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식과 얘기

 

양식과 내용의 호응, 이건 오래된 질문이기는 하다. 음악이든 미술이든, 기본적으로는 얘기를 한다는 것은 같은 건데. 양식이 바뀌면 과연 그 얘기도 바뀔 것인가, 그런 질문이 있다.

 

새로운 양식이 생기면 새롭게 하고 싶은 얘기가 생기는 것인지, 아니면 양식이 바뀌어도 여전히 같은 얘기를 하게 되는 것인지. 좀 투박하지만 양식에 대한 질문이란 건 그런 거다.

 

언어에 대한 질문과도 같다. 분명히 습득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가 생기면, 새로운 정보가 생기고, 새로운 지평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그게 어디까지의 범위에 해당될까?

 

언어와 관련해서는, 20대 초반의 잊을 수 없는 경험이 있다.

 

프랑스에서 7개 국어를 하는, 아주 오래된 외교관을 알게 된 적이 있었다. 출신은 귀족이었고, 젊었을 때에는 영화를 한다고 집안 돈을 좀 가져다 썼고, 결국 나중에 정신차려서 외교관이 된. 물론 그건 공식적으로 들은 얘기고, 본인은 영화 때문에 돈을 많이 쓴 건 아니고, 경마를 돈을 많이 썼다는

 

하여간 당시 나도 어학에 관심이 많아서, 불어를 한참 익숙하게 하기 위해서 고민하던 중이었고, 라틴어도 배우고 싶었고, 희랍어도 배우고 싶어하는 그런….

 

그 양반 얘기는, 자신은 7개 국어를 하지만 경제에 대해서는 막 박사과정에 들어온 나보다도 모른다는 거

 

불어와 영어, 이미 충분히 어학적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자기처럼 언어에 시간을 많이 쓰다가 환갑이 다 되어서 후회하지 말고, 경제에 대해서 혹은 세상에 대해서 더 많이 알려고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어쨌든 나는 그 조언을 따랐고, 그 후에 독일어를 조금 더 공부했을 뿐, 어학에 대해서는 별로 시간을 쓰지는 않았다.

 

후회도 있다. 지금이라도 일본어를 더 배우고 싶은데, 핑계이기는 하겠지만, 이젠 새로운 언어를 배울 시간을 잘 내기도 어렵고, 그만한 공간을 내기도 쉽지가 않다.

 

지금에 와서 이런 얘기를 다시 생각하는 건

 

, 그냥 텍스트라고 하지만, 이 안에도 주제나 포맷에 따라서 묘한 스타일의 차이가 있고, 거기에 얹을 수 있는 내용이, 일종의 상호결정처럼 작동한다는 것.

 

대체적으로 책을 쓰는 것에 대해서 고민을 하기 시작한지 10년쯤 되는 것 같은데, 당시 나는 보고서에 익숙해져 있어서 보고서체나 논문체가 아닌 다른 종류의 글을 아예 쓸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당시 막 인터넷 게시판이라는 게 활성화되기 시작했는데, 도대체 이 새로운 양식에서는 어떻게 글을 써야할지, 전혀 감을 못잡고 있었다.

 

어쨌든 책을 쓰려고 마음을 먹으면서 내가 했던 건, 몇 년에 걸쳐서 매일 글쓰기를 했던 것과, 그냥 놀이 살아서 보던 영화들을 진짜 진지하게, 마치 교과서를 공부하듯이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누구나 기본에 해당하는, 100번쯤은 보았을 교과서가 있고, 나에게는 경제학이 그랬다.

 

100번쯤 볼 영화라면, 많은 사람들은 고전에 해당하거나 외국의 명작들을 집어들었을 테지만, 내가 처음 집어든 한국 영화는 짝패’, 그 다음에 달마야 놀자와 같은 한국 영화였다.

 

어쨌든 그게 영화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었을지는 여전히 회의적이지만, 대중들과 얘기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그 과정에서 좀 많이 배웠던 것 같다.

 

그 후에 두 종류의 글쓰기에 대해서 익숙해지려고 노력했던 편인데, 하나가 사회과학이라는 형태로 테제들을 정리해내는 것, 또 다른 한 가지가 원고지 10장 내외의 칼럼으로 글 쓰기.

