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꼽사리다, 막방을 준비하며

 

막방이라는 말을 쓰게 될 날이 올 줄 몰랐다. 어쨌든 모든 시작하는 것에는 끝이 있는 법, 우리도 이제는 마지막 방송을 준비해야 한다. 나꼽살팀은 7명이 한 팀이다. 출연진 외에, 뒤에서 도와주시는 황덕창 작가, 팀 매니저 역할을 해주신 배영란씨 그리고 녹음 엔지니어 선생님, 이렇게 세 분의 스탭이 더 있다.

 

한 회분 제작에 보통 4주 정도가 걸린다. 처음 주제 정한 다음에 게스트 섭외 여부와 질문지 작성 등, 평균 4주 정도를 쓴다. 보통 이 정도 내용이면, 공중파 기준으로 3팀 혹은 4팀 정도가 붙을텐데, 그냥 우리는 몸빵으로 다 때우면서 왔다. 이미 지난 여름을 지나면서 제작진의 피로도가 극으로 달했고, 요즘은 거의 한계 상황이다. 나도 도저히 이렇게는 더 못 버티겠다고, 출산으로 제호를 바뀌면서 방송 기획을 선대인에게 넘겼다. 그러나 우리가 예상치 못하게 안철수 캠프에 합류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방송 기획과 섭외 등을 다시 내가 맡게 되었다.

 

일정을 살펴보니, 대선 이후의 화요일은 크리스마스이고, 그 때 녹음하면 공개가 내년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래서 결국 대선 전주 방송을 막방으로 하기로 했고, 이게 12 11일이다.

 

지난 여름에 아주 더울 때, 선대인이 처음 대안 경제방송 만들어보자고 했던 순간이 기억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멀리 왔다. 김용민 총선 출마한 이후, 선대인 안캠 합류 이후, 누가 봐도 위기의 순간이라고 할 때가 몇 번 있기는 했지만, 대체로 우리는 방송 기간 내내 가족처럼 지냈다. 매 방송마다 이런 저런 문제들이 터져 나왔지만, 어쨌든 임기 웅변과 몸빵으로 넘어간 것이고.

 

나꼽살 지방 버전도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이 때쯤 아기가 태어났다. 아기를 놓고 지방으로 돌아다니면서 뭔가 기획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꼽살 대구편, 나꼽살 부산편, 이 정도는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봤었는데, 순전히 내가 게을러서.

 

미화 누님과 일년간 방송을 같이 했던 것, 선대인과 매주 만난 것, 김용민이 얼마나 착하고 실력있는 인간인지 알게 된 것, 이 기억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정말로 최고의 스탭들과 같이 일할 수 있었던 것이, 정말로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우리 일정상, 대선 앞이라고 해서 별도의 호외 방송을 만들기는 어려울 것 같고, 11일 방송에서 투표 참여 독려와 우리끼리의 조촐한 방송 정리,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다.

 

경제 전문방송으로, 정말 이 정도 성공시킬 수 있을지, 우리도 잘 몰랐었다. 회당 300만명에서 400만명이 듣는데, 그 정도로까지 갈 수 있을지는 상상도 못했다. 어쨌든 매주, 펑크내지 않고 간다, 그런 생각밖에 없었다. 선대인이나 나나, 범생이들이라서, 숙제 내라면 하여간 제때 제때 내는 거, 그런 건 잘 한다. 그거 말고는, 사실 별로 잘 하는 건 없다.

 

개인적으로는, 이 나꼽살 막방이 현업 경제학자로서는 공식적으로 은퇴하는 순간으로 생각하고 있다. 신문에 주기적으로 쓰는 칼럼은 벌써 연초에 정리했다. 나머지 일들도 조금씩 덜어내는 중이었고, 이제 남은 일은 거의 없다. 그 동안 관여하던 단체에서 하던 일들도 정리했고, 이제 남은 건 경제 대장정 시리즈의 남은 책 몇 권 정도. 쉬엄쉬엄, 가끔 밀린 경제학 책 내는 정도, 그렇게 경제학자로서의 나의 사회적 역할을 정리하려고 한다.

 

한미 FTA나 새만금 같은 것을 막아내지 못한 것이, 결국 마음에 남는다. 우리 시대에, 내가 주도해서 했던 큰 싸움에서, 나는 대부분 졌다. 그게 나의 한계이고, 나의 실력은 거기까지이다. 이기고 물러설 수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런 게 삶이다. 벌써 전에 내려놓고 싶었지만, 어쨌든 나꼽살 막방까지는 한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버틴 것이다.

 

나의 싸움은 졌지만, 경제학자로서는 과도한 영광을 누렸었다. 나에게는 아무 영광이 없지만, 중요한 싸움을 이기는 편을 정말로 소망했었다. 그러나 나의 소망은, 이제는 가슴 속에만 남게 될 것 같다. 세상을 몇 사람의 힘만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은 들기에, 마음만은 편하다.

 

막방 때 어떤 식으로 정리할지, 12월 방송은 어떻게 진행할지, 이리저리 생각해보는 중이다. 이젠, 정말로 막방 준비.

 

이 방송에서 해보고 싶었는데 못한 것 중 하나가 경제 콩트였다. 내부에서 몇 번 얘기는 나왔지만, 너무 정신 없어서 제대로 챙기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짧게라도 시도해 볼 수 있었으면, 사람들에게 경제를 좀 더 편안하게 전달할 수 있는 포맷 실험이 되었을텐데, 그건 못했다.

 

본격적으로 경제학 공부를 시작한 것은 학부 2학년 때였고, 정말로 경제학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은 학부 3학년 때였다. 그 때 대학원에 가야겠다고 처음 생각했다. 20년이 넘도록, 경제학만 하고, 경제학만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경제학자로서의 마지막 순간에, 사람들에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전부 내놓는다고 생각하는 방송을 만들 수 있어서, 행복했다. 이 이상의 영광은 없을 것이다.

 

몇 달 전부터, 나꼽살팀은 완전 방전에 기진맥진, ‘완주라는 단어가 멤버들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성과나 평가, 그런 건 모르겠고, 일단은 완주하는 게 유일한 목적이었다. 우리가 대선 국면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기여가, 완주라는 단어에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완주가 눈 앞에 보인다. 그러니 또한 기쁘다.

