일은 동물병원 가서, 검은 고양이 뭐 먹는 약이라도 없나, 좀 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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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좋아질까?

 

학자로서 살아가는 삶은 올해를 마지막으로 하겠다고 결심한 건 꽤 오래 된다.

 

마흔 살에 은퇴하겠다는, 스무 살 때부터 나하고 했던 약속이 있다. 돌아보면 내 삶은 미친 놈처럼 과로와 과로의 연속이었는데, 그만둘 시간이 정해져서 과로 인생을 살았던 측면이 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정부나 외부 지원 없이, 학자 혼자서 해볼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해봤고, 이보다 일을 키우기 위해서는 팀 작업이 필요한데, 그건 지금으로서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다. 모델링 작업이나 장기 시뮬레이션 같은 걸 더 해보고 싶은데, 이런 것도 혼자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넘는다.

 

이래저래, 더 할 수 있는 건 없다. 했던 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고, 뭐 그런 방법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게 시간을 끌고 싶지는 않고.

 

방송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데, 누군가 나가야 하지 않느냐는 얘기를 듣고, 그 동안 TV도 참 많이 나갔다. 이제 그건 나꼽살로 어느 정도는 내가 기여할 만큼은 한 거라는 생각이 들고, 올해까지 주어진 시간 동안에 열심히 하는 걸로.

 

아주 우연한 기회에, 예정에 없이 갑작스럽게 영화사 직원이 되었고, 요즘은 시나리오부터 영화에 대해서 새롭게 배우는 중이다. 나름, 안 해보던 일이라서 재미있다.

 

혼자서 학자로 살아간다는 것, 이게 좀 고달픈 일이다. 어떻게 보면, 나도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지 좀 되는 것 같은데, 그냥 억지로 즐거운 상상을 하고, 웃으면서 참고 버텼던 것 같다.

 

올해까지가 그 한계점이라고 생각한다.

 

더 큰 문제는, 연구소 같은 데 대해서 생각하면 머리가 빡빡하고, 대학 근처만 생각해도 머리가 욱신욱신. 어떻게 생각하면, 지금까지 거의 쉬지 못하고 너무 오랫동안 초긴장 상태에서 살아온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연구소나 대학에는 더 이상 비밀스러운 것도 없어서, 신비감이나 기대감 자체가 사라져버렸다는 게 문제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런 일은, 이제 때려죽인다고 해도 못하겠다.

 

이래저래, 내가 학자로서 사회적으로 뭔가 할 수 있는 건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은 나도 못 버티고, 또 같은 형식으로는 더 나올 얘기도 없을 것 같다.

 

삶이라는 게, 의미와 보람만으로 살 수는 없고, 흥미나 재미가 없으면 정말로 자신의 혼을 담기가 어렵다. 간단하게 말하면, 학자로서의 삶이 더 이상 흥미가 없고, 어떤 이유로든,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가 않다.

 

경향신문 연재 기준으로 하면, 이제 3번의 칼럼이 남아있다. 사회적으로 하던 일 중에서, 칼럼이 제일 먼저 끝난다. 아마 꼽사리가 가장 마지막까지 진행될 거고, 경제 대장정을 다 마무리하게 될 때까지는 당분간 책은 계속 쓰게 될 거고.

 

어쨌든 그러다 보니 가장 마지막으로 나에게 남은 질문이, 과연 명박 시대가 끝나고 나면 세상이 좋아질까, 그 질문이다.

 

안타깝지만, 지금 상황대로라면 별로 좋아지지 않는다, 이게 내 잠정적 결론이다. 물론 내가 모든 걸 생각할 수는 없으니, 언제라도 돌발 변수가 존재할 수는 있지만, 현재까지로서는 영 아니올시다에 가깝다.

 

그렇지만 어쩌겠냐, 내가 어쩔 수 없는 범위 바깥의 일인데 말이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그 다음은 나도 모른다, 그럴 수밖에 없다.

 

다음 시대의 일은, 또 다음 시대의 사람이 등장해서 더 많이 분석하고, 더 적극적으로 해결해주기를 바랄 수밖에.

 

세상은 늘 그렇게 흘러간다. 안타깝다고 붙잡고 있는다고 해봐야, 더 문제를 잘 풀 수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 괜히 그러다가 정말 노욕이 생겨나게 된다. 처음 출발할 때 생각해보면, 이미 아주 멀리 와 있다. 더 가겠다고 붙잡고 있는 것, 그건 내가 살아온 방식과는 다르고.

