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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2.05.30 엄마 고양이 그리고 송도 신도시 10

요즘 새로 배우는 것들 2

 

호기심 같은 말이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증오나 사랑 혹은 희망과 같은 단어들과는 전혀 계열이 다른 용어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디오니소스 계열이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광기나 광란과 같은, 그렇게 격정적 에너지와는 조금은 더 다른 분야의 말이 있다.

 

한동안 트렌드로 사용되던 희망이라는 단어와 호기심은 또 다른 종류의 개념인 듯싶다.

 

예를 들어, 일본어를 새로 배운다고 해보자. 일본어를 배워두면 뭐에 쓸 것 같아서 배우는 경우와, 그냥 일본어가 재밌을 것 같아서 배우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재밌다는 것과는 조금은 다른 것일텐데, 호기심 때문에 뭔가 배운다

 

아마 영어로 얘기하면, 느낌 팍팍 올지도 모르겠다. 필요나 쓸모도 아니고, 재미도 아니고, 그냥 호기심 때문에 영어 공부를 하는 경우가 있을까? 아마 있다면, 호기심 대마왕 정도 될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뭔가 배우려고 할 때, 그 동기가 지나치게 불순하거나 직접적인 경우가 많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쁘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내가 책을 읽을 때 재미있어서 읽었는가? 나한테 곰곰 생각해보면, 호기심은 아니고, 재미는 더더군다나 아니고, 그야말로 죽지 않기 위해서 봤다, 이게 아주 솔직한 얘기일 것이다.

 

어쨌든 박사를 마칠 때까지, 나도 무수히 많은 시험과 구술시험 혹은 갖은 방법의 테스트를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암기력이 정말 나쁜 편이라서, 아주 많은 독서를 하고, 그 독서량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 그렇게 고결한 입장이나 순수한 호기심 같은 걸로 독서를 한 건 아니다. 가끔 나의 진정한 독서는 만화 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는 게, 필요나 생존과 같은 목적과 관련되지 않고, 정말로 내가 순수하게 즐긴 적은 만화 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말로 호기심 때문에 무언가 새로 배우게 된 게 도대체 언제인가, 기억도 잘 나지 않을 정도이다.

 

어쨌든, 이제 경제학은 내려놓고 학자로서의 삶을 접겠다고 생각을 한지는 꽤 되는데, 그렇게 마감으로 정해놓은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생각지도 않았던 존재에게 무엇인가를 배우기 시작했다.

 

1) 고양이와 아이들

 

고양이를 돌보기 시작한 게, 아마 고3때부터였나? 너무 오래 되어서 잘 기억도 안 나는데, 그때부터 대학 시절, 집을 나오기 직전까지. 그렇다고 그 때 뭘 배웠던 것 같지는 않다.

 

3년 전부터 고양이와의 삶이 다시 시작되었는데, 요즘은 내가 생각하는 게 아무 것도 없어서 그런지, 고양이들로부터 이것저것 은근히 많이 배운다.

 

그렇다고 무슨 실용적인 이유는 아니다. 그냥 주어진 삶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내 앞에 나타난 녀석들과 운명적인 삶을 같이 살아가는데, 그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배우는 것들이 좀 있는 듯 싶다.

 

고양이들은 꾀병이 없다고 들었는데, 정말로 그렇다.

 

야옹구가 아픈 것처럼 보였을 때는 일요일 오후였고, 월요일 오후에 심상치 않다 싶어서 바로 다음날 오후에 들쳐엎고 병원에 갔는데백혈구 수치가 너무 낮아서 정말로 고양이별로 바로 보낼 뻔 했었다. 시껍했었다. 6개월 이상 상당히 아팠을텐데, 정말 그렇게 아픈지 까마득하게 몰랐다.

 

최근에 새끼 고양이들 두 마리가 또 떠나갔다. 아픈 줄 알았거나 급하다고 생각을 했으면, 무슨 수를 내더라도 냈을텐데, 나도 그렇게 섬세하지는 못했다. 요즘은 출산을 마치고 난 엄마 고양이가 바이러스 감염으로, 재채기를 하기 시작했다. 완치는 어렵고, 면역력을 길러줘서 버티게 하는 수밖에 없다는데, 정말 티 안내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간다.

 

야생의 생명체들이 보통 그렇다고 들었다.

 

꾀병 없이 버틸만큼 버티고, 쓰러질 때에는 가볍게.

 

그걸 보면서 정말 오래 전에 읽었던 ‘Seize the day’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카르페 디엠! 삶을 만끼하라!

 

어쩌면 우리는 걱정이 너무 많다. 살아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삶을 만끽하라!

 

오랫동안 잊고 있던 얘기였는데, 고양이들의 삶을 보면서 그런 걸 배웠다.

 

잘 먹고, 튼튼하고 오래 살고그게 그렇게 중요한 가치일까, 그런 생각을.

 

영혼 없는 표정’, 이런 건 좀 아니다 싶다는 것을, 고양이들의 짧지만 강렬한 삶 속에서 조금 배운 듯 싶다.

 

이 얘기들을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요즘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왜 아이들이냐고? 고양이를 제일 좋아하는 게 아이들이기도 하고, 또한 고양이가 제일 좋아하는 게 아이들이기도 하니까.

 

하여간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간만에 뭔가 배우는 중이다. 고양이들이 나의 스승이다.

 

2) 조지 루카스와 스타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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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마음이 무겁다. 가볍게 마음을 먹으려고 해도, 세상이 이 모양이니, 이게 마음이 가볍게 되나?

 

이것저것 고민하고 있는 나를, 야옹구가 딱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다.

 

그냥 자...

 

여기, 편해.

 

그렇다.

 

Seize the day...

 

(대학교 들어가서 두 번째로 집은 영어 소설이었는데, 결국 끝까지 다 못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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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새로 배우는 것들 1

 

20살 안팎의 나이였던 것 같다. 그 때는 ‘inspiration’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했다. 그 때는 뜻이나 알면서 좋아했던 건지도 잘 모르겠다. 하여간 영감이나 혹은 충동, 그렇게 갑자기 떠오르는 이미지, 그 정도 뜻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아마 경제학에 대해서 내가 가장 많은 영감을 가졌던 것이, 아마 박사과정 2년차에서 3년차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그 때는 작은 노트를 가지고 다니면서 나중에 쓰고 싶은 책의 리스트를 적는 게 중요한 취미생활이었다. 인터넷은 내가 학위를 받은 즈음에나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고퍼도 거의 학위 마칠 때쯤이었고, 대학에서 이메일 계정이라는 것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거의 학위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노트북은 가지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맨날 컴퓨터만 붙잡고 있을 수도 없었고,

 

