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삼촌이 아프다

 

 

두 달 전부터, 내가 바보 삼촌이라고 부르는 고양이가 기침을 시작했다. 가끔 고양이들이 기침을 하는 건 안 본 건 아니다. 몇 번 동물병원에 가서 물어보면 바이러스성 질환이라고 얘기도 하고, 연고 같이 생긴 약을 가져다 먹이기도 하였다.

 

어쨌든 바보 삼촌의 기침은 점점 더 심해지고, 요즘은 10분 넘게, 그야말로 폐병 환자처럼 쿨럭쿨럭거리는 소리를 듣는 일이 잦아졌다. 요즘은 덤불 안에 숨어서 길게 기침을 하기도 한다.

 

그래도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같이 산다고는 하지만, 어지간한 포획작전을 하지 않으면 잡기도 어렵고, 워낙 고양이 여러 마리들이 교대로 다니기 때문에 그렇게 잡기도 어렵다. 솔직히, 아기 보는 것도 어렵다. 게다가 10월이면 둘째 아이가 태어난다. 아내는 슬슬 만삭의 분위기로 가기 시작한다.

 

고양이는 전형적인 야생동물인데, 야생동물이라는 말은 꾀병이 없다는 말이다. 아프다 싶으면 여지 없고, 아파 보이지 않아도 잠시 안 보여서 찾아가면 무지개 다리 건너가 있는 게 야생 고양이들이 삶이다. 내 손으로 참 많은 고양이들을 안아서 떠나 보내고는 하였다.

 

너무 이른 생각인지는 몰라도, 언젠가 바보 삼촌의 우리 집을 떠나가는 날에 대해서 슬슬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녀석과 벌써 4년을 같이 살았다. 장마가 한참 극성이던 때, 마루 옆의 베란다에서 빗소리와 함께 새끼 고양이 세 마리가 연신 울어대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렇게 처음 만났다. 그 중에 결국 혼자 살아남아 그 해 겨울을 같이 났다. 그 겨울을 같이 났던 아빠 고양이가 그 다음 해 봄부터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다음 해에는 우리 집 마당에서 참 예쁜 고양이들이 많이 태어났는데, 그 중에 결국 한 마리가 살아남아서 무사히 우리 집까지 이사를 했다. 녀석과 같이 한 배에서 태어난, 내가 생협이라고 불렀던 고양이는 이사오기 직전, 처음으로 영하로 내려가던 날 죽었다. 마루 베란다 한 구석에서 녀석을 찾아내서 안아들고, 정말로 한없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 수많은 새끼 고양이들이 내 품을 거쳐갔다. 살아남은 고양이보다, 내 품에 그렇게 안겨서 영원히 떠나간 고양이들이 더 많다. 한 마리 한 마리, 돌아보면 눈에 밟히지 않는 녀석이 없다.

 

내 입장에서는, 바보 삼촌이 잘 버텨서, 지난 세 번의 겨울을 나와 같이 났던 것처럼, 또 몇 번의 겨울을 더 나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밥을 제 때 주고, 물 깨끗하게 갈아주고, 그런 기본적인 것 외에 뭘 더 해주기가 어렵다.

 

야옹구가 많이 아픈 적이 있었다. 전날 저녁에 아프다 싶었는데, 그 날 오후에 영 이상해서 바로 병원에 데리고 갔는데, 그야말로 구름 다리 넘어가는 걸 겨우겨우 잡아 온 셈이 되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하지….

 

녀석들은 꾀병이 없어서, 아프면 정말 아픈 거다.

 

삶이라는 것, 늘 좋을 때에 밝은 낯으로 서로를 볼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어려울 때도 겪고, 심통 날 때도 겪고, 그리고 음, 아주 많이 심통 날 때도 겼고. 그런 게 식구와 같은 사이라고 할 만할 것 같다.

 

나도 식구처럼 지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중에 한 명은 벌써 떠났다. 가끔 술 마시고 취하면, 이렇게 얘기하고는 한다.

 

씨발 넘이 벌써 뒤지고 지랄이야

 

그래도 그가 죽고 몇 해가 지나니, 이제는 울지 않고 그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남은 사람은 또 남은 사람이라, 그의 아내와 자식들과 매달 만나면서 또 몇 년이 지나니, 이제는 그도 좀 덤덤해진다.

 

내년에는 출간 일정을 이리저리 치워서, 먼저 죽은 나의 친구에 대한 책을 준비하고 쓸 시간을 좀 만들었다. 그가 살아있을 때,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쓰려고 했던 책인데, 그가 떠나고 난 뒤, 그와의 삶을 생각하면서 쓰는 책이 되어버렸다.

 

시간이라는 것은 나름 편리한 것이다. 많은 것을 무덤덤하게 만들고, 견딜만하게 만들어준다.

 

어쩌면 바보 삼촌이 지금의 기침 증상을 잘 이겨내고, 앞으로 열 번쯤 나와 같이 겨울을 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냥, 그러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럴 수 없더라도, 그것도 받아들이려고 한다. 어쩌겠는가. 다 자기 명이 있는 걸. 녀석도 이미 그 또래의 고양이들에 비하면 이미 충분히 오래, 충분히 재밌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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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1.

장 폴 뒤부아라는 프랑스 소설가의 <프랑스적 삶>이라는 소설이 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봤을지 모르지만, 나는 참 재밌게 보았다. 드골에서 지스카르 데스탱을 거쳐 미테랑, 시락까지 이어지는 대통령의 집권기를 각 장의 주요 소제로 쓴 소설이다. 많은 소설은 연대기적 형식을 가지고 있는데, 이 책처럼 각 정부의 집권기를 노골적으로 챕터 구분의 방식으로 쓴 것은 아직 보지 못한 것 같다.

 

우리나라의 소설 중에서, 예를 들면 박정희 때, 전두환 때, 노태우 때, 김영삼 때, 김대중 때, 노무현 때 그리고 이명박과 박근혜 때, 이렇게 딱 시기를 걸고 주인공의 삶을 그 안에서 드라마틱하게 보인 적이 있을까? 사건 그대로를 보이려고 하면, 예를 들면 박경리의 <토지>처럼 엄청나게 길어진다. 장 폴 뒤부아의 소설은, 그렇지만 그걸 관찰한 한 사람의 시각으로 압축적으로 묘사하면서 한 권의 책에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얘기는, 아내에게 배신당한 한 엘리트 남성의 몰락기와 비슷하다. 그나마 그 아내는 정부와 헬리콥터를 타고 가다가 죽는다. 한 때는 잘 나가는 회사의 사장 남편이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사진작가이기도 했던 주인공이 노년에 재취업을 위한 상담 창구에서 상담 직원에게 개무시를 당하는 장면에서, 나는 약간은 자학적인 의미로, 그래 그런 게 삶이야, 이런 느낌을 받기도 했다.

 

<88만원 세대>에서 동거하겠다는, 그것도 일본인 애인과 동거하겠다는 아들에 대해서 무덤덤하게 대답하는 장면의 모티브는 이 소설에서 가지고 왔다. 그들이 결혼과 동거를 어떻게 하는가, 가장 평범한 묘사를 이 소설에서 보았었다.

 

나는 이 소설이 그렇게 좋았던 것이, 그가 잘 났든 그렇지 않든, 그 사회를 살아가는 개개인들이 대통령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뼈저리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바로 그 시대적 인식 때문이었다.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평온하고, 아내가 바람을 피우고, 자기는 그걸 알지도 못하고

 

이 소설을 읽는 순간만큼은 한국에 사는 우리의 삶도 그렇게 누가 대통령인가에 대해서, 개개인의 삶의 변곡점을 맞는 그 모습과 너무 닮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 와서 다시 돌아보면, 그건 좀 오류일 수도 있다.

