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이 된 내 성격에 좋은 점이 있다. 패닉이 없고, 분노가 없다. 잠깐 택배 받는 사이, 애들 양 쪽으로 기저귀 떼고 마루에 똥 싼 것을 당황하지 않고 해결한 이후, 내 인생에 패닉은 없어졌다. 포기할 건 포기하고, 포기하지 않을 건 최대한 되게 하고. 그리고 분노하지 않는다. 분노의 힘으로 뭔가 일을 할 나이도 지났다. 내 안에 더 이상 분노도 없고.. 좋은 점을 좋게 생각하고 고마워하는 동안, 분노가 사라져버렸다. 물론 그렇다고 감정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뒷끝은.. 있다.
DJ 정부의 초대 경재수석 하셨던 김태동 선생과 간만에 점심 식사. 책도 한 권 받고, 나도 새 책 인사도 드릴겸. 소설 '모피아'의 첫 모티브가 그날, 왜 김태동이 경질되었는가, 여기에서부터 시작했었다. 역사의 미스테리다. 알아본 바, 아무도 모른다. 뭐, 알기냐 하겠지만,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게 맞을지도.
나도 나이를 먹는다. 더 이상 30대, 불같던 소장파도 아니고. 이제 50이 넘었다. 30대 때, 지금 생각해도 나는 탸협의 여지가 전혀 없던 불같은 성정이었다. 청와대 근무, 한 마디로 "싫어요" 했다. 지금은 배 나왔다. 이제는 다른 이유로, "싫어요, 내가 왜?". 불같은 성정은 사라졌고, 까칠함만 남았다..
평균적 가계 기준으로 월 생활비 400만원, 실제로 우리 집이 한 달에 그 정도 돈을 쓴다. 물론 아내가 극단적으로 돈 쓰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고, 나도 주머니에서 돈이 막 나가는 편은 아니다. 그 정도 내에서 틈틈이 외식도 하고, 거의 매달 짧더라도 여행을 떠난다. 일년에 두 번 정도는 해외 여행도 한다. 나도 한 달에 동료들 한두 번은 술 사준다. 월 400~500만 원 사이, 내가 맞추려고 하는 생활의 수준이다. 낮추려면 더 낮을 수도 있는데, 그러면 책값이나 DVD 비용 같은 것을 줄여야 한다. 그렇게까지 줄일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큰 애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다. 이 앞에 있던 몇 가지 선택들은 그렇다 치고, 이제 진짜로 사립학교 보낼지, 그냥 동네 학교에 보낼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제일 큰 건 애들 등하교 문제다. 그런 거 아니면 고민을 시작할 일도 없다. 국공립 초등학교에는 등하교 버스가 없다. 사립은 버스가 온다. 출근하는 아내 입장에서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은 어린이집 등하원을 내가 시키고 있는데, 언제까지 이러기도 힘들다고 아내는 생각한다. 나야, 어차피 특별히 하고 싶은 것도 없는데, 그냥 이렇게 살아도 별 상관 없다.
제도적 기원을 보면, 버스회사들 요즘은 마을버스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이재정이 경기도 교육감 되자마자 초등학교에 스쿨버스를 투입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마을버스들이 난리가 났다. 아이들 등하교 시간이 고객 줄면 망한다고.. 결국 없던 일로 되었다.
보통 초등학교 3학년 정도 되어야 아이들이 혼자서 버스 타고 등하교 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그 전에는? 이건 초등학교만 그런 것도 아니다. 사립유치원 등 사립자 들어가는 어린이집 같은 데에는 버스 운용을 다 한다. 그런데 국공립 그야말로 ‘버블릭’ 글자만 들어가면 옴팡, 부모가 뒤집어 써야 한다. 그리고 그것만 하는 직업이 활성화되어서, 등하교 전담 도우미.. 이거 왜 이래?
버스회사와 마을버스 로비의 벽을 공무원들이 못 넘어선 거다. 지금 사립 유치원 사태 보다는 훨씬 고치기 쉬운 일인데… 진짜로 진보 교육감이라고 하던 사람들, 뭐하고 계시는겨? 박근혜 정부 때에는 국토부의 협력이 어렵고, 지자체에서 반대한다고 했다. 지금은 김현미 아냐? (설마 현미 누님이 반대할라고..)
여기에 사립이 좋은 점은, 이건 진짜 관점의 차이이기는 한데, 엄마들 오라가라 하는 게 없다는. 요즘은 국공립도 많이 줄기는 했는데, 여전히 “자기가 오던지, 사람을 사서 보내든지”, 이렇게 말하는 선생님이 불과 최근까지 목격된 바가 있다. 일하는 엄마 입장에서, 자녀의 ‘우월한 교육’은 차지하고, 최소한 이 두 가지의 실용적 목적 때문에 사립학교를 보낼지 말지, 고민을 하게 된다.
우리 집도 고민을 했다. 아내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했다. 나야 그냥 내가 애들 데리고 다니면 된다고 생각하니까, 이러거나 저러거나 별 생각이 없었는데, 아내는 끝까지 고민을 했다.
2.