 

한국 경제를 주제로 12권의 책을 마치고 나면, 정말 더 할 것도 없고, 더는 아는 것도 없는 상황이 될 것 같다. 그리고도 세상이 안 좋아진다면? 어쩌겠냐, 거기까지가 내 능력치의 전부일텐데.

 

어쨌든 시리즈에 남은 책 몇 권 그리고 번외편으로 준비된 기타 등 정리하고 나면, 경제학자로서 더 이상 책을 쓰거나 그런 일은 안 할 것 같다. 그야말로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이다.

 

어떻게 보면, 진작에 그만두었어야 할 일들이었는데, 명박 시대라는 이상한 시대를 만나 마지막으로 남은 힘들을 쥐어짜면서 몇 년을 더 버틴 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우리들의 시대가 해피엔딩으로 끝나기를 바라고, 지금도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걸 끝까지 지키겠다고 할 수 있는 능력치 이상으로 바둥거리면, 정말 사람 추해지는 건 순식간이다. 별로 그러고 싶지는 않다.

 

어떻게 보면, 한국 사회에서 나도 주체할 수 없는 과분한 영광을 누린 셈이다. 이제 그걸 다음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싶다.

 

권력이나 힘이나, 영광이나, 너무 쥐고 있으려고만 하면 결국에는 추해진다.

 

나는 그렇게 안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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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들만으로 구성되지 않은 조직

 

에너지관리공단 시절, 한참 많은 때에는 여성 과장을 두 명이나 데리고 있었고, 직원도 여성, 그래서 남성은 나를 제외하면 1~2명만 있던 때가 많았다.

 

별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나는 특채로 나중에 입사한 경우라서, 사람들이 다 꺼렸던 여성 과장이나 여직원들이 내가 있던 팀에 집중배치된. 내가 여성들과 같이 일을 하는 법을 처음으로 배운 건, 그 시절이었다.

 

프랑스의 경우는 그렇지 않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경제학과에서 여성들을 보기가 어렵고, 아주 금방, 남성만으로 구성된 임시조직들이 만들어진다.

 

책을 낼 때는, 나의 파트너들은 대부분 여성들이다. 새로 작업하게 된 에디터 일부들을 제외하면, 오래 작업한 친구들은 대부분 아줌마이고, 아기 엄마이기도 하다.

 

지금도 중요한 경제와 관련된 회의에 가면, 여성들이 없거나, 아니면 정말 하위직으로만 참가하는 그런 경우가 많다.

 

한전 등 발전회사에서 여자 과장들이 생겨난게 얼마 되지 않는다.

 

나는 꼽사리다를 처음 시작할 때, 여성 멤버가 있는 편이 좋으냐, 아니냐, 이런 걸로 김어준 등과 좀 고민을 한 적이 있다. 이것도 선택의 문제이기는 한데, 여성이 없는 편이 좀 더 편하고 장점이 많을 거라는 게 김어준의 생각이었다.

 

일리 있는 생각이기는 한데, 길게 보면 나는 여성이 있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이유는, 별 특별한 게 아니라 남성들만으로 구성된 조직 보다는 양쪽 성이 다 참여하는 편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던,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그게 다른 진행자보다는 나랑 선대인이 김미화 누님 쪽을 더 선호했던 이유이기도 하고.

 

이게 좋았던 건지 아닌지는, 시간이 조금 더 지나봐야 알겠지만, 어쨌든 남성들만으로 구성된 조직을 자꾸 흔들려는 게, 수 년째 내가 가졌던 자세이다.

 

아무래도 자꾸만 이질성을 만들어내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너무 균일한 그룹이나 동질적인 사람들끼리만 모이면, 남들 다 아는 것을 자기들만 모르는 바보 현상, 혹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현상이 벌어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나도 아직은 이유는 정확히 모르지만, 어쨌든 남성만으로 구성된 조직에는 문제가 좀 생길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믿음 같은 게 있다. 가능하면 그렇게 내가 움직이는 공간을 구성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타이거 픽쳐스라는 곳은, 요즘 두 달째 내가 출근하고 있는 곳을 가장 간단히 설명하면, 이준익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곳이다.

 

물론 이 집단은 처음부터 남성으로만 구성된 집단은 아니었다. 영화사 아침의 대표, 정승혜 대표가 이 집단을 이끄는 삼두마차의 한 축이었다. 전설적인 인물인데, 불행히도 나는 뵐 기회가 없었고, 암으로 딱 내 나이 때 돌아가셨다.