 

누가 대통령이든 상관없이 평안한 대기업의 일부 인사들이 있을 수 있고, 누가 대통령이든 상관없이 언제나 인생은 개떡과 같은 어려운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서 인생을 생각한다는 것, 그것도 이 쪽과 저 쪽의 극단을 예외적으로 배제한 나머지 사람들의 얘기일지도 모른다.

 

2.

내 삶도 그러했겠지만 한국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삶도 누가 대통령인가에 따라서 상당한 부침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외형적으로, 그러니까 흔히 얘기하는 프로필 혹은 요즘 식의 스펙에 보이는 외형적 모습 말고 정말 자신의 내면의 모습을 보면, 실제로 부침이 많았을 것이다. 이건 자신이 어느 편이냐, 그런 굳건한 생각을 갖았느냐 혹은 그런 생각에 따라서 충실한 행위를 했느냐,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 질문이다. 편은 바꾸기도 하고, 실천은 하기도 하고 말기도 하고, 그러기도 한다.

 

어쨌든 누가 대통령인가에 따라서, 어쩌면 한국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그에 따라서 자신의 정말 개인적이면서도 사적인 비망록을 정리하는 게 가장 간편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를 결혼을 했거나, 아이를 낳거나, 이혼을 했거나 혹은 집을 샀거나 그런 개인개인의 개별적 요소들이 얹힐 것이다. 좋든 싫든, 우리는 그런 구조에서 살고 있다.

 

3.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어떻게 남은 살을 살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냥 쉽게 생각하면 늙은 아비의 고민 같은 거라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50이 내일 모래가 된 나이에, 아무래도 우량아 등급에 들어갈 만한 아기를 내내 안고 들어주다 보니, 이제 손목도 시리고, 발목도 시리고, 허리도 뻐적지근하기 시작한다. 저질 체력에 늙은 아빠, 하여간 아기 보다 골병들기 딱 좋은 조건이다.

 

게다가 10월이면 둘째 아이가 태어난다. 아내는 회사를 다니니까. 어떻게든 내가 더 많은 시간들을 아기들을 데리고 있어야 하는 상황인데, 슬슬 겁나기 시작한다.

 

4.

솔직히 정치는 물론이고,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은 다 놓고 그냥 조용히 앉아서 아기나 돌보고 싶다. 아기만 돌봐야 하는 것도 아니다. 아침에 눈만 뜨면 혹시 밥통 비었나, 살펴봐야 하는 고양이들도 이제는 여섯 마리도 넘는다. 내가 아기 돌보고, 고양이들 겨우 밥 주는 동안에, 마당은 완전히 잡초 밭이 되었다. 영화 <대부>에서 말론 브란도가 죽을 때 보았던 그 정갈한 포도밭, 그것과 완전히 정반대인 전혀 손대지 못하는 잡초밭을 보고 있다.

 

물론, 비겁한 변명은 있다. 마당 고양이들이 몇 년새 만들어놓은 그 똥밭에 정상적인 것들은 자라지 못하게 되었다. 물론 이게 변명인 것은, 그 똥들도 제 때 치워주면 된다. 아기 똥 기저귀 갈아주다, 잠시 시간 나면 고양이들 밥 주고, 그러면 언제 고양이 똥을 치우고, 또 내가 원하는 그 식용 박하를 키우고 채리 묘목을 돌볼 것인가.

 

어쨌든 이건 나의 일상의 삶이다.

 

그 와중에 잠시 짬을 내서 방송도 하고 촬영을 한다. 강연은 거의 하기가 어렵지만 내가 어려울 때 신세진 사람들이 부탁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서 가끔은 한다. 취재를 조금 더 하고, 사진도 조금 더 찍고 그렇게 현장에 가고 싶지만, 이건 거의 어렵다. 요즘은 아기가 밤에는 손이 좀 덜 가게 되어서, 밤에는 좀 글을 쓴다. 그래 봐야, 뭘 쓸지 방향을 잡을 정도로 시간을 보내고 나면 잠시 가졌던 시간이 끝날 정도이다.

 

짧게 정리하면, 아내가 일하러 간 동안에 나는 아기를 보는, 그런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그 틈틈이 약간의 사회적 삶을 한다. 시민단체의 정치참여르 담당하는 내가 꿈꾸는 나라의 대표로서 필요한 활동을 올해는 도저히 못한다고 했는데, 공동대표 체제로 되어있는 상황상, 하여간 대충 하는 시늉이라서 한 해 더 해주면 좋겠다원래 내가 하면 죽어라고 하고 말면 마는데, 이거 영 꼴이 꼴이 아니다

 

5.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골목 모퉁이에 붙은 표지판에서 장석준이라는 이름을 단 선거벽보를 보았다. 석준이시의원 후보로 나왔다. 택도 없는데, 왜 니 얼굴이 여기 있는 거니

 

마음이 더 괴로울려니, 그와 상대편에 서 있는 사람과 통화를 하게 될 일이 생겼다. 그를 내게 소개해준 사람은, 너네 동네에 노동당이 택도 없이 나와 았는데, 신경 쓰지 말고, 여기 좀 도와주라

 

사실, 그 중간에서 마음이 아팠다. 왜냐하면, 그 때만 해도 그 상대편이 장석준인 줄 몰랐으니까.

 

, 애 키우고 있는 애기 아빠한테 이렇게들 복잡해.

 

고민을 잠시 했는데, 내가 많이 도와주지는 못하더라도, 어떻게 표도 안 찍어. 그건 내가 그들과 보낸 수 십년이 넘는 젊은 시절의 기억 그리고 우리가 같이 넘으려고 했던 그 선, 그것에 대한 기억이다.

 

6.

내가 제일 하고 싶은 삶은, 그냥 조용히 아기 키우면서 지내고, 내가 사는 동네에 노동당 장석준이나, 예를 들면 녹색당 아무거시, 이런 이름이 뜨면 두 사람의 정책이나 경력 그런 걸 비교해서 투표하면 되는 삶이다. 내가 본 많은 유럽의 뭘 좀 안다고 하는 동네 사람들, 대체적으로 그렇게 살아간다. 나도 딱 그러면 좋겠는데

 

그게 과연 우리 시대에 허용된 꿈일까, 그런 깊은 회의에 잠기게 된다.

 

거대 악과 차악, 그 중에 골라달라, 그게 벌써 몇 십 년이냐. 내가 살다 살다 죽어도, 내 아이는 물론, 손자가 살아도 그렇지 않은 날이 안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7.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런 생각을 이번 지방선거 끝나고, 원래도 그 얼마 전부터 했는데, 선거 이후로 깊게 해보았다.

 

모른다. 그리고, 모르겠다. 원래 이런 종류의 질문은, 모르겠다, 그렇게 답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인민노련이라는 조직이 있었다. 나는 인민노련 조직원은 아니었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그들과 식구처럼 삶을 살게 되었다. 된장, 그 인민노련도 갈갈이 찢겼다.

 

조직부장이었던 노회찬, 울산으로 최초로 내려간 현장 활동가, 조승수, 그들은 정의당에 가있다. 조직부장 노회찬 밑에 있었다고 들었던 인천의 송영길은 이번에 선거에서 졌다.

 

그리고 그들이 정당을 만든다고 했을 때, 그 당의 최초 상근자이자 우리의 영원한 정책위원장인 이재영은, 대선 직전에 암으로 사망했다.

 

남은 몇 명이 여전히 노동당 한 축을 형성한다.