사립학교에 다니는데, 방과후 프로그램까지 이것저것 부대비용들 넉넉하게 잡아보니까 월 150만 원 정도 한다는 것 같다. 영어유치원 한 달 비용이, 교제값과 등하교에 들어가는 추가적 시간까지 해보면 얼추 그 정도 된다. 그러니까 꽤 많은 집은 이미 지난 2년 동안 이 돈을 들였을 수도 있다. 어차피 드는 돈, 이미 각오했어!
간단한 산수를 해보았다. 간단하게 월 백만 원이라고 치면 6년간, 기계적으로 7,200만 원 나온다. 이자비용 감안하면 8천만 원, 이것도 최소 비용으로 잡은 것이다. 거기에 아이가 둘, 1억 8천.. 잠깐잠깐, 이건 돈이 너무 크다.
중학교 들어가기도 전에 아이들 둘 교육비로 1억 8천, 까딱하면 2억, 이건 뭐야? 이걸 그냥 등하교가 몇 년 어렵다고 태워? 태워 버리기에는 돈이 너무 크다. 공교롭게도 열 살까지, 스무 살까지 증여세 없이 증여할 수 있는 돈과 거의 비슷하다. 이걸 그냥 등하교 좀 편하게 하자고 허공에 태우자고? 뭘 위해서 태우는데?
두 아이들 중학교 들어갈 때, 둘의 공동명의로 2억 가까운 돈을 마련해줄 수 있다면? 설령 걔들이 나 닮아서 뻑하면 학교 그만두고 싶어할 텐데, 그래도 조그만 가계라도 갖고 싶다면 그걸로 뭔가 되는 거 아녀?
이런 고민하고 있을 때 박용진이 사립유치원 문제를 터뜨렸다. 아내는 사립 초등학교는 사립유치원보다 더 무서운 존재일 거라고, 연방 뉴스 터지는 걸 보면서 사립학교는 접었다. 아내 성격상, 분명 비리를 보면 학교랑 싸우고 결국 전학가게 될 것 같단다. 어내는 사립학교 추첨 서류를 쓰는 대신, 회사에 내년 3월에 한 달간 육아휴직 쓰겠다고 통보했다. 초등학교 첫 달에는 방과후 학교가 없다.
교육을 전담하는 조희연은 대체 뭘하고, 박원순은 뭐하고 있는겨? 교통을 담당하는 김현미는 뭐하고 있는겨? 초등학교 저학년을 위한 통학버스 마련이 그렇게 힘든 일인가? 에쿠스, 그랜져, 이런 대빵용 관용차 몇 대만 모닝으로 바꿔도 그 정도 돈은 나올 거 아닌가벼?
말로 다 안 해서 그렇지, 김현미 삽질, 조희연 삽질, 기타 등등 장관들 삽질, 이거 보고 있으면 진짜로 속에서 열불 난다. 정말 이상한 것은 개인들이 최소 1억 원 이상 추가로 지불하게 되는 이상한 제도의 공벽이 너무 많다는 점. 이리저리 남들 하는 대로 하면 자녀당 2억이 뭐냐, 대학 졸업 때까지 5억이 넘게 들게 생겼다.
그만큼 쓰면서 병신 짓을 하던지, 아니면 그만큼 미안해 하던지..
난 맘 먹었다. 다음 번 교육감이랑 서울시장 선거에서 다 필요 없고, 초등학교 스쿨버스 공약 거는 넘 찍을 거다. 애 둘에 2억 원이 걸린 일이다. 쓰거나 말거나, 그게 취향과 소신에 따른 선택이 되는 게 맞지, 애들 등학교를 위해서 그걸 쓰는 게, 이게 좀.
3.
내가 도시민 월 평균 소득인 4천만 원에 평균적 가구의 생활비를 맞출 수 있도록 제도들이 정비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꼭 중산층만을 위한 기준은 아니다. <살아있는 것의 경제학>이라는 책에서 정리했던 생각이 있다.
최저임금 만 원이면 유휴수당까지 넣어서 환산하면 대략 월 208만원 정도 된다. 물론 그렇게 안 하겠다고 지금 정부도 이것빼고 저것빼고, 아주 생난리 중이기는 하다. 주 40시간 노동에 최저임금 만 원 받는 남녀가 만나서 가정을 꾸리면 416만 원이 된다. 최저임금 커플이 사랑을 하든, 같이 살든, 아니면 서로 지지고 볶거나, 그건 자기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내가 하는 계산은 과연 그들이 아이를 낳고 살아갈 수 있느냐, 그 기준에 대한 계산만.
정상적인 – 혹은 중산층틱한 – 남녀가 월 400만원으로 살아갈 만한 나라를 만드는 것, 그것이 최저임금 커플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주거부터 문화까지, 그 정도 수준에서 설계가 안 될 이유가 없다. 안되는 것은? 청와대에 돌대가리들이 자리 차고 앉아서 그렇다, 그렇게 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 아니면 총리라도 좀 토건질 그만하고 머리 빠릿빠릿하게 돌아가는 사람을 앉히던가. 청와대는 돌대가리, 총리는 토건에만 용감하신 분, 에 또..
그러니 마을버스 업자들에게 막혀서 초등학교 스쿨버스 문제 하나도 해결 못하는, 토건의 나라, 업자의 나라, 이런 게 된 거 아니냐? 대형 학원이나 사교육 자본의 힘에 막혀서 못했다, 그러면 안타깝더라도 설명이나 되지. 마을버스 로비에 학교에 스쿨버스를 못 보낸다, 이게 말이 되는가?