 

이번 대선, 시대의 전환점이다. 꼭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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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의 이름은 생협, 몸은 고양이별에, 마음은 내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다음 에세이집 키워드는, 돌봄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가 몇 권의 책을 냈는지 까먹게 되었다. 좋게 얘기하면 초월하게 된 거고, 나쁘게 얘기하면 교만해진 거다. 그리고 재수 없게 얘기하면, 앞으로 하고 싶은 얘기에 더 집중하느라고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지 않는 거고. 그 어느 편이든, 진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진짜로 잘 모르겠다.

 

<1인분 인생>은 여러 가지로 나에게 의미 있는 책이다. 문학이라는 분류로는 처음 낸 책이기도 하지만, 늘 고통스럽게 생각하던 책 만드는 과정이 즐거웠던 책이기도 하고. 이 책에서 출판사에서 번 돈이 봉도사가 감옥에 가자마자 낸 포토 에세이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간직하는 보람이기도 하고 (그 책, 참 우라지게도 안 팔렸다...) 무엇보다, 이 책은 만드는 과정이 즐거웠다. 이선지라는, 크고 작은 결정을 내가 내릴 때마다 늘 상의하는 동료가 이 과정에서 생겨난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그리고 대학 시절, 카프카를 같이 읽던 여성 동지가 이 책의 기획자로, 이거 좀 내자고 해서, 어린 시절의 친구와 같이 작업할 수 있었던 것도 즐거운 일이었고.

 

어쨌든 <1인분 인생>은 대략적으로 2년 정도 작업을 한 건데, 마흔을 모티브로 글을 조금씩 쓰기 시작한 게, 마흔 넷이 되어서야 출간하게 된. 하여간 급하게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냥 쥐고 있다가 오래 된 친구의 권유로 내게 된 책이었다.

 

<1인분 인생> 다음 책은, 여전히 그 시절의 에디터인 이선지씨와 같이 고민을 한다. 어지간해서는 난 에디터를 바꾸지 않고, 출판사도 잘 바꾸지 않는다. 태생이 게을러서 그렇다. 그냥 하던 사람하고 계속 작업하는 게 편하다. 즐거움이든 아픔이든, 같이 나누는 그런 오래된 관계를 더 좋아한다. 문제가 있다면, 나에게 문제가 있을 거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게, 속 편하다.

 

어쨌든 <1인분 인생>에서의 키워드는 40대였는데, 나는 그 주제로 글을 쓰는 게, 편안하고 즐거웠다. 그 이후, 후속 작업에 대한 고민을 계속했었는데, 결정된 것은 다음 번 작업은 포토 에세이 형식으로 한다는 거 그리고 더 편안한 얘기를 해보겠다는 정도였다.

 

맨 처음 잡았던 주제는 명박 시대였다. 누구에게나, 어떤 이유로나, 명박 시대는 치열한 고민이다. 내가 알기로는, 보수들에게도 이 시대는 고민스러웠던 걸로 알고 있다. 그들도 사람이다. 저 꼬라지를 봐라, 겉으로는 쉴드 치는 사람들도, 편안하게 우리끼리 얘기할 수 있는 자리에서는 고통을 토로한다.

 

명박 시대 들어오자마자, 대운하는 아니다, 니가 좀 막아봐라, 그렇게 말한 사람들이 꼭 진보라고 불리는 사람들인 것만은 아니었다. 평소에는 보수 중의 보수라고 하는 사람들, 명박에게 자랑스럽게 투표한 사람들도, 저건 좀 아니다 싶다, 니가 어떻게든 막아봐라, 그런 얘기를 많이 했다. 새만금 개발에 대해서도, 이건 좀 아니라고 나를 격려해준 사람들이 꼭 평소에 좌파나 생태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만은 아니다. 누가 딱 봐도 보수 중의 보수인 그런 사람들도, 새만금 얘기는 니 얘기가 맞다, 절대 굴복하지 마라, 내가 도와줄 수는 없어도

 

나중에 알게 된 일이다. 내가 칼럼으로 처음 데뷔한 것은 서울신문을 통해서였는데, 그 때 나를 추천해준 사람이 조선일보 기자였다는 사실을세상 참 복잡하고 교묘하게 얽혀있다. 삶이란, 원래 그런 건가 보다.

 

어쨌든 <1인분 인생> 다음 책은 포토 에세이로 하기로 마음을 먹은 데에는 좀 사연이 있다. 경제 대장정 시리즈의 8, 핵발전에 관한 문제가 지금 권수로 비어 있다. 그리고 <문화로 먹고 살기>, 9권이 먼저 나갔다. 8권을 포토 에세이로 할 생각이 있는데, 그 중간에 넘어가는 단계로 좀 더 쉬운 주제로 포토 에세이를 한 번그런 생각이었다.

 

문제는, 이걸 문제라고 표현하는 것은 좀 그렇기는 하지만, 아기가 태어나게 되었기에해외든, 국내든, 여행을 늘 다니던 삶에서, 아이를 준비하고 태어나는 것을 지켜보면서, 가기는 어딜 가집과 영화사, 그리고 가끔 국회, 그렇게만 움직이는 삶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애초의 생각과는 달리, 고양이들과 꽃 그리고 아주 약간의 일상적인 사진 외에는 찍어놓은 게 없다.

 

하여간 이건 제약 조건이고

 

명박 시대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해보고 싶었는데, 아내의 임신 기간을 옆에서 지켜보며, 그리고 급박한 출산과 이제 100일이 되는 아기와의 삶, 그 속에서 차마 명박 시대를 카메라로 표현해보겠다고 뛰어다닐만한 용기도 또 그럴 의욕도 나에게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무엇인가를 증오하며 그 속에서 창작욕을 불태운다는 게, 새로운 생명의 탄생 앞에서는 정말로 어색해 보였다. 그래서 그 길은 포기했다.

 

올 봄에 태어난 두 마리 고양이들에게, 각각 강북과 생협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은, 내가 하고 싶은 또 다른 키워드를 그 고양이들 속에서 발견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동안 두 번째 에세이집의 가제목은 강북과 생협이었다. 생명을 보는 경이로움과 안타까움, 그게 내가 생각한 강북이라는 가치와 생협이라는 가치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녀석들에게, 나는 당시 내 머리를 차지하고 있던 가장 중요한 가치들을 부여했었다.

 

이번 첫 추위, 그날 영도까지 가는 추위도 추위였지만, 비바람이 몰아치던 그 밤에, 마당 고양이들이 많이 죽었다. 그리고 진짜로 내가 애지중지하던, 생협이 그 밤에 죽었다.

 

고양이들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앞뜰, 뒷뜰, 여기저기 구석진 곳을 찾아서 고양이 사체를 치우는 게 내가 하는 일이다. 그래도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몇 달간 썩어가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고양이별로 가는 마지막 길이라도, 내 손으로 치워주고 싶었다.