 

어차피 현실에서 별 거 안 할 거라면 인민노련의 친구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녹색당의 파운더 중의 한 명으로 살아갈 것인가, 그런 고민을 이번 지방선거 이후에 심각하게 했다.

 

매 번 선거 때마다 이렇게 나름 최선을 다하고, 끝나고 나면 내가 뭐했나 하는 자책감에 시달리고, 또 그렇게 평생을 살 거라면

 

차라리 나의 양심에 따라서, 정말로 내가 지지하고 나와 식구처럼 살아왔던 사람들을 위해서 떡이라도 한 번 돌리는 게 맞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8.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여전히 고민 중이다.

 

이번 지방선거를 보면서, 영원할 나의 친구이나 동료들인 인민노련 그리고 그들의 동료들과, 아무 영광은 없어도 차라리 같이 함께 할 가치를 지키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다. 원래 나는 우유부단한 인간이라서, 잘 결정을 못한다.

 

어쨌든 이번 선거를 보면서, 그 어느 때보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 고민을 깊게 하기 시작했고, 누구를 진정으로 지지할 것인가, 그 생각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이 고민은 퍽이나 오래 갈 것 같다. 그러나 백년의 고독처럼, 무엇을 할 것인가, 영원할 고민만 하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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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와 처벌', 사회 부총리 신설에 부쳐

 

우석훈

 

세월호 사건이 벌어지고 몇 주 지났을 때였다. 이 사건을 가지고 책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건, 내가 바다와 배 혹은 안전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 엄청난 전문가라서 그런 건 아니다. 거의 직관적인 생각으로, 세월호를 핑계대고 원래 자기들이 하고 싶던 일을 그냥 하는 형태로 가지 않을까, 그런 염려가 들었다.

 

그 후 다시 몇 주가 지났는데, 대체적으로 나의 생각이 아주 틀리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적당히 할 줄 알았다. 사람들이 아주 다 바보도 아닌데, 적당히 하다 말 줄 알았다. 그래도 최소한의 인격이 있다면, 좀 하다 말 줄 알았다.

 

예전에 경제부총리와 교육부총리가 있었는데, 결국에는 다 없어졌다. 경제기획원이라고 하는, 평가에 따라서 극과극을 오갈 수 있는 그런 부처도 결국 없어졌다. 정부 직제에 따라서 미래가 바뀌는 일이 전혀 안 벌어진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내가 뭔가 결정할 수 있는 순간이 되면, 아마 나는 예전에 없어져버린 동력자원부를 다시 만들 것 같다. 어쨌든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사람들이, 결국 예전 동력자원부에 있다가 부처가 없어지면서 황망해진 그 사람들이었던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들과 함께, 우리가 써야 할 에너지의 미래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나는 국가가 무엇인지 배운 것 같다.

 

부총리라는 자리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 내가 감동한 적은 딱 한 번이다. 프랑스의 우파 대통령인 사르코지가 집권을 하면서, 우리 식으로 치면 국토부와 환경부를 합치고, 그 두 부처의 통합 수장을 환경 부총리로 만든 걸 보면서 놀란 적이 있었다. 그렇게 합쳐진 환경부를 생태부로 이름을 바꾸고, 30대 중반의 엔지니어 출신인, 비록 보수 성향이지만 그런 여성 전문가를 장관으로 앉히는 걸 보면서 정말 생각 많이 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프랑스 문화부 장관은 비슷한 30대 여성이 하면서 엄청 이슈거리가 되었다. 환경부 얘기는 그 덕에, 상대적으로 좀 가리워졌었다.

 

필요해서 부총리급의 자리를 만들고, 거기에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한다는 의미만으로 반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적절한 조치라면, “이렇게 좀 하자라고 찬성하고 박수칠 생각이 있다 그리고 나는 대체적으로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오늘 박근혜 정부에서, 비경제 부분의 총괄 기능이 없다고 사회 총괄, 그들의 용어라면 사회 컨트롤타워를 담당할 부총리직을 새로 만든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래저래, 교육부 장관이 그 자리를 맡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런 걸 된장이라고 한다.

 

경제에 총괄기능이 있어야 한다, 이것도 쉽지 않은 판단이다. 경제 총괄부처는 어디에나 있고, 금융이 아니라 실물경제를 담당하는 부처도 있다. 그리고 그런 걸 전체적으로 견제하면서 발관 기능을 담당하는 중앙은행이 있다. 그걸 총괄하는 경제 부총리? 사실 그것도 일상적인 일은 아니다.

 

일본에 사실상 그런 일을 총괄하던 대장정, 일본의 큰 곳간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었다. 일본의 경제 민주화의 상징으로, 그렇게 중요했던 대장정을 결국 폐지했고, 그들의 기능을 총리실 등 각 부처로 뿔뿔이 날려버렸다.

 

경제에 부총리가 있어야 하느냐, 그것도 잘 모르겠다. 안 그래도 집중되기 딱 좋은 경제 행정, 나름 나누어서 견제도 하게 하는 게 길게 보면 낫지 않느냐, 그런 게 나의 생각이다.

 

하여간 별 논의도 없이, 경제부총리를 현 정부에서 신설했다. 그래놓고는 현오석이라는, 능력은 고사하고 인격도 좋게 평가하기 어려운, 좀 찌질한 아저씨를 그 자리에 앉혔다. 임명권자 마음이라그래, 니들 맘대로 하세요, 어차피 선거에는 니들이 이겼으니까.

 

그리고 오늘, 이제는 비경제 부문의 콘트롤 타워가 필요하다고, 사회 부총리 혹은 교육 부총리 자리를 신설한다고 한다.

 

이게 세월호와 무슨 상관이 있냐, 그런다고 지금 연안항로를 오가는 여객선들이 안전해지겠느냐, 아니면 구조 시스템이 나아지겠느냐?

 

누가 봐도, 이 두 사건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

 

핑계를 대더라도 이런저런 상황 봐가면서 핑계를 댈 법도 한데, 이건 정말로, 아무런 설명도 없다. 그냥 내가 하고 싶으니까, 이게 세월호 대책이야명분이 떨어져도 뭔가 명분이라도 만드는 흉내라도 내는 게 보통의 독재 상황인데, 이건 그런 시늉도 안 한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적당히 세월호 대책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알아서들 해석해줄 거야이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사회 콘트롤타워,  문명 국가에서, 이런 말을 쓴 적이 있던 것인 것, 과문해서 나는 잘 모르겠다. 사회를 콘트롤하지 말자는 게, 하여간 불편해도 참아내자는 민주주의 정신이라고 알고 있다. 꼭 의미가 아니라도 혹시라도 오해할까봐, 사회에는 콘트롤이라는 말을 잘 안 쓴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냥 멀리도 아니고 살짝 한 두발만 떨어져서 이 사건을 보면, 미셀 푸코의 책 제목 중의 하나인,

 

감시와 처벌’,

 

그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가?

 

수틀리면 다 감시하고, 기분 나쁘면 다 처벌하겠다

 

파업 중인 KBS와 파업 안 하는 MBC의 차이가 이 단어에 있지 않은가?

 

KBS는 감시 중이고, MBC는 처벌 중이었고. 파업하면 다 짤라 버리고, 새로 다 뽑아서 편안한 방송으로 가겠다

 

원래도 이 정부가 하고 싶었던 게 감시와 처벌이라고 생각한다. 그것까지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 선거의 여왕, 어차피 선거해도 이길 거, 굳이 복잡하게 매번 토론하고 그럴 필요가 있나 그런 생각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행동을 실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기울어진 운동장의 이 편에 있다. 그래서 기울어진 운동장의 저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의 과감한 발상과 행동, 그것을 경험은 커녕 상상도 잘 못해보는 사람들이다.