 

어쨌든 그 이후로, 일부 스탭들을 제외하면, 남성만으로 구성된 집단처럼 되었다.

 

이곳은 2년째, 위기를 겪고 있고, 특히 조연출 등 스탭들을 감독으로 데뷔시키지를 못해서, 진짜 어려움에 빠져 있다.

 

상황이 그러다 보니, 진짜 오래된 식구들만 사무실에 나오는데, 사실상 남자만으로 구성된 조직처럼 되어있다.

 

이준익 감독과 여성 출연자에 대해서는, 좀 재밌는 얘기들이 많다.

 

아직 나도 답은 모른다. 이건 상황에 따라서 다르고, 맥락에 따라서 다르니까, 경제학에서 얘기하듯이 최적화의 논리를 드러낼 건 아닌 듯 싶다.

 

어쨌든 남성만으로 이루어진 조직, 이것도 연구 대상은 연구 대상이다.

 

그렇다고 그걸 연구하기 위해서, 남성만으로 이루어진 조직을 찾아다니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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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과 얘기

 

양식과 내용의 호응, 이건 오래된 질문이기는 하다. 음악이든 미술이든, 기본적으로는 얘기를 한다는 것은 같은 건데. 양식이 바뀌면 과연 그 얘기도 바뀔 것인가, 그런 질문이 있다.

 

새로운 양식이 생기면 새롭게 하고 싶은 얘기가 생기는 것인지, 아니면 양식이 바뀌어도 여전히 같은 얘기를 하게 되는 것인지. 좀 투박하지만 양식에 대한 질문이란 건 그런 거다.

 

언어에 대한 질문과도 같다. 분명히 습득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가 생기면, 새로운 정보가 생기고, 새로운 지평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그게 어디까지의 범위에 해당될까?

 

언어와 관련해서는, 20대 초반의 잊을 수 없는 경험이 있다.

 

프랑스에서 7개 국어를 하는, 아주 오래된 외교관을 알게 된 적이 있었다. 출신은 귀족이었고, 젊었을 때에는 영화를 한다고 집안 돈을 좀 가져다 썼고, 결국 나중에 정신차려서 외교관이 된. 물론 그건 공식적으로 들은 얘기고, 본인은 영화 때문에 돈을 많이 쓴 건 아니고, 경마를 돈을 많이 썼다는

 

하여간 당시 나도 어학에 관심이 많아서, 불어를 한참 익숙하게 하기 위해서 고민하던 중이었고, 라틴어도 배우고 싶었고, 희랍어도 배우고 싶어하는 그런….

 

그 양반 얘기는, 자신은 7개 국어를 하지만 경제에 대해서는 막 박사과정에 들어온 나보다도 모른다는 거

 

불어와 영어, 이미 충분히 어학적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자기처럼 언어에 시간을 많이 쓰다가 환갑이 다 되어서 후회하지 말고, 경제에 대해서 혹은 세상에 대해서 더 많이 알려고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어쨌든 나는 그 조언을 따랐고, 그 후에 독일어를 조금 더 공부했을 뿐, 어학에 대해서는 별로 시간을 쓰지는 않았다.

 

후회도 있다. 지금이라도 일본어를 더 배우고 싶은데, 핑계이기는 하겠지만, 이젠 새로운 언어를 배울 시간을 잘 내기도 어렵고, 그만한 공간을 내기도 쉽지가 않다.

 

지금에 와서 이런 얘기를 다시 생각하는 건

 

, 그냥 텍스트라고 하지만, 이 안에도 주제나 포맷에 따라서 묘한 스타일의 차이가 있고, 거기에 얹을 수 있는 내용이, 일종의 상호결정처럼 작동한다는 것.

 

대체적으로 책을 쓰는 것에 대해서 고민을 하기 시작한지 10년쯤 되는 것 같은데, 당시 나는 보고서에 익숙해져 있어서 보고서체나 논문체가 아닌 다른 종류의 글을 아예 쓸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당시 막 인터넷 게시판이라는 게 활성화되기 시작했는데, 도대체 이 새로운 양식에서는 어떻게 글을 써야할지, 전혀 감을 못잡고 있었다.

 

어쨌든 책을 쓰려고 마음을 먹으면서 내가 했던 건, 몇 년에 걸쳐서 매일 글쓰기를 했던 것과, 그냥 놀이 살아서 보던 영화들을 진짜 진지하게, 마치 교과서를 공부하듯이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누구나 기본에 해당하는, 100번쯤은 보았을 교과서가 있고, 나에게는 경제학이 그랬다.