 

생협의 사체는 며칠 후, 마루 바로 바깥에 있는, 녀석이 늘 숨어있기를 좋아하는 회양목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녀석은 늘 내가 TV를 보던 마루 바로 바깥에서 정말로 자는 듯이 쓰러져 누워있었다. 고양이 사체를 치우는 것에는 이제는 좀 익숙해질 만하기도 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다. 집게로는 집을 수 없는 회양목 깊은 곳에 있어서, 결국 두 손으로 안아내면서, 정말 그렇게 눈물이 많이 났다. 너무너무 예쁜 녀석이었다. 한 번도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 못했고, 마음껏 안아주지도 못했다. 그렇게 한 번쯤 만져보고 싶었던 녀석을, 죽은 다음에야 안타깝게 만져볼 수 있었다. 아, 삶이란! 왜 우리는 마음껏 사랑하지 못했던가!

 

생전의 그 털 그대로, 그렇게 곱게 누워있는 녀석을 안아 들고, 구청 직원을 기다리면서, 집에 있는 제일 좋은 종이 봉투를 몇 개 겹쳐서 그 안에 넣어주었다.

 

올 봄에 녀석과 한 배에서 같이 태어났다가 한 달도 채우지 못하고 누운 녀석의 형제들도 내 손으로 받아주었었다. 그 때는 그렇게 눈물이 많이 나지는 않았었다. 솔직히, 그냥 안되었다, 넋이라도 좋은 곳으로 가면 좋겠다, 그렇게 무덤덤했다.

 

그러나 내 책의 모티브로 생각했던 생협, 그러니 내가 얼마나 더 정을 주었겠는가. 잠든 듯이 누워있는 녀석의 뻣뻣한 몸을 들어내면서, 문득 털이 참 곱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을 내가 그렇게 모시는 동안에, 정말로 녀석을 애지중지 돌보던 엄마 고양이가 담벼락 위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어머니 생각이 났다. 동생들이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어머니는 전부 다섯 명을 낳으셨다. 내 바로 밑에, 아주 어려서 죽은 여동생이 있다. 워낙 내 어린 시절이라, 기억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 밑에 남동생이 하나 더 있다. 걔는 기억에 난다. 어른이 되었을 때에는 삼형제로만 알고 있지만, 내가 알기로는 어머님은 다섯 명을 낳으셨다.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그 생각이 났다.

 

이래저래 생각해보면, 지난 4년 동안 내가 돌본 고양이들이 열 마리가 넘는다. 맨 처음 우리 집 마당에 자리를 잡았던 삼색 모녀 고양이, 거기에서부터 아직까지 마냥 자기 집이라고 우기면서 오는, 우리 집 아기 고양이들의 아빠가 된 검둥이, 그런 녀석들과 내가 지낸 지난 4년간의 삶, 그것을 설명하는 키워드로 돌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녀석들을 돌본 건지, 녀석들이 나를 돌본 건지, 그걸 잘 모르겠다.

 

사람들과의 티격태격하는 관계, 언제나 내가 질게 뻔한 새만금이나 FTA 같은 싸움 속에서, 내가 즐거움을 잃지 않고, “, 빨리 집에 가봐야 합니다, 얘들 굶고 있을 거라서”, 이렇게 내가 아프면 안되고, 쓰러지면 안 된다고 격려하던 건 오히려 내가 돌보는 고양이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가 누구를 돌보는 것이냐, 이게 요즘 내가 하는 고민의 가장 큰 주제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익관계인지, 협력관계인지, 잘 따져보면 말하기 나름이다. 이건 좀 복잡하다. 그러나 고양이를 돌보면서, 이게 이익관계가 아닌 건, 너무너무 뻔하지 않은가? 걸핏하면 집 나가고, 툭하면 죽고, 그런 어설픈 녀석들과 지낸 4, 돈과 이익으로 삶이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진짜로 내가 배운 것 같다.

 

내가 생협이라고 불렀던 고양이, 너무너무 예뻤었다. 녀석의 사체를 커다란 종이봉투에 담으면서

 

몸은 고양이별로 가고, 마음은 내 마음에 담고.

 

그 생각을 하면서, 정말로 많이 울었다.

 

마지막 길을 보내는 건, 귀찮은 일이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게 싫다고 돌보지 않는 것, 그건 좀 아닌 듯 싶다. 우리의 삶은, 좋든 싫든, 만남과 이별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 그게 어른이 되는 길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예전에는 대가족이었고, 형제들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기본적인 사회화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집안 내에서 형제들끼리, 어느 정도는 한다. 그게 전통적 삶이다.

 

그러나 지금은, 혼자 많아야 두 명이 큰다. 집안에서 형제, 자매들끼리, 그렇게 하는 사회화를 우리는 생략하고 넘어간다. 돌봄? 부모가 날 돌보는 거, 그게 당연해지는 사회이다. 학교? 지금 학교에서 그런 걸 가르쳐주지 않는 건 뻔하게 다 알고 있는 거 아닌가? 강남과 목동 엄마들이 신봉하는 사교육, 거기에는 예쁨받고 돌봄받는 귀공자, 귀공녀들 양산처 아닌가?

 

우리의 교육에서는, 좋든 싫든, 죽여라, 그래야 산다, 대학입시를 향해서 단 하나만을 가르친다. 대학교육? 뻔하지 않는가. 지금 우리는 태어나서 취직할 때까지, 남을 죽이라고만 가르친다. 그리고 그게 장땡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게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는 것은, 상식을 가진 사람들은 다 알 수 있는 거 아닌가?

 

돌봄은 올드한 개념이다. 영어로 캐어’, 그야말로 니미 뿡이다.

 

작년, 올해, 사회적 트렌드의 키워드는 힐링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건 명박 시대가 만든,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사기성 농후한 개념이다. 사람을 수동태로 만들고, 누군가 날 좀 치유해줘, 그러나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뭔가 좀 나아진 것 같지만, 돌아서면 허무하거나 사기 당한 생각이 드는 개념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멘토 열풍에서 힐링 열풍까지, 명박 시대를 지내느라고 우리가 너무 힘들어서, 잠시 그런 데 기대고 있었던 것에 불과한 것 아닌가?