 

그런 세월호 대책으로 감시와 처벌’, 그리고 그걸 행정적으로 구현할 비경제 부총리 혹은 사회 부총리, 이걸 만든다고 지금 발표하는 것은, 너무 비인간적인 일이고 너무 가혹한 일이다. 슬픔에 젖어 있는 이 사회에, 너넨 지금부터 조심해, 이렇게 말하는 것도 너무 가혹한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을 지금부터 하겠다는 걸, 세월호의 부모들 핑계 대는 건, 진짜로 잔인한 일이다.

 

인간이 모여서 사는 사회에, 이 정도로까지 참혹하고 잔인한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역사 이래로, 지배층들이 아주 특수한 나치즘이나 파시즘 같은 상황을 제외하면, 이 정도로까지 몰염치하게 하지는 않았다.

 

적당히들 했다, 지금까지는.

 

박근혜 정부, 적당히 하지를 않는다. 너무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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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살 살아가기

 

20대 때에는 뭘 하는 줄도 모르고 그냥 방황하느라고 시간이 지나갔던 것 같다. 늘 불만이 많았는데, 그 불만을 해결하는 방법을 몰랐다. 30대에는 늘 불안감을 안고 살았던 것 같다. 뭘 해도 불안했고, 만족하는 걸 잘 몰랐다.

 

이제 40대 중반, 늙은 아빠로 아기를 낳아 키우면서 모든 일이 생각한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처음에는 아기를 보면서 노트북으로 글을 써야지, 그런 야무진 생각을 했었다. 택도 없는 일이다. 아기는 TV는 물론이고, 핸펀, 노트북, 이런 거 너무 좋아한다. 사실 핸펀이라는 게 어른이 봐도 너무 재미있는 물건 아니냐? 아기가 기어다닐 수 있게 되자마자, 이런 모든 문명의 이기와는 당분간 안녕!

 

그럼 책은 읽을 수 있나? 그것도 힘들다. 자기랑 놓아주지 않고 책을 붙잡고 읽을 수 있게 해주지 않는다. 유일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은 동화책이다. 그것도 한 두번이지, 같은 책을 수십번씩 읽어주고 있으면 나중에 지겨워서 진물이 난다. 덕분에 국내 동화책과 번역된 동화책의 미묘한 차이와 동화 시장의 생산 구조와 유통 구조 같은 것은 좀 이해하게 되었다.

 

한전 사보를 아기에게 재밌게 읽어주었다. 중간중간에 사진과 그림이 많아서 얘기를 만들어주면서 읽어주면 아기가 좋아한다. 내가 태어나서 한전 사보를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도 여러 번에 걸쳐서 본 적은 없다. 예전에 박수근이 표지를 그린 한전 사보들을 미술관에서 아주 감명깊게 본 이후로, 정말이지 한전 사보를 이렇게 공들여서 본 적은 없었다.

 

처음에는 뭔가 정해놓은 일정이 자꾸 깨어지면서 짜증이 전혀 안 난 것은 아니다. 아예 작업실을 구해서 집밖으로 나가서 작업하는 것도 생각해봤다. 소설가 김탁환의 목동 작업실이 천에 100만원이라는 얘기가 귀에 쏙쏙 들어온 것은, 이런 식으로는 아무 것도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가면 아기는 누가 봐 줘? 게다가 10월이면 둘째 아이가 태어난다. 안 그래도 대충 살던 인생에, 그래도 유일하게 의미 있는 일 아닌가 싶다.

 

아기가 만 두 살에 가까워지면서 내 삶도 많이 바뀌었다. 살살 살아가기, 좋든 싫든 이 방식에 익숙해지는 것 같다. 아직도 완벽하게 익숙해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대충 던져놓고, 에라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점점 익숙해져 간다.

 

아내는 출근하고 나는 아기보고나쁘지는 않은 삶이다. 그러나 가끔 뭔가 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길 때, 풀 수 없는 외통수에 처박힌 것 같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점점 더 익숙해져가기는 한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무서운 자연의 법칙이다. 그렇게 새로운 조건에 적응하게 된다.

 

이것저것 뭔가 하자고 내 주변에서 사람들이 얘기하는 게 줄어들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애기 아빠 택두 없슈, 그렇게 어렵다고 말하는 것에 익숙해질 뿐이다. 어딘가 근무하면서 일하는 제안이 몇 번 있었고, 정치와 관련된 얘기들도 일부 있기는 하지만, 아기 아빠가 애 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 대신 빵을 만들기 위해서 조금씩 뒤져보면서 빵 만드는 준비를 하게 된다. 2~3일에 한 번씩 빵을 사오는데, 이젠 그 돈도 아깝고, 무엇보다도 믿을만한 빵이 그렇게 많지가 않다.

 

살살 살기, 아직까지도 완전히 익숙해지지는 않았다. 아직까지는 해보고 싶은 게 더 많이 생각나기는 한다. 새로운 영화도 더 기획해보고 싶고, 방송 포맷도 실험해보고 싶기도 하고그러나 너무 많은 일을 할 수는 없다.

 

이 와중에 영화 기획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몇 년째 손발을 맞추고 같이 일하던 파트너 같은 동료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한 것은 아니고 처음에 제안만 해놓고 손을 놓은 작업이 있었다. 다행히 몇 주 전에 투자도 결정되고, 주연 배우도 어느 정도 캐스팅이 끝나는 모양이다. 덕분에 사무실 돌아갈 형편은 된 것 같다.

 

준비하다가 만 영화 몇 편에 대한 기획은 계속 진행 중이다. 그래도 정말로 몸이 움직여야 하는 순간도 있다. 몇 주 후에 사람들 모아서 23일 정도로 합숙 기획회의를 하려고 한다. 얘기의 기본 틀이라도 그렇게 정리가 되면 혼자 앉아서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야무진 생각도.

 

아기를 낳으면 더 많은 욕심을 내면서 더 열심히 살게 된다고 하던데, 내 경우에는 정말 살살 살아가게 된다. 아마도 많은 여성들이 육아와 함께 이런 삶을 선택했을 것 같다.

 

혼자서 모든 일을 마무리 지을 수가 없기 때문에 동료들의 도움이 더 많이 필요해졌다. 내가 움직이기 위해서 같이 손을 맞추는 동료들이 몇 명이나 있나 몇 달 전에 세어본 적이 있다. 간단한 셈법으로도 열 명은 넘어가는 것 같다. 우라질! 나도 벌려놓은 일이 많기도 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거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나도 모르겠다. 아마 이렇게 점점 하는 일들을 줄여나가다가 은퇴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퇴물 소리 듣는 것 보다는 적당한 때에 내려놓는 편을 선택할 것 같다.

 

하는 일이 줄면 집착도 줄어들고 고통도 줄어든다.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을 줄이지 못하고 잔뜩 껴안고만 있던 나에게, 아들이 준 것은 강제로 많은 것을 내려놓게 한 진공상태이다. 그게 상당한 평온을 준다. 내려놓는 것, 어지간한 사람은 스스로 알아서 할 수 있는 덕목이 아니다. 나도 마찬가지다. 알아서 내려놓고, 뭐 그런 정도로 심성이 고운 사람은 아니었다.

 

살살 살아가기, 삶을 대하는 또 다른 방법이라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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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쯤 되어야 이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게 될까...

 

마음이 답답하고 막막한 오후, 영화 <머니 볼> 마지막 장면을 보고 또 울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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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나치에 대한 얘기가 빠지는 수업이 거의 없을 정도로...