최저임금 커플 416만 원, 아직은 미래의 수치다. 내가 이 정도를 정책 설계의 기본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문화 경제라는 또 다른 축 때문이기도 하다.
최저임금 우습게 보지만, 한국의 수많은 작가나 연구자, 화가 등 예술가, 최저임금 근처에도 못 간다. 뭔 일을 해야 최저임금이라도 받지, 괜히 쿠사리 당하고, 쫑코 맞고, 툭하면 성폭력성 언어폭력에 시달리는 사람들, 최저임금 한참 언더다. 요즘 책 안 팔린다고 작가들이 난리지만, 그래도 어른들 보는 책 쓰는 사람은 욕이라고 하지. 어린이책, 동화책 작가들은 산 입에 거미줄 치는 정도가 아니라 길고양이 사료까지 집어먹게 생겼다. 유학생 시절에 너무 배가 고파서 고양이용 사료를 사다가 먹고 나중에 정신적으로 심하게 흔들리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이게 지식과 문화의 현장에서 지금 한국 현실이다. 그들에게는 416만 원도 넘사벽, 크다.
4.
약간 심통성 정책을 제시하면서 세 번에 걸친 돈에 관한 얘기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한국의 평균 가정이 살아가는 데 월 평균 얼마가 필요할까? 400만 원에서 500만 원 사이로 계산될 것이다. 해마다 조금씩 올라가기는 하지만 하여간 도시민 가계평균 소득이 한국에서 그 정도다.
경제 관료는 국장급 이상, 나머지 관료는 1급 실장급 이상, 연봉을 전부 거기에 맞추면 어떻게 될까? 경제 부처 기준으로, 과장까지는 생활형 공무원, 그 이상은 정무급.. 3급부터는 자기들이 생각하는 한국 경제의 생활인에 대한 정상 임금을 정해서, 월급으로 그 돈을 받게 하자. 그러면 자기들이 편하려고 어떻게든 생활의 낭비 요소들을 줄일 거 아니냐? 다른 부처 공무원들도 1급이 되는 순간, ‘국민 정상임금’을 받게.
그러면 5년 안에 한국은 월소득 4백으로 “나는 매일매일 행복해서 죽겠네”, 이런 비명 소리가 튀어나오는 나라가 될 것이다. 실제로 많은 국가의 고위직 공무원들이, 그렇게 연봉이 높지가 않다. UN의 과장급 이상 고위직들, 뉴욕이나 런던 같은 데 가라고 하면 곡소리 난다. 에고에고, 이 돈으로 어떻게 사나..
대통령, 총리, 장관, 이런 높으신 분들 연봉도 월 400에 맞추면 좋은 것 같다. 그 대신 이 아저씨들은 명예가 있쟎아. 공무상 더 필요할 돈은 업무추진비 빠방하게 늘려주고. 다만 생활은 이 수준에 맞추어서. 국회의장 등 국회의원들 세비도 이 수준에 맞춰서.
경제학자로서, 가급적이면 나도 도시 가계생활비 평균치를 넘지 않는 선에서 생활을 꾸리려고 한다. 그래야 나도 다른 사람 앞에서 당당하다. 그리고 그렇게 살면서 애 키우다 보니까, 생활의 어려움이 좀 보이기 시작한다. 총리나 장관, 이런 똑똑하신 분들 눈에는 얼마나 잘 보이겠냐?
월 400만 원으로 행복한 나라, 그건 개인이 돈 더 벌어서 풀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풀어야 할 문제다. 그리고 실제로 1인당 국민소득 7만 달러, 8만 달러 가는 나라들이 다 그 정도 선에서 어느 정도 살 수 있게 시스템 설계가 되어 있다. 월 4백 대통령, 이거 못할겨? 이건 그냥 결정헤서 하면 되는 거다.
(경제학자로서 내가 느낀 촛불에 대한 감성이 존재한다.. 그걸 정치적 욕망으로만 느낀 낀 사람들, 좀 거시기하다..)
1.
둘째는 태어날 때 숨을 잘 못 쉬었다. 조선 시대 같았으면 아이와 산모가 다 위험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시절에 나는 그야말로 나는 박근혜랑 싸운다고 정신이 없었다. 실제로 박근혜가 아니라 순실이랑 싸우고 있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이것저것 막는다고 나름 고심을 했는데, 남양주 종합촬영소가 매각되는 것은 막지 못했다. 부영건설에 팔렸다. 순실이가 영진위를 장악하고 해쳐 먹었다. 너무 소리소문 없이 성공한 작전이라, 나도 사후에 알았다. 원전 등 에너지 쪽도 순실이가 꽤 손을 뻗쳤다. (나중에 그 앞잡이로 소문난 양반이 나한테 전화해서, 자기는 억울하게 연류된 거라고 했다.)