 

곰곰 생각해보면, 내가 생협을 돌보고 있었던 것인지, 생협이 나를 돌보고 있었던 것인지, 난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생협의 사체를 발견하고, 그걸 정리하면서, 돌본다는 것은 누가 누구를 돌보고, 그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또한 삶이다. 생협은 6월에 태어나 11월에 눈을 감을 때까지, 다섯 달 동안 짧은 삶을 살았다. 그리고 나는 그 다섯 달 동안, 그의 삶 전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걸로, 하나의 우주가 완성된 것이다. 영생도 아니고, 건강도 아니고, 번영도 아니다. 삶은, 그냥 삶이다.

 

그런 생각을 곰곰이 하면서, 다음 에세이집의 키워드는 돌봄으로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무슨 돌봄 전문가인 것도 아니고, 스웨덴식의 돌봄 노동과 성의 고착화 같은 인류학 논문을 쓸 만큼 준비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각 잡고, 이게 돌봄이고, 이건 그릇된 돌봄이고, 그런 얘기를 할 마음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지난 4년 동안, 열 마리 넘는 길냥이들에게 매일 같이 밥을 주게 된 과정, 그 속에서 생겨난 인간적인 즐거움과 갈등 혹은 가끔 있는 아픔, 그런 얘기들을 이젠 좀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마당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눈 앞에서 죽었을 때, 마당에 있던 개나리 나무 아래에 묻어주었던 게 생각이 난다.

 

문득 생각해보니, 대한민국이라고 불리는 나라가 더 이상 교육과정에서 가르치지 않는 게, 우리는 뭔가를 돌보고 또 뭔가가 자신을 돌보는 그런 관계 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 어느 순간부터인가, 우리는 죽이라고만 가르친다. 시험을 잘 봐서 남을 죽이고, 입사 면접에 잘 대답해서 남을 죽이고, 그렇게 남을 죽여야만 니가 사는 것이다, 그렇게만 가르친다.

 

이게 나라냐? , 양아치들의 공화국 아닌가?

 

수경스님이 새만금 갯벌에서 삼보일배를 떠나면서 유마경 얘기하신 게, 오랫동안 마음을 적셨다.

 

네가 아프니, 내가 아프다

 

우리는 유마힐이 했던 그 얘기 속에서, 앞의 문장 반은 빼어먹고, ‘내가 아프다만 줄구장창 반복하고 있던 것 아닌가? 네가 아픈 건 안 보이고, 내가 아프다고만 말하고 있는 이 기이한 상황

 

내가 늘 있던 마루 앞에서 얼어 죽은 생협의 사체 앞에서, “참 추웠겠구나, 미안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사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20대에 나를 투사라고 생각하면서 삶을 시작했다. 이제는 그만 싸워야지, 하면서도 평생을 싸우면서 살았다.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싸우는 게, 결국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고, 뭇 생명을 위한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았다. 과연 그럴까? 겨우 다섯 달, 나와 같이 지냈던, 아직 어른이 채 되지 못한 고양이의 사체를 손에 안고, 참 생각 많이 했다.

 

싸우는 게 다가 아니고, 힐링이 다가 아니다. 우리 편 만만세, 이건 더더욱 아니다. 삶은 그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명박 씹새, 그것 또한 과정의 일부일 뿐, 깨달음은 아니다.

 

우리는 너무 날이 선 채로 살아간다. 그리고 정말로 날을 세울 것을 잊은 채, 증오 위에 삶을 세우려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 고양이를 열심히 돌본다, 그것 역시 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한다, 그것도 소박한 변명일지도 모른다.

 

무엇인가를 돌본다는 것, 그것은 소유하지 않으려는 사랑이 아닌가, 그 정도가 내가 내린 임시 결론이다. 내가 길거리에 떠도는 고양이 몇 마리에게 밥을 준다고 해서, 그들이 내 소유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속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런 질문들을 다시 해보게 된다.

 

과연 우리는 충분히 사랑하고 있는가? 어차피 우리는, 영원히 사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은, 생협이나 우리나, 다를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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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삼촌, 굽은 나무가 선산지킨다고 하더니, 정말로 강하다...)

 

하룻밤 사이에 고양이 다섯 마리가 한꺼번에 고양이별로 떠나갔다.

 

아직 11월 중순밖에 안되었는데, 때이른 한파가 찾아왔다. 이번에 태어난 아기들, 아직 이름도 못 붙여주었는데, 한꺼번에 떠났다. 봄에 태어난 네 마리 중, 두 마리가 살아남았는데, 목둘레를 감은 흰털로 인기를 독차지하던 생협도 이번 추위를 못 이겼다.

 

영화사 고양이 둘은, 아마도 인근 아파트촌에서 도둑고양이 퇴치한다고 놓은 쥐약을 먹은 것 같다. 천만이는 그날 바로 고양이별로 갔다. 대박이는 며칠을 죽어라고 버티더니, 병원에 입원하면서 사투하다가 천만다행으로 살아 돌아왔다.

 

고양이들과의 삶은 늘 이렇게 이별을 눈 앞에 둔 안타까운 사랑과 같다.

 

 

(한꺼번에 자식을 넷이나 잃은 엄마 고양이, 표정이 애잔하다.)

 

몇 달 동안 정들면서 살아왔던 생협은 늘 그 녀석이 놀던 화단 한 구석에서 발견되었다. 혹시라도 영역 다툼 때문에 밀려난 거 아닌가, 그렇게 마음을 돌리려고 했는데, 결국 추위에 얼어죽은 시신으로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일인 듯 싶지만, 늘 자신들이 먹고 놀던 그 어디에선가 고양이들의 사체를 발견하고 처리할 때마다, 경건해진다. 태어난지 한 달도 안 되는 아기 고양이들은, 정말로 자는 듯이 누워 있었다.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그의 마지막 가는 길까지 같이 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해마다 몇 마리의 고양이를 새로 만나고, 또 몇 마리의 고양이를 이렇게 내 손으로 떠나 보낸다.  

 

펫 로스라는 말이 있다. 반려동물들과 헤어짐은 그 자체로 심한 정신적 충격이기에 그런 말이 생긴 것이다. 물론 매번 떠나 보낼 때마다 가슴이 아프지만, 그냥 삶이라는 것은 그런 것 아니냐나는 그렇게 좀 신경을 무디게 하려고 한다. 물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정말로 마음이 무뎌지지는 않는다.

 

처음에 죽은 고양이 사체를 만질 때에는, 참 당혹스러웠다. 요즘은, 그래도 그 마지막 모습이라도 눈 속에 담아두려고 한다.

 

몸은 고양이별로 떠나고, 마음은 내 마음 속에 담아두려고 한다. 내 마음은 넓다. 내 마음 속에서라도 그 혼이 배불리 먹고, 신나게 뛰어놀 수 있으면 한다.