 

지겹도록 복습하고 또 복습하는 유럽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생각, 아무리 생각해도 또 생각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생각을 안하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19078.html?_fr=mr1

 

사설.칼럼

칼럼

[세상 읽기] 전체주의와 생각의 힘 / 김종대

등록 : 2014.01.09 18:42수정 : 2014.01.09 18:42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2차 대전 당시에 대량학살을 자행한 나치 전범 중 한명인 아돌프 아이히만이 1963년에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나치의 학살을 증언하기 위해 수많은 유대인이 법정에 나와 나치의 만행을 고발하기 시작했다. 이때 놀라운 사실이 발견된다. 홀로코스트 당시 유대인들 거의 대부분은 이송 지점에 정시에 도착했고, 제 발로 처형장까지 걸어가며, 자신의 무덤을 파고, 옷을 벗어 가지런히 쌓아놓고 총살당하기 위해 나란히 눕기까지 한다. 이상할 정도로 저항이 없었다. 재판 당시 검사들이 증인을 향해 묻는다.

“왜 당신은 저항하지 않았습니까?” “왜 당신은 기차에 탔습니까?” “1만5000명의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고 수백명의 간수들만 당신과 마주하고 있는데 왜 당신은 폭동을 일으키거나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않았습니까?

이에 대해 쉽게 대답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추방될 유대인의 명단을 작성한 것도 유대인 대표들로 이루어진 유대인 위원회였으며, ‘최종적 해결’로 불린 유대인 멸절에 적극 협력한 사람들도 유대인 자신이었다. 나치 제국에 재산을 헌납하고, 일단 죽음을 면할 명망가 유대인을 선발하는 정책도 그들의 일이었다. 나치 간부와 이들 유대인은 우호적으로 협력했다. 수용소에서 유대인에 대한 사형집행인도 유대인이었고, 시체를 처리한 것도 유대인이다. 그런데 유대인이 나치에 저항했다는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왜 저항하지 못했을까?

이 재판을 지켜본 독일 유대인 출신인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즉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집필한다. 지난 세기에 가장 논쟁적인 저술이자 2000년까지 이스라엘에서 금서였던 이 책에서 아렌트는 분석한다. 가해자인 나치나 피해자인 유대인 공히 ‘생각하는 방법’을 잃어버렸고, 그것을 잃어버리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살인하지 말라’는 양심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방법, 곧 ‘생각하지 않는 방법’을 전체주의 체제로부터 배워버린 것이다. 국가가 개인의 양심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준 것이다. 나치가 학살을 할 때 염소가스는 오히려 인간적인 조처였다. 수용할 수 없는 유대인을 고통 없이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는 가스는 ‘불필요한 고통’을 면제해주는 수단이었다. 가스로 살해하라는 총통의 명령을 수행하는 나치의 하수인들은 자부심도 느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고, 단지 국가의 명령을 수행한다는 의무감이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국가주의자들에게 국가가 신성한 권위를 갖는 이유는 바로 국가가 자기 개인의 양심의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국가의 합법적인 명령이라면 정당성 여부를 따지지 말고 복종해야 한다. 그래서 정보기관원들은 대선에 개입했다. 그러나 양심은 국가나 자신이 속한 조직이, 또는 법이 해결해주는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했다. 그것은 오직 생각할 줄 아는, 스스로 존엄성을 아는 개인만이 해결할 수 있다. 이것을 부정하는 사회는 바로 전체주의 사회다.

최근 국가의 권위에 종교적 신성함을 부여하려는 극단적 국가주의자들의 모임에 대한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한 정보기관의 송년 회식에서 “통일 위해 다 같이 죽자”며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는 희한한 풍경이 그것이다. 이건 진보당의 지난해 5월 ‘좌파 아르오(RO) 모임’에 비견되는 ‘우파 아르오 모임’처럼 보인다. 이후 요즘 공무원들이 애국가 4절까지 외우느라고 고생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국가 정통성을 강조한다는 역사 교과서도 다 좋다. 국가안보를 위해서라는데. 그러나 그 대신 양심의 명령에 따르는 개인의 존엄성도 똑같이 강조하라. 그게 자유민주주의다.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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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는 가끔 그야말로 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생동감있게 보여주는 일반인들의 글이 올라온다. 대체적으로 재밌다...

 

알바 얘기는 나도 자주 다루고, 취재도 많이 한다.

 

그래도 늘 새롭다. 슬픔과 기쁨이 순간적 찰라에 뒤엉켜 지나간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42715&PAGE_CD=ET000&BLCK_NO=1&CMPT_CD=T0000

 

 

  • 매달 5일은 월급날이다. 전달 일한 잔업시간에 따라 월급이 각자 다르겠지만 큰 차이는 나지 않는 것 같았다. 30년 근무한 사람이나 10년 근무한 사람이나 기본급 차이가 워낙 적었고, 나머지는 잔업수당에 따라 달라지는데 정규직들이야 거의 시키는 대로 잔업을 채우다보니 모두 비슷비슷하다고 했다. 쉬는 시간 공장장이 월급 명세표를 나눠주었다. 모두들 쓱 한번 쳐다보고는 주머니에 집어 넣는다. 왜 꼼꼼히 살펴보지 않느냐니까, 다 알고 있단다. 옆에 있던 최영근씨가 대신 답해준다.

    "저 사람들 자기가 잔업한 내용은 꿈에서도 틀리지 않아요. 공장 다니는 사람들은 다 그래요. 어제 몇 시간, 그제 몇 시간. 하루하루 잔업시간이 자기도 모르게 머릿속에 다 입력이 돼 있다니까요. 한 시간이라도 틀려 봐요. 바로 사무실에 달려가 난리 나지."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나만 하더라도 하루하루 일당을 나도 모르게 계산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일부러 보여달라고 한 박성현(47, 가명)씨의 10월 급여는 256만 몇 천 원이었다. 잔업이 142시간 기록돼 있었다. 한 달 내내 한 번도 쉬지 않고 하루 4시간 이상 잔업을 해야 찍히는 시간이다.

    "잔업 140시간이 넘어가면 하루도 안 쉬었다는 건데. 휴일날은 쉬고 싶지 않아요?"

    내가 물었다.

    "낸들 기계가 아닌 이상 쉬고 싶은 맘이 와 안 들겠능교. 우리 회사가 일감이 있다 없다 카니까. 벌 때 벌어야 하는기라요. 그라고 우리가 알바 맹크로 쉬고 싶다고 쉴 수 있겠능교. 회사에 시키면 시킨 대로 해야지."
    "월급 받으니 기분이 어때요?"
    "큰 돈은 아이지만 그래도 통장에 돈이 꽂힌다고 생각하니 좋은 날 아닌교."

    박성현씨는 멋쩍게 웃었다. 김영태(53, 가명)씨는 기자와 같은 조립반에 있어 친한 사이다. 그에게도 월급명세표를 보여달라고 했더니 거절한다. 부끄럽다는 것이다.

    "우리 아들이 구미에 있는 대기업에 작년에 취직했는데, 걔 초봉이 30년 일한 나보다도 많던 걸."

    머리를 긁적이는 그에게 부끄럼과 뿌듯함이 섞여 있다.

    여성 알바들 때문에 공장이 환해졌다

    공장 안이 갑자기 환해졌다. 아줌마 네 명이 알바로 왔다. 나이 지긋한 오십대 초중반 나이지만 공장에 돌연 활기가 돈다. 아줌마들은 부속 끼우는 공정에 투입됐다. 두 명은 작년에도 보름 정도 일한 경험이 있고 나머지 둘은 처음 온 사람들이란다.