혼자 다니는 시간이 거의 대부분이니, 카페에서 잠시 커피 한 잔 마시고 쉴 때 뭔가 할 일이 필요하다. 그 때 앞으로 쓰고 싶은 책의 제목을 쓰거나 고치거나, 찢어버리거나, 하여간 그게 혼자서 카페에서 놀 때 가장 편하게 할 수 있는 놀이였다. 작은 수첩과 펜 하나만 충분히 커피 두 잔 정도는 심심하지 않게 마실 수 있다. 그 때 수첩은 벌써 잊어버렸는데, 그 시절에 내가 쓰고 싶던 책과 지금의 책은, 일부분을 제외하면 아주 다르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게 바로 지금의 책이 된 것은 아니고

 

한 번쯤 더, 정말로 내가 뭘 하고 싶고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많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가 초록정치연대 정책실장을 하던 시절이다. 지금 쓰는 경제학 책들의 원형은 대부분 그 시절의 노트 같은 데에서 나왔다. 그 시절에 끄적거려 놓은 것과 전혀 상관없는 책이, 없는 것 같다. 하던 생각이 전개되지 않고 죽는 법은 있어도, 해보지도 않은 생각이 글로 나와서 책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내가, 참 게으르다. 몇 년째, 그 시절에 했던 생각을 정리하고, 또 정리하는 그런 일만 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그 중간에, 그야말로 틈틈이 새로 배우는 것들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수 년째 나의 일상은 정리하는 일 밖에 없다.

 

지금 10권째에서 서 있는 경제 대장정이나, 한참 중간을 넘어 파이널로 피치를 올리고 있는 나꼽살이나, 내가 여기에서 경제학에 대해서 뭔가 배우는 것은 아니다. 이미 알고 있거나 생각했던 것을 포맷을 바꾸거나, 전달하는 방식 혹은 요소들의 앞뒤 연결 고리만 바꾸는 일이다.

 

사실 내가 모르는 것을, 남한테 설명할 수가 있겠나? 그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내가 부지런하게 취재를 다니는, 뭐 그런 인간은 절대 아니고.

 

아는 건 아는 거고, 모르는 거는 모르는 거다이게 내 인생 철칙 중의 하나이다. 잘못 알고 있는 건 있을 수 있다. 이건 모르는 거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중간, 그건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아는 것 중에도, 모르는 것이 있다.

 

영감이라고 하는 단어를 쓰거나, 모티브라는, 동기의 의미를 가지고 있거나이런 게 분노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분노가 사람을 움직이기는 하지만, 그 분노는 오래 갈 수가 없다. 하루 종일 화낼 수도 없고, 몇 년째 화만 내고 있을 수도 없다. 사람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공부든, 작업이든, 분노로 시작한 것은 오래 못가는 듯 싶다.

 

분노가 해소되는 일은 거의 없다. 분노를 출발하게 만든 그 사건이, 사람이 살아가는 한에서는 해소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그런 구조적인 일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MB라는 틀이 기본적으로 이런 딜레마 안에 들어가 있다. 이 인간이 좀 황당한 인간이기는 하지만, 정말로 인간 하나 이상하다고 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건 아니다. 그래서 아무리 그를 미원한다고 해도, 그 구조를 바꾸기는 어렵다. 게다가 어차피 대선이라는 게, 지나간 대통령을 뽑는 게 아니라 다음 사람이 나오는 구조쟎아? 박근혜도 미워하자! 말이 쉽지, 그 미움의 감정이 그렇게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한 두번 건너가면 그 강도가 약해지게 된다.

 

맨날 벽에 사진을 걸어놓고 미워하자!

 

이거, 자기가 먼저 지친다. 누구도 그렇게 증오만 하면서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

 

세상의 증오라는 것은, 많은 경우, 지쳐서 사라지거나, 증오의 에너지를 다 써버려서 결국은 잊혀지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지 못한다.

 

나라고 싫은 사람이 왜 없겠나?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숫자만큼 나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고, 당연히. 그러나 사실 이제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예전에 헤어진 연인이 그렇게 미웠던 적이 있었는데, 하나씩 잊혀져 가다, 나중에는 아예 이름도 잊혀지게 된다. 그게 정상이다. 그걸 다 기억하면, 못 산다.

 

증오보다는 돈이 조금은 더 솔직하고, 에너지의 강도도 높다고 할 수 있을 듯 싶다.

 

증오가 사물에 대한 관계라면, 돈은 조금 더 보편적이고 밋밋한 것이다. ‘보편적 등가물’, 그야말로 돈이야말로 평등하면서도, 동시에 얕은 감정이다. 그 대신, 오래 간다. 등가물, 이 사람은 저 사람과 치환되지 않지만, 이 돈은 저 돈과 치환된다.

 

돈을 위해서이건 솔직한 거다. 돈 때문에, 이렇게 이유를 댈 때, 뭐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돈이 갖는 에너지로서의 한계는, 돈이 주는 에너지는 다른 돈으로 치환된다는 점 아닐까 싶다. 이렇게 벌든, 저렇게 벌든, 돈만 벌리면 돈의 궁핍으로부터 생겨난 정신적 에너지는 소멸된다. 그래서 돈이 허무한 거다. 쥐어봐야,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물론 그 돈에 대한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사람들도 종종 있는 듯 싶다. 예를 들면 명박. 요건 기본적으로는 악마인데, 따져보면 그 인간도 불쌍한 인간이다. 명박을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돈에 대한 욕구가 돈의 양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영화 <나자리노>에는 사탄이 늑대인간에게, 사실은 자기는 외롭고 힘들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있다. 늑대인간이 사랑을 선택했기 때문에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텐데, 그 때 자기가 힘들다고 애기를 좀 해달라고

 

악마도 잘 생각해보면, 불쌍한 구석이 있기는 할 듯 싶다. 물론 대부분의 우리는, 그런 걸 불쌍하게 생각할만큼 그렇게 속이 깊지 못하고, 또 삶이 팍팍해서, 그렇게까지 여유를 부리기가 쉽지는 않다.

 

그보다 상층의 동기는?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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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이 함께 하기를!

 

‘fta 한 스푼이 오늘 예약판매가 시작되었다. 아마, 오랫동안 시간이 지나도 이 순간을 잘 잊지 못할 것 같다. 앞으로도 몇 권 더 나올 게 있고, 책 작업은 당분간 계속 하기는 할 것이지만경제학자로서의 내 삶은, 이 책에 걸었다. 아니 모두 묻었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일까?

 

열정이라

 

20대에는 열정과 분노가 아주 컸던 것 같고, 30대에도 열정만큼은 컸던 것 같다. 그 대신, 나는 꿈 같은 것은 가져본 적이 없던 것 같다. 하기로 한 건 열심히 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꼭 나의 꿈인 것은 아니었다. 기후변화협약의 정부 대표로 협상에 나서던 시절, 열정적으로 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게 내 꿈이 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총리실 근무하던 시절에도 열정적으로 일을 했던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내 꿈인가? 그런 꿈은 가져본 적이 없다.

