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생의 지식’ 감상문
1
아기 키우기 시작하고는 정말로 거의 책을 못 읽었다. 내 인생에 이렇게 길게 책을 못 읽은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뭐, 1살 미만의 아이들이 보는 동화책은 여러 권 읽었다. 아기 읽어주느라고.
하여간 그 와중에 유일하게 읽은 책이 화장실에서 보는 책이었다. 어차피 화장실에서는 계속 책을 보니까.
민음사에 나온 ‘한 평생의 지식’이라는 책은, 아마도 내가 읽은 책, 아니 한글 책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붙잡고 읽은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처음에는 뭐, 그렇게 깊게 선택해서 본 책은 아니었다. 아무 거나 식탁 위에 잡히는 대로.
2.
아주 솔직하게. 100% 그런 건 아니지만, 저자들에게 글의 품질은 원고료와 어느 정도는 비례한다. 그냥 보람으로 알고 좋은 글을 달라, 뭐 보람은 가지만 여러 가지로 여건이 잘 되지가 않는다. 그러나 작지 않은 돈을 조금 더 신경을 쓰기 시작하고, 아주 많은 돈을 주면, 인지상정, 당연히 더 신경을 쓰게 된다.
‘한 평생의 지식’은 내 글도 들어가 있는데, 생각보다 작지 않은 원고료를 받았다. 물론 나도 아직 외부에 쓴 적이 없는 내용을 상당 부분 집어넣었다. 나중에 농업경제학 같은 데 쓸려고 꼬불쳐놓고 있는 내용을 동원. 사람이란 그런 존재가 아니던가?
나꼽살 할 때는 돈과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건 제한된 기간에 모든 것을 폭발시키는, 그런 특별한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고.
이 얘기를 먼저 하는 건, 우연치 않게 잡았던 책 치고는 정말 많은 걸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돈이 생각보다 많은 걸 설명해준다.
3.
여럿이 나누어서 쓰는 글은, 꼭 내용이 부실한 것은 아닌데,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책 판매상으로 아주 불리하다. 책이라기 보다는 왠지 자료집 같이 느껴지고, 그러다 보니 어디에선가 PDF 같은 걸로 그냥 받을 수 있다고 느껴지고.
그런 걸 돈 주고 사려니, 당연 마음 속에 아까운 생각이 드는 거 아니겠는가?
‘한 평생의 지식’은 그런 느낌을 준다. 게다가 또 하나 치명적 약점이 있다
민음사 박맹호 회장의 팔순을 기념하며 기획된 책… 원로 교수의 은퇴기념 논문집 혹은 고희 기념 제자들 논문 모음집, 이런 걸 돈 돈 주고 사는 사람도 있나? 듣기만 해도, 별로 안 보고 싶어지는 느낌이 드는 책.
‘한 평생의 지식’은 정말로 사람들 손에 집히기 어려운 두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야말로 가지가지 한다, 그렇게 말해도 이상하지 않다.
이런 내용을 담은 서문을 보면 이 책을 사고 싶다는 생각이 절대로 안들 것 같고, 조금 민감한 사람이라면 읽기도 싫어질 것이다.
솔직히 나도…
서문 읽자마자, 좀 자세히 상황을 알아보고 글을 썼어야 한다는, 아뿔싸… 그런 생각마저 들었었다.
얼굴도 본 적 없고, 누군지도 잘 모르는 박맹규라는 사람의 팔순을 기념해서 내가 글을 썼다니, 이 뭔 꼴이고. 원고 청탁 과정에서 그런 얘기는 나는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알았다면 미칬나, 그러고 안 썼을 것 같다.
4.
그러나…
‘한 평생의 지식’은 무엇인가 삶의 변화를 생각하거나, 뭔가 고민이 많거나, 아니면 자신을 한 번쯤 돌아봐야 하는 사람이라면.,
자연과학의 한 극단에 있는 얘기에서 철학의 한 극단에 이르는 얘기까지, 아 요즘은 사람들이 이런 걸 고민하는구나, 그런 걸 살펴보는 용도로는 딱이다.
보통은 엄청 무거운 톤으로 글을 썼을 법한 사람들도, 할 수 있는 한 어깨에 힘을 뺀 상태로 status of art, 나름대로 이 정도는 우리가 좀 알아줘야 하지 않겠나, 그런 걸 알려준다.
부담스럽지 않다. 그리고 자기가 이미 아는 얘기를 한다 싶으면, 그냥 다음 글로 넘어가면 된다. 옴니버스식 구성이 주는, 씹다 버린 껌 같은 가벼움 같은 미덕은 가지고 있다.
간만에 책값보다 10배 이상의 값어치는 한다고 생각하는 책을 만났다.
이번 겨울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으로, 그야말로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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