    일을 경험해 본 적이 있어서인지 다들 작업에 거부감도 없고, 처음 온 사람 특유의 멋쩍음도 없었다. 어느새 네 명은 같은 일행처럼 어울렸다. 같은 공정에서 여성들끼리 일하다 보니 한결 일할 맛이 나는 것 같았다. 처음엔 이들의 활력이 같이 뭉쳐서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차츰 지내고 보니 여성 특유의 친화력과 적응력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며칠 후 그녀들은 각각 다른 공정에 배치되었다. 그녀들은 각자의 공정에서 무뚝뚝한 남자들에게 색다른 방식의 소통을 자극했다. 내가 일하는 조립공정은 주로 피스를 박고 무거운 새시를 들어야 하기 때문에 여성들이 일할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포장을 하거나 새시에 구멍을 뚫는 프레스 작업 작업장에서 같이 일하는 남성 노동자들의 얼굴엔 희색이 돌았다.

    여성 특유의 소통과 섬세함이 작업장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 같았다. 이 여성들도 오후 8시30분까지 잔업을 꼭꼭했다. 힘들지 않냐고 물어보자 이런 답이 돌아온다.

    "집에서 놀믄 뭐한다요? 애들 다 컸겠다. 팔다리 튼튼허것다, 남편 돈 못 벌것다. 여기 와서 일하는 게 훨씬 맘 편허요. 몸이사 쪼개 고되긴 하더라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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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 알바들 여성들이 일하자 공장에 돌연 활기가 찼다.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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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은 전라도가 고향이고 다른 두 명은 경상도가 고향이다. 만나자마자 언니, 동생 하는 그녀들에게 지역감정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진화적 관점에서 볼 때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훨씬 우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목표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질주하다 삶을 소진하는 남성에 비해 여성은 소통과 공감에서 기쁨을 찾는다.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도급작업

    "00초등학교 창틀 3500개 작업이 밀려 있어, 이번 토요일 도급으로 쳐내겠습니다. 그리고 일요일은 △△회관에서 회식을 합니다."

    공장장이 아침 조회를 소집해 말했다. 도급이란 일명 '돈내기'라고도 하는데 일정 물량을 정해진 조건으로 약속한 시간 내에 처리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의 이기심을 최대한 자극해 일감을 몰아치는 것으로, 건설현장에서 흔히 써먹는 방식이다. 창틀 3500개 조립 다하면 언제든지 마칠 수 있고, 그날 작업은 일요일까지 한 것으로 쳐 이틀 치를 계산한다.

    몇 시쯤 마치냐니까, 대개 열두시쯤이면 마치는데 빠르면 열한시 반에도 마친다고 한다. 나는 지하철 막차 시간 때문에 고민을 하다 다음날 쉬고도 하루 일당을 쳐준다는 유혹에 넘어가기로 했다.

    토요일 도급날이 되었다. 사람들이 부산한 가운데 자발적으로 일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자재를 준비하고 조립대를 일렬로 놓은 다음 조를 짰다. 피스를 박는 조립은 능숙한 정직원들이 하고 알바들은 나르거나 절단된 새시를 조립하기 좋게 작업대 위에 놓는 있는 일을 했다. 여성들은 비닐로 묵는 포장을 하고 세 명은 4개 단위로 포장된 창틀을 쌓았다.

    나는 운이 나쁘게 창틀 쌓는 작업을 했다. 창틀 묶음 하나가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15킬로그램에서 20킬로그램은 됐다. 이 창틀을 아침 여덟시부터 밤 열한시까지 마당으로 나른 다음 키보다 높게 적재했다. 어깨가 뻐근했지만 내 앞에 놓이는 물량을 처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쌓아야만 했다. 다음날 아침 수저를 못들 정도 어깨가 아팠지만 정작 일할 때는 통증을 그다지 느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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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틀 도급 작업 조립한 창틀을 마당에 쌓고 있다.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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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급날은 하루를 보내는 기준이 달라졌다. 자주 보던 시계는 뒷전이고 몇 개를 조립했는가에 관심이 쏠렸다. 점심시간에 같이 적재하던 장씨에게 물어보니 "팔 구백 개 정도 되려나?" 한다. 삼천오백 개를 언제 다하나 싶었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자 산더미 같던 자재는 조금씩 줄어들었다.

    반면에 내가 쌓고 있는 창틀은 언덕처럼 쌓여갔다. 물어보면 힘만 빠질 것 같아, 다음날 쉴 생각만 하며 쌓고 있는데 "얼추 이천 개는 넘어 나온 거 같네"하는 장씨의 말이 들렸다. 주위를 돌아보니 어둑해지려고 한다.

    이 추세라면 열두시 경에 마칠 것도 같았다. 그보다 조금 일찍이거나. 결국 도급도 그동안의 경험에 의해 정해진 코스에 불과했다. 경험적 통계에 의해 이 정도 물량이면 대략 몇 시간 내에 끝낼 수 있다는 추정이 나왔고, 그 오차범위는 한 시간을 넘지 않았다. 결국 도급이란 밀린 물량을 처리하기 위해 직원들에게 전력질주를 원하는 작업지시 방식이었다. 정속 주행하던 차를 일부러 가속시켜 성능 시험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세시, 하루 중 작업능률이 가장 떨어질 때다. 사장님이 현장에 나타나더니 직원들에게 일일이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나에게도 오더니 "고깃값이다!"하며 오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내민다. 엉겁결에 받아들었다. 생각지도 않은 돈이 들어오니 일순 반갑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먹이를 받아먹는 애완동물이 된 느낌이다. 주는 방식을 달리했으면 어땠을까. 봉투에 넣어 공장장을 통해 지급하는 식으로 우회하는 했으면 훨씬 세련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한편으론 그런 방식은 먹물 배인 사람들이 선호하는 방식에 불과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힘쓰라고 던져주는 먹이, 눈앞에서 직접적이고 확실하게 쥐어주는 게 당장 그 순간 힘을 쏟는 데는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거기에 먹이를 주는 주체를 강력하게 인식하게 하는 건 덤이고.

    이것이 현장에서 날것으로 축적된 관리기법인지, 혹은 사람을 다루는 사장님의 개인적 스타일인지 구별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나에게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방식이었다. 모멸감이 든 사람이 나뿐인가 싶어 둘러보니 누구도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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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시 원자재 마당에 쌓여 있는 새시 원자재를 작업장 안으로 옮겨 조립한다.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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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비 값'이라는 명목의 현금보너스를 지급하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본래 도급은 하루 일하고 이틀치의 임금을 계산하기 때문에 다음날은 당연히 휴무가 된다. 그런데 다음날 회식이라는 명목으로 직원들의 출근을 종용했다. 오두 두시에 회식을 할 예정이니 어차피 나오는 공장, 조금 일찍 나와 오전 작업이라도 해달라, 사무실 회의에 참석하고 온 공장장이 금요일 저녁에 한 말이었다.

    곧 이어 웅성웅성하더니 여기저기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다.

    "하이고 고깟 고기 안 묵고 쉴라요."
    "고기 몬 묵어 환장했나?"
    "공장장요, 고마 사람 좀 삽시다. 괴기보다 쉬는 게 몸에 더 좋소."
    "회식비 돈으로 나눠주믄 안 되나, 억지로 회식 안 해도 되니 사장님도 좋고 우리도 좋고, 서로 좋을 틴디."

    얼굴이 달아오른 공장장이 "알았다, 알았어"하며 손사래를 치고는 사무실로 다시 갔다.

    열시가 넘어서부터 슬슬 지하철 막차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막차는 모덕역에서 11시 45분에 있다. 지하철을 타지 못하면 택시를 타야 하는데, 집까지 택시비가 못해도 삼만 원은 나올 것 같았다. 이렇게 되면 다음날 일당까지 두배로 벌기 위한 도급이 거의 헛수고가 된다. 택시비 삼만 원을 빼고 이만 원 벌자고 열두시까지 뼈 빠지게 일하는 건 한마디로 미련한 짓이다.