 

작년 10월 후반에서 11월을 거치면서, 나는 사람들과 한미 fta라고 불리는 줄 앞에 서 있었다. 그냥 내 양심이 시키는 대로 했다. 원래는 한미 fta에 대한 책 계획이 없었는데, 그 줄 한 가운데에서 책 한 권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상식적으로, 합리적으로는, 그 책은 쓰지 않는 편이 좋은 책이다. 그걸 내가 모르는 건 아니다. 짧게 보건, 길게 보건, 쓰지 않는 편이 낫다. 아직도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면 말이다.

 

이 시점에서, 정권이 바뀌든, 바뀌지 않든, 한미 fta에 경제학자로서 반대한다는 건, 한국에서는 아무 것도 안 하겠다는 말과 마찬가지이다.

 

냅둬요, 그냥 생긴 대로 살래요

 

어차피 많은 걸 포기하고 살고, 또 포기할려고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걸 이 시점에서 이런 식으로 할 필요가 있느냐, 나에게 많은 사람들이 해준 얘기가 이런 거다.

 

세 번의 큰 사건이 있었다.

 

국회 날치기 사건이 있었고, 한미 fta 발효가 있었고, 에 또총선에서의 패배가 있었다.

 

그 사이에 사람들은 대부분 떠나갔고, 시간은 흘러갔다. 포지션을 잡는다고 할 때, 이게 아주 어렵게 되었다.

 

그 와중에, 책을 그만 내려놓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여러 번이 있었다. 일단 입장을 정하기가 어렵고, 그러다보니 어디에서 논쟁점을 잡아야 할지, 그런 기술적인 고민들이 있었다. 그리고 님 떠난 빈들에서, 그런 생각도 강했고. 이미 사람들은 다 떠났는데, 나 혼자 빈들에 앉아 이게 무슨 가지학대적인 고민이람, 그런 생각도 많이 들었다.

 

이미 끝난 걸 뭐하러 붙잡고 있냐, 대표적인 목소리가 이준익 감독이었다. ,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진취적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미 지나간 건 어쩔 수 없고, 다음 방어선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는 얘기를 주로 했다.

 

아 참, 내가 이렇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느껴진 건, 정말 대학 시절에 처음 경제학 책을 진지하게 보기 시작한 이후로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내가 내놓을 수 있는 건, 그 과정에서 거의 다 내놓은 것 같다.

 

삭발은 진짜 애교이고. ‘88만원 세대절판은 그 다음에 이어서 한 거고.

 

더 내려놓을 수 있는 게 있으면 더 내려놓으려고 했는데, 그 다음에는 내려놓을 게 없었다.

 

총선 끝나고, 사람들이 멘붕을 호소하는 그 시점에

 

나는 금주를 했고, 한미 fta에 대한 입장과 생각들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이석기 사건이 생겨났고.

 

그 와중에 한미 fta는 무슨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을지, 대선이 무슨 소용아람!

 

시대에 뒤떨어지는 아주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는 걸 감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게 좀 멋지게 표현하면 시대의 불쏘시개’…

 

원래는 모든 공포의 총합으로 시작했던 컨셉에서 ‘fta 한 스푼으로 바꾸게 된 건, 정말로 일반인들과 아주 길게 그리고 아주 오래, 많은 대화를 나누고 난 다음이다.

 

모든은 나는 못하겠고, ‘한 스푼은 하겠고.

 

그래서 한미 fta 논의에 나는 딱 한 스푼만큼 더 한다고 가볍게 마음을 먹은 다음에, 세워놓았던 원고를 다시 붙잡을 수 있었다.

 

불쏘시개로 그냥 활활 타오르는, 뭐 그 이상은 나는 못하겠고.

 

불쏘시개에 불을 붙인다고 그게 정말로 나무에 불이 붙을지, 그건 잘 모르는 거고. 불쏘시개는 그냥 불쏘시개 답게 확 타버리면 그만 아니겠남?

 

하여간 책 한 권이 발간되게 하는 것, 그 이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처음에는 총선을 생각하면서 대선과 총선 사이에 국회에서 할 수 있는 조치들을 디자인하면서 작업을 시작했는데

 

총선 이후로는, 대선 과정에서도 한미 fta는 필요 없는 논의가 되어버렸다. 그거야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래도 자신의 삶을 위해서 그런 논의가 필요한 국민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요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정확히 말하면 내 주변 사람들이 치룬 대가는 크다. 원고를 마무리지을 때까지, 그 전의 모든 일정들을 다 세웠고, 원래 있던 계획들은, 개판이 되었다.

 

내 삶도 완전 개판이 되었고, 같이 작업하던 동료들의 삶도 덩달아 같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 후에 이 상황을 수습하느라고 하는 만큼 하지만, 한 펀 개판이 되어버린 삶이, 최소한 일정이라도 원래대로 돌아오지는 못했다.

 

어쨌든 그렇게 난리굿을 치면서 만들어낸 책이 예약판매가 걸린 게 오늘이다.

 

원래 예약판매 같은 건 거의 안하는 편인데, 한미 fta 논의에서, 이것저것 가릴 게 뭐가 있겠나 싶어서 그냥 하자고 했다.

 

어쨌든 경제학자로서 시대의 맨 앞이 아니라, 시대의 맨 뒤에 서게 되는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남들보다 먼저 논의를 하는 게 아니라, 논의 다 끝난 뒤에 저 뒤에 서서,

 

, 아직 이 얘기는 안 해봤쟎아…”,

 

요런 상황에 되었다.

 

난 그걸 받아들였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맨 앞에 서는 것만이 학자로서 할 일이 아니라, 맨 뒤에 서는 것도

 

비겁한 변명입니다!

 

영화 <실미도>에 나오는,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유행하게 된 대사가 생각난다.

 

맨 뒤에 서 보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기는 하다. 아마 이 상태로 작은 불소시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어떠랴.

 

이 시대에 경제학자로서 살았던 나는, 내가 꼭 해야 할 얘기를 했고, 그걸 두려워하지는 않았다는, 그야말로 내가 왜 살았는지, 그건 나한테 설명할 수는 있게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한 스푼은 정말로 나를 위한 제목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많은 걸 바꾸려고 하면 아무 것도 못하게 된다. ‘한 스푼만큼은, 혼자서라도 할 수 있는 것아닌가 싶다.

 

한미 fta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나는 늘 눌려 있었고, 웃음을 갖기가 어려웠다. ‘한 스푼이라는 제목을 달고서야 비로소 유머와 명랑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이 책과 함께, 내가 치룬 대가 중에 큰 건, 복지와 금융 등 많은 것을 같이 고민하던 동료들과 가은 자리에 앉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대부분, fta의 세계로 건너갔다.