 

100번쯤 볼 영화라면, 많은 사람들은 고전에 해당하거나 외국의 명작들을 집어들었을 테지만, 내가 처음 집어든 한국 영화는 짝패’, 그 다음에 달마야 놀자와 같은 한국 영화였다.

 

어쨌든 그게 영화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었을지는 여전히 회의적이지만, 대중들과 얘기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그 과정에서 좀 많이 배웠던 것 같다.

 

그 후에 두 종류의 글쓰기에 대해서 익숙해지려고 노력했던 편인데, 하나가 사회과학이라는 형태로 테제들을 정리해내는 것, 또 다른 한 가지가 원고지 10장 내외의 칼럼으로 글 쓰기.

 

이걸로 먹고 살 수 없다고 얘기했던 사람들이 많기는 했는데, 그리고 10년쯤 지나보니, 어쨌든 이것저것 모아서 하루에 세 끼 먹고 사는 데는 별 문제는 없다. 물론 나야 워낙 소비가 적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젠 이 두 개의 양식을 내려놓으려고 한다. 물론 그렇게 결심한 것은 좀 오래되기는 했는데, 이제 그 순간이 점점 눈 앞으로 오고 있는.

 

칼럼이란 것은, 아주 짧기는 한데, 최고로 날이 선 양식이다. 원고지 10장으로 세상을 바꾼다

 

세상을 바꾸기는 어렵지만, 누군가는 아주 곤란하게 만들어줄 수는 있고, 그게 칼럼이 가지고 있는 힘이다.

 

무술로 따지면, 극도로 제약된 짧은 순간에 공격과 수비를 마감해야 하고, 그렇게 전투를 끝내야 하는 글이다.

 

물론 더 짧게 하려면 트위트의 몇 줄로도 세상이 조금 바뀌기는 하지만, 트위터의 단문들은 아직 양식으로 자리를 잡지는 못한 것 같다.

 

고전적이고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유효한 양식은 칼럼이다. 물론 모두에게 칼럼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지만, 누구나 칼럼이라는 형식의 글을 쓸 수는 있다.

 

칼럼은 날카로운 칼이고, 이미 쏘아버린 활과 같다.

 

칼럼의 장점은, 잘 벼려서 짧게 끊어치면 책 몇 권으로도 하지 못한 일을 순간적으로 바꿀 수 있는 효율성이다.

 

단점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내면서, 자신에게도 상처가 남는다는 점.

 

몇 년 동안 참 많은 싸움을 했는데, 칼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이, 칼을 잘 쓰는 사람에게도 상처가 남는다.

 

책은 칼럼보다는 숨이 길다. , 그거야 당연하고.

 

2년 전부터, 한국 출판계에는 묘한 흐름이 생겼다.

 

책이 선시장이고, 책을 따라서 방송과 기타 사회 현상들이 생겨나는 일들이 한국에도 있었던 것 같다. 근데 그게 좀 변했다. 이게 임시적이고 잠정적인 건지는,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책이 어느덧 후시장 같은 게 되었다.

 

사건이 먼저 생기고, 책이 뒤따라 가거나, 뒤이어 팔리는 것.

 

섬유시장으로 치면, 파리의 프리미어 비지옹, 밀라노의 후시장, 그런 구조가 떠오른다.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파리 시장에서 밀라노 시장으로 책이 움직이는 작동방식이 묘하게 바뀐 것.

 

어쨌든 사회과학이든, 칼럼이든, 하고자 하는 얘기는 같다. 다만 스타일이 다르고, 숨보가 다르고, 사회적으로 움직이는 공간의 균열 방식이 좀 다르고.

 

최근에 새롭게 시도해보는 게 에세이인데, 이건 길이는 칼럼하고 같거나 조금 더 길거나 가끔은 더 짧기도 하고 -, 이건 칼럼과는 목표도 다르고 작동방식도 다르다.

 

활로 비유해보자. 사회과학 책이나 칼럼이 머리를 겨냥한다면, 에세이는 가슴을 겨냥한다고나 할까? 읽는 사람과 공감하는 공간이 다르고, 울림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다르다.

 

물론 잘 만들어진 책이나 칼럼이나 에세이나, 더 상윗단계로 올라가면 차이가 있을 게 없을 듯하지만, 거기는 아직 내가 못 가본 단계이고.

 

어쨌든 이런 게 좋든 싫든, 텍스트라는 틀 내에서 움직이는 것들이고.