 

이걸로 먹고 살 수 없다고 얘기했던 사람들이 많기는 했는데, 그리고 10년쯤 지나보니, 어쨌든 이것저것 모아서 하루에 세 끼 먹고 사는 데는 별 문제는 없다. 물론 나야 워낙 소비가 적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젠 이 두 개의 양식을 내려놓으려고 한다. 물론 그렇게 결심한 것은 좀 오래되기는 했는데, 이제 그 순간이 점점 눈 앞으로 오고 있는.

 

칼럼이란 것은, 아주 짧기는 한데, 최고로 날이 선 양식이다. 원고지 10장으로 세상을 바꾼다

 

세상을 바꾸기는 어렵지만, 누군가는 아주 곤란하게 만들어줄 수는 있고, 그게 칼럼이 가지고 있는 힘이다.

 

무술로 따지면, 극도로 제약된 짧은 순간에 공격과 수비를 마감해야 하고, 그렇게 전투를 끝내야 하는 글이다.

 

물론 더 짧게 하려면 트위트의 몇 줄로도 세상이 조금 바뀌기는 하지만, 트위터의 단문들은 아직 양식으로 자리를 잡지는 못한 것 같다.

 

고전적이고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유효한 양식은 칼럼이다. 물론 모두에게 칼럼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지만, 누구나 칼럼이라는 형식의 글을 쓸 수는 있다.

 

칼럼은 날카로운 칼이고, 이미 쏘아버린 활과 같다.

 

칼럼의 장점은, 잘 벼려서 짧게 끊어치면 책 몇 권으로도 하지 못한 일을 순간적으로 바꿀 수 있는 효율성이다.

 

단점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내면서, 자신에게도 상처가 남는다는 점.

 

몇 년 동안 참 많은 싸움을 했는데, 칼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이, 칼을 잘 쓰는 사람에게도 상처가 남는다.

 

책은 칼럼보다는 숨이 길다. , 그거야 당연하고.

 

2년 전부터, 한국 출판계에는 묘한 흐름이 생겼다.

 

책이 선시장이고, 책을 따라서 방송과 기타 사회 현상들이 생겨나는 일들이 한국에도 있었던 것 같다. 근데 그게 좀 변했다. 이게 임시적이고 잠정적인 건지는,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책이 어느덧 후시장 같은 게 되었다.

 

사건이 먼저 생기고, 책이 뒤따라 가거나, 뒤이어 팔리는 것.

 

섬유시장으로 치면, 파리의 프리미어 비지옹, 밀라노의 후시장, 그런 구조가 떠오른다.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파리 시장에서 밀라노 시장으로 책이 움직이는 작동방식이 묘하게 바뀐 것.

 

어쨌든 사회과학이든, 칼럼이든, 하고자 하는 얘기는 같다. 다만 스타일이 다르고, 숨보가 다르고, 사회적으로 움직이는 공간의 균열 방식이 좀 다르고.

 

최근에 새롭게 시도해보는 게 에세이인데, 이건 길이는 칼럼하고 같거나 조금 더 길거나 가끔은 더 짧기도 하고 -, 이건 칼럼과는 목표도 다르고 작동방식도 다르다.

 

활로 비유해보자. 사회과학 책이나 칼럼이 머리를 겨냥한다면, 에세이는 가슴을 겨냥한다고나 할까? 읽는 사람과 공감하는 공간이 다르고, 울림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다르다.

 

물론 잘 만들어진 책이나 칼럼이나 에세이나, 더 상윗단계로 올라가면 차이가 있을 게 없을 듯하지만, 거기는 아직 내가 못 가본 단계이고.

 

어쨌든 이런 게 좋든 싫든, 텍스트라는 틀 내에서 움직이는 것들이고.

 

나는 꼽사리다의 경우는, 기본적으로는 텍스트의 연장이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연출이라는 게 들어간다. 물론 텍스트에도 설정 같은 게 들어가기는 하지만, 흔히 컨셉으로 들어간 연출이라는 요소가 들어간다.