 

졸지에 자식 넷을 추위에 떠나 보낸 엄마 고양이의 모습이 애잔하다. 얼마나 끔찍하게 애지중지하던 녀석들인데, 그 마음이야 오죽하겠나.

 

간만에 살아남은 녀석들이 모여서, 어쨌든 사는 놈들은 또 살아야 하니까, 겨울을 준비하면서 몸에 살을 붙이기 시작한다.

 

지금 있는 아이들의 아빠인 검둥이가 간만에 집에 와서 개집 옆에 누워있는 걸 봤다. 녀석도 자식들이 고양이별로 떠난 걸 아나 보다. 어지간해서는 잘 보이지 않더니, 집에 왔다. 검둥이의 애인이면서, 바보 삼촌이 연애를 걸려고 했던 걸로 알고 있는 삼색 고양이 한 마리도 간만에 집에 와서 밥을 먹고 갔다. 살아남은 녀석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고양이별이여 영원하라!

 

그런 얘기가 하고 싶어졌다.

 

 

 

 

 

(내가 찍은 생협의 마지막 사진... 정말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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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녹색당>에서 일하는 김현입니다.

그 사이 여러 일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10월 13일, 충남 홍성에서 <녹색당>이 또 한 번 창당대회를 가졌습니다.

총선에서 2% 이상을 획득하지 못하면 등록이 취소된다는 현행 정당법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창당대회를 개최하게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당원들을 더 만나고 지역과 소통했던 과정은 좋았던 것 같습니다.

언론을 통해서 아시겠지만, 지난 5월에 <녹색당>은 2% 이만 등록취소 조항에 대해 행정소송을 제기한 바 있고,

지난 달 10월26일, 서울행정법원은 이 조항이 위헌이라고 판단하여 위헌소송을 제청하였습니다.

두 번씩이나 창당대회를 치룬 것이 좀 억울하긴 하지만,

무척 환영할 만한 결정이었습니다. (관련 내용)

이제 헌법재판소의 판단이 남았습니다.

2% 미만 등록취소(정당법 44조)는 서울행정법원도 위헌이라고 판단한 만큼, 헌재도 위헌 판결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더 관심을 갖는 것은 정당법41조, 그러니까, 등록 취소된 정당의 동일 당명 사용 금지의 위헌여부입니다.

<녹색당>은 헌법소원을 제출한 상태인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듯합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녹색당>의 명칭은 무엇일까요?

지난 재창당대회 때 주요 안건으로 상정되었는데, 당원들은 <녹색당+>를 선택했습니다.

‘녹색당’이라는 명칭을 살리면서 여러 의미가 있는 ‘+’라는 부호를 하나 덧붙인 것입니다.

사전에 선관위에 공개적인 질문을 통해 기호나 부호 등을 사용해도 무방하다는 답변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재창당 즈음, 선관위는 <녹색당+>는 <녹색당>과 동일명칭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의견을 보내왔습니다.

정당 등록 접수가 각하될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강하게 항의했지만,

지난 6개월간 재창당을 위해 준비한 것을 생각하면, 일단 정당등록 후에 싸워야겠다는 판단을 했고,

결국 한 발 물러서서 <녹색당더하기>라는 이름으로 등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녹색당>이라고 읽습니다.^^

선관위 직원들도 동일당명 사용 금지 조항은 위헌의 소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어서

헌재의 전향적인 판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녹색당>이라는 명칭을 되찾을 수 있지요. 헌재의 빠른 판결을 기대합니다.

재창당과 당명 이야기로 조금 길어졌는데,

제가 앞으로 2년 동안 <녹색당>의 사무처장을 맡게 된 것도 변화 중에 하나입니다.

그 동안 사무처장 직을 맡았던 하승수 전 처장이 공동운영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 자리를 제가 이어받았습니다.

사무처장으로서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이고,

당원들과 당내 주요한 분들이 저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신다고 약속하셔서 부담을 덜기도 했습니다만,

그래도 이렇게 큰 조직에서 중책을 맡는다는 무게감은 저를 짓누르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동안 녹색정치를 희망했던 분들의 기대감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준비해나가겠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못 하는 일이 있으면 질책을, 잘 하는 일이 있으면 따뜻한 격려를 보내주시면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드린 편지가 너무 재미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조금 더 재밌는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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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건 새만금 특별법 법안 원문

1902437_의사국 의안과_의안원문_새만금 의원.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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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필강동원강석호강창일고희선권성동권은희길정우김관영김기준김기현김도읍김동완김상민김상훈김선동김성곤김성주김세연김승남김영록김영우김영주김영환김용익김우남김윤덕김장실김재경김재원김종훈김춘진김태원김태흠김한표김 현김현숙김현미김회선김희정나성린남인순노영민노웅래노철래류지영문재인문병호민현주민홍철박근혜박남춘박대출박민수박민식박상은박성호박수현박영선박완주박인숙박지원박홍근배기운배재정변재일부좌현서기호서병수서영교손인춘송광호송영근신경림신경민신계륜신동우신성범신의진신장용신학용심윤조심학봉안규백안홍준안효대양승조여상규염동열오제세우윤근원유철유기준유기홍유성엽유승민유승희유인태윤관석윤영석윤후덕이강후이군현이명수이목희이병석이상민이상직이언주이용섭이원욱이윤석이이재이인제이재영李宰榮이종걸이종훈이진복이찬열이채익이철우이춘석이학영이해찬이헌승이학재인재근장병완장윤석전병헌전순옥전정희전하진전해철정갑윤정두언정몽준정문헌정병국정성호정세균정수성정우택정의화정진후정희수조경태조현룡주승용주호영진성준진 영최규성최동익최민희최봉홍최원식최재성최재천추미애한기호한선교한정애함진규홍문종홍일표홍지만황영철황우여황주홍황진하 의원(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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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새만금 해수유통

 

우리나라의 생태운동의 큰 출발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반핵, 하나는 새만금. , 크게 보면 그렇다.

 

새만금 개발파는 언제나 멋진 그림을 그렸고, 조감도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참, 멋진 그림들을 그렸다.

 

그러나 우리는 늘 꼬질꼬질했다. 언론은 늘 우리를 세상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 근본주의자, 고리타분한 인간, 그렇게 몰아붙였다. , 꼬질꼬질한 건 맞다. 우린 늘 돈이 없었고, 우리를 치장할 줄도 몰랐고, 그럴 시간도 없었다.

 

아내와 만난 건, 새만금 때의 일이다. 정확히 말하면, 새만금 방조제에 아내가 올라가던 때의 일이다.

