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윤의 ‘마술 라디오’
1.
아기가 태어난 다음에, 정말로 책 한 권 제대로 읽기가 어려워졌다. 늙은 아빠가 아기를 어떻게 볼지도 잘 모르겠고, 너무너무 힘 좋은 아들한테 휘들리다 보면 정말이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녹초가 된다.
게다가 요 한 두해 사이에, 정말로 책을 읽기 어려울 정도로 노안이 심해졌다. 책을 거의 보지를 못했다.
전공과 관련된 책들, 내가 하는 일과 관련된 책들은 그 와중에라도 정말로 억지로 억지로 읽었는데, 그냥 읽은 책은 거의 없었다.
그 동안에 그림책, 동화책은 엄청나게 읽었다. 뭐, 딱히 읽을려고 한 게 아니라 아기가 책을 수북히 들고 와서 읽어내라고 순 땡깡이니.
어쨌든 아기가 태어난 이후, 아기를 옆에 보면서 읽은, 전공과 관련되지 않은 첫 번째 책이 바로 정혜윤의 ‘마술 라디오’였다.
막 책 작업을 하나 끝내고, 며칠 여행을 다녀오고 싶었지만, 둘 째 아이를 기다리며 만삭인 아내와 한참 깽판 모드로 들어간 아직 두 돌 안 된 아들 사이에서 여행갈 틈바구니는 생기지가 않았다. 그래서 여행 대신에 쇼파 근처에 있던 책 중에서 되는 대로 손에 잡히는 걸 먼저 읽기 시작했는데, 그게 딱 이 책이었다.
(사실은 아직 출간되지 않은, 파일 상태의 책과 함께 동시에 읽었다. 이제 막 저자로 데뷔하려고 하는 어떤 선배의 책과 같이 읽으니, 너무 비교가 되는… 큰 일이다. 추천사를 써줘야 하는데…)
2.
정혜윤의 책은 이전에도 몇 권을 읽었다.
정혜윤과 나는, 독서가 정반대인 스타일일 지도 모른다. 내가 읽은 책은 그가 읽은 게 거의 없고, 그가 열심히 소개하는 책은, 이번에는 내가 읽은 게 별로 없다. 아주 고전이거나 유명한 소설이 아니면, 어쩌면 그렇게 서로 겹치지 않은 독서를 하는지.
어쨌든 그가 소개하는 수많은 책 속에 있는 그 기막힌 구절들을 보면서도, 언제 이런 책까지 다 읽어, 워매, 나는 못 읽겠네, 그랬다.
어쩌면 그렇게 책을 많이 읽었든지, 그리고 어지간해서는 잘 보지 않을 예를 들면 중남미의 한 구석에 있는 소설가라든가, 별로 유명하지 않은 유렵의 작가라든가, 그런 걸 어쩌면 그렇게 살갑게 잘 소개해주는지, 그냥 놀랄 따름이었다.
내가 읽는 전화번호부 만한 책들은, 우리나라에서 몇 명 봤을까 말까한, 그런 캐캐묵은 고전들이거나, 특정한 분야 한 구석에 처박힌 책들이다. 힘들어도 참고 읽지만 굳이 소개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반면에 그가 읽은 책들은, 뭐 이 정도는 읽어줘야 하는 거 아니겠어, 그런 예를 들면 문학 상식과 같은 것들인데, 나는 들어본 적도 없는 작가들의 얘기들이다.
아, 원래 내가 좀 무식하지…
그런 마음으로, 진짜 책 소개해주는 여인의 글을 보듯이, 그렇게 봈다.
정혜윤에게는 좀 미안한 얘기지만, 읽으면 좋겠지만 그렇게까지 다 읽을 여유가 안 되어서.
3.
이번 책, 정혜윤의 ‘마술 라디오’는 그 이전의 책들과는 전혀 다르다. 이번에도 수없이 많은 책들이 구속구속 글귀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얘기의 핵심은 그가 만난 사람들의 얘기들이다.