시대는 어두워지는데, 내 삶이 더 먼저 어두워지고 있었다. 아내는 얼마 전에 차장으로 승진했었다. 결국 폐렴을 달고 사는 둘째 때문에 퇴사했다. 방법이 없어서 가사 도우미도 쓰기 시작했다. 그 때 보니까 우리 집이 한 달에 500만 원 정도를 평균적으로 쓰는 것 같았다. 물론 이것저것 더 줄일 수도 있지만, 병원비 등 늘어날 돈도 있으니까 평균 내면 그 정도일 거라고 생각한다. 자동차 사고 유지하는 돈까지 전부 합쳐서 계산하면 그 정도 된다 (많은 사람들은 생활비 계산할 때 승용차 구입비 등을 빼놓고 계산하는 경향이 있다.)
많이 쓸 때는 한 달에 500만원, 요즘은 400만원 정도 쓰는 것 같다. 이 정도 선이 도시가계 평균 소득과 얼추 비슷하다. 요 정도 삶이 국민소득 말고 소득 쪽으로 잡은 평균치 정도 된다. 말이 좋아서 한 달에 500이지, 이걸 연봉으로 환산하면 1억 원 정도 된다. 1억 원을 받아본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연봉 1억이면 대충 한 달에 천 만원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았다. 연봉 1억에 이것저것 떼고 평달이면 500만 원 조금 넘는다. 실소득 중심으로 계산을 하면 뭐가 많이 빠진다. 아파트 평수 계산할 때 실평수로 들어가면 전혀 다른 숫자가 나오는 것과 유사하다.
내 머리 속에 있는 수치는, 아이 둘 데리고 월 400만 원 정도면 충분히 많다는 정도다. 아이가 아프거나 뭔가 복잡한 일이 생겨서 돈이 더 들어가면 월 500만 원, 그리고 이게 3만 달러 시대의 한국의 도시의 평균적 가계가 실제로 사용하는 돈이기도 하고.
2.
국가를 설계하는 방식이 있다. 내가 설계한다면 한 달에 400만원 정도 버는 가정이면 풍요롭지는 않더라도 풍족하기는 하고, 넉넉하지는 않더라도 남한테 손 벌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 실제 평균치도 이 정도가 평균치다. 그 나라의 평균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니미, 이렇게는 못 살겠다”, 이렇게 입에서 욕 막 튀어나오면 그건 식민지 수준의 경제 행정이다. 유럽의 평균치 가정에 방문하면, 너무 화려하지는 않아도 이케아 가구 같은 것은 손가락질 당한다고 안 쓰는 정도는 된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앤티크 가구가 적당히 있고, 약간 폼 나는 바우 하우스 스타일의 모던 가구도 좀 있을 수 있다.
독일 사람들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비율이 90%가 넘는다고 한다. 뻥이라고 하겠지만, 실제 저임금 노동자 비율을 보면 그렇게 현실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독일 노동자의 14% 내외가 저임금 노동자이기 때문에, 나머지 사람들은 중산층 혹은 그 이상이다. 벨기에는 이게 6%다. 확률적으로 벨기에에 태어나면 94%의 국민이 중산층 혹은 그 이상이다. 혹시라도 이민 가야 할 일이 있다면 반드시 벨기에로..
“적당히 벌면 왠만큼 행복한”, 이런 게 노르딕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린 죽도록 벌어도 “존나게 불행한”, 아주 죽겠다는 단내가 입에서 턱턱 튀어나오는 구조다. 여기부터는 시스템 오류다. 자꾸 ‘인간의 욕망’ 혹은 ‘이기심’ 그런 얘기 하는데,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다. 한국 사람만 특별히 더 부동산에 욕망이 있거나, 명품 아니면 죽겠다. 특출나게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사유 방식은 다 오류다 (이 얘기는 독일 사람들이 게을러서 못 산다고 하는 유럽식 편견에 대한 장하준 설명이 제일 멋지다.)
가구 평균소득 4천~5천 사이에 시스템 설계가 맞추어 져야 한다. 그러면 국민의 90% 가까이가 행복의 나라로 갈 수 있다.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그렇게 걸어갔다.
방법은 다양하다. 직접 임금과 사회적 임금으로 나누기도 한다. 평균적 가구의 월 지출비의 50% 정도가 사회적 임금인 곳이 유럽의 잘 사는 나라들이다. 다시 말하면 임대주택에 의한 간접적 월세 보조든, 교육비 보조든, 총 지출비의 절반 정도는 국가로부터 나온다. 그러면 월 400만 원을 벌어도 실제 소비는 800만 원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나라는? 직접 임금의 비율이 90% 가까이 된다. 나라가 해주는 거, “좃도 없다”,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쉽게 비유하면, 우리나라 소득의 절반 가까이가 황당한 사립 유치원 원장 ‘목구녕’으로 쑤셔 들어간 거다. 정상적이라면 안 써도 되었을 돈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돈이 전입신고 막고 있는 소소한 불법 집주인 입으로 처 들어간다.
내년부터는 아내가 대충 우리 집의 일상적 생활비인 400만 원 정도를 벌어오는 것 같다. 이게 우리 집 재무설계의 기본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기에 생활을 맞추려고 한다. 왜?
내가 경제학 박사라서 그런다. 다른 건 몰라도 지출만큼은 국민들의 평균치 안에서 생활하고 싶다. 그래야 뭐가 불편하고, 뭐가 잘 못 되었는지 좀 보일 것 아니냐?