 

나는 건너가는 대신, 그냥 여기서 늙어 죽으리라, 그렇게 선택을 했다.

 

몇 년 전부터 쓰던 구호인데, 지난 몇 달 동안 나를 지켜주었던 구호가 하나 있었다.

 

명랑이 함께 하기를!

 

아직 fta의 나라로 건너가지 않은 모두에게, 이 말을 드리고 싶다.

 

명랑이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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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에 대한 생각

 

 

1.

2012 6, 이 시기를 어떤 때로 기억하게 될까, 그런 질문을 해보게 되었다.

 

아주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명박 정부가 끝나고 그 다음 정부는, 박근혜 정부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상태에서 사람들이 멘붕을 호소하는 시기일 것이다. 박근혜 시대를 살아간다, 많은 사람들은 그 사실에서 머리가 뽀개지도록 아프거나 아니면 생각이 멈추어 버릴 듯 싶기도 하다. 그러나 또 많은 사람들은, 이제야 자기 세상이 왔다고, 활개치면서 행복해할 것도 사실이다.

 

얼마 전부터 들었던 생각이, 이번 대선이 어쩌면 우리가 치루는 마지막 대통령 선거가 될 수도 있다는. 한국 정치에 언제나 떠다니는 얘기가 의원내각제의 전설이다. 이건 꼭 좌우로 나뉘어서만 진영이 펼쳐지는 것도 아니다. 초록정치연대 정책실장 하던 시절에, 녹색당이라면 대통령 중심제 해체하자고 주장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나한테 얘기하던 사람들이 은근 많았다. 좌파 인사들 중에도 있었다.

 

어쨌든 지금처럼 정치의 보수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석기 사태 이후로 도무지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진보의 몰락, 그런 게 겹쳐지면 의원내각제 방향으로의 개헌이 다음 정부에서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번 대선은 정말로 마지막 대선이 될 수도 있다.

 

조금 더 과장해서 말한다면, <스타워즈>에서 공화국이 제국으로 넘어가고, 시즈의 힘이 제다이의 힘을 눌러버리고, 루크 스카이워커가 다스 베이더로 변하는 그 순간, 바로 그 시대를 지금 우리가 지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공화국이 제국으로 변하고, 그 제국에 맞서서 루크 스카이워커가 다시 등장해야 하는.

 

영화로 치면, 다스 베이더가 내가 이 애비다라고 하는 기가찬 대사발을 날려주시는 5편도 아니고, 루크 스카이워커가 드디어 포스의 어두운 힘을 몰아내고 제국을 몰아내는, 그런 6편을 살고 있는 것도 아니라, 생각하기도 싫은, 공주는 죽고, 제다이들도 다 죽고, 아나킨은 다스 베이더가 되고, 요다와 오비완은 도망가는그런 <스타워즈> 2편의 어딘가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 아니냐, 그런 생각이 갑자기 머리를 빡.

 

이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했는데, 이석기 보면서, 이건 도저히 할 수 없는 게임에 들어와있다는 그런 어두운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하여간 객관적 상황이 이렇다면, 먼 훗날 우리는 이 시기를 박근혜가 풀 파워’, 완전히 힘을 갖추었고, 이 쪽은 지지부진, 무너지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진짜로 이렇게 될지, 아닐지, 그건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객관적으로는 명박 5, 근혜 5, 그렇게 10년이 펼쳐져가고, 그 뒤의 5년은 있을지 없을지, 정말로 일본 자민당식의 50년 독재가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다. 어쨌든 지난 수 년동안 새누리당이 모델로 삼던 것은 장기독재를 합법적으로 할 수 있었던 일본식 자민당 모델. 진짜로 갈 수 있을지, 없을지, 그건 모르지만 하여간 그리로 가고 싶어하고는 했다. 미국식 모델? 미국 모델만 해도 일본 자민당에 비하면 양반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새로운 힘이 등장하고, 뭔가 대단하게 바뀌고, 그럴 조짐은 사실 보이지 않는다.

 

객관적으로는 그렇다.

 

2.

엄마 고양이는 벌써 두 번째 새끼를 낳았다.

 

처음 봤을 때의 산뜻함은 사라졌지만, 그 대신 시간이 만들어준 아름다움으로, 정말 환하게 피어났다.

 

잘 때보면, 독특하게 눈이 +자 모양이 된다. 두 개의 10, ( +  +  ), 딱 요렇게 생긴 모습으로 잔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예쁘게 모습을 잡아보고 싶어서, 이렇게 저렇게 시도를 해본다. 사실, 예쁘다. 그러나 내가 너무 화사한 아름다움 같은 걸 보고 싶은 것일까?

 

2012 6월은, 새로 마당에서 고양이들이 태어나서, 어떻게든 살려서 이번 겨울이라도 볼 수 있게 해보려고 내가 아둥바둥하던 시기로 기억이 남을 수도 있다. ‘멘붕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특별히 정을 줄려고 했던 아기 고양이 한 마리는 벌써 고양이별로 떠나갔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서, 뭘 어떻게 해볼 수도 없었다.

 

작년에는 장마철을 세 마리가 모두 잘 버텨냈었는데, 결국 가을이 되었을 때에는 한 마리만 살아남았다. 그게 지금의 바보 삼촌이라고 부르는 애다. 지난 번에 냈던 에세이집에 사진이 실렸던, 그래서 책에도 한 번 나왔던 새끼 고양이가 얘다.

 

어쨌든 아름다움에는 치명적인, 일탈이라는 속성이 숨어 있기도 하다.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말이, 눈 앞에 주어진 질문을 피해나가거나, 사회적 변화로부터 눈을 감는다는 것과 같은 순간이 되기도 한다.

 

내일 세상이 망한다 하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스피노자의 얘기가 멋진 얘기이기는 한데, 박근혜가 풀 파워로 가는 동안에, 나는 열심히 고양이를 돌아보았다, 이건 좀 이상하다.

 

삶은 그런, 조금은 비루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멋지고 중요한 일을 하더라도, 또 세상의 모든 것을 짊어진 것 같아도, 세 끼 밥은 먹어야 하고, 꼬박꼬박 잠은 자야 하고, 틈틈이 세상과 삶에 대해서 사색도 해야 하고, 그리고 수다도 좀 떨어야 하고.

 

3.

어쨌든 한동안 신경 쓰고 있지 않던, 도시계획이라고 부르는, 다가구주택 밀집지역과 같은 공간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하나, 그런 생각을 시작한 것은 엄마 고양이의 전신샷에 대한 고민을 하는, 그런 때였다.