 

물론 애초에 누군가 기도하거나 계획한 연출은 아니다. 그럴만한 스탭도 없고, 그렇게까지 새밀하게 준비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단순한 텍스트의 연속인 것만은 아닌, 의도되었든 의도하지 않았든, 연출이라는 요소가 더 들어간다.

 

일단 방송이 자리를 잡으면 출연진을 바꾸기가 어려운 게, 이미 생겨난 화학적 결합을 새롭게 대체하기가 쉽지가 않아서 그렇다. 물리적인 변화와 화학적 변화의 차이라고 하면 가장 적합할 것 같다. 나꼽살의 경우도, 지금에 와서는 편집 김용민부터, 출연진의 어떤 요소도 바꾸기가 쉽지가 않다.

 

이건 단순히 무료로 봉상할 사람이 더 없다거나, 그만큼 정부 눈치 안보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없다거나, 그것과는 좀 다른 얘기이다. 재밌든 재미없든, 이미 생겨난 화학적 결합은, 예상은 할 수 있지만, 기도되지는 않은 것이다.

 

여기까지가 이미 내가 해보았거나, 익숙해진 양식들이고

 

영화가 만들어지는 방식은, 책이나 칼럼과는 전혀 작동 방식이 다르다. 물론 그 출발점은 시나리오라는 텍스트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이건 우리가 익숙한 글과는 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텍스트이다.

 

우리가 언제 처음으로 책을 읽었을까? 그림 책까지 치면, 보통 4~5살 처음으로 책을 한 권을 읽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계에서는 시나리오를 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 을 읽어본 사람은, 아주 드물다. 영화와 관련한 전공을 했거나, 지망생들까지가 을 읽었을 거의 전부가 아닐까 싶다. 일반인들이 시나리오를 읽게 될 일은 아주 적을 것 같다.

 

요즘 내가 만나보게 된 새로운 질문은, 사회과학 혹은 칼럼과 같은 양식에서 시나리오로 양식이 바뀌면, 하고 싶은 얘기가 바뀌거나 아니면 아예 다른 종류의 얘기를 하게 되는가, 아니면 양식이라는 것은 그저 내용을 반영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인가, 그런 기본적인 질문이다.

 

제일 쉽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예산의 범위이다.

 

영화의 예산이 5억인 경우, 15억인 경우, 30억인 경우, 70억인 경우, 100억인 경우, 무대를 다루는 방식이나 셋트의 설정 그리고 얘기를 전개하는 공간이 다르게 된다. 동원되는 가장 큰 신의 형식도 차이.

 

진짜로 현장을 보여줄 것이냐, 아니면 그걸 중계하는 방식 혹은 누군가의 입을 빌어 나중에 얘기하도록 할 것인가?

 

큰 전쟁이 벌어지는 걸 그냥 보여줄 수도 있고, “, 전쟁 났다가 끝났대”, 이렇게 짧게 대사 처리를 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예산차이는 본질적이면서도, 어떻게 보면 하고자 하는 얘기의 크기에 비하면 아무 일도 아니다.

 

영화 <짝패>에서, 서울 본사의 얘기는 얘기로만 존재하지, 실제 형상화되어서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건 예산 문제라기 보다는, 그 영화에서 잡았던 프레임과 스케일의 문제이다. 돈과는 상관없다. 감독은 악 너머의 악이 존재한다는 은유만으로 서울이 존재하기를 바랬다.

 

1주일째 습작 겸 시나리오 작업을 해보는 중인데, 양식과 내용이라는 첫 번째 딜레마에 부딪혔다.

 

과연 같은 얘기를 하는 것인데, 다만 그 양식만이 바뀐 것일까, 아니면 양식이 바뀌었으면 당연히 하고 싶은 얘기도 바뀌어야 하는 것일까?

 

지금 내가 쓰는 시나리오가 대대적 보완을 거쳐 결국 촬영에 들어갈지, 아니면 수없이 구상되었다가 사라지는 그런 얘기 중의 하나일 뿐인지, 그건 아직은 잘 모른다.

 

어쨌든 이 새로운 양식 앞에서, 양식과 얘기라는 아주 고전적 테마가 잠시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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