유럽의 선진 공업국가 정도면 월 400만 원의 소득이면 충분히 행복하다. 그 다음에 더 쓰는 것은 진짜로 개인의 취향 문제다. 우리나라에서 월 400만원 소득이면? 평균치 약간 아래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집집 마다 “먹고 죽으려고 해도 돈이 없다”, 이런 일 벌어질 것이다.
이것보다 많이 버는 집 주부들의 상당수가 마트 캐쉬어로 일한다. 백퍼, 자녀 교육비 때문이다. 캐쉬어가 일이 좋다 나쁘다, 그런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먹을 거 사고 나가려고 하는데, 캐쉬어가 내 책을 꺼내면서 사인 해달라고 그랬던 경험이 몇 번 있다. 범상치 않은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그렇지만 자녀 교육비 때문에 멀쩡한 고학력의 중산층 여성이 결국 캐쉬어로 나서게 되는 것, 이건 좀 시스템 오류다.
얼마나 있으면 행복할까? 상한선은 없다. 그렇지만 월 400만 원 소득이면 ‘행복의 나라’로 갈 기본 조건이 되어야 한다.
그게 내가 촛불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보면서 내린 잠정적 결론이다. 저 사람 한 명 한 명, 가계소득으로 월 400만원 이상은 받게 하고, 그 수입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그게 촛불의 나라다, 그 시절 경제학자로서 내가 했던 생각은 이렇다.
내가 쓰기에는 통장에 너무 많아, 얼마가 있는지 신경도 안 쓰고 살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시민운동한다고 가진 돈을 한 번 다 털어 넣었고 통장에 마지막 5만 원이 남는 순간을 경험해 본 적이 있다. 문재인 당대표 시절에 방법이 없어서, 또 돈을 한 번 털어 넣은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5만원이 아니라, 바로 그 통장에 5원이 남아 있던.. 물론 그게 우리 집 돈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아내에게 할 말이 없게 된.
결국 아내가 돈 번다고 나섰고, 나는 그냥 애들이나 보게 된. 그리고 대충 2년 정도를 진짜 돈은 하나도 안 쓰고 그냥 버텼다. 물론 나만 돈을 안 썼다.
내가 너무 아무 것도 안 하고 집에만 처 박혀 있으니까, 올 가을에 아내가 차를 사줬다. 딱 2천만 원. 차 없앤지 대충 2년만.
그래도 내가 독한 게, 돈 없으면 하고 싶어지는 방송이나 강연 같은 것에 손 벌리지 않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았다. 물론 강연을 아예 안 한 건 아닌데, 정말 최소한으로.
그래도 그 기간이 그렇게 고생스럽거나 한이 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삶에 대해서 많이 배웠고, 인생에 대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매운 인생 달달하게 달달하게’, 이게 그 시절의 책이다. 나는 진짜로 많이 바뀌었고, 재밌는 생각도 많이 했다.
2.
오랫동안 법인 카드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하나 내놓으라고 하면 공식적으로 쓸 수도 있는 상황이기는 한데.. 그딴 건 필요 없다, 내 인생에서 떼어버렸다.
접대 같은 건 안 한다. 그렇지만 누군가에게 신세졌거나, 위로라고 해야 하는 경우, 술은 산다. 그리고 어지간하면 내 돈으로 산다. 그리고 아내에게 빙신 짓 하고 다닌다고, 쫑코 먹는다.
그래도 좀 멋적은 소망 같은 것은 있다. 언젠가 이 직불 카드에 1억원은 넣어 놓고 살리라. 물론 현실은 백 만원 정도 들어가 있다. 그나마도 술 처먹고 나면, 아내가 돈을 다 빼 버린다. 얌전하게 살아야 그 정도 잔고라도 유지시켜 주는.
그게 무슨 궁상이냐 싶지만. 나는 두 차례에 걸쳐서 사회를 위해 일 한다고 집에 있는 돈을 다 쓴 적이 있다.
아내는 그런 내가 별로 현명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차라리 차를 사거나, 스피커를 사거나, 카메라를 사는 데 돈을 쓰는 게 허망하게 쓰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구경도 해보지 못한 돈이 모두 사라지는 것을 몇 번을 경험한 아내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럴 것 같다.
양향자와는 꽤 친하게 지낼만한 사이였는데, 내 코가 석자라서. 미루고 미루다, 어제 여의도에서 술 한 잔 했다. 다음에 만나면 누님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좋아한다. 나는 누나들하고 특히 잘 지냈다. 목에 힘 빳빳하게 줘봐야,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다.
50대 에세이는 팔린 건 그닥, 그렇지만 내 삶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바뀐 생각이 글에 반영되는 것도 좀 있지만, 글을 쓰면서 다시 생각을 정리하고..
나중에 70쯤 먹어서 나에게 가장 많이 영향을 준 책 물어보면, 나는 이 책 집어들 것 같다. 요즘 만나는 사람들, 가급적이면 편안하게 해줄려고 노력한다. 예전의 나는 그렇지는 않았다.
50이 넘으면 좀 찌그러지는 맛이 있어야..
요즘 진짜로 그렇게 산다. 좀 찌그러져서, 적당히.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갖고, 나 혼자 있는 시간도 가급적 많이.