 

아름다움이란 과연 뭘까, 그런 생각이 며칠 전부터 계속해서 머리를 맴맴 돌고 있다. <직선들의 대한민국>을 정리하면서, 한 번쯤 내가 생각하는 미학에 관한 걸 정리한 적은 있는데, 그걸 실제로 현실이나 정책에 연결시키려는 노력을 한 적은 없다. 콘크리트 미학의 세계가, 얼마나 단단하던지!

 

명박 시대라는 질문에서, 강북은 어떻게 가야 하나, 이런 식으로 질문을 조금씩 넘겨본 것이 대충 이즈음의 일이다.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결국 강북도 재건축하고 강남처럼 되어야 하고, 그렇게 못하면 슬럼이 될 거다, 이렇게 얘기하는 요상한 사람들이 꽤 많다.

 

한국의 도시계획 논의에서 슬럼이라는 개념을 전격적으로 들고 왔던 게, <슬럼, 지구를 뒤덮다>는 책을 한국에 소개하면서 내가 했던 일로 기억한다. 이게 돌고 돌아, 어느덧 다가구주택 밀접지를 강남 스타일의 인간들께서, 곧 슬럼으로 될 곳으로 포장을 하고 계시더라, 이런 허무한 결과.

 

그 시점에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런 질문을 다시 해보게 되었다.

 

명박 시대가 근혜 시대로 넘어가는 것을 다른 식으로 보면, 강남 스타일이 한국을 뒤엎는 것과 같다. 그것은 한 편으로는 경제 패러다임의 전쟁이고, 정치적 패거리의 이합집산이기도 하지만, 시대미학을 둘러싼 전쟁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강북과 아름다움, 요런 질문을 진지하게 한 번 던져보게 되었다.

 

튼튼하게 엄마 젖 잘 먹고 크는 다른 두 마리의 고양이 중에 한 마리에게 강북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문제는, 또 다른 한 마리와 구분을 할 수가 없어서, 누가 강북인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3번째 아이는 아직 이름을 붙여주지 못했다.

 

아파트촌을 보면서 아, 아름답구나 생각하는 것과, 다가구주택 밀집지역을 보면서, 이게 뭐야, 곧 슬럼이 될 곳 아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 사이의 격차가 너무 크다.

 

강북이라는 질문 하나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슬금슬금 내 삶 속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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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녀석은 내가 검둥이라고 부르는 녀석이다. 지난 겨울에 큰 상처를 입었었다.

 

어쨌든 내가 알기로는 얘가 아기 고양이들의 아빠이다.

 

얘가 새끼 고양이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모른다. 그렇지만, 최근에 부쩍 마당 어딘가에서 움크리고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자기 아기들이 태어난 것 정도는 알고 있는 눈치이다.

 

원래 아빠 고양이는, 엄마 고양이와 함께 아기들을 돌보면서 지냈다. 그러나 중성화 수술 이후로, 새로운 새끼들이 태어나서, 이제 근처에 자주 오지는 못한다.

 

가끔 발치로 보기는 한다.

 

 

검둥이는 배가 많이 고팠던 것 같다.

 

보통 내가 있으면 잠깐만 먹고 금방 도망가는데, 오늘은 꽤 길게, 눈치보면서도 많이 먹었다.

 

길고양이들의 삶은 애달프다.

 

 

 

잠시 후, 마당 고양이들이 나타났다.

 

엄마 고양이와 검둥이가 같이 있는 걸 본지 꽤 오래된다.

 

올 초, 혼자 있던 아들 고양이를 밀어내고 마당을 차지하기 위해서 검둥이가 싸움을 걸었던 적이 있었다.

 

아들 고양이가 한참 밀렸는데, 엄마 고양이가 나타나자, 정말 무섭도록 밀어붙여서...

 

금방 싸움은 종결.

 

그 때 엄마 고양이가 바위 위를 얼마나 빠르게 뛰어다니면서 전투를 하는지,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덩치는 검둥이가 훨씬 크지만, 싸움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런!

 

바보 삼촌이 검둥이에게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요즘 아들 고양이는 아기 고양이들 준다고 뜯어놓은 특식들을 자기가 먼저 눈치도 없이 먹어버린다고 해서, 바보 삼촌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엄마 고양이는 얼마 전부터 눈이 진물르기 시작했다. 바이러스 질환이라고 해서, 사료에 약을 조금씩 넣어서 먹이기 시작한다.

 

안 아픈 고양이가 먹어도 상관은 없다는 약인데, 뭐, 바보 삼촌은 눈치 없이 낼름낼름 잘도 먹는다.

 

이런 바보 삼촌이, 검둥이에게 회심의 펀치를 한 방!

 

약하지만 분명한 메시지였다.

 

기분이, 어째 한 방 날릴 듯 싶두만.

 

너, 너무 많이 먹쟎아!

 

 

엄마 고양이가 있는 곳은, 새끼 고양이들이 쉬고 있는 뒤뜰로 가는 길목이다. 길목을 딱 지키고,

 

나름대로 녀석들은 진을 짜고 있다.

 

검둥이는 10분 정도 자리를 지키다가 떠났다.

 

 

한참 조용해진 다음에,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나왔다.

 

녀석은 영양 상태가 다른 두 마리에 비해서 안 좋다. 젖먹기 경쟁에서 밀린 건데, 그러다보니 일찍 자립심을 키우게 되었다.

 

얘는 엄마 젖을 맘껏 못 먹으니, 캔을 일찍 먹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하루에 두 번씩 캔을 따주기 시작했다.

 

벌써, 한 마리는 떠나보냈다.

 

작년에는 별로 신경 쓰고 않고, 알아서 잘 하겠지...

 

하면서 장마를 보내고 나니까, 가을 무렵에는 결국 한 마리만 살아남았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살아남은 게, 지금의 바보 삼촌.

 

 

아이고, 이 녀석 물 마시는 것 좀 봐라.

 

물통이 높아서, 한 발을 짚고 올라간다.

 

나중에 다 크면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내가 돌봐주는 동안만이라도 아프지 않고, 잘 자라기만을 바랄 뿐이다.

 

 

내가 아무리 잘 돌봐준다고 해도, 엄마만 하겠나.

 

엄마 옆을 지나는 녀석의 표정, 이 순간만큼은 자신만만하다.

 

 

오늘 한 건 해서 그런지, 바보 삼촌이 오늘따라 의기양양하다.

 

내가 밥값은 한다...

 

마당에서, 먹이를 덜 줄 수가 없는 게, 녀석들은 늘 배고프고, 부족하다.

 

대학 시절에 키웠던 엄마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아주 좋아했던 녀석인데...

 

새끼를 낳고 나서, 먹이를 늘려주는 걸 잘 몰랐다.

 

제일 강해보였던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데리고 어느 날 떠나버렸다.

 

먹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새끼들이 좀 더 자랐을 때, 엄마 고양이가 새끼들을 위해서 자기는 떠날 수도 있다.