 

아내가 삭발을 했다. 정말 예뻤다. 나는 그녀가 그 정도로 살벌하게 에쁜 줄 몰랐다. 그러나 삭발을 하고 나니, 정말로 눈이 부시도록 예뻤다. 그래서 예쁘다고 그랬다. 아내는 내 말을 곡해했다. 삭발한 순간도 예쁘다고 해주는 남자물론 난 그렇게 화사하고 멋진 남자는 아니다.

 

어쨌든 아내는 그렇게 삭발을 하고 새만금 방조제로 올라갔고, 그 위에서 물대포를 맞았다. 내가 아내에게 선물로 했던 핸펀은 바다물 속에 풍덩했고, 가방도 바다 속에 풍덩.  

 

, 다친 데 없으면 되었다. 그러나 바다 위 방조제에서 활동가들에게 물대포를 쏜 것은 살인행위이다, 그걸 내가 잊지는 않는다. 아무리 삭발한 활동가라도 그냥 물에 빠지라고 물대포를 쏜 행정 행위에 대해서 잊을 수가 있겠나.

 

나는 그 삭발한 활동가와 결혼했다. 그리고 우리는 9년을 살았다. 아이가 안 태어나서 참 맘 고생 많이 했는데, 올 여름에는 사내 아이가 태어났다.

 

그 중간에 새만금과 관련된 사연도 많다.

 

어쨌든 사람들은 생태운동이라고 하면, 꼬질꼬질하고 꾀죄죄하다는 이미지를 덮어 씌우고, 세상 물정 모르는 옛날 사람처럼 몰아붙인다. 반대를 위한 반대주의자, 그렇게 해놓은 이미지 속에서도 어쨌든 우리는 결혼을 했고, 우여곡절 속에서도 아이를 낳아서 키우고, 나름대로는 재밌게 산다.

 

세련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나름대로는 아름답게는 산다.

 

오늘 블로그 이름을 새만금 해수유통으로 바꿨다.

 

이 문제에는 해법이 있다. 그리고 우리도 많이 양보했다.

 

마치 해법이 없는 것처럼 우리를 몰아붙이는 사람들과 지난 10년 내내 싸웠다.

 

오늘부터 내 이름은 새만금 해수유통이다. 그 때 아내가 20대였다. 20대 여인이 삭발하고 새만금 방조제에 올라가던 순간, 나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늘 그녀를 사랑했다.

 

어정쩡하게 새만금 개발하자고 다시 나서는 사람들에게, 아무 일도 없는 듯, 가만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적들의 수괴, 새누리당은 남경필이고, 민주당은 박지원이다.

 

니들이 죽나, 우리들이 죽나, 지금부터 전쟁이다.

 

4대강 돈은 다 빨아먹었고, 4대강 후속 사업은 국회 통과가 어려워보이니까, 이번에 눈을 돌린 게 새만금이다.

 

새만금 찬성하면서 토건 문제 있다고 하는 거, 그건 말이 안된다.

 

내 블로그 이름은 오늘부터 새만금 해수유통이다. 지금부터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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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나의 지도자는 아니다

 

나는 정책만 가지고 판단한다. 오랫동안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만 그 입장을 밝히는 것은, 내 삶에서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다. 현역 경제학자로는, 이번 대선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활동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어쩌면 공개적으로 내가 판단하는 마지막 순간일 것 같다.

 

아주 솔직하게, 문재인이든 안철수든, 장점만큼 단점도 명확해서, 참 선택하기 어렵다. 그냥, 난형난제라고 하는 게 정말로 솔직한 내 심경이다. 박근혜라는 존재의 절체절명적 상황이 아니었다면, 누가 되거나 말거나,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모범생이라, 주어진 질문지에 답 없음이라고 쓰고 수험장을 나설 만큼 배짱 있는 사람은 아니다. 일단은 아는 만큼 쓰고, 또 그리고도 더 쓰고, 선처를 기다리는그렇게 살았다. 난 늘 그렇게 비겁하게, 답안지를 제출하는 사람이다.

 

fta에 대해서는, 두 사람 다 마찬가지다. 50 100, 어차피 이걸로 기준선이 나오지는 않는다. 사소한 차이가 있지만, 진짜로 대동소이.

 

결정적으로 내가 안철수가 나의 지도자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은, 금융 공약을 보면서 갖게된 생각이다.

 

몇 가지 장식적인 얘기들이 있지만, 기본적인 것은 금융위원회를 해체하는 것에 관한 일이다.

 

내 생각에는 해체하거나 말거나, 본질적인 것은 그런 건 아니다. 만약 금융 민주화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과는 다른 층위의 고민이 있어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간단히 말해서, 금융위를 없앴다가 다시 만들었다가, 그리고 다시 없앴다가, 다시 만들었다가이건 영원히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과 같은, 아무 변화도 안 생길 허위 프레임에 관한 일이다.

 

일단 기계적으로 지금 안철수안이라면

 

제일 신나는 건 모피아들이다.

 

박정희 때에도 EPB와 재무부로 나뉘어서 그 사이에 견제가 있었고, 위계상으로는 EPB가 상위 기구였다. 이제는 너무 유명해진 모피아라는 단어를 만든 것들도 EPB 사람이고, 재무부 견제하는 의미로 쓰인 용어이다.

 

지금 안철수안대로 가면, 예전의 재무부를 다시 만들고, 거기에 경제기획원의 총괄기능도 갖고, 보너스로 여기에 더해서 예산 기능까지 다 갖는, 초대형 블록버스터급 모피아 만세, 그런 게 생긴다. 박정희 유신 경제보다 더 이상한 경제 통치 체계, 금융 관리체계로 가게 된다.

 

그리고 몇 년 지나 다시 문제가 생기면 이제 다시 금융 정책 기능을 또 떼어내, 그 이름이 뭐든 금융위 같은 것을 다시 만들자고 하고, 그걸 개혁이라고 하게 될 것이다.

 

그 사이에 정말 중요한, 금융 결정에 대한 이해당사자의 참여와 시민의 결정권, 그런 건 앞으로도 최소한 10년 이상, 제대로 얘기해볼 공간도 없게 된다.

 

기타 등등여기서 파생적으로 생겨나는 문제와, 본질적으로는 무엇이 금융 민주화인가, 이자율 등 금융 자체에 대한 건 대선에 설령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논의하기 어렵게 된다.