 

나는 꼽사리다의 경우는, 기본적으로는 텍스트의 연장이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연출이라는 게 들어간다. 물론 텍스트에도 설정 같은 게 들어가기는 하지만, 흔히 컨셉으로 들어간 연출이라는 요소가 들어간다.

 

물론 애초에 누군가 기도하거나 계획한 연출은 아니다. 그럴만한 스탭도 없고, 그렇게까지 새밀하게 준비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단순한 텍스트의 연속인 것만은 아닌, 의도되었든 의도하지 않았든, 연출이라는 요소가 더 들어간다.

 

일단 방송이 자리를 잡으면 출연진을 바꾸기가 어려운 게, 이미 생겨난 화학적 결합을 새롭게 대체하기가 쉽지가 않아서 그렇다. 물리적인 변화와 화학적 변화의 차이라고 하면 가장 적합할 것 같다. 나꼽살의 경우도, 지금에 와서는 편집 김용민부터, 출연진의 어떤 요소도 바꾸기가 쉽지가 않다.

 

이건 단순히 무료로 봉상할 사람이 더 없다거나, 그만큼 정부 눈치 안보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없다거나, 그것과는 좀 다른 얘기이다. 재밌든 재미없든, 이미 생겨난 화학적 결합은, 예상은 할 수 있지만, 기도되지는 않은 것이다.

 

여기까지가 이미 내가 해보았거나, 익숙해진 양식들이고

 

영화가 만들어지는 방식은, 책이나 칼럼과는 전혀 작동 방식이 다르다. 물론 그 출발점은 시나리오라는 텍스트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이건 우리가 익숙한 글과는 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텍스트이다.

 

우리가 언제 처음으로 책을 읽었을까? 그림 책까지 치면, 보통 4~5살 처음으로 책을 한 권을 읽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계에서는 시나리오를 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 을 읽어본 사람은, 아주 드물다. 영화와 관련한 전공을 했거나, 지망생들까지가 을 읽었을 거의 전부가 아닐까 싶다. 일반인들이 시나리오를 읽게 될 일은 아주 적을 것 같다.

 

요즘 내가 만나보게 된 새로운 질문은, 사회과학 혹은 칼럼과 같은 양식에서 시나리오로 양식이 바뀌면, 하고 싶은 얘기가 바뀌거나 아니면 아예 다른 종류의 얘기를 하게 되는가, 아니면 양식이라는 것은 그저 내용을 반영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인가, 그런 기본적인 질문이다.

 

제일 쉽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예산의 범위이다.

 

영화의 예산이 5억인 경우, 15억인 경우, 30억인 경우, 70억인 경우, 100억인 경우, 무대를 다루는 방식이나 셋트의 설정 그리고 얘기를 전개하는 공간이 다르게 된다. 동원되는 가장 큰 신의 형식도 차이.

 

진짜로 현장을 보여줄 것이냐, 아니면 그걸 중계하는 방식 혹은 누군가의 입을 빌어 나중에 얘기하도록 할 것인가?

 

큰 전쟁이 벌어지는 걸 그냥 보여줄 수도 있고, “, 전쟁 났다가 끝났대”, 이렇게 짧게 대사 처리를 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예산차이는 본질적이면서도, 어떻게 보면 하고자 하는 얘기의 크기에 비하면 아무 일도 아니다.

 

영화 <짝패>에서, 서울 본사의 얘기는 얘기로만 존재하지, 실제 형상화되어서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건 예산 문제라기 보다는, 그 영화에서 잡았던 프레임과 스케일의 문제이다. 돈과는 상관없다. 감독은 악 너머의 악이 존재한다는 은유만으로 서울이 존재하기를 바랬다.

 

1주일째 습작 겸 시나리오 작업을 해보는 중인데, 양식과 내용이라는 첫 번째 딜레마에 부딪혔다.

 

과연 같은 얘기를 하는 것인데, 다만 그 양식만이 바뀐 것일까, 아니면 양식이 바뀌었으면 당연히 하고 싶은 얘기도 바뀌어야 하는 것일까?

 

지금 내가 쓰는 시나리오가 대대적 보완을 거쳐 결국 촬영에 들어갈지, 아니면 수없이 구상되었다가 사라지는 그런 얘기 중의 하나일 뿐인지, 그건 아직은 잘 모른다.

 

어쨌든 이 새로운 양식 앞에서, 양식과 얘기라는 아주 고전적 테마가 잠시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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