 

그래서 부족하지 않게 주려고 하는데, 바보 삼촌이 낼름낼름 먹다가...

 

돼지가 되어버렸다.

 

어쨌든 오늘,

 

오 예, 바보 삼촌, 한 방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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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고양이는 '바보 삼촌'이라는 새로운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덩치는 엄마보다 더 큰데, 새로 아기 고양이들이 태어나게 되면서, 동생도 아니고 삼촌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되었다.

 

그래도 얘가 참 순박하다. 새끼 뻘인 동생들과 잘 지내고, 밥도 잘 양보한다. 틈틈히 핥아주기도 하고.

 

요즘은 형제들이 줄어서 그런 일이 잘 없지만, 어느 집에나 바보 삼촌에 대한 얘기들이 있었다.

 

얘가 딱 그 바보 삼촌의 이미지이다.

 

벌써 분가해서 자기 삶을 꾸렸을 나이인데, 여전히 엄마와 지내면서 새로운 동생들과 잘 지내는...

 

 

엄마 고양이는, 참 예쁘다. 그리고 지혜롭다.

 

어느 어미가 새끼를 키우면서 지혜롭지 않겠느냐마는, 고양이의 세계에서도 어쩔 수 없이 새끼를 버리고 도망가는 어미가 종종 있다.

 

집 마당이, 내가 개입해서 누군 살고, 누군 살지 말고,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자기들끼리 질서를 잡아나간다.

 

가두어놓고 키우는 게 아니라서, 갑자기 쎈 고양이들이 지금 사는 녀석들을 밀어내고 자기들이 터를 잡을 수도 있다.

 

처음에는 삼색 고양이 모녀가 살고 있었는데, 지금의 고양이들도 그렇게 먼저 있는 녀석들을 밀어내고 자리를 잡은 것이다.

 

시간과 여건이 허락하는 한, 지금의 엄마 고양이와 이 가족들을 오랫동안 보살피려고 한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새끼들이 이제 슬슬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도 아직 전부 모인 걸 보지는 못했는데, 지금까지 본 건 4마리이다.

 

작년에는 세 마리가 났다가, 결국 가을까지 버틴 건, 지금 바보 삼촌이라고 부르는 녀석 한 마리이다.

 

그때까지는 뜨문뜨문 먹이를 주다가, 먼저 떠난 두 마리가 너무 가슴 아파서, 겨울이라도 날 수 있게 해주자고 한 게 지금처럼 다시 대가족이 된 것이다.

 

 

멘붕이라고 부르는 삼색 고양이가 한 마리 더 있는데, 어제,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새끼 고양이들이 워낙 약해서, 잠시만 눈에 안 보이면 겁이 덜컥 나기도 한다.

 

엄마 고양이가 어련히 잘 알아서 챙기겠나 싶다가도, 새끼 때는 워낙 약하니까.

 

생각 같아서는 예방 접종도 다 맞춰주고, 그렇게 하고 싶은데, 괜히 잡는다고 지내는 걸 힘들 게 했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잘 몰라서.

 

 

 

 

 

엄마 고양이와 아들 고양이.

 

이제는 아들 고양이 덩치가 더 크다. 별 의미는 없는 사진이지만, 뒷뜰에서 해질 무렵이라, 왠지 느낌이 있게 나왔다.

 

갑자기 내 생각이 났다.

 

나는 장남으로 살아왔고, 어머니와는 대체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마도 내가 아는 한에서, 우리 집에서는 내가 처음으로 태어난 좌파였고, 그래서 난 늘 우리 집을 위태롭게 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햐, 정말 귀엽다.

 

노란 고양이 두 마리는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지금 같아서는 누가 누군지, 도저히 모르겠다.

 

알 듯 싶었는데, 막상 이렇게 보면 정말 모르겠다.

 

 

 

하여간 요렇게 발발거리고 돌아다니는 녀석이 현충일날 태어났다고 해서 현충이라고 부르는 그 녀석인 것 같기는 하다.

 

자기도 먹어야겠다고, 얼굴 들이민다.

 

똑같이 나온 녀석들이라도 발육 상태가 다 같은 건 아니다. 벌써 캔과 같은 습식 사료 정도는 먹는 녀석이 있고, 아직도 밖으로 잘 못 나오는 녀석도 있고.

 

 

진짜 열심히 먹는다.

 

어쩌면 녀석에게는 이건 생존이 걸린 문제일 수도 있다.

 

일요일 오후, 야옹구까지, 고양이 여섯 마리가 전부 자고 있었다. 오후에 잠시 외출을 했던 아내도 낮잠을 자고.

 

나 빼고는 이 집의 모든 존재들이 자고 있었다.

 

평온이라는 단어를 잠시 떠올렸다.

 

모든 평온은 일시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삶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헤쳐나가야 할 난관의 연속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잠시의 평온과 잠시의 행복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살면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런 걸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우린 너무 많은 걸 부여잡으려고 한다.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두는 것, 그런 잠시의 평온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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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행이 아닌 선택

 

퇴행(regression)이라는 단어가 있다. 나이를 뒤로 먹는다는 말로 표현할까? 하여간 무엇인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것을 만났을 때, 이런 퇴행을 겪게 될 수 있다.

 

총선은 아마 많은 사람에게 충격이었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렇다. 견디기 힘들었고, 미래에 대한 예상 자체가 고통스러웠다.

 

총선의 결과를 보고 제일 먼저 한 게, 대선 때까지 술을 끊기로 한 것이다. 맨 정신에 이 일들을 보는 게 힘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맨 정신이 아닌 상황에서 이 일들을 겪는 건 더 싫었다.

 

어떤 사람들은 멘붕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 말을 제일 적극적으로 쓴 사람은 김용민이었다. 그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좋든 싫든, 나 역시 그와 가장 가까이에서 그가 겪던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나쁜 일은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는 않는다. 이정희에서 이석기에 이르기까지, 진짜 기막힌 타이밍이다. 누가 그렇게 일부러 시간을 맞춘다고 해도 쉽지 않을 정도로

 

그냥 버티고 갈 때까지 갈 거라는 예상이야 누구나 할 수 있던 거였고, 역시 또 일은 그냥 그렇게 갔고,

 

금융 위기에 대해서 퍼펙트 스톰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거야말로 퍼펙트 스톰 아닌가 싶다.

 

솔직히,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 아무 말도 안하고 싶고, 아무도 안 만나고 싶고, 다 귀찮다이게 솔직한 심경이다.

 

뭐라도 분석을 하고, 데이터표라도 들여다 보고 있으면 뭐하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이라는 게, 원래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니니, 여기까지야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발만 더 나가면, 그때부터는 퇴행이다.