 

이건 기술적인 얘기이고

 

보다 심각한 것은, 이런 중대한 결정이 누구를 통해서, 어떤 경로로 만들어졌는지, 그런 게 전혀 없고, 잘못이 있다고 얘기할 과정도 없고, 반대 의견을 수렴할 과정도 없다는 것이다.

 

금융 공약의 내용보다 더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전형적인 밀실행정이 캠프라는 이유로 또 다시 반복되는 것

 

그건 우리가 가야 할 미래가 아니다.

 

간단한 공청회 몇 번 하거나, 하다못해 peer group review 해보는 거, 그게 그렇게 힘드나?

 

질문을 해본다면, 명박 시대에 이상한 방식으로 하나은행에 넘겨준 외환은행 어떻게 할 것인가, 멀쩡했던 산업은행을 민영화한다고 쪼갈라 놓은 것, 어떻게 할 것인가? 거기에서부터 답이 시작되어야 한다. 그게 금융 공공성 혹은 금융 민주화의 1번 질문이다.

 

2번 질문은, 이자율과 환율에 관한 질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금융 자체의 문제로 순서를 매겨나가면 답해야 할 것들이 많다.

 

그런 누구나 알고 있는 명확한 질문들이 있는데, 금융위 어찌할까, 그게 바로 모피아 프레임 아닌가? 엉뚱한 질문 던져놓고, 이게 개혁이다, 서로 논쟁하는 것, 그건 모피아 함정에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판단을 해야 하고, 이번 대선에서 가장 큰 기준을 금융 민주화로 잡았었다.

 

안철수는 영웅이다. 그걸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는 하늘이 낸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것도 부정하지 않겠다. 어쨌든 박근혜를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처음 준 사람이 안철수이다. 그래서 이 시대의 영웅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되든, 성공하기를 빈다.

 

그가 통합후보가 되면, 나는 기꺼이 그에게 투표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지도자는 아니다.

 

이게 그의 공약을 보고, 경제학자로서 내가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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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태어난 삼색 고양이와 봄에 태어난 강북걸 사이의 스킨쉽. 진정으로 다정함이 뭔지를 배우게 된다.)

 

가을이 막 깊어가기 시작할 때, 새로운 고양이들이 태어났다. 늘 그렇듯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앞에 놓고는 삶에 대해서 잠시라도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사의 조철현 대표는 요즘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있다. 아주 오랜만에, 영화사에서 간략하게 니체 이전과 니체 이후에 대한 철학사 강의를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삶에 대해서 대단한 통찰력이나 이해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삶에 대해서 너무 가벼워서도 안되고, 너무 무거워서도 안 된다는 정도의 생각을 한다. 고양이들의 삶은 짧다. 그리고 야생 고양이들의 사이클은 더더욱 짧다. 내가 돌보고 있는 동안에도 맨 처음 마당에 자리잡았던 모녀 고양이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번 봄, 바보 삼촌의 아빠였던, 내가 아빠 고양이라고 부르던 녀석이 사라졌다. 봄에 태어났던 삼색이와 누렁이, 두 마리도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하고 떠나갔다.

 

무엇인가를 돌본다는 것은, 참 익숙해지지 않는 헤어짐과 익숙해진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지도 모른다.

 

 

(이번에 태어난 세 마리 아기 고양이들, 얘들 데리고 이사갈 생각하면 머리가 욱신욱신하다. 잽싸기는, 엄청나게 잽싸르고, 눈치도 엄청 빠르다.) 

 

요즘 돌본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이 많아졌다. 지금 이래저래 내가 돌보는 고양이들이 열 마리가 되었다. 집안에 야옹구, 마당 고양이 7마리, 여기에 영화사에 있는 고양이 두 마리. 다들 나름대로 신경을 써고 돌보고 있지만, 내년 봄에도 계속 볼 수 있는 고양이가 몇 마리인지, 나도 잘 모른다. 이사가면서 혹시라도 못 따라오는 고양이가 있을 수도 있고, 이사간 집에 적응하지 못하는 고양이가 있을 수도 있고. 게다가 영화사 사무실에 있는 고양이들은 겨울이 되면서 더 이상 사무실에 있기가 어려워져서, 입양 보낼 데를 사무실에서 수소문하는 중이다. 그냥 그런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약간씩 애잔하게 남아있다.

 

아주 간단한 얘기이지만, 돌보는 사람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 과연 누가 누구를 돌보는 것인가, 누가 누구에게 도움을 주는 것인가, 그런 본질적인 질문이 가끔 든다. 고양이들과 이렇게 지내면서 나도 많이 바뀌었다. 여전히 게으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규칙적으로 무슨 일을 해야만 한다. 내가 없으면 굶거나 아주 힘들어지는 존재가 있다는 게, 날 힘들 게 하는 게 아니라 나한테 변화를 만들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조금씩 해보기 시작한다.

 

머리로 아는 것과 살면서 배우는 것 아니면 조금씩 느끼는 것, 그 사이에 간극이 많다.

 

어디에서 나왔던 얘기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듣기는 아내한테 들은 얘기가 있다. 전문가 집단 중 수명이 가장 긴 집단이 정원사들이라는 것. 정원사가 죽으면 그가 돌보던 정원도 황폐해지고, 귀하게 대접받던 식물들도 그냥 시름시름, 죽어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정원사들은 그게 의식적이든 혹은 무의식적이든, 어쨌든 기를 쓰고 오래 살게 된다는 것.

 

나는 어렸을 때 외할머니가 키워주셨고, 그래서 내 유년기 기억의 대부분은 외할머니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는 않으셨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학교 들어가는 거는 보고 눈을 감아야 한다고 맨날 얘기하셨다. 그리고 나중에는 대학교에 들어가는 거는 봐야겠다고 말씀하셨다. 결국은 박사학위를 받고 취직하는 것까지는 보셨고, 결혼하는 것은 못 보셨다. 현대 다니던 시절,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셨다. 당시만 해도 조모상의 경우는 휴가가 안되어서, 장지에는 못 갔다.

 

돌봄과 사랑은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은 다른 듯싶다. 사랑은 집착과 한 끝발 차이다. 스토커와 짝사랑을 구분하기는 참 어렵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아동학대, 지금 사교육으로 자녀들을 내모는 부모들이 기본적으로는 다 아동학대 아닌가? 그러나 사랑과 구분하기는 어렵다. 돌봄은 집착으로 바뀌지는 않고, 스토커로 바뀌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소유하지 않는 사랑, 그것을 돌봄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잠시 생각을 해본다.