처음에는 아기 무릎에 앉혀놓고 설렁설렁 읽으려고 했다. 본인이 본문보다 더 길 것이라고 한 프롤로그는, 그야말로 아기 보다 잠시 틈을 내서 보는 아기 아빠들이 볼 글이었다. 전혀 긴장하지 않고, 나처럼 기능적으로 일단 읽어나가는 사람의 시선을 끄는 것과는 좀 다른. 그러나 나 같은 사람의 특징은, 정말로 책이 재미없어지기 이전까지는 어지간해서는 앞부터 뒤까지 다 읽는다는…
본문이 시작할 때까지도, 나는 내가 어떠한 종류의 책을 읽고 있는지 잘 몰랐다. 라디오 얘기를 하고, 기억 얘기를 하고 그러는데, 그거야 라디오 PD니까 당연한 얘기고, 내가 읽지 않은 책의 귀절들을 자꾸 들어보라고 하는 것도 이전 책과 같고. 아마 내가 참을 성 있는 독서가가 아니고, 또 어지간하면 일단 읽기 시작한 것은 기계적으로 다 읽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50페이지가 넘는 프롤로그 그 어디에서인가, 사실 난 바쁜 사람이야, 이러고 책을 덮었을 것 같다.
50페이지를 조금 넘어서, 본문이 시작되면 책은 돌변한다.
이건 책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내가 만난 사람들에 관한 얘기라니까 말이다.
이 책은 14개의 에피소드에 관한 책이다. 장서가이거나 독서가가 아니라면, 정혜윤의 프롤로그는 과감히 생략하고 첫 번째 에피소드부터 바록 시작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인 독서일지도 모르겠다.
눈물 끝을 몇 뻔 뽑고나서, 차분하게 다시 프롤로그를 읽어도 좋을 테니 말이다.
4.
정혜윤이 던져준 에피소드는, 한 마디로 대박이다. 본 얘기로 들어간 다음에 몇 페이지 안되어서 나도 울기 시작했다.
이 책 최고의 문장은,
“그건 내가……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몇 개의 에피소드를 읽고 만약 눈물이 안 나거나 최소한 찡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면, 자신이 살아온 삶을 한 번쯤 곰곰이 반추하는 게 좋을 듯 싶다. 하여간 첫 번째 에피소드는, 적어도 한 번쯤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눈물 없이 그냥 넘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찡하다. 그리고 그런 얘기들이 연타발로 나온다.
그 뒤쪽의 얘기는, 이제 아주 무겁다. 너무 허망하게 첫 사랑을 날려버린 사나이의 얘기에서는 이제 분노가 일기 시작한다.
사랑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사랑에 대해서 회상하는 것, 나는 솔직히 구역질을 느꼈다. 아마 작가인 정혜윤도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소중한 것이 소중한 것을 모르는 사람, 그러면서도 태연덧하게, 괜찮아 나는 느낀 게 있고, 배운 게 있으니…
5.
정혜윤이 우리에게 던져준 14개의 에피소드들은, 하여간 사람이라면 동질감을 느끼거나 반발심을 느끼거나, 외경감을 느끼거나, 어쨌든 감정의 움직임을 만들어낼 만한 사례들이다.
그런 걸 안 느꼈다면?
문창극이냐?
이걸 다 읽고 난 느낌은, 앞으로 정혜윤은 뭘 가지고 글을 쓸 것이냐, 이렇게 자기 뒤에 있는 평생의 감정들을 다 털어내고 난 뒤에. 그런 느낌이 잠시.
허겁지겁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 사실 좀 후회했다.
이런 책은 화장실에서 하루에 몇 페이지씩 읽어내려가는 게 맞는데, 손에 잡힌 김에 읽는다고, 죽어라고 읽어내려간 나의 허겁지겁이 재밌는 책 한 권을 허망하게 소비해버린 것이 아닐까 싶은.
책을 접고 나서, 나는 이만한 14개의 에피소드가 있을까? 이 정도의 얘기라면, 나는 한 개에서 두 개 정도를 알고 있지, 그 이상의 얘기를 알고 있지는 못하다.
직접 만나 본 사람들에 관한 기막힌 이야기, 사실 우리 같은 사람이 살면서 그런 걸 몇 번이나 만나겠나.
6.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의 괴리.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라디오에서 음악 틀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여전히 그런 소망이 있는데, 이제 내 삶은 그런 곳에서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런 어린 시절의 아련한 기억들을 정혜윤의 책과 함께 다시 만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