 

그 선이 애매하기는 한데, 멘붕을 거쳐 원상태 혹은 다른 또 어떤 상태로 진화하는 방식이 있고, 그냥 퇴행으로 가는 방식이 또 하나 있을 법 싶다.

 

이게 참 애매하다. ‘승화(sublimation)’라고 부르는 것과 퇴행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한 경계가 있을까? 이런 답답함을 예술과 같은 창작이나 창조적 힘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승화라고 부르는데, 그것과 퇴행 사이의 경계가 좀 애매하기는 하다.

 

하긴, 이 모든 것들의 기준이 되는 궁극의 답이라는 게 존재할 리가 없으니 말이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는 그 궁극의 답은

 

42라고 했다.

 

42? 알 게 뭐냐. 영문 소설명의 글자수를 다 더하면 42개가 된다는 얘기가 있지만, 그런 건 아닌 듯싶고.

 

어쨌든 현실에서 도망쳐 회피하고 싶은 일탈의 경계선이 어딘가, 그런 질문이 문득 들었다.

 

이 모든 게 김제남 손에 달려있다는데, 이거야 참.

 

김제남 마지막으로 본 게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아예 사람을 몰라야지, 너무 뻔하게 아는 김제남의 손에 달려 있다니, 그 사실을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힘들다.

 

혹시 핸펀에 김제남 총장 전화번호가 있나, 검색해봤더니, 이런 된장김종남 총장 전번이 나온다. 김제남, 김종남, , 내가 이런 ㄱㅈㄴ, 요런 이름의 머리글자를 가지신 분들과 같이 일을 했었구나요런 쓸 데 없는 생각을 하는 것도 일탈인가 싶다.

 

하여간 기막힌 타이밍으로, 모든 일은 기똥차게 꼬였다. 이젠 멘붕을 넘엉서, 일탈의 경계가 어딘가, 그런 걸 고민할 수밖에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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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 드디어 새로 태어난 새끼들을 만나게 되었다.

 

난 가장이라는 생각 자체를 별로 해본 적도 없고, 그런 식으로는 생각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밥을 하거나 밥을 주어야 하는 존재들은 계속해서 늘어간다.

 

이미 새끼들이 태어났을 거라고는 생각을 했는데, 굳이 찾아나서지는 않았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엄마 고양이가 갑자기 바짝 말라서 나타난 걸 본 건 며칠 전이다.

 

그렇다고 찾아 나서지 않은 것은... 내가 본다고 해서, 더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없고, 오히려 불편하게 할 뿐이다.

 

작년에 태어난 녀석들은 장마철 내내 마루 앞의 화단에서 울어댔었다.

 

지금 아들 고양이라고 부르는 녀석이 혼자 가을까지 살아남았다.

 

 

 

 

이 녀석에게는 현충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현중일날 처음 봐서 그렇다. 생일이 현충일인 셈이다.

 

어쨌든 첫 외출이었을 것 같다.

 

부랴부랴 뛰어가서 캔을 뜯어주었는데, 다 큰 녀석들이 먼저 먹어버리고 녀석에게는 찌그러기가 차례가 갔다.

 

우유를 갖다 줘야 하나, 뭘 줘야 하나 잠시 고민하는 사이,

 

캔에 낼름 달려둘어, 캔을 엎어버렸다.

 

그리고는...

 

이제 겨우 눈을 뜨고, 엄마 젖도 아직 다 떼지 않았을텐데.

 

 

누가 따로 가르켜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먹는다.

 

자세히 확인해보지는 않았는데 - 사실 확인할 길도 별로 없지만 - 수컷이 아닐까 싶다.

 

아마 아빠는, 역시 마당에서 살고 있는, 내가 검둥이라고 부르는 녀석일 거다.

 

얘가 수컷이 아니면, 아주 계산 복잡해진다.

 

 

 

현충, 그 이름은 복합적이고, 중의적이다.

 

막상 그렇게 부르기로 하고 나니, 이미지와도 나름 어울리는 것 같다.

 

 

그리고 두 번째 녀석.

 

얘는 삼색 고양이, 볼 거 없이 암컷이다.

 

사람들이 멘붕을 호소하는 시기에 태어났다는 의미에서, 멘붕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3년 전인가, 이 마당에서 삼색 고양이 모녀가 잠시 살았던 적이 있었다.

 

 

 

 

이것저것 생각할 틈도 없이, 얘는 그냥 성묘용 사료를 먹기 시작한다.

 

아빠가 한 덩치 하는 범상치 않은 녀석이었는데, 역시 강하다...

 

그리고 엄청 귀엽다.

 

 

이 가족의 족보가 좀 복잡하기는 한데...

 

어쨌든 엄마와 삼남매라고 해야 하나?

 

이제는 엄마보다 덩치가 더 커진 아들 고양이. 벌써 분가해서 나가는 게 일반적이기는 한데, 어쨌든 이렇게 한 가족이 되었다.

 

이사가는 날이 정확하게 정해지지는 않았는데, 가을이 끝나갈 때나 겨울이 시작될 때, 이사를 가게 된다.

 

몇 마리가 되든, 그 때까지 같이 사는 녀석들을 데리고 가려고 한다.

 

그 때까지는 지네들 살고 싶은 대로 살게 내버려두고.

 

중성화 수술에 대해서는 좀 복잡한 생각이 있는데, 어쨌든 이 경우에는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중성화수술을 시켜주고, 퇴원하면서 이사갈 집으로 데리고 가기로 했다.

 

이사가는 집은 지금 집에서 2킬로미터 약간 안되는 거리이지만, 고양이들이 알아서 찾아올 수 있는 거리는 아니고.

 

 

 

 

 

멘붕이라고 부르기로 한 새끼 고양이, 진짜 귀엽다.

 

두 마리 다 예방접종도 시켜주면 좋겠는데, 그건 별로 방법이 없다.

 

광견병도 문제겠지만, 철마다 고양이들 사이에서 유행병이 돌기도 한다. 예방주사 외에는 약이 없는 경우도 꽤 있는 걸로 안다.

 

 

엄마에게 달려가는 현충과 멘붕,

 

진짜 눈물 날 듯하게 감동적이었다.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이고, 다 소중한 것인가, 그런 생각을 어찌 안할 수 있겠는가?

 

 

새끼 고양이들이 마당에서 쉬고 있다.

 

쉽게 보기 어려운 장면이고, 또 쉽게 포착하기도 어려운 장면이다.

 

녀석들이 삶의 주인이 되어서 신나게 뛰어다니는 시간이 오래지 않아 올 것이다.

 

고양이들의 시간은 사람보다 짧다. 압축해서 시간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그래서 또 떠나보낼 때의 아픔도 있다.

 

처음 키웠던 엄마 고양이 생각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두 번의 새끼를 낫고, 겨울이 다 끝나가던 어느 날, 쥐약을 먹고 현관 앞에 쓰러졌다.