 

과연 누가 누구를 돌보는 것인가, 마당의 고양이들과 몇 년째 같이 살면서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 고양이는 올해 두 번째 새끼를 낳았다. 봄부터 이미 건강이 썩 좋지는 않은 상태다. 이번에는 고등어를 구워서 주는데, 눈치 없는 바보 삼촌이 어김없이 나타나서 후다닥녀석의 별명이 그래서 바보 삼촌이 되었다. 봄 출산 때에는 엄마 고양이가 바이러스 감염까지 있어서 기침을 심하게 했다. 사람 천식 있는 것처럼 콜록콜록상당히 비싼 약을 사다가 캔에 타서 먹이는데, 녀석은 이 약 탄 캔까지 그냥 처묵처묵.

 

, 눈치 좀 봐라.

 

사랑이라는 게 뭘까, 이걸 이해하는 건 참 어렵다. 그러나 돌봄이라는 게 뭘까, 그건 그렇게 무겁거나 치명적인 속성이 없어서 더 편하다. 조금씩 서로를 돌보는 것, 이것은 다다익선이다.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않으면, 특별한 이데올로기적 속성을 가지지 않은 채로, 약간씩 서로 숨 쉴 공간을 만드는 것.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혹은 문화적으로나, 약간의 숨 쉴 공간이 지금 우리에게 있으면 좋겠다. 우리는 시방, 너무 날 선 삶들을 살고 있다.

 

(햐, 녀석도 몸단장한다. 아직 성별도 제대로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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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상 정치차별금지법

 

일명 연령차별금지법이라고 불리는 법안이 인권위에서 만들어질 때, 나도 자문그룹으로 참여를 했었다. 아직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기업체 같은 데에서 사람을 뽑을 때, 연령을 이유로 차별하면 불법이다. 예를 들면 특정년도 졸업생을 명기하거나, 이런 걸 하면 안 된다. 이렇게 하면 고령자들이 노동 시장에서 좀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청년들이 약간 손해를 볼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전체적으로 볼 때 이게 옳기 때문에 법안은 무난하게 만들어졌다.

 

기업이 알아서 하는 거 아니냐, 지금 우리나라의 제도는 최소한 연령에서는 그렇게 차별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요즘 이런 생각을 종종 한다. 나는 좌파로 살아왔고, 내가 좌파라는 사실을 감춘 적도 없다. 한국에서 진보냐고 물으면 30% 사람 정도가 그렇다고 대답하고, 좌파냐고 물으면 2% 정도가 그렇게 대답한다고 알고 있다. 2%, 이건 한국 사회에서는 소수자이다. 보이지 않는 차별이 아니라, 대놓고 하는 차별이 많다. 많아도 정말 많다.

 

그러나 이건 내가 내린 판단에 대한 몫이라고 생각해서 그냥 묵묵히 짊어지고 살았다. 나는 내 양심에 따른 선택을 한 것이고, 그에 따른 차별도 그냥 감수했다.

 

그런데 이게 과연 타당한 일인가, 그런 질문을 요즘 해보기 시작했다.

 

한국의 헌법은 사상의 자유와 같은 양심의 자유를 허용한다. 내가 헌법을 지키고, 법을 지키는 한에서, 좌파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대우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요즘 기업체나 공기업 같은 데에서 하는 면접 같은 거, 도가 지나치다고 느껴진다. 어떻게든지 조금이라도 자신들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을 아예 취업 과정에서 배제시키고자, 별의별 수단을 다 쓴다.

 

근데 이거헌법 위반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노동과정에서 문제를 일으킨 직원을 인사 조치한다는 것, 이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가 아닐까 싶다.

 

진보성향을 가진 구직자를 걸러내기 위한 면접 관행, 이게 위헌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헌법은 그걸 보장하고 있는데, 지들이 뭔데 거기에 대해서 제약을 가하는가?

 

궁극적으로 우리는 연령을 이유로 차별하면 안되고, 성별을 이유로 차별하면 안 된다. 그리고 학벌을 이유로 차별해도 안 된다. 마찬가지로 정치적 사상을 이유로, 차별해도 안 된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한국 사회 발전의 방향이다.

 

우리 경제의 다음 모습은 다양성이다. 우리가 요즘 가고자 하는 복지국가를 만든 나라들의 또 다른 힘은 바로 이 다양성에서부터 나온다. 미래 경제의 한 축이 다양성이다.

 

박근혜가 얘기하는 국민대통합이라는 것을, 경제적 관점으로만 본다면 이건 구시대 경제 패러다임이다. 더 많은 다양한 모습들이 나오게 해야 하는데, 자꾸 통합이라고 묶으면, 새로운 변종과 혁신을 지체시키게 된다. 궁극적으로 박근혜의 경제가, 뭐라고 디자인하든, 미래 경제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유 없는 차별을 자꾸 줄이고, 그 안에서 공동체적 연대의식 같은 걸 만드는 게 우리가 가야 할 일이다. 그런데 정치적 이유와 사상의 이유로, 취업할 때 불이익을 주겠다고 공공연히 기업 사람들이 떠들고 다니는 것 혹은 경제 관료들인 모피아들이 은근히 뒤에서 협박하는 것, 이건 위헌 아닌가?

 

나는 그 불이익들을 그냥 받았다. 그러나 나와 같은 판단을 했을 청년들을 위해서라도, 이 얘기는 좀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좌파라는 이유로 혹은 진보라는 이유로, 고용상 불이익을 받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가 않는다. 능력이 적합지 않다거나, 조직내 의사결정을 저애한다거나, 다른 이유로 문제를 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신념의 차이로 처음부터 걸러내기를 한다는 것은, 우리 헌법 체계에서는 잘못된 관행이다. 그건 우리가 가야 할 미래의 모습이 아니다.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좌파 비율이 10~15% 정도 된다. 그게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2%만이 좌파라고 대답하는 것, 그건 차별을 피하기 위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있다는 얘기이다. 사회에 차별이 존재하는 이유는 많지만, 양심의 자유 때문에 차별받는 건, 그건 좀 아니다 싶다.

 

연령, 성별, 지역, 학력 그런 차별이 옳은 것은 아니다. 이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면서 한국이 발전하는 것이다. 양심의 자유 혹은 정치적 선택에 따른 차별, 이것도 우리가 유지해야 할 미래의 모습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고용상 정치차별금지법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헌법에서 보장하는 권리를 무슨 권한으로 공공연하게 제한하는 것을 정당하게 보는 것인가? 나는 우리 안에 몸에 밴 차별 관행을 하나씩 줄여다나가면서, 더 많은 다양성을 시스템이 확보하는 것, 그게 미래 경제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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