만약 내가 갑자기 암으로 죽지 않는다면, 찌그러지는 것의 미덕 하나가 늘어날지도 모르겠다. 찌그러지는 것이 목표가 되면, 스트레스가 엄청나게 줄어든다. 사실 무지막지한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어진다. 그런 것들의 많은 이유는 자기가 자기에게 주는 짜증과 비난 같은 것 아니겠나.
안희정과 이재명 지지자들이 뻥하고 붙을 때, 나는 무서워서 도망다녔다. 사람들 감정이 날카롭게 서 있었다. 요즘도 그렇다. 나는 그냥 무서워서, 대충 찌그러져 있을려고. 이재명을 공격하는 사람이나 방어하는 사람들 모두, 너무 많은 감정과 정성으로 한다. 이해는 가는데,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너는 의견이 뭐야?
네, 그냥 저는 찌그러져 있는.. 계속 찌그러져 있을께요.
기자들이 만날 때마다 김수현에 대한 의견을 물어본다. 의견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 뒤가 무섭다. 네, 찌그러져 사는 사람이 무슨 생각이 있겠어요, 잘 몰라요.
2004년부터 사회적 논의에 의견을 표명하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다. 시시콜콜, 이건 이렇게 생각하고, 저건 저렇게 생각해.
이제 처음으로, 나도 찌그러져서, 저 아무 생각 없어요.
많은 의견들은 논리처럼 생겼지만, 사실 감정이다. 그리고 그 감정의 뿌리는 생각보다 단순한 먼지 한 알인 경우도 많다. 그 위에 우리는 논리의 나무라고 생각하면서 사실은 감정의 숲을 일군다. 그리고 가끔은 그 숲을 보면서 스스로 대견해한다.
여기에 의견을 내는 것은 무의미한 경우가 많다. 시간이 많은 것을 스스로 드러나게 하리..
계통망인 그리드, 농업 전문가 특히 일본 농업 전문가, 플러그인 설계자, 내가 겨울 안에 만나려고 생각하는 사람들 리스트다. 일부는 내가 필요해서, 일부는 동료가 필요해서.
내가 관심 갖고 있는 분야나 주제는, 사실상 아무도 눈 돌리지 않고, 또 의도적으로 '불편하다'고 관심을 돌리고 있는 분야들이다.
찌그러져서 내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 한다. 뭐, 약간은 나도 돈도 좀 벌고.
그러면 나한테 뭐가 좋아?
찌그러진 삶에서도 찌그러진 꽃은 피는 법,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허허무지 벌판에 꽃씨를 피우는 마음을 사람들은 알랑가 몰라. 그런데 작은 꽃, 진짜 찌그러진 꽃이라도 피어나면 가슴이 뿌듯해지는 그 행복감을 사람들은 알랑가 몰라.
이런 마음을 50대 에세이 작업하면서 만들어낸 것 같다. 뭐, 원래도 화려한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책 작업과 함께 그렇게 화려한 것을 피해야 하는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인 마음 가짐을 가지게 되었다. 찌그러지는 것은 아름답지 않더라도, 불편하거나 더러운 것은 아니다.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값비싼 모피를 입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뒤에서 받고 있는 것보다는 낫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의 의미를 잘 몰랐다. 못 빳빳하게 세워야, 그런 생각을 했었다.
찌그러지고, 굽어져보니까, 선산을 지키는 것의 의미는 알겠다. 그냥 세 끼 밥 처먹고 있는다는 얘기와 다를 바 없다. 그래도 세 끼 입에 밥이 꼬박꼬박 들어가는 게 어디냐.
앞에 나가서 전사들처럼 헤집고 싸우는 사람들도 필요하고, 그냥 쭈그러져서 황무지에서 조그만 꽃이라도 피우는 찌그러진 사람도 필요하다.
'손 많이 가는 남자'라는 표현이 있었다.
나이 50, 이제 나는 씨 뿌리고, 꽃을 쓰다듬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에 가까워진다. 내 손이 필요한 일들이 세상에 좀 생겨났다. 그렇게 찌그러져서 밥값이라도 하고 사는 게 행복한 삶이다.
부다페스트였다. 도나우강에 일본 정부 후원을 받아서 UN에서 배를 띄웠다. 막 사회주의에서 전환된 부다페스트는 딱 한국 70년대 모습 같았다. 공항에서는 서독 마르크를 받았고. 해질 무렵부터 진짜 호화판으로 먹고 마시고. 그 때 도나우강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내 인생이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 시절 외교부에서 파견 근무를 나왔으면 좋겠다는 얘기가 있었고, 청와대 외곽 조직 한 군데에서도 파견 희망을 했었다. 뭐.. 눈 딱 감았으면 UN 기구에 좀 높은 자리로 가는 순번이었다.
IEA, International Energy Agency, 국제에너지기구, 파리에 본부가 있다. 우리는 그걸 International Excursion Agency, 국제소풍기구라고 불렀다. 절경마다 찾아다녔고, 툭하면 칵테일 파티였다. 그 시절 나는 개혁파 young chair, 진짜 젊은 의장이었다. 몇 년 지나면 개혁파 지지로 서브스타 의장 정도는 할 거라고 사람들이 생각했나 보다. 하여간 혼자 차 한 잔 마시기가 어려웠다. 화려함으로 치면 극강의 화려함을 추구할 수 있는 자리였는데..
부다페스트에서 이렇게 사는 건 좀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2.