 

그 때는 정말 많이 울었었다.

 

내가 집을 나왔던 것이 거의 그즈음이었다.

 

 

 

삼색 고양이는, 엄청 귀엽다. 그리고 놀랍도록 씩씩하다.

 

나에게도 이렇게 어렸던 시절이 있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녀석을 보자마자 멘붕이라는 이름이 떠오른 것은, 도움이 될지 안될지 모르지만, 지금 멘붕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보낼 수 있는 작은 위로라는 생각이 들어서.

 

고양이는 금방 자란다. 가을이면 벌써 새끼 티를 벗고, 겨울이면 적어도 겉모습으로는 성묘와 구분하기가 어려워진다.

 

 

 

어쩌면 아직 만나지 못한 새끼 고양이가 한 마리쯤 더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걸어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엄마와 두 마리의 아기 고양이,

 

이 사진은 좀 공을 들여서 찍었다. 이런 모습을 살면서 몇 번이나 만나게 되겠는가.

 

막상 '명박 시대'를 제목으로 포토 에세이를 준비한다고 한 다음부터, 모티브를 찾지 못해서 몇 달 동안 좀 애먹고 있었다.

 

아내는 8월이 출산 예정이다.

 

아직까지는 출근을 하는 중이고, 바깥에서 식사를 잘 못해서 매일은 못하지만, 거의 매일 저녁을 준비하는 중이다.

 

원래 계획으로는, 요 맘때쯤 어떻게든 부탁을 해서 원자력 발전소 내부의 사진들도 좀 찍고, 화력 발전소의 발전기들도 좀 찍고, 그럴 예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꼼짝을 하기가 어렵다.

 

낮에 움직여서 아파트 재건축 현장 같은 데라도 좀 찍을 수는 있는데, fta 책 등, 그야말로 나도 일정에 쫓겨서 그렇게 하기도 어렵다.

 

작년까지는 출장도 많이 다니고, 특히 거의 매주 지방의 현장에 갈 일이 있었는데, 딱 포토 에세이를 준비하려고 하는 올해는...

 

뭐,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삶이 매일매일 이렇게 축하할 일로 가득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너무 오랫동안 우리는 뭔가 증오하거나 저주하거나, 미워하면서 그렇게 시대를 인식했는지도 모른다.

 

지칠 법도 하다.

 

오늘은 하루 종일, 새로운 탄생에 대해서 축하를 하면서, 미래를 기원하면서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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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똥풀이 한참 피어있다. 노란색이 워낙 많아서, 안하던 짓을 해보았다.

 

삶이라는 것은, 그냥 아름답거나, 그냥 추한 것만은 아니다. 모든 것은 복합적이고, 다면적이다.

 

그 속에서 한 가지 속성을 드러내는 일, 그게 학자들이 주로 하는 일이다.

 

요즘 송도 신도시와 새로 분양되는 보금자리 주택에 대한 생각을 좀 많이 하는 편이다.

 

아파트 분양할 때, 이것저것 사기치는 얘기들을 업자들이 많이 한다.

 

그 최고의 결정판, 어떻게 보면 한국판 디버블링의 클라이막스에 송도 신도시가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나는 해운대가 그 클라이막스가 될 거라는 생각을 계속 했었는데, 송도에서 벌어지는 사기극에 비하면 해운대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일단 10년만 참고 견디면, 송도가 분당도 되고, 일산도 된다는데...

 

요코하마에 가보지 않았다면,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요코하마의 크고 작은 신도시를 채우기 위해서 요코하마가 했던 눈물나는 노력들.

 

그런 뉴스들을 모아서 계속해서 추이를 보고, 가격 지표 같은 것을 찾아보고, 유사한 다른 나라의 도시들에 대해서 점검을 하고...

 

그리고 내 생각을 정한다. 그리고 다른 뉴스가 있으면 다시 업데이트 하고.

 

송도 얘기하는 사람들에게, 속으로 해주고 싶은 얘기가... 목동을 보라. 목동 아파트 가격 내려가는 것이, 그보다 열등지인 다른 모든 아파트들의 미래가 아니겠나 싶다.

 

동경에서 얼마 전부터 은행에서 그냥 살기면 하면 지원금을 주기 시작한다고 들었다.

 

스톡으로 은행에서 붙잡고 있는 집들은 사람이 안 살면 금방 황폐해진다. 달리 스톡을 처분할 길도 없고, 그렇다고 가까운 시간 내에 대대적인 정책이 나올 가능성도 없고.

 

결국 은행에서, 큰 돈은 아니더라도 그냥 살아주기만 해도 돈을 주는 순간이 오게 되었다. 동경에서 본 게 그런 거다.

 

송도, 정말 택도 없는 얘기이다. 평당 가격으로 비교해보든, 거리로 비교해보든, 성공했다고 치고 단지가 살만한 순간이 되는 시간을 놓고 봐도, 택도 없는 가격이다. 밑바닥을 쳤다고 업자들이 말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택도 없다.

 

그렇지만 다만 가격을 놓고 송도의 업자 마케팅이 한국 버블의 클라이막스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10년을 잊고 지내면..."

 

사람이 살아야 얼마나 살겠는가. 삶에서 10년은 그냥 처박아놓고 버릴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양이들을 본다.

 

엄마 고양이는 벌써 나와 두 번의 겨울을 같이 났다.

 

평균적 길고양이의 수명으로 치면, 아무리 내가 애지중지 키우더라도, 이번 겨울을 나기가 확률적으로 어렵다.

 

가을이 되면, 아들 고양이와 엄마 고양이, 중성화수술을 해주고, 새로 이사가는 집으로 데리고 갈까, 고민이 많다.

 

엄마 고양이는, 이번 여름과 이번 가을이, 어쩌면 살아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일지도 모른다.

 

아파트 투기를 위해서 인생의 10년을 포기하라...

 

이 정도면 이제 업자들의 투기 충동질이 거의 막장까지 온 거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래서 테제 하나를 바꿨다.

 

한국의 디버블링은 해운대에서 시작한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아마 송도에서 시작하게 될 것 같다...

 

이런 계산을 막 하고 있다가 엄마 고양이를 보았다.

 

생명의 아름다움, 삶의 존귀함,

 

그런 얘기를 혹시라도 송도에 가서 10년을 참고 버티면 뭔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었다.

 

길고양이 한 마리라도 보살피다보면, 투기꾼들이 말하는 시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배울 수 있을 듯 싶다.

 

 

고양이가 웃는다.

 

그 웃음은 나에게 평온을 준다.

 

송도의 10년, 그건 아무에게도 어떤 평온도 주지 못한다.

 

송도의 평당 1,200, 길고양이 한 마리 만큼의 가치도 없는 수치이다. 나는 그렇게 이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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