    차츰 초조해져 장씨에게 물어보는 횟수가 많아졌다. 다 되어 갑니까. 몇 개쯤 했을까요. 그도 대충은 가늠해도 정확히는 답하지 못한다. 아마 11시 반 꺼지는 되지 싶네. 그런데 의외의 곳에서 해결책이 나왔다. 쉬는 시간에 아주머니들에게 어떻게 집에 갈 예정이냐니까. 간단하게 대답한다.

    "우리는 찜질방에 갈 겁니더."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차가 끊기면 굳이 택시를 안 타고 팔천 원짜리 찜질방에서 자고는 아침에 대중교통을 타면 되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마음이 푸근해졌다.

    "집에 안 들어가면 아저씨가 뭐라 하지 않나요?"
    "아, 이 나이에 뭔 의심이여, 의심이. 젊은 마누라도 아닌디 뭘."
    "아따, 나가 한 푼이라도 벌어야 지가 따신 밥이라도 묵을 거 아인가베."

    아주머니들은 외박이 마치 소풍이라도 되는 것 마냥 즐거워했다.

    도급작업은 장씨의 말대로 11시반에 끝났다. 나는 서둘러 지하철 막차를 탈 수 있었다. 종종거리는 발길과 달리 시선을 위로 쳐다보니 불 꺼진 공단의 밤하늘에 몇 개의 별이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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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료 버스 등 대중교통을 무료로 만드는 것은 좌파들의 오래된 꿈이다.

     

    내가 했던 여러 가지 얘기 중에서, 진짜로 내 마음의 소망이, 바로 이거다.

     

    목수정이 여기에 대해서 글을 썼다.

     

    언젠가, 이 글은 기념비적인 글이 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은 대중교통은 무료가 될 것이다.

     

    그게 언제가 될 것인가, 그게 그 나라 좌파의 역량 차이에 달려 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1022058175&code=990100

     

    전체기사
    [목수정의 파리통신]대중교통의 혁명 - 자유, 평등 그리고 무료!
    목수정 | 작가·파리 거주
    • 매년 12월31일 오후 5시가 되면 파리 시내 모든 대중교통은 무료로 운행된다. 다음날 정오까지.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연말파티를 즐기는 시민들에게 파리교통공사가 제공하는 애교스러운 서비스다. 지하철은 밤새 흥청거리는 사람들을 무료로 실어 나른다. 백야축제를 하는 날 밤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축제니까, 우리도 시민들 기분 좀 맞춰줄까? 하면서 공공서비스가 시민들에게 내놓는 선물이다. 갑자기 이동의 자유가 확대될 때, 사람들의 머릿속을 스쳐 가는 생각은 “이 무한한 해방감을 매일 누릴 수는 없을까?”이다. 이동의 자유를 확대하는 것은 의식과 행동반경을 확장하는 해방의 행위임에 분명하다. 아직까지 한국의 진보진영이 외쳐보지 못했던 구호. ‘무상 대중교통’의 꿈을 실현해가는 도시들이 프랑스에서 늘어가고 있다.

      “자유, 평등, 무료.” ‘박애’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보다 구체적이고 직설적인 구호 ‘무료’를 박아 넣은 깃발을 프랑스 남부 도시 오바뉴의 모든 버스들이 달고 달린다. 오바뉴의 모든 버스노선은 4년 전부터 무료로 운행되기 때문이다. 이 야심찬 계획을 실행에 옮긴 사람은 공산당 출신의 시장 다니엘 퐁텐이다. 2008년 시장으로 재선된 퐁텐은 무상 대중교통 프로젝트에 바로 착수했고, 4년이 지난 지금, 이 도전은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교통비 부담이 없어진 사람들은 당연히 더 자주 외출하고, 친구 집을 오가며, 인근 도시들과의 교류도 활발해졌다. 인근 도시에서 부러움을 사면서 도시의 인구도 늘어났다.

      그렇다면 이 대중교통 수단의 운영비를 지급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9인 이상의 직원을 가진 기업주들이 내는 교통세이다. 버스 승객의 55%가 학교나 직장에 가기 위해 매일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며, 25세 이하의 승객이 전체의 50%를 차지한다. 기업을 돌아가게 하기 위한 직접적인 인력, 혹은 미래의 인력들을 위한 비용이므로 조세저항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매표와 검표를 위한 시스템, 이를 관리하는 사람들의 인건비가 사라졌으므로 당연히 대중교통운영의 비용 자체가 상당한 폭으로 감소하기도 했다.

      25년간 오바뉴에서 버스 운전을 했던 장루이는 버스가 무료가 된 후 더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이용하게 된 것은 분명하지만, 우려했던 버스의 시급한 낙후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밝힌다. 반면, 승객들이 훨씬 더 느긋하고 편안해지면서, 자신 또한 스트레스를 덜 받으며 운행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노동조건도 향상되었다고 증언한다.

      현재 프랑스에는 오바뉴뿐 아니라, 샤토후, 콤피에느 등 총 24개 도시가 무료 대중교통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으며 벨기에, 스페인 등에서도 이 같은 움직임이 확대되고 있다. 이처럼 대중교통을 무료화하는 도시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그 이유 중에는 ‘이동의 권리에 대한 보장’ 차원에서뿐 아니라, ‘환경 보호’(무료 대중교통이 등장하면서 자동차를 이용하는 인구가 줄어들기 때문), 외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시장에 대한 접근을 용이하게 하면서 구매력 확대, 시장 활성화와 같은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내용도 포함된다.

      2013년 1월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은 모든 대중교통이 무료로 운영되는 유럽 최초의 수도로 탄생했다. 언젠가는 파리의 대중교통도 무료가 될 날이 올 것인가? 바로 이러한 꿈을 목표로 하는 시민운동 조직 ‘유료 대중교통 폐지 조직’이 2000년도에 파리에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들은 ‘요금 제로 = 무임승차 제로’를 슬로건으로 하고, 시민들의 이동의 자유를 극대화할 것을 주장한다. 비록 2014년 1월부터 파리 인근 수도권의 대중교통 요금이 3% 인상된다고 파리교통공사는 정반대의 소식을 전하고 있지만,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해 나가는 사람들이 주변에 늘어난다면, 아름다운 꿈이 현실이 되는 날이 올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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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설을 오늘의 뉴스로 고른 건 처음인 것 같다.

     

    내가 알기로는 경향신문 사옥의 부지 소유주는 정수장학회.

     

    그래서 신문사에 간다는 생각 보다는 자기 집에 간다는 생각이 더 강했던 것일까?

     

    이렇게까지 문제를 복잡하게 할 필요가 뭐가 있나 싶다.

     

    하여간 하루 숨고르기를 했던 경향, 사설이 아주 쎄게 나왔다.