‘88만원 세대’의 출발 버전이 여러 개가 있다. 세 번째 버전인가가 LG 투수 이상훈 얘기로 시작하는 버전이 하나 있었다. 그걸 갈아 엎으면서 ‘어깨에 힘 빼고 던지기’라고 메모를 적었다. 그 앞의 얘기들에 너무 힘이 들어가 있었다. ‘첫 섹스의 경제학’이라고 이름 붙인 장은 그 한참 뒤의 버전이었다. 결국 그걸로 출발점을 삼았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사는 게 좀 힘들기는 했다. ‘악으로 깡으로’, 사실은 이런 말을 더 좋아했던 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악도 없고, 깡도 없다. 남은 건 늘어난 배 밖에 없다. 배가 나오고 살이 붙이 시작하면서, 존심도 사라졌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악과 깡으로, 그런 말이 정말 몹쓸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 천민 자본주의가 해줄 거 제대로 안 해주면서 그냥 쥐어짜기만 하려다 보니까 이런 이상한 말들을 만들어낸 거 아닌가 싶다.
악과 깡을 권하는 시대, 정말 거지 같은 시대를 우리가 살았다. 요즘은 좀 낫나? 올해 프로야구의 키워드는 ‘절실함’이었다. 절실함이 있는 선수와 절실함이 없는 선수, 악과 깡의 21세기 버전일 뿐이다. 지랄맞다.
3.
나라고 가슴 아픈 순간이 없겠나? 더럽게 안 팔리는 책들, 가슴 한 켠에 묻을 때는 솔직히 눈물 찔끔 나려고 한다. 그래도 순간이다. 요즘은 훨씬 쉽게 그런 걸 잊는다. 남 탓도 이젠 잘 안 한다. 그냥, 재수 없는 것에 불과하다. 잘 되든, 못 되든, 과도한 의미부여 같은 것도 잘 안 하려고 한다. 그냥, 재수가 없는 것이다. “내 탓이요”, 요 딴 것도 싫다. 남들은 뭔데? 거적데기여?
요 몇 년 사이, 남들한테 화 내는 일도 거의 없다. 유일하게 화 내는 건 우리 애들. 좀 정리 좀 하시고 사세요들.
그냥 기능적으로, 한다, 안 한다, 이렇게는 안 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무감각하고 무심하게 조건만 얘기할 뿐이다.
그래도 가끔 어깨에 더 힘을 빼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기도 하다. 진짜 이상하게 끼어드는 벤츠 보고, 저 놈의 벤츠 새끼가.. 그리고 금방 후회한다. 왜 욕을 해, 어차피 듣지도 못할 건데, 비겁하게 숨어서.
4.
뭔가 정부기관 기관장들 모아놓고 석학 발표 같은 것을 해달라고 한다. 뭔지도 모르고 추천한 사람 얼굴 보고 그냥 한다고 그랬더니, 발제문이 필요하단다. 젠장. 그냥 생각 자유롭게 얘기하면 된다고 하더니, 뭔 발표문이야.
가만히 돌아서서 생각해보니까, 근데 내가 석학인가? 나는 그냥 애 둘 키우는 아빠일 뿐. 뭔가 새로운 생각을 해야 한다는, 바로 그 생각을 안 한지 벌써 몇 년 된다.
나이만 처먹으면 그냥 대우가 높아지는 것은, 전형적인 개발도상국의 장유유서 분위기. 쩝.
되고 싶은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상태에 도달한지 몇 년 된다. 2년 조금 넘는 것 같다. 광주의 모 공기업 사장 자리 안 간다고 한 뒤로, 되고 싶은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상태에 드디어 도달한 것 같다.
남들은 불쌍하게 보는데, 나는 이 편안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몇 년간 내 속을 몇 번씩 다 뒤집어가며 남은 허세들 탈탈 털었다.
그래도 아직은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젠장, 나오기 시작한 배에 신경 쓰여서 배에 힘을 주다 보니, 온 몸에 다시 힘이 들어가는. 이거 아닌데.
5.
어떤 데에서 올해의 책 선정 해달라는 부탁이 왔다. 지방 여행 중이라, 바로 답변을 못했다.
잠시 생각을 했다. 올해의 책 선정을 전혀 안 한 건 아닌데, 나는 무슨 심사위원 이런 거 안 한다. 내일은 그 얘기를 하고, “저는 빼주세요”, 통화를 해야겠다.
그런데 이런 마음에는 약간의 심통도 있다. 지 책도 제대로 못 파는데, 무슨 심사는 심사. 한 물간 노털 느낌 드는 것도 좀 편치는 않다. 써야 할 글도 잔뜩 밀렸구만, 책 선정이나 하는 건, 약간 가슴이 서늘한 느낌도.
좀 더 넓게 마음을 먹고, 이것도 예, 저것도 예, 그냥 그렇게 대충 살아야 하는데, 지켜야하는 원칙이 아직은 너무 많다. 이것도 안 해, 저것도 안 해, 이건, 그냥 기분 나빠서 안 해..
애 보는 아빠가 이 정도는 좀 가려도 되지 않나, 나에게만 넓고 관대한.
teleology라는, 목적론이라는 개념이 있다. 뭐, 별로 안 좋아한다. 그래서 생태학 공부를 시작하게 되기도 하였다. 인생에 도달할 목표, 그딴 거 없다. 하면 뭐하게? 하면 더 행복해질까?
