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발을 하다

 

한미 FTA 3 15일 발효된다고 발표되었다. 이미 알고 있던 일이지만, 진짜로 마음이 멍했다.

 

주변 사람들과 좀 상의를 했는데, 그냥 니가 삭발해라

 

나라 경제가 넘어갈지도 모르는데, 경제학자 한 명쯤 삭발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 삭발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건 잘 안다. 그렇지만 내가 진짜 싫었던 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을 지고 가면서, 내 주변에 지나가는 모든 일상적 야만을 참고 견뎌야 한다는 것. 그 무기력감 보다는 차라리 삭발이라도 하는 게 나을 듯 싶었다.

 

그래도 우울과 비장미, 이건 영 내 감성 아니고

 

미장원에 가서 우울하지 않게, 그리고 가능하면 너무 흉하지 않게 하라는 게, 아내가 허락을 해주면서 내린 지침이었다. 삭발아내와 연애하던 시절, 이 여인이 정말로 멋지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바로 새만금 사건으로 아내가 방조제 올라가면서 삭발하던 때였다. 아내는 새만금 방조제 위에서 처음으로 물대포를 맞았다.

 

기왕에 하기로 한 거, 날자를 잡다보니, 한미 FTA 발효일 이전에 방송될 수 있도록 나꼽살 FTA 특별편 녹음을 하기로 했고, 그게 바로 오늘이다.

 

하여간 그리그리하여, 출판사의 도움을 받아서 나꼽살 녹음 스튜디오에서 제일 가까운 미용실에서 약식으로 삭발을 했다. 이게 뭔가 바꾸지 못한다는 걸 너무 잘 알지만, 정말로 무기력과의 싸움과도 같다. 큰 걸 할 수 없더라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아니다. 생각해보면, 사회의 중요한 계기에, 크든 작든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정성을 내놓으면서 살았던 것 같다.

 

김미화 선배, 선대인 등 나꼽살팀이 삭발하는 자리에 같이 해주었는데, 나름고마웠다. 다들 바쁜 사람들이다. 방송 시작한지 벌써 4달이 넘었는데, 아직 전부 같이 앉아서 소주라도 한 번 하는 자리는 물론이고, 회식 한 번도 제대로 못했다. 잠깐 같이 앉아서 차 한 잔 하는 것도 쉽지 않다.

 

FTA와 관련해서, 삭발 한 번 하고 땡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계속해서 사정이 바뀌고, 나도 정신이 없어서 아직 마감을 하지 못하고 있는, ‘모든 괴담의 총합으로 이름 붙인 책을 마감하는 게 우선 급하다. 사실 이번 주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끝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래저래상황이 계속 바뀌어서 아직 못 끝냈다는 건, 비겁한 변명이고팜플렛으로 낼 수 있는 시기를 놓쳐서, 결국은 얘기를 더 키워야 하는.

 

(밀린 책이 한 권 더 있다. 역시 거의 다 써놓고 마무리를 못하는 책 한 권 더. 이건 주제가 좀 다르다.)

 

진짜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후에 지난 번 시나리오를 가지고 소설로 바꾸는 작업. 하여간 나도 가진 재주와 채널을 전부 동원해서, 이 싸움을 이렇게 간단하게 끝내고 싶지는 않아서.

 

안 하던 짓까지 하면서도, 이 난리를 치는 것은, 이 싸움을 그냥 지고 끝내고 싶지는 않아서 그렇다.

 

언제부터인가, 거창하게 생각하는 걸 싫어하게 되었다. 감성에 맞지도 않고, 효과적이지도 않고, 지치기만 한다. 작더라도 의미 있는 일들을 조금씩 하고, 그걸 조금씩 모아서 어느 순간 돌아보니, 세상이 조금 좋아졌군그런 걸 더 선호하게 되었다.

 

내가 언제까지나 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영원히 전선을 치면서 방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 시대의 문제는 우리 시대에 해결하고그럴 수 있었으면 한다.

 

좀 밝고, 재밌게 생각하고, 그렇게 삭발도 좀 즐기자고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돌아오는 차 안에서 붉은 돼지의 엔딩 곡인 가끔은 옛 이야기를’, 카토 토끼꼬의 노래를 들으면서 갑자기 눈물이 픽.

 

이게 뭔 궁상인가 싶지만, 예전에 삭발했던 생각, 단식했던 생각, 단식하는 사람 말리던 생각 등등,

 

이 나이에 이게 뭔짓이래, 그런 생각이 잠시 들면서 눈물이 픽. (나야 워낙 눈물이 많아서, 내 눈물에 별 정도값은 없다.)

 

가끔은 지난 이야기를 할까

늘 찾아가던 옛 친구의 그 가게

마로니에 가로수를 창밖으로 내다보며

커피 한잔으로 하루를 보냈었지

보이지 않는 내일을 무턱대고 찾으면서

다들 희망을 품었었지.

흔들리던 시대의 뜨거운 바람에 휘말려

온몸으로 세월을 느꼈었지.

그랬었지..

 

집에 들어오니까, 야옹구, 야 이 개새, 무섭다고 푸르르 도망을 가버린다.

 

이럴 수가 있어, 매일 니 똥을 치워주는 건, 바로 나라고 나!

 

잠시 후 금방 익숙해졌는지, 낑낑거리며 따라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 아빠, 털갈이를 벌써 했나?

 

요즘은 야옹구도 봄맞이 털갈이를 시작했다.

 

삭발,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머리는 금방 나고, 날씨도 금방 봄이 되고, 사방에는 꽃이 피어날 거다. 진짜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민주화 되었다고 하는 게 언젠데, 그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또 이러고 있다는 게 약간 슬펐고, 이 문제가 그냥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게 더 서러웠다.

 

영화 매트릭스비유를 가끔 들고는 하는데, 자본주의 경제라는 게 진짜로 그렇다. 여기에 한국이라는 아주 독특한 사회를 집어넣으면, 진짜로 ‘2중 매트릭스’ – 등에 좋다는 2중 매트리스가 아니라 인 셈이다.

 

한명숙이 어떤 사람인지, 진짜로 또 하기 싫은 경험을 한 번 더 혹독하게 했다.

 

싸움은 이제 중반부를 슬슬 넘어가는 듯싶다. 아직은 꼬불쳐두고 있는 패들이 좀 남아있다.

 

(타이거 픽쳐스의 오대표가 삭발 직전, 멍 때리고 있는 사진을 한 장 찍어주었다. , 고맙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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