     

    영화 <짝패>의 류승완 대사 하나를 인용하면, "자, 이제 전쟁이유!"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2231921375&code=990101

     

    [사설]경향신문사 난입은 반언론적 폭거다<br><br><br>과연 지금은 언제인가. 절대다수의 국민이 인간다운 삶을 누린다는 21세기의 ‘국민행복시대’인가. 아니면 언론이 압살되고 국민의 기본권마저 철저히 유린당했던 1970년대 말의 유신독재정권 시절인가. 엊그제 경찰이 철도노조 지도부를 체포한다며 민주노총이 입주해 있는 경향신문 건물 전체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놓은 처참한 현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이러한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경찰이 휘두른 해머에 정문 유리창은 박살 났고, 매캐한 최루액 냄새는 아직도 건물 곳곳에 배어있으며, 유리조각 등의 잔해가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사회의 시계를 수십년 전으로 거꾸로 돌려버린 폭거이자, 언론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번의 반언론적 반민주적 폭거가 어떻게 기획·실행됐는지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엄중 처벌할 것을 정부에 강력히 촉구한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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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이 난입한 시점은 경향신문 기자들이 신문제작을 위해 회의를 열고, 기사를 작성하는 등 한창 바쁜 시간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리창을 부수고 최루액을 난사한 것은 언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무시한 망동(妄動)이었다. 게다가 경찰은 “체포영장 집행 30분 전에 경향신문 측에 통보하겠다”는 사전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고 한다. 법을 집행한다면서 스스로 신의 성실의 원칙조차 짓밟은 셈이다. 또하나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경찰이 법원에서 발부받은 것은 노조 지도부에 대한 체포영장이지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경찰은 노조 지도부를 체포하는 것보다는 마치 경향신문 건물을 초토화하는 것이 목표인 양 행동했던 것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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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1970년대 말을 언급한 것은 지금의 상황이 그때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1979년 8월 박정희 유신정권은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이던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을 강제연행하기 위해 1000여명의 경찰을 동원했다. 이 과정에서 야당의원들이 폭행을 당하고, 여성노동자가 투신 사망하는 비극적 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유신정권은 곧이어 발생한 부마항쟁과 10·26사건으로 붕괴했다. 정권이 언론을 탄압하고 노동계 전체를 적대시하면 필연적으로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사실은 1996년 12월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 날치기 사건에서도 거듭 확인된다. 새누리당의 전신인 당시의 여당 신한국당은 성탄절 새벽 정리해고를 법제화하는 노동법안을 날치기 통과시키고 국회 인근 식당에서 “우리는 승리했다”며 축배를 들었지만 곧이어 그들에게 들이닥친 것은 한보비리 사건과 IMF 구제금융 사태 등 정권몰락의 독배였다. 1979년 YH 사건 당시보다 무려 5배가 넘는 경찰을 동원해 경향신문 사옥을 유린하고, 노동계 전체를 적으로 만들고 있는 현 정권에서 불행의 조짐을 읽어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출범한 지 1년도 되지 않는 정부가 몰락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박근혜 대통령이나 정부·여당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의 비극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박 대통령을 비롯한 현 정권의 책임있는 당국자들은 이성과 상식을 찾기를 촉구한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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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이번의 경향신문 난입 사태가 경찰의 자체 판단만으로 이뤄졌다고는 보지 않는다. 수천명의 병력을 동원해 신문제작 중인 언론사를 아비규환으로 만들어 놓은 중대한 사안을 ‘윗선’의 지시 없이 경찰이 독자적으로 실행에 옮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언론자유와 민주주의의 수준을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아류(亞流)로 퇴행시킨 이번 폭거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철저히 진상을 규명한 뒤 책임자는 엄중 문책할 것을 다시 한번 정부에 요구한다. 진심 어린 사죄와 물적 피해보상도 뒤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수많은 시민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된 이 땅의 민주주의와 언론자유가 뒷걸음질할 것인지, 한 고비를 넘기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는 전적으로 정부에 달렸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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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class="article_photo_center" style="width: 408px;"><div style="background-color:#F5F5F5; border:1px solid #CCCCCC; padding:3px; width:100%;"><img src="http://img.khan.co.kr/news/2013/12/23/khan_Wgkc4B.jpg" vspace="1" hspace="1"></div><div id="divBox"></div></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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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태경제 이야기]생태의 눈으로 본 철도 민영화 논의
    우석훈 | 영화기획자·경제학 박사
    20세기 초, 대부분의 남자 경제학자들은 철도 건설을 우호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고, 이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줄 것이라고 믿지 않은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여성 경제학자이자, 1차 세계대전을 지지했던 독일의 극우파 남성들이 가장 싫어했던 로자 룩셈부르크는 생각이 좀 달랐다. 실제 그녀는 군인들에게 길거리에서 난타당해서 사망하게 된다. 그녀는 철도가 전통적인 자본주의 영역 바깥으로 손을 뻗어 시스템 외부의 자원을 확보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자국 내에서 외부 착취 요소를 찾던 자본주의가 결국에는 더 큰 외부로 향해 제국주의가 되고, 그 후에도 외부를 찾지 못하면? 결국 붕괴될 것이라고 보았다. 철도에 대해 이렇게 야박한 시선을 보낸 사람은 로자 룩셈부르크 외에는 보지 못한 것 같다.

    현대를 사는 대부분의 생태주의자들은 철도를 지지하고, 대중교통을 지지한다. 승용차를 통한 개별 운송이 만들어내는 환경부하보다는 철도 편이 유리하다는 것이 이유다. 유사한 논쟁은 한반도 대운하를 두고, 배가 트럭이나 승용차보다 온실가스 감축 면에서 유리하다고 주장할 때 본 적이 있다. 물론 개별 운송보다 유리하기는 하지만, 철도보다 유리하지는 않다.

    생태주의자는 유럽에서는 시민사회의 한 분야다. 녹색은 생태, 보라는 여성, 그렇게 색깔로 각각 상징된다.

    사회민주주의, 줄여서 사민주의가 노동자들을 대변하면서 전통적인 좌파를 형성한 반면, 생태는 별도로 녹색당을 만들면서 신좌파의 한 축을 형성한다. 그리고 생태주의는 그런 노동자들이 지나치게 강해져 생겨난 제도적 부패를 견제하면서 출발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지금의 정의당이나 노동당이 집권을 했고, 또 그들이 너무 오래 집권하다 보니 부패현상이 나타나 녹색당이 생겨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위스 등에선 중간에 농민당이 생겨나기도 했는데, 이건 결국 극우파 정당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생태주의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지 않고, 사민주의 노선에 전적으로 공감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생태적일 때, 그리하여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도움이 될 때 지지한다. 좌파의 여러 흐름들이 보편적으로 지지하는 공공성에 대해서도, 예를 들면 원자력 발전과 같은 경우 생태주의는 과감하게 반대 의지를 표명한다.

    이런 눈으로 볼 때, 지금의 철도 파업은 어떨까? 코레일 41%, 공공자금 59%로 자회사를 만들어 수서발 KTX에서 경쟁을 시키겠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일을 외환위기 때 한 적이 있다. 바로 거대조직 한전의 발전 부문을 떼어내 6개 자회사로 만든 것이다. 그때는 일부 발전소를 해외에 매각하는 것을 전제로 작업했다. 이후 경제 상황도 나아지고 공공성 논의가 진행되면서 매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난 정부에서는 선진화를 명분으로, 다시 이렇게 나누어진 발전사의 합병 논의를 했다. 정부가 하는 말의 미사여구를 다 떼어놓고 한전 분할과 비교해보면 기술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이를 민영화 ‘수순’으로 보지 않을 방법이 있는가? 게다가 모기업과 자회사 사이의 경쟁이라니, 무슨 해괴한 말을 하는가? 발전 자회사 주주총회 한 번 가 보시라. 한전 간부 한 명, 사무관 한 명이 주주를 대표해서 앉아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게다가 정부 기조야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 아닌가? 철도 요금이 저렴해져서 더 많은 사람이 이용할 수 있다는데, 왜 반대를 하겠는가? 그게 아니라서 반대하는 것 아닌가? 선로는 정부가 관리하니까 민영화가 아니다? 한전은 발전망을 보유했지만, 개별 발전소는 해외에 매각할 수 있다는 게 당시 논리였다. 같다. 생태의 눈으로 볼 때, 철도 파업을 지지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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