개인이 집을 사는 게 목표가 아니라, 국민들이 집 같은 거 고민하지 않게 해주는 게 북구 스타일이다. 아직은 전환기다. 국가의 목표가 하나하나씩 개인에게 전이되어, 개인들이 결국 악과 깡으로 살게 만드는 개떡 같은 나라 흔적을 아직도 못 버렸다.
목표는 국가가 고민해야 하는 거지, 개인은 목표 같은 거 필요 없다. 그게 선진국이다.
꿈이라는 것은 로보트 태권브이를 만들고 싶다, 달나라에 가보고 싶다, 그런 것을 꿈이라고 부른다. ‘해저 2만리’ 같은 것이 꿈이다 (그리고 쥘베른은 해저2만리에서 제국주의가 진짜 꼬진 것이라고 끊임없이 외친다..)
그래도 어쩌겠냐, 국민들 소득수준은 선진국인데, 개도국 수준도 채 못 마치는 청와대 행정을 보면서 살아야 하니, 자꾸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그래서 어깨에 힘을 빼고 또 빼야 한다. 그러면 정말 좋은 볼을 던질 수 있게 된다. 언젠가는.
어제 야구는 재밌게 봤다. 시즌을 마감하는 경기. 영화 머니볼에서 빌리빈은 마지막 경기에서 지면 꽝이라고 했다. 그 마지막 경기다.
영화 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선의 8번 타자다." 원래 8번은 투수들이 들어가는 자리다. 지명타자가 있으면 그 팀에서 제일 못하는, 수비 전문 같은 사람들이 들어간다. 하여간 타격으로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그래도 게임에는 나오는.
남은 인생, 8번 타자로 살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뭔가 해줄 거라고 기대하지 않고, 또 그럴 실력도 안 되고. 그래도 8번에서 뭔가 나오면 게임 풀어가기가 훨씬 쉬워진다. 누가 나한테 인생을 대하는 태도 같은 거 물어보면, "나는 조선의 8번 타자다"라고 자신있게 말하고 싶다.
몇 년 동안 핸펀 주소록을 거의 관리하지 않고, 그냥 더하기만 하고 살았다. 1700명.. 차 블루트스 핸펀 db에 1000명만 들어간다. 어지간하면 그 선에서 문제 없었을 것. 얼마나 내가 너저분하게 살았는지, 느낌이 팍 왔다.
별 다른 방법도 없어서 그냥 시간 날 때마다 손으로 하나씩 지우기로 했다. 김씨 동네 막 끝났다. 우와, 이렇게 많은 김씨들이 있었다니.
앞으로 차 한 잔 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기준이다. 용민이 남고, 김어준? 그래도 술 한 잔 할 가능성이 높은. 남고. 그 사이에 장관된 사람이 몇 명 있는데, 아무래도 이 번호로 연락해서 차 한 잔 마실 일은 없을 것 같다. 방송할 때 알았던 사람도 많은데, 필요하면 지들이 알아서 연락하겠지. 문재인 태그로 18명이 있는데, 이것도 일괄 삭제. 김두관 번호는? 차 마실 일 진짜 없을 것 같다. 꼭 술 한 번 마시자고 돌아섰는데, 그리고 술 마실 일이 없었던.
한살림이나 ymca 간사들 번호 지울 때 좀 생각을 했다. 어렵던 시절, 같이 등을 대고 건너던 사이이기는 한데.. 필요하면 자기들이 알아서 연락하겠지.
여의도에서 무슨 일을 할 일은 없을 것 같고, 정부에 다시 들어갈 일도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방송을 다시 할 것 같지도 않고. 그냥 지난 시간의 일이다. 사실 2년 전에 일괄 정리를 한 번 했었어야 했는데, 그럴만한 틈이 없었던 것 같다. 마침 직장 민주주의, 최종 수정까지 탈탈 털고 나니 잠시 마음의 여유가.
특별히 유별난 일 하지 않는 이상, 나는 100명 정도의 전화번호면 충분할 것 같다. 어쩌다가 1,700명까지 늘어났을까? 너저분하게 살아서 그렇다. 잠시 반성.
늘 보고 일하는 동료는 다섯 명도 많다. 정신없어서 그렇게 많은 숫자가 같이 돌아다니기 어렵다. 1년에 한 번 차 마실 정도의 사람은 100명이 안 된다.
총리실에 있던 시절, 수첩 전화번호칸이면 깔끔하게 다 들어갔다. 그 수첩이 내 삶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준 수첩이 되었다.
어느 날 전화번호 옮겨적다 보니까, 된장.. 절반이 박사고, 나머지는 고위 공무원들이네. 뭔 인생을 이렇게 대충 산 거야? 그 고민이 커지고 커져서, 결국 사직서를 냈다. 그리고 내 삶이 생겨났다.
100개의 전화번호면 충분하게, 그렇게 단촐하게 살아야 한다, 나이를 처먹었으면. 치부책 만지듯이 핸펀번호 들여다보면서 넉넉함을 느끼면.. 지옥갈 것 같다. 100개로 넘치는 삶을 단촐하게 살 수 있으면, 천당갈 가능성이 높